세상너머

혼란스러움

청 설모 2014. 5. 11. 00:43

혼란스러움 

1.유태인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모세의 지도로 탈출
2.팔레스타인에서 다윗의 지도로 이민족을 복속시키고 유대의 번영과 영광을 구가함.
3.유대의 분열과 멸망-로마의 압제속에서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 대망.

그러한 시대속에서 예수가 탄생하고 처형당함. 그의 사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메시아로 불리며 전세계로 그의 가르침이 전파됨.

 

모세, 다윗등과는 달리 이민족의 압제로부터 유대를 독립시키지도 물질적으로 번영시키지도

못한 예수를 왜 메시아로 부르는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은 과거의 지도자와는 달랐다.

그가 주장한 것은 현실적, 물적, 육적세계가 아닌 영적세계(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였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그렇다면 현실적, 물적, 육적세계는 하나님의 지배가 미치지 아니하는 치외법권지역인가?

--(기독교인들은 악신-사탄이 지배한다고 하고 영지주의자들은 이 물질세계 자체를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고 영혼이 물질에 갇혀있다고 함)


또 한가지 문제는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서로 긴장관계에 있다는 점.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은 서로 다르다.
육의 소욕-DNA에 내재한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력, 원초적 본능.
영의 소욕-육의 소욕을 초월한 거룩하고 신성한 것.

 

영지주의는 신비한 지식에 의해 이러한 물질세계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성령의 가르침.

 

영은 육신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육신의 소욕과는 원하는 바가 다르다(반대방향).

그런데 육의 존재가 살아남는 것도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자연과 질병, 식량, 경쟁의 격화등...

(영혼을 팔아서라고 취직을 하고 싶다는 말, FTA등)

 

살기 위한 맹목적 의지는 이성도 영도 아닌 DNA에 입력된 본능(신이 태초에 부여한)에 따라

최선의 노력을 다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와는 반대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영은

육적 생존에 많은 걸리적 거림을 주는 것이라 할수 있다-생명체의 세계, 동물의 세계, 자연의 세계,

기업의 세계, 국가간의 세계에는 힘의 원리가 작용한다.

 

육적, 물질적 기반없이 영만 홀로 존재할 수 없다(생전에는). 그래서 이러한 육적 물질적 기반을

유지 존속하는 데도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전부 퍼부어야만 겨우 살아 남을수 있는데

영의 성장은 육적, 물질적 틀을 깨고 나가려 한다. DNA는 생존을 위해 더 강한 잇빨과 튼튼한 다리를

요구하고 있으나 영의 소욕은 그러한 것을 버리라고 한다. 자연의 세계와 기업의 세계는 기독교의

영적 가르침과는 다르다. 팔아야 살아남고 팔기 위해서는 더욱더 감각을 자극적으로  부추겨야 한다

(그런데 땅의 것이 아닌 위엣것을 생각하라고 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한편으로 이러한 물질적

번성이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고 너무도 정교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아니한다고

생각하기도 어렵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무엇인가?
(1)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으나 영혼은 하늘나라로 간다고 한다.

하늘나라는 신이 통치하는 저승세계를 의미한다. 천당.
(죽어서 천당에 가면 하나님을 뵐수 있는데 그러면 예수의 노력이 무의미해지지 않는가?)

 

(2)사람이 살고 있는 현재 이승에서 하나님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 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아마 태초의 창조와는 다른, 자연법칙을 수정하거나 벗어나는 것일 것이다. 똑같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이것은 창조의 수정인가?  복구?
아니면 새로운 창조(창조의 완성)인가? 태초의 창조가 불완전한 육적, 물적 창조에 그친반면

이것은 영적세계를 포함한 창조의 완성인가? 그렇다면 육적 소욕과 영적 소욕은 반대방향이므로

육적 소욕을 벗어나도록 육적 물질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예수는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외면했으며,

그의 제자들도 그의 동족들이 로마에 항거하여 싸워 패망하는 것을 보고도 가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종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교는 그들이 물질적 충족, 육적 필요를 기도하면 다 들어 주고 물질적 풍요가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국가가 잘 사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연적, 동물적 약육강식의 법칙과 흡사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발버둥쳐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가?(가진자에게는 축복이 맞지만...)

(현대가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기독교때문인가 기계문명때문인가?)

 

물질적 육적 기반없이는 영이 존재할 수 없다. 모두 육적 물질적 기반을 갖기 위해서 끝없이

서로 다툰다(경쟁의 격화).

그러한 것을 영은 싫어한다. 살아있는 동안 끝없는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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