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14. 日本国 誕生(2)

청 설모 2018. 6. 30. 13:10

14. 日本国誕生(2)


1.近江京
「白村江의 전투」에 임하여,「中大兄皇子」는「大海人皇子」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고 있다.
 그것도 네 명이나 된다.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시대가 시대일 수도 있다.

 
「中大兄皇子」란 「葛城皇子」를 뜻하는데, 「余豊璋」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 딸의 아버지가 동일인물이라고는 한정할 수 없게 된다.
私見에 의하면「大海人皇子」란、「古人大兄皇子」이다.

「中大兄皇子」(以下、「中大兄」이라고 한다)는「蘇我石川倉山田麻呂」의 女、「遠智娘」을 妃로 삼고、그 딸、「大田皇女」와「莵野皇女」(持統天皇)을 天武天皇에게 시집보내고 있다. 그녀들이 앞에서 말한 4명중 2명이다.


「葛城皇子」의「葛城」県이라고 하는 것은、본래「蘇我氏」의 本貫이다.
그리고  「中大兄」의 祖母가 「嶋皇祖母命」라고 하면、모친쪽이 蘇我系인「大田皇女」와「莵野皇女」는、「葛城中大兄」의 딸이라고 추측할수있다.

그러면 「大江皇女」와 「新田部皇女」가 「豊璋中大兄」의 딸이 되겠는가?   
   
「葛城皇子」는「中大兄」의 一面을 가지고 있으면서、실체를 잡기 어려운 인물이다.
 확실히 「中大兄」이 한줄기 줄로 나가지 않으니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舒明天皇의  実子인 것조차 의심이 든다.

실은 皇極天皇이 데리고 온 자식이며,  父親은 葛城系의 누군가가 아닐까라는 상상이  마구마구 솟구치고만다.


이야기를 조금 「白村江의 패전」후로 되돌려보자.

패전후의 筑紫에는、「倭国」의 諸将들뿐만이 아니고「百済」의 諸将 ・정예들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黒歯常之」가 朝鮮반도에서 버티고 있는 동안에, 「百済」최후의 땅、「筑紫」에서 재건을 도모하여, 연전연승을 계속하고 있는「黒歯常之」와 호응하여,  旧地탈환을 계획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그 「黒歯常之」가、너무도 간단히 「唐羅」에게로 돌아눕고 말았다.

여기에「百済」의 명운이 걸렸다.

이미、諸将등이 돌아갈 「百済」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筑紫」가 「唐」의 점령하에 놓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筑紫」에 남아 있었던 「葛城中大兄」으로서는、諸将을 통솔할 수완을 갖지 못했다.
倭国人만이라면 몰라도、異国 百済人은 本国(이라고는 해도、王을 倭地로부터 보냈으므로, 이쪽이 宗国이다)을 잃고、옥쇄를 불사할 각오였기때문이다.


「豊璋中大兄」은 어떻게 되었을까?

『三国史記 ・百済本紀』에서 말하는、행방불명은 정말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하기보다도,  朝鮮의 기록에서는 행방불명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은 것일까?

탈출하여「高句麗」로 도망갔다고 하지만, 그의 宝剣은「唐羅」軍이 가져갔다고 하므로, 어쨋건 왕의 신분을 감추고 도망친 것이다. 아군이라면 몰라도、敵国人에게는 그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倭国으로 도망가서、天智天皇으로 즉위했다는 説도 있다. 그에 관해서 지금까지는 「豊璋中大兄」으로 불러왔다.  多武峯 百済정권 하에서의 皇太子의 위치에 있었기때문에, 천황즉위도 있을수 있지만, 패전국 百済王을、「唐羅」의 협력국이던「倭国」이、그것을 허락했을까?

상식적으로는 허용받을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唐」은「筑紫」에 都督府를 설치한 것이다. 아무리 새롭게 近江京을 열었다고 해도, 이러한 상황하에서 전쟁범죄인이 무사히, 더구나 天皇으로서 즉위할수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수 없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近江京을 연것은 「葛城中大兄」이다.

그런데, 「百済」가  패할수 있다는 것은,   渡航하기 전부터 짐작이 갔던 것이 아닐까?

『日本書紀』는、「白村江의 전투」前紀로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해、百済를 위하여 新羅를 토벌하려고 생각하여、駿河国에 명하여 배를 건조하게 했다.
다 만들고 나서 続麻郊(伊勢国 多気郡 麻績)으로 끌고 왔을때、그 배는  한밤중에 이유도 없이,
艫(선미 船尾)와 舳(선수 船首)가 뒤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은 싸우면 패할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科野国으로부터 말해왔다.
『거대한 파리떼가  서쪽을 향해 고개를 넘어 날아갔습니다. 크기는 열 명이 둘러쌌을 정도이고 높이는 하늘에 달했습니다.』라고. 

이것은 구원군이 패할 것이라는 징표일 거라고 짐작했다.」

이런 상태였으므로,  「中大兄皇子」도 구원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 斉明天皇이 있던 「筑紫」朝倉宮은、귀신불이 나오고 宮이 부서지는등 하다가, 그후 얼마안있어,  斉明은 죽게되지만, 이것을 「鎌足」에 의한 策謀라고 보고 있는 것은, 前章에서 말해왔다.


「豊璋中大兄」은  입장상 짊어진 것에 불과하고, 본인 자신은 전혀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패전후, 王子「忠勝」・「忠志」등은、군대를 이끌고、倭軍과 함께 항복했지만, 「余豊璋」은 신분을 감추고 탈출했다고 하는 『百済本紀』로부터도 추측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딸을「古人大兄皇子」=「大海人皇子」에게 시집보낸 것은、귀환후 백제인만이 아니고, 자신이 죽고난 후의 딸의 장래를 걱정한 것이 아닐까? 「豊璋中大兄」은 倭地로는 귀환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장래를 「大海人皇子」(以下、「大海人」으로 略한다)에게 부탁한 것일까?

百済 정권이 정권을 잡아온 것도, 본국이 뒤에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乙巳의 変」 이후, 倭国정권이 대대적으로  보복행동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豊璋中大兄」으로 보면 、멸망된 「百済」에 남겨진 황족들이  어떤 굴욕을 당할지 따위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大海人」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은, 가족의 장래에 대한 보험이었다.
다행히도 「大海人」은、出家하여 吉野에 宮을 만들어, 정치의 제일선으로부터 물러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입장적으로는, 「倭国」의 皇太子임에는 틀림없었다.
「豊璋中大兄」으로부터 보면, 요행이라고 할만한, 원하지 않았던 좋은 포지션이었다.
    ・・            ・・
「鎌足」은「筑紫」에 부임해있었기때문에、倭京은「大海人」이 잡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大海人」은「豊璋中大兄」의  제의를 、표면상으로는 쾌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出家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손가락을 물고 보고만 있을「葛城中大兄」이 아니었다.
   
본래,「蘇我」의 계보를 이어면서도, 「百済」의 비호에 후했던「葛城中大兄」이었지만、이대로 두사람이 손을 잡고 말아버리면, 2번 다시 「葛城」이 나올 幕은 없어질 것이다. 「葛城」은「豊璋」을 朝鮮半島로 보내면서、자신의 딸 둘을「豊璋」과 마찬가지로、「大海人」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함으로써、「葛城」의 倭京에서의 입장이 약속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맞이한 것이 이번 패전이었다.

「葛城中大兄」만으로는、패전후의  여러 장수들을 다 다루지 못하고、「大海人」에게 여러 장수들의 신분 보장을 원했다.  물론, 넣어둔 딸에 대해 계산하고 있는 일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大海人」에 의한 冠位의 증설은、天智 3年 春2月9日이며、검토는 天智 4年 春2月이라고 한다.
또、天智 10年 春1月에도、東宮太皇弟(大海人皇子)가 冠位와 法度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보여지고, 天智 4年과 同10年에는、「鬼室集斯」에게 小錦下의 지위를 하사했지만, 이것은、2개의 天智元年으로부터 오는 重出(중복되어 나옴)이라고 생각된다.

「葛城中大兄」은「古人大兄皇子」의 딸、「倭姫王」을 皇后로 삼고있지만, 『日本書紀』의 記述만을  믿으면,「古人」은「中大兄」에게 謀反의 혐의를 받아 살해당하고 있다.
  
정략이라고는 해도 아버지의 적인 「中大兄」에게 태연히 시집가는 신경을 이해할 수 없다. 
내 말은, 「中大兄」과「古人」의 관계가 날조라는 것이다.

사실은, 『日本書紀』에 의하여 「古人大兄皇子」의 별명을 부여받은 「大海人」이 近江朝에 딸을 황후로 보낸 것이다.


『籐氏家伝』은 天智섭정 7年의 일로서、어떤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浜楼事件」이라고 부르고 있지만、特別編『藤原鎌足』에서 언급했던, 주연에서의 天武의 長槍事件이다.

이 사건이 사실, 天智7年에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私見으로는 「鎌足」은 죽고 없기때문에, 「鎌足」은  만나지 못했을런지도 모르고, 이 7년은 天智天皇의 즉위년이기 때문에, 실은 天智元年에 일어났던 사건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아니면, 「鎌足」의 생전의 사건을 7年의 것으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건으로부터 시간경과를 추측하면, 冠位의 증설을 고했던 天智3年보다도 前이며, 白村江의 패전보다도 後年이다.

라고 하는 것도, 天智3年 혹은 4年의 冠位後의 기록에는, 

「天智3年의 条、이 달 淡海国으로부터 말해왔다. 『坂田郡의 사람、小竹田史身이 키우고 있던  멧돼지 水槽안에、갑자기 벼가 솟아올랐습니다. 身이 그것을 수확해넣으면, 그후, 날이갈수록 富가 늘어났습니다.
栗太郡의 사람, 磐城村 主殷의 新婦의 방의 문지방 끝에, 하룻밤새 벼가 자라고 이삭이 붙고, 다음날에는 이제 익어서 이삭이 늘어졌습니다.  다음날 밤, 또 하나의 이삭이 신부의 정원으로 나와서, 두 개의 열쇠가 하늘에서 떨어져 왔습니다.  여자는 주워서  殷에게 건네고, 殷은 그 때 부자가 됐다는 겁니다』라고」

 

가 있고, 그것이  비유하는 바는 불분명하긴 하지만、近江(淡海)에 무언가 変革이 있었다던지, 지금부터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天智4年의 条에는

「또 百済의 民、男女 4百여명을、近江国의 神崎郡에 살게했다.」

「이 달、神崎郡의 百済人에게 田을 지급하였다.」

라고 계속하고 있다.


天智5年의 条에는、

「이번 冬、都의 鼠가 近江国을 향해 이동했다. 百済의 남녀 2천여명을 東国에 살게했다.
百済의 사람들에게 대하여, 僧俗을 가리지 않고 3년 동안 국비로 음식을 주었다.
倭漢沙門智由가 指南車를 헌상했다.」


라고 있으며, 그리고 드디어 天智6年에는、近江遷都가 된 것이다.

「3月19日、都를 近江으로 옮겼다. 이때 천하의 인민은 遷都를 기뻐하지 않고, 諷諫(넌지시 빗대어 충고함)하는 자가 많았다. 童謡도 많고, 밤낮없이 出火하는 곳이 많았다.」

결국、「近江国」으로 百済人의 移入은「白村江의 敗戦」의 翌年、天智3年에 시작하여, 天智6年의 近江遷都를 통해 완료하고 있는 것이다 .


浜楼事件으로 된 会談에서는、패전후의 百済人의 近江 移入이 메인테마였다고 생각된다.
요약하자면、「近江国」에 百済人 국가를 만드는 것을,「倭国」측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이  노린 것이 아닐까.

그 회담은, 「浜楼事件」의 결과로부터 추측하면, 決裂되기 직전이었다. 단지 「鎌足」의 중개에 의하여、어쩔 수 없이 승낙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百済人 国家 실현을 강행했던「中大兄」에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人民의 離反과 폭동이었던것으로, 『日本書紀』의 기록으로부터 추측할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中大兄」이라고 하는 것은、「百済」의 諸将으로부터의 압력에 굴복한 「葛城中大兄」이며、마지못해 승락한 것은 「大海人皇子」이다.


天智6年3月19日、『日本書紀』는 近江 遷都를 기록하고 있다.

「鎌足」이「大海人」을 납득시킬수 있었던 것은,「葛城大兄」에게「古人大兄」=「大海人」의 딸「倭姫王」을 、后로 하는 약속을 승락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政治는 后쪽이 담당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近江朝」의 정치는 「大海人」측이 담당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近江朝=百済人国家라고 해도,「倭国」의 정치지도에 따른 合弁国家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旧百済系의 諸将들과 함께、「蘇我」나 「巨勢」 같은 「倭国」의 옛 호족들이、近江朝의 重臣으로 된 것도、같은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한다.


近江遷都라고 하는 정도이므로, 首都는 近江京에 틀림없지만, 실제로는 遷都가 아니고, 新国家의 건설이었다.
대개「京」이라고 하는 것은、首都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日本書紀』는 「倭京」 을 併記하고 있다.  하나의 国에 2개의 首都가 존재할리가 없고, 여기에 이르러서 또 2朝併立상태로 된 것이지만, 多武峯시대와는 달리, 그것이 合議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라고 상상한다.


『日本書紀』는、고의인지 校正미스인지、이러한 중대한 記述을 종종 보여주고 있지만, 이러한 것이 진정한 歴史를 해명하는、열쇠로 되어버리는 것은  편찬자 측도 결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이니 「近江朝」라고해도、「倭国」으로부터 보면, 단지 일개 지방도시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전쟁 상태에 돌입하고 만다.

물론 선전포고를 할리도 없었고, 이것이 『日本書紀』에 記載되었을 리도 없다.
그러나、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지는 기록이라면, 확실히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다음의 一文이다.

「이번 冬、高安城을 만들고, 畿内의 田税를 그곳에 모았다.  이 때 斑鳩寺에 出火가 있었다.」

이번 冬이라는 것은, 天智8年 12月의 일이다.


2.高安城

高安城이라는 것은 大宝元年(701)에 廃城으로 되었던、古代 朝鮮式의 山城이었던 것 같지만, 以来1300年、그 위치나 규모도 몰랐던「환상의 城」이었다.

그렇지만, 昭和53年4月、高安山의 東方、生駒郡 平群町의 山中에서、市民 그룹의 「高安城을 찾는 会」가 倉庫 유적이라고 생각되는 礎石群을 発見하여、그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橿原 고고학 연구소의 발굴 조사결과, 이 礎石建物은 廃城후의 奈良시대 초기(730頃)의 것으로 판명되어, 高安城은 다시 환상이 되어가고 있었지만、그 후、高安城의 성벽으로 보여지는 石垣의 일부가, 大阪・奈良府県境의 高安山(488미터)의 7개소에서 발견되어、이것이야말로 天智天皇의 高安城이라고 판단되고 있다.

조사결과, 城域은 남북 2.1킬로미터, 동서 1.2 킬로미터로 복원할수 있다고 한다.
 
1辺이 二1~3미터의 方形의 큰 화강암을 2段 쌓았던 石垣은、능선 先端을 조성했다고 보여지는, 평탄한 땅을 둘러싸고 있고, 그후 더욱더 약 300 미터의 간격으로 5개소에 걸쳐 石垣을 확인하였다.
어느것도 같은 標高上에 있으며, 五段分이 남아있는 곳도 있었다.
그러한 것은 大阪 平野측으로부터  공격하기 어렵도록、西側의 城壁은 능선上이 아닌 斜面에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山頂의 東 약1킬로미터의 奈良県 平群町 久安寺에도、幅15미터, 높이 8미터의 土塁모양의 둑길로、石垣을 더한 시설을 길이 20 미터에 걸쳐 확인, 水門인 것 같은 地形도 남아있고, 여기가 城壁의 東辺으로 보여진다.

 

여기 올라가면, 현재에도 大阪湾이 한눈에 볼수있고, 瀬戸内海를 공격해오는 적국의 船団을、감시하기에 충분하였음에 틀림없다.

통설에 따른 高安城은、「白村江의 전투」에서 패전했던 「百済」・「日本」연합군이었지만, 귀환후의 「日本」은 국토방위를 위해, 「対馬」,「筑後」,「讃岐」등 西日本에 적어도 6개소에 山城을 축조하고, 高安城은 首都 直近의 거점으로 되어 있다.


西側 斜面의 6개소는 方形으로, 바깥으로 돌출한 능선의 끝단을 평탄하게 整地하고、그것을 둘러싸듯이 石垣이 축조되어 있다. 거기에는 다른 고대城(横積이라고 불리는 돌쌓는 방식으로、동시대의 고분의 석실과 공통하는 위에, 크기등도 고대의 山城・鬼ノ城(岡山県  総社市)와 유사하다.)과 마찬가지로,  높은 망루를  짓고 있었던 걸까 ?

성벽이 남북 2.1 킬로미터에  걸쳐 山의 西側 斜面에 연결되어, 곳곳에 망루가 돌출한 장대한 城이라고 추측할수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山 전체가 거대한 요새와 같이 보였던 것으로, 바로  天智天皇이 近江朝의 위신을 걸고 축조한 것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日本書紀』가 記述하는 高安城의 様相은、軍糧을 옮겨넣고 있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高安城의 위치로부터 추측하면,  도저히 「近江朝」방어를 위한 축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天智7年(668)、「高句麗」는「唐」의  공격 前에 멸망하고 있다.
실은, 이 전투는「연개소문」의 구테타로  끝을 내고 있어,  『三国史記』에 따르면, 642年의 일이므로、단순계산으로 26年間 계속되고 있던 것이 된다.
   
그리고、同시기에 「新羅・百済」전쟁이 발발하여, 「唐」도「新羅」에 협력하여, 참전한다.
이것에 의하여「百済」는 멸망하고、 多武峯 ・百済가「百済」부흥군을 朝鮮半島로 보내어, 「百済」로서 보면, 「白村江」의 대패전으로 되었지만, 朝鮮半島에서는 끊임없이、그 후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唐」은「百済」의 旧領地에、熊津 ・馬韓 ・東明 ・金漣 ・徳安의 5都徳府를 설치하여 전후처리에 애썼지만、「白村江의 전투」後의 熊津都徳에는、百済王子 ・「扶餘隆」을 임명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旧百済分子의 반란을 抑止하려는 것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말하면, 눈앞의 敵「高句麗」공략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서는 亡国이 된 「百済」에 신경 쓸 만한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朝鮮半島에서조차 그러했다면, 日本列島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럴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리고 그 위치부터、首都防衛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면、高安城 축조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高安城은、大宝元年(701)에 廃城으로 되었지만,  이것은 文武天皇 5年에 해당한다, 廃城으로 되었다는 것은 그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 해에는 「粟田真人」를 遣唐使로서、임명하고 있는 정도이므로, 이 때 「唐」과는 우호관계였다고 생각할수 있다.
과연、対「唐」을 목적으로 했던 축성이었다면, 이때에는 목적을 잃었던 城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唐」이 축성의 원인이 아닌 것이다. 폐성의 원인도 「唐」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日本書紀』에 따르면、天智天皇 8年、처음으로 高安城에 田税를 비축하고 있다. 그리고 翌 9年에는、穀과 塩을 비축하고 있지만, 田税・穀과 塩의 어느쪽도 同類의 것이라고 추측한다.

단지, 『天智紀』에는 重出(중복해서 나옴)이 많았기 때문에、이 기록도 그중의 하나일런지도 모르지만, 흥미깊은 것은, 穀이 비축된 후에 그것에 호응하듯이、반드시 法隆寺(斑鳩寺)로부터 出火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련의 사건은 다음 일로 끝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12月、大蔵에 出火가 있었다」

이것이 사고인가 사건인가는 상상일 뿐이지만, 『日本書紀』에 따라 순서대로 箇条를 쓰다 보면,

   「大蔵으로부터 出火」
   「高安城에 田税를 모우다」
   「斑鳩寺로부터 出火」
   「高安城에 穀과 塩을 비축하다」
   「法隆寺로부터 出火」

 로 되어,「法隆寺」가 「蘇我」色이 강한「聖徳太子」(강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蘇我入鹿」그 사람 자체이므로)의 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高安城의 築城主에 의한「蘇我」系로의、공격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築城主는 물론、天智의 近江朝이며、「蘇我」系라는 것은『日本書紀』가 「倭京」이라고 기록하는 側이다.

즉, 高安城이라는 것은、倭京세력에 대한 대항을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것이 아닐까?
田税나 穀과 塩은 軍糧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高安城이야말로 近江朝으로서는、対倭京의 最前線基地였던 것이다.

또한 翌年인 天智10年、이 해는 天智가 崩御한 해이지만, 近江宮의 大蔵省의 第3倉으로부터 出火하고 있다.

매년처럼, 大蔵으로부터 불길이 오르는 것은 이상한 사태이다.
 
이것이 그 사건에 관계가 있다고 하면, 倭京이  시작한 게릴라전이 아니었을까라고 상상해버리고 만다. 高安城의 築城 개시야말로、近江朝의 倭京에 대한 선전포고이며, 그 뻔뻔스러운 敵意에 대한 倭京의 보복행동이야말로、近江京의 財源인 大蔵에 대한 공격이 아닐까?

高安城에 대해서는 이상과 같이 결론지었지만, 실제로 高安城이 倭京軍과의 전투의 拠点이었다라고 밖에 생각할수 없는 기록이 『日本書紀』에 있다. 그것은 바로 「壬申의 乱」에서의 다음의 기록이다.


「이 날、坂本臣財는 平石野에 묵었지만、近江軍이 高安城에 있다는 것을 듣고 山에 올랐다.
近江軍은 財가 온다는 것을 알고、税倉을 모조리 불태우고,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그래서 재화들은 성 안에서 밤을 새웠다. 明方 西쪽을 바라보자, 大津 ・丹比 2개의 道로부터 軍勢가 대거 몰려오는 旗가 보였다. 누군가가、『近江의 将 壱伎史 韓国軍이다』라고 말했다.


財는 高安城으로부터 내려와서、衛我河를 건너서、韓国과 河의 西쪽에서 싸웠다.
재화들은 군사가 적어서 막을 수 없었다.」


이와같이、문헌상으로부터의 高安城은、倭京공략의 拠点이었다고 추측할수 있지만, 그 城壁은 남북 2.1 킬로미터에 걸치고, 山의 西側斜面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大阪平野側으로부터의 攻撃을 想定한 構造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른 3방향은 山稜이기때문에、 자연의 要塞라고 말할 수도 없고、平野에 面한 西側을 견고하게 쌓는 것은 당연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후방으로부터의 공격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면, 어디까지나  大阪湾으로부터의 상륙을 想定했던 築城이었을까


감히, 한가지 더 말씀하시면, 『天武紀』에 기록되어 있는 高安城은、너무도 부서지기 쉽고、2.1킬로미터에 달하는 城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財」가 너무 쉽게 공략하고 있어、大船団으로 밀려오는 「唐」에 대항하기위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또한 昭和53年4月、高安山의 東쪽、生駒郡 平群町의 山中에서의、市民 그룹에 의한 최초의 발견에서 화제가 디었던 倉庫유적이라고 생각되는 礎石群은、그 후, 橿原 고고학 연구소의 발굴조사의 결과, 廃城後의 奈良시대 초기(730年頃)의 것이란 것이 판명되었다.

이 조사의 결과로부터, 築城 직후의 高安城에는 아직 城壁등이 없고、그 후、서서히 증축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벌써 이렇게 되면、 견강부회라고 말씀하실 것 같지만, 이와같이 생각하는 것에도, 어렴풋하게나마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近江京」을 방위하는데는、그 위치로부터 보아 적당한 城이 아니라고 해도、그 목적이 平城京이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地図를 펼쳐주시면, 납득할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大阪湾과 高安城과 平城京의 위치관계는 일직선이다. 
이것이라면 성벽 규모도, 大阪平野측으로부터의 공격을 상정했던 城壁의 위치를 보아도, 목적과 합치하지 않는가?

본래、近江京의 손에 의하여、倭京공략을 목적으로 하여 築城되었던 高安城은、급한 임시변통의 형편없는 城이었지만, 近江京 함락후에도、그 위치관계로부터 파괴되지 않고, 倭京측에 의하여 관리되어, 瀬戸内로부터의 침입자에대한 「平城京」의 수비로서、정비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야말로 벼랑 끝의 지킴이였던 것이리라.

여러가지로 생각할수 있지만, 결론으로서의  高安城은、이후의 역사배경은 빼고, 단순히 倭京 공략의 拠点이라고 하고、앞으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3.天智天皇

天智天皇이야말로、그 즉위이전은 이름이 많은 인물이다.
『日本書紀』를 보아도、「葛城皇子」・「開別皇子」・「中大兄皇子」가 있고, 이름만으로는 도저히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葛城皇子」와「開別皇子」는、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것 같고,「中大兄皇子」에 대해서는、어떤 때는 「葛城皇子」이고 、어떤 때는 「余豊璋」이었다.


「白村江의 전투」후의 「余豊璋」의 행방은、「高句麗」로 도망갔다고 하는 『日本書紀』의 証言이외 알수 없지만, 도망쳐서 살아나서,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면, 사형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白村江」이후의「余豊璋」은、행방을 알수 없는채로 있지만, 이미 국가외교와는 무관계한 위치에 있게 된다. 적어도「唐」만은 알 수 없도록,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이 후의 「中大兄」은 「葛城皇子」에 한정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筑紫」를 쫓기면서도 、旧「百済」의 諸将을 이끌고 「近江」에 京을 열어, 즉위했던 인물은 「葛城皇子」였다. 天智7年(668)1月이었다.

통설에 따른 天智元年으로부터 지금까지는、『日本書紀』의 기록과는 크게 다르고, 그 記述과는 정반대로  정해진 견해를 강요당했지만, 좋게 끝난다.  어처구니없다


天皇의 즉위년을 원년이라고 정하지 않고、왜 7年인가?
이것은、斉明 死後로부터 天智 즉위까지의、皇太子 섭정시대를 연대에 짜넣고 있기 때문이지만, 皇太子 섭정원년을 天皇元年으로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皇太子는 아니지만、天皇 不在時의 섭정시대는、이외에 神功皇后를 들수 있다.
그러나 皇后의 元年은 섭정원년으로 한다고『日本書紀』가 증언하고 있기때문에, 이것으로는 이치에 맞지않다.

이것에의하여、皇太子 섭정원년을 어디까지나 天智元年으로 하려면, 그 해에 天智의 즉위가 있었다고 하는 쪽이 보다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天智元年이라고 하기위해서는, 天智가 즉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日本書紀』는、동시에 존재했던 2명의 天皇(大王)을 인정할리가 없기때문에, 거기에는 교묘한 트릭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天智元年에 즉위하고 있었을 또 한명의 천황은、抹殺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또 한명의 天皇을、어떻게 부를까? 라고 생각해봤지만,『日本書紀』가 이 시대를 天智元年으로 하고 있는 이상, 天智로밖에 부를수가 없다.


이때 즉위했던  天智는、「中臣鎌足」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孝徳紀』에 말하고 있는, 다음의 一文을 그 傍証으로 들고싶다.

「5年 春1月1日、夜、鼠가 倭의 都를 향해 달려갔다. 紫冠을 中臣鎌足連에게 수여하고, 약간의 増封을 하였다.」

'수여하다'와 '하사' 등과 같이 記述되어 있긴 하지만, 이  紫冠이야말로 즉위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몇번이나 말하고 있지만, 紫色이상으로 고귀한 色을 나는 알지못한다.


第11部 巻末에서、이미 같은 記述을 하고 있지만, 勘이 좋은 여러분은, 그때에 이러한 흐름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만 문제는 적지 않다 。

이『孝徳紀』5年이라는 것은、白雉5年(654)이지만, 가령 이 해를 天智元年으로 하면, 斉明즉위(655)이후、在位7년간이 날아가 버리고 만다.

난폭한 말투로 말하면, 날아가서 전혀 상관없고, 차라리 그 편이 어찌나 고맙다. 실제 이 당시의 기록이 되면 重出(중복으로 나타남)이 많아 무엇이 어느 시대에 일어났는지, 어느쪽의 기록을 신용할것인가는 읽는 사람의 추측에 일임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러면 『魏志倭人伝』을 학자의 사정에 편하게  해석하여, 진실에 뚜껑을 덮어버리는 것과 아무런 변함이 없다.  아니, 그 이상으로 나쁜 것이 정해져 있다

이 모순점을 짤라내는 포인트는 몇개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整合性좋게 생각해가면, 모순도 아무것도  아니다.
   
『日本書紀』 편찬시에는、이미 몇개의 史書가 존재하고 있었고, 각각 天皇紀의 年紀가、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年紀順으로 편집해버린 결과,  重出 ・矛盾이 발생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은 고증없이  転載했던 것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추측한다.
요약하자면, 진실을 어둠속으로 묻어버리기위하여 앞뒤를 끼워맟춘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다른 年紀에 비교하여 보다 重出이 많고,『斉明紀』・『天智紀』에는 아마 史実의 捏造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
유감스럽지만, 『日本書紀』와 동시대를 記述했던 正史는、『古事記』이외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日本書紀』자체도 다른 『天皇記 ・国記』를 인정하고 있고, 神代의 記述에는 歴史書로서、어떤『一書』등을 인용하고 있다.
               ・・
또한『日本書紀』이외의 正史의 존재는、中国의 史書에 증거를 남기고 있다.

『宋史』日本伝에는、日本으로부터『職員令』・『王年代紀』 각각 一巻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年代記』를 인용한 記事를 남기고 있다.


그것에 의하면、

「그 年代記에서 기록한 곳에서 말하는、최초의 主는 天御中主라고 호칭한다. 다음은 天村雲尊이라고 하며,  그 후는 皆尊을 호칭한다. 다음은 天八重雲尊、다음은 天弥聞尊、다음은 天忍勝尊・・・・以下略」

라고 초대의 아메노미나카누씨는 『古事記』에도、최초의 神으로서 등장하지만, 이후의 神은 귀에 익지않은 이름뿐이다. 굳이 말하자면、「天村雲尊」은 「尾張氏」의 祖神에  이름을 올린  아메노무라쿠이지만, 天皇의 祖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몸서리칠 정도로 흥미롭다
 

또한、『日本書紀』가 初代라고 하는 쿠니토코다치는 13代이며、19代의 아마테라스는 어쩐지 18代 수사노오의 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도 또한  흘려들을 수는 없는 기록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헌상품이므로 正史 아니면 그에 준하는 것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때 入宋했던 것은、東大寺의 僧「奝然」이다.
『記紀』의 기록과는 다른 正史의 존재는、그외에도 그러한 史書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데 충분한 증거로 된다고 생각한다.
   
『斉明紀』・『天智紀』를 통하여 기록되어있는, 주요한 重出은 다음과 같다.

   「斉明4年 沙門智踰가 指南車를 만들었다.」
   「天智5年 倭漢沙門智由가 指南車를 바쳤다.」

   「斉明5年7月 小錦下坂合部連石布・大仙下津守連吉祥을 보내어 唐国에서 쓰게하다.」
   「天智4年 小錦守君大石등을 大唐에 보냈다、云々--等이라고 하는 것은, 小山坂合部連石積 ・大乙吉岐弥 ・吉士針間을 말한다.

                        생각컨대 唐의 使人을 보냈을 것이다.」


   「斉明6年5月 皇太子가 처음으로 漏刻을 만들어、人民에게 時를 알리게되었다.」
   「天智10年4月 漏刻을 새로운 台의 위에 놓고、처음으로 鐘 ・鼓를 쳐서 時刻을 알렸다.」

   「斉明6年10月 百済의 佐平 鬼室福信은、佐平貴智등을 보내어、唐의 포로 백여 명을 바쳤다.」
   「斉明7年11月 日本世記에는、11月에 福信이 바친 唐人의 続守言등이 筑紫에 도착했다고.
                             또 어떤 책에는, 이 해、百済의 佐平 福信이 바친 唐의 포로 106인을 近江国의  墾田에 살게했다. 昨年 이미 福信은

                             唐의   俘虜를 바친 것이 보이고 있다. 지금 적어두니 어쩔지 정해라 」


   「斉明7年6月 伊勢王이 죽었다.」
   「天智7年7月 伊勢王과 그의 弟王이 날을 이어서 죽었다.」


   「天智3年2月 皇太子는  弟大海人皇子에게 명하여、冠位의 階名을 増加하여 변경할것・・・」
   「天智10年1月 東宮太皇弟가 명하여、─ 어떤 책에는 大友皇子가 宣命한것으로 되어있다.─ 冠位・法度를 시행시켰다.」

   「天智4年2月 佐平福信의 功績에 의하여、鬼室集斯에게、小錦下의 位를 내렸다.」
   「天智10年1月 鬼室集斯에게 小錦下를 주었다、・・・」


주의깊게 검토하면, 더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一読하여 알게 된것만도 上記와 같다.
단지、斉明6年 ・7年의「鬼室福信」의 기록은, 『日本書紀』자신이 重出을 인정하고 있는 의미에서 여기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斉明紀年과 天智紀年에 혼란이 있는 것은, 바로 인정할수 있을 것이다.
예를들면, 斉明4年과 天智5年、斉明5年과 天智4年、斉明7年과 天智7年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斉明元年은 655年으로 말해지지만, 이 해를 天智元年이라고 하는 史書도 아직 존재하고 있다. 4年과 5年의 차이는、元年을 前天皇年의 末年로 볼것인가、翌年으로 볼것인가로 변해오고 있는 것으로、誤差内라고 생각해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斉明7年과 天智7年은、완전히 同一年이다.

또、天智3年과 天智10年、天智4年과 天智10年에 대해서는、대략 7년의 差가 있지만, 이것들은, 天智元年이 2개 혹은 그 이상 존재함으로서 일어난 것이며 실은 같은 해일 가능성이 높다.
   
斉明6年과 天智10年이야말로、 잘 설명이 안 되지만、굳이 말하자면, 모두 末年代였다는 것이 될것이다.

그리고、『日本書紀』가 말하는 斉明在位가 7年間이며、天智의 즉위가 天智7年이라고 한다.

이러한 모두가 7년이다.

실은 이 7년이야말로、앞뒤를 맟춘 것이며、복잡하게 계획한 조작이 아닐까?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孝徳朝와 그 이전의 王朝의 본래의 모습이다.

孝徳朝 이전의 蘇我系 ・倭国과  多武峯 ・百済와의 2朝시대는、이미 이해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乙巳의 変」을 경계로하여  両朝는、우선 하나로 되었다. 그것이 孝徳朝이었지만、「中大兄皇子」의 造反에 의하여, 両朝는 결렬되어、다시 2朝間에 政争이 시작되게 되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中臣鎌足」은、실의에 빠진 孝徳으로부터 皇位를 이어받아 즉위하여, 「倭国」의 天皇이 된다.
한편 多武峯 ・百済는 合併王朝때는、孝徳에게 位를 양보했던 皇極(斉明天皇)이 복귀했다라고 하는 것의 重祚했던 것이 아니고、孝徳時代에도 多武峯 ・百済의 王은 皇極이었으므로、皇極 ・孝徳 ・斉明의 시대를 통하여 연속하여 女帝였던 것이다.


이「中臣鎌足」의 즉위가、『日本書紀』와는 다른 또하나의 天智元年이다.
그리고『日本書紀』의 天智元年에는、「葛城皇子」가 즉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 天智元年은 斉明7年의 斉明薨去의 年이다.


『日本書紀』를 편찬하는데 있어서, 大別하여 다음의 2종류의 史料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①「中臣鎌足」의 즉위를 天智元年으로 하는 史書。
   ②「葛城皇子」의 즉위(斉明天皇의 薨去年)을 天智元年으로 하는 史書.


솔직히 생각하면,
①이 倭国政権에 의한 史料이며、②가 百済政権에 의한 史料일 것이다.

당연히「倭国」의 史料는、斉明의 재위를 인정하지 않고, 「百済」의 史料로부터 보면, 「中臣鎌足」(以下、鎌足天智)는 단지 「大臣」일뿐이다.


그러나 私見에 따르면, 「王」・「臣」・「連」姓은、각각 同格이며、
예를들면, 「王」姓의 頂点이「大王」、「臣」姓의 頂点이「大臣」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최종적으로「大王」이 支配하는 世上이 되어、「臣」・「連」은 臣下로물러났던 것이다.

따라서「鎌足」을 흡사 臣下처럼 기록하고 있는 『日本書紀』에서도, 그것이 이겨서 살아남은 組인, 天皇중심의 史観이니、 어쨌거나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고、차라리「大臣」이라는 地位를 남기고 있는 것만으로도、친절하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것은「蘇我氏」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孝徳 ・斉明 ・天智는 연속했던 天皇紀로 되어 있지만, 天智의 즉위는 天智元年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皇太子 섭정시대도 天智年代에 포함시키는 것은, 편찬상의 괴로움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天智는「中大兄皇子」는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日本書紀』의 天智元年에、「中大兄」은 天皇으로 즉위하지 않았기때문이다.
       ・・
따라서、紫冠을 받았다고 하는「中臣鎌足」이야말로、이때 즉위했던 鎌足天智이었던 것이다.

「鎌足」은、「唐」으로부터「筑紫都督府」의 都督으로、임명된것으로 추측되지만,「鎌足」이 선택된 이유가, 여기서는 협력국 「倭国」의 天皇이면서 어느쪽에도 짐을 지우지 않고, 언제나 중립적인 입장 이었기때문이라고 해두고 싶다.


4.鎌足天智

그런데、즉위후의 鎌足天智는、이미 말해왔듯이,「百済」원정 저지를 향해 족적을 남기고 있다.

「白村江의 전투」에서 대패배를 맛본 「百済」는 최후의 거점인 太宰府까지 도망쳐、급히 방어하면서 자웅을 결정지을 각오였지만、마지막 희망이었던 「黒歯常之」가 항복하고 말았으므로  어찌할 수도 없게 되었다.


「葛城中大兄」은、폭도화 직전의 旧百済의 여러 장수들에게 土地를、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近江에 건국했던 것은, 「倭京」에 협력관계를 구하면서,  여차하면 琵琶湖를 건너 단숨에 日本海로 도망갈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단지「葛城中大兄」의 誤算은、「大海人」이「葛城」의 제안에 대하여, 맹렬하게 반발했다는 것이다.
「大海人」으로서보면、近江에 건국하는 것은 인근에 폭탄을 안고 가는 것이 되어, 쉽게 安眠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浜楼事件」이 되는 셈인데, 「鎌足」 중재로 어떻게든 아무일도 없었다 .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문을 가지기를 원한다.   

臣下의 입장에 있는 「鎌足」이、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이 위대한 両皇子를、遺恨을 남기지 않고 중재했다는 것일까?   서로 끌어내린 셈이다. 그들은 「鎌足」이 말하는 것이라면, 어쩔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方이나 긴 창을 床에 꽂고, 方이나 군사로 에워쌓다. 이러한  一触即発의 흥분상태에서、一臣下가 말하는 것을 들을 여유가 있을까?


역사가 인정했던 위대한 그들이라면, 과연 그런 전환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鎌足」이 天皇「鎌足天智」이었기때문에야말로、명령에 따를수밖에 없었다. 라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스무스하지 않을까?

「蘇我氏」3代(私見으로는「馬子 ・入鹿」의 2代)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日本書紀』는 요소요소에서 「藤原氏」가、大王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도,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一文도 하지 않았다.
 
 물론、『日本書紀』성립때의 天皇家의 万世一系의 血筋과、天皇支配의 정당성을 공연히하는 역사서이기때문에 그것도 당연하며, 「蘇我氏」말살의 의도를  풀기 위한 것이지만, 그 당시 天皇을 괴뢰로 했던 최고권력자였던 「藤原不比等」의 혈통까지 왜곡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편찬책임자 본인이 말이다.
                  ・・
내친김에,  통설에는、女帝의 시대에 암약했던「藤原不比等」이라고 되어 있지만, 잘 조사해보면, 아무래도 암약 같은 것은 아닌 것 같다

『東大寺献物帳』에는、聖武天皇 遺品에 있었다는 「黒作懸佩刀一口」이라는 것의 由緒가 적혀 있다 
原文은 漢文이지만、「上山春平氏」의 읽어 내려오는 글을 拝借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黒作懸佩太刀 右(이 경우는 上記)、日並皇子,  항상 가져와 太政大臣에게 받는다.
大行天皇、즉위때、 즉 헌납하지 않는다. 大行天皇、죽을때、또 大臣에게 준다. 

大臣 죽는 날、또한 太上天皇에게 바치지 않는다.」


결국、이 太刀는 원래는 草壁皇子로부터 「不比等」에게 주어진 것이기때문에、文武天皇이 즉위할때에 이것을 天皇에게 바치고,

文武가 죽었을때 다시 「不比等」에게 반환되어, 「不比等」의 薨去日에、「不比等」은 이것을 聖武天皇에게 바쳤다 고 하는 것이다.
결국、女帝가 옹립되었을때는 언제나「不比等」의 手中에 있었던 것이다.
   
太刀는 어느 시대가 되어서도, 権力의 상징이다.

「이 太刀를 朕으로 생각하여・・云々」

등의 台詞를 들은 적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太刀는、즉위때부터 崩御할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것이다 . 「하사하다」「바치다」라고 하는 文字에  눈이 가버리기때문에 의심스럽게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不比等」을 모르는 者가、이 설화를 읽으면, 皇位계승자로 이어진 것처럼밖에 읽을 수 없는 것 같다.


상세한 것은 다른 기회에 넘기지만,  이 「黒作懸佩太刀」는、역시 최고권력자의 印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시대의 최고권력자라고 말하면, 天皇 말고는 있을 수 없는 거지만, 이것을 결론으로 하는 것은, 조금 너무 성급한 것일런지 모르기때문에,

우선 이 단계에서는,「不比等」은 당시의 최고권력자였다고 하는 정부견해와 같은 玉虫色의 해답으로 허락해 주시길 바란다.


 그런데、이야기를 원래로 돌아가자.

「鎌足天智」라고 하는 생각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日本書紀』가 말하는 天智年間에 倭国王이、「鎌足」이었다고 말을 바꾸면, 풀릴 수 있을까.    
私見에 의한「鎌足」은 「都督」이다. 이 官位는「唐」에 의하여 任命된 것이지만, 이「都督」이라고 하는 것은 軍政의 官位이며、과거에도 임명된자가 복수 있다.


   倭의 5王을、기억해주세요
   그중에도 倭王「武」는、스스로

「倭・百済・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国諸軍事、安東大将軍、倭国王」

이라고 자칭하고 있는데, 실은 이것은, 일부 생략하여  翻字한 것이다.
이것을 아무것도 생략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쓰면,

「使持節都督倭百済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将軍倭国王」이다.


「使持節」라는 것은、“周辺을 지킨다”라고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것 같다.
또한 잘 꺼집어내지는 것은 「安東大将軍」뿐이다. 의외에도「都督」의 쪽은 문제가되고 있지 않은듯하다.「安東大将軍」에 대해서는、「宋」보다 東쪽의 토지는 우리에게 맡겨주세요라고 해석할수 있다.


이 중에서 장식어를 생략하면、都督=倭国王이 된다.

결국、「唐」側은「百済」를 빼고나서、이 称号를 추인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倭王「武」자신이 이것을 자칭하고, 許可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三国史記 ・百済本紀』에 따르면、白村江의 패전후、「唐」의 高宗은 旧百済王子「扶餘隆」을「熊津都督帯方郡王」으로 임명하여、「百済」의 旧領을 통치시켰다. 즉、熊津都督=帯方郡王이며、스스로「都督」의 칭호를 원하여, 倭王「武」의 자칭으로부터 추리해도、都督=王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주변제국에게 王으로서 인식시키기위해서는、「都督」이라고 하는 墨표시가 필요한 것이었다. 자칭  国王보다도、「唐」의 地方官(라고 해도 地方君主이지만)쪽이 훨씬 고마웠던 일이 된 것이다.
   
시대가 변하여,「鎌足」의 시대가 되어서도、이러한 中国을 중심으로 한 국가관, 결국 중국 至上의 国家観에 대하여 차이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 후에「遣唐使」등을 보낼 이유가 없다.

그런 이유로부터、「鎌足」이 「筑紫国」의 「都督」으로 임명되었다면, 筑紫国王이 된 것이며、
동시에 「鎌足」은 私見에 따른 倭王이기도 했으므로、西日本을 대표하는 大王이라고 해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다만、「藤原氏」는 대체로 민중의 마음을 끌지 못한 듯하다.
  
그 최고의 인물은 、무어라해도「藤原不比等」일것이다.

女帝를 괴뢰로했다고 하는 이미지가 강할런지 모르지만, 그 미움받는 모습은、『竹取物語』에 있어서  실로 현저하다.

이 이야기를  모르시는 분은 있을 법하지 않다고 생각하시지만 , 「가구야히메」라고 말하면,  누구나 그 내용이 떠오르는 것이리라.


간단히 줄거리를 말하자면,

「竹取 노인의 대나무 속에서 주운 가구야姫는、도시의 남자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절세의 미녀로 성장한다.  밤낮없이 엿보러 오는 남자들이 있다고 하는、超아이돌 이라고도 말할수 있을까?
그 남자들 중에는、정치 운영에 종사하는 5명의 귀인·호족까지도 포함됐다고 한다 .
그리고 그 5 명의 구혼이 대단하고,  그들에게 억지로 난제를 강요하여 어떻게든 거절하는 가구야姫.
드디어는 황제조차도 찾게되어 버렸다.
 
그렇게 이러고 있는 사이에 달에서 마중을 왔다.

황제의 軍勢는 이걸 맞아 쏘겠지만, 화살이 닿는 것도 없고 전혀 당하지 않는다.

결국, 달에서의 마중은 가구야姫를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라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5인의 귀인, 호족은, 実在했던 인물을 모두 그대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등장인물로서는,

   「石作皇子」
   「車持皇子」
   「右大臣阿部御主人」
   「大納言大伴御行」
   「中納言石上麿呂」


의 5인이지만, 후반의 3인은 『持統紀』10年10月22日의 条에、그 이름이 보인다.

「正広参位右大臣丹比真人에、일시적으루 舎人120인을 私用하는 것을 허락했다.
正広肆大納言阿倍朝臣御主人・大伴宿禰御行에게는、각각 80명을.
直広壱石上朝臣麿呂・直広貳藤原朝臣不比等에게는、각각 50명을 허락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도 5명인데, 혹시 後의 2명은、각각 「石作皇子」・「車持皇子」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은 그렇다.

「藤原不比等」의 母는、『興福寺縁起』에 따르면, 「鏡王女」이지만、당시의 風評으로서「車持君与志古娘」을 사실이라고 했던 것 같다.

결국「車持皇子」라는 것은「不比等」을 야유했던 人名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石作氏」와「丹比氏」는 호아카리를 祖로 하는 동족으로서, 그 의미로는 「尾張氏」와도 縁이 깊다. 다른 4명이 実在했다면、「石作皇子」만이 架空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이것도「石作皇子」=「丹比真人」으로해도 좋을 것이다 。


가구야姫는 그들에게 無理한 難題를 말하지만, 「車持皇子」에 대해서는 서두가、

「車持皇子는 마음 속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たばかる』 상대를 꾀어 자기 생각대로 하게 하다. 또、 속이다 .)

라고 시작하고 있으며, 실제로 비열하고 교활한 人物像으로 되어있다.

『竹取物語』는「藤原氏」가  절정기일때 성립된 것으로서、암호였던 것이든、 비판은 목숨이 걸려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발표했다고 하는 것은, 미움을 받는 모습은 심상치 않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더욱 흥미깊은 것은、隠語의 인물은 모두「皇子」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皇子」라고 하는 것은 天皇의 子이다.

隠語를 써서 本名을 피한 것은、풍자에 따른 이유도 있겠지만, 이 2명이 실제로 天皇의 皇子였던 것이 아닐까?
「皇子」였던 것이、공연한 비밀로 되어있던 2사람의 진실을, 隠語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이야말로 공공연히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丹比真人」은、같은 이름을 가진 天武天皇의 子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不比等」가 「皇子」라고 한다면, 父「鎌足」은 당연 天皇이었던  것이 되고,
또『尊卑分脉』의 不比等伝에는、

「 公避할 곳의 일이 있다」(출생의 공개에 도움이 되는 바가 있다 )

라고 되어있고, 이것이 실은 天智落胤説의 근거로 되고 있다.


天智元年에 즉위했던 天智야말로、「鎌足」이었다고 하는 私見으로부터 보면,「不比等」은 물론「皇子」이며、天智落胤説과의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보이지 않는다.

세세한 걸 말하면 、『籐氏家伝』에 따른 「鎌足」의 생탄년은、推古22년이라고 한다.
 또『紹運録』에 따른 天智 생탄년이、推古22年이다. 이러한 符合은 큰 문제가 아닐런지도 모르지만, 符合이 보여지는 史書가 있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테면,『紹運録』은、天智 ・天武  형제역전설이、증거로 하는 史書이다.

현재의 天智綾은 山科에 있다. 이것은 『扶桑略記』・『万葉集』・『延喜式』등의 記録도、山科라고 하는 점에서 일치하지만(山科에는 그외에도 御陵 후보지가 몇군데 존재하고 있다)、『日本書紀』에 따르면, 「鎌足」도、山科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어쨌든、아무리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이러한 증언으로부터 흘깃 엿보이는 「藤原氏」의  모습은、天皇을 괴뢰로 하는 최고권력자였을런지 모르지만, 충실한 家臣이라고 하는 이미지 보다는 차라리,  大王 그 자체로 볼수있고, 특히 「鎌足」은 명실상부한 최고권력자였다고 생각하지 않을수없다.


5.豊璋(풍장)과 翹岐(교기)

「白村江의 전투」後、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던「余豊璋」이지만、『日本書紀』・『三国史記 ・百済本記』에 따르면, 「高句麗」로 도망친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百済本記』에서는、「唐」이 「豊璋」의 王剣을 입수하였기때문에, 王의 신분을 감추고 도주한 것으로 보고있다.

日本에 도항하여、天智로서 즉위했다는 説도 있지만, 그것은 어떨까?
「唐」의「劉仁願」이나「郭務宗」등이、몇번이나 来訪하고 있는 한 가운데、전쟁범죄인인 「豊璋」이天皇으로 즉위할수 있었을까?

확실히、「豊璋」은「中大兄皇子」의 一面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天智라고 하는 것은, 큰 의문이다.

来訪때의「豊璋」은 百済王子였지만, 또 한명 유배로、来訪했던 百済王子가 있었다. 그것이「翹岐」이며、私見에 의하면 後日의 「鎌足」이다.
 
 그렇지만, 「豊璋」과「翹岐」가 동일인물이라고 하는 説이 있다.

『日本書紀』중에서、「豊璋」은 別名으로 불렸던 부분이 2개소 있다.


斉明7年4月의 条
「百済의 福信이 使者를 보내어 表를 바쳐서, 百済王子 糺解를  모시고 싶다고 청했다.」

天智2年5月의 条
「犬上君이 高麗로 急行하여, 출병을 알리고 돌아왔다. 그때 糺解과 石城에서 만났다. 糺解는 犬上君에게、鬼室福信에게 罪있는 것을 말했다.」

의 2개소이지만, 斉明7年의 百済王子라는 것은 「豊璋」으로서、百済王子「糺解」는「豊璋」이다.


문제는 이 이름의 발음이다.

「糺解」라는 것은“쿠게”라고 발음되지만, 아무래도“키우게”라고 발음하는 것이 정답인것 같다.
그리고 「翹岐」는 어떤가하면、“키요우기”라고 발음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이 “키유우가이”이라고 한다.
이 両者는 朝鮮語로부터 보면 같은 발음인것 같다.
또한 , 小林恵子氏는、「翹岐」는“케우기”로 발음하며, “키우게”=“케우기”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결국、『日本書紀』의 記述로부터는 「豊璋」=「糺解」이며、
発音으로부터 보면 「糺解」=「翹岐」이므로、「豊璋」=「翹岐」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私見을 겹치면 어떻게 될까?

「豊璋」=「鎌足」이 되어、鎌足天智의 皇太子시대가「中大兄皇子」、즉「豊璋」이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지게 된다.
나아가서 、「乙巳의 変」은「鎌足」의 一人 무대였던 것이 되어、後의 藤原 4代가「梅原猛」氏가 말하는 곳의、「蘇我氏」의 亡霊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도、묘하게 납득이 간다. 뭐랄까 「入鹿」 살인의 장본인을 祖로 하는 것이므로.

그리고、「白村江의 패전」의 후、「倭地」로 도망쳐 돌아왔던 「鎌足」은、九州防備에 힘을 쏟는 한편, 「近江京」을 건국하기에 이르지만, 「山科」에서 암살당한다. 天智와「鎌足」의 最後를 맞이한 땅이「山科」였던 것도、이 両者가 동일인물이라면 당연한 것이 된다.


정말 흥미깊고 흥분시키는 説이 완성되었다.  

実際、「豊璋」=「鎌足」을 주장하는 역사가는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두사람을 동일인물로 하는 최대의 결정권자는,「豊璋」과「鎌足」만에게 주어졌던 「織冠」(大織冠?)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日本書紀』의 경우、2개 이상의 別名이나 称号를 불리고 있는 인물은, 「豊璋」=「糺解」이외에도 복수인이 있다.


예를들면,
「葛城皇子」를「中大兄皇子」나「開別皇子」、
「大海人皇子」를 「大皇弟」나「東宮太皇弟」、
「古人大兄皇子」를「吉野太子」나「吉野皇子」、
그리고 「山背大兄王」을「上宮의 王」이라고 하는 거지만、
私見에 따르면 그들은, 사실관계를소상하게 밝히고 싶지 않다고 하는 『日本書紀』의 意図가(그것은  너무 정직하여 곧이곧대로 하는 정도로)분명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豊璋」=「糺解」도 예외가 아니지 않을까?

물론、「豊璋」과「翹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독자들에게는「糺解」를 중개하는 것에 의하여、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의도적으로 착각시키는 記述로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同音이라도 異字를 선택할 수 있는 한문만의 마술이요,  그런 식으로 착각해주었으니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고,  말을 더하자면, 別人으로서는  대단히 형편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다.


『日本書紀』에 등장하는 「余豊璋」은、『三国史記 ・百済本紀』에서 말하는 「扶餘豊」이며、王子에게 「扶餘隆」의 이름이 보이기 때문에、「豊」의 부분이 이름에 해당하는 것일까?  여기에 「璋」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扶餘璋」이란것은 「百済」 제3십代王 「武王」이다

게다가「翹岐」가 渡来하게 되었던 애초의 원인인、「百済」의 구데타에 대해서 『百済本紀』는 일절 말하고 있지 않다. 물론 「糺解」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그 부분만 빼면,  앞뒤가 맞기 때문에、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을 때까지도, 어느 쪽이 말이 모자란 것이다.


역시 『日本書紀』인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많으시겠지만, 이것에 대한 記述은 『日本書記』에 軍配를 올리고 싶다.
(※각주:軍配-심판이 이긴 편으로 부채를 들다)

『日本書紀』에 따르면、百済史는 他国史일 뿐더러、편찬시에는 亡国이 되어있는 百済史를 거짓말로 굳혀도 아무런 이익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豊璋」은「武王」의 嫡子라고 생각하고 있다.『日本書紀』를 옳다고 하는 입장에서、「豊璋」의 이름은、父「武王」에게서 유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糺解」인것이지만、이 인물이「豊璋」과 같은 인물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할수 없는 이유는 다음의 一文 때문이다.

「夏5月1日、犬上君이 高麗에 急行하여, 출병을 알리고 돌아왔다.

그때 糺解과 石城에서 만났다. 糺解는 犬上君에게、鬼室福信에게 罪있는 것을 말했다、
   
6月、前軍의 将軍 上毛野稚子등이、新羅의 沙鼻・岐奴江 2개의 城을 取했다.
百済王 豊璋은、福信에게 謀反의 마음이 있는 것을 의심하여, 손바닥을 가죽으로 묶었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 곤란..」

왜、이정도로 짧은 文章 가운데에서「豊璋」・「糺解」를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糺解」란 이름의 初見은、斉明7年의

「夏4月、百済의 福信이 使者를 보내어 表를 바치고、百済의 王子 糺解를 맞이하고싶다고 청했다.──釈道顕의 日本世記에는、百済의 福信은 書를 바쳐서, 君糺解를 東朝에 바랐다고」

이지만, 「糺解」=「豊璋」이라면、이 기록보다 앞의 斉明6年 冬10月에、「福信」은「豊璋」을 百済国王으로 맞이하고 싶다고 使者를 보내고 있고, 天皇은 이것을 허가하고 있다.
결국、허가를 얻어 반년후에, 다시「豊璋」송환을 신청한 것이 된다.
마, 이것은 重出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에 계속해서,  『日本書紀』는

「─王子 豊璋 및 妻子와 叔父 忠勝등을 보냈다.  그 출발 때의 일은 7年의 条에 있다.」

라고 하면서, 斉明7年의 条에 그 기록은 없고, 이것에  이은 기록에 해당하는 것은、『天智紀』에 斉明7年의 것으로서、

「9月、皇太子는 長津宮에 있고、織冠을 百済王子 豊璋에게 주었다. 또 大臣 蒋敷의 妹를 妻로 삼았다.그리고 大山下狭井連檳榔  ・小山下秦造田来津을 보내어 、軍兵 5千余를 이끌고、豊璋을 本国으로 護送시켰다. 이 豊璋이 나라에 들어가자, 鬼室福信이 마중나와서  平伏하여  国政을 모두 맡겨 말씀드렸다 」

 라고 있기때문에, 夏4月의「糺解」의 기록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듯이 보인다.


또한 「豊璋」送還의 기록은 이것만으로 그치지않고, 天智元年 5月의 条에는,

「大将軍 大錦中阿曇比邏夫連이、軍船 170艘을 인솔하여、豊璋등을 百済에 보내고、칙명을 내려 豊璋에게 百済王位를 잇게했다. 또 金策을 福信에게 주어、 그 등을 쓰다듬어 위로하고 爵位와 禄物을 주셨다. 그때  豊璋 ・福信등은 꿇어엎드려 말씀을 듣고、사람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送還은 1回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 기록은 날짜를 바꾸어 3회에 걸쳐있다.
「豊璋」이 百済王으로서 송환된 것은、史実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보냈다 보냈다고 중복하여 기록되어 있으면, 도리어 무언가 의심하고싶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의 裏에는、소문에 오르고 싶지 않은 무언가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豊璋」과「糺解」는、실제로는 다른 사람이었지 않은가라고 하는 것이다.

앞서 소개했던、天智2年5月  ・6月의 条에 대해서、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犬上君은、高麗로부터 귀환도중、앞질러서 石城에서 기다리고 있던 糺解과 마주쳤다.

糺解은 犬上君에게 福信이 謀反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살며시 말했다.  일의 중대함에 놀란 犬上君은 그것을 上毛野君稚子등에게 전하고, 그후 、豊璋에게 전하게 되었다.  곤혹스러웠던 百済王 豊璋은 각 장군과 협의한 끝에、福信을 처형했다.」

혹시라도、「犬上君」과 마주쳤던「糺解」와「福信」을 처형했던 「豊璋」이 동일인물이었다고 한다면,
 거의 同一文임에도 불구하고 명칭을 분별하고 있는 의도를 모르겠다.


결국,『日本書紀』의 전하는 대로라고, 「豊璋」이 石城에서「犬上君」과 마주쳤을때, 「福信」에게 謀反의 마음이 있는 것을 전하고, 그것을 들은 「豊璋」이 軍議의 결과 「福信」을 처형했다라고 하는 것이 되어, 文도 내용도 앞뒤가 맞지않게 되고 만다.


   『斉明紀』

   「王子豊璋을 모시고 싶다」
   「王子豊璋을 맞이하여 国王으로 받들고 싶다」
   「豊璋을 세워서 王으로 보냈다」
   「百済의 王子 糺解을 맞이하고 싶다」
   「糺解의 일을 東朝에 청했다」

   『天智紀』

   「豊璋을 本国으로 護送했다」
    「豊璋을 百済로 보내어 百済王位를 잇게했다」


시간순으로  箇条를 써보았지만,  언뜻 착란한 듯한 내용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모두는 「豊璋」=「糺解」로、가져가기 위한 수법이었던 건 아닐까?
 발음상으로부터「糺解」는「翹岐」였다는 것에 틀림없지만, 그것으로부터「豊璋」=「翹岐」라고 보는 説은、바로 『日本書紀』가 생각하는 프레임이다.
   
「糺解」와「豊璋」은、확실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福信」은、먼저 書를 바쳐서 「豊璋」의 귀국을 의뢰하고, 다음으로 「糺解」를  원한 것이다.

모두 百済王子였으므로 그 의뢰는 당연할 것이다.


「糺解」는「翹岐」이며、私見으로는「鎌足」이다.

「豊璋」은 百済王으로서 바다를 건너고, 「鎌足」은 대략、来訪했던 「福信」과 접촉하여、무언가의 교섭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교섭의 成否는 알수없지만, 그후 바다를 건너게 된 것으로 생각되고있다.

 그때의 모습이 앞서 소개했던 『西寒田神社縁起』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단、여기에  적혀 있는 그런 「百済」 구원이 아니라 「唐羅」에 협력하기 위해서이다.


「福信」이 처형된 후의「百済」는、 당장 「新羅」가 쳐들어가고 있다.
「神武」라고까지 불리었던「鬼室福信」조차 어떻게든 해버리면, 「百済」 재건의 목표가 서지 않게 되는 것이다. 
「糺解」는「犬上君」에게、「福信」이 罪가 있다고 말했으므로, (백제로)渡航後의「鎌足」은「百済」의 내부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거짓정보를 흘린 것이다.


원래、「鬼室福信」이야말로「百済」부흥의 제1인자이었으므로、謀反할 마음을 품었을 리가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福信」의 子「鬼室集斯」가、「福信」의 功績으로부터 小錦下의 位로 승진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 功績이라는 것이 배반이었을런지도 모른다고 이미 말했다.

혹은, 「鎌足」의 謀略의 희생이 되었던 「福信」에 대한 보상이었다고도 생각된다.


실은 이 「鎌足」의 策略은、『日本書紀』에 있는「乙巳의 変」까지에、「蘇我氏」를 분열시켰던 책략과 닮아있다.

「入鹿」살해에 이르는 과정도「蘇我石川麻呂」을 끌어안아、스스로 손을 대지 않아도 「蘇我氏」를 내부분열시켜、단숨에 붕괴시켜 가는 수법이었다.

새로운 권력이 오래된 권력을 쫒아내기 위해, 더욱더 효과있는 수법은, 오래된 권력의 내부분열을 꾀하는 것이다.

「白村江 전투」前夜의 「百済」의 경우도、「鎌足」은「犬上君」이라고 하는 리모콘을 사용하여,「豊璋」을 잘 꼬드겨서、내부분열을 꾀해「福信」을 죽여버리게 했던 것은 아닐까?


그후 「鎌足」은 筑紫都督  ・倭国王으로서、통일「百済倭国」실현을 향해서 、「飛鳥朝」・「近江朝」에 걸쳐 수완을 발휘했지만,「鎌足」의 死後、다시 결렬했던 両朝는「壬申의 乱」으로 돌입해 간다.

그리고、「鎌足」의 実績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百済倭国」=「藤原」王을 자칭한 것은,「不比等」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 까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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