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천국, 자아
슈바이처는, 예수는 ‘도덕적-사회적 차원의 하나님 나라’가 아닌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차원의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즉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도덕적 선과 정의가 확립된 사회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역사의 종말이 도래하고 악의 세력이 패퇴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자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여기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의 처형을
스스로 자원했다는 것이 슈바이처의 주장이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산상수훈을 종말이 오기 전에 잠깐 실천할 수 있는 중간윤리라고 봄)
그러나 슈바이처가 주장한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으로 인한 종말이 임박했음을 주장한 예언자였다고는 보기 어려우며,
공관복음서 내용 중 ‘임박한 인자(人子)의 도래’를 말하는 구절들, 즉 묵시문학적 종말을 말하는
구절들은 예수의 실제 메시지라기보다는 이 복음서들이 기록된 서기 1세기 후반 교회공동체의
신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통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접하고 구원을 얻는 데에 있어서 가장 먼저
장애물이 되는 것이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통치는, 이처럼 자아를 내세울 수 있는 방편과 자아를 보호해 줄
수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결국 자아에 대한 헛된 집착 자체를 버리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자아에서의 해방’이 진정한 종교인으로 거듭나는 데에 있어서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존재 가치>에서 발췌함.
.만물은 자신의 역량에 따라 존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런 본능적 의지 또는 욕망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한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나 신의 복사판이 아니라 코나투스를 가진 존재이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고 해로운 것을 피한다.
.감정도 코나투스와 관계가 있다. 기쁨이란 자기보존 욕망이 실현돼 자기가 더 커질 때
느끼는 감정이고, 거꾸로 슬픔은 자기보존 욕망이 방해받아 자기가 더 작아질 때 느끼는 감정이다.
<기독넷 >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발췌함
칸트가 본체계인 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으나 쇼펜하우어는 생에 대한 맹목적 의지!
그것이 바로 물 자체라는 것이다.'
니체는 존재하는 것들이 ‘의지’라는 것이며 그 의지는 힘을 원한다.
힘을 원하는 의지가 힘을 얻으면 그 의지는 커진다. 더 커진 의지는 더 많은 힘을 원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반복이 이루어지면서 의지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끊임없이 돌아온다.
여기서 힘을 원하는 의지의 본성을 가리켜 ‘힘에의 의지’ 혹은 ‘권력에의 의지’라고 부르고
새로운 출발점으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을 ‘영원회귀’라고 부른다.
<간단한 서양 철학사 >에서 발췌함.
모든 존재는 모두 존재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천당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고
그것은 개인의 자아와 의지를 버림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
범아일여?
그렇다면,
저 바글거리는 생명체들이 자신의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저렇게 노력하는 것이 무의미한것인가?
진흙속에 미물들도 생존을 위해 투쟁을 하고, 사랑을 하고 번식을 한다.
신이 이 세상을 그렇게 창조한 것이 아닌가?(약육강식, 적자생존)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가 왔고 그것은 이 세상의 종말을 통해서만이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종말이 실제로 이 세상에 일어날 것 같지가 않다는 것.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