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ciDu0vwFvzU
choistube 님의 동영상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月朔(월삭)간지
광개토왕 비문에 신라성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광개토왕이 5만의 지원병력을 보내 남거성에서 출발하여 임나, 가라, 종발성(축종의 성입니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궤멸시켰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비문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기 웅략 8년조 (464년) 기사가 광개토왕비 40 년의
내용과 상통합니다.
또 한군데가 더 있습니다. 개화천황인데 연대와 계보가 뒤죽박죽 엉망입니다.
숭신, 수인, 경행, 성무, 중애, 신공은 모두 거의 대부분이 500 년대의 실존인물이고,
응신천황은 400년대 초의 천황입니다.
중애천황과 신공황후의 아들이 응신천황으로 되어 있으나 응신천황은 신공황후의 아들이 아니고 그보다 150년전인
400년대 초반에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개화천황은 기원전 인물로 되어 있으나 응신천황과 동시대인 400년대 초에 실존했던 천황으로 응신천황과는 다른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결사8대(缺史8代)라고 하여 순정천황부터 개화천황까지의 8대를 가공인물이라고 하나 개화천황은 400년대 초에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개화, 중애, 신공황후에 대한 기록이 일본서기 말고 1100년대 후반 천태종 승려 현진(顯眞)이 쓴 책 「산가요략기」 (山家要略記)에 나와있습니다. 권2 「3한정벌기」(三韓征伐記)와「부상고어영이집」(扶桑古語靈異集)「對馬記」에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2015년 야기토모코(矢木智子)가 쓴 「對馬記成立私論」
-- 「3한정벌기」「부상고어영이집」을 중심으로-- 란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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巻二「三韓征伐記」
正八幡大菩薩垂迹事
三韓征伐記曰 武内宿祢記
正八幡大菩薩。日本武尊第貳子穴戸豊浦宮仲哀天皇在。
曾対馬嶋高麗牧矣。新羅住土。
開化天皇代於此嶋襲来新羅於大日本國為殴朝。
則天照太神顕二兵降伏新羅。而太多良妣出現沙竭羅龍王宮。防拒土弼朝。爾後息長宿祢女化。
仲哀天皇后約。而後此王治二年癸酉。自大和國被遷都於穴戸。偏是新羅来朝怖。防土御世事。
天皇祈念言。天龍八部庶我守。勠力降伏魔軍相邦祈念。貴人於天下言。
吾斯白鳥太神号。今祈念感応。古我護倭有一住。幸恰休官軍。
告者已幸。而手自石磊霊壇。崛請天照太神発願日。我今夜中作為此所乎城郭矣。
長防護新羅高麗怨賊尊崇朝廷神道祈誓石疊。天童来擎燈。
力士至自比良灘極三方山立矢。採海底石築固城郭息官軍厥内。
頌曰
治倭也富留 神能誓濃 石帖
毀禹世極 大倭嶋有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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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幡大菩薩 : 八幡은 하치반, 야하타 - 야하타/ 야마타/ -- (야마토)입니다.
大和는 야마토가 아니고 오와입니다. [大和, 大倭, 吳越, 尾張(おわり), 大泊瀨(おばり)는 전부 오와를 가리킴]
八幡 -- 야마타/야마토
忍代 -- 참대/차마타이/사마타이/야마타이
(야마토는 일본을 가리킴)
벌/발 -- 하라/原(はら)는 넓은 벌판을 가리킴.
어느것에 해당되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야마토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한일 양국 학자들이
잘못된 국명을 오해해서 읽어왔습니다.
倭를 한국에서는 왜라고 읽고 일본에서는 와라고 읽습니다. 그런데 15세기 최세진의 「훈몽자회」가 나올때까지만해도
한국에서도 倭를 왜가 아니라 와라고 읽었습니다. '오왜'가 아니라 '오와'입니다.
오왈, 오와타, 오와르, 오와리, 오와뢰, 오하라, 오바라...
본문해석>
正八幡大菩薩 - 야마타대보살 - 일본대보살 - 일본수호신-- 일본을 지키는 수호신을 불교식으로 부처에 붙혀서 윤색해서 설명하여 일본대보살이 된 것이 중애천황입니다. 일본무존의 두째아들인 그는 아나토 (穴戸) 의 도유라(豊浦)宮의 중애천황을 가리킵니다. 중애천황이 아나토(穴戸)의 도유라(豊浦)宮에 있었는데 그가 일본의 대보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曾 일찌기
対馬嶋 牧은 행정치소를 말합니다. 도, 군을 의미.
일찌기 対馬嶋는 高(구)麗의 목장이었다. 원래 고구려가 아니고 고려.
korm : 고려(고구려)를 일본에서는 고마(구마)라고 함. 또는 狛(박) -- 모두 구마로 고구려를 가리킨다,
고려, 구려 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를 말하고 왕건의 고려가 아닙니다.
본문해석>
일찌기 대마도는 고구려의 목장인데 신라가 거주하는 땅이다.
개화천황대에 이 섬에 (대마도 섬을 말함) 신라가 습격해 와서 대일본국의 조정을 때렸다.
그래서 天照太神이 두 병사를 출현시켜 신라를 항복시켰다.太多良妣(다다라히메=신공황후를 가리킴)가
沙竭羅龍王宮(사갈라 용왕궁)에서 출현하여 땅을 지키고 조정을 도왔다. 이후 沙竭羅 용왕궁에서 나온
다다라히메가 息長宿祢의 딸로 태어나서 仲哀天皇의 황후로 맺어졌다.
그리하여 그후 천황 2년(癸酉)에 大和國(오와국)에서 穴戸(야마토)로 천도했다.
신라가 조정을 치러 오는 것에 두려워 대비하기 위해서.. 그래서 땅도 지키고 조정도 지켰다.
이후 중애천황이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대마도에서 싸우다가 유시에 맞아 죽고,
신공황후가 응신천황을 임신한채로 삼한을 정벌했다.
①개화천황때 신라의 공격으로 정벌을 당함
②중애천황이 신라정벌에 나섰으나 전사함(야마타 수호신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김)
③신공황후가 임신한 몸으로 삼한을 정벌함
※天照太神은 아마테라스라고하는데 제가 볼때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天照가 신라 21대 소지왕과 이름이 동일합니다.
그래서 신라 21대 소지왕 400년대 후반의 동일한 인물을 이렇게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天照(천조) : sor-bitz를 훈차 -- 햇볕
炤知(소지) : sor-bitz를 음차 "
두사람의 이름이 똑같으므로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炤知왕-- 신라 21대 왕 재위 479 ~ 500년
※대마도는 원래 고구려의 牧(목)이었는데 (중애천황 당시에는) 신라가 거주하고 있었다.
개화천황대에 신라의 침입을 받아 조정을 때리기에 이르렀다.
신라가 대마도와 큐우슈우지역을 공격한 시기는 언제일까?
가능성이 있는 연도로 다음과 같은 연도를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400년 - 광개토왕비문에 10년 경자년(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404년 - 웅략8년 筑足流城(축족류성) 전투
(527~528)-계체 21~22년 큐우슈우지역 친신라계인 축자국 이파이(礬井)가 반란을 일어켜서 진압함
529년 - 이에 대해 신라가 보복공격. 이사부의 1차 큐슈정벌. 4개의 마을을 초략함.
(532년) - 견디지 못한 구형왕(일본무존)이 신라에 항복함.
구형왕이 항복하자 중애천황이 그 뒤를 이은 것으로 보입니다.
중애천황의 재위기간(532 ~ 541년) 9년간 재위한 것으로 추정됨. 이 중애천황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싸웠지만 541년 사망한 것으로 보임. 중애천황 전사후 신공황후가 삼한(큐우슈우지역)을 탈환한 듯.
562년 - 그러자 다시 이사부와 사다함을 파견하여 큐우슈우지역을 다시 정벌하게 됩니다.
562년(임오년) 진흥 23년, 흠명 23년, 이사부의 2차정벌. 화랑 사다함 출정
562년 이후는 큐우슈우 지역 임나는 완전 신라에 복속했으므로 더이상 임나라고 일컫지 않게 됩니다.
일본서기의 기록도 그렇다(* 그러나 임나의 기록이 다음 추고천황대에도 나오고 있슴)
600년 - 추고천황 8년(600) 봄 2월 신라가 임나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자, 천황이 임나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이 해 경부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수적신을 부장군으로 삼아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나를 위하여
신라를 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곧바로 신라를 향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신라에 이르러 5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가 6성을 바치며 항복.
그후 신라가 곧바로 탈환해 갔습니다. 일본서기에 기록이 있음,
(624년) - 큐우슈우 지역을 지키던 눌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라역사에는 안나오고 삼국사기 열전에만 나오는데
큐우슈우 지역 7개성을 지키다가 백제 대군의 공격에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후 20년동안 백제가
차지하고 있다가
644년 - 김유신이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7개의 성을 탈환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7개성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큐우슈우 지역에 있었던 것입니다.
위 본문에서는 신라. 고구려가 언급되어 있으므로 신라가 대마도와 큐우슈우지역을 공격한 시기는
400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광개토왕비문에 10년 경자년(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잇키섬 즉 남거성(男居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수병(戍兵)-- 아나토
신라성 ■성 --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404년 일본서기 웅략8년 (갑진년) 筑足流城(축족류성) 전투- 웅략기 464년에 실려있지만 실제로는 404년의 일입니다.
60년의 차이가 나는데 잘못 기록된 것입니다. 웅략 8년에 신라를 지켜주러온 고구려군이 머무르는 筑足流城(축족류성은 종발성을 말합니다) 즉 축자성이라고 있습니다. 고구려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광개토왕비에 「14년(404년」갑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 연선(連船).... 평양을 거쳐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웅략 8년조 내용과 광개토왕비 내용이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위 본문에서 말하는 신라가 대마도와 큐우슈우를 공격한 시기는 400~404년 무렵의 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애천황 --- 「산가요략기」에는 중애천황이 대마도를 공격하다 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는
대마도라고 되어있지않고 웅습(熊襲)을 공격하다 사망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웅습(熊襲)은 무엇인가?
웅(熊)은 앞에서 말했듯 고마, 곰을 말하는데 고구려를 가리킵니다.
습(襲)은 습을 연진발음하면 스비/스바/스브/로 될 것입니다.
삽을 연진발음하면 사바/사비/사브/ 이런 식으로 될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沙比新羅(사비신라)란 말이 나오는데 사비신라는 사비슬기로 계림신라와 대조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계림신라는 한반도 경주지역 신라를 말하고, 사비신라는 큐우슈우와 서일본지역의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사마(沙麽), 佐波(자바)-- 현재 서일본 야마구치 지역에 있었던 지명입니다.
서일본지역에는 周防國(주방국)이란 나라가 있었습니다. (佐波=防府). 周防을 일본에서는 스와라고 하는데
스바, 스와는 다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데 같은 이름입니다. 沙麽, 佐波는 이름 자체가 같습니다. 자바, 스마, 스와.
蝦夷(하이)-- 蝦는 새우하자 입니다. 새우의 한국 고어가 사비입니다(경상도 방언 쎄비)
사비를 하이라고 쓴 것입니다. 연나라를 세운 선비족을 서비 또는 사비라고도 했습니다.
鮮卑(선비), 犀砒(서비), 師比(사비)....
즉, 서비, 사비가 연나라를 세웠고, 또 한반도로 흘러들어와 신라를 세웠고, 바다를 건너 큐우슈우 서일본지역에
사비신라나 하이라고 하는 사비, 이쪽에서도 나라를 세웠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들이 같은 민족인지 같은 나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어적인 유전자가 같습니다. 큐우슈우 남쪽에 오오스미(大隅) 대우국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이 隅가 스미입니다. 스미/스비: 음의 부전현상으로 같은 말입니다.
이 웅습(熊襲)이 있었던 곳이 구마모토(熊本)현 일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웅습국(熊襲國) 또는 습국(襲國)이 바로 周防國(주방국)과 똑같은 이름입니다. 저는 沙比新羅(사비신라)는 습국(襲國), 웅습(熊襲)과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웅습(熊襲)은 고구려와 사비신라를 합쳐서 부른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중애천황이 공격한 웅습은 고구려와 사비신라를 합쳐서 부른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중애천황이 공격한 웅습은 고구려. 신라가 아니고 고구려 + 사비신라입니다.
曾対馬嶋高麗牧矣. 新羅住土 라고 쓴 이유를 짐작할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현진스님이 쓴 삼가요략기, 삼한정벌기를 바탕으로 해서 개화천황이 400년대 초반의 인물이라고 생각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제 또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또 다른 관점이 무엇이냐? 月朔(월삭)간지 대조법입니다.
간지는 주로 십간십이지지, 천간지지를 줄여서 간지라고 하는데 줄여서 보통은 연도를 나타낼때 많이 씁니다.
갑자년, 을축년, 병인년, 기묘년 이런 식으로..... 이 간지를 날짜에도 씁니다. 일간지. 날짜도 간지로 나타냅니다.
날짜밑에 을사, 병오, 무신등으로 쓰여있습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연간지보다 월삭간지, 일간지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예를들면, 겨울 11월 신미삭 임오에 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했다. 이런 식으로....
朔(삭)은 초하루 삭자입니다. 4월 갑자삭이라고 하면 4월 1일이 갑자라는 것입니다.
음력으로 11월 1일이 戊辰(무진)이라면 11월 戊辰朔 辛未는 11월 4일, 11월 戊辰朔 庚午는 11월 3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11월 1일 戊辰,
2일 乙巳,
3일 庚午
4일 辛未 이런 식으로,...
예를들어 10월 무술삭 정미라고 하면 11월 10일이 되고, 계묘는 10월 6일이 됩니다.
그래서 월삭간지를 보면 거꾸로 실제 연도를 유추할수 있습니다.
10월 1일이 초하루가 무술인 해는 거의 없습니다. 10월 초하루가 무술로 시작되는 해를 찾아 볼수가 있습니다.
영남대 출판부 한보식 교수가 펴낸 「연력대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일간지를 일일이 다 써 놓았습니다
「일본연력대전」서기 445년 이후부터 되어 있습니다. 445년 이전은 알수없고 중국연력대전을 보아야 합니다
「중국연력대전」BC 1384년부터 AD 2년까지 나와 있습니다.
「한국연력대전」
일본서기에 실려있는 개화천황의 기록중에서 월삭간지가 언급된 것을 전부 뽑아보면
기원전 57년 가을 9월에 大日本根子彦国牽天皇이 죽었다(崩) / (孝元天皇을 말함)
겨울 11월 신미삭 임오(12일)에 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원년 봄 정월 경오삭 계유(4일)에 황후를 높혀 황태후로 하였다.
겨울 10월 병신삭 무신(13일)에 도읍을 春日(카스카)땅으로 옮겼다.
5년 봄 2월 정미삭 임자(6일)에 大日本根子彦国牽天皇을 검지도상릉에 장사지냈다,.
6년 봄 정월 신축삭 갑인(14일)에 이향색미향을 황후로 삼았다.
이것을 모두 뽑아 연력대전으로 맟춰보면
효원 76 11월삭 신미삭 (401년)
개화 1 1월 경오삭 (402년)
개화 1 10월 병신삭 (402년)
개화 5 2월 정미삭 (406년)
개화 6 1월 신축삭 (407년)
개화 28 1월 계사삭 (429년)
개화 60 4월 병진삭
개화 60 10월 계축삭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개화 60년 이후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화천황이 400년대 초반의 인물이 분명하다면 그 후대의 천황들인 숭신, 수인, 경행, 성무, 중애, 신공, 응신도
400년대 후의 인물일 것입니다.
숭신천황은 탁순왕 末錦(말금)한기.
수인 (= 脫知이질금) - 신라에 항복한 구형왕의 동생.
경행천황의 아들이라는 일본무존(小碓尊, 小碓命)은 구형왕
중애천황은 가야국 가실왕, 가수리군과 동일한 인물입니다. 가수리군은 백제 개로왕이라고 잘못 주석을 달은데 현혹되어 많은 학자들이 엉터리 연구에 피와 땀을 쏟아왔습니다. 중애천황은 532 ~ 541년에 활동했던 인물로 추정되는데 연력대전을 통해서 월삭간지 비교를 해 보겠습니다.
중애 8년 1월 기묘삭 : 신라를 공격하다
9월 을해삭 : 대마도에서 화살에 맞고 부상당하여
* 중애 9년 2월 계묘삭 : 정미 (2월 5일)에 사망
3월 임신삭
4월 임인삭
9월 경오삭
10월 기해삭
12월 무술삭
신공 1년 3월 병신삭
10월 계해삭 : 중애천황이 죽은 후 신공황후가 임신한 몸으로
신공 2년 11월 정해삭 : 신라정벌을 계속한다
* 2월 1일이 계묘인 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서기 200년에 있으나 다른 것과 맞지않습니다.(계묘, 경오, 정해)
중애 9년 2월 계묘삭, 9월 경오삭, 신공2년 정해삭의 3개는 일치하나 나머지는 맞지않습니다.
3개정도 맞다는 것은 그 정확성이 굉장히 높다고 할수 있습니다.
2갑자 수정설에 따라 120년을 끌어내리면 320년 전후인데 월삭간지와는 전혀 맞지않습니다.
백제왕력과 대조해서 120년을 끌어내린 2갑자 수정설은 허무맹랑한 주장인 것입니다.
위의 200년도보다 월삭간지가 더 정확히 일치하는 해가 있는데 바로 541년입니다.
* 541년 2월 1일도 계묘로 시작했습니다.
541년 2월 5일은 계묘삭 정미입니다. 이와같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7개나 되고, 한달차이 나는 것이 3개입니다.
한달 차이는 하루 차이일수도 있습니다. 500년대가 200년대보다 더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중애천황의 재위기간은 192 ~ 200년이 아니라 532 ~ 541년이 분명합니다.
개화천황은 400년대 초반.
중애천황은 532 ~ 541년에 재위했던 가야국 가실왕, 가수리군입니다. 이 둘은 모두 같은 이름 가슬을 표기한 것입니다.
가슬/kasur 중애(仲哀)
가실(嘉實)
가수리(加須利)
가야금을 신라에 전한 악성 우륵이 가실왕 밑에 있다가 국운이 다하자 신라로 망명합니다. 신라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한 것이 55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중애천황의 활동시기와 우륵의 일생이 잘 맞아 떨어집니다.
532 ~ 541년 사이는 우륵이 중애천황 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륵의 출생지 省熱縣(성열현)은 어디인가? 큐우슈우 지역입니다.
사세보(佐世保) 삳느릅 사낣 (snurb)
성열현(省熱縣)
소나라(素奈羅)
수나라(須那羅)
활개성(活開城) 모두 같은 이름입니다.
월삭간지를 통해서 보아도 개화천황은 400년대초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이 임나와 가라를 정벌하던 시기에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중애천황은 구형왕이후 세력을 끌어모아 신라에 맞서 싸웠던 실존인물입니다(재위 532~541년)
그 황후인 신공황후는 실존인물이 맞다고 하더라도 200년 혹은 320년대에 신라를 정벌한 것이 아니라 500년대 중반에
정벌한 것이고, 그 정벌한 곳은 큐우슈우 지역의 임나 가라가 맞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일 양국의 학자들이 모두 엉터리 연구를 해왔습니다. 출발점부터 잘못되었고 연구방향이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6세기에 실존했던 인물을 500년 전의 인물로 착각하고 , 또 임나는 큐우슈우 지역을 가리키는데 경남 김해나 대마도에서 찾으려 하니 제대로 연구가 안되는 것입니다.
큐우슈우지역에 널려있는 산성이나 분묘의 형태와 양식등에 대해서 무작정 종래의 학설을 따라가려하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된 연구를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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