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近江의 朝廷
1.2朝 분열
「大原大王이、崩御한것 같다」
이 소문은、「近江京」・「倭京」을 통하여、자연스럽게 퍼지기 시작했다.
「大原大王」은、물론「藤原鎌足」이며、「山科」의 사고로부터 、반년이 지난 때였다.
그는、「大原」(奈良県 明日香村 小原)을「倭京」의 본거지로 했기때문에, 이렇게 불렸던 것으로 추측한다.
飛鳥의 중심、「飛鳥坐神社」의 옆을 빠져나가면 、「鎌足」의 생탄 전승지「大原神社大神宮」이 있다.
「鎌足」은 百済王家출신이기때문에、여기가 출생지일리가 없지만,
『万葉集』에
天皇賜藤原夫人御歌一首(天皇이 藤原夫人에게 준 歌 한수)
「わが里に大雪降れり大原の古りにし里に降らまくは後」
우리 마을에 큰눈이 내려 大原의 옛 마을에 내려오는 것은 나중일것이요 ..
(天皇이 飛鳥宮보다도 산기슭 시골인 大原마을을 놀려서、
「그쪽은 시골이므로 눈이 내리는 것은 약간 후일것이요」라고 했다)
巻2-103 天武天皇
藤原夫人奉和歌一首(天皇이 준 歌에 대하여 藤原夫人이 답한 返歌)
「わが丘のおかみに言ひて降らしめし雪のくだけしそこに散りけむ」
우리 언덕(大原)의 神인 용왕에게 부탁하여 내려온 눈이지만, 그 나머지가 그 쪽에 흩어졌을 것입니다
巻2-104 藤原夫人
인것과 같이、「大原」에 藤原夫人의 住居가 있었다는 것을 엿볼수 있다.
藤原夫人은「鎌足」의 딸이며、天武의 妃이다. 이것으로부터도 「鎌足」과「大原」마을과의 깊은 연결을 알수 있을 것이다.
「鎌足」의 墓였을「阿武山古墳」에는、「太織冠」이나「玉枕」이라고 하는 평범하지 않은 副葬品이 있었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더구나 盛土(흙을 돋움)하지않은 百済式의 墓였다.「鎌足」이 百済王家출신이었기때문이라고 하면 듣기에 좋지만, 『日本書紀』流로 말하면, 「内大臣」이었기때문에、누가 보아도 그걸 알 수 있는 墓가 아닌 게 이상할 것이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견조차 되지않는、『籐氏家伝』의 編者조차도、阿武山을 阿威山으로 혼동하고 있는 정도이므로、그 존재를 알고있는 인물은 극히 소수였지 않았을까?
확실히「鎌足」은、검소한 장례식을 원했던 것 같지만, 검소하다고 하기보다 차라리 비밀리에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된다.
「鎌足」의 죽음을 世間에 공표하는 것은、주저되었을 것이다. 百済式의 墓의 採用도 그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鎌足」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답은 명쾌하다.
「鎌足」의 중재에 의하여 실현된 「倭京」・「近江京」의 合併、一朝체제에 균열이 생겨, 마침내는 붕괴하고 말것이다.
최종적으로는 그것이 「壬申의 乱」이라고 하는 형태로 표현되고 말았다.
단 그것은, 「大海人」과 「中大兄皇子」(以下、「中大兄」이라고 略한다)의 대립만이라고 하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大海人皇子」가、「鎌足」의 죽음을 몰랐을리가 없고, 「浜楼事件」에서 싸움이 있었던「大海人」과「中大兄」이었지만、合併후의 両者는,서로 협력하여「近江朝」실현을 향하여 노력을 고조시켜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鎌足」의 딸、「氷上娘」을 夫人으로 하여、앞에서와 같은 천진한 노래를 주고받는 것을 보면,
나쁘게 말하면, 平和바보역할을 하고있는 것이며, 곧바로 대립세력이 될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대립세력이라고 한 것은「大海人」이 아니고、「鎌足」에 의하여 억눌려져 온,「大伴氏」로 대표되는 「倭京」의 古豪族이 아닌가?
「壬申의 乱」에서 天武쪽은、「大和」평정을 위해서 필사적인 戦闘를 강요당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이때의「大和」는、「近江朝」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大海人」의 힝포가 있었다고 한다면、「近江朝」의 一朝지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鎌足」의 죽음을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는,「倭京」의 古豪族의 반란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렇지만、私見에 따른 역사인식에 의하면, 天智朝하에서 일어났거나、수행했던 주요한 사항은,「鎌足」의 죽음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天智8年의「鎌足」의 죽음을、白村江의 패전의 翌年인 664年頃의 일로 생각하고 있기때문에、近江遷都는「鎌足」이 죽고나서 수년후의 일이 된다.
그러한 것들에 근거한 위에、「壬申의 乱」前夜라고도 말할수 있는、天智天皇 崩御까지의 両朝의 행방을 생각하고 싶다.
「大海人」은 「倭京」을 대표하는 皇子이었지만、「吉野太子」(大海人=古人大兄皇子)라고 불리고 있는 것으로부터 알수있듯이, 그의 본거지는、「倭京」이 아니고「吉野」로 옮겨갔다.
따라서「倭京」은 실질、「大伴氏」등의 호족연합통치의 都였다고 생각된다.
요소요소에서、「大海人」을 가마로 메어 냄으로써 、대의명분을 세웠을것이라 생각한다.
「白村江의 전투」후、準戦勝国이었던「倭国」은、기세를 몰아、「大海人」이 즉위하고 말았다면 좋았겠지만, 「鎌足」의 策謀에 의하여、「近江朝」과의 合併이 성립했다.
이것을 어쩔 수 없이 승낙했던「大海人」을 대신해서、「中大兄」이 통일「百済倭国」의 大王으로서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그 정치는 「倭京」側이 담당하는 것이다.
결국、近江側은「庚午年籍」(이것에 대해서는 後述한다)에 의하여、실패작이었지만、중앙집권체제의 原型을、「倭京」에도 밀고 나간 것이지만 、호족연합으로 성립되었던 「倭京」은、이것이 재미있을리가 없었다.
무엇이 불쾌한가 하면, 「近江朝」의 통치하에서、新参者인 旧百済관료의 政庁이 놓이고, 자치권이 박탈된 것이다.
그러나、王없는 発起는 단순한 반란군일뿐이며, 여기선 참는 수밖에 없었겠지만,
「都를 近江으로 옮겼다. 이때 천하의 인민은 遷都를 기뻐하지 않고, 風諌하는 자가 많았다.
童謡도 많고, 밤낮없이 出火하는 것이 많았다.」
라고 있는 것으로부터、이 合併遷都에 찬동하는 자는、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鎌足」이 낙마사고를 당한다.
「夏5月5日、天皇은 山科野에 薬草사냥을 나갔다」
『日本書紀』에는、이 이상의 기록은 없지만, 이 때의 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검증이 끝난 것이다.
「鎌足」은、매년 5月5日을 薬草사냥의 행사로서 했을 것이다.
蛇足이지만、대략 이것이 端午의 節氣의 起原이 아닐까라고 생각되고 있다.
端午의 節氣의 역사는 오래되고, 그 起源은 奈良시대로 소급한다.
맛츠리(축제) 그 자체의 뿌리는、農家에서의 여자아이의 맛츠리였지만, 中国의 端午의 행사와 융합하여, 宮廷행사로 되었을 것이다.
端午에서, 「端」은 처음의 의미로、원래는 月初의 午의 日로서、그 午와 五와 발음이 같은 것으로부터
어느새 5日을、그것도 5月5日을 말하듯이 되었다.
그 무렵의 5月5日은、病이나 재앙을 피하기위한 행사가 행해졌던 중요한 맛츠리(祭日)이었을 것이다.
宮廷에서는、이 날에、창포로 장식하고、황족이나 신하들에게 연(蓬)등의 약초를 나누어 주었다.
또 병이나 재해를 초래하는 악귀를 퇴치하는 의미에서、騎射(말을타고 활을 쏨)등의 練武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5月5日의 薬사냥이었던 것이다.
이 퍼포먼스는、단순히 액(厄)막이 행사의 하나로서가 아닌、「中大兄」과「大海人」의 협조를 세간에 알림으로써、 불필요한 불협화자들을 억누르려는 의도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년은「蒲生野」、그리고 遷都 2년후,(『日本書紀』에서는 天智7年)인 금년은 「山科野」였다.(실제로는 「鎌足」이 살아있을때 薬사냥은 1회였다. 蒲生野=山科野의 기록이며、그것은 遷都前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한창때 、「鎌足」은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서、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 5개월 후, 「鎌足」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鎌足」의 죽음은、일급비밀로 되었다.
「百済倭国」皇帝「大原大王」은、빈소(殯所)를 차린후、비밀리에、그러나 무서울정도로 정중하게 매장되었다. 그것은「鎌足」생전부터의 유언이며、국내를 2분하는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기위한 배려였다.
왜냐하면,「鎌足」의 죽음은、「鎌足」의 중재에 의하여, 일이 커지지않고 무사히 끝나게 된 「倭京」在住의 古豪族이、「近江京」타도를 결단하는데、충분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貴人의 죽음은、그렇게 숨길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鎌足」중태설은、금방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天智7年5月5日、
「天皇은 蒲生野에 사냥을 나가셨다.」
라고 되어있지만, 그 직후 秋7月의 条에
「高麗가 越 路로부터 使者를 보내어、調를 바쳤지만、풍랑이 심해서 돌아갈수가 없었다.
栗隈王을 筑紫率로 임명했다.
그때 近江国에서 武術을 강습했다. 또 많은 牧場을 만들어서 말을 방목했다.
또 越国으로부터 불에타는 흙과 불에타는 물을 바쳤다.
또 水辺의 御殿의 아래에 여러가지 물고기가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였다.
또 蝦夷에 饗応받았다. 또 舎人등에게 명하여, 다양한 장소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사람들은、『天皇은 位를 떠나신 것일까 』라고 말했다」
무술지도나 말의 확보, 석탄 석유의 비축, 또 물고기의 이상행동등은、전쟁돌입을 예감시키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이것은、天智7年의 기록이지만, 그후에 계속되는 전개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실제로는 天智8年의「山科野」의 직후의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이야기가 사리에 맞게된다.
결국、「山科野」의 薬사냥에서 사고가 있었던「鎌足」이、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던、「近江朝」側의 대책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
거꾸로 말하면, 「近江朝」으로서는、그렇게하지 않으면 안될정도로、아직도 불안정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天皇은 位를 떠나신 것일까 』라고 말했다」
이 부분의 본문은,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天皇 天命将及乎」
이지만, 「天命将及」이라는 것은、中国에서는 王朝交替를 의미할 것이다.
또 재미있는 説로、「中村幸雄」氏의 「天命」을「天皇의 位에 오르라고 하는 하늘의 命令」의 의미로 읽어、통설의 「天皇의 목숨이 끝이나다」는 誤読이라는 것도 있다.
이 경우의 天皇이라는 것은 、통설대로 읽으면, 「鎌足」이 될것이나「中村幸雄」氏의 説에 따르면、天智가 될 것이다.
蝦夷에 饗応을 베풀었다던지, 도처에서 宴을 개최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지방 다지기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根回し(큰 나무를 이식하기전 나무뿌리의 주위를 둥글게 파서 잔뿌리를 침. 사전공작)이다.
이러한「近江京」의 돌연한 불온한 행동이、「倭京」의 古豪族에게 전해지지 않았을리가 없다.
이 裏面에는 무언가가 있다고 읽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그 古豪族이라는 것은、싹뚝 잘라 말해서 「大伴氏」이다.
대략、「鎌足」낙마의 뉴스는, 이때 이미 전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容態까지는 不明이었다.
그렇지만, 近江側의 불온한 행동이나, 사람들에 의한 王朝交替의 소문이、「鎌足」위독을 확신시키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大伴氏」는、雄略朝를 피크로 하여 번영했던 유력씨족이며, 最盛期에는 「大連」이었다 .
欽明朝때 「大伴金村」이 실각하고 있지만, 그 후에도 최대세력 「蘇我氏」에 이은 유력씨족이었다.
孝徳朝에는 右大臣도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웬지 斉明・天智朝에서는 중용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는 커녕 오히려 이름조차 보이지 않고、이 시기에는 전혀 不明이었다.
대략「大伴氏」는、최대세력때의 「蘇我本宗家」에 종속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用明紀』를 보면、
「馬子大臣은、土師八島連을 大伴毘羅夫連의 곳으로 보내어、자세하게 大連의 말을 하게했다.
이것에 의하여 毘羅夫連은 손에 활과 방패를 가지고, 槻曲의 大臣 집으로 가서, 주야로 大臣을 지켰다.」
「大伴氏」가 주야로 지켰던 大臣은 「蘇我馬子」이며、이 大連은「物部守屋」이다.
이 모습을 보아도、「蘇我本宗家」와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近江京」의 뿌리는、「葛城皇子」의 母、皇極天皇의「多武峰 百済」이다.
예전의 「蘇我本宗家」는 적국의 大王家였을 수도 있고、이때의 「大伴氏」의 피가、「乙巳의 変」으로부터의 直系였다면、중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大伴氏」는、大王을 따르고 그 경호를 임무로 삼는、軍事氏族과같이 말해지고 있기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蘇我氏」・「巨勢氏」・「紀氏」라고 불렸던、옛부터의 중앙호족이、「近江朝」의 重臣으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중에、「大伴氏」는 登用되지않았던 것이다.
「大伴氏」로서 보면、「近江京」이 아무리 잡다한 어중이떠중이를 끌어모은 急増国家였다고 해도 이래서는 재미있을리가 없다.
본종가가 아니라고 해도 、「蘇我氏」는 선출되어 있는 것이다.
대략 이 選任은、「近江京」側에 경계심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鎌足」의 案이었다고 생각한다.
天下의 大王「鎌足」의 案이라면、마지못해 하면서도 납득했던 것이다.
그러나、그「鎌足」도 고인이 된 지금, 「近江京」의 필사의 은폐공작의 보람도 없이、그 소문은 어느새 「倭京」에까지 알려지게 되엇을 것이다.
「近江京」은 遷都와 天智의 즉위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치의 중심이「近江京」으로 옮겨가서、안정정권을 수립해버리면, 「大伴氏」라고해도, 「近江京」을 압도할수가 없다.
「大伴氏」단독이라고 하기에는、다소 무리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여기서는「大伴氏」를 중심으로 이루어진、「倭京」在京 豪族이라고 하는 의미에서、그것을 정리하여 「大伴氏」라고 부르고 싶다.
따라서、아무리 新王朝 전복을 생각하고 있었다고해도、그것이 실현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지만, 가만히 「新羅」와 통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땠을까?
前章에서 언급했던 某国이란 것이 「新羅」였다.
그리고 그 결과, 억압되어있던 「大伴氏」가、반격을 꾀하기 시작했다.
「関祐二」氏는、「白村江의 전투」후、「唐」의 사절단이「筑紫」에 들어온것을 『日本書紀』는 明記해두면서, 그들이 「大和」까지 왔다고 하는 사실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大和」는「近江朝」성립前의「倭京」이지만、「中大兄皇子」는 패전후、大和입성이 안되었기때문에、「筑紫」에서 停戦조정을 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당시「筑紫」는、「百済」의 점령지역이었기때문에、「中大兄」이「筑紫」에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며、적진 「倭国」에 갈 이유도 없다、
단『日本書紀』가、「大和」에 들어가지 않은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결국, 「唐」에게 있어서는に「筑紫」이외의 일본열도는、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筑紫」의 점거로 전후처리가 끝났으므로, 「大和」와「筑紫」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으며, 전승국인 「唐」이、이러한 태도를 취할수 있는 케이스는、이때의「大和」가 전쟁 불참가였던지, 전승국이었던지의 어느쪽이었다. 물론 나는 전승국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筑紫」에는「唐」의 점령정부인 「都督府」가 설치되고、「唐」에의한 정치지배로 되었지만, 그위에, 「天智朝」가 성립한 후에도、「唐」은「筑紫都督府」이상으로 입국했던 기록이 없다.
「唐」으로서의 문제는、지배지「筑紫」에「都督府」에 의한 정치안정이었다고 생각되어, 「大和」즉 「倭京」이 쓰러진 경우를 빼고는、그외 열도 국내의 처우에 「唐」은、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암묵의 협력이라고 말할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私見으로는、都督「鎌足」사망소식을 들은「唐」은、「定恵」를 新都督으로서、보내고 있다.
그러한 전제에서 『天智紀』를 보면、「近江朝」의「唐」에 대한 외교기록은 일절 없다는 것을 알수있다. 기록같은 것으로 말하면, 天智天皇 崩御때、「郭務宗」등에 의한 再拝이지만, 이것은 『天武紀』에적혀있는 기록이며, 실은 이것도 「筑紫」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天武紀』(下巻)을 보면、외교관계의 기록은「新羅」일변도인 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것에서인지 흔히 「壬申의 乱」은、「百済」와「新羅」의 대리전쟁이었다고 조차 말해지고 있지만, 「吉野」가「新羅」、「近江」이「百済」등이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壬申의 乱」은「大和」를 무대로 싸웠던 、분명한(이상한 말투이지만)内戦이며、거기에 朝鮮半島문제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新羅」가「倭京」과 통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어지는 一説이、『天武紀』上巻에 있다.
「冬11月24日、新羅의 客人 金押実등을、筑紫에서 응접하여, 각각 선물을 하사했다.
12月4日 武勲을 세운 사람들을 뽑아, 冠位를 加増시켜、小山位 이상의 位를 각각에 따라 주었다.
15日、船1隻을 新羅의 客에게 내렸다. 26日、金押実등은 돌아갔다.」
上記가 그것이지만, 종전후「大海人」이「大和」에 도착한 것이、9月 12日、岡本宮으로 옮긴 것이 15日이다. 同年中에 飛鳥 浄御原宮을 축조하여 이주한 것이、전후처리나 恩賞수여로 超多忙이었을 한가운데, 「筑紫」까지 가서「金押実」등을 응접하고、船 1척까지 내주었다는 것은 심상치않다.
「金押実」이「新羅」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수단은 船일것이므로、보통으로 생각하면, 船는 필요없을 것이다. 라고 한다면, 이 船는 恩賞으로서 하사받은 것이 아닐까?
・・
더욱 흥미깊은 것은, 「金押実」등을 일부러 客人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日本書紀』는 외국으로부터의 使人에 대해서는、왔다와 돌아갔다는 것이、대략 한 쌍이 되어 기록되어 있다.
과연「金押実」은、언제 무슨 목적으로 왔던 것일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倭京」에의 협력으로밖에 생각할수 없다.
여기부터 「壬申의 乱」으로、가속도를 붙혀서 단숨에 치닫고 있지만, 또 하나의 부족한 키가 있다.
그것은 「大海人皇子」를 끌어들인 것이다.
「大海人」은 天智의 딸 2명(『日本書紀』에서는 4명)을 妃로 하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불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天智朝에 협력적이었던 증거가 아니었을까?
그가 天智朝에서 정치적으로 어떠한 포지션이었던가를, 『日本書紀』는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단지 皇太弟였다고 하고있다.
天智의 동생이었기때문에 皇太弟였지만、실질상의 皇太子였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이 皇太弟에게는 다소 의문을 갖고있다.
이하는、『懐風藻』의 一説을 .現代語訳으로 하면、
「皇太子는、淡海帝의 맏아들이다. 용모가 뛰어나고 훌륭해서 、풍채는 광대하고 심오하며 、눈동자 속은 선명하게 빛나고、뒤돌아보는 눈은 눈부시게 빛났다. 唐使의 劉徳高가、皇子를 보고 감탄하여,
『이 皇子의 人相은、보통사람이 아니다. 실로 이 나라의 분수에 맞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皇子가 한때 밤에 꿈꿨던 것에는、 하늘의 문이 활짝 열려、붉은 옷을 입은 老翁이 태양을 바쳐 와서 、들어 皇子에게 바쳤다. 갑자기 사람이 옆문 근처에서 나와、즉시 태양을 뺏고, 가져가 버렸다고.
藤原内大臣에게、皇子는 이 꿈의 내용을 상세하게 말했다. 藤原内大臣은 탄식하여 말했다.
『대략 天皇 崩御후에、무섭게 악한자가 틈을 노리는 것이겠죠.
그러나、나는 평상시、이러한 것이 있어서 좋을것인가하고 말했습니다.
臣이 듣기로는,하늘의 道는 사람에 대하여 공평하여, 단지 善을 행하는 자만을 돕는다고 합니다.
바라건대、大王、徳을 다스리도록 일해 주십시오. 그러면、재앙은 두려워할 정도는 아닙니다.
臣에게 딸이 있습니다. 제발 後宮으로 들여 妻로 삼아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혼인관계를 맺어서、皇子를 親愛했다. 겨우 20세에 太政大臣이 되어、많은 일을 총괄하는 성과를 시도하다.
皇子는 박학다식하고 많은 것에 정통하고 、文芸도 武芸도 재능이 있었다.
모든 정치를 스스로 실행하기 시작하게 되어 、群臣下僚들은 경외심에 따르고, 부끄러워할 사람은 없었다.
23才때 皇太子로 되었다. 널리 인재를 구하여, 학자 沙宅紹明 ・塔本春初 ・吉太尚 ・許率母 ・木素貴子등을 초빙하여、賓客으로 대했다.
太子는、타고난 명석으로 、원래 널리 古学에 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筆을 들면 文章이 되고、한마디 말하면 훌륭한 議論으로 되었다.
때로는 議論하는 자는、皇子의 박학에 감탄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지 않는데 、詩文의 재능은 날마다 새롭게 되어 갈고 닦여 나갔다.
壬申의 乱을 만나, 天寿를 다하지 못했다. 때에 25才.」
로 되어 있지만, 이것들은 「大友皇子」를 소개하고 있는 一説이다.
説話는 너무 잘 되어 있고、「鎌足」의 딸과「大友」가 결혼하면, 덕을 다듬게 되는 거라고 읽으면서 재미있지만、
「大友皇子」가 23歳에 皇太子로 되었다고 하는 기록에는、크게 흥미를 끌었다.
물론 이것 만으로는, 「大海人」이 皇太弟가 아니었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그위에 『懐風藻』은 다음과 같은 一説도 기록하고 있다.
「神代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우리나라의 법에 따르면, 子孫이 상속하여 天位를 잇도록 되어있다.
혹시 형제가 상속하면, 반드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 사태를 보면 누가 황위에 올라야 하는 것은 스스로 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왜 이것저것 섞어버리는 것이다 .」
이것은 이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大友皇子」의 子인、「葛野王」에 의하여, 「軽皇子」의 立太子를 결정지은 한마디다.
결국、天智의 후계자는「大友皇子」였지만, 「大海人」이、억지로 황위에 오르기위해, 혼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자손상속이 神代부터의 룰이라고 말하고 있다.
神代부터의 룰이라고 말하면, 天皇의 正妃의 친족이 천황을 보좌하여, 정치의 실권을 쥐는 것이었다.
天智의 正妃는「倭姫王」이며、그녀는「大海人」=「古人大兄皇子」의 딸이었다. 이것에 의하면, 정치의 실권은 「大海人」이 쥐지만, 그는 天皇으로는 될수 없는 것이다.
「大友皇子」가 23세로 皇太子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 이전의 天智朝에서는, 皇太子는 결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혹은、天智天皇이 살아있을때는, 皇太子의 결정은 없었던 게 아닐까?
이것은『日本書紀』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다음은 『天武紀』1節이다.
「天皇은 東宮에게 皇位를 넘겨주고 싶다고 말했다. 거기서 사퇴하여,『나는 불행하여, 원래부터 병이 많고, 국가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원하건대 陛下는、皇后에게 天下를 맡겨 주십시오. 나는 오늘에라도 出家하여、陛下를 위하여 仏事를 修行할 것을 원합니다 』라고 말했다」
天智는「大海人」에게 譲位할려고 하지만, 「大海人」이 계략이 있다고 짐작하고、사퇴하는 유명한 장면이다.
「大海人」이 이것을 받아들이면, 謀叛의 마음이 있는 것으로 체포, 처형되었다고 하지만, 「大海人」은 사실 皇太弟였더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며, 거기에 음모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天智가、謀叛의 죄를 입히려고 한다면, 그것은 奇策도 아무것도 아니고, 天智는 단순히 룰 도 소용없는 횡포한 천황인 것이 된다.
天智가「大海人」을 시험해볼려고 하는 것이라면, 또「大海人」이 天智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라고 한다면, 「大海人」에게는、황위계승권이 없었다는 것이 대전제이다. 황위계승권이 없는「大海人」에게 譲位의사를 물어, 譲位에 고개를 끄덕일 때야말로 謀叛의 마음이 있는 것으로 되어, 皇太弟였던 경우의 譲位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좋은 것이 아닐까?
따라서, 「大海人」은 皇太弟가 아니었던 것이 되고、「大海人」의 발언이 진실이라면, 「大友皇子」도 皇太子가 아니었던 것이 될것이다.
「鎌足」사망의 소문을 들었던, 「大伴氏」가 自氏 복권을 걸고、제일 선두에 섰던 것이야말로,「大津京」에 있던 「大海人」과의 密通일 것이다. 「大海人」은 「吉野宮」에 은둔하고 있던 시대가 있었다고 하지만, 「近江朝」성립후는、「倭京」의 대표로서 보내진 、총리대신격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近江정권 수립에 난색을 보이면서도、天智의 딸을 정중히 받들어, 遷都後의 待遇面을 생각하면, 어느새 그 마음 「倭京」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古豪族의 안색을 보면서의 정치보다도,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정돈하려고 하는 新朝의 쪽이、명령 계통이 단일화되어 있어서 지내기가 편할것이 뻔하다.
더구나, 「大海人」은「浜楼事件」에서도 알다시피, 횡포로 열받기 쉽고、대단히 독재적인 사람이었다.、、、아니 아니 상상뿐이지만..
단지、天武天皇이 神이다 神이다라고 말하면 할수록, 그 실태는 공포정치였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다소 탈선하지만, 『日本書紀』의 天皇의 漢風諡号는、「淡海三船」의 作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大友皇子」의 曾孫에 해당하는데, 그런 그가 이름붙힌 天武라고 하는 諡号가 호의적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中国史上 유일의 女帝였던 「唐」의 「則天武后」는 정권을 잡기위하여 陰謀나 살륙, 또 밀고를 장려하는 공포정치, 、「武韋의 禍」라고 불린、완전한 悪女帝이다.
나는, 天武에게「則天武后」의 이미지가 중첩되고, 天武의 2문자는、「則天武后」로부터 채택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되고 만다.
마、그럴리는 없겠지라고 생각하지만.
2.庚午年籍
天智10年1月5日의 일、「大友皇子」가 太政大臣에 임명되고 있지만, 이것은 671年의 天智10年이 아니고, 또 하나의 天智10年(664)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日本書紀』에서 말하는 天智3年의 일이다.
「3年春2月9日、皇太子는 弟 大海人皇子에게 명하여、冠位의 階名을 증가하여 변경할 것과、氏上 ・民部 ・家部등을 설치할 것을 말했다.」
따라서 이 기록과, 다음의 天智10年1月6日의 기록은 같은 때 일 것이다.
大臣의 임명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遷都、그리고 天智의 즉위식이 행해진 후의 일이다.
『日本書紀』는 遷都를 天智6年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도「近江」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기때문에、정식발령이 天智6年에 있었던 것이며, 정치운영은 이미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6日、東宮 太皇弟가 명하여、──어떤 책에는、大友皇子가 宣命한다고 한다 ──冠位 ・法度가 시행되었다.」
6日의 기록에서는、「大海人」과「大友」에 착각이 보이지만, 이때의 「大友皇子」가 太政大臣이라면、착각의 대상이 되었던「大海人」도、太政大臣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지위가 아니면 안된다.
동시에 太政大臣 클래스는 2명은 필요없다.
순번대로 가면, 「大海人」이 실각하여, 혹은 실각당하여, 「大友」가 차기 太政大臣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사실이라고 한다면, 天智는 「大友」를 상당히 노골적으로 정권의 후계자자리에 앉힌 것이 된다.「大友」의 母는 伊賀출신의 采女이며、신분은 높지않다.
「大海人」과 비교하는 경우, 핏줄 위에서는 비교도 안 되는 차이가 있다.
통설에서는 이 처우를, 사랑하는 아들 「大友」사랑때문에 임명이며, 天皇의 지위에 집착을 가진 天智가、「大海人」계통으로 天皇이 옮겨가버리는 것을 싫어했기때문이다 등으로 말하고 있는것 같다.
天皇의 계통을 「大海人」에게 주고싶지 않다, 라고 하는 기분이 있었다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자식에대한 귀여움 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葛城皇子」가「百済」의 망명귀족을 끌어안고, 「近江」에 도착했을 때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언제 「唐」에게 추격당할지 모르는 敗軍인데, 백제병사들은 가는 곳곳마다, 마치 침략군과 같이 행동하고, 얼마나 「葛城」을 애쓰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을 달래어 、冠位 ・보상을 주어、 정리해 올리기 위해 「葛城」은 심신이 함께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浜楼」에서의 정권교섭, 「鎌足」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葛城」의 목숨을 건 박력이었지 않았을까?
물론「葛城」에게도、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母「斉明天皇」이 九州에서 죽고, 「余豊璋」을 朝鮮半島로 보낸 후의 「葛城」은、倭地에서 태어나, 朝鮮半島에는 한번도 건너가 본적이 없는 채로, 全「百済」의 실권을 쥐게 되었으므로, 그 중압감은 측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깨닫게 되면、敗軍의 総大将이 되어 있다고 하는 덤까지 붙어 버렸다.
이미 돌아갈 장소는 없다. 「近江」은 목숨을 건 建国이었다.
정치는「大海人이 담당한다고 하는 약속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鎌足」이 살아있을때의 일.
「鎌足」의 존재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던 政界바란스는、「鎌足」의 사후, 단숨에 무너져 버렸다.
天武13年의 詔에、
「애당초 정치의 要는 군사이다.」
라고 있다. 대략 皇太弟시대 이전부터의 「大海人」의 抱負였을 것이다.
敗戦後를 눈앞에서 목도해왔던 「葛城」에게 있어서、그러한「大海人」의 말은, 暴言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浜楼事件」에서의「大海人」이 취했던 태도도、「葛城」의 心証을 몹시 나쁘게 여겼다.
天皇으로 즉위후, 旧「百済」여러 실권을 쥐게 된「葛城」은、「鎌足」이 없는 지금, 「大海人」에게 정치를 맡길 마음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大友皇子」를 太政大臣에 앉혔다.
「大海人」에게 주권을 넘겨주겠다고하고, 遷都後「近江朝」을 열어보면, 天智 ・「大友皇子」체제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가면, 天智에게 협력적이었던 「大海人」도 평온할 리가 없다.
天智의 규칙위반에 의하여、合併은 분명히 실패이다.
원래、武力해결을 좋아한 성격이었을 그는, 「近江朝」와 결별하여, 타도天智의 봉화를 올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大和」의 古豪族에게 했던 것에서、「近江京」과의 합병에는 아무런 메릿트를 찾아볼수가 없을뿐만아니라, 주권이「近江京」으로 옮겨가고 말아, 주어지는 側으로 되고 말은 것에, 납득이 갈리가 없었다.
「鎌足」이 죽고없고、「大海人」이 배척되게되면, 決別 ・決戦의 목소리도 들려보자는 것이다
그러나、「倭京」의 생각은 통하지 않았다.
이렇게되면, 합병준비를 위해 「近江」에 있는(있었을)「大海人」은 인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략 엄한 감시의 눈에 노출되게 되었을 것이다. 무언가 행동을 일어키면, 바로 죄에 추궁당하고 처분되는 일이 눈에 보이고 있다.
그것을 무릅쓰고, 「倭京」으로 돌아가게 되면, 기다리고 있은듯 바로、모반죄를 덮어쓰게 될 것이다.
「大海人」의 吉野로 들어가는 것은 即日 出家하여 행해지고 있지만, 天智가 이것을 허락했기때문에 실현되었던 것이며, 자유롭게 출국할수 없었던 모습이 보여진다.
물론 감시하에 있었으므로, 외출조차 하지 않으면, 외부에로의 연락이나 면회는 가능했다고 해도 보통으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수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거기로 와서,「倭京」의 古豪族을 자극하는 사태가 찾아왔다.
그것이 天智9年2月의 庚午年籍의 작성이다.
「庚午年籍의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大宝令』에는 이것을 영구히 보존할것이 정해져있고,
奈良時代에는 庚午年籍을 근거로 하여, 氏姓을 다시 바꿀것을 원하여 허락되는 것이 종종 있어, 이것이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다.
西는 九州로부터 東은 常陸 ・上野、즉 당시의 朝廷의 세력하에 있었던 일본 전체의 지역에 걸쳐 제작된 것도, 奈良 ・平安시대의 기록에 의하여 판명된다. 또한 그 수량은, 九州諸国의 것만해도 770巻、上野国만으로도 90巻이상 있었던 것으로 알고있다. 이 九州770,上野90이라고 하는 数는、8、9세기의 九州와 上野国에 존재했던 郷의 数에 가깝다. 天智9年의 戸籍制는、일본국내의 구석구석까지 상당히 오가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日本의 歴史2」古代国家의 成立 으로부터「直木孝次郎」著
『日本書紀』에는、다음과같이 기록하고 있다.
「2月、戸籍을 만들어、盗人과 浮浪者등을 단속했다.」
이 庚午(670)年間이 完成年이라고 한다면, 이 제도가 지방에 오가기까지에는、그것에 상응한 年月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보아도、몇년 전에부터 걸려 있었을 것에 틀림이 없다 . 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근린 諸国에 대해서는、초기의 단계에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庚午年籍의 목적이라는 것은, 戸籍을 작성해 인구와 石高(쌀의 수확량)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이렇게하면, 징수세액을 파악할수 있어 국가예산을 計上할수 있다.
확실히 国税는 한줄로 하는 편이、징수하는 즉으로서도, 징수당하는 측으로서도 형편이 좋을 게 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일화된 국가에 있어서만 유효한 것으로서 内戦때에는 오히려 해가 된다.
合併이 불성립으로 끝난 지금, 합병을 전제로 작성된 戸籍은、「倭京」의 세력을 「近江京」에게 알려주는 代物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까지도、遷都를 향해 각각 준비가 계속되고 있었기때문에, 首都기능의 많은 부분은、「大津」에 집약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순차 수행중에、「倭京」의 세력은 알몸이 되고、首都 기능을 잃게 된 「倭京」은、 완전히 「近江朝」의 세력권에 수습되어 버린 것이다.
대등했었을 이때의 합병도、결과적으로는「近江京」에 따른 흡수합병이었으며, 이것에 의하여 국가로서의 「倭」는 자연소멸하고, 단순한 지방도시로 시작했던 「近江京」은 새로운 국가를 선언했다. 정권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
그런데、「鎌足」의 死後、이 이후、이 2月의 전후로 흥미깊은 기록이 3개 있다.
「12月、大蔵에 出火가 있었다.
이 冬、高安城을 축조하고、畿内의 田税를 그곳에 모았다. 이때 斑鳩寺에 出火가 있었다」
「2月、戸籍을 만들고、盗人과 浮浪者등을 단속했다.
同月、天皇은 日野에 납시어、宮을 만들 땅을 보게 되었다.
또 高安城을 축조하여 穀과 塩등을 비축했다. 또 長門에 一城、筑紫에 二城을 쌓았다.」
「夏4月30日、 새벽에 法隆寺에 화재가 있었다 . 一舎도 남기지 않고 불탔다.
폭우가 내리면서 천둥소리가 으르렁거렸다.」
3.民衆의 불만과 倭豪族
이것에 의하면 「高安城」은 마치 穀倉같지만, 단순한 곡창이라고 하면, 전혀 부자연스럽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땅은 奈良県에 접촉하고 있어,「近江」보다 차라리 「大和」쪽이 가까운 위치에 있기때문이다.
「近江」보다 멀리 떨어진 大阪府 八尾市의 高安땅에、城이라고 불리우는 穀倉을 짓는 사태, 편리성이 전연 보이지 않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땅이 선택된 것일까?
또、「斑鳩寺」는「法隆寺」이다. 따라서、다른 史書로부터 인용에 의하여 重出의 가능성도 불식시킬수 없지만, 「高安城」에 軍糧이 모여지면, 「法隆寺」로부터 出火하고 있는 偶然도、너무 많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에서、「法隆寺」의 재건 ・비재건론을 물을 생각은 없지만, 오늘에는, 현재의 「法隆寺」의 식당부근으로부터、焼土焼瓦이 출토될 때、天智朝의 화재에 의하여 一舎도 남기지 않고 불타, 현재 후에 재건립했던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재건립된 시대에 대해서는 확증이 없다.
실은「高安城」은 対「倭京」의 최전선 基地였다(14부참고)
그러면、「法隆寺」는?
추측대로、「倭」豪族의 군사거점이며, 역시 최전선 基地이다.
「倭京」은「近江京」의 세력범위 안으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군사적 요소가 현저하게 결여되어버렸을 것이다. 중앙집권체제가 진행되는 한가운데, 세력범위내라고 하는 것은 관리통제하에 놓였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倭」豪族들은「倭京」을 뒤로하고, 새로운 방위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 하나의 거점이 「法隆寺」였다고 생각한다.
그 중심적 호족이 앞서 말한대로「大伴氏」였다고 생각한다.
『日本書紀』로부터 추측할수 있는 「大伴氏」가 채택한 주요한 행동은 다음과 같다
「大伴氏」의 중심적 인물인 「大伴連馬来田」은、스스로「吉野宮」을 대비하고, 동생인「吹負」를、密使로서「近江京」으로 보내어「近江朝」내부로 접근시켰다.
「大伴朴本連大国」는、근린諸国의 猟師나 산적의 수령을 아군에게 붙이도록 설득하여 돌아다녔다.
「大伴連友国」은「倭京」에 남아、다른 호족등과 결집하여, 反「近江朝」세력을 확립하고 있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馬来田」에게로 결집하여, 「法隆寺」-「倭京」-「吉野宮」이라고 하는、일직선의 군사경계거점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기 위하여、「法隆寺」에 대치하여 건조된 城이야말로、「高安城」이었던 것이다.
애초에「大伴氏」등「倭」豪族이、「近江朝」에 반발했던 이유가, 「倭京」이 호족연합에 따른 합의제로 성립된 것인데 대하여, 「近江京」은, 天皇을 중심으로 했던、전제적인 중앙집권 국가를 목표로 했던 것이다.
『記紀』는 天皇을 万世一系라고 주장하지만、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지금에야 상식이다.
大化改新 이전은、그시대 ・시대의 유력 호족들에게 추천받았던 天皇家의 핏줄이라고 칭하는 인물이, 즉위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호족의 力関係에서 天皇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天智가 통설에서 말하는바와 같이、「大友皇子」를 즉위시키기위하여、皇位계승은 中国에 모방해서、「長子相続制」의 채용을 강행하고 있었다면、호족들의 반발은 必至의 사실이였고, 실제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近江朝」의 성립은「倭京」에서 본다면、対岸의 화재였다. 결국 他国의 사건에 지나지 않았지만, 新法의 강제력이「倭京」에까지 미쳐, 그것을 배제할수 없다고 한다면, 호족들에게는 불만이 퍼져, 그것이 反近江朝라고 하는 큰 에너지로 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호족들에게 큰 타격으로 되었던 것은, 중앙집권정치로부터 부과되는 조세의 부담증가이었다.
조세에는, 노동력 ・兵力이라고 하는 무형의 것과 싹둑 짤라 穀類라고 했던 유형의 것이 있었다.
피지배자층의 민중은、그런 것을 그 토지의 지배자층인 호족에게 상납하는 대가로, 안전이 보증되었다.
그러나、일단 다른 지역으로부터,그 위에 기술력 ・무력등의 힘을 가진 호족이 진출해오면, 종래의 지배자층이었던 호족은 흡수되고, 민중도 그것에 따랐다. 이와같이 하여, 힘이 있는 호족은 더욱더 힘이 세어지고, 지역사회로서의 제후로 군림하게 되었다.
징수된 조세는、그 제후를 위해 사용되고 환원되었기때문에、그 나름으로 바란스가 잡히고 있었다.
天皇이라고 해도, 그러한 호족에게 길러져 있었다.
그것이 天皇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정치로 대신하게되면、그들 호족은 정부의 고급관료로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되지만, 그 代償으로서、公地 ・公民制에 의하여 사유지와 사병을 잃고、庚午年籍이 더욱더 박차를 가해, 그것을 결정적으로 했다.
이렇게되면 租税는、토지에 대하여 머리수로 징수되게 된다.
예로부터、노동력과 토지가 풍부해서 수확량이 많은 제후는、잉여가 많고 부유해서、조세도 비교적 낮은 경향이 있었다. 그것이 새로운 노동력을 낳고、더욱더 부유한 제후가 되어갔지만, 빈부의 차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과세하게되면, 조세의 부담은 무겁게 되어간다. 더구나 제후가 아니고 정부에 징수되는 셈이다.
관료로 되었던 호족도、정부로부터 給金으로서 지급되데 되어, 설령 그것이 동액이었다하더라도, 대우면에서는 호족이면서, 피지배층이 된 셈이다.
중앙호족조차도 이러한 모양이었으므로、지방호족에게 있어서는 그 대우가 한층더 나빴다.
고급관료의 지위로는 나가지 못하고, 단순한 지방役人의 입장이 주어져서 중앙으로부터 내려오는 国司를 섬기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불만이 퍼져나가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러나、새로운 국가조직의 조기성립은、당시의 국제정세 가운데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그 정세가 호족들의 불만을 무마해 간 것이다.
668年、朝鮮半島에서는「高句麗」가 멸망하고、「新羅」에게 통일되었다.
그리고 그 翌年、「唐」・「新羅」사이에서 半島독립전쟁이 발발했다.
그 전란 과정에서 「白村江의 전투가」있었던 셈이다.
「白村江의 전투」後、「唐」은「百済」의 旧領地였던 「筑紫」에 「都督府」를 두고, 北九州를 점거했지만, 이것으로 끝을 이루고 、「葛城皇子」가「近江京」건설에 나섰다. 일반적으로는 국방상의 이유로부터의 건설인듯하다.
그렇지만, 「唐」의「筑紫」지배에 걱정을 품은 것은、「近江京」만이 아니었다.
무려 준전승국이었던 「倭国」、즉「倭京」도 또한、이것에 경계를 보였던 것이다.
「唐」이「筑紫」에 주둔하게 되면, 「倭」본국 침입은 목전의 일이 될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나라를 2개로 쪼개어 다투고 있을 겨를이 없다.
국력을 양분하여 있는 가운데, 「唐」에게 먹혀버리고 말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도「唐」이 하는 방식은、蛮夷으로 蛮夷을 制하는 것으로(夷以制夷)、属国「倭」에 의하여, 「筑紫」를 다스리기 위하여、그 이상의 東進은 면할 수 있었지만、도망치는「百済」를 좇아서、「唐」이 瀬戸内를 東進해 오는 경우, 과연「倭京」이라고 해도, 상처가 없이 지나갈수 있을까?
대국「唐」을 상대로、호족단위로 대처할 수 있는 일은 전무하다.
거기에、「鎌足」선동의 합병이야기가 날아든다.「倭京」側은 난색을 표하면서도, 생존을 걸고 합병을 용인한 것이다.
「新羅」는 반도의 통일에 「唐」의 힘을 빌렸지만, 「唐」은 반도지배의 거점으로서, 옛 「高句麗」의 영토였던「帯郡」으로부터「遼東郡」에 걸쳐서를 점거했다. 이것으로서 「唐」에 의한 반도 운영의 디딤돌은 생겼다.
그후 「新羅」와「唐」은 전쟁상태로 되어、676年、「新羅」는 百済人과 高句麗人의 협력을 얻어 「唐」을 격파하여 반도를 완전 통일하지만, 「唐」의 정책의 실패는 「新羅」를 자국의 속국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우연히도、朝鮮半島가 이러한 상태였으므로, 「唐」・「新羅」의 日本列島 本州에의 진행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이기에、畿内통일은 急務였다.
「鎌足」사망후의 畿内통일은、두껑을 열어보면, 50:50의 대등합병이 아니고, 100:0이라고 하는 흡수합병의 모양이었다.
구호족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분출해갔고, 그것은 近畿 外豪族에게까지도 파급되어 갔을 것이다.
단지 畿内와는 달리、 아직 방관할 수 있는 여유를 두고 있었다.
호족의 불만은、그대로 민중의 불만이기도 했다. 호족에게 부과되었던 租税 ・노동의 의무는, 직접적으로 민중에게 영향을 미쳤기때문이다.
조세징수의 증대는、新都建設을 위하여 불려나가게 된、남자들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대단히 가혹한 것이었다.
더구나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제도는, 설령 그것이 「近江朝」에서 입안한 법이 아니라도,
「近江朝」의 탓으로 해둔다고 하는、덤도 붙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나쁜 것은 모두「近江朝」의 탓으로 해두면, 민중 직속의 호족들에게 있어서는, 이정도로 사정이 좋은 것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것도 거들어서, 「近江朝」의 정책은、민중에게 큰 반감을 심어주어、「壬申의 乱」의 地盤으로 되엇던 것에 틀리지 않는다.
단지、이 内乱에서 대단히 흥미깊은 것은, 민중이 스스로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통상 이러한 内乱의 後는、왕권이 붕괴하여 민중의 정부가 성립되지만,「近江朝」붕괴후는、天武天皇이라고 하는 「近江朝」이상으로、율령제를 강화시킨 정부의 등장이다. 이것은 무력에 의한 공포정치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하지만, 아무리 무력을 갖고 있어도、구테타에 의한 天皇制가 崩壊해버리면、天武天皇이 즉위하는 것이 아니라 공화제정치로 이행해 갔을 것이다.
그렇지만「壬申의 乱」후는、그렇게 되지 않았다.
따라서、内乱의 근본적 원인은 「近江朝」가 펼친 제도였던 것이 아니고, 「近江朝」존재 그 자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호족의 불만, 민중의 불만은, 그 요인으로 되었던 것은 사실일것이다.
그렇지만, 「新羅」의 半島 독립전쟁은, 원인이 내쇼날리즘에 따른 것이 크다.
라고 하는 것도, 「新羅」는 韓民族국가이며、当地의 촌락이 공동체로 되어, 건국해갔던 共立왕권이었다. 이것에 대하여, 「高句麗」・「百済」는 늦게 朝鮮半島로 移入해 왔던 북방의 부여민족에게 지배당했던, 말하자면, 탈취왕권이었다.
따라서 韓民族으로부터 보면, 「高句麗」・「百済」는、朝鮮半島의 침략집단이며, 구축되어 당연하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다.
예전부터의 「倭」在地豪族 ・민중도 또한、같은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마디로 말하면, 「近江朝」는 침략왕조라고 하는 것이다.
白村江의 대패전의 직후야말로、「筑紫」가「唐」의 군사지배지역으로 되는등, 군사적 긴장의 고조로부터、국가통일의 機運으로 되었지만, 그후、 계속 이어지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唐羅」에「倭」地로 침입할 의사가 없을뿐만아니라, 연합해 있던 両国이 전쟁상태로 되자, 一転하여, 「近江京」의 존재 그 자체가 소홀해진 것은 아닐까?
참고로 『日本書紀』에 따르면, 近江 遷都는、天智6年(667)이며、「中大兄皇子」의 즉위는、그 翌年인 天智7年(668)이다.(『日本書紀』는 天智6年3月 즉위라고 하는、異説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668年에、「唐」은「高句麗」를 멸망시키고 있다.
원래、처음부터「近江京」遷都를 기뻐했던 인민은 없었으며, 近江遷都 자체에 국방상의 이유가 없게되면, 「近江京」은 전연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그 위에 庚午年籍이나 近江令이라고 했던 제도를 펼치고, 「倭京」이「近江朝」의 관리하에 놓이게 된 셈이다.「倭京」在地豪族이나 민중의 불만은 단숨에 퍼져 나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돌연히、지금까지 본적도 없는 「近江朝」의 관리가、무수히 밀려와서, 「倭京」政庁을 억눌러、자치권을 침해해갔던 것이다. 그 관리라고 하는 것은, 新政府가 정한 新冠位를 자칭하는、旧「百済」의 망명귀족이며, 「倭京」이 무엇이었는지 알지도 모른채、「近江朝」의 권위를 흔들어대고、공공연히 행동했다면 、그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인민의 불만은 、얼마나 많은 것이었을까.
민중으로서의 호족이다. 아무리 세력이 강한 호족이라고 해도, 그것은 민중이었던 것. 민중이 兵馬를 내놓고、租税를 바치는 것이다.
민중의 마음이 떠나버리면, 호족 등 일개 친척집단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이전의 内乱은、예를들면, 「乙巳의 変」을 들어보면, 『日本書紀』에 따르면, 「蘇我氏」対「天皇家」(百済分家인가?)와 같이、貴族 ・豪族간의 싸움일 수밖에 없고, 패배한 호족에 붙었던 민중은、승리했던 호족이 그대로 받아들였던 図式이며、단순히 상층부가 바꿔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前의 지배자보다 나쁜 정책을 펼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大化改新」에 의하여、민중은 토지의 私的사용권을 얻었다.「改新의 詔」는 호족에게 엄하고, 민중, 즉 농민에게는 후한 법제도였다.
그렇지만, 『日本書紀』는、그러한 改新의 법제도에 의하여 우대받던 민중조차, 「近江」遷都를 기뻐하지 않고, 밤낮없이 出火했다고 하므로, 「近江朝」가 펼친 제도는 改悪이며、도처에서 反「近江朝」의세력이 결집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국지적인 게릴라전에 지나지 않았다.
일찌기、「多武峯」에 돌담을 쌓고, 籠城과 게릴라전을 정해놓았던, 旧百済政権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한 게릴라전조차 저항할수 없었던 「倭京」側은、군사물자 ・兵馬 공히 압도적으로 부족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大伴氏」는、일족을 걸고 첩보활동에 의한 정보전을 꾀하여, 확실히 그 성과를 얻고 있다.
대략「大津京」에서「近江朝」의 감시하에 있는「大海人」과、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大海人」과「大伴氏」의 관계를、『日本書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天武壬申紀』에
「그날、大伴連吹負는、가만히 留守司(천황부재시 궁중을 지키는 관리) 坂上直熊毛와 짜고, 한둘이 한순간에 이야기하여 、
『나는 거짓으로 高市皇子라고 자칭하여、수십騎를 이끌고、飛鳥寺의 北路로부터 나와서、軍営에 나타나면、당신들은 그때 배반을하라 」
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것에서 、「大海人」의 皇子、「高市皇子」의 이름을 사칭해도, 나무라지않는 친밀한 관계였다고 추측한다.
4.大伴氏의 奇計
한편으로「法隆寺」를 전선기지로 했던 군사행동은、날이 갈수록 다른 小豪族의 힘이 결집해갔던 것도 도움을 받아, 「近江朝」의 軍糧基地「高安城」에 대치했다.
「倭京」을 제압했던 「近江朝」側의 軍糧은、「高安城」으로부터 공급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倭京」側에 의한 古京회복의 가장 빠른 길은, 「高安城」을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法隆寺」는 2번에 걸친 「近江」側의 공격끝에 거꾸로 함락되고 말았다.
이렇게되면, 「大伴氏」의 첩보활동만이 의지가 되었다.
「大海人」이「大津京」을 탈출하여、吉野宮의 다음으로 향한 곳은 、그의 湯沐邑인「美濃国 安八磨評」(현재의 岐阜県 安八郡)이었다. 湯沐邑라는 것은、왕족의 사유지이며, 국가에 의하여 지정된 일정한 戸로부터 징수되는 租税를 자기의 수익으로 할수있는 邑이며、귀족의 食封과 닮은 시스템이다.
한마디로「安八磨評」이라고 해도、현재의 安八郡만이 아닌, 그 북쪽으로 넓어지는 池田郡도 포함하여、광대한 영역이었을 것이다.
「大海人」이「安八磨評」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전연 알수없지만, 「安八磨評」을 구성하고 있는 郷에는、다음과 같은 것도 있어, 그 이유를 추측할수 있는 범위이다
「額田」・「壬生」・「小 島」・「伊福」・「池田」・「春日」
(以上、池田郡)
「那珂」・「大田」・「物部」・「安八」・「服織」・「長友」・「春部」
(以上、安八郡)
이 중에는「額田」、「大田」이라고 하는 이름의 郷이 있어、이것이「額田王」이나 「大田皇女」라고 했던 妻의 이름과 공통하는 것은, 우연이라고는 말할수 없을 것이다.
挙兵했던「大海人」이、「吉野」로부터「安八磨評」을 향하여, 스무스하게 탈출할수 있었던 것은, 「大伴氏」활동의 확고한 성과일 것이다.
언젠가 後述하겠지만、「黄書造大伴」등이、駅鈴(駅馬 사용을 위한 公用의 鈴)을 구하는데 실패하여, 말을 얻지못했기때문에,「大海人」은、어쩔수없이 도보로 東国으로 출발했지만、생각지도 않게, 「県犬養連大伴」를 만나 乗馬를 얻었다.
・・・・・
「県犬養連大伴」와는、뜻하지않게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우연이 아니고,「黄書造大伴」으로부터의 伝令에 의하여、 달려갔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
「甘羅村」에서는、猟師의 首領이었던 「大伴朴本連大国」이、猟師들을 데리고 일행에 참가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하고 있다.
「壬申의 乱」은、예를들면「近江朝」의 5人의 臣이、「大友皇子」를 받들어、天皇앞에 맹세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경과부터 전황까지 1600年의 「関ヶ原의 전투」와 그대로 닮았다고 생각한다.
혹시、「関ヶ原의 전투」가 픽션이라면、「壬申의 乱」을 모델로하여, 戦国시대를 모티브로하여 만들어진, 스토리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天智」・「大海人」・「大友」는、「秀吉」・「家康」・「秀頼」과、각각 오버랩시킬수 있다.
마지막으로 「大伴朴本連大国」은、「織田信長」의 「本能寺의 変」後、간신히 伊賀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때에、「家康」을 先導했던「服部半蔵」에게、그 모습과 코스까지도 겹칠수가 있다.
「半蔵」은 伊賀忍者의 首領이었다.
어쩌면、「大国」도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버린다.
「伊賀」는「大友皇子」의 母의 고향이다. 말하자면, 적지이다.
밤의 어둠을 뚫고 적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大海人」일행에게 있어서는, 수렵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을 「大国」은、伊賀 산을 넘어가는 선도자로서 이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을 것이다.
『日本書紀』에는、
「한밤중에 隠郡(名張郡)에 도착하여、隠의 駅家를 불태웠다. 마을 가운데로 소리를 질러서、『天皇이 東国에 오셨다. 그래서 人夫로서 따를자는 모두 모여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駅家를 불태운 것은 새삼 「名張」만이 아니다.「伊賀」의 駅家도 또한 불태운 것이다.「伊賀」와 接하는「名張」은、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敵地이며、넓은 의미에서의 「伊賀」였던것에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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