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중심으로 |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
● 남해 차차웅 (재위 AD 4~24) 14년 (남해 차차웅 11년) 왜인들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노략하니, 6부의 굳센 병사들을 출동시켜 막았다. 그러자 낙랑은 신라 내부가 허실할 것으로 여기고 몰려와서 금성을 공격하니 상황 이 매우 위급하였다
● 탈해 이사금 (재위: 57년~80년) 64년 (탈해 이사금 8년) 백제의 다루왕때 와산성(蛙山城)을, 10월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명을 내어 쫓았다. 65년 (탈해 이사금 9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 으로 개칭한 뒤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73년 (탈해이사금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羽烏) 를 보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羽烏) 는 그곳에서 죽었다. 77년 (탈해 이사금 21년)가을 8월에 아찬 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 군과 싸워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그 공로를 포상하였다.
● 파사 이사금 (재위: 80년~112년) 94년 (파사 이사금 15년) 가야군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였으나 아찬 길원 (吉元) 에게 기병 1천기를 보내 쫓게 하였다. 96년 음력 9월 가야군이 다시 습격해 왔으나 이때 왕이 5천기를 거느리고 친정, 대승을 거두었다. 102년 (파사 이사금 23년) 8월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영토를 다투다가 왕에 게 와서 판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난처하게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 이 연로해 아는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해서 수로왕을 불러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귀속하 도록 하였다. 이에 왕이 6부 에 명해 모여서 수로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도록 하였다
● 지마 이사금 (재위:112년~134년) 115년 (지마 이사금 4년) 2월에 가야가 남쪽 변경을 노략하였다. 7월에 왕이 친히 가야정벌에 나서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 洛東江) 를 건넜는데, 가야인들이 수풀 사이에 복병을 숨겨두고 기다 렸다가 뛰어 나와 몇 겹으로 에워쌌다. 이에 왕은 군사를 지휘해 명렬 하게 싸워서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116년 (지마 이사금 5년)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치게 하고, 왕도 정예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따르자, 가야가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비가 오래도록 내려서그냥 돌아왔다. 121년 (지마이사금 10년) 4月에 倭人이 東쪽 辺境을 공격했다 123년 (지마이사금 10년) 春三月에 倭国과 講和했다 125년 (지마이사금 14년) 정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에 대거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7월에 다시 대령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 오니,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백제가 다섯 명의 장군 을 보내 돕게 되자, 적들이 듣고 물러갔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파사 이사금 26년 (105년) 화친한 이후 지마, 일성 이사금 2대동안 평화적이었다.
● 아달라 이사금 (재위: 154년~184년) 158년 (아달라 이사금 5년) 倭人이 礼物을 持参했다 165년 (아달라 이사금 12년) 10월에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했다가 발각되 자,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백제로 도망해 들어갔다. 왕이 글을 보내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내어 치자, 백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신라 군사는 식량 이 다해 그만 돌아왔다.
167년 (아달라 이사금 14년) 7월에 백제가 나라 서쪽 두 성을 습격해 깨뜨리고, 주민 1천 명을 노략해 갔다. 8월에 일길찬 흥선을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이를 치게 하였다. 또 왕이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漢水를 건 너 다다르니, 백제가 크게 두려워해 노략해간 남녀를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173년 (아달라 이사금 20년) 5월에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여왕 히미코 (卑彌 乎)가 사신을 보내왔다. 175년 (아달라 이사금 치세)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기이제1에는 연오랑 과 세오녀라는 이름의 부부가 등장하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 벌휴 이사금 (재위:184~196) 185년 (벌휴이사금 2년)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를 좌군주 와 우군주로 임명해 召文國(소문국,또는 조문국)을 치게하였다 (※仇道는 김알지의 5세손으로, 신라 최초의 김씨 국왕인 제13대 미추 이사 금의 아버지) 190년 (벌휴이사금 7년) 8월에 백제가 서쪽 국경의 원산향을 습격하고, 다시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仇道가 날랜 기병 5백 명을 거느 리고 공격 하니 백제 군사가 짐짓 거짓으로 달아났다. 仇道는 추격해 와산까지 갔다 가 백제군에 패하였다. 왕은 仇道가 실책했다 하여 부곡성주로 강직시키 고 설지를 좌군주로 삼았다.
193년 (벌휴이사금 10년) “6월에 왜인들이 크게 굶주려서 우리에게 와 먹을것을 구하는 이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 바다를 건너온 왜인인가 아니면 한반도에 거주하던 왜인인가. 당시 한반도에 상당수의 왜인이 거주했을 가능성.)
● 내해 이사금 (奈解泥師今)(재위:196~230) 200년 (내해 이사금 4년) 7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02년 (내해 이사금 6년) 2월에 가야국이 화친을 요청하였다 208년 (내해 이사금 12년) 봄 정월에 왕자 利音을 이벌찬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겸해 맡아보게 하였다.
209년 (내해 이사금 13년) 2월에 서쪽의 군과 읍을 돌아보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4월에 왜인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利音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209年 (奈解 이사금 14년) 7월에 浦上8國의 亂 (389년 이란 說이 있다) 마산 주변 해안가에 있던 작은 국가들이 加羅를 침략하자 新羅에 구원을 청했다.奈解王이 「太子 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 에게 명하여、 加羅를 도와 8국의 장군을 쳐죽이고, 잡혀갔던 6천명을 빼앗아 되돌려왔다 列伝에서는 「王孫 奈音」에게 명했다라고 되어있다. 羅紀本紀) 時浦上八国謀侵加羅。加羅王子来請救。王命太子于老与 伊伐干利音、将六部兵往救之。撃殺八国将軍、奪所虜六 千人還之。
羅紀列伝)勿稽子伝承 (略)時八浦上国同謀伐阿羅国。阿羅使来請救。尼師今 使王孫奈音率近郡及六部軍往救、遂敗八国兵。 于老 奈解 이사금의 아들이자 장군이다.
※ 浦上8國의 亂과 于老에 대해 신라본기 나해왕 14년, AD209년. 伊伐湌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 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利音 將六部兵往求之 (포상팔국)이 침입하였다고 고하면서 구원을 청하였다.이에 우고(于考) 와 리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 군사를 거느리고가서 구하도록 하였다. 加耶王子 우고태자(于考太子)를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해왕 14년 기사 에서 于老로 잘못기록했다. 浦上八國(포상팔국)과 于老는 전혀 상관이 없다
※浦上8国의 亂이 발생한 연도 문제 -- 浦上8国의 亂이 낙랑, 대방군이 망하고 난 후 해상무역에 관한 문제 때문에 4세기 末에 발생한 것이란 설이 있다. 그러나 그러면 于老나 于考의 생몰년도와 맞지 않게 된다.
212년(내해 이사금 17년) 가야가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음 214년(내해 이사금 19년) 7월에 백제가 와서 나라 서쪽 요거성을 공격해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利音에게 명해 정예병 6천명을 거느리고 백제 를 치게 하여 사현성(沙峴城)을 깨뜨렸다.
218년(내해 이사금 23년) 7월에 무기고의 병기들이 저절로 나오더니, 백제 사람 들이 와서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 고 나가 쳐서 쫓았다.
● 조분 이사금 (재위: 230~247) 231년 (조분 이사금 2년) 7월에 이찬 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甘文國을 정복하 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232년 (조분 이사금 3년) 4월에 왜인이 갑자기 들이닥쳐 금성을 포위하므 로, 왕 이 몸소 나가 싸웠다. 적들이 무너져 달아나니, 날랜 기병을 보내 쫓아가 쳐서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234년 (조분 이사금 4년) 5월에 왜병이 동쪽 변경을 노략하였다. 7월에 이찬 于老가 사도(沙道)(지금의 浦項)에서 왜인과 싸웠는데,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 적들의 배를 불사르니, 적들은 물에 뛰어들 어 모조리 죽었다.
243년 (조분 이사금 13년) 정월에 이찬(伊飡) 于老를 사불한(舒弗邯)으로 임명 해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246년 (조분 이사금 16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于老 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지켰다. 그날 밤 몹시 추웠는데 于老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몸소 땔나무를 태워 덮혀주니, 무리가 마음 속으로 감격하였다.
● 첨해 이사금 (재위: 247~261) 249년 (첨해 이사금 3년) 석우로가 왜인에게 살해당하는 기록이 있으나 석우로 가 죽은 것은 미추왕 7년의 일이다. (http://hl2dus.egloos.com/v/1636963 참고)
256년 (첨해 이사금 9년) 9월에 백제가 침입해 오자 일벌찬 익종이 괴곡 서쪽에 서 맞아 싸우다가 적들에게 살해되었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 왔으나 물리쳤다. 262년(첨해 이사금 15년) 2월에 달벌성을 쌓고,나마 극종을 성주로 삼았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미추 이사금 (재위: 262~284) 미추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 박씨는 갈문왕 이칠 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266년(미추 이사금 5년) 8월에 백제가 쳐들어와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268년(미추 이사금 7년) 舒弗邯 于老가 倭의 사신 葛那古를 접대하면서 倭의 왕을 塩奴(소금을 굽는 노예)로,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만들겠 다고 희롱한 것이 화근이 되어 倭王이 크게 노하여 将軍「于道朱君」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자 于老가 책임을지고 倭의 진영에 스스로 가서 火刑을 당 함으로써 倭軍을 물러가게 하였다. 미추왕때 于老의 부인이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신라에 온 倭國의 사신 을 죽였고, 이 때문에 倭人이 金城을 침공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三国史記「列伝」、于老伝承(概略) 沾解七年、癸酉、倭国使臣葛那古在館、于老主之。与客戯言。 早晩以汝王為塩奴、王妃爨婦。 倭王聞之怒。遣将軍于道朱君討我。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茲之患、由吾言之不慎。我其当之。
遂抵倭軍謂曰、前日之言戯之耳。豈意輿師、至於此耶。 倭人不答。執之、積柴置其上、焼殺之乃去。
味鄒王時、倭国大臣来聘。于老妻請於国王、私饗倭使臣。及其泥酔、 使壮士曳下庭焚之。以報前怨。 倭人忿来攻金城。不克引帰。
味鄒王時、倭国大臣来聘。于老妻請於国王、私饗倭使臣。及其泥酔、 使壮士曳下庭焚之。以報前怨。 倭人忿来攻金城。不克引帰。
284년(미추 이사금 22년) 9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여 겨울 10월에 괴곡 성을 에워싸므로, 일길찬 양질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 유례 이사금 (재위: 284년 ~ 298년) 287년(유례 이사금 3년)정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288년(유례 이사금 4년)4월에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해 불을 놓아 태우고, 사람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293년(유례 이사금 9년) 6월에 왜병이 沙道城(포항)을 쳐서 함락시켰다. 일길찬 대곡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가서 구원하고 복구하게하였다
295년(유례 이사금 11년) 왜병이 와서 장봉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96년(유례 이사금 12년)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왜인들이 우리 성읍 을 여러 차례 침범해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없으니, 내가 백제와 함께 계책을 내서 일시에 바다를 건너 들어가 그 나라를 치고자 하는 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하였다. "저희들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 하니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나가 싸우다가 예측하지 못한 위험이 있을까 두렵고, 백제는 속임수가 많아서 늘 우리 나라를 집어 삼킬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역시 함께 일을 도모하기는 어려울 것 같 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렇겠다."
● 기림 이사금 (재위: 298~310) 299년(기림 이사금 2년)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귀의해 왔다.” 300년(기림 이사금 3년) 정월에 왜국과 사절을 교환하였다 307년(기림 이사금 10년)“국호를 다시 ‘신라’라고 하였다.”
● 흘해 이사금 (재위: 310~356) 내해왕의 손자이다. 우로 각간의 아들. 312년(흘해 이사금 3년)(수정 328.5년)“봄 3월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의 배필을 구하니 아찬 급리의 딸을 보내주었다.” 344년(흘해 이사금 35년)“2월에 왜국이 사신을 보내 혼인할 것을 청하자, 딸이 이미 출가했다 하여 거절” 345년(흘해 이사금 36년) “2월에 왜 왕이 글을 보내 국교를 끊었다.” 346년(흘해 이사금 37년) 왜병이 갑자기 風島에 이르러 변경의 민가를 노략하더 니, 다시 나와 金城을 에워싸고 급히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를 내어 서로 싸우고자 했으나 이벌찬 강세가 말하였다. "적 들은 멀리서 왔으므로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으니, 시간을 늦추어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 는 것만 못합니다." 왕이 그렇겠다고 여겨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 들이 양식이 떨어져 막 물러가려 하자, 강세에게 명해 굳센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쫓아버렸다. ---------------------------------------------------------- (◆ 고구려, 백제, 중국관계) 311年 高句麗 美川王은 西晋멸망의 혼란을 틈타 노리고 있던 遼東을탈취하였다 312年 美川王은 遼東 西安平을 점령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楽浪郡을 점거 했다. 313年 이어서 高句麗는 남방의 帯方郡도 점거했다. 이 곳에 있던 漢人을 등용하 여 기술적、제도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315年 帯方郡 태수는 高句麗의 공격을 받고 이전부터 혼인관계에 있던 百済에 게 구원을 요청했다. 百済는 帯方郡을 도우러 출전했으므로 高句麗의 원한을 사게되었다. 高句麗는 百済를 습격하려고 했으나 배후의 慕容 廆 가 遼東을 奪回 하려고 노리고 있었으므로 百済에 손을 쓸수가 없었다.
318年 高句麗는 鮮卑族의 협력을 얻어 鮮卑・高句麗의 연합군이 慕容廆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하여 遼東의 覇権을 잃고 말았다.
320年 高句麗 美川王은 계속 遼東 탈환을 시도했으나 慕容仁에게 패했다. 337年 慕容 皝이 前燕을 건국하고 황제에 올랐다. 338年 342年에 前燕이 高句麗를 공격하여 수도 丸都城이 함락되고 많은 포로가 끌려갔다.
346년 近肖古王 즉위하다 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350年 前燕이 後趙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352年 氐族의 족장 苻健이 東晋으로부터 독립하여 前秦을 세웠다. 前秦은 급격히 세력을 확대하여 華北일대는 前秦과 前燕이 동서로 양분 하게 되었다. 355年 위기를 느낀 前燕은 高句麗를 征東将軍・営州刺史・楽浪公・高句麗 王 에 책봉했다.
367年 급격히 약해진 前燕은 東晋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를 틈타 前秦 이 前燕의 수도 洛陽을 함락시켰다.
369年 이것을 보고 前燕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된 高句麗는 百済에 2만의 군사를 보내 공격했지만 패했다. 百済는 高句麗로부터의 공격을 피할수 없을것이란 것을 알고 倭의 협력을 얻으려고 하였다.
370年 前燕이 前秦의 공격을 받아 패하고, 慕容評이 高句麗로 도망가지만, 오히려 사로잡혀 前秦으로 보내졌다. 前秦은 慕容評을 처형하고 前燕의 領地였던 遼東을 획득했다. 371年 高句麗는 다시 百済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百済의 역습을 받아, 수도 平壌 城(지금 북한에 있는 平壌이 아니고 中国 集安市에 소재)이 공격받고 高句麗 고국원王이 전사했다.
372年 百済에 이길수 없음을 알고 高句麗는 前秦에게 朝貢하여 前秦의 협력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에대해 百済도 東晋에게 조공하여 東晋의 협력을 받게 되었다. 또한 百済는 倭에게도 조공하여 七枝刀를 보냈다.
375년 百濟 근초고왕 죽다.(일본서기 권9,神功皇后55년조) (삼국사기, 권24) -------------------------------------------------------- ● 내물 이사금 (재위: 356~402) 364년(내물 이사금 9년) 新羅本紀 364年의 記事 4월에 왜병이 크게 들이닥쳤다. 왕이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해 풀 인형 수천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벌려 세우고, 용사1천명을 부현 동쪽 들에 매복시켰다. 왜인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곧바로 나오니, 복병을 일으켜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인들이 크게 패해 달아나자 우리 군사가 추격해 거의 다 죽였다.
373년(내물 이사금 18년) 백제 독산성주가 무리 3백 명을 거느리고 와 투항해 오니, 왕이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 였다. "우리 두 나라가 화목하고 우호하여 형제처럼 지 낼 것을 약속했는데 이제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간 백성을 받아들이니, 이는 화친하는 뜻에 매 우 어긋나는 것이며 대왕께 기대하던 바가 아 닙니다.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였다. "백성이란 변함없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이 있으면 오고 싫증이 나면 가는 것은 본래부터 그러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안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지는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리 심합니까?" 백제가 그 말을 듣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 백제와 신라 간 마찰에서 슬슬 신라의 반항이 시작됨)
381년(내물 이사금 26년) 위두를 부견의 전진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부견이 위두에 물었다.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해동이 일들이 예전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위두가 대답하였다. "역시 중국에서 시대 가 변하 고 국호가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지금 해동이 어찌 예전과 같겠습니 까?" 392년(내물 이사금 37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으며 .왕은 고구려가 강대하다 하여,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 로 보냈다. 393년(내물 이사금 38년) 5월에 왜인들이 와서 금성을 에워싸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울 것을 요청했으 나, 왕은 "지 금은 적들이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죽을 곳에 있으 니 그 예봉을 당 할 수 없다" 하여 성문을 닫아 걸고 있자, 적들이 아무 소득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 들이 돌아가는 길목을 막게 하고, 다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 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끼고 공격해 크게 쳐부수니, 죽이고 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399년(내물 이사금 44년) 년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공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가야와 왜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고구려 의 군대가 신라 영토 안에 머물기도 하였다. 401년(내물 이사금 46년) 7월에 고구려에 가 있던 볼모 실성이 돌아왔다. ------------------------------------------------------- (◆ 고구려, 백제, 중국관계) 375年 高句麗는 百済의 水谷城(지금의 開城 부근)을 공격했다. 百済는 将軍을 파견하여 방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376年 前秦이 華北을 통일하고、高句麗는 前秦에 조공하여 前秦의 협력을 얻었다. 381年 高句麗가 강성하게 되자 百済는 두려워하여 倭와 협력관계를 강화 했다. 倭와 百済의 관계가 강화되자 이것을 두려워한 新羅는 前秦의 苻堅에게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383年 前秦이 東晋에게 패하여 약해졌다. 384年 이것을 본 慕容 皝의 아들 慕容垂가 현재의 河南省에서 독립하여 後燕을 건국했다. 이틈을 타 高句麗는 재빨리 後燕을 공격하여 遼東탈환에 성공했다. 이후 다시 高句麗는 百済 공격에 시동을 걸게 된다.
384년 百濟 근구수왕이 죽고 아들 枕流王 즉위 (일본서기, 神功皇后64년 조) (삼국사기, 권24) 385년 百濟 枕流王 죽다. 王子 阿花가 어려 숙부 辰斯가 왕위를 뺏다(일본서기, 神功皇后65년 조) (삼국사기권24)
392年 高句麗에 好太王이 즉위했다. 好太王은 倭・百済 연합군을 물리치기 위해 新羅와 협력했다. 新羅는 이전부터 倭・百済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倭의 공격에 골치를 앓아왔던 新羅는 왕자 実聖을 高句麗에 인질로 보냈 다. 이후 高句麗는 百済를 공격하여 漢水이북을 전부 함락시켰다. 百済는 395年에 걸쳐 탈환을 시도하지만 전부 실패했다.
395年 5月、後燕 황태자 慕容宝가 北魏를 공격하지만, 도리어、北魏軍의 역습 을 받아 대패했다. 이 패전으로 인해 後燕과 北魏와의 세력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396年 後燕이 약해진 것을 본 好太王이 遼東、帯方의 2国王이 될 것을 요청했 다. 後燕으로서도 北魏에 대항하기 위해서 高句麗를 상대할수 가 없었으 므로 이 제안을 허락하게 된다. 이로써 高句麗는 後燕에 대한 방어를 걱정 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倭・百済 연합군에 전력으로 상대할수 있게 되자, 漢江을 넘어 百済에 침공하여 58城 700村을 일거에 함락시키고, 百済王에 게 많은 포로와 織物을 献上하고, 영원 히 隷属될 것을 맹세시킨다. 高句麗에게 복속하는 것을 싫어했던 百済 阿華王은 왕자 腆支를 倭에 인질 로 보내고 원군을 요청했다. 百済는 高句麗와의 맹세를 어기고 倭와 화통했던 것이다. 高句麗는 百済를 정벌하려고 平譲에서 출병하였다. 바로 그때 新羅로부터 사자가 와서 수많은 倭人이 新羅에 침입하였 으므로 高句麗王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高句麗王은 新羅를 구원하게 되었다. ※ 아화왕은 즉위 직후부터 고구려에 빼앗긴 한수 이북의 諸城을 되찾기 위하 여 3년과 4년 계속적으로 고구려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광개토왕비 문의 병신년(396) 기사에 의하면, 아화왕 5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대규모로 남진하여 백제의 왕도王都를 공략하 고 백제왕을 신복(臣伏)시켰다. ‘무례어귀국(無禮於貴國)’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같은 상황과 관련 이 깊다. 바로 이 때문에 백제는 왕자 직지를 일본에 보내게 되었다.
400年 高句麗가 5万의 大軍을 파견하여 新羅를 구원했다. 新羅 王都에 가득찼던 倭軍은 任那・加羅로 퇴각했으므로, 이를 추격하여 任那・ 加羅로 쳐들어 가자 반대로、安羅軍등이 新羅의 王都를 점령했다.
이때, 어느정도 세력을 회복한 後燕王 盛이 三万을 이끌고 高句麗의 배후를 습격하여, 遼東을 탈취하려고 했다. 高句麗는 遼東을 다시 뺏으려고 해도 大軍이 한반도 남쪽에 파견해 있어서 後燕에게 조공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後燕王은 高句麗의 조공에 예가 교만하다고 생각하여 兵3万을 이끌 고 高句麗를 습격하여 순식간에 新城、南蘇城을 함락시켰다.
신라 내물왕의 아들 未斯欣에 관한 史話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 삼국유사에 각각 기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제상이 고구려에가서 인질로 간 눌지왕의 왕제 복호를 정월에 데려왔고, 그 해 가을 일본에 건너가 미사흔을 왜국으로부터 돌아오게 하였으니, 그 해가 눌지왕(訥祗王)2년(418)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사실을 일본서기에서도 신공황후 섭정5년 (205)에 “신라왕이 모마리(毛麻利)를 시켜 조공을 했으며, 質子 [微叱許智= 未斯欣]를 毛麻利가 도망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양측이 모두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연대는 약 2백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박제상이 고구려에 가서 王弟 복호(卜好)를 데려온 그 해 가을 일본에 있는 王弟 未斯 欣을 음계로 써 본국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 삼국사기 눌지왕 2년(418)으로 고구려 장수왕 6년에 해당한다. 그 후 6년 뒤인 눌지왕 8년(424) 고구려에 사자를 보내어 수빙(修聘)을 맺었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으 며, 이해가 곧 장수왕 12년에 해당된다.
401年 後燕 慕容盛이 禁軍의 반란에 의해 살해되자, 高句麗는 잽싸게 後燕 의 宿軍城 (遼寧省 朝陽 東北)을 함락시켜 遼東을 탈환했던 것이다.
405年 百濟 阿花王이 죽었다. 전지왕이 백제로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 腆支王이 일본에 인질로 갔다가 아신왕이 돌아가자 귀국하여 즉위하는 해가 삼국사기 연표에 의하면 고구려 광개토왕 14년이요, 신라 實聖 王 4년 이며, 중국 東晋 安帝義熙 원년 乙巳에 해당한다. 양서백제전 을 보면 “동진 의희 중에 백제왕은 餘映” 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응신천황 16년조의 기록과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 원년의 내용이 일치한다.(연대가 120년 내려감) 응신 천황 16년(285)으로부터 120년을 내려잡으면 전지왕이 곧 직지 왕인 것 이다. 이와 같이 전지왕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연대가 신라 ․고구려, 특히 중국의 기년과 일치하고 있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三國史記와 동국통감과 진서를 종합하면, 일본의 응신천황이 아니라 履中天 皇 6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연대가 120년을 내려야 한다.
413年 전술에 탁월했던 好太王이 죽었다
광개토왕비문 "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거나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깨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또는 "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오므로 고구려가 왜를 쳐부수었다."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단 주요 글자가 망실되어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다. 열도(일본) 에서는 주로 "왜가 391년 이후 백제를 쳐부수고 신라를 신민 즉 부용 국(식민지)로 삼았다."라고 확실히 믿고 있다. ,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 ... 14년[15] 갑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420年 (일본서기, 應神天皇25년조) 百濟 直支王이 죽고 태자 久爾辛이 즉위하다 (삼국사기, 권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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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성 이사금 (402~417) 402년(실성 이사금 원년) 3월에 왜국과 우호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 을 볼모로 삼았다. 407년(실성 이사금 4년) 4월에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막아 다시 싸워 깨뜨리고, 3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409년(실성 이사금 6년) 3월에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더니, 6월에 또 남쪽 변경에 침입하여 1백 명을 노략해 갔다. 410년(실성 이사금 7년) 2월에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비축하고서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군사를 미처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 시설을 치고자 하였다 이때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였다. "제가 들으니 '무리란 훙한 도구요, 싸움이란 위험한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나라를 치다가 만일 실패한다면, 그때는 후회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험한 곳에 의지해 관문을 설치하 여 그들이 오면 막아서 우리를 침범해 어지럽히지 못하 게 하고, 우리 할 때는 나가 사로잡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남을 이용할 것이요,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대책 가운데 으뜸 일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좇았다. 414년(실성 이사금 11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 눌지 마립간 (417~458) 실성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가 개입한 군사정변. <삼국유사> 기이 1 실성왕조편 418년(눌지 마립간 2년) 왕의 아우 복호가 고구려로부터 제상 나마와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는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424년(눌지 마립간 8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의 예를 닦았다.” 431년(눌지 마립간15년) 4월에 왜병이 와서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명활성 을 에워 쌌지만 아무 소들이 없이 물러갔다. 433년(눌지 마립간 17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요청하므로, 그대 로 따랐다.”
434년(눌지 마립간 18년) 2월에 백제 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더니, 9월 에 다시 흰 매를 보내왔다. 10월에 왕이 황금과 명주를 백제에 보내 답례하였다. 440년(눌지 마립간 24년) 왜인들이 남쪽 변경을 침범해 백성을 노략해갔다. 6월에 는 다시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444년(눌지 마립간 28년) 4월에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에워쌌다가, 양식이 다하 자 그냥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내어 뒤쫓고자 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 였다. "병가의 말에 '궁지에 몰린 도적을 쫓지 말라'고 했으니 왕께서는 그만두소서." 왕은 듣지 않고 긱병 수천여 명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 서 어우러져 싸웠으나, 적들에게 패해 죽은 장수와 병사들이 절반이 넘었다. 왕이 창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오르니, 적들이 여러겹으로 에워쌌다. 이때 홀연히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적들은 신이 돕는 것 이라고 생각 해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 돌아갔다.
450년(눌지 마립간 34년) 7월에 고구려 변경의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 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하슬라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보내서 그를 엄습해 죽였다. 고구려 왕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사람을 보내 와 통고 하기를 "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를 닦아 매우 기쁘게 여기던 터에, 지금 군사를 내서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이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 곧 군사를 일으켜서 우리의 서 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이에 왕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자 그대로 돌아갔다. 455년(눌지 마립간 39년) 8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니,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동맹의 변천)
● 자비 마립간 (458~479) 458년(자비 마립간 2년) 4월에 왜인들이 병선 1백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와 월성을 에워싸니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 다. 왕이 성에서 지키다가 적들이 바야흐로 물러나려 하자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부수고, 달아나는 것을 추격해 바다 어귀에 이르 니, 적들 가운데 물에 빠져 죽는 이 가 절반이 넘었다. 460년(자비 마립간 4년) 2월에 왕이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461년(자비 마립간 5년) 5월에 왜인들이 활개성을 쳐부수고 백성 1천 명을 사로 잡아갔다. 462년(자비 마립간 6년)2월에 왜인들이 삽량성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 가자, 왕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매복해 기다리고 있다가 요격해서 크게 쳐부수었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강역 을 침범하므로 변경을 따라 두 개의 성을 쌓았다. 468년(자비 마립간 11년)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 을 습격 하였다. 474년(자비 마립간 17년) 고구려 백제 정벌. “왕이 군사를 내서 백제를 구하게 했으나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백제는 이미 함락되었고 경(개로왕) 역시 살해 되었다.”
● 소지 마립간 (479~499) 482년(소지 마립간 3년)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침입해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신라 군사가 백제와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들이 무너져 물러갔다. 그들을 추격해 이하 서쪽에서 쳐부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485년(소지 마립간 6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신라 군사와 백제가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공격해 크게 쳐부수었다. 494년(소지 마립간 15년) 3월에 백제 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 하자, 왕이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냈다.7월에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해 왜적을 방비하였다 497년(소지 마립간 18년) 2월에 가야국에서 흰꿩을 보내왔는데,꼬리 길이가 5척 이나 되었다. 7월에 고구려가 우산성에 쳐들어오자, 장군 실죽이 나가 이하 에서 쳐부수었다. 498년(소지 마립간 19년) 4월에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501년(소지 마립간 22년) 3월에 왜인들이 장봉진을 쳐서 함락시켰다
※내물왕대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영향.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고구려에 의해 왕위가 결정되는 등, 상당 기간 고구려 의 영향력 지속. 눌지왕대를 기점으로 동맹이 변화.백제, 가야와 대고구려 전선 형성.
● 지증 마립간 (재위: 500년~514년) 순장을 금지시키고, 국호를 다시 신라로 고침 513년 (지증 마립간 13년) 6월에 우산국이 귀복하여 옴
● 법흥왕(재위:514~540) 522년(법흥왕 9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냈다. 532년(법흥왕 19년) 금관국주 김구혜가 왕비 및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던,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자기 나라의 재물과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 였다. 왕은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상등의 관위를 주었으며, 본래 그들 나라를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까지 이르렀다.
● 진흥왕(재위:540~576) 548년 (진흥왕 9년) 2월에 고구려와 예인들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 주령을 보내 정예병 3천 명을 거느 리고 가서 쳐서 죽이고 사로잡은 적들이 매우 많았다. 550년(진흥왕 11년)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 함락.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 함락.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해 군사를 내어 쳐서 두 성을 빼앗아 증축” 551년(진흥왕 12년)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고, 승세를 몰아 10개 군을 빼앗았다.—단양적성비. 553년(진흥왕 14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10월에 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이해 소비로 삼았다. 554년(진흥왕 15년) 7월에 명활성을 수리해 쌓았다.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가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 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555년(진흥왕 16년) 정월에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였다 10월에 왕이 북한산에 행차하여 영토를 개척하고 국경을 정하였다 북한산 순수. (※ 신라 국력의 성장. 150년 만의 변화.) 562년(진흥왕 23년) 7월에 백제가 변경 주민들을 침략하였다. 왕이 군사를 출동시 켜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9월에 가야가 배반하므로 왕이 이사부에게 명해 토벌하게 하고, 사다함을 그 부 장으로 임명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치달려 전단문 에 들어가 흰 깃발을 세우니,온 성중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도착하니 일시에 모두 항복하다. 564년(진흥왕 25년) 8월에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므로, 왕이 친히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았다. 565년(진흥왕 26년) 북제 책봉 ‘사시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
● 선덕여왕 (재위: 632년 ~ 647년) 635년(선덕여왕 3년)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갑사 5백 명 을 거느리고 와서 그곳에 매복하고 있었다. 알천이 이를 엄습해 모두 죽였다. 639년(선덕여왕 7년)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겅의 칠중성을 침공하니, 백성들이 놀라서 산록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해 그들을 안정시키고 모이게 하였다.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이들이 매우 많았다.
643년(선덕여왕 11년) 7월에 백제왕 의자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서쪽 40여 성을 빼앗아 당으로 가는 길을 끊으려 하니, 왕이 당태종에게 사신을 보내 위급한 사정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 시켰는데, 도독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대야성에 서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이가 바로 춘추의 딸이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고구려 왕 고장(장수왕)이 ‘죽령은 몬래 우리 땅이니 네가 만약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 있다." 며 김춘추를 감금시킴.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해 결사대 1만명을 보내자 김춘추를 풀어주다
644년(선덕여왕 2년) 9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아뢰었다. | 173년 (아달라 이사금 20년) 5월에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여왕 히미코 (卑彌 乎)가 사신을 보내왔다.
침입하여 이에대한 방어 위주였다. 232년 (助賁王 3년)때부터 倭와 新羅간에 큰 변화가 일어나 倭가 新羅 내부까지 침입했다. 倭兵이 처음으로 내륙까지 진줄하여 王都인 金城 (慶州)까지 공격하여 싸웠다는 위급한 국난이 발생했다. 助賁王이 몸소 참전하여 죽이고 포로 1천명을 사로잡았다.
234년 (助賁王 4년)이때부터 于老가 활약하여 倭兵을 괴멸시킨다.
300年 (基臨王 3年) 왜국과 使者를 교환하여 평화가 성립
●仲哀天皇 200年(仲哀天皇9년) 12월 『日本書紀』卷九 神功황후 신라 정벌기 則皇后爲男束裝。征新羅 時神導之。由是隨船浪之遠及于新羅國中 於是新羅王宇流助富利智干。參迎跪之。取王船旣叩頭曰。 臣自今以後。於日本國所居神御子。爲內官家。無絶朝貢。
황후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이때 神이 인도하였 으므로 배를 따라 파도가 일어 멀리 新羅國 안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우류조부리지간)이 나와서 맞이하여 무릎을 꿇고, 왕의 배를 맞아들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길 "臣은 지금 이후부터 일본국에 있는 神의 아드님께 內官家(내관가)가 되어 조공을 끊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爰新羅王波沙寐錦、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仍齎金銀彩色及綾・羅・縑絹、載于八十艘船、令從官軍。是以、 新羅王常以八十船之調貢于日本国、其是之緣也。 於是、高麗・百濟二国王、聞新羅收圖籍降於日本国、密令伺其軍勢、 則知不可勝、自來于營外、叩頭而款曰「從今以後、永稱西蕃、不絶朝 貢。」 故因以、定內官家屯倉。是所謂之三韓也。皇后從新羅還之。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金‧銀‧채색(彩色)‧능라(綾‧羅)‧겸견(縑絹)을 배 80 척에 싣고 官軍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조(調)를 일본국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一云。 禽獲新羅王詣于海邊。拔王臏肋令匍匐石上。俄而斬之埋沙中 則留一人。爲新羅宰而還之 然後新羅王妻不知埋夫屍之地。獨有誘宰之情。乃誂宰曰。 汝當令識埋王屍之處。必篤報之。且吾爲汝妻。 於是宰信誘言。密告埋屍之處。 則王妻與國人。共議之殺宰。更出王屍葬於他處。 時取宰屍。埋于王墓土底。以擧王櫬窆其上曰。尊卑次第固當如此。 於是天皇聞之。重發震忿。大起軍衆。欲頓滅新羅。 是以軍船滿海而詣之。是時。新羅國人悉懼不知所如。 則相集共議之。殺王妻以罪。〉
또 一說은 다음과 같다. 新羅王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王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 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을 베어 모래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新羅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妻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말하길,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 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은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주었다.
곧 왕의 妻는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다시 왕 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때 재상의 주검을 취하고,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 에 얹고,"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를 천황이 듣고 매우 화가 나 군대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즉시 멸망시키려고 하였다.그래서 군선이 바다에 가득차서 도착하니, 이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妻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파사매금(波沙寐錦)과 인질 微叱己知波珍干岐의 年代문제 파사매금(波沙寐錦)은 파사이사금(재위 서기 80년~112년)이고 微叱己知波珍干岐는 未斯欣으로 未斯欣이 일본에 볼모로 간 것은 실성왕 원년인 402년으로 파사매금(波沙寐錦)과는 생존연대가 완전 틀린다. 또 未斯欣을 볼모로 보낸 것은 실성왕이 왜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우호의 증표로 보낸 것이지 전쟁에 져서 포로로 잡혀간 것이 아니다. 第4代 婆娑王과 싸웠던 것은 卑弥呼 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仲哀9年 神功皇后가 신라를 정벌했을때의 신라왕은 波沙寝錦 (婆娑王)이 아니다. 卑弥呼의 事績이 神功皇后의 事績으로 삽입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 (우류조부리지간)은 삼국 사기의 첨해이사금 3년(250년) 때의 舒弗邯 于老의 이야기와 닮았다. 그러나 神功황후는 4세기의 인물인데 舒弗邯 于老는 第10代 奈解 王의 王子이자 第16代 訖解王의 父인 「于老」로서 3세기 인물이다 4세기의 神功왕후를 3세기의 히미코(卑彌乎)에게 오버랩시켜 억지로 갖다 붙힌 것이다. 이런 억지에 기반하여 于老와 내해왕, 첨해왕의 연대도 120년을 더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神功황후의 신라 정벌(仲哀9年)에 관한 기사의 연대 ① 320년 설 -- 일본서기에 적힌 200년 + 2주갑(120년) 인상 ② 346년 설-- 新羅本紀는 百済本紀를 345년까지의 半年一年暦으로 하면, 中国暦의 高句麗本紀나 中国史書의 사건과 거의 일치하게 되어 연대에 관해서는 모순이 별로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하면 神功皇后가 신라정벌을 한 것은 346년 (神功26年)이 된다) 그러나 사건의 경위나 결과등에 대해서는 일본서기나 好太王碑文 과 차이가 보이므로, 사건의 연대는 新羅本紀를 따르되 사건의 상세는 일본서기나 好太王碑文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설.
③ 362년설 --그러나 古事記 崩年度를 기준으로하면, 仲哀天皇이 즉위9년에 죽고 神功皇后가 新羅 遠征을 한것은 362년이 된다.
④神功 섭정5年의 微叱許智伐早은 奈勿王의 王子 未斯欣으로 생각. 新羅本紀에는 実聖王 元年(402年=仁徳11年(半年暦)倭国과 国交를 열고、 奈勿王의 王子・未斯欣 346年(神功26年) (신라 訖解王36年) 「2月、倭王이 국교단절의 국서를 보내왔다. 倭軍이 갑자기 습격해서 변경지대를 침입하고 金城까지 포위하여 공격해왔지만、 城문을 닫고 지구전에 들어가자 이윽고 倭軍이 물러 갔다.
366년(神功皇后 46년) 3월 초하루 斯摩宿禰를 탁순국(卓淳國)에 보내었다. 이 때 卓淳王 말금한기(末錦旱岐)가 斯摩宿禰에게 “甲子年 7월에 백제인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세사람 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貴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臣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 면 우리 王이 반드시 (君王)에게 덕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 久氐 등에게 ‘전부터 동쪽에 貴한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어 그 길을 못한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험하여 큰 배를 타야 겨우 통할 수 있을 것이니 길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겠는가’라 하였다. 그러자 久氐등이 그렇다면 지금은 갈 수 없겠 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려면 다시 돌아가서 배를 뒤에 가야 하 겠습니다’라 하고 ‘만약 貴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 에 도 알려 주십시요’라 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에 斯摩宿禰는 從者 이파이(爾波移)와 卓淳人 과고(過古) 두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肖古王)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하고,다섯가지 빛깔의 채견(綵絹) 각1필과 각궁전(角弓箭) 및 철정(鐵鋌) 40매(枚) 를 이파이(爾波移)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가지 진기한 것들을 보여 주며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귀한 나라에 바치고자하나, 을 알지 못하여 마음만 있을 뿐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使者 에게 부쳐서 바친다”고 하였다. 이에 이파이(爾波移)가 일을 받들고 돌아와서 志摩宿禰에게 보고 했다. 바로 卓淳으로부터 돌아왔다.
※神功皇后의 신라정벌기에는 신라가 항복하고 곧이어 백제와 고구려 도 항복했다고 위 기사에 의하면 이때까지 아직 倭가 어디에 치하고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있으므로 완전 뻥이란 사실을 알 수있다
367년 (神功皇后 47년) 4월 백제왕이 久氐 ‧ 미주류(彌州流)‧막고(莫古)를 보내어 조공하게 했다. 이 때 신라국의 조사(調使)가 久氐와 함께 왔다. 이에 황태후와 태자 예전별존(譽田別尊)이 매우 기뻐하며 “선왕이 바라던 나라 사람들이 지금 와서 조공하니, 천황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슬프도다”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두 나라의 貢物을 조사하였더니 신라의 貢物은 진기 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백제의 貢物은 적고 천하여 좋지 않았다. 이에 久氐등에게 “백제의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된 것이 냐”고 물었다. “우리들이 길을 잃어서 사비신라(沙比新羅)에 이르렀는데 신라인들이 우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 달 이 지난 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때 久氐등이 하늘을 향하여 저주 하였더니 신라인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 고 우리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 을 우리 나라의 공물로 바꾸었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만약 이 을 말하면 돌아가는 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久氐 등은 두려워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겨우 천조(天朝)에 도착 할 수 있었습니다” 고 대답하였다. 이때 황태후와 예전별존(譽田別尊) 이 신라 사신을 책망하고 天神에게 기도하여 “누구를 백제에 파견하 여 일의 사실 여부를 조사시키며, 누구를 신라에 파견하여 그 죄를 물으면 좋겠습니까”라 하였다.天神이 "武內宿禰로 하여금 의논하도 록하고 천웅장언(千熊長彦)을 使者로 삼으면 소원대로 될 것이다”라 고 가르쳐 주었다. 이에 천웅장언(千熊長彦)을 신라에 보내어 백제가 바치는 물건을 훔친 것을 질책하였다.
※久氐는 구수, 貴須(귀수)로 근구수왕, 미주류(彌州流)는 침류왕, 막고(莫古)는 막고해라고 한다. ※沙比新羅- 사량부 – 지금의 梁山으로 추측됨
369년(神功皇后49년) 加羅7국 평정 3월 황전별(荒田別)과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沙白)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요”라 라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에게 (木羅斤資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精兵)을 이끌고 사백 (沙白)‧ 개로(蓋盧)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본(比自 㶱‧) 남가라(南加羅)‧ 㖨國(녹국)‧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加羅7국 比自㶱-경남 창령지방 (「眞興王巡狩碑」중 하나인 「昌寧碑」에 比子伐로 나오며, 三國史記』 의 比自火郡(또는 比斯伐)이 곧 比自㶱과 같은 곳으로 믿어진다 南加羅-金海에 있던 本加耶 지칭( 『三國史記』 「庾信碑」에 ‘則南加耶始祖首露’라는 기록이 있다) 㖨國(녹국)-㖨己呑國. 大邱 부근의 慶山지방으로 추정해 왔으나, 최근 이를 경남의 靈山, 密陽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安羅-경남 咸安. 『三國史記』에서 咸安郡을 阿尸良國(아시량국 또는 阿那加耶, 아나가야)이라 하였고 三國遺事』에는 阿羅伽耶를 당시의 咸安이라고 하였다. 多羅-경남 陜川 『三國史記』에서 본래 大良(또는 耶)州郡인데 경덕왕때 陜州로 바꾸었다. 卓淳- 대개 大邱 부근으로 보아 왔으나 이를 경남 창원지방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있다 加羅-경북 高靈지방에 있던 大加耶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 캐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 (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比 利) ‧ 피중(辟中) ‧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 였다. 그래서 백제왕 父子와 황전별(荒田別)‧ 목라근자(木羅斤資) 등이 의류촌(意流村)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 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피지산(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古奚津-『三國志』 東夷傳 馬韓조에 보이는 狗奚國으로서 전남 康津설과 전남 海南설이 있다. ※忱彌多禮-오늘날의 제주도 설과 古奚津의 중심부락인 康津일대설이 있다. ※전라4읍 할양 비리(比利) 피중(辟中) 포미지(布彌支)‧-전남 羅州로 비정 반고(半古)-寶城으로 비정
※위 내용은 백제 近肖古王(346 ~ 375)이 馬韓을 멸하여 전라도 남해 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이 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만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 라고 맹세하였다.그리고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久氐등을 딸려서 보냈다.
370년(神功皇后50년) 2월 황전별(荒田別) 등이 돌아왔다. 5월 천웅장언 (千熊長彦)과 久氐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때 황태후가 기뻐 하며 久氐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한(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 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久氐등이 “천조 (天朝)의 큰 은택이 멀리 우리나라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왕이 기쁨 에 넘쳐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지극한 정성 을 바치는 것입니다. 비록 만세까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겠 습니까” 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다사성(多沙城)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역(驛) 으로 삼게 했다.
※ 多沙城-경남 하동읍성(河東邑城), 가야가 멸망하고 백제의 세력권에 들면서 다사성(多沙城)이라 하였으며, 신라 통일 후 한다사군 (韓多沙郡)이라 하였다.
371년(神功皇后51년) 3월 백제왕이 또 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 태후가 태자와 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 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 게 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천웅장언(千熊長彦)을 久氐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神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이 때 백제왕 父子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貴國의 큰 은혜는 하늘과 땅보다 무거우니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을 수 있으리요. 성스러운 왕이 위에 있어 해와 달같이 밝고 신이 아래에 있어 산악과 같이 굳세니 길이 서쪽 번국(蕃國)이 되어 끝내 두 마음이 없을 것이오”라 아뢰었다.
372년(神功皇后 52년) 9월 초하루 久氐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枝刀) 1자루와 칠자경(七子鏡) 1개 및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계(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침류왕(枕流 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貴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 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土物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 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 하여 조공하였다.
367년(応神天皇의 즉위年) 日本書紀에서는 応神天皇의 즉위는 干支로 庚寅年인데 이해는 中国暦에 따르면 390年이지만、日本書紀는 応神天皇으로부터 倭5王시대에 명백히 연대가 붙혀져 있다. 이것을 기초로 반年 1年暦 으로 하면、応神天皇 즉위는 367年 후반이 된다. 日本書紀에서는 神功47年에 해당하고, 이해 百済와 新羅가 함께 공물을 보내왔다.
(※382年, 神功皇后 62년에 襲津彦을 新羅에 파견하여 新羅를 토벌 하고 있는데 같은 내용이 応神16年에도 있다. 이 2가지 사실이 같은 해에 일어났다고 한다면 神功62年=応神 16年이 된다. 이것을 기초 로하여 応神元年을 계산하면 367年이 된다)
375년(神功皇后 55년) 백제 초고왕(肖古王)이 죽었다. 376년(神功皇后 56년) 백제왕자 귀수(貴須)가 왕이 되었다.
382년(神功皇后 62년) 葛城襲津彦에게 신라를 토벌하도록 했지만、美女에게 미혹되어, 거꾸로 加羅国을 공격했다. 百済의 木羅斤資를 보내어 토벌하도록 하여 加羅를 회복하다.
389年 神功皇后가 죽고 応神天皇은 다음해 (390년) 즉위
391년(応神 3년) 이 해 百濟의 진사왕(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日 本)의 天皇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百済 辰斯王은 高句麗에 대하여 저자세가 되어 高句麗에 복속할 것을 승락하게 되고 이것을 알게된 倭는 辰斯王 으로서는 高句麗에 대항할수 없게됨을 의미) 기각숙네(紀 角宿禰)・ 우전시대숙네(羽田矢代宿禰)・석천숙네(石川宿禰)・목토숙네 (木菟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 國 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네(紀角宿禰)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서기 권10, 應神天皇3년조) 391年(応神 3년) 倭는 阿花王을 구원하기 위해 大軍을 파견하여 高句麗 세력을 물리쳤다.
396年 (応神 7年) 高麗人、百済人、任那人、新羅人들이 来朝하다. 그 때 武內宿禰에게 명하여 여러 韓人들을 이끌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이 연못을 이름하여 韓人池라 불렀다.
397年 (応神 8年) 百済人이 来朝하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에 무례하였기 때문에 (日本이) 우리의 침미다례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天朝(일본조정)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아직기는 왕자로서 아화왕 6년(396)에 일본에 質子로 갔다가 아화왕이 죽은 405년에 귀환한 것이라 하겠다
※ 東韓의 땅-- 峴南・支侵・谷那・東韓을 별개로 보는 사람도 있고, 峴南・支侵・谷那을 東韓의 땅이라고보는 설도 있다. 応神 16년 시세조 분주에, 「東韓者는 甘羅城・高難城・ 爾林이다」 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즉 峴南을 甘羅(대체로 전북방면으로추측), 支侵을爾林(충남홍성, 대흥에, 谷那를 高難(전남 곡성으로 추측)에 비정하는 것이다.
400年 倭・百済 연합군과 싸우고 있을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高句麗는 倭에 사신을 보내 평화협정을 성립시켰다. 高句麗의 뒷배가 없어진 新羅도 倭에 奈忽王의 아들 未斯欣을 인질 로 보냈다.
이때 高句麗、新羅、百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倭로 오게되고, 倭는 그 사람들을 활용하여 難波(大阪) 운하、茨田堤(만다제방) 축조 (仁徳11)、山城(교토)에 큰 개천을 파고(仁徳12) 和爾池、横野堤 를 쌓았다 (仁徳13).小橋、大道등의 토목공사를 일어켰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402年(仁徳11年) 実聖王 元年 倭国과 国交를 맺고、奈勿王의 王子・未斯欣을 인질로 삼았다. (※新羅本紀에서는 이 기간이 倭와 新羅간의 전쟁기간으로 되어 있다.) 325년 (神功 5年)--신라 실성왕 원년에 해당하므로 AD402년(仁徳11年) 신라왕이 오례사벌(汙禮斯伐)과 毛麻利叱智(혹은 毛末, 박제상),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볼모로 와 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未斯欣)을 돌아가게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잠시 본토에 갔다오겠다는 허락을 받고 葛城襲津彦과 함께 對馬에 도착했으나 毛麻利叱智등이 襲津彦을 속이고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미질한기(微叱旱岐)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襲津彦은 속은 것을 알자 신라 사신 세 사람을 붙잡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신라에 나아가 도진(蹈,鞴津, 다대포로 추측)에 이르러 초라성(草羅城, 양산지방으로 추측)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이 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오늘날의 상원(桑原)과 좌미 (佐糜 ) ‧고궁(高宮)‧ 인해(忍海) 4읍의 한인(漢人) 등의 시조이다.
402년(仁徳14年) 2월 백제왕(百濟王)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쳤다. (縫衣工女는 바느질 기술자)-진모진(眞毛津)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오늘날 래목의봉(來目衣縫)의 시조(始祖)이다.
403年(応神14年)弓月君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臣은 저희 나라의 人夫 120 縣을 거느리고 귀화하려고 하였으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加羅国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였다.(中略)
이에 葛城襲津彦 (카츠라기 소쓰비코)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 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신찬성씨록에는 弓月君:“太秦公宿禰 秦始皇帝十三世孫 孝武王之後也 男功滿王足仲彦天皇八年來朝 男融通王[一云 弓月王] 譽田天皇 十四年來歸 率百二十七縣百姓歸化 獻金銀玉帛等物·” 이라 하여, 弓月君을 秦始皇帝의 후예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秦始皇帝의 성은 진씨가 아니고 嬴(영)씨이다.
403年에 応神天皇이 죽지만, 記事는 계속 応神天皇대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仁徳天皇 시대의 일이다.
404年 高句麗가 다시 남하해 올 것을 두려워 한 倭는 高句麗의 배후를 쳐서, 일거에 帯方界(현재 中国과 북한의 국경부근)까지 공격했다. 이때 高句麗는 戦力을 遼東에 향하고 있었기때문에 帯方界까지 침공 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중심을 바로잡은 高句麗는 倭軍을 격파 했다. 404年(応神15年) 8月、壬戌- 백제왕이 阿直岐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아신왕 11년) 곧 輕(경)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阿直岐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때문에 말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廐坂 (구판)이라고 한다. 阿直岐는 또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菟道稚郎子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천황이 阿直岐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博士가 또 있느냐” 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王仁(和邇)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하자 上毛野君의 시조인 荒田別(아라다와케)과 巫別(가무나기와케)을 백제에 보내어 王仁을 불렀다. 阿直伎는 阿直岐史의 시조이다.
※(阿直伎:고사기에서는 阿知吉師(아질길사)라고 하였는데, 吉師는 族長을 나타내는 경칭이다. 왕자?
405年(応神 16年) 2月,王仁이 왔다. 태자 菟道稚郎子는 스승으로 모시고 王仁에게서 여러 典籍(전적)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王仁이라는 사람은 書首(서수) 등의 시조이다.
405년(応神 16年)8월 평군목토숙네(平群木菟宿禰)・적호전숙네(的戶田宿禰) 를 加羅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詔)를 내려, “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반드시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新羅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네(木菟宿禰) 등이 精兵을 데리고 진격하여 新羅의 국경에 다다르자, 新羅王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弓月의 人夫를 데리고 襲津彦과 함께 돌아왔다.
405년(応神 16年) 이 해 百濟 阿花王이 죽었다. 天皇은 直支王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東韓은 甘羅城・高難城・爾林城이다]. 直支王은 阿花王의 長子(390年-420年)로서 阿花王 8년에 人質로서 大和에 살고 있었지만, 백제로 돌아가 直支王이 되었다. (삼국사기)
409년(応神 20年) 倭漢直(東漢直라고도 한다)의 先祖인 阿知使主와 그아들 都加使主가 17縣民을 이끌고 귀화했다.
414년(応神 25年) 백제(百濟)의 직지왕(直支王)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 (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사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天皇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 [『백제기(百濟記)』에는, “木滿致는 목라근자 (木羅斤資)가 新羅를 칠 때에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功으로 任那에서 전횡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貴國(日本)에 갔다가 돌아와 天朝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는데, 권세의 높기가 세상을 덮을 정도였다. 그러나 天朝 에서는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426년(応神 37년) 2월 초하루 아지사주(阿知使主)・도가사주(都加使主)를 오(吳)나라에 보내어 봉공녀(縫工女)를 구하게 하였다. 아지사주 (阿知使主)등은 高麗國을 지나서 吳나라로 가고자하여, 먼저 高麗에 도착하였으나 吳나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을 아는 사람을 高麗에 구하니, 高麗王은 구례파(久禮波)와 구례지(久禮志) 두 사람을 딸려 보내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말미 암아 吳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吳의 왕은 工女, 형원(兄媛)・제원 (弟媛)・오직(吳織)・ 혈직(穴織) 등 4명의 여자를 주었다.
※ 춘추전국시대 吳越의 吳나라는 기원전에 멸망했고 위촉오 시대의 吳나라는 280년에 멸망했으므로 이때 吳나라로 갔다 는 것은 뻥이다.
428년(応神 39年) 2월 百濟의 直支王이 누이 신제도원(新齊都媛)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신제도원(新齊都媛)은 7명의 여자를 이끌고 와서 귀화하였다.
※바로 앞에 ‘応神 25年에 백제(百濟)의 직지왕(直支王)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라고 했는데 応神 39年 2월 百濟의 直支王이 누이 신제도원(新齊都媛)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라고 되어 있으므로 잘못이다.
※신제도원이라는 여성이 전지왕이 아니라 비유왕의 누이이고, 일본 에 건너간 시기도 전지왕 때가 아니라 비유왕 때인데 일본서기의 편찬자가 잘못 기록했다고 가정을 한다면, 백제왕의 누이가 왜국의 왕실로 건너가서 그 곳 귀족들을 섬기거나 혼인을 하는 경우가 가능 했을까? 그 당시 백제와 왜의 밀착관계로 미루어 양쪽 왕실간에 혼인을 통한 외교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任那國: 금관가야 또는 가야연맹체의 異稱이다. 任那라는 말이 가장 먼저 보이는 우리나라의 자료는 廣開土王陵碑 (광개토왕릉비)인데 ‘任那加羅(임나가라)’라 하였고, 『三國史記(삼국 사기)』列傳(렬전)6 强首傳(강수전)에 의하면 강수가 ‘臣本任那加良人 (신본임나가량인)’이라하였다.한편鳳林寺眞境大師碑(봉림사진경대사비) 에는 “俗姓新金氏(속성신금씨) 其先任那王族(기선임나왕족) ··· 遠祖興 武大王(원조흥무대왕)”이라하였다.『日本書紀(일본서기)』 欽明 天皇 (흠명천황) 23년(562) 봄 정월조에 의하면, “통털어 말하면 임나 라하고, 따로 말하면 加羅國, 安羅國, 斯岐國(사기국)·多羅國,·卒麻國 古嵯國 (고차국)· 子他國(자타국)·散半下國(산반하국)·乞飡國(걸손국)· 稔禮國 (임례국)이니 합하면 10국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가야국의 명칭은 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加耶(가야)를 사용하 나, 각종 저술에서는 伽倻(가야), 伽耶(가야), 加羅(가라), 伽羅(가라), 迦羅 (가라), 呵羅(가라), 加良(가량), 駕洛(가락), 伽落(가락)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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