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6GoGqvsa45k&t=2s
choistube의 동영상에서 기록
日本書記와 廣開土王碑 地名대조
고정관념을 깨라
1.倭 ≠ 야마토(日本) ---- 倭는 야마토가 아닙니다.
倭는 와 wa/war/wat 와/왈/ 왓으로 구전되는 말을 倭로 音借한 것으로 倭가 모두 야마토인 것은 아닙니다
다르게는 和(화), 和多(화다), 波多(파다)등으로 적었는데 이 倭는 원시어소 불/bur 에서 비롯된 것으로
bur에서 구전되고 분화된 밭:하타(はた, 畑) --- 제주방언 왙,(왙에서 받침소리가 약해지면 와가 됩니다)
바다: 와다(ゎた, 海)
倭와 日本은 다릅니다. 倭라고 써놓고 야마토라고 읽는것은 新羅라고 써놓고 고려라고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입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倭人在帶方 東南大海之中 이라고 적혀있습니다
帶方은 한반도를 말합니다.
倭人-- 왜 人자를 붙혔을까? 다른 국가이름에는 人자를 붙히지 않았습니다. 선비, 오환, 동이, 한(마한, 진한, 변한)
에는 人을 안붙혔습니다. 왜 倭에만 人을 붙혔을까? 이것은 倭國사람이란 뜻이 아니고 倭人자체가 나라이름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을 일본어로 히토(ひと)라고 합니다. 본래의 국명이 와히토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2. 언어권의 고정관념
한국어권 일본어권을 구분하는 것은 지금 현재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고,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어가 서로 비슷비슷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현재의 방언처럼). 일본도 큐우슈우
중부, 동부의 언어가 차이가 났을 것입니다. 가까운 지역의 언어가 더 비슷했을 것입니다. 즉 큐우슈우 任那語 또는
倭語가 한반도 남부지방의 언어와 상당히 비슷했을 것입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나서 이후 고구려, 백제언어는 상당수 신라어에 흡수되고 일부는 소멸되어 갔을 것입니다.
임나어, 왜어도 전체 일본이 통합되고 난 뒤에는 중심지가 나라쪽이다보니 방언으로 그 지위가 밀려나고, 대부분은
일본어에 흡수되지만 그중 상당수는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큐우슈우지역의 고대 지명, 인명, 국명등은 일본어로
풀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어로 해독이 안되는 고대의 지명, 인명은 한국어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대표적인 것이 히젠(肥前), 가고시마(鹿兒島), 츠쿠시(筑紫)입니다. 일본인들이 원래 무슨
뜻인지 모르니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히젠(肥前),가고시마(鹿兒島),츠쿠시(筑紫)는 일본어의 사음훈차(似音訓借)가 아니고 한국어의 사음훈차(似音訓借)
입니다. 借字표기중에서도 音借, 訓借와는 달리 似音訓借는 언어권의 경계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됩니다.
큐우슈우지역이 한국어의 似音訓借라는 것은 여러가지를 시사합니다. 언어권의 경계를 지금의 국가경계를 기준으로
하지말고 이 언어가 서로 비슷했을수 있는 이쪽 지역이 모두 일본어로 되어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加羅 ≠ 任那 ---- 加羅는 任那가 아닙니다.
加羅는 가야라고도 하는데 고을 읍성국가를 가리키는 원시어소 굴/kur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원시어소 굴/kur 은
갈/걸/굴/귤/글/길/겔 등으로 구전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갈로 구전된 형태. 갈은 다시 종성자음 구전에서
갈/같/갓/(간)/감 등으로 구전이 됩니다.
갈의 형태로 구전된 말을 연진발음하면 가라가 됩니다. 가라를 음차표기하면 加羅가 됩니다.
갈을 연진발음하면서 받침소리를 약하게 하면 가야가 됩니다.
또 털/터럭, 쌀/싸락, 숟갈/숟가락과 같이 갈/가락으로 발음하기도 합니다. 갈과 가락의 발음을 넘나들었는데
이것을 音의 부전(浮轉)이라고 합니다.
(간)으로 구전된 말을 音借표기하면 간(干), 한(汗)으로 표기할수 있습니다. 또 다른 音借표기는 한(韓)-- 마한,
진한, 변한의 韓인데 가야와 같은 말입니다. 일본에서는 韓을 가라(から)라고 합니다. 고을 읍성국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임나가라 -- 임나국, 성산가라 -- 성산국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加羅와 任那를 같은 말이라고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는데 加羅와 任那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중국의 역사서에도 가라와 임나를 따로, 다른 나라로 표기한 것이 더러 있습니다.
중국의 송서 이만열전에 7국 --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 -- 왜, /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이렇게 가라와 임나를 전혀 다른 별개의 나라로 다루고 있습니다.
당나라 장초금이 쓴 「한원」이란 책에는 가라와 임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하여 가라와 임나를 2개의 나라로
분명하게 구분했습니다.
임나는 미마나로 적은 것이 아닙니다. 미마나는 일본인들이 임나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원래는 한국어로 '맡라'
라는 나라를 사음훈차하여 任那라고 적은 것입니다. 任(맡)의 사음훈차표기. '맡라'는 말로국, 말라현(末羅縣)으로
사음훈차한 것이고 지금의 큐우슈우지역 송포(松浦, 마츠우라)를 말합니다.
가라가 임나라는 고정관념을 떨쳐내기 바랍니다.
임나는 경북 고령, 경남 김해, 대마도 등으로 알고 있으나 큐우슈우 지역에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
筑紫國은 북큐우슈우 지방에 있으므로 거기서 북쪽으로 2천여리에 있다면 한반도 남부가 아니냐는 것..
북은 바다로 막혀있고 鷄林의 서남쪽에 있다면 북이 바다로 막혀 있으므로 대마도가 아니냐?
去는 갈去입니다. 떨어질 거리 距자가 아닙니다.
我去美國 이라면 나는 미국으로 간다입니다. 나는 미국으로부터 떨어져있다가 아닙니다
글쓴이가 있는 나라지방에서 축자국으로 2천여리를 가면 거기가 任那라는 것입니다
임나는 대가야라는 견해에 대하여..
일본서기에 소나갈질지라는 임나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 임나인 소나갈질지가 '나는 오호가라에서 왔고, 왕자인데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이라고 했습니다. 돌아갈때 천황이 너의 나라 이름을 미마나로 고치라고 했습니다.
蘇那曷叱智 (소나갈질지)
都怒我阿羅斯等 (도노아아라사등)
于斯岐阿利叱智干岐 (우사기아리질지간지)
都奴加阿羅志 (도노가아라지)
都怒何阿羅志止 (도노가아라지지)
都怒賀阿羅斯止 (도노가아라사지)
모두 같은 이름입니다. 아라지는 '알지', '을지'와 같은 말로 큰 인물이란 뜻입니다.
도노아라사등 -- 똘똘하다. 똑똑하다 --- 한꺼번에 표기하면 -- 똙/ 닭
너르다, 넉넉하다 --- " -- 널/넉 -- 넑 낡
똘똘하고 똑똑하고 마음이 너르고 넉넉한 큰 인물을 표기하면 '닭낡알지' 입니다.
'독녹알지'를 위의 여러가지로 音借하여 표기한 것입니다. '도노'를 일본에서는 '스'로 읽습니다 -- 소나갈질지
우사기아리갈질지 -- 한국어 토끼를 일본어 우사기로 읽습니다. 원래 '닭낡알지'인데 일본인이 우사기알지로
사음훈차하여 표기한 것입니다. 이 이름이 일본어로는 잘 해독이 안되고 한국어로 잘 풀리는 것은 소나갈질지가
속했던 지방의 언어권이 한국어권역에 가까웠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임나인 소나갈질지는 의부가라, 오오가라라고 하는 나라의 왕자인데 일본천황이 미마나로 바꾸라고 했습니다.
오오가 大인데 오오가라는 대가야이고 미마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오가라는 한반도가 아닌 큐우슈우에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吳國이 몇번 나오는데 이 나라는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손권이 세운 吳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전후문맥상 큐우슈우에 있습니다. 지금의 구류미(久留未)구류메에 있습니다. 吳國은 오오가라 -- 구루메입니다. 왜그러냐하면,
원래 오오가라인데 くれ로 잘못 읽은 것입니다(--- 구루메) . 구레(くれ)로 읽었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오오가라를
고려(고구려)와 혼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착각하고 있었던 정황을 나타냅니다. 吳市도 있는데 구레시라고 했습니다. 구루메가 오오가라이고, 고령의 대가야는 지명이 완전히 다릅니다.
<경북 고령지방> <큐우슈우 지역>
古誕者 古冬藍 高靈 大=おお(오오) 意富加羅
고탄ㅁ- 고탄자 고당ㄻ 고닮 吳國 (くれ)
久留未
오오가라는 고령의 대가야와는 전혀 다른 지역입니다. 그래서 소나갈질지가 나오는 오오가라는 고령이 아니고
현재는 구루메라고 하는 미마나는 큐우슈우에 있는 것입니다.
任那= 금관가야라는 견해에 대하여
근거 : 진경대사 비문과 광개토대왕 비문
진경대사 비문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 寶月凌空塔碑)
............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
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考盃相道高莊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居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
진경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 속성은 김씨(金氏)다.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인데,
매번 이웃나라 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신라)의 원조(遠祖)인 흥무대왕(興武大王)에게 투항하였다.
먼 조상(遠祖)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 稟氣하고, 바다(鰈水) 騰精하여,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하였으며, 평생토록 ▨▨하여 두 적이 영원히 안정되고
안토군(安兎郡)의 사람들이 능히 세 조정을 받들어 멀리 진한(辰韓)의 풍속을 어루만졌다.".
여기서 진경대사의 선조가 임나왕족이라고 했는데, 임나왕족의 먼 조상이 흥무대왕 김유신이고,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증손자이다. 그러니까 결국 임나는 김유신의 증조부가 왕이었던
금관가야국을 말한다고 합니다.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초발성지(草拔聖枝)는 사람이름으로 소벌슭이의 이름을 음차한 것입니다. ㅊ이 →ㅅ으로 백제의 초고왕 →소고왕
흠춘 → 흠순
소벌슭이를 草拔聖枝로 음차하여 표기할수도 있지만 草薙剣(초치검), 天蠅劍(천승검)으로 표기할수도 있습니다.
일본 건국신화에는 草薙剣(초치검), 天蠅劍(천승검)과 같은 칼 이름이 나오는데 칼을 쓰루기(つるぎ)라고 하므로
초발성지(소벌슭이)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해석하자면, 그 선조는 임나왕족 소블성지인데 매번 이웃병사들로 괴로워하다가 我國의 遠祖인 김유신에게 투항하였습니다.
그후 오산(鼇山) 稟氣하고, 바다(鰈水) 騰精하여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했던 사람은 임나왕족 소벌슬기였습니다. 임나왕족인데 투항하여 신라왕실을 잘 받을었다는 뜻.
광개토왕 비문 신묘년조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羅 以爲臣民.
빈칸 ▨▨▨羅는 (任那加)羅입니다. 큐우슈우 지역이란 것을 알면 이 문장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해석>
百殘, 新羅는 옛날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조공해왔고(20년 전부터)
倭는 辛卯年부터 조공을 해왔다. 而는 앞의 문장을 생략한 것이므로 倭가 침입을 해왔다는 것이 아니고 조공을 해왔다
는 것이 됩니다. 而 = and
倭가 왜 조공을 해왔느냐? 광개토대왕이 바다를 건너 백잔, 임나가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기때문에 왜가 조공을
해온 것입니다. 침입을 해온 것입니다. 큐우슈우지역이 임나가라는 것을 알면 이렇게 쉽게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김해나 고령이 임나라는 고정관념이 박혀있었기때문에 제대로 해석이 안되는 것입니다.
404년(甲辰)의 기록 대조 -- 광개토왕비와 일본서기
크게 3단락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건국신화와 선대의 행적
2.광개토왕의 정복활동
3,수묘(守墓)관리
2.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중에서 백제, 왜를 정벌한 것을 뽑아보면
391년 (신묘년)
395년 패려토벌(백잔, 신라, 왜) 이때에 백잔, 신라, 왜를 토벌한 것이 아니고, 백잔, 신라는 옛날부터 조공을 해왔고
왜는 신묘년부터 조공을 해왔습니다.
396년 백잔을 토벌함. 백제를 대대적으로 수도까지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냄.
399년 백잔과 왜가 和通. 백제가 왜와 손을 잡고 반기를 들어 신라를 침입함
400년 경자년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5만의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함
404년 갑진년, 영락 14년. 왜가 대방계 침입. 대대적인 전투가 일어남.
400년 경자년, 404년 갑진년의 내용이 일본서기의 내용과 유사
일본서기는 내용과 연도에 오류가 많아 신뢰성이 낮습니다. 대표적인 오류를 보면,
웅신 25년 (294년) 백제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왕이 즉위했다.
응신 39년 (308년) 백제 직지왕이 누이 신제도원을 보냈다.
응신 25년 294년에 직지왕이 죽었다고 해놓고 39년 누이 신제도원을 보냈다고 써놓았습니다.
웅진39년에는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왕도 죽고 다음왕인 비유왕 2년일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하게 기록해 놓은 곳도 있습니다. 백제 성왕의 죽음과 같은 곳입니다.
연도도 삼국사기와 일치하고 내용도 더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조하는 것입니다.
400년 경자년, 404년 갑진년의 기록이 일본서기에는 웅략8년(464년) 이 간지가 틀린 것으로 보고 - 60년을 하면
404년으로 딱 들어맞습니다.
광개토왕 비문 404년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
광개토왕 즉위 10년 (영락 10년) 400년 경자년에 보,기병 5만을 보내신라를 구원하였다.
南居城에서 新羅城에 이르니 신라성 안에 倭가 가득차 있었다. 고구려군이 도착하니 □□로 물러갔다.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즉시 함락하였다.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일본서기에도 실려있습니다.
일본서기 404년 갑진년 고구려가 정예병사 100명을 보내 신라를 지키게 했다고 했습니다.
고구려군사가 머무른 성이 축족류성(筑足流城)이라고 했습니다. 임나왕이 주변에 여기저기 군사를 모아 고구려군과
대항하여 10 여일 싸워 고구려군을 크게 무찔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일본서기를 보면 신라(시라기)가 막연히 일본 서쪽에
여기저기 흩어져 존재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림은 경주쪽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그냥 신라라고 하면 어딘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계림과 신라에 대해
잘 몰랐던 듯 일본서기는 신라(=시라기)가 막연히 서쪽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여 큐우슈우쪽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큐우슈우 남부에 아이라(始良)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아이라(始良)는 한국식으로 읽으면 시라입니다.
큐우슈우 북쪽에는 카라츠(唐津)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한국식 한자음은 唐津(당진)인데 카라츠라고 합니다.
이 카라츠는 加羅와 관련이 좀 있어 보입니다. 한반도 남부에도 加羅가 있었고, 큐우슈우 북부에도 加羅가 있었는지
아니면 전체가 같은 加羅였는지는 모르지만 큐슈 북부에도 加羅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광개토왕 비문을 읽으면 남거성이 어디인가? 광개토왕비 3단락에 묘지 守墓관리인에 보면
百殘南居韓이란 지명이 있습니다. 百殘南居韓의 南居韓과 南居城이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이름이 같습니다.
韓은 카라, 城은 골입니다. 고구려어로 홀. 남거카라, 남거홀이 됩니다.
南居는 무엇인가? 남거는 나무입니다. 남ㄱ를 연진발음하면 남그 -- 뿌리깊은 남그는....
나믁 -- 나막신
이것을 음차표기하면 南居, 男居가 되고, 훈차표기하면 木이 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신라의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제상(363~419) 신라 눌지왕때 충신.
倭에 볼모로 가 있던 王弟 미사흔을 도망치게하고 자기가 대신 잡혀 죽임을 당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박제상이 죽임을 당한 곳이 木島라고 합니다. 똑같은 내용이 일본서기에도 실려있습니다.
서기에는 신라왕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고 대마도까지 쫒아갔으나 못잡고 박제상만 잡아서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에서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木島는 대마도와 일본 본토 가운데밖에 없습니다. 잇기섬. 잇기섬이 바로 木島이고 南居城인 것입니다. 이것은 검증이 필요하지만 거의 확실합니다.
南居城에서 어디로 갔느냐? 南居城에서 이르른 곳이 신라성, 좀 황당하지만 큐우슈우 북쪽에 신라성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신라성이 큐우슈우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 任那加羅 從拔城(종발성)
일본서기에는 筑足流에 고구려군이 신라를 지켜주기위해 머물렀다고 합니다.
筑足流의 筑은 담다, 담을 筑의 약자로 담.
足은 한국어로 발을 의미합니다. 筑足은 담발이라고 둘다 사음음차한 것입니다.
流는 음차입니다. 담발류.筑足流는 筑紫國의 筑자와 같은 이름을 적은 것입니다. 담보라를 적은 것입니다.
담보라, 담발류등으로 발음이 구전되는 것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한자를 借字한 것입니다.
筑紫國이 있었던 곳은 큐우슈우 북쪽입니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從拔城의 從은 한국어로 따르다를 사음음차한 것이고
拔은 음차한 것으로 따르발이 됩니다 (연진발음) 응집발음으로 하면 딸발이 됩니다. 된소리가 아닌 발음을 하면 달발이 됩니다.
달/담을 한꺼번에 표기하면 닮이 됩니다.
筑足流(축족류) = 筑紫(축자) = 從拔(종발)은 모두 「닮브라 」를 借字한 표기입니다.
安羅人戍兵 : 安羅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安羅人 자체가 국명입니다.
人을 떼고 그냥 安羅라고 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倭人(와히토)에서 人을 떼고 그냥 倭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安羅人 Anaito 를 借字한 것이 安羅人입니다. 아나이토가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 경남 함안이 아닙니다.
아나토(穴門) = 지금의 나가토(長門)로 바뀌었습니다. 야마쿠치 현 쪽.
일본서기에 나오는 安羅를 무조건 경남 함안이라고 비정하면 안됩니다. 여기 있는 나가토(長門)를 가리킬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562년(任午)의 기록대조
<삼국사기> <일본서기>
532년 : 금관가야가 항복
562년 : 가야가 배반하니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 562년 : 신라가 임나관가를 타멸했다.
평정하였다. 623년 : 신라가 임나를 토벌하니 임나가 신라에 복종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해 참으로 이해할수 없는 부분
30년 전에(532년) 항복한 금관가야국의 왕자들은 신라조정의 대신이 되고, 신라의 장수가 되어 열심히 신라에 이바지하고 있는 중인데
562년 가야가 배반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때의 가야는 금관가야가 아니고 대가야를 가리킨다고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562년에 삼국사기에는 가야를 평정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관가를 타멸했습니다. 정확히 일치하나 가야와 임나는 별개의 나라입니다. 가야는 임나가 아닙니다.
큐우슈우지역에 가라, 임나, 안라, 왜 등등의 여러 나라가 같은 지역에 존재했습니다.
한국측에서 볼때는 통털어서 가라와 여러 나라들 이라고 이야기 할수 있고(가라로 통칭한 것이고)
일본열도 쪽에서 볼때는 임나와 여러나라들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통털어서 말하면 임나라고 할수 있지만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加羅)국, 安羅국, 사이기(斯二岐)국, 多羅국, 卒麻국, 古嵯국, 子他국, 散半下국, 걸손(乞飡)국, 임례(稔禮)국 10개국을 말합니다. 정확하게 일본서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562년에 신라가 타멸했다는 임나관가의 10개국 이름을 모두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
국명들 중에서 임나와 관계가 있는 지명, 국명을 몇개 뽑아서 살펴보겠습니다.
지명, 국명을 파악하여 비정할때는 音借표기 위주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音借, 訓借, 또 音의 浮轉, 혼동착변, 이완현상에 대해서 특히 似音訓借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이해를 하고 임해야 합니다. 또 지명의 변천과정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비슷한 音 몇개를 이리저리 끼워 맟추는 엉터리 지명비정은 더 이상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엉터리 지명비정은 역사연구에 방해만 될뿐입니다.
啄 (탁) 연진발음하면 多久 ---- 현재 多久市가 있다
卒麻(졸마) 사츠마 薩摩 (살마) 사츠마 = 肥前(히젠), 鹿兒島(가고시마)-- 한국어의 사음훈차표기
斯二岐(사이기) 佐伯 (사이키)
娑陀(사타),子他(자타) 糸田 (이토다)
稔禮(임례) 伊萬里 (이마리) 任의 연진발음
古嵯(고차),久磋(구차) 臼杵(구저),玖珠(구주) - 일본에서는 우스케라고 한다. 구즈, 쿠스근처에 고차국이 있었다 迊羅(잡라/삼라) 早良 (사와라)= 散半下 (잡라/삼라를 연진발음하면 사바나, 사바라-ㅂ발음을
약하게 하면,사와라가 된다 - (음의 부전) 散半下는 사바나를 음차표기한 것
啄己呑(탁기탄) 大分 (오이타)
須那羅, 素那羅 佐世保(사세보)
※大分(오이타)에는 옛날에 碩田國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碩田國을 오호키타(於保岐陀)라 읽었습니다.
오히타현의 홈페이지에 가면 大分의 分은 段과 같고 kita로 읽었다고 합니다.결국 大分은 원래 다키타로 썼는데
오역에 의해 大를 訓讀하면서 오키타로 읽고 나중에 오이타로 변한 것이 됩니다.음이 많이변하면 지명을 제대로
추측하기가 쉽지않습니다.
※須那羅의 那는 '넓' -- 연진발음하면 너르, 너브, 너릅(너르브)
아주 넓은 것은 사낣 -- 연진발음하면 사나라, 사나라바 -- 사나라를 음차하면 素那羅가 됩니다.
佐世保의 世는 한국어의 누리를 사음음차한것으로 사누르바인데 -- 후세에 한자음을 그대로 읽어서 사세보가 됨
이러한 지명들을 볼때 신라 이사부와 사다함이 정벌했던 나라들은 대부분 큐우슈우에 있었던 것으로 볼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신라가 投身對馬之外 竄跡迊羅之表 (투신대마지외 찬적잡라지표)
(몸은 對馬 바깥에 던져놓고 흔적은 迊羅(잡라)의 끝에 숨긴채) 고구려의 공물을 막고 백제의 성을 삼켰다고 분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신라가 한반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큐우슈우 지역에도 있었던 것으로 볼수 밖에 없습니다
또 당나라 재상 두유가 편찬한 「통전 」변방 신라조에는
신라가 처음에는 백제에 속했으나 점차 강성해져 습, 가라, 임나등 여러나라를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습(襲)은 웅습국(熊襲國)을 말합니다.(구마모토현 일대) 신라가 이 쪽을 침공했거나 이쪽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거나
아니면 이곳에 존재해 있었다는 소리밖에 안됩니다.
제가 부탁드리는 것은 어설픈 애국심이나 영토확장주의에 빠져들지말고 오로지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자하는 자세로
임해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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