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13. 日本国 誕生(1)

청 설모 2018. 6. 27. 17:35

13. 日本国 誕生(1)


1.筑紫 都督府
『日本書紀』白雉5年(654)春1月1日의 条로서、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밤、쥐가 倭의 수도를 향해 달려갔다. 紫冠을 中臣鎌足連에게 하사하고、약간의  増封을 지급하였다.」

(※각주 : 増封 : 특별히 천황의 명령으로 지급되는 俸祿特)


그리고 이 기록은、「中大兄皇子」가 難波宮을 떠나갔다고 하는、아래의 記述에 계속되는 것이다.

「이 해、太子가 奏上하여『倭의 수도로 옮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天皇은 허락하지 않았다. 皇太子는 皇極上皇・間人皇后・大海人皇子등을 이끌고、倭의 飛鳥 河辺行宮으로 가게 되었다.

公卿大夫・百官의 사람들은 모두 따라 옮겨갔다. 이로 인해 천황을 원망하고 位를 떠나려고 생각하여, 宮을 山崎에 만들게 했다・・・以下略。」


쥐가 倭의 수도를 향해 달려갔다는 것은, 주요  豪族들은 難波를 떠나, 「中大兄皇子」를 뒤따라갔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그러나, 이 「中大兄皇子」의 강행후、孝徳天皇은 退位를 생각하여, 紫冠을 「鎌足」에게 주게 되었던 것이다.

혹은, 앞에서 말한대로, 「中大兄皇子」등에게 살해당했을런지도 모른다.
몇번이고 해설하고 있지만,나는 紫色이상으로 고귀한 色을 알지못한다. 가령, 紫冠이 신하의 최상위였다고 한다면, 天皇에게 相応하는 色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주시기 바란다.
따라서 紫冠의 授与라는 것은, 天皇位의 譲位에 다름 없다고 생각한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孝徳의 退位는 白雉 5年10月10日 崩御의 날이지만, 실제로는 翌年1月1日、譲位에 의하여「鎌足」이 즉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鎌足」이 天皇으로?
라고、의아한 얼굴을 하실 분도 계실 것이므로 먼저, 大王位라고 말을 바꿔도 상관없다.

또 万世一系 사상이란 것이 없었을 이 시대에는, 天皇이라고 하는 称号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大王=天皇이다.

통일 왜국정권과 결별한 多武峯・「百済」는 다시、皇極天皇을 세워(重祚하여 斉明天皇)「百済」本國 구원을 위해 원정의 준비에 착수한다.
  
重祚했다고 말해도, 『日本書紀』는 孝徳時代에 皇極上皇을 인정하고 있기때문에, 통일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天皇(大王)은 2人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鎌足・倭国」과「斉明・百済」는、朝鮮외교문제가 뒤틀림에 따라 완전히 서로를 敵國視하여,   크게 대립적 요소를 심화시켜 나갔다.
  
이후「鎌足・倭国」은「唐羅軍」과 협력관계가 되고, 「斉明・百済」의 조선원정을 저지하기위한 압력을 가해갔지만, 이당시의 「鎌足」의 정책은, 前章까지에 상세하게 말했으므로 생략한다.

그후의 多武峯・百済는、『日本書紀』에 따르면, 거점을 多武峯으로부터、九州의 현재의 福岡로 옮겼던 것 같다.  그것이 朝倉宮이라고『日本書紀』는 전하고 있다. 라고하기보다 大和공략을 위한 出先機関을 철거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런지 모르겠다.

그리고 斉明天皇은 朝倉宮에서 崩御한다.
 
그 뒤를 이은 것이 「中大兄皇子」이었지만, 斉明崩御를 전후하여, 天智天皇이(天智天皇으로서가 아니다)즉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日本書紀』가 말하는 天智元年의 시작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황태자 섭정 시대에서 天智 운운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거점을 九州로 옮겼다고 해도, 「筑紫」는 어떤 시점부터「百済」의 점령지였다. 이전에도 말한적이 있지만, 『欽明紀』에는 그런 냄새를 풍기는 묘사가 많이 되어 있고, 「筑紫・百済」의 「大和」진출이야말로、百済系인 敏達朝의 시초였다.

『日本書紀』가 멍청하게 記述미스를 범했다고는 생각할수 없지만, 「筑紫 都督府」의 존재는、「筑紫」가 「唐」의 점령정부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결과로 되어있다.


「筑紫」가 패전국인 「百済」의 점령지였으므로、「唐」은「筑紫」에 도독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朝鮮半島를 쫒겨난 「百済」의 諸将은、「百済」최후의 領地인「筑紫」에서、「百済」재건을 계획했을런지 모르겠다.

「壱岐・対馬・筑紫」등에  쌓아 올린 烽(봉화)나、「筑紫」의「水城」(해자)나「大野城」・「基肄城」은、그들이 건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唐羅」방위에 대비했을 것이다.
   
昭和50年에 발굴조사된 「水城」은、폭60미터、깊이9미터의 水路(해자)가 확인되고, 「大野城」의 土塁(토성)의 총연장은、15키로미터에 이른다고 말한다.

또「大野城」과「基肄城」은、朝鮮式山城의 수법을 취하고 있으므로、築城者는「百済」와  매우 관계가 있다.

이러한 3개의 城(砦 요새?)은、西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 太宰府를 지키도록 築城되었으며, 「唐羅」軍에 대비했던 築城이었다는 것을 용이하게 추측할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百済」최후의 거점일것이다.

원래 太宰府라는 것은、「百済」가 九州지배를 위하여 두었던 出張政府、즉 당의 「都督府」이다.
「百済」멸망후에「筑紫都督府」로서 「唐」에 의한 지배를 받아, 후에, 「日本」측이, 行政組織으로서  고스란히 이용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菅原道真」은 太宰府에 대해서,

「都府의 기능은 겨우 瓦에 色을 돌본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都府」는「都督府」일 것이다.

이러한 지휘를 맡았던 인물은, 「中大兄皇子」였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 일련의 군사행동은,「白村江 전쟁」후에도 朝鮮半島에서、旧百済将軍「黒歯常之」가 최후의, 그러나 대대적인 저항을 하고 있었기때문에, 그것에 호응하도록 해서 생겼던 행동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러한「黒歯常之」이었지만、처음에는 완강한 저항을 보여 주었던 것이、그후에는 너무도 간단히 항복해버리고 만다.
『三国史記・百済本紀』에 의하면, 「黒歯常之」의 활약에 대해, 한때는 2백여성을 탈환하여, 「唐」의「蘇定方」조차 이길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승전임에도 불구하고 항복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으로는 생각할수 없다. 거기에는 당연히 密約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후 「黒歯常之」는、 唐軍의 무장이 되어, 항복하지 않고있던 「百済」의 任存城을 함락시켜, 마침내「百済」부흥의 명맥을 끊었기때문이다.


「黒歯常之」가 항복해버리고 말았던 것에 의해, 「中大兄皇子」등은 직접 「唐羅」軍의 공격을
받을 두려움이 생겨버렸다.
旧「百済」가 취할 길은, 「唐羅」軍과 격돌하거나、倭地에로 후퇴밖에 없었다.
격돌은 멸망을 의미하고, 후퇴는「倭国」・「唐羅」사이에서 협공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쪽이든  전쟁을 피할수 없다. 旧「百済」의 諸将은 소수정예라고 말하면, 듣기에는 좋지만, 말그대로 정예라고 해도 소수인 것이다.
진퇴양란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그러나 「中大兄皇子」는  어떤 수를 쓰고 있었다.
   ・・
天智는「大海人皇子」에게 자신의 딸을 4명이나 시집보냈다.

「大田皇女」、「莵野皇女」(持統天皇)、「大江皇女」、「新田部皇女」이다.

여기서는「中大兄皇子」의 정체를 분명히 하지 않지만,  이 4명가운데 몇명은 그의 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斉明 7年 春1月8日、「大田皇女」는「百済」구원을 위하여 九州로 가는 항로 도중, 여자를 낳고있다.. 逆算하면, 약 1년전에、「大海人皇子」에게 시집가도록하여, 「中大兄皇子」는 「大和」를
떠난다. 「大海人皇子」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낸 것이지만, 해산달이 가까운 「大田皇女」가 원정에 참가한 것은 믿기어렵고、「大海人皇子」가 동행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이 件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략결혼이란 것은 일목요연하다.

「中大兄皇子」는「大海人皇子」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것이었을까?
旧百済領을 결말을 지은 後「唐」은、머지않아「筑紫」에도 침입해올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실, 그 후 「筑紫都督府」를 둔 占領政府를 펼치고 있다.

「中大兄皇子」에게 남겨진 術은、「大海人皇子」를 의지하는 것이었다


天智 3年 春2月9日의 일이다.

「皇太子는 弟 大海人皇子에게 명하여, 冠位의 階名을 증가하여 변경할 것과, 氏上・民部・家部등을 마련할것을 告하게했다」

「筑紫」에 있는「中大兄皇子」가「百済」로부터의 망명귀족이나 장군을 위하여, 「大海人皇子」에게 그에 상응한 신분과 대우의 요청을 한 것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大海人皇子」는 아주 간단하게  이 요청을 받아들여 새로이 冠位를 6階 증가하여, 冠位26階를 제정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그들이 가는 끝에 길이 트인 것처럼 보이지만, 「中大兄皇子」등은、왠지「倭京」이 아니고「近江」이었다.
「倭京」을「飛鳥」라고 한다면、왜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夏5月17日、百済에 있었던 鎮将 劉仁願은、朝散大夫 郭務宗등을 보내어, 上凾과 献物을 바쳤다.」

「冬10月1日、郭務宗등을 배웅하는 칙을 내셨다. 이날 鎌足은 沙門智祥을 보내어, 品物을 郭務宗에게 보내었다. 4日、郭務宗등에게 향응을을 베풀었다.」


「12月12日、郭務宗등은 귀로에 도착했다 」

「郭務宗」등이 온 이유는、패전국「百済」와 협력국「倭国」에 대한 전후처리 때문밖에 없었다.
「鎌足」의 「都督」임명은、이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郭務宗」은 약 7개월간 머무르고 있고, 이 사이 「鎌足」과 면회하고 있는듯하지만, 「唐」의 使者가 방문한다고하는 중요한 件임에도 불구하고, 皇太子도「大海人皇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은 단순한 使者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따라서、「郭務宗」은「鎌足」을「倭国」의 大王이라고 인정하여, 승전국에 준한 협상을 벌였기때문에 、倭国에 독립한「百済」의 이름은 소멸했다.


결국,  「中大兄皇子」등은「筑紫都督府」가 설치됨에 따라서、「筑紫」에 있는 것이 위험하게 되었다던지, 어느것이라도 「近江」에 都가 열렷던 것이다.

「近江오우미京」의 시작이다.


2.大海人皇子

「大海人皇子」는、天智天皇이 즉위함과 동시에 立太子(皇太弟)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지만, 天武天皇으로서 즉위하기 이전의 「大海人皇子」에 대해서는, 큰 事績을 기록하고 있지않다.
그 얼마 안 되는 事績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孝徳、白雉4年의 条』
「이 해、皇太子가 奏上하여『倭의 京으로 옮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天皇은 허락하지 않았다. 皇太子는 皇極上皇・間人皇后・大海人皇子등을 이끌고, 倭의 飛鳥의 河辺行宮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孝徳、白雉5年 冬10月1日의 条』
「皇太子는 天皇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듣고, 皇極上皇・間人皇后・大海人皇子・公卿등을 이끌고,難波宮에 가셨다 」

『天智3年 春2月9日』
「皇太子는 弟 大海人皇子에게 명하여、冠位의 階名을 増加하여 변경할 것.
  氏上・民部・家部등을 마련할 것을 告하셨다」


『天智7年5月5日』
「天皇은 蒲生野에 사냥을 나가셨다. 그때 皇太弟・諸王・内臣 및 群臣등  모두들  함께했다」

『天智8年5月5日』
「天皇은 山科野에 약초사냥을 가셨다. 大皇弟・藤原内大臣 및 群臣등 모두 함께했다.」

『天智8年10月15日』
 「天皇은 東宮太皇弟를 藤原内大臣의 집에 보내어, 大織의 冠과 大臣의 位를 하사하셨다.」

『天智10年1月6日』
「東宮太皇弟가 이르기를、──어떤 책에는、大友皇子가 칙명을 내렸다」


『天智10年10月17日』
「天皇이 병이 중하여, 東宮을 불러서、寝所에  부름을 받고、『나의 병이 중하므로, 後事를 너에게 맡기고 싶다.」등을 말했다.

東宮은 病이라고 称하여、몇번이고 固持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天智天皇의 皇太弟이면서、上記 내용으로부터는 정치적인 활동을 엿보아  알 수도  없을뿐더러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들판에 풀어놓는 것과 같다」

 라고까지 말씀드린 '大海人皇子'인데도 불구하고, 前半生은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
   
「尾張氏」의 実像으로부터、 진정한 古代史를 탐구해 간다고 하는 테마이면서, 오래도록 「尾張氏」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여기 와서 중요한 役을 맡아온 듯 하다。

과연『日本書紀』가운데에서도、「大海人皇子」는「大海皇子」라고 표현되고 있는 부분이 보여, 이것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또、「尾張氏」와 天武天皇과의 관계는, 다음의 『日本書紀』 壬申의 乱 前紀의 기록으로부터도 추측할수 있다.

「不破(岐阜県의 郡)의 郡家에 다다를 쯤에、尾張国 司小子部連鋤鉤가、2万의 兵을 이끌고 귀속했다」

『続日本紀』는、또한 중요한 증언을 하고있지만, 여기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따라서「大海人皇子」→「大海氏(尾張氏)」의 관계는、大和氏의 説을 환영하고, 「尾張氏」와 天武天皇에는、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해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고 싶다

여기에서는「大海人皇子」가、「大海人」이었던 이유에 신경쓰고 싶다.

「尾張氏」와의 관계만으로 보면, 「海人族의 大王」으로도 생각할수 있지만, 東国으로부터 온 大王이「壬申의 乱」에서 승리하여、天皇이 되었다고 한다면, 天武天皇 즉위 前紀에서「大海人皇子」를 등장시킬 필요가 전연 없다.  継体天皇처럼、야마토 조정으로부터 청원하여 군사행동을 일으켜, 즉위했다고 한다면, 좋은 것이다.
   
「大海人」이라는 것은、역시「大海의 人」이었을까?  좀 더 말하자면, 「大海로부터 온 人」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할 경우,「大海人皇子」는 渡来人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天武天皇 帰化人説은、小林恵子氏의 説이 잘 알려져 있는듯하다.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피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天武天皇은「漢皇子」이고, 그의 父「高向王」과 함께 中国으로부터 온、帰化人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天武는 中国으로부터 彗星과 같이 와서、바로 天皇이 되었다고 한다.


林青梧氏는、「大海人皇子」는「金多遂」이었다고 한다(「日本書紀」의 暗号 講談社刊)

氏는 白雉때 돌연 나타났던 「大海人皇子」는、大化5年 이전에는「倭国」에 없었으며, 그 이후에 와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은,「金多遂」이며、「中臣鎌足」이「金多遂」를「大海人皇子」로 변신시켰다고 단언하고 있다.


両氏의 説은 함께 매력적인 説이지만, 어느쪽의 説을 택해도, 「大海人皇子」를「皇子」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를, 설명할수가 없다.

왜냐하면, 「皇子」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天皇의 子가 아니면 안된다. 그러므로, 越前으로부터 온 継体天皇에게는、「皇子」時代는 당연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応神天皇의 5世孫이었다고해도、天皇의 子가 아니기 때문이다.


『日本書紀』는 이러한  세부적인 점에서는、잘 통일되어 있다.

예를들면, 「市辺押磐皇子」의 子인 顕宗天皇과 仁賢天皇은、摂津国에서 발견되기까지, 각각 「億計王」・「弘計王」로 되었고,

清寧天皇의 夏4月7日의 条로서、

「夏4月7日、億計王을 皇太子로 하고、弘計王을 皇子로 삼았다.」

라고 일부러 기록하고 있는 정도이다.

 

다만 예외도 있다 「宝皇女」와「田村皇子」、또한 聖徳太子의 皇子들이다.
이 중에서 「聖徳太子」는 私見에 의하면, 天皇이므로、그 아들들은 皇子라고 불리는 것에 위화감은 없다.

「大海人皇子」는 舒明天皇의 実子로 되어있기때문에, 『日本書紀』에 따르면, 확실히 「皇子」이다.  그렇지만, 第9章에서 말한것과 같이, 天武崩御年(686)이 65歳라고 한다면, 舒明崩御(舒明13年、641)때의 天武는 20歳였기때문에, 당연히 天武는 舒明이 즉위하기 전에 태어나 있었다.

그러면 아주 형편이 안 좋은 일이 생기고 만다.
   
『日本書紀』는 舒明의 崩御歳를 기록하지 않지만, 『扶桑略記』에 따르면, 49세이며, 다른 문헌도 대략 통일되어 있다.
그러면, 舒明13年(641)에 죽은 舒明은、대략 推古 元年(593)이나 1년 전에 태어난 것이 된다. 그리고 「大海人皇子」가 태어났을때의 해에 28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마아 이것은, 현실적인 연령이라고 말할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舒明의 父는 「押坂彦人大兄皇子」이며、이 者는「宝皇女」(後의 皇極)의 祖父이다.
결국 舒明은、자신의 父의 孫・異母兄弟의 子를 后로 삼은 것이 된다.

이러한 近親婚은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아니라서 한편으로 이해는 할수있지만, 그러면, 「宝皇女」가 「大海人皇子」를 낳은 연령은, 얼마가 될것인가?

系図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된다.


                吉備姫王┐
      広姫 ┐                ├─宝皇女─┐
         │        ┌芽淳王┘       │
       ├押坂彦人大兄皇子┤           │ ┌葛城皇子
       │        │           ├ ┼間人皇女
   敏達天皇┤        ├────舒明天皇─┘ └大海人皇子
       ├───糠手姫皇女┘
 菟名子夫人 ┘


대단한 近親婚의 연속이다.

가령, 舒明이 태어난 때를, 「押坂彦人大兄皇子」가 16歳때이고、「芽淳王」이 1년 일찍 태어났었다고 해보자.

또 이 이상 연령을 낯추어서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吉備姫王」이 혼인후 바로 懐妊했다고 해도, 舒明이 28歳일때 「宝皇女」는12歳나13歳밖에 되지 않는다.


舒明2年의 条에、

「2年春1月12日、宝皇女(後의 皇極)을 세워서 皇后로 했다. 皇后는 2男1女를 낳았다.
第1은 葛城皇子、第2는 間人皇女、第3은 大海人皇子이다」

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을 믿으면, 「宝皇女」가 「葛城皇子」를 낳았을때 연령은,
빨리 어림잡았다 해도 16살이다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연령으로는 되어있다.


그러나「大海人皇子」가「葛城皇子」보다도 연장자라고 한다면, 이와같이 생각함으로써 『日本書紀』는、 실로 괴로운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실제로는, 天武天皇 薨去73歳로 되어있는 문헌도 있기때문에、연대를 앞당기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日本書紀』에 薨去歳의 기재가 없는 것이、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다 .


실은 皇極에게도、崩御歳를 기재한 문헌이 舒明과 같은 정도로 존재한다. 그것에 의하면、皇極은68歳로 薨去한 것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

『日本書紀』에 의하면、皇極은 斉明7年(661)에 薨去하고 있지만, 崩御歳로부터 본 皇極의 생년은、대략 推古元年(593)이 되어、舒明과 거의  똑같이 태어난 것이 되어 버린다.
같은 연령대의  子와 孫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생각할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의 경우,  그들은 異母兄妹였지 않은가?

결국 어느 방향으로부터 검증해봐도、『日本書紀』의 記述대로는 생각하기 어렵다.


『日本書紀』가 감추려고 하고있는 사실은,『일본서기』에 있어서 형편없는 일밖에 없고 「大海人皇子」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실로、「大海人皇子」의 이름은、『日本紀』역사편찬시기에 만들어진 이름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

舒明과 皇極이 同世代人이었다고 한다면, 두사람의 年代差가 단숨에 約20년간 쪼그라들고 만다.
그렇게 되면、「厩戸皇子」와「蘇我入鹿」이 同世代人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린다.

물론 우리들은, 「厩戸皇子」(聖徳太子)=「蘇我入鹿」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놀라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것들에 의하여「高向王」과「蘇我石川倉山田麻呂」、혹은「高向王」의 子「漢皇子」와「大海人皇子」・「中大兄皇子」등은 同世代人이 되어、「乙巳의 変」에 연관 짓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天皇을 父로 갖지못한 「宝皇女」와「田村皇子」가、「皇子」로 되어 있는 것은 왜일까?

이야기가 본론으로부터 옆으로 빗나가게 되지만,  이 件도 포함해서 아무래도 「押坂彦人大兄皇子」에 대해서、 언급해 두어야 한다 。

다음의 一文은 몇번이고 소개하고 있지만, 『孝徳紀』에 있는 例의 二朝時代를 뒷받침하고 있는 会話이다.


「『옛날의 天皇들의 代에는、天下는 혼연일체가되어 다스려져 왔지만, 지금은 너무 나뉘어 떨어져서、나라의 일이 행하기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天皇도 우리皇도、万民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天도 사람도 상응하여, 그 政이 새로이 되어 왔습니다. 삼가 축하의 말씀을 올립니다.


現 為神明神御八嶋国天皇이、나에게 물었습니다.
『群臣・連・및 伴造・国造가 소유하는 옛날의 天皇의 시대에 두었던 子代入部、  皇子이름이 들어간 私民、皇祖大兄(彦人大兄을 말함)의 이름이 들어간 部와 그 屯倉등을、옛날 그대로 둘것인가 어떨것인가』라는 질문을 삼가 듣게되어, 『하늘에 2개의 해가 없듯이, 나라에 2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천하를 하나로 정리하여, 万民을 심부름꾼으로 하는 것은 오직 천황뿐입니다. 특별히 入部와 食封의 民을 国의 仕丁으로 돌리는 것은、앞에서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私用으로 부리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入部는 524口、屯倉은 181所을 헌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쓰드렸다』고 했다」

(大化2年 3月20日、「中大兄皇子」가 天皇에게 사자를 보내, 奏上했을때의 記述로서 『日本書紀』로부터  인용하여,   현대어로 번역)


3.押坂彦人大兄皇子

「押坂彦人大兄皇子」를「皇祖大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실은 그도 天皇으로 즉위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않다면 「宝皇女」와「田村皇子」가「皇子」로 될 리가 없다.
『日本書紀』는「彦人大兄」天皇을、말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彦人大兄皇子」는、 어엿한「多武峯・百済」系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舒明・皇極을 기재하면서, 「彦人大兄」天皇을 기재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수없다.


단지、이 会話의 내용은 2朝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과、같은 정도 흥미깊은 부분이 있다.

그 무리의 신하, 連, 및 伴造, 国造가 소유하는, 옛 천황의 날에 둔 子代入部,  皇子등이  私有하는
御名入部、皇祖大兄의 御名入部(彦人大兄을 말함)및 그 屯倉、고대와 같이 岡むや不や」


이것에 대한 回答이 다음과 같다.

「때문에、入部 524口、屯倉181所를 바친다」

献上한다고 하는「入部 524口、屯倉181所」는 皇祖大兄、즉「彦人大兄皇子」의 것이다.
다른 곳은 좋긴 하지만, 「彦人大兄皇子」의 것은 헌상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会話의 직전、大化 2年3月2日의 条의 一節에는、

「官司의 直営田과 吉備嶋皇祖母(皇極天皇의 母)의 각지의 貸稲을 廃止하고、
  그 田地는 群臣과 伴造의 班田으로 하시오」

 가 있다. 이 두사람은 皇極의 父母이지만、이 내용은 명백히 処分이다.
領地를 몰수시키는 정도의 불상사가 있었다고도 생각하고 싶어진다.


이전에 推古天皇은 실체가 없는 天皇이며、그 모델이 蘇我・倭国系의 女帝「物部鎌姫大刀自連公」이었다는 것과, 

実在했던「額田部皇女」에 겹쳐지는 것、그리고「額田部皇女」는 舒明天皇의 母「糠手姫皇女」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확실히 이 시대는 女帝의 시대였다는 것、그녀는 倭国系의 女帝이며, 더구나 『日本書紀』가 어떻게든
「蘇我氏」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려고  고심하고 있던 「物部氏」출신의 女帝이다.

시대부터가、舒明의 父「彦人大兄」天皇은、「物部鎌姫大刀自連公」과 併立하고 있던 것이 되지만, 『日本書紀』는「彦人大兄皇子」의 后인「糠手姫皇女」를、推古天皇으로 조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倭国系 女帝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진정한 百済系의 天皇「彦人大兄」은、天皇으로서 이름을 남길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私見에 따른 舒明 ・皇極의 父이면서,

 남아있는 기록은 처분하는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어지간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내용이 天皇의 불상사 일것이라고 생각될뿐, 유감스럽게도 추측할 재료조차 없다.
『日本書紀』는 비윤리적이었던 天皇의 事績을、過한 表現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彦人大兄」天皇의 불상사라는 것은、国家間을 넘어서는 불상사였던 것이 아닐까?

그것을 억지로 추측하고자하면, 『旧唐書倭国日本伝』에 있는 다음의 一文이 흥미깊다.


「貞観 5年、使者를 보내어 方物을 바치다. 太宗 그 길의 먼 곳을  측은히여겨(あわれみ)、
所司에게 명하여 해마다 貢物을 바치지 않도록. 또 新州의 勅使 高表仁을 보내어、
節을 가지고 다니며 이것을 쓰다듬다. 表仁、綏遠의 재능이 없고、王子와 令을 다투어、
朝命을 말하지않고 돌아간다.」


貞観 5年은、舒明3年(631)에 해당한다. 倭国의 遣使에 대하여, 唐」高宗은、

「먼 곳인 것 같으니 해마다 오지 않아도 된다 」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高表仁」을「倭国」으로 보내고 있지만、그「表仁」이「倭国」의 王子와 명령을 다툰 모양이다.

『新唐書日本伝』에서는、왕자는 없고 왕이 나온다.
 
연대야말로 舒明 3년이지만 이런 일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表仁」과 令을 다투고 있는 王이야말로、「彦人大兄」天皇이었을 가능성이 생각된다.
물론  『日本書紀』에는  이 기록은 고사하고 유추할 수 있는 기록조차 적혀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사족이고, 한 가지 검증 재료밖에 안 될 테니  이런 것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만 그쳐두고 싶다  


4.天武天皇

그런데、「大海人皇子」의 출생을 분명하게하기 위하여、 이야기가 꽤 옆길로 빗겨나 버렸는데、「大海人皇子」가 天智天皇의 兄이라고 推察할수 있는 이상、「高向王」의 子「漢皇子」와 동일 인물인 것으로 할 수 있겠다.

그러나、「高向王」은「高向皇子」이더라도 天皇은 아니다.「大海人皇子」는「皇子」이기때문에、天皇의 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舒明도 皇極도 天皇이므로、그 아들「大海人皇子」가 「皇子」인 것은 당연한 것으로, 촌스러운 일은 이 시기에 이르러 말하고 싶지 않다


前述한 西野凡夫氏는、「高向王」이 의외의 인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氏는「高向王」=「高向玄理」이라고 하여、

「『和州旧跡幽考』巻16의 武市郡 法輪寺의 条에
『推古朝때、賀留大臣 玄理가 則天의 薬師如来를 훔쳐내어 日本에 가져왔지만, 舒明때、다시 入唐하여 面皮가 벗겨져、이마에 등대를 놓아, 世人들은 灯台鬼라고 했다』
라고하는 기묘한 전승이 採録되고 있다.
   
『帝王編年記』斉明6年의 条에도
『今年、遣唐使 高向玄理 為灯臺鬼、詩云』으로서、이것도 또한 기묘한 詩가 採録되어 있다.
더우기、『東寺王代記』에는、
『或記云、推古天皇御代 迦留大臣 遣唐使 ニ渡リケルカ。灯台鬼ニナサル』라고 記述되어있다.
『賀留』、『迦留』、『軽』이며、軽皇子로서 後日의 孝徳天皇이다. 그 軽皇子가 賀留大臣玄理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賀留大臣玄理로부터 高向漢人玄理와 孝徳天皇을 동일인물로 보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 추정된다.」(『新説日本古代史』文芸社)

라고 말하고 있다


『日本書紀』에 의하면、「高向史玄理」는 孝徳朝에서 国博士라고 불리어、天皇의 브레인이었던 인물이지만, 이 이름으로부터 상상되는 인물이라고 말하자면 역시「高向王」이다.
「高向王」=「高向史玄理」라고 한다면、「倉山田麻呂」는「高向史玄理」였던 것이 되지만, 확실히 「乙巳의 変」이후의 「倉山田麻呂」는, 바로 国博士라고 말할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실제、「高向王」=「高向史玄理」는、흔히 말해지는 것으로서、여기에 氏의 説과 私見을 결부시켜보면,  孝徳天皇=「蘇我石川倉山田麻呂」가 된다


『孝徳紀』에 限해 존재하는「現為神明神御八嶋国天皇」은、孝徳天皇의 일이 아니다.  私見에 따라 그것은, 「倉山田麻呂」의 일이지만, 본래 『孝徳紀』에 記述된 天皇은、孝徳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사고방식이 根底에 있는 限、보통의 이해에 따른 「現為神明神御八嶋国天皇」은、孝徳의 일이 되고 만다.

혹은、「倉山田麻呂」는 사실, 孝徳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高向王」이「高向史玄理」였다고 한다면、「高向王」=孝徳天皇이라는 説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高向史玄理」는 遣唐使로서 여행중에 죽게되어、「倉山田麻呂」의 최후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高向王」=「高向史玄理」를 통하여、「倉山田麻呂」와 孝徳天皇이 서로 겹쳐지게 된다면 、「倉山田麻呂」자살은 孝徳 자살인 것이 되어、이 事変도、「白雉」年号 발령 이후의 것이 된다.


想像이다.
想像에 지나지 않지만, 『日本書紀』만으로 보더라도、이러한 것을 상상하게 만들어버리는것이다
그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는 天武天皇의 前半生이、앞에서 본대로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 그 天武天皇에 대해서 말하자면、역시「吉野」이다. 그리고 교과서급의 역사사실로서는, 『日本紀』의 편찬 사업의 시작일까.


단지、天武의 詔에 따른、

「帝紀 및 上古의 諸事를 기록하여 校定시켰다」

 그것은、『欽明紀』로부터 『天武紀、上巻』까지의 것이라고 推察하여, 이것을『十巻本』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이 『十巻本』이라고 해서 、『日本書紀』 혹은『日本紀』(이하、『日本書紀』로 통일)로서 再編될때에、얼마나 윤색되었는지 알 수 있었던 게 아니다.


그러나、『日本書紀』가  성립 당시 그대로 라고 、믿고 있는 분은 없을 것이므로、 뭐, 이 일은 낫다고 해두지만 굳이 말하자면, 天武天皇의 薨去기록을、天皇의 生前中에 기록하는 것은 있을수 없으므로  그에 대한 언급은 있을 수 없으니 기록하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下巻』은 持統天皇이후의 시대에、편찬된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다음의 記述을 일독해 주셨으면 한다

「『천황이 말씀하시는대로 따르시지요. 어째서 無理를 하여 내가 물려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出家하여 吉野에 들어갔습니다. 仏道의 修行에 임하여、天皇의 행복을 기원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말을 마치고 허리의 太刀를 풀어 땅에 내던졌다.  또 舎人들에게 명하여、모두 太刀를 벗게했다.

그리고 法興寺의 仏殿과 塔의 사이로 가서, 몸소 수염과 머리를 깎고, 袈裟를 입어셨다.」


上記는 「吉野」로 가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大海人皇子」가 吉野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모습일까 ?

실은,『孝徳紀』天皇즉위 前紀에 기록된, 「古人大兄皇子」가「軽皇子」(孝徳)에게 天皇位를 물려주고、吉野로 出家하는 모습이다.

이 記述을 보고、「古人大兄皇子」를 연상했던 분은, 상당히 『日本書紀』에 정통하고 계신 분이다.
내용은 전적으로 같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日本書紀』는、

「--어떤 책에 의하면 古人太子라고 하고、어떤 책에서는 古人大兄이라고 한다. 吉野山에 들어갔기때문에、어떤 때는 吉野太子라고도 했다」

라고 하고 있다.
또「吉野皇子」라고하는 표현조차 있다.
太子라는 것은 皇太子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古人大兄皇子」는 皇太子였던 것이 된다.


또한、「古人大兄」이라고도「古人太子」라고도 불리고 있었던 것이라면, 大兄이라는 것은 皇太子의 의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굳이 大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皇太子라고 明言하는 것을 꺼려했던 것이다.

「古人大兄皇子」는 舒明天皇과 「蘇我馬子」의 딸「法提郎媛」사이의 子라고 하지만, 『日本書紀』에 있는 그의 記述은、다음의 4箇所밖에 보이지 않는다.


舒明 2年正月
「蘇我馬子의 女 法提郎媛은 古人皇子를 낳았다.」

皇極 2年10月
「蘇我臣入鹿은 독단으로 上宮의 王들을 폐하여、古人大兄을 天皇으로 할려고 꾀했다」

皇極 4年6月
「古人大兄은 私宅으로 뛰어들어가 사람들에게『韓人이 鞍作臣 을 죽였다. 나도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하며、寝所로 들어가 문을 닫고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大化 元年9月
「古人皇子는 蘇我田口臣川堀・<他、人名略>고 함께 모반을 꾀했다」

「中大兄은 菟田朴室古와 高麗宮知에게、兵 약간을 이끌고 古人大兄皇子등을 토벌시켰다」


단 이것뿐이다.「古人大兄皇子」는「蘇我氏」의 血로 태어나、
「乙巳의 変」에서는「入鹿」의 편에 서고、결국、謀反의 혐의가 씌워져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皇子라고 해도 、「入鹿」의  관계자들은 모두 죽는다고 하는 、説明을 위하여 등장시키고 있는 것으로서 그 이외는 아무것도  남기고 있지 않다.

事績이 없다고 하는 점에서는、天武天皇과 많이 닮아있다고 말할수 있지만, 「吉野太子」라고까지 불렸던 、「古人大兄皇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吉野에 남겨져 있는 伝説은 天武天皇의 것 뿐이며,「古人大兄」을 모시는 神社조차 없는 것은 어떤 이유때문일까?
   
 결국、「古人大兄皇子」는 문헌상으로만 존재하는 인물이며, 実在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나는、天武天皇과「古人大兄皇子」는、동일인물이라고  포착하고 있다.
라고 하기보다、「乙巳의 変」후의「古人大兄皇子」의 행동이야말로、天武天皇의 진실의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十巻本』편찬의 최대의 목적은、「大海人皇子」의 거병으로부터 近江京 함락까지를、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十巻本』의 巻十(『日本書紀』巻28 에 해당한다)은、後에 수정되었다고 해도, 명백하게  天武天皇에게 사정이 좋게 씌어져 있다.
  
「大海人皇子」의 吉野로 가는 모습은, 『天智紀』의 巻末과、『天武紀』의 巻頭에 각각 기록되어 있지만, 저 유명한 『天武紀』에 보여지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들판에 풀어준 것이다」

라고 하는 台詞등은、그 하나의 예일 것이다.


이러한 吉野行으로부터 거병까지의 「大海人皇子」의 행동은 、너무도 스무스하고 서술적이며 읽는 사람을 설레게 하지 않을 수 없다 。
한마디로 말하면, 너무 멋있는 것이다.

그 결과、「大友皇子」는 살해당할 운명에 있었지만, 그가 살해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를、『日本書紀』로부터 발견할수가 없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든 「大海人皇子」가 皇位계승을 사퇴한 것이야말로、「大友皇子」가 皇位계승권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이다.


『日本書紀』에 따르면、「大友皇子」는 皇位에 오르지는 않았지만(平安時代의 몇가지 史料에는、大友皇子의 즉위를 기록하고 있다.)、次期天皇이었음은 틀리지 않고, 그것을 토벌하여 즉위한 天武天皇이야말로、천하의 대악인이라고 해도 어쩔수없다.

天武는「壬申의 乱」에 의한 승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吉野」行의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


『日本書紀』의 성립은、681年의 편찬 개시보다 훨씬 늦은 720年이다.
때는 元正天皇의 代이기 때문에、스탭들의 멤버 구성원도 상당히 변했음에 틀림없다.
편찬의 목적도 본래의 목적이었던  「壬申의 乱」의 정당화로부터、현행의 왕권에 사정이 좋게 씌여진  修史事業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의 세월이 、이미 경과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새롭게 가담한 스태프는、天武天皇의 의사를 왜곡하지않고 『十巻本』을 다시 썼던 것이 아닐까?

「古人大兄皇子」에게는、그러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中大兄皇子」와「古人大兄皇子」의 명칭을 비교한 경우、그 문자로부터 「古人大兄」이 兄이라는 것은 용이하게 상상이 간다
   
「中大兄」은 2번째나,  한 가운데의 皇子의 의미가 되고, 2명의 「中大兄皇子」를 암시하기에 충분한 명칭이다. 그리고,  両者모두 「大兄」이며、결국 皇太子였다는 것도 시사하고 있다.

앞에서도 기록했지만,  「古人大兄皇子」는、『日本書紀』에 의하여 만들어진 문헌상의 皇子에 지나지 않는다.

「古人大兄皇子」가  謀反을 이유로、살해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 살아있어달라고 하면 당연히 곤란한 결과가 될 것이다. 뭐라고 해도、天武의 吉野 입산은、天智10年(671)이라고 이미 記載가 끝났으니까.


그것보다도 「中大兄皇子」의 수하병사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쪽이 오히려 흥미깊다.
「古人大兄」이 天武라는 것을、용이하게 推察할수 있는  서술이 되어 있는 곳에서, 天武를 잘 생각하지 않는 記者에 의한 加筆일 것이다. 「壬申의 乱」에 대한 복수심도, 거들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등으로 상상해 버린다.

따라서、「吉野」에 「古人大兄」의 伝説이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며、伝説이 없는 것이、도리어 自説을 뒷받침하는 결과로 되어있다.


「大海人皇子」・「古人大兄皇子」가 実은 동일인물이며,  어쩌면 「漢皇子」도「大海人皇子」의 別名일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大海人皇子」와「中大兄皇子」는 틀림없는 異母兄弟이며、年長順으로、「古人大兄(大海人)」・「間人皇女」「葛城皇子」로 되어,  그 이름에 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大海人皇子」는 皇太弟가 아니다.


蛇足이지만、여기에서 天皇의 연령에 대하여 언급해두고 싶다.

아시겠지만 、『日本書紀』에는『欽明紀』이후 『推古紀』를 빼고는 薨去歳의 記載가 없다.
『日本書紀』의 성립이 720年이며、欽明의 薨去年이 『日本書紀』로부터 계산한대로 571년이라면, 그 사이기간은 겨우 150년이 채 안 되는 셈이 된다.  더구나,  『日本紀』의 편찬개시가 통설대로 681年이라고 한다면、더욱더 짧게되어 90年이다.
 고작해야 그정도 기간의 천황의 薨去歳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체에 무리가 있고, 하물며 편찬개시의 장본인인  天武의 薨去歳가、不明이엇다는 것은 절대로 생각할수 없다.


그런데 中世의 史書로부터、薨去年만을 빼내어  一覧表로 만든 것이 아래의 表이다.

 ┌───────┬──┬──┬──┬──┬──┬──┬──┬──┬──┬──┬──┐
 │史書名    │欽明│敏達│用明│崇峻│推古│舒明│皇極│孝徳│天智│天武│持統│
 ├───────┼──┼──┼──┼──┼──┼──┼──┼──┼──┼──┼──┤
 │日本書紀   │--│--│--│--│--│--│--│--│--│--│--│
 ├───────┼──┼──┼──┼──┼──┼──┼──┼──┼──┼──┼──┤
 │扶桑略記   │--│24│--│72│73│49│--│--│--│--│--│
 │       │  │  │  │  │85│  │  │  │  │  │    │
 ├───────┼──┼──┼──┼──┼──┼──┼──┼──┼──┼──┼──┤
 │水鏡     │63│24│63│72│73│--│68│--│52│--│--│
 ├───────┼──┼──┼──┼──┼──┼──┼──┼──┼──┼──┼──┤
 │愚管抄    │63│37│--│72│73│--│68│--│--│--│--│
 │       │  │28│  │  │  │  │  │  │  │  │  │
 ├───────┼──┼──┼──┼──┼──┼──┼──┼──┼──┼──┼──┤
 │一代要記   │63│--│--│--│73│49│68│--│53│65│58│
 ├───────┼──┼──┼──┼──┼──┼──┼──┼──┼──┼──┼──┤
 │皇代記    │63│48│--│72│73│48│--│--│--│--│--│
 │       │  │  │  │  │75│  │  │  │  │  │  │
 ├───────┼──┼──┼──┼──┼──┼──┼──┼──┼──┼──┼──┤
 │仁寿鏡    │63│61│48│72│73│49│--│--│58│73│--│
 │       │  │48│  │  │  │  │  │  │  │  │    │
 ├───────┼──┼──┼──┼──┼──┼──┼──┼──┼──┼──┼──┤
 │興福寺略年代記│87│83│69│72│73│49│68│--│49│65│--│
 │       │63│  │  │  │75│57│  │  │58│  │    │
 ├───────┼──┼──┼──┼──┼──┼──┼──┼──┼──┼──┼──┤
 │神皇正統記  │81│61│41│72│76│49│68│59│58│65│58│
 ├───────┼──┼──┼──┼──┼──┼──┼──┼──┼──┼──┼──┤
 │皇年代略記  │63│48│--│73│73│49│68│--│58│--│58│
 ├───────┼──┼──┼──┼──┼──┼──┼──┼──┼──┼──┼──┤
 │如是院年代記 │63│48│--│72│70│49│68│59│58│73│58│
 ├───────┼──┼──┼──┼──┼──┼──┼──┼──┼──┼──┼──┤
 │紹運録    │63│48│--│73│73│49│68│--│58│65│58│
 ├───────┼──┼──┼──┼──┼──┼──┼──┼──┼──┼──┼──┤
 │倭漢合符   │--│--│--│--│73│49│66│59│58│72│--│
 └───────┴──┴──┴──┴──┴──┴──┴──┴──┴──┴──┴──┘
  (같은 칸 上下로 숫자가 있는 것은 異説있음)


이렇게보면, 各 史書에서 薨去歳에 대해서는、뜻밖일 정도로 잘 간추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은, 확고한 史料나 通説이 통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日本書紀』가 그러한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推理도 성립된다.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면, 用明天皇의 薨去歳를 기록하고 있는 史書는 4史가 있지만、모두 다르다.

그러나、用明의 재위는 본래부터 부정하고 있기때문에、이러한 4史에 대해서는 짤라버리는 생각을 하고싶고, 마찬가지로 薨去歳가  분분한  敏達天皇에 대해서도、초대 百済系 天皇、즉 도래한 天皇이었기때문에、상세한 史料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러면、崇峻으로부터 天智天皇까지의 薨去年은、2説이 존재하지만, 『一代要記』・『水鏡』에、각각 天智53歳・52歳를 빼면, 거의 완전하다고 할 정도로 갗추어져 있다.

그렇지만, 그것에 계속되는 天武天皇은 『一代要記』・『紹運録』의 65歳、『如是院年代記』・『倭漢合符』가 73歳・72歳라고하는 、크게 2개의 異説이 존재하고 있다.
다음의 持統天皇에는、異説이 전연 없음에도 불구하고말이다.


『日本書紀』로부터 본 天智天皇의 薨去歳는、舒明13年(641)의

「이때、東宮의 開別皇子 16歳에 벌을 받았다 」

를 옳다고 한다면 대략 46歳이다.

이 歳야말로、天智와 天武의 兄弟관계는、실은 弟・兄이었다는 傍証이지만, 他史가 모두 58歳라고 하고 있으므로、간단히는 긍정할수 없다.

 天武 年長説의 원인이 되었던 『紹運録』조차、天智58歳 薨去로 하고 있는 정도이다.
「古人大兄皇子」의 내용을 알아채리지 못하면、『日本書紀』를 他史와 비교 검증하지 않는한, 天智・天武의 관계는 弟・兄으로 되지 않는다.


『欽明紀』이후、推古를 제외하고는 薨去歳의 記載가 없는 『日本書紀』가、16歳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이 기록이 올바른 것으로、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中大兄皇子」라던가「葛城皇子」가 아니고、이때에 한하여,「開別皇子」로 되어 있는 것이다.

天智天皇은「天命開別天皇」이므로、「開別皇子」는 天智를 말하는 것이지만, 아무런 先入観없이 읽으면, 「開別皇子」=「葛城皇子」이라고는 우선 읽을 수 없다.


天智는 2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기때문에、「開別皇子」의 이름이야말로、葛城天智와 또 한명의 天智를 한 사람에게 결부시키는 、트릭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誅를 불렀다고 하는 16歳의 「開別皇子」는、「葛城皇子」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大海人皇子」는、4歳 연상인 20歳인 것에도 異論이 없다.
 
다만 어디까지나、「開別皇子」 16살 때와 비교하기만 한다면,
잘、天智崩御歳는「開別皇子」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天智10年에 崩御한 것은、天智일 것이 뻔하지만、그것은 「葛城皇子」일런지도 모른다.
   ・・        ・・
어떤 天智의 탄생부터 다른 天智의 薨去까지를 天智의 생존년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또、『日本書紀』로부터 계산하면46歳 崩御이지만、他史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58歳 崩御라고 하고 있는 것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단지 이것은 다음 章에서 설명하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天武의 즉위 前紀에는、

「타고난 소질을 지닌 훌륭한 분이었다. 성인이 된 뒤로는 웅장하고 武徳에 뛰어나 있었다.
 천문·둔갑에 능하다.」

 「淡海三船」이 天武라고 이름붙인 이유도、이 부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天武紀』에 기록되어 있는 구체적인 天武像은、결여된 前半生으로부터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武芸와 지식이 뛰어난 것같다.

그렇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通説에 의한 天文이란 것은「諸葛孔明」에게서 보여지는 天文術이며、遁甲이 처음 보여지는 것은 『後漢書』의 方術伝에서、中国에서 일어났던 忍術같은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陰陽道의 일종이다.  
天武天皇 4年春1月1日의 기록에、「陰陽기숙사」가、 同月5日에「占星台」가 처음보인다.


推古10年10月에 百済의 중 「観勒」이 天文・地理와 遁甲・方術의 책을 갖고 来訪하고 있지만, 天文・遁甲등의 「術」은、道教的요소가  강한 것외에 道士가 渡来하지 않았을 이 시대에、「能하다」고 말할수 있기까지 어떻게 習得한 것일까?


확실히、「吉野」는「役行者」가 「吉野 金峯山寺」를 창설했던、修験道場이다.
그것이 天智의 白鳳年中(白鳳은 逸年号)이라고 하므로, 「吉野」에서 습득했다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中世의 史書에는 辛酉白鳳(661) ・ 壬申白鳳(672)・癸酉白鳳(673)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부터、白鳳元年은 天武元年이  아니냐고 추리할 수 있고、「役行者」의 吉野 입산은「壬申의 乱」이후가 된다. 따라서、天武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 된다.

게다가、修験道나 陰陽道는 「壬申의 乱」을 경계로、급속히 퍼져 나갔던 것이다.

또 、「壬申의 乱」에서는 自軍에는、「前漢」高祖・「劉邦」의 전투방식을 모방하여、近江軍과   판별하기 위하여、衣服에 붉은 천조각을 붙혔다고 한다.
   
이때의 모양은、「柿本人麻呂」가 『万葉集』에 남기고 있다.

「북소리가 천둥소리라고 들을 때까지, 뿜어대는 小角의 音도 敵을 본다.、
호랑이인가, 용서하면 여러 사람이 겁을 먹을 때까지 바친 幡의 나부끼는 것은,
 겨울이 오고 봄이 되자 들판마다 피워놓은 들불이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것과 같이、」


펄럭이는 붉은 旗가 봄에 들판의 마른풀을 태우는 것 같이、大地를 가득 채운 모습을 노래한 것이지만、『日本書紀』에는 馬를 구하는 記述도 있기때문에、騎馬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역시, 중국식의 병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략、이와같은 兵法에 따른 전쟁은、「壬申의 乱」의 吉野方에 의한 것이 처음일 것이다.

약간 이상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天武로부터 古代・中世에 近代戦이 들여온 셈이다.

天武의 幼少는「大海人皇子」이었지만、「漢皇子」일런지도 모른다고 前述했다.


이상을、整合的으로 생각하면, 「漢」으로부터「大海를 건너서 온 人」이야말로、天武였다고 하는 것이 된다.
小林恵子氏는、天武를 귀화인이며 중국으로부터 来日하여 갑자기 天皇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무모한 생각이라고 생각된다.

天武는「前漢」의「劉邦」의 末裔이며、渡来人이었을 거라고도 감안하고 싶지만 、
첫째、天武가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渡来人이었다면, 군사적, 경제적 기반도  갖지 못한 가운데 얼마안되는 기간에 大王이 되어 지방호족을 통솔하고, 近江京을 전복시키는 것등이 가능할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天武의 実際像에는、어떤 者의모습이 투영되는 것 같이,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年齢조차  고려하지 않으면、바로 상응하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그 어떤 자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大海人皇子」에 대해서의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①「大海로부터 건너온 人」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다.
   ②「皇子」 결국 天皇의 子이다.
   ③「高向王」의 子「漢皇子」일지도 모른다.
   ④「高向王」=孝徳天皇이라면、孝徳天皇의 子이다.
   ⑤舒明의 子가 아니다.
   ⑥天智보다 年長者이다
   ⑦斉明이 母이다
   ⑧「古人大兄皇子」이기도 하다


「漢皇子」의 소식은 일절 不明이지만、孝徳의 子에는「有間皇子」가 있다.
그러나 이 「皇子」도 謀反의 혐의를 받아、「中大兄皇子」에게 絞首에 처해진다.

『日本書紀』는 따로、④孝徳天皇의 「皇子」를 말하고 있지 않기때문에、이것에 의하여 해당자는 없게되고 만다.

그렇지만, 孝徳의「皇子」는  意外의 곳으로부터 등장한다.


『多武峰縁起』에는、

「定彗(定恵)和尚者、中臣連一男、実天萬豊日天皇皇子也」

라고 기록되어있다. 天萬豊日天皇이라는 것은 孝徳을 말한다. 따라서

「定恵和尚은、鎌足의 長男이긴 하지만、실은 孝徳天皇의 皇子인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것에는 놀라움이다. 学問僧「定恵」는、孝徳의 皇子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定恵」는 遣唐使이면서、사실은「唐」에 인질로 되었다. 그러나 私見에 따른「定恵」는 그후、
唐帝의 天勅에 의하여「筑紫都督」에 임명되고 있다. 결국 帰国을 명령받은 것이다.
그것도、굉장한 護衛가 딸린것이다.


「鎌足」에게는、二男이 있었다. 長男이「定恵」、次男이 「不比等」이다.
 二人은 同腹으로서、母를 「与志古娘」이라고 하고있지만, 그녀는  「軽皇子」의 寵妃였던 것 같다.더구나、懐妊中인채로 「鎌足」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현대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古代의 가치관으로서는 절대적인 신뢰관계의 증거인것 같다.

『日本書紀』에는、皇極 3年1月1日의 条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中臣鎌足은 이전부터  軽皇子와 친했었다.  그래서 그 宮에 참배하여 侍宿(시숙)을 하려고 했다. 軽皇子는 鎌子連의 資質이 고결하고, 용모에 범하기 어려운 기품 있는 것을 알고, 원래 寵妃인 아베 씨의 여자에게 명하여、別殿을 깨끗하게 하고、寝具를 새로이 해서 간절히 시중들게 하고 정중히 대접하게 되었다. 中臣鎌子連은 知遇에  감격하여 舎人에게 이야기하기를 『이런 은혜를 베푸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皇子가 천하의 왕으로 되시는 것을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天武에게 投影되어 있는 어떤 者라는 것은、물론 이「定恵」이다.

天武와 「定恵」에게는、중요한 점에서 공통하고 있는 것이다.

「定恵」는 귀국했던 665年의 12月 23日에、죽었다고 생각되어지고 있지만(『貞彗伝』)、『東寺王代記』에는

「15年 定恵和尚 入滅」

로 되어있다. 이 15년은 天武 15年이다. 天武의 薨去도 역시 15년이다.


또 天武는 차기 皇位를 사퇴하고, 出家하여 仏道수행을 택하게 되지만, 그때 頭髪을 내리고 沙門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定恵」는、물론  僧侶이다.

확실히 天武가 취한 행동은, 天智를 납득시키기 위한 알기 쉬운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들판에 내보내는 것과 같다 」(『天武紀』)

 라고 듣기까지한 天武의 「吉野」行이다. 天智는 아무말도 않고 허락하고 있는것 같지만, 혹시 이것이 사실이라면, 누구의 눈에도 近江京 전복의  画策인 것처럼 비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宮廷 안에 있으면서 계획을 짜는 편이 안전한 게 아닐까.

따라서  이 記述은、원래 「定恵」가 僧侶였기때문에、沙門이 됐다는 天武의 記述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古人大兄皇子」가 吉野로 물러났을 시대에는、아직 修験道의 장소는 아니었다고 생각되어, 修行僧과 吉野는  결부되지 않는 것이다 。

그리고 天武의 이름은 「天淳中原瀛真人」이지만, 『多武峰縁起』에는「定恵」에 관한 것으로 다음의 一節이 있다고 한다.

「和尚其性聡明絶倫故小字曰真人」

「定恵」는 幼少年때도 또한 「真人」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더우기 「真人」에는、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天武 13年에 제정된 八色의 姓의 第1位이며、최고의 爵位로 天皇의 자손에게 주어진 것이다.
통설에는、天武 자신의 이름을 最高位로서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거꾸로 말하면, 天武가、「真人」이라고 하는 귀족의 최고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 된다.
   
「天淳中原瀛真人」이 天武의 본명이라면, 신하와 같은 이름을 가지는 것을 天武자신이、허락할수가 있었을 것인가?

『万葉集』에서「神」으로 칭해지고, 「높이 비추는 日(해)의 皇子」라고 노래불리었던  天武가 아니었던가?
天武가 죽은 뒤라면 몰라도、天武와 同世代에 살고있는 자가、같은 이름을 가지고 잇었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수가 없다.


이와같이 『日本書紀』에 기록되어있는 天武像은、「定恵」 그 자체이거나 모두「定恵」에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다.

持統・元明天皇시대에 暗躍했다고 말해지는 人物이야말로、「藤原不比等」이었지만、마찬가지로, 天智시대의 그것은、「藤原鎌足」이었다.

「定恵」도 또한、그렇지 않았을까?

우리들이 알고 있는 天武는、정말로 天武였을까?

『日本書紀』(『天武紀』를 제외하고)는 天武에 대하여, 잔재주를 너무 많이 부린 것이 아닐까?
   
幼年期・青年期가、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 複数人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처럼 즉위전의 모습이 어둠에 싸인채로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특별히 天武天皇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天智의 경우에도 그랬다.
   
天智・天武와、그것에 계속되는 女帝의 시대, 미심쩍은 일이 많은 가운데、「定恵」가 私見대로였다면,  확실히 이 시대는、

「藤原」三代의 시대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集大成이、「大藤原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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