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부여가 흉노였을까?

청 설모 2022. 2. 8. 00:29

부여가 우흉노(훈족서부지역의 왕)였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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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씨는 동쪽으로는 발해의 바닷가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寇漫汗)에 이른다

부여(扶餘)는 그 땅이 예맥(獩貊)과 연결되어 있으니, 지금 북쪽 경계인 숙신의 땅이다

기언 제48권 속집 > 사방(四方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예맥국(濊貊國)은 지금 조선의 강원도(江原道)이다.

, 사기흉노전(匈奴傳)에는 이르기를, “묵특(冒頓)이 강성해져서 동쪽으로는 예맥(薉貊)

 조선(朝鮮)에 접하였다

 

부여도 예맥과 접하고 묵특의 훈족도 예맥과 접하고,,,먼가 좀 이상하다....

 

晉書肅愼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去扶餘可六十日東濱大海西接寇漫汗北極弱水廣袤數千里裨離國在肅愼氏國西北馬行二百日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一群國去莫汗又百五十日計去肅愼五萬餘里

진서에 숙신씨는 읍루라고 하는데 부여에서 60일거리이다.서쪽으로 구막한국에 접하고 북쪽으로 약수에 접하고 비려국은 숙신씨국에서 서북으로 말을 타고 2백일 가야하며 양운국은 비려국에서 말을 타고 50일을 가야하고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백일거리이다.숙신씨땅은 5만여리이다.

 

숙신은 부여의 속국이다..그렇다면 부여의 서쪽끝은 구막한국이고 부여라는 나라는 사방2천리가 아니라 동서로 5만리?

 

張掖郡故匈奴昆邪王地武帝太初元年開莽曰設屏。〔戶二萬四千三百五十二口八萬八千七百三十一縣十觻得千金渠西至樂涫入澤中羌谷水出羌中東北至居延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官式。〔昭武莽曰渠武刪丹桑欽以為道弱水自此西至酒泉合黎莽曰貫虜氐池莽曰否武屋蘭莽曰傳武。()〔都尉治澤索谷莽曰勒治。〔驪靬莽曰揭虜。〔番和農都尉治莽曰羅虜。〔居延居延澤在東北古文以為流沙都尉治莽曰居成。〔顯美

전한서

장액군은 옛날 훈족 곤야왕땅이다.현이 10개 있다.소무현,상흠현은 약수를 건너면 당도한다.려간현은 왕망이 갈노라고 했다.

 

후한서(後漢書)부여열전(夫餘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국은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挹婁),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였으며,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사방이

2000리이고, 본디 예의 땅이다. 처음에 북이 색리국왕(索離國王)의 아들인 동명(東明)

남쪽으로 도망쳐 엄호수(掩淲水)를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색리국왕은 우리 기록에 금와왕이다..금개구리를 닮았다하여 한자식 표현으로 금와왕인데..

이상하게 약수에 또다른 훈족 왕이 있었는데 역시 곤야왕이다..훈족우현왕이라고도 한다..

 

먼가 이상했다..그래서 자료를 찾아보왔더니......터키교과서에 진나라,한나라와 싸운 훈족을 부여훈제국이라고 표기한 것을 발견했다.

 

BÜYÜK HUN DEVLETİNİ KİM KURDU

부여훈국가 김구르두

터키말로 위대한 훈족국가 위대한 늑대

 

창업자는 두만선우라고 한다..즉 두만선우를 다른 말로 위대한 늑대,금구르두라고 불렀던 것이다.

금와왕을 우리말로 바꾸면 금개굴

두만강이 두만선우에게서 따온 이름이라는 말도 전해지는데...우연이 아닌듯하다..

 

그래서 연대를 추정해봤다.

두만선우는 기원전 209년에 아들인 묵특에게 살해당한다.

(두만은 묵특대신 후궁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고 묵특을 없애기 위해 월지국에 볼모로 보낸뒤 월지국을 침공한다...즉 월지국보고 자기 아들을 대신 죽여라 이뜻인 것이다..묵특은 탈출한뒤 공을 세워 좌현왕이 되고 후에 반란을 일으켜 부왕을 죽인다..)

 

주몽(일본기록에는 도모라고 하는데 호태왕비문에는 추모라고 한다..즉 원래 발음은 투모였을 것이다.. 추를 고대에는 투라고 발음했다.)은 기원전230년 고구려를 건국하고 31살때인 기원전221년 진시황중국통일떄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강대국으로 변신한다.(조선시대기록에 주몽이 북옥저를 멸망시킨 시기가 진시황중국통일시기라고 한다.)

조선시대기록에 따르면 주몽은 기원전 212년 죽고 금와왕은 기원전 217년에 죽는다.(금와왕이 죽고 5년뒤 주몽이 죽는다.)

 

금와왕은 두만선우처럼 후궁의 소생을 더 아껴서 왕으로 세우려 했고 다른 아들의 반란으로 권력을 내놓게 된다...

 

조선학자들이 주몽의 출생시기를 정확히 알았는지 약간 의문이 된다..그들도 막연하게 고구려가 강대국이 된 시점이 진시황중국통일떄와 같다라고 했을 뿐이다..

 

혹은 전한서의 내용대로 훈족왕인 묵특이 부여즉 북이를 굴복시키고 동호즉 선비와 오환을 쫓아내고 북방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하자.

부여가 묵특에게 굴복하기 전에 주몽은 탈출한 것이 되고 부여는 일개 속국이지 패권국가가 아니게 된다..

그런데 한나라기록에는 부여는 불패의 강대국이고.우리 기록에도 고구려 유리태왕이 부여를 두려워하여 우리는 작고 저 나라는 크다라고 했는데,,,,,그럼 먼가 앞뒤가 안맞다...게다가 약수를 훈족우현왕과 부여가 공유한다는게 말이 안되고..왕의 이름이 비슷한것도 말이 안된다..(금와라는 이름이 왕을 뜻하는 것이 된것으로 보인다..시저처럼)

 

사기흉노전(匈奴傳)에는 이르기를, “묵특(冒頓)이 강성해져서 동쪽으로는 예맥(薉貊)과 조선(朝鮮)에 접하였다

 

다물회(고토수복과 역사회복)에서 발췌함

https://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q/12?q=%EB%B6%80%EC%97%AC%ED%9B%88&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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