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15. 壬申의 乱

청 설모 2018. 7. 3. 16:30

 15. 壬申의 乱


1.只御 신이 떨어지다
『日本書紀』는 天智8年冬10月의 条에、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日、天皇은 東宮 太皇弟를 藤原 内大臣의 집으로 보내어、大織冠과 大臣의 位를 주었다.
姓을 하사하여 藤原氏로 하게했다. 이후, 통칭 藤原内大臣이라고 불렀다.
16日、藤原内大臣이 죽었다.」


藤原内大臣이라고 하는 것은、물론「藤原鎌足」을 말하는 것이지만、「藤原」姓이 天皇으로부터 이때  하사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의심스럽다.

15日에「藤原」姓을 하사받고 16日에 죽었다고 하므로, 「鎌足」이「藤原」라고 자칭했던 시기는 겨우 하루뿐이다. 이것은 마치 죽을 시간을 알고있어서 보내진 것 같은 것이다.
또한 여기서 깊이 언급할 생각도 없고, 언젠가 기록할 기회가 있겠지만, 대략「鎌足」의 死後、殯가운데에 그러한 処遇가 되어, 생전의 일과 같이  적힌 것이라고 생각한다(혹은「藤原」의 初代는「不比等」이 아니었을까?)


첫째、『日本書紀』에서조차 시간의 혼동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天智8年의 条에는、

「夏5月5日、天皇은 山科野에 약초사냥을 가서, 太皇弟・藤原内大臣 및 群臣들과 모두 함께 갔다.」

라고 있어서, 이것은 「鎌足」의 죽음보다、반년 가깝게 앞선것이면서, 「藤原」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大織冠은、「百済」式의 大王位의 증거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된다.
織冠을 손에 넣은 인물은, 문헌상으로는 고작 2명뿐이다. 한명은「鎌足」이고 다른 한명은 「余豊璋」이다. 그 「余豊璋」은 百済王의 칭호와 동시에 織冠을 손에 넣고 있다.  그리고 「鎌足」이후、大織冠을 받은 인물은 어느 누구 한명도 없다.


臣下로서의 最高冠位였다고 한다면, 그후 받은 인물이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것이「百済」멸망과 거의 同時期이기 때문에、大織冠은 百済王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면, 「鎌足」은、「倭国」、「筑紫都督府」의 2国間의 王일뿐만 아니라, 최후의 百済王이었던 것이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단언할수 있는 史料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정도는 私見을 따라서、「鎌足」은 皇帝였다고 하여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하지만, 先述한 天智8年의 条는、『扶桑略記』의 다음의 기록에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 한 마디로 말하다. 天皇馬을 타고、山階郷에 거동하다.

돌아오지 않고, 오랫동안 山林에 어울려 、무너질 줄 모르고.  신이 떨어진 곳을 그 山稜으로 삼는다 」


 이 기록만으로는, 「山科」에 갔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지만, 『水鏡』에서는,

「12月3日、천황은 말을 타고、山科로 가서、 숲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게되다.
어디에도 御座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 그저 신이 떨어진 것을  陵으로 통채로 봉헌하는것이다 」


「新井白石」의『天智朝』에서는、

「옛사람이 전하기를、帝가 山科에 행차하여、 그 안에 들어가서 、간곳을 알지 못하고」

라고 되어있어、「山科」로 간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天皇은 여기에서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현존하는 天智天皇陵은、

「신발이 떨어진 곳」에 정해진 것이다.


 그렇지만、현재의 天智天皇 比定陵에는 문제가 몇가지가 있어, 名古屋女子大学 教授 丸山竜平氏가、대단히 흥미깊은 것을 말하고 있다.

    ①被葬者는 不明이다.
    ②(上8角 下方墳으로 이야기되는 형상이므로、)天皇陵일 가능성이 극히 크다.
    ③被葬者는 天皇이거나 그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다.
    ③그 소재지로부터 보아서、藤原氏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日本書紀』에 따르면
       「鎌足」도 「山科」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④그 축조지점으로부터 보아, 藤原宮 혹은 그 造営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⑤ 축조연대는7세기의 3四半期를 중심으로 그 전후를 포함한 시기이다.
    ⑥古墳은 순조롭게 완성되어, 壬申의 乱에서의 혼란은 상상할수 없고, 『日本書紀』의 記載내용과도 맞지않다.

        (古墳의 축조는 壬申의 乱이 발발함으로써 완성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続日本紀』文武3年10月条에 斉明陵과 동시에 造営개시한 기록이 있다.)

    

         단、( )内의 文은 筆者의 追記임.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생각해보면,  天智天皇陵이라고 比定되는 陵에는 天智天皇이 埋葬되어 있다고 단정할수 없게 된다.

『日本書紀』에 따른 天智라는 인물은、「葛城皇子」이겠지만、私見에 의하면, 「藤原鎌足」도 또 같은 시기에, 天皇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시대가 天智의 時代였다고 한다면、「鎌足」도 또한 「天智」이다.
私見에서 말하는 「鎌足天智」이다.

정확히 말해서 現 天智天皇 比定陵은、「鎌足」의 陵墓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陵墓를 鎌足陵으로 比定하는 것은、私見을 포함하여「丸山氏」의 說

  「③ 그 소재지로 보아서、藤原氏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

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丸山氏」는、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미 周知한 바와 같이, 藤原宮의 서쪽끝(아랫길)은 北上하여 平城京의 朱雀大路로 되고, 또 平城京의 西大路는 平安京의 東大路와 거의 동일선상에 있다. 이 점을 부연설명하면 藤原宮을 中心軸으로하여 연장선상 北端에 이 現 天智天皇陵이 위치하는 것이 된다. 반대로、藤原宮을 중심축으로 하여 남쪽 연장선상에는, 天武・持統天皇陵이나 中尾山고분(추정 文武天皇陵)이 위치하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이것에 대하여 북쪽 연장선상에 이 天智天皇陵이 있다고 한다면, 이 被葬者像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 것인가?<中略>
 
그렇다 하더라도、現天智天皇陵이 基点으로 되었던 藤原宮의 主軸이 결정을 보았다고까지는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반대로 両者의 관계를 추측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天智天皇이 藤原京・宮의 구상을 포함하여, 그 宮都의 市街구획의 땅분할 작업을 추진했다고 하는 추측에 서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결국、「藤原京」은 現天智天皇陵을 基点으로 하여 설계한 것이 되고, 그렇게되면, 그 관계로부터 藤原京이야말로 天智구상에 따른、최종적 遷都先이며、天智의 사후, 天皇의 의지를 헤아려, 藤原京이 건설되었거나, 藤原京의 건설後、중심축상에 天皇陵을 만들었거나의 어느쪽이 되겠지만, 그 어느쪽도 아니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天智로서「藤原」의 명칭은 상상할수 없다.
   
단 이 天智가「鎌足天智」였던 경우를 빼면...

그리고 天皇陵이 있는 이곳 「山科」는、藤原氏 一門이, 館 ・저택을 가지고 있던 중요한 拠点이었다는 것을, 부가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多武峯의「談山神社」의 안쪽에、「御破裂山」라고 불리는 山이 있다.
이것은 옛부터 「鎌足」의 墓라고 불리고 있다.

平安시대부터、

「藤原鎌足의 墓는、처음에는 摂津의 安威에 있었지만, 後에 大和의 多武峯으러 改葬되었다」

라는 説이 있은 것으로서, 「御破裂山」은、바로 이것에 해당하는 것이된다.


余談이지만、왜「御破裂山」이라고 불리워졌느냐고 하면, 「国家에 중대사가 일어날때 이 山이 울리었기때문이며, 그것은 「鎌足」의 분노라고 말해지고 있다. 平安時代로부터 江戸時代에 걸쳐、삼십수회나 울렸을 것이다.

 또한、昭和9年에 발굴조사되었던, 茨木市 大字安威 및 高槻市 奈佐原에 걸친「阿武山古墳」으로부터는、昭和62年이 되어、당시의 X線 사진이 컴퓨터로 해석된 것에 의하여、「太織冠」비슷한 것이 확인되어, 현재는 이것이야말로 「鎌足」의 墓라고 단정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출토품은 대부분 다시 채워져 있다. 상세한 것은, 特別編『攝津阿武山古墳調査報告書』를 보아주세요.

단, 이것을 의문시하는 의견이  적잖이 있다는 것도 付加해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처음에는 摂津의 安威에 있었다고 하는 「鎌足」의 墓는、그 장소로부터 「阿武山古墳」의 오류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御破裂山」에의 改葬은、遺体의 이동을 동반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 私見으로는、現天智天皇比定陵도 또한 「鎌足天智」의 陵墓이지만、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 것인가?

대략『扶桑略記』에도 있는바와 같이, 여기에는 누구도 埋葬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듯이 『万葉集』에는、다음과 같은 歌가 掲載되어 있다.


「石川夫人의 歌一首

   大山守는 誰를 위하여 山에 묶는가 君도 없는데」
    (ささなみの 大山守は誰がためか 山に漂結ふ 君もあらなくに)


일반적으로 이 歌는、
天皇은 이미 죽었는데、御料地의 番人은, 누구를 위하여 山에  밧줄을 치고 있는가라고  해석되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大山守라는 것은 朝廷이 소유하는 山을 지키는 관리로서、말하자면, 墓守(묘지기)이다.
墓守가 지키는 山이라는 것은 山稜밖에 있을수가 없다. 天皇의 墓이기때문에 그 墓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天皇의 山稜을 지키기 위하여 줄을 치고 있는 것으로서, 종래의 해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수가 없다.
   
이 歌는、天皇이 埋葬되어 있지 않은 陵墓인데、대체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한 墓守인가、라고 읊은 歌로밖에 생각할수 없다.

결국、이 歌는 天皇이 埋葬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정직하게 읊은 歌였으므로, 『扶桑略記』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陵墓가 아니라면 그 장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이 떨어진 곳」

라고 한다면, 그곳은 어떠한 이유에 의하여, 건강한 「鎌足」의 최후의 장소였다고 생각되어진다.

現天智天皇比定陵은 「鎌足」이 事故를 일어켰던 장소이며, 生前을 그리워하는 최후의 장소였다.
그곳에「鎌足」을 神으로서 제사지내고, 禁足地로 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의미로서, 神社와 同類일 것이다.


2.阿武山古墳의 被葬者
「신이 떨어진 곳」

이 一節은、많은 역사가의 논란이 교차하는 곳이 되고있다.

 즉, 天智의 죽음이 暗殺에 의한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이다.

諸説은 일단 제쳐두고、여기서 말하는 天智는「鎌足天智」이므로, 과연 「鎌足」은 암살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阿武山古墳의 被葬者」를「鎌足」이라고 단정한 위에 이야기를 진행하지만(特別編、『摂津阿武山古墳調査報告書』抄録、을 参照해주세요)、이 被葬者는、X線 사진 감정에 의하면, 척추의 第11胸椎가 上下로  짓눌려 변형되어있고、이 부근 왼쪽 갈빗뼈가 3개 부러져 있다고 한다. 흥미깊은 것에, 그중의 일부는 癒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감정당시의 東海大学医学部、今井教授의 말을 빌리면,

「믿을수 없을 정도로 보존이 좋다」
  (생략)


今井教授의 말로부터 추리할수 있는 것은、아무래도 「鎌足天智」은、승마중에 낙마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육로 이동수단이 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낙마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것도 큰 부상이다. 그렇게 되면 사냥감을 노리고 주행 중인 말 위에서 활을 겨누고 있었던 것인가, 라는 것이 된다.

암살의 선은 어떻게 할까?

이것이 암살이었다고 하면, 숨통을 찌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鎌足」은 사고후 한동안 살아있었다고하므로 암살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사고는 언제 일어났느냐고 묻는다면, 『日本書紀』에서 말하는 天智8年 夏5月5日이 아닐까?

「夏5月5日、天皇은 山科野에 약초사냥을 나갔다. 大皇弟・藤原内大臣 및 群臣등을 모두 함께 갔다.」

앞에서『日本書紀』의 이 記述은、이것이 天智암살의 날이 아닐까 라고 문제로 해 왔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를 알게 되면、「鎌足天智」가 자신의 소유지인 「山科」(私邸가 있었다고 말한다. 奈良의「興福寺」는、婦人 「鏡女王」가「鎌足」의 병 치료를 위하여、私邸에 세웠던 「山科寺」를, 子「不比等」이옮긴 것이다.)에서、「大海人」등과 함께 사냥을 했던 記録이었던 것이 되어, 당시「鎌足」은「中臣鎌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藤原内大臣」으로 된 것은, 史実을 왜곡한 후에 加筆된 기록이었기때문이다.


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 기록의 정확히 일년 전에, 

「5月5日、天皇은 蒲生野에 사냥을 나갔다. 그때 大皇弟・諸王・内臣 및 群臣 모두 함께 갔다.」

라고 있기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鎌足」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内臣이 그것이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그것은 앞에서의 「山科」의 기록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1년후의 「山科」의 記録을 읽지 않았더라면, 「内臣」=「鎌足」이란 것은 판별할수 없다.

『日本書紀』의 이러한 수법은, 독자의 눈을 事実로부터 벗어나게하여、잘못된 선입관을 심어넣어, 진실한 역사를 어둠에 파묻어버리려고 할때의 상투수단이라고 할수 있다.

蘇我入鹿・蝦夷・馬子・倉山田麻呂、聖徳太子、山背大兄、古人大兄、中大兄、大海人 그리고 「鎌足」까지、「乙巳의 変」으로부터「壬申의 乱」에 걸쳐 주요인물은 모두 한결같이 그렇지 않나?
 
그러면서도 반드시 엉터리인 것만은 아니니 더더욱 형편이 나쁘다.

『日本書紀』는「鎌足」을、天智의 충신중의 충신인 것으로 記述하고 있다.
혹시 이것이 사실이라면, 「蒲生」행차때「鎌足」이 동행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 1年後의「山科」행차에는、「藤原内大臣」이라고 당당하게 記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이때는 왜 그렇지 않았는가? 그것은, 인물이 뒤바뀌어 있기때문이 아닐까?

따라서 이때 記述된 天皇은、『日本書紀』가 그렇다고 하는 「葛城天智」이 아니다. 그리고 、内臣도 「鎌足」이 아니다.

天皇은「鎌足天智」이며、内臣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인물로서, 어디의 누구인지 모르고, 가공의 인물일런지도 모른다.

『日本書紀』는、「白村江의 전투」에서「鎌足」의 渡航을  쓸 수 없었기때문에 、「鎌足」이 天智의 충신으로 참모격일 리가 없다.

『日本書紀』에 따르면、「鎌足」은 10月16日에 죽었으므로, 사고로부터 약 5개월간은 생존해있은 것이 되어, 이점은 「阿武山古墳」의 피장자의 조사결과와 잘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이「鎌足天智」의 죽음이야말로, 「壬申의 乱」의  방아쇠가 되었던 要因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3.百済倭国(후지와라) 皇帝鎌足

「白村江의 전투」에서 패전했던「百済」(이 경우는 朝鮮半島의「百済」가 아니고, 倭의「筑紫」를 점거하여 多武峯에 出先機関을 두었던「多武峯 百済」이다. 白村江의 해전때에는 朝鮮「百済」는 멸망하고 없고, 宗国은 倭의「百済」이다)는、어렵사리 自国「筑紫」(太宰府인가?)로 도망쳐 城砦를 축조하여 방위전에 대비했지만, 「唐」은「筑紫」로 進軍、할 수 없이 후퇴했던 「百済」를 대신하여「筑紫」를占領하고、首都를 무혈제압하여, 그대로「筑紫都督府」를 설치했다.


「唐」은 協力国이었던 倭国王「鎌足」을 都督으로 임명하여、筑紫政府를 맡겼다.
이것에 의하여「筑紫」는 倭에 있으면서、「倭国」에도 「百済」에도 속하지 않은、「唐」의 관리하에 두게된 독립자치국이었던 것이다.

그 후「太宰府」가 독특한 발전을 보인것도 이때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앞에서도 몇번이나 소개했지만, 「太宰府」는「都督府」의 일본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太宰」는 정확하게는 「大宰」이다. 왠지  현지에서는 「太宰」라고 씌어있다.
그 이유는 알수 없지만,「宰」는「宰相」을 말하며 総理大臣의 의미이다. 「唐」의 天子를 대신하여  政治를 담당하므로  総理大臣일 것이다.
   
『日本書紀』에 따르면、이 때 倭에 天皇은 없다.「葛城皇子」섭정이며, 말하자면 그도 또한 総理大臣이다. 거기에 「大」를 붙혀서「葛城総理」와 구별했던 것일까? 「大総理鎌足」의 출현이다.

또한 흥미깊은 것에, 史跡「大宰府政庁跡」에「紫宸殿」이라고 하는 지명이 남아있다.
「紫宸殿」이라고 하는 것은 京都御所에 있는 正殿이다.


또한「大宰府政庁跡」에는「朱雀大路」까지 있다. 이것은, 皇居로 통하는 大路이므로, 이런 것이 「筑紫都督府」시대로부터의 명칭이라고 한다면, 역시 「鎌足」은 大王이며(마 그것을 天皇이라고 바꿔말해도 좋을런지 모르겠지만)、近江朝의「葛城天智」이나 倭京의「大海人皇子」조차、「鎌足」에게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한다면, 그 이상의 입장이며、「筑紫」・「近江」・「倭国」連邦国家의 皇帝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筑紫都督府」의 점령 정부에 의하여、완전히 숨통이 끊겼던 「百済」였지만、역전의 정예들 사이에서는, 「唐」과의 일전을 불사하자고 豪言하는 자도, 상당한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強者도 知将없이는 통솔이 되지않고, 그냥 오합지졸로 되어갔다.

그것을 정리해 낸 것이 、「余豊璋」그림자에 가려 전범으로부터 모면했던, 또 한명의 中大兄皇子「葛城皇子」였다고 생각한다.

「筑紫」에서의 재건이  꿈과같이 흩어졌던 諸将에게 필요한 것은、새로운「百済」였다.
 
天智6年의 条에

「3月19日、都를 近江으로 옮겼다. 이때 天下의 人民은 遷都를 기뻐하지 않고, 諷諌하는 자가 많았다.
 童謡도 많고, 밤낮없이 出火하는 것이 많았다.」

라고 있다. 그 뒤 8月에、

「皇太子가 倭京으로 오시게 되었다.」

라고 있으므로, 이것은 遷都가 아니다. 京이라는 것은 首都이다. 1国에 2개의 京이 있을리 없을 것이다.
따라서 近江遷都라는 것은、近江 지방정권의 수립이었다.
  
『日本書紀』의 내용으로부터 보아, 이 정권은 武力에게 말을 하게하는、侵略政権이었을 것이다.
말을 바꾸면 占領이다.
 그리고 그 5개월 後、「葛城皇子」는「倭京」으로 출발하고 있다.

이때의 경위는 알수 없지만, 이 倭京行이야말로 『籐氏家伝』에 보이는 「浜楼事件」의 前夜라고 생각한다.

물론、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가 되지 못하고、오늘에도 적이다. 그러한 중에 「葛城皇子」혼자서 태연스럽게 나갔을 리가 없다.
그에 상응하는 兵力을 이끌고 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近江京」과「倭京」. 이러한 2朝상태는 여기에서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다.

예를들면, 敏達天皇의 百済의 大井이나  舒明天皇의 百済宮은、畿内에「百済」가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私見으로부터 「多武峯 百済」와「蘇我系 倭国」의 争乱의 정점이야말로、「大化改新」에로 이어지는 「乙巳의 変」이었다.

어떤때는  적대하고, 어떤때는 손을 잡았던 「百済」(이 경우는 畿内에 있었던 원격지 영지「百済」)와「倭国」이었지만、이번의 「近江京」은、前例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百済」는、정략결혼등에 의하여 「倭国」과의 混血이 있었든 간에, 「百済」그 자체였던 반면、「近江京」은 그 대다수가 「百済」로부터의 亡命貴族・将軍으로 구성된 것으로, 父는 「百済」系이지만, 畿内에서 태어나고 畿内에서 성장한 倭人、「葛城」이 이끌고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葛城」은 몸소 「倭京」으로  행차할 정도이었으므로, 畿内에서의 共存을 희망했을 것이다. 언제 「唐羅」가 공격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浜楼에서의 会談은、「葛城」으로부터 제안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에 대하여 「大海人」은 공격적이었다. 처음부터 「近江京」을 인정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생각한다.
「大海人」과「葛城」은 兄弟(『日本書紀』에 따르면 弟兄)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서 母와 떨어졌던 「大海人」은、그 애정을 알지 못한다.
과연 그 일도 관계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大海人」은 「葛城」 증오심에서 살해를 도모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籐氏家伝』에 記載되어 있는 「浜楼事件」을 믿는다고 한다면, 槍을 겨누었던 것은 「大海人」쪽이었다.
이 会談은、「葛城」으로부터 제안한 것으로、敵地로 뛰어드는 「葛城」으로서는、非武装이야 아니겠지만, 강한 경계심을 품게할만한 武装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大海人」의 맹반발에 의하여 会談이  결렬될 것 같은 것은、全章에서도 말한대로、「葛城」의 誤算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때문에 2명의 사랑하는 딸(『日本書紀』에서는 4명이지만, 私見에 의하면, 다른 2명은 「余豊璋」의 딸)을、「大海人」에게 넣게 했을까?
결과론이지만, 모든 것은 이런 날을 예상하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이러한 両雄에 의한 일촉즉발의 사태는、「鎌足」의 중재에 의하여 회피되었다.
물론, 두 사람을  억누를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鎌足」이 천하의 忠臣이었기때문이었다、라고하는 설명으로는, 미흡하다. 이미 말했지만, 두사람보다 입장이 우위에 있었기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두사람을 납득시킬수있는 어떤 제안을 한 것이 아닐까?

「葛城」은 天皇에 즉위후, 「古人大兄皇子」의 딸인「倭姫王」를 황후로 삼고있다.
「古人大兄」은、私見에 의하면, 「大海人」과 동일인물이므로、「倭姫王」은 물론 「大海人」의 딸이 된다. 더구나 「倭姫王」이란 이름은 고유명사라고는 생각할수 없다. 실명이 아닐 것이다.
실명을 내세우면,「古人大兄」=「大海人」이란 것이 들통나기 때문에 、「倭姫王 야마도히메」라고 하는 보통명사로 했다라고밖에는 생각할수 없다. 이 이름은 『日本書紀』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고, 「倭姫王」에게 子가 없는 것도 傍証의 하나가 될 것이다.
           ・・・
결국 「鎌足」가 제안한 내용은, 両朝의 合併이었던 것이 아닐까?

고대의 관례에 따라서 、「葛城」이 両朝의 天皇으로 即位하는 대신에、정치는 皇后쪽인「大海人」側이、집행하는 것이다.

얼핏보면, 공평해보이는 제안이었지만, 「大海人」側으로부터 보면、예를들면, 정권을 장악하는것인, 首相의 자리를 넘겨주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이 합병은 아무런 메릿트도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倭京」만으로 보면,「大海人」은 정권여당의 수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倭京」은 그대로두고, 「近江朝」의 정치에만「大海人」側이 개입한다고 하는조건이지 않았을까?
「近江朝」의 左大臣「蘇我赤兄臣」은「大海人」側의 한명이었을 것이다. 左大臣은 重臣중에서 남버원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는 「葛城」이、납득할리가 없다.
  
 거기서「鎌足」이「葛城」에게 発했던 한마디를 다음과 같이 상상하고 있다.

「잘 생각하시오 。임자는 大海人보다 젊지 않은가? 순번대로 죽으면 大海人이 먼저 죽게 될 것이다. 

임자는 그때부터倭京을 받아도 너무 늦은 일은 없을 것이다.」

머리를 숙이고, 近江 건국을 부탁하러 왔던「葛城」이었다. 불합리하긴 하지만 、이 한마디에 의하여 납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両朝는、「鎌足」의 仲介에 의하여 合併에 응하기로 했다.


이로부터、天智가 天皇(이라고 해도 현대의 総理大臣에 상당)、「近江京」을 首都로 하고、「大海人」側이 정치를 담당하는 형태로、정식으로「近江朝」가 발족하게 되었다. 나머지는 宣命을 기다릴 뿐이었다.

국제외교의 場은「近江朝」으로 移行했지만、「倭京」은 豪族의 연합지배에 의한 독립국인채로 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鎌足」은 자신의 의지에  관계없이、「近江京」・「倭京」을 걸친 大王位 상당을 손에 넣게 되었다.
여기에「百済倭国」=「藤原」帝国의 기초가 될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후、한동안 국내에는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書紀紀年에 따른 天智8年5月5日、「鎌足」은「山科野」에서 사고를 당한다.
약초사냥에 가서 낙마라고 생각된다.
어떻게든 목숨은 건졌지만, 瀕死의 중상이며, 同年10月16日、不帰의 客이 되었다.

 

감히 書紀紀年이라고 했는데 、이 天智8年은 통설의 669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日本書紀』에는 종종 보이는 것이지만, 특히『斉明紀』・『天智紀』는 重出 ・ 混同이 많이 보여,
紀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마、紀年을 그대로 믿고 있는 분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의 정리를 위해서도, 이 부근의 연대를 확실히해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전에 말한 것과 중복될런지도 모르지만, 「定恵」의 송환이、「鎌足」의 죽음과 직접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都督」不在로 되었기때문에 、新都督으로서「定恵」를 送還시킨 것이 아닐까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私見에 따른「鎌足」의 죽음은、「定恵」의 帰国年을 넘길수가 없다.


「定恵」는『孝徳紀』에 인용된「伊吉博徳」이 말하기를,

「定恵는 乙丑年에 劉徳高등의 배를 타고 돌아갔다.」

라고 되어있다.

이 乙丑年은 665年이 되지만, 書紀紀年에서 말하는 天智4年이다.
 
확실히、『天智紀4年』에는「劉徳高」가 왔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올리고 있다.

「9月23日、唐이 朝散大夫沂州司馬上柱国 劉徳高등을 보내왔다. .... 等이라고 하는 것은 右戎衛郎将上柱国百済禰軍・朝散大夫柱国 郭務宗을 말한다. 전부 245명.  7月28日에 対馬 도착。9月20日、筑紫에 도착、22日에 表凾을 바쳤다」

이것은 이것으로 좋지만, 이 때 「定恵」가 귀국했다고 하면, 적잖이 골치 아픈 일이 된다. 『日本書紀』가 말하는「鎌足」의 죽음은、天智8年이기 때문이다.  書紀紀年을 우선시키면, 私見을 버리지 않을수 없지만、重出이 많은 書紀紀年은、즉각 믿기는 어렵다.


거기서 天智4年의 다른 条項으로 눈을 돌리면,

「이 달、百済国의 官位의 계급을 검토했다. 佐平 福信의 功績에 의하여、鬼室集斯에게、小錦下의 지위를 내렸다. 」   이다.

이것이 天智10年1月의 条에도、記録되어 있는 것이다.

「이 달、佐平余自信、沙宅紹明에게 大錦下를 주었다. 鬼室集斯에게 小錦下를 주어・・・」


이「鬼室集斯」의 기록만을 보면, 天智10年도 또한 665年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天智4年 ・天智10年이 함께 665年이 되고 만다、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일이 있을리가 없지만..

이 결과로부터 생각할수 있는 것은, 天智4年은 中大兄皇子称制4年이며, 天智10年은 鎌足天智10年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4年・10年은、어느쪽도665年이 된다.


『日本書紀』를 따르면、「鎌足」의 죽음은 天智8年이었다.

그러나、이 天智8年은 鎌足天智 8年을、『日本書紀』가 말하는 天智8年으로서 편집된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따라서, 실제의 「鎌足」의 죽음은、鎌足天智8年、663年의 白村江의 전투 後의 것이 될 것인가?
 
그리고、그 後의 665年「定恵」가 送還되어 왔다, 라고 하는것으로 해두고 싶다.

그렇지만「鎌足」의 没年은、『天智紀』에 인용된 『日本世紀』에 따르면, 50歳이다. 또한 異説로서 56歳라고 올려져 있다.

「鎌足」의 생탄년은『籐氏家伝』에 의하면、推古22年(614)이기 때문에、614年으로부터 鎌足天智8年의 663年까지를 세면, 50歳가 된다.   또、天智8年의 669年까지를 세면 56歳가 되기때문에, 어떤 説도 틀리지 않은 것이지만, 私見에 따른 「鎌足」의 薨去는 663年이므로 50歳를 정답으로 하고 싶다.


단、「鎌足」이 大王位에 올랐던 年代는、白雉5年(654)春1月1日의

  「・・・紫冠을 中臣鎌足連에게 주어・・・」

이때라고 생각하고 있기때문에、663年은 鎌足天智9年으로 되고 만다.

 이것에 대해서는、史実과 각 史書와의 年紀의 差에 있다고 생각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쉽게 설명할수 있는 材料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 사과드리고 싶다.
   
『日本書紀』에 의하면、「白村江의 전투」의 翌年에 冠位를 26階段으로 증설한 同年
「郭務宗」等이 来訪했던 것으로 되어있지만, 冠位의 증설은  어쨌든 간에、점령군이 来訪했던 것이 翌年이었다는 것은, 너무도 늦은 것으로 생각한다.

『天智紀』를 읽어나가면, 天智10年11月10日에、「郭務宗」等 2千명이 来訪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天智紀』중에、수많은 重出중의 하나이지만,

「11月10日、対馬国司가 使者를 太宰府로 보내어、
『今月 2日에、沙門道久・筑紫君薩野馬・韓島勝裟婆・布師首磐의 4명이 唐으로부터 와서、『唐의 使人 郭務宗등 6百명、送使沙宅孫登등 천4百명、총계 2천명이、船 47隻에 타고 比知島에 도착했다. 서로 의논하여、지금 우리 사람도 배도 많다 。바로 저쪽으로 갔으면、 아마 저쪽 防人은 놀라서 쏘아올 것이다. 먼저 道久등을 보내어서, 전에는 어서 와서 来朝의 뜻을 밝히기로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라고하여, 다른 「郭務宗」의 来訪기록과 비교한 경우, 이 기록이 初来訪일것이란 것에 주목하고 싶다.
 
年代를 무시해버리고、8月23日에 白村江의 대 패전후、「唐」이 11月10日에 바로 왔다고 생각하는 쪽이 무리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浜楼」의 1件으로、「近江京」과「倭京」의 공존을 성공시켰던 「鎌足」이었지만, 그 후 얼마안있어 「山科」의 사고를 당해 죽고만다.

 그렇게 되는 찰나에 바란스를 잃고, 両朝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작은 충돌을 시작하게 되었다.
「近江京」側은「高安城」을 건조하여「倭京」에 대비했을 것이다.

「鎌足」이 죽은 直後인 12月、『日本書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2月、大蔵에 出火가 있었다.
 이 冬、高安城을 축조하여, 畿内의 田税를 거기에 모았다. 이때 斑鳩寺에 出火가 있었다.」

분명히 항쟁의 勃発이다.


그러나、엄청난 항쟁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은,  「唐」과「倭京」이 손잡았던 某国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唐」은 準전승국인「倭国」、즉「倭京」과 우호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패전국 「百済」의 잔당으로 구성된 「近江京」등、「倭国」의 1 州에 지나지 않는、혹은 인식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夏5月12日、鎧・甲・弓矢을 郭務宗등에게 하사했다. 이 날 郭務宗등에게 주었던 것은, 합쳐서 견직물1,634 匹・布 2,852 端・綿 666斤이었다」

이것은『天武紀』元年의 기록이다.

「郭務宗」은『天智紀』에도、 몇 번이고 軍을 이끌고 来訪하여 귀국하고 있는듯이 기록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체적인 贈物의 언급이 일절  없는 곳에서 、「近江京」과의 외교관계는 희박했을 것이다.

某国에 대해서는、第16部에 검증을 넘기고 싶다.


4.大友皇子

両朝의 항쟁도 그렇지만, 「鎌足」이 죽고 특필할 일은 、大友皇子가 太政大臣에 임명되고 있는 것이다

上代의 立法 ・行政 ・司法、모든 정치를 総轄하여、8省百官을 총괄하는 기관에 太政官(明治維新때까지 존속하고 있은 것으로서, 上代라고 말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이 있지만、그 중에서도 명령계통의 最高位는、太政官 4部官으로 불리는 조직이다.


이 가운데서 상위 3位까지를 三大臣이라고 불러、이것은 太政大臣을 필두로하여、左大臣 ・右大臣으로 계속된다.
内大臣은 그 아래에 위치하게 되지만, 이것은 大宝令이후의 것으로、그 이전은 左右大臣보다 上位였다.  참고로 大宝令이전에 内大臣으로 된 것은 「鎌足」뿐이다.

太政大臣의 임명은、「大友皇子」가 처음으로서、三大臣制는 天智朝로부터의 発足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때의 左大臣은「大和」로부터「蘇我赤兄臣」、右大臣은 「近江」으로부터 「中臣金連」이라고 생각되고, 그 위에「鎌足」이 内大臣으로 있었다고 하면(실제의「鎌足」은 훨씬 위에 君臨하고 있었지만)、정치 바란스에 우열은 없었다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鎌足」의 死後、「大友皇子」를 특권대우라고도 할수있는 太政大臣에 올랐으므로, 바란스는당연히 近江側으로 기울어지고 만다.
   
「葛城皇子」가 天智天皇으로 즉위한것과 동시에,「大海人皇子」는 皇太子로 되었다.
통설에는、「大友皇子」의 太政大臣 임명은、차기 皇位를 엿보게하는 、皇太子에 준하는 대우를 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懐風藻』에서는、

「연초에 弱冠, 太政大臣을 배례하여, 」

「年23歳、 皇太子가 되다 .」

라고「大友皇子」가 皇太子였다는 것을 記述하고 있다.
   
「大友皇子」23歳는、天智9年(670)이므로, 이때 皇太子로 되었다고 하는 『懐風藻』의 記述은、『日本書紀』에는 없는 것으로、皇太子로 되었다고 하는 記述이 흥미깊다.


 또한『懐風藻』가 기록한 「大友皇子」像은、「劉徳高」의 말을 빌리면,

   「 이 皇子, 風骨 世間의 사람 같지 않고, 실로 이 나라에 비할 바가 없다.」

   「皇子 박학다식하고,  文武의 재간이 있다.」

라고 절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전적으로 믿을것은 아니지만, 「大友皇子」가 비범한 인물이었던 것은, 의외로 정말일런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은,  天智天皇이「大友皇子」를 太政大臣으로 임명했던 것이, 단순히  내 자식 귀여움 때문만인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것을 증명할 문헌이 없다면, 逸聞 ・残欠조차 없지만, 간접적으로는 알수있을 것 같다.
(※각주:逸聞-일화
           残欠- (문헌 등의 일부가 빠져) 불완전한 것


『懐風藻』은「大友皇子」에 대해서는, 매우 厚하게 말하고 있어、「大友」의 曽孫「淡海真人三船」이編者가 아닐까라고 말해지고 있는 정도이다.

「大君은 곧 신이기 때문에 赤駒(빨간털의 말)이 배를 깔고 있는 田井(논)을 都로 삼는다.」

「大君은 곧 신이기 때문에 물새가 많이 모여 있는 水沼(수렁)을 도읍으로 삼는다. 」


그렇지만, 上記 2首는、『万葉集』에 있는 天武天皇을 읊은 歌로서、巻19의 4260番「大伴御行」과  이것에 계속되는 작자미상의  巻19의 4261番이다. 여기에는, 「壬申年의 乱의 平定 이후의 歌 2首」라고하는 필사가 있다 .

   「大君은 神입니다」는「柿本人麻呂」가 持統天皇에게 읊었고、
   「大君은 곧 神 신이기 때문에 天雲의 번개 위에 초막을 세울지도」

등이 있지만, 天武가 初見이다.


戦前까지의 天皇은、現人神이라고도 말해져왔지만, 어쨋건 天武天皇이 그 뿌리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들판에 놓아준 것 같다.」라고.

이 一文은、「大海人」이 吉野로 들어가기 前의 『天武紀』에 있는 台詞로서、같은 모습을 記述했던 『天智紀』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台詞를 현대풍으로 말하면, 武者가 떨정도로 멋이있다고 할 것인가?


『日本書紀』가 天武자신의 発案이며、『天武紀』는 자신의 기록이므로、상당히 많이 끼워넣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애초 호랑이는、日本列島에 生息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日本書紀』에 올려져 있는 것은 、중국문화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龍이나 기린、봉황이 상상의 동물인데 대하여, 호랑이는실재하는 최강의 동물로서 畏怖의 대상으로 되어왔다.
  
「大海人」은 「葛城」의 딸、4명(私見에 의하면 4명중 2명은、百済王子「余豊璋」의 딸)을 妃로 삼았지만, 이것들은 정략결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이유야 어떻던「大海人」은、「葛城」의 의향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닌가?
 이 후、「浜楼事件」이 일어나、両者 사이가 꼬이기는 했어도、正妃「菟野皇女」는、天武가 죽은후 、天皇으로 즉위하는 정도였으므로, 혼인관계는 해소되지 않았다. 라고 하는 것은、意志変更은 없었다는 것이다.


「大海人」은 天智에게 음모가 있다고 의심하여、皇位를 사퇴했지만, 『天武紀』冒頭에 보이는, 「蘇我臣安麻呂」의

「잘 주의하여 대답해주세요」

라는 한마디가 없었다면, 『日本書紀』로부터 의심스러운 사항을 발견하지 못한다.


또한 이 한마디는  『天武紀』에만 있어서、『天智紀』에는 記載되어 있지 않다.
『天武紀』는 修史事業 개시때의 天皇이었던 天武로서는、형편이 좋게 쓰지 않았을 리가 없다.
라고 한다면,  『天智紀』에는 없는 이 한마디는、捏造의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天智가 「大友皇子」에게 皇位를 물려받게하고 싶었던 기분은, 親心을 별도로 한다면, 의외로 적었을런지도 모른다.
   
더 말하자면 、「大海人」은 『日本書紀』에 따르자면, 皇太弟이기때문에, 天智가 굳이 譲位를 꺼내지 않아도、차기 천황후보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것도 「近江朝」와「倭京」의 통일天皇이  가능한 셈이다 .

대략「倭京」의 「大海人」으로부터 보자면、「近江朝」는「百済」의 긴급피난적 都일 것이다.
그것이 증거로、天武 즉위후의 首都는、역시、「飛鳥」이다. 즉 그대로인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상상할수 있는 「大海人」은、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非常識人이었던가?  결코 칭찬받을 만한 말투는 아니지만 、일종의 狂人的이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浜楼事件」에서、長槍을 床에 내려꽂는 暴挙로부터도、그렇게 말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男者가、차기 천황후보였다면, 「近江朝」의 미래를 생각한 경우, 天智로서도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大友皇子」를 太政大臣에 앉힌 것은、天智의 才覚이었으며、거기에 상응하는 좋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부터、『懐風藻』의 記述은 신뢰하기에 족한 것이라고 생각되며,『日本書紀』를 시작으로 다른 文献이、「大海人」을 칭찬하면 할수록, 그 実像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거꾸로 말하면, 『日本書紀』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天武의 敵「大友皇子」야말로, 진짜 인격자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안 된다 .

天武가 神이라고 불리웠던 이유도, 神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5.額田女王

그런데, 天智와 天武를 말하는 경우에,피할수 없는 女流歌人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額田姫王」이며、『万葉集』에는「額田王」으로 되어있다.

그녀는、당대 굴지의 여류歌人으로 불리고、『万葉集』에 長歌3首와 短歌9首를 올리고 있고, 어느것도 우수한 歌로 정평이 나있다.


그녀의 이력은 『天武紀』의

「天皇은 처음 鏡王女、額田姫王을 불러들여 十市皇女가 태어나다」

라고、『万葉集』의

「額田王近江天皇을  생각하여 만든 歌 1首


 너를 기다리면 내가 그리워하니 내가 집 문짝의 발을 움직여 가을바람을 불어온다  
君待つとわが恋ひをれば吾が屋戸のすだれ動かし秋風吹く」


로부터, 처음은 天武의 妃였으며、後에 天智의 妃로 된 것을 알수있다.

게다가『万葉集』으로부터는、「額田王」의 姉로 「鏡王女」가 있었는데、그녀도 또한 天智妃였던 것을 알수있다.

 그렇지만、『天智紀』에는 「額田王」에 관한 記載는 일절 없다.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日本의 歌謡는、본래 神에게 바친다던가 死者를 추도하는 경우에, 필요에 응하여 만들어진 것이지만,
近江朝 무렵부터는、개인의 문학적 흥미에 의하여 、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長歌 ・短歌라고 불리는 형식이 성립된 것도 이무렵이었다.

「額田姫女」의 활약도 、이러한 시대였기때문이었다.


그녀가「大海人」과 서로 주고받았던 相聞歌는、잘 알려져 있다.

「あかねさす紫野行き標野行き野守りはみずや君が袖ふる」

일본어 현대어역:

あかね(いろ)をおびる、あの紫(むらさき)の草(くさ)の野(の)を

野(の)の番人(ばんにん)は見(み)ていないでしょうか。

あなたは袖(そで)をお振(ふ)りになることよ。

 
검붉은(꼭두서니빛) 빛을 띠고 있는 저 보라빛 풀이 있는 들을

망보는 사람이 보고 있지는 않을까요?

당신이 손을 흔들고 있는 그 소매를.

(저녁놀이 검붉은 빛으로 물든 무라사키노의 사냥터까지  사람눈을 피하여 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향해서 그렇게 손을 흔들고 있으니  그걸 망보는 사람이 보고 있지는 않을까요?)


라고「額田姫女」가 노래하고、「大海人」을 나무라는데 대하여, 「大海人」은,

「紫の匂へる妹を憎くあらば人妻ゆゑにわれ恋ひめやも」
 
紫草의 紫色과 같이 아름다운 당신을 미워하려고 생각하면, 어째서 나는 당신을 이처럼 그리워하게 됩니까?

당신은 사랑해서는 안되는 人妻(남의 아내)인데...(미워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당신에 대한 恋心이 나온다)

라고 답하여 노래하고 있다.


大海人과 결혼하여 애까지 두었는데 이때의 그녀는 天智의 妃였기때문에、 이 두사람의 관계로부터、삼각관계가 「壬申의 乱」의 遠因이 되었다는 説을、성실하게 설파하던 선생님도 있었지만, 단순한 집안소동 같은 게 아니라, 나라를 2개로 쪼개는 전쟁있으므로,  그 원인이 3각관계였다면, 누가 추종하는 자일까?  있을리가 없다.


두사람의 관계가 비밀스러운 일이었다면, 이러한  歌謡가 전해졌을리가 없고,
그렇다면 연회 같은 곳에서의 농담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무리가 없지 않을까?


또한「額田姫女」는 이러한 歌를 읊어도、비난받지않는 특수한 입장이었던 것은 아닐까?

대략、그녀는 현대에서 말하는 芸能人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大海人」이나 天智의 妃였다고 하기보다도、차라리 芸能人으로서 관계(육체관계를 포함하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권력자가、당대 제일가는 美女나 유명인 등과 가까이 하는 것은、현대에도 들려오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관계였으므로, 『天智紀』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않고, 『天武紀』에 있는 것은、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妃로서 宮廷에 불려간 것이 아니라던가、采女였다던가、논리를 세우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깊이 빠져서 되레 알 수 없게 된다 。
 
모두가 女流歌人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으니까, 여기서는 연예인으로 좋다고 생각하지만, 어떨까?

'뿌리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近江朝의 붕괴  (0) 2018.09.23
16. 近江의 朝廷  (0) 2018.07.09
14. 日本国 誕生(2)  (0) 2018.06.30
13. 日本国 誕生(1)  (0) 2018.06.27
12. 白村江의 전투  (0) 2018.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