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김유신(金庾信)의 계보

청 설모 2020. 11. 12. 22:09

www.youtube.com/watch?v=BRa4HUvWIv8&t=1543s

choistube란 분의 동영상을 기록한 내용임.  

위 내용이 맞는지 틀린지 알수 없으나 앞으로 공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기록한 것임

 

「김유신의 계보」

삼국사기, 삼국유사 모두 김유신의 할아버지를 김무력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무력의 아들 김서현이 김유신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무력은 구형왕의 세째아들이고 구형왕은 금관가야국의
마지막 왕으로 신라 법흥왕 19년인 532년에 신라에 항복을 했는데 그때 세 왕자를 데리고 항복했다고 합니다.
세 왕자의 이름이 노종, 무덕, 무력이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세종, 무도, 무득이라고 이름을 좀 다르게 기록하고 있지만 어쨋거나 그 세 왕자중 마지막 아들인 세째아들
무력의 손자가 김유신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1권 기이 제1 김유신편에는 분명히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구형왕                                              구형왕
              ㅣ                                                  ㅣ
ㅣ------------ㅣ--------------ㅣ                ㅣ----------------ㅣ----------------ㅣ
노종(세종)  무덕(무도)   무력(무득)           노종(세종)       무덕(무도)       무력(무득)
                              ㅣ                ㅣ
                            김서현            솔지공
                              ㅣ                ㅣ
                            김유신            김서현-------  만명  
                                                       ㅣ
                                               ----------------------------
                                             김유신    흠순     보희     문희----  김춘추
                                                                              ㅣ
                                                                            문무왕

삼국유사 1권에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삼국유사 2권 기이(紀異) 제2 가락국기에는 좀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가 무력이 아니라 솔지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력의 손자가 아니라 구형왕의 첫째왕자인 노종의 아들이 솔지공이고 그 아들인 김서현이 김유신을 낳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저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솔지공이 들어있는 이 계보가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무력 -- 김서현 --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잘못된 것으로 이에따른 연구를 해서는 안되고 
「노종 -- 솔지공 -- 김서현 --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이 계보를 바탕으로 연구를 해야합니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2권 기이 제2 가락국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임오년 562년 9월  신라 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어켜 쳐들어오니 구형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당할수가 없었다. 이에 동생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 본국에 머물러 있게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을 (일본어로 읽어면 소치고우이다)등을 데리고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금관가야가 항복한 것은 532년으로 되어 있지만, 532년에도 항복한 것으로 되어있고 562년에도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이 부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차이가 있지만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으니 잘 봐두는 게 좋습니다)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이질금은 임금이다),  소치고우, 탈지(脫知)란 이름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562년은  잘못된 연도이지만 어쨋건 구형왕이 항복할때 동생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은 머물러 있으라 하고 아들인 왕자 3명과 손자 솔지공까지 데리고 신라에 항복해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가락국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661년 법민왕(문무왕을 말한다. 문무왕의 이름이 법민이다) 이 내린 조서에 
가야국 시조의 9대손인 구형왕(仇衡王)이 이나라(신라를 말한다)에 항복할때 데려온 世宗의 아들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잡간의 딸 문명(文明)황후(김유신의 누이 문희)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러므로 가야국의 시조들도 제사를 받들어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정리하면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항복할때 데려온 첫째왕자  世宗의 아들 솔지공의 아들 서운잡간(김서현)의 딸 문명황후(문희, 김유신의 누이)가 나를 낳았다라고 한 것입니다.
무력 -- 김서현 --김유신」 이 아닌, 이 계보가 올바르고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있는 인물중에서 생몰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사람은 김유신뿐입니다.  김유신의 증조부인 노종(세종)- 놀부의 경우 사망연도는 정확히 밝혀져 있습니다. 588년에 사망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진지왕때인 577년에 백제가 일선군을 침투하자 일선군에서 백제를 물리쳤다고 되어있습니다. 거기에는 이찬 세종이라고 이름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2년후인 579년 진평왕이 즉위하던 해에 상대등에 임명되었는데 여기에는 노리부라고 되어있습니다. 놀부를 연진발음하면 「놀부 -- 노르부 -- 노리부 -- 노례부」가 됩니다.
김유신은 595년에 출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595년에 태어나서 79세 되던 673년에 사망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532년 : 가야국 구형왕 신라에 항복                   김유신 (595 ~673년)
                                                       - 15세에 화랑
  577년 : 일선군에서 백제 격퇴(세종)                   - 629년 (35세) 중당 당주
  579년 : 상대등에 임명됨(노리부)                                     고구려 낭비성 공격에 참가함
  588년 노리부 사망                                    - 644년 (50세) 소판              
                                                                      백제 7성 격파, 가혜진을 개항함
                                                       - 660년 (60세) 백제 사비성 공격         
                                                    
김유신의 출생 595년과 노리부 사망 588년을 두고 추측해보면 솔지공, 김서현 두사람 정도가 들어가는 것이 적절합니다.  솔지공이 빠진 「무력 -- 김서현 -- 김유신」으로 이어진다면 세대간의 터울 차가 평균 35세 이상이 되어 별로 자연스럽지가 못합니다. 따라서 세종 -- 솔지공 -- 김서현 --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이 계보가 세대간의 나이상 터울로 보아도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일본 양국의 학자들은 무력에서 김서현 --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이 계보가 올바르다고 믿었고 거기에 따라서만 연구를 했습니다. 

솔지공이란 인물이 삼국유사에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솔지공이 바로 무력과 동일인물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올바른 역사를 알아낼수가 없었습니다. 솔지공이 들어간 이 계보가 올바르다는 것을 알아야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솔지공이 들어가 있는 이 계보에 따라서 역사학자들이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를 해야된다고 봅니다.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단지 차자(借字)표기와 이를 바탕으로 인명, 지명, 국명등에 대해서만 논할뿐이라고 여러차례 말해왔습니다. 이 동영상에서도 이름풀이 위주로만 설명할 것이고 솔지공이 들어간 이 계보가 맞는지는 여러분들이 앞으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1) 먼저 구형왕의 이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구형왕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표기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에는 김구해라고 되어있습니다.
금관국적 김구해가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항복해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책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편에는 구해를 구차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차휴, 구해, 구형 모두 동일한 이름을 표기한 것이고 동일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실제 이름은 쿠스라고 불려졌던 것을 각자 다른 한자로 모두 음차표기한 것입니다.  ㅎ 과 ㅅ 은 음이 쉽게 넘나듭니다( 음의 부전현상)
지금도 경상도에는  ㅎ, ㅅ음이 쉽게 넘나들고 있습니다.  
향나무/상나무,  힘/심, 혓바닥/셋바닥, 형님/성님, 형아/세이야
등으로 ㅎ과 ㅅ이 쉽게 넘나들고 있습니다.  쿠스, 쿠세이를 구형이라고 했는데 실제 이름은 쿠스, 쿠세이 정도....
     Kous
     구형왕(仇衡王) (521~532)
     김구해(金仇亥) -- 구차휴(仇次休)

한국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는데 일본에서는 어떻게 표현했는가요?
속일본기에는 구소왕(久素王)이라는 표기가 보입니다. 구소왕(久素王)은 백제 6대 구수왕과 사실상 똑같은 이름입니다. 하지만 동일인은 아닙니다. 이름이 같으니까 동일한 인물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아닙니다.  백제 6대 구수왕은 200년대의 인물이고 구소왕은 500년대 초반의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학자들이 이 구소왕을 백제 6대 구수왕이나 14대 근구수왕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연구를 해왔는데 그 잘못 짚은 것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가 될수 없었습니다,

속일본기에는 백제 구수왕이 아직기, 왕인을 보내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천자문은 중국 양나라 주흥사가 천자문을 만든 것이 500년대 초반입니다. 천자문이 500년대 초반에 나왔기때문에 500년 이전에는 천자문 책 자체가 없었으므로 천자문을 전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왕인박사가 천자문을 전해주었다면 500년대 초반 이후라야 하는 것입니다. 즉 525년 전후에 백제 구소왕 (큐우슈우 지역의 백제를 말합니다)이 즉 구형왕이 왕인박사를 파견하여 일본쪽에 천자문을 전해준 것입니다. 이 구소왕은 백제 6대 구수왕이나 근구수왕이 아니고 근초고왕때의 인물도 아닙니다.
즉 왕인을 근초고왕때의 인물로 학계에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완전히 잘못 짚은 것입니다. 한국, 일본 역사학계가 모두 헛짚고 있는 것입니다. 구소왕은 바로 구형왕이고 아직기와 왕인이 천자문을 전해준 것은 525년 전후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 왕인을 파견한 것은 525년 경의 일로 큐슈백제의 구소왕(=구형왕)이 
      큐슈에서 열도 중부쪽으로 보낸 것임

      구수왕(214~234)이나
      근초고왕(346~375)
      근구수왕(375~384)과는 관련이 없음

이 구소왕을 일본서기는 소대존(小碓尊)이라고 합니다. 소대(小碓)는 일본어로 코우스(こうす) 라고 읽습니다. 즉 코우스라고 하는 발음을 소대(小碓)라는 한자로 借字하여 표기한 것입니다. 일본식  借字입니다. 정확하게는 일본식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중간, 임라식, 또는 가야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소대존(小碓尊)은 일본서기의 경행기(景行紀)에 나오는데  景行天皇의 아들이 소대존입니다. 사실은 이 계보가 맞지않습니다. 일본서기는 연도도 무시하고, 계보도 무시하고 주석도 무시하고 보아야됩니다. 景行天皇의 아들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전혀 별개의 인물입니다. 소대존(小碓尊)을 일본무존(日本武尊)이라고도 한다고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일본무존(소대존, 구소왕, 구형왕)은 천황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천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 활약상이 정말 돗보이는 인물이지만 천황의 계보에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서른살에 죽었기때문이라고 기록하여, 서른살에 요절했기때문에 천황에 들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신라에 항복했기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천황의 계보에서는 누락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구형왕, 구해, 구차휴..
       Kous
      구형왕(仇衡王) (521~532)
      김구해(金仇亥) -- 구차휴(仇次休)

      구소왕(久素王)
      소대존(小碓尊) = 코우스(こうす)
      일본무존(日本武尊)


이 모두가 동일한 인물, 구형왕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름에서 구소왕이 백제의 귀수왕, 근구수왕과 동일한 인물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借字표기를 제대로 모르면 그런 잘못된 판단때문에 즉 구수왕을 백제의 6대 귀수왕이나 근구수와 동일한 인물로 잘못 착각하고 연구를 하면 제대로 된 연구를 할수가 없습니다.  올바른 역사파악이 불가능합니다. 借字표기, 그리고 인명, 지명, 국명을 연구해야 하는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쪽 기록에서 나오는 구소왕과 일본무존, 소대존이 바로 구형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연구해야 올바른 역사적 진실을 파악할수 있을 것입니다.

(2) 쿠오스, 소대존, 일본무존 즉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할때 신라에 데려온 세아들중 첫째왕자 노종(세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노종(세종)은 놀부란 이름을 표기한 것입니다. 흥부와 놀부할때 그 놀부입니다. 이 놀부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단양적성비, 마운령비, 황초령비같은 비석등에 여러가지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부 -- 노리부 -- 내례부 -- 내부 -- 노종 -- 세종」 , 모두 동일한 인물을 표기한 것인데 이 속에는 音借표기한 것도 있고, 訓借, 재내훈차한 표기, 그리고 사훈차표기한 것도 있습니다. 이 借字방식에는 '놀부와 노리코'란 책에서 상술한 바가 있었기때문에 여기서는 일일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인물 놀부라는 이름을 표기한 것이라는 것 까지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일본의 고사기에는 김파진한기무(金波鎭旱紀武)라는 인물의 이름이 실려있습니다.
윤공천황이 병에 걸렸을때 신라의 유명한 의사를 초빙해 낫게했다고 되어 있는데 똑같은 내용이 일본서기에도 실려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이름은 없습니다.  신라의 유명한 의사가 와서 병을 고쳤다는 내용만 나올뿐입니다. 고사기에 실려있는 이 파진한기무의 파진한은 파진찬을 말합니다. 해찬, 또는 해칸, 파진칸  이것은 신라 17관등 중에서 제4위 관등의 이름입니다. 제4위 관등을 파진찬이라고도 합니다. 관등명을 뺀 김기무(金紀武)가 이름입니다.  紀武를 일본어로 읽으면 노리부(のりぶ)입니다. 
       Norbu
       노부(奴夫)
       노리부(弩里夫)
       내례부(內禮夫)
       내부(內夫)
       노종(奴宗)
       세종(世宗)

       김파진한기무(金波鎭旱紀武)    紀武=노리부 (のりぶ)

이 노리부가 신라에 항복한 이후 신라인으로 편입한 다음에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서 파진찬, 잡찬, 이찬, 그리고 상대등까지 높이 올라가게 되는데 노리부가 파진찬 벼슬에 있었던 시기는 545년에서 550년 전후입니다. 그러니까 윤공천황이 400년 초반에 재위에 있었던 천황으로 되어 있지만 연도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윤공천황이 400년대 초반이 아니라 500년대 중반에 실존했던 인물이거나 아니면, 500년도에 있었던 일을 100~150년 정도 끌어 당겨서 연도를 엉터리로 기술했거나 둘중에 하나입니다. 다시말해 인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파악하므로써 엉망으로 뒤죽박죽되어 있는 일본서기의 연도와 천황계보등을 바로 잡을수가 있을 것이란 이야기가 됩니다.

(3) 다음은 구형왕의 손자이자 놀부의 아들인 솔지공(率支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솔지공(率支公)은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삼국유사에만 나오는데 졸지공(卒支公), 혹은 솔우공(率友公)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졸지공, 솔우공으로 되어 있는데 友는 支를 잘못 쓴 것으로 보입니다 (迷影字)

                       仇衡王
                         ㅣ
       ㅣ----------------ㅣ----------------ㅣ
      奴宗(世宗)     武德(茂刀)       武力(茂得)
       ㅣ
      率支公
       ㅣ
      金舒玄-------  萬明  
              ㅣ
         ----------------------------
      金庾信    欽淳     寶姬     文姬----  金春秋
                                       ㅣ
                                     文武王

   ※ 率支公(솔지공)  --  率友公(솔우공)
      卒支公(졸지공)

이 솔지공은 구형왕과 그 아버지 또는 삼촌들에 비해 큐우슈우 지역에서 주로 많이 활동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구형왕과 세종등은 한반도에서 주로 활동했다면 이 솔지공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즉 큐우슈우로 건너가서 그쪽에서 주로 활동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별로 없고 일본서기에 기록이 많이 남은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본서기에는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이란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습진언이 바로  일본어로  소츠히코입니다.  갈성 습진언(葛城襲津彦)의 갈성(葛城)은 일본어로 카츠라키라고 하지만 올바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원래는 가락기라고 읽습니다. 가야를 갈, 가라, 가야, 가락기라고 읽습니다. 갈을 연진발음하면 가라, 가야, 가락 -- 가야를 가락국이라고 하죠. 갈-가락은 부전현상(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숟갈/숟가락, 머리칼/머리카락, 칼국수/가락국수등의 예를 생각하면 쉽게 짐작할수 있습니다. 가락을 연진발음하면 가락기가 됩니다. 가락기인데 갈을 일본에서 갓으로 읽으니까 카츠라키로 읽게 됩니다. 본래는 가락기입니다. 

다시말해서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은 가락국 왕자 소츠히코 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소츠히코를 일본어로 다르게 쓰면 증도비고(曽都毘古), 증두일고( 曽頭日古), 또 사지비궤( 沙至比跪) (백제기)라는 표기도 나옵니다.  일본서기, 신공기 신공 62년조에 보면, 백제기를 인용해서 사지비궤라는 이름을 써 놓았는데 똑같은 습진언을 말합니다. 
이 사지비궤라는 표기는 신공 62년 (262년입니다. 그 연도는 잘못되었습니다.  임오년입니다)  신공 62년 임오년에 신라가 조공을 하지않아서 습진언을 보내 신라를 치게했는데 습진언 즉 소츠히코는 신라는 안 치고 도리어 가야를 쳐서 멸망시켰다고 되어있습니다. 신공 62년이 262년으로 되어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562년  임오년에 있었던 일을 300년이나 끌어올려 262년의 일인 것처럼 연대를 엉터리로 기술해 놓았습니다. 실제로 임오년인데  262년이 아니라 562년인 것입니다.

       率支公(솔지공)  --  率友公(솔우공)
       卒支公(졸지공)

       襲津彦(습진언)  -- 소츠히코 (そつひこ)
       曽都毘古(증도비고)--- 사치히코  ( さちひこ )
       曽頭日古(증두일고)
       沙至比跪(사지비궤)   <백제기>

       葛城 (갈성)

562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신라 이사부가 가야를 평정한 때입니다. 가야가 어디 있었느냐 하면 큐우슈우 지역에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는  562년 임오년에 가야가 배반해 이사부를 보내 평정하였다. 그때 15세 화랑 사다함이 가장 먼저 선두에 서서 전담문을 돌파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똑같은 562년 임오년의 기록이 (신공기 말고) 흠명기 흠명천황 23년조에 신라가 쳐서 멸망시킨 임나관가(任那官家) 10국을 쳐서 멸망시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라가 쳐서 멸망시킨 임나관가 10개국은 큐우슈우 지역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보면 신공 62년 백제기를 인용한 사지비궤가 신라를 치지않고 거꾸로 가야를 쳐서 멸망시켰다는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수 있을뿐 아니라 그 연도가 562년 이란 사실까지 알수 있습니다.

   ※ 가야국, 가락국 -- 큐우슈우 가라쓰(唐津)시
      임나국, 말로국 -- 큐우슈우 마쓰우라(松浦)시

      임나관가 10국 --안라(長門), 걸손(狗留孫), 자타(자田), 가라(唐津), 산반하(早良), 임례(伊萬里),  다라(多良)
                          고차(    ) ,  사이기(左伯),  졸마(薩摩) 

일본서기 신대기에는 천진언(天津彦),  천치언(天稚彦)이란 이름이 나옵니다.  天을 일본어로 아마라고 읽는다고 고사기에는 주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석을 그대로 믿으면 안됩니다. 일본어로 아마라고 읽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고대 한국어에서는 하늘, 또는 하늘처럼 높은 것을 '솔'이라고 했습니다(솔개). 그것을 天으로 借字하여 적은 것입니다.(音借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솔직고 즉 소직코를 적은 것입니다. 똑같은 이름입니다.  천진언, 천치언, 천일창, 소치코, 동일한 이름을 이렇게 표기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동일한 이름, 동일한 인물 솔지공( 率支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있는 이 천일창은 저의 억측일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연구가 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천일창도 동일한 인물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천일창의 표기를 분석하면, 천일은 솔히입니다. 창은, 한국어로 창은 송곳입니다. 송곳의 고어가 솔곳입니다.  솔곳은 백제 초고왕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하늘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솔곳, 솔씨를  일본에서는 소코라고 하는데 지금은 후코라고 하죠, 이 솔씨, 솔곳과 앞에나온 천일창과는  ('천일창, 초고왕의 이름풀이'는 ebook <계백과 김유신> ebook <임나의 인명>을  참고.) 약간 다르지만 저는 같은 인물을 가리킬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봅니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이 천일창도 솔지공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솔지공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率支公(솔지공)  --  率友公(솔우공)
      卒支公(졸지공)

      襲津彦(습진언)  -- 소츠히코 (そつひこ)
      曽都毘古(증도비고) --- 사치히코  ( さちひこ )
      曽頭日古(증두일고)
      沙至比跪(사지비궤)   <백제기>
 
      天津彦(천진언)
      天稚彦(천치언)
      天日槍(천일창)
  
천일창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일본서기 수인천황(垂仁天皇) 3년조에 신라왕자 천일창이 왔다고 적혀있습니다.  가락국의 가락왕자가 아니라 신라왕자라고 되어있습니다.  할아버지 구형왕이 신라에게 항복하고 아버지와 삼촌들은 한반도에서 주로 활동하는데 이 왕자는 신라로 편입되었으므로 신라왕자가 됩니다. 신라왕자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垂仁天皇 의 垂仁은 타르어지인 것입니다. 垂→ 타루, 仁→ 어지, 즉 구형왕의 동생인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의 탈지(脫知)와 垂仁天皇의 垂仁은 동일한 타르어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인천황은 탈지이질금과 동일한 인물이고 500년대 중반의 인물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11대 垂仁天皇은 기원전 29년부터 서기 70년 사이에 재위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무려 500년도 더 넘게 과거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연도와 계보와 주석은 모두 엉망입니다.  계체천황(継体天皇) 이후는 신뢰성이 높지만 계체천황(継体天皇) 이전의 조항들은 거의 믿을수가 없습니다.  垂仁天皇 역시 기원전 인물이 아니고 500년 중반의 인물인데  500년을 과거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근데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느냐? 바로 인명을 借字표기를 통해서 고대인의 이름을 올바르게 파악함으로써 그 사실을 깨달을수 있는 것입니다. 借字표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인명, 지명, 국명을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를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4) 다음은 김서현(金舒玄)의 이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서현(金舒玄)의 이름은 서운(庶云) 또는 소연(逍衍)이라고 읽기도 합니다.  서현(舒玄), 서운(庶云), 소연(逍衍) 이 이름은 선, 슨 (surn)정도로 불렀던 이름을 音借한 표기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그러나 金舒玄 이름이 정확히 무슨 뜻을 지닌 무슨 말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김서현의 이름풀이에 대해서는 설명을 보류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서현이 만명(萬明)과 야합하여  유신(庾信)을 낳았다는 것에 대해 삼국사기 기록에는 입종(立宗)아들 숙흘종(淑訖宗), 숙흘종(淑訖宗)의 딸 만명(萬明)이 길에서 金舒玄과 만나서 중매도 없이 도망가서 김유신을 낳았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萬明이 金舒玄을 따라서 도망간 곳이 어디냐? 金舒玄이 만노군 대수(萬弩郡 大守)(= 태수)로 부임할때 집에서 몰래 도망쳐서 따라 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만노군(萬弩郡 )이 어디냐? 삼국사기에는 이 만노군(萬弩郡)이 충북 진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노군과 만노군은 같으며  충북 진천을 가리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만노군(萬弩郡)을 충북 진천이라 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삼국사기가 범한 크나큰 오류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삼국사기에 이렇게 잘못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이 엉뚱한 연구를 할수밖에 없었고  저 역시도 그 기록을 그대로 믿다보니까 오랫동안 방향을 못잡고  헤멜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노군(萬弩郡)은 충북 진천이 아니고 큐우슈우시 북부 현재의 맛츠우라(松浦)시라고 보면 됩니다.
562년에 신라의 이사부와 사다함이 큐우슈우 지역을 정벌합니다. 이사부의 2차정벌.  
큐우슈우 지역의 임라관가(任那官家)를 모두 쳐서 멸망시키고 신라의 강역에 편입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말로국(末盧國, 즉 임나국(任那國)을 멸망시키고, 그 末盧國이 있던 곳이 바로 신라의 강역에 포함되어서 만노군(萬弩郡)으로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萬弩郡이  末盧國이 있던 마쓰우라(松浦)를 가리킨다고 99% 확신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확신은 오로지 借字표기와 그를 바탕으로 한 인명, 지명, 국명분석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유물, 유적의 발견이나 그 외 다른 기록과의 비교검토를 통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종합적인 판단 즉 저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검증해주실 분들은 바로 여러분들이라 할 것입니다.

 (5) 이제 김유신(金庾信)이란 이름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김유신의 유신(庾信)은 무엇을 쓴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갈남, 갈넘, 클놈, 지금 현대 한국어로 말하면 클놈(큰놈)을 뜻하는 갈낢을 유신(庾信)으로 차자(借字)하여 적은 것입니다. 유신(庾信)의 한자 유(庾)는 창고를 말합니다. 우리말의 골입니다. 골방할때 골, 한국어로는 골이고 일본어로는 쿠라(くら,倉)라고 합니다. 창(倉), 고(庫) 유(庾)들을 모두 일본어로 쿠라(くら)라고 합니다.  한자 信은 일본의 인명에서 노부(のぶ)라고 되어있습니다. 信子를 일본어로 노부코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클람, 일본어로 읽으면 쿠라노부(くらのぶ)란 이름을 유신(庾信)이란 한자로 借字하여 표기한 것입니다. 김유신의 실제 이름을 글람으로 추정한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추남(楸南)이란 고구려 점쟁이 이야기 때문입니다. 글자 추(楸)는 가래 추(楸)자입니다. 즉 가래남이란 이름을 추남(楸南)이라고 借字하여 적은 것입니다.

상자속의 쥐가 몇마리인지 알아맟추는 그 고구려 점쟁이 추남(楸南)에 관한 설화는 김유신의 실제 이름이 글남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됩니다,  庾信 그리고 楸南 둘다 글남이란 같은 이름을 표기한 것입니다.  같은 이름을 한자만 달리하여 적은 것입니다. 이에관한 자세한 내용은 인명풀이 '계백과 김유신'이란 책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정리하면, 쿠스, 구해, 구차유, 금관가야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562년에 신라에 항복하면서 세왕자를 데리고 항복하였는데 그 왕자중에 첫째 노종(세종) = 놀부의 아들 솔지공이 있었습니다.  562년 이사부와 사다함이 큐우슈우를 정벌한 562년 이후에 이 솔지공이 낳은 아들이 김서현이고,  김서현이  만노군 대수로 부임하면서  만명과 야합하여 함께 가서 595년에 낳은 아들이 김유신입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문명황후)가 김춘추와 결혼하여 문무왕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이 계보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짧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올바르다고 저는 믿습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모두 김유신의 계보에서 솔지공의 존재가치를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신라의 역사에서 큐우슈우 지역을 다스렸던 흔적을 싸그리 지워버린 바로 이러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사기의 이러한 과오는 연도, 계보, 주석 모두가 엉망인 일본서기의 오류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 심각하다고 볼수있습니다. 500년대 継体紀 이전의 천황계는 신뢰도가 아주 낮은 편이지만 일본서기를 연구할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삼국사기에도 오류가 있고 일본서기에도 오류가 있습니다.

고대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는 것도 우리가 할수밖에 없고 찾아내서 바로잡는 것도 우리가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 찾아내는 방법중 하나가 借字표기를 바탕으로 한 인명, 지명, 국명의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예를들자면 여기 있는 
구형왕 쿠스는 소대존, 일본무존과 이름이 같습니다.  일본무존 즉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면서 동생 탈지이질금은 본국에 남아 있으라고 했습니다. 탈지이질금의 탈지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垂仁天皇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垂仁이 타루어지를 표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지공은 일본서기 垂仁天皇의 3년조에 나오는 천일창과 이름이 똑같습니다. 솔지공과 천일창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렇다면 垂仁天皇은 기원전 인물이 아니고 500년대 중반의 인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의 이런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앞으로 여러분들이 연구해서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垂仁天皇이 500년이나 앞당겨져 있는 일본서기의 기록연도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垂仁天皇은 500년대 중반의 인물 탈지이질금이고, 신라왕자 천일창은 김유신의 할아버지 구형왕의 손자 솔지공(葛城襲津彦)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솔지공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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