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내용은 (http://asianews.seesaa.net/article/463124249.html 에서 복사해 왔음)
【일본 천황의 뿌리】천자(天子)라는 호칭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前略
일본은 천황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운 나머지 1915년 6월 29일 조선총독부 경무령을 포고하여 치안상의 이유로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의 족보발행을 금지시켰다. 285개나 되는 김씨 본관 중 하나에 불과한 김해김씨의 족보가 왜 '일본의 국가안전과 사회공공의 질서를 해친다'는 것일까? 그 열쇠가 김해김씨의 족보에 있다.
1864년에 발행된 김해김씨의 족보에는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에게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부터 열째까지의 일곱 아들은 세상이 되어가는 꼴을 비관하여 구름을 타고 나라를 떠났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일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일본이라 불리는 나라를 건국한 황실의 시조는 하늘 나라에서 구름을 타고 규슈에 있는 다카치호(高千穗)의 '구지후루'에 내려왔다"고 쓰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역사 교과서에서 "천손인 천황이 BC660년 2월10일 규슈 다카치호(高千穗)에 강림했다"고 가르치고 이 날을 건국기념일로 정했다. 그리고 "다카치호 정상에서 내려오는 천손을 모두 엎드려 맞이했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천황이 외부에서 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다카치호의 '구지후루(1574m)'는 바로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구지부리(龜旨峰)가 소리변화된 것이다. 그리고 다카치호 옆 '가라쿠니다께(韓國岳·1700m)'의 자락에 있었던 에미노구마(笑熊), 도미노구마(富熊), 시시노구마(獅子熊), 호시노구마(星熊), 히라구마(平熊), 고이노구마(戀熊), 구마사키(熊崎) 등 '일곱 곰의 마을'은 바로 '일곱 명의 금(김)씨가 살던 마을'로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살던 곳이다.
가고시마켄(鹿児島県) 시가쿠칸(志學館) 대학의 후지나미 미치히로(藤浪三千尋) 명예교수의 말에 의하면 '일곱 곰의 마을'은 "하나의 마을이 아니라 가고시마켄 고쿠후시(國分市=現·霧島市)에 산재해 있던 일곱 고을인데,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 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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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의 姓이 金, 금, 곰등으로 불려지다가 음독을 할때는 金으로, 훈독을 할때는 熊으로 썼던것 같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熊襲(구마소, くまそ)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대 야마토정권에 저항했던 족속중에 熊襲族이 있었는데 그들의 거주지가 위에서 말한 곰마을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가야왕족이 고대 야마토정권을 세운 것으로 생각했는데 경행천황과 중애천황이 熊襲를 정벌했다면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혼란스러움
熊襲族
熊襲(구마소 くまそ)는、日本의 記紀神話에 등장하는、현재의 九州 南部지방에 있었던 襲国(소노구니ソノクニ)에 본거지를 두고、야마토 왕권에 저항했다고 하는 사람들. 또는 지역명 자체를 총칭하는 것이다.
古事記에서는 熊曾、日本書紀에서는 熊襲、筑前国風土記에서는 球磨囎唹등으로 표기되었다 (위키피데아)
다음은 熊襲族를 검색하다 http://kamodoku.dee.cc/kumaso-hayato-4.html 에서 발췌한 내용들임
「景行天皇紀 」(景行紀12年7月条)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熊襲는、「朝貢하지 않아서」
다음 8月에 天皇이 친히 정벌하기 위해 九州로 건너갔지만、1회만에 끝내지 못하고 2번째에는
야마토 다케루(ヤマトタケル)를 보내 겨우 진압했다고 한다(同27年8月条)
다음에는 다케루의 차남인 仲哀天皇의 시대에도 「朝貢하지 않아서」 정벌을 위해 九州島로 간다.
그러나 神功皇后에 빙의한 神이 熊襲말고, 半島의 新羅를 토벌하라고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神罰을 받아 죽고만다 ( 실제로는 熊襲와의 전투에서 패하여 죽었을 것이다)
※ 神功皇后紀의 記事를 마지막으로 熊襲은 書紀의 역사로부터 사라진다.
그리고 皇后자신이 新羅를 정벌한 직후에 호무다와케「ホムタワケ」라는 아들을 낳는데 곧, 応神天皇이다
이것으로부터 応神天皇이야말로 실제로는 熊襲라고 하는 論者가 상당히 많다.
早稲田大学의 水野祐교수는 江上波夫교수의 祟神天皇 騎馬民族説을 이어받아
東征한 것은 祟神天皇이 아니라 5代後의 応神天皇으로서、이것이 南九州 熊襲族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인 仁徳天皇의 시대를「新王朝」라고 이름붙혔다.
熊襲는 魏志倭人伝에 나오는「狗奴国」을 말하며、일찌기 後漢에 사절을 보내어 金印을 받아와서 九州 北岸에 있덨던 奴国이 南部 九州로 이동하여 발전한 나라이다라고 한다.
※(推古女帝가 蘇我氏에게 「馬이라면 日向의 말(駒)」이라고 한 것과
「肥前国風土記」値嘉嶋条에 있는 「隼人과 닮은 白水郎(あま)이 牛、馬을 대량으로 키우고, 騎射(말타고 활을 쏘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부분 -- (그전에는 일본에 말이 없었다)
古事記에서 나라 탄생의 段에 따르면 九州島에는 4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①「白日別(筑紫国)」-- 조선半島의 「新羅」를 가리킴- 밑에 자세히 설명
②「豊日別(豊国)」--豊前・豊後를 합친 영역. 히미코 여왕의 뒤를 이은 토요(トヨ)가 동쪽으로 도망쳐 망명정권을
세운 것이며, 그것이 바로 토요국(トヨ国=豊国)일 것이다
③「建日向日豊久士比泥別(肥前・筑後国)」: 肥国=邪馬台国 -- 「熊曽国(建日)의 맞은편에 있으며、빛나는 大王 (クシヒ)의 分国」
④「建日別(熊襲国)」--오늘날의 熊本県과 鹿児島、宮崎 両県을 합친 거대한 영역 肥後国과 日向国(단지 옛 日向)을
포함한 九州 南半分의 대국이었다
※ 白日別 (시라히와케 シラヒワケ)
박혁거세왕때의 瓢公, 석탈해가 바다를 건너온 航海系 倭人과 연관이 있다.
「魏志韓人伝」에 의하면 3세기의 倭人伝시대、半島의 弁韓은 물론이고 辰韓、馬韓에도 상당한 수의 倭人、그것도
文身을 한 海人系의 倭人이 있었으므로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4세기에도 있었다고 해도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魏志韓人伝」에 의하면、(景初年間=237~239年)魏가 公孫氏가 열었던 帯方郡을 접수할때、
辰韓12국 가운데 8국을 가까운 帯方郡이 아닌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楽浪郡에 속하게 했다고 한다.
属한다고 하는 것은 朝貢이나 貢納을 받치거나、労役을 해야하는 것이므로、가까운 帯方郡이라면 또 모르겠거와
훨씬 멀리있는 楽浪郡은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분노한 辰韓国들은 帯方郡과 일을 꾸며, 당시 帯方郡長官
弓遵을 살해했다. 이에대해 魏는 지원군을 증강시켜 「帯方郡과 楽浪郡 二郡」과 함께 韓을 멸망시킨다」라고 표현한
것처럼、韓의 땅을 유린했다(正始年間=240~248年).
이때 辰韓을 중심으로 하여 九州島에 도망 혹은 망명하여、거기서 辰韓을 중심으로 하여 망명정권이 수립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倭人 그중에서도 海人系 倭人이 이를 갈고 분해했을 것이다. 이때 옹립된 왕이 韓人伝을 통독해보면
대륙의 殷王朝로부터 갈라져나온 「箕子」의 후예였을 것이다.
결국 반도의 남부에는 海人系 倭人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魏가 帯方郡을 직접 지배하자 (三韓에 있던 馬韓 55
国、弁韓 13国、辰韓 13国중에서)이에 순종하는 諸国도 있었지만、箕子의 王統이 통치하는 辰韓은 위에서 말한바
와같이 혹독한 처우에 반항하다 패하여 九州島로 도망쳐、倭人의 지원으로 힘들게 왕통을 이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九州북부의 筑紫国은 半島시대의 辰韓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던 나라라고 하는 의미로 「白日別」로 불렸던 것이다
(半島에 남은자들의 정권이 후일의 新羅가 되었다).
筑紫国이 白日別로 불린 것은、3세기에 발생했던 朝鮮半島 남부(三韓)에 일어났던 戦乱때문에 이동해온 辰韓王을
옹립하여 倭人국가 연합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狗奴는 熊에 다름 아니다. 또 投馬国의 投馬는「襲津間(ソツマ=そのくに)로부터의 転訛하면서「ソ」가 탈락한 것이다. 즉 狗奴国과 投馬国이 합쳐 熊襲国이 되었다
『先代旧事本紀』에는
「筑紫島(九州)는 身하나에 四面을 가졌다고 말한다. 각 面에는 이름이 있어서
筑紫国을 白日別이라고 하고
豊国을 豊日別이라고 하며
肥国을 建日別이라고 하고. (오늘날의 佐賀県과 長崎県을 합친 영역)
日向国을 豊久士比泥別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熊襲国을 建日別이라고 한다.(오늘날의 熊本県・鹿児島県을 영역으로 하며 위의 肥国과 동일부족국)
5국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肥国과 熊襲国이 같은 「建日別」로 표기되어 있다.
建日向日豊久士比泥別라는 것은 「建日(熊襲国)에 맞서는、日豊かなる久士比(くしひ=奇日)의 泥(ね=根)別(わけ=갈래)」라고 해석한다. 「熊襲国을 맞상대하고 있는 나라이며、빛나는 大王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나라라고 하는 거싱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이야말로 九州邪馬台国이었다.
私見으로、이 邪馬台国은 九州 狗奴国에 의해 병합되어 히미코 여왕의 뒤를 이은 토요(トヨ)가 동쪽으로 도망쳐 망명정권을 세운 것이며, 그것이 바로 토요국(トヨ国=豊国)일 것이다.
熊襲(구마소)는 3세기의 中国史書「魏志倭人伝」가운데서〈狗奴国〉과 〈投馬国〉을 합친 九州남부의 부족을 가리키며 이것을 일본「古事記」에서는〈建日別〉(熊曽国의 異称)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熊襲族에는 2種이 있어서、「熊国」는 오늘날 대략 熊本県을 영역으로 하고, 「襲国」은 대략 오늘날의 宮崎・鹿児島県을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 倭人伝에서의 〈投馬国〉은「襲人」의 발음「소시마 ソツマ(襲의国)」의 중국식(漢字)表記였다. 3세기의 古日向에 投馬国이 있었다.
隼人은, 7세기 후반 이후 중앙집권화 과정에서、「南方을 지키는 鳥=朱雀」의 日本版으로서「隼」을 지정하는 것으로서, 熊襲의 일파・投馬国(襲人)의 후계자로서 南九州에 살아왔던 부족을 「隼人」이라고 불렀다.
※큐우슈우는 九州를 말하며 과거 9개의 나라가 있었음을 말한다
筑紫国에서 갈라진 筑前国, 筑後国,
豊国에서 갈라진 豊前国, 豊後国,
肥国에서 갈라진 肥前国, 肥後国,
熊襲国에서 갈라진 日向國, 大隅國, 薩摩國 9국을 말한다.
※ 김씨가 곰토템과 연관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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