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12. 白村江의 전투

청 설모 2018. 6. 12. 16:21

12. 白村江의 전투


1.年表

朝鮮문제를 둘러싸고 통일정권은 분열했다. 百済政権은 다시 多武峯에 진을 치고、보다 강고하게
築城했다. 이것을 後岡本宮이라고 불렀다.


百済政権은「百済」지원정책을、명확하게 내세워 실현을 시도하는 한편, 倭国政権의 군사행동에도 대비했다.
그러나, 본거지였던 岡本宮(後岡本宮?)은 화재를 당하고 있다.  이것은 戦火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継体天皇즉위로부터、지금까지의 역사의 흐름을 정리하기 위하여, 여기에서 私見을 섞은 年表를 작성해 보려고 생각한다.


  502年  雄略天皇(이때 이미 死亡)、征東証軍을 하사받다.
  503年  大伴金村등、男大迹王을 영입하다. 継体天皇 즉위.
        嶋君(「百済・武寧王」)、人物画像鏡을 보내다.
  523年頃 大和의 磐余의 玉穂宮으로 遷都하다.
  524年頃 旧 야마토 세력(旧 仁賢政権)이 筑紫国王「磐井」와 손을 잡았기때문에
        継体朝는 이것을 阻止. 군사행동으로 나오다.「磐井」는 翌年 죽임을 당하다.
                     「磐井의 乱」 

  
  527年  継体天皇 崩御。安閑天皇 즉위, 경사진 金橋宮으로 遷都하다.
  528年頃 安閑天皇 崩御。宣化天皇 즉위, 九州 博多의 부근을 군사강화하여, 聖明王系「百済의 침공에 대비하다.
  531年  安閑天皇・「上殖葉皇太子」암살되다. 欽明天皇 즉위.
  538年  欽明7年、仏教公伝。(『日本書紀』는 欽明 13年으로하고 있다)
  555年  「百済」의「余章」(威徳王)、弟인「恵」를 来訪시키다.
  562年  「新羅」가「任那」를 멸망시키고 점령하다.


  571年? 欽明天皇 崩御。全権을「蘇我馬子」에게 맡겼지만,「百済」가 정권을 빼앗아, 敏達天皇에 의한 百済政権을 탄생시켜,

                      二朝 병립상태로 된다. 이후 「蘇我氏」와「物部氏」同盟하여、「蘇我馬子」는「守屋」의 누이인 「物部鎌姫大刀自連公」을 
        妃로 한다.   渡来系 氏族과 蘇我 호족연합의 성립.
  584年  「蘇我馬子」石川의 宅(宮인가?)에 仏殿을 만들다.
  585年  「蘇我馬子」塔을 大野丘의 北에 세우다. 敏達天皇 崩御。蘇我호족연합이 정권을 탈취 「蘇我馬子」가 大臣(大王과 同位)

                       으로서 최고권력자(천황)이 된다. 敏達天皇 사망후의 百済政権은 舒明天皇을 세워, 多武峯에 築城하며 籠城하다
        
  587年  「物部守屋」이 崇仏에 반대하지만、「馬子」등에 의하여 収拾되다.
  592年  「馬子」는「物部鎌姫」에게 譲位하여、新倭国政権이 성립한다.
        (『日本書紀』는 推古天皇으로 기록하여、딴사람으로 전하고 있다)
  593年  「馬子」와「鎌姫」의 子,「善徳」(聖徳太子이며「蘇我入鹿」)이 섭정하다.
        
  603年  冠位12階의 制定。
  605年  斑鳩宮으로 옮김.
  607年  遣隋使「小野妹子」를 보내다.
  608年  「小野妹子」가「裴世清」을 동행하여 귀국하다.
  626年  「蘇我馬子」죽고、「入鹿」이 大臣을 이어받다.
        二朝間의 항쟁이 격화되다.


  631年  百済王子・「余豊璋」来訪하다.
  636年  岡本宮이 倭国政権의 공격을 받아 焼失되다.    
  637年  倭国政権의 攻撃 앞에、多武峯・百済가 패배하다.
  642年  多武峯・百済에서는、舒明天皇이 崩御하고 皇極天皇 즉위하다.
  645年  「蘇我入鹿=聖徳太子」、甘橿丘의 언덕 옆에서 암살당하다.「乙巳의 変」
        元号를 大化라고 하다.
  646年  倭国政権을 이어받은「蘇我石川倉山田麻呂」이、改新의 詔를 発하다.
        
  647年  私有의 土地 人民의 収公을 명하다. 7色13階의 冠位의 制定。
        「金春秋」来訪하다.
  648年  「金春秋」에게 帯同되어 遣唐使가 보내진다.
  649年  冠位19階을 정하다. 倭国과 多武峯・百済에 의한 통일전쟁이 모색되다.
                    「倉山田麻呂」謀反의 혐의가 씌워져 자살하다.
        新羅使・「金多遂」来訪하다.


  650年  元号를 白雉로 고치고, 孝徳天皇을 통일천황으로 하여 통일정권이 발족하다.
        難波長柄豊崎宮으로 천도하다.
  653年  船 2隻으로 遣唐使 241人을 보내다.(「金多遂」帯同)하지만、
        第2 船은 침몰 조난한다. 朝鮮문제의 꼬임으로서 통일정권은 분열하다.
        孝徳天皇은 殺害(?)되고、「中大兄皇子」등은 大和飛鳥河辺行宮으로 옮긴다.        
  654年  中臣鎌足에게 紫冠을 하사하다.


2.阿倍比羅夫의 遠征

『斉明紀』에 기재되어 있는 대사건은, 무어니 해도 「白村江의 전쟁」에서의 대패배이지만,
 먼저,「阿倍比羅夫」(아베노히라후)의 蝦夷討伐 원정에 주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阿部比羅夫」의 東北원정에 관한 記事는、斉明4年(658)을 시작으로하여, 同5年、6年에도 보이지만, 4年과 5年의 記事에 대하여 말하면,  船軍180艘、攻略先도「秋田」과「能代」(5年에서는、「飽田」과「淳代」)이며、명백히 重出(중복해서 나오는 것)했다는 것이 通説이다.


오래전은 「本居宣長」이、1回 1年에 지나지 않았던 遠征을、3年으로 연장한 것이겠지만, 私見으로는 4年과 5年의 기록은 통설대로 重出(중복해서 나오는 것)하여、5年에「秋田」「能代」、6年에「粛慎国」(미시하세노구니)를 공략한 것으로 한다.

粛慎이라고 하는 종족은、실제로는 잘 모르지만, 『日本書紀』가 蝦夷와 粛慎을 구별하여 기록하고 있는 이상, 이 両者는 다른 종족일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蝦夷는 東北地方이며、粛慎은 北海道의 종족이 아닐까 말해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斉明元年(655)、「高句麗」・「百済」의 연합군의 공격앞에 분해직전의 「新羅」는、드디어「唐」의 지원을 구했다.
그리고 5年後인 斉明6年(660)、「唐」은 직접「百済」에 遠征軍을 보내왔다.

「阿倍比羅夫」의 원정은、이와같이 朝鮮半島가 戦火로 휩싸여있는 한가운데에, 실행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斉明6年(660)의 7月에 「百済」는 멸망하고 있지만, 同年 3月에「阿部比羅夫」는「粛慎国」을 공격하고 있다.
이 3월이라고 하는 것은『三国史記・新羅本紀』에 의하면, 唐의 高宗이 「蘇定方」등에게「百済」토벌을 命했던 달이며, 同月「金春秋」도

토벌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또한、私見으로는 蝦夷討伐은 斉明五年(659)3月이며、同年4月에는「百済」가「新羅」의 국경을 침입하여, 「新羅」의 独山・桐岑의 2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있다.

결국  이 2회의 원정은, 조선반도에서 백제, 신라의 양국간 전쟁에, 링크된 것과 같이 실행된 것이며, 조선반도 문제와 관계가 있는 것임은 부정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웬지 많은 역사가는, 이것을 문제로 삼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원정의 주모자가 누구였는가를 확실히 함으로써 원정의 진의가 보여질 것이다.
원정의 주모자는 倭国政権인지 百済政権인지、어느쪽이었던 것 같다.

긴박했던 정세 가운데에서 원정이  필요했던 이유는, 蝦夷가 중앙정권에 대하여 不穏한 움직임을 보였거나, 蝦夷를 아군으로 끌어넣기 위해서였던가의 어느쪽일수밖에 없다.


「白村江의 전쟁」으로、百済政権이 朝鮮半島에 출병한 병사가 2만7천명, 별동대 1만여명, 합쳐서 3만7천명이다.
百済政権측이 이것만의 数를 출병할수 있었던 것은, 畿内의 유력호족의 대부분이、百済政権에 붙었다고 생각되어진다.

라고말하는 것은 倭国政権측에는、「阿部比羅夫」의 遠征때의 180隻의 배를 출항시키는 것만의、
통솔력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蝦夷征伐의 주모자는、百済政権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百済」本国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이때에, 왜 백제정권이 원정을 강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百済政権으로서는 일각이라도 빨리、本国으로 원군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므로, 蝦夷공략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약하면、蝦夷등이 이때의 政権与党이던 多武峯・百済에게、돌연 도전해 온 게 아닌가


공략했던 것은  日本海측이었다고 생각하면, 대략 제3국이 蝦夷등을 움직여, 百済政権의 朝鮮출병에 걸음을 멈추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 第3国이라고 하는 것은、蘇我・倭国이었다고 생각된다.

蝦夷등은 대단한 저항도 보이지 않고 항복하고 있지만, 倭国政権에 있어서는 最低라도、百済政権이 朝鮮出兵에 이르기까지의 時間지체가 되면 좋고,  斉明 5년에는 蝦夷을, 6年에는 粛慎을 움직여、百済政権의 발을 묶어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테러행위이다.


3.鎌足의 策謀

약체화된 倭国政権에게、이러한 것을 할수있는 知恵者가 존재하고 있었을까하고 의문을 가질수도 있지만,

그것이 「中臣鎌足」이었다고 한다면 어떨까?

紫冠을 하사받은 「中臣鎌足」은、倭国政権의 최상급 지위 즉, 대왕으로서 옹립된 것으로 推察한다.


孝徳天皇이 죽은(暗殺?)後、倭国政権을 담당한 것은, 어쩌면「鎌足」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그의 입장을 현대에서 말하면, 브레인 매니저나 총리대신이라고 말할수 있지 않을까?
당시로서는 섭정이라고 말할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결론지은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鎌足」은 이후 『日本書紀』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다음에 나타난 것은, 「白村江의 전쟁」의 이후로서 天智 3年의 일이다.

따라서 「白村江의 전쟁」의 때에도, 조선반도에는 건너가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지만, 豊後国의「西寒田神社縁起」에는、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2年 癸亥。従大唐責百済国。依之欲従日本遣兵救百済。即勅藤原臣大織冠。
 因是下向九州地。陣豊前之国中津郡。為下知集軍兵。其後漂泊群国送数月」

(663年、大唐이 百済를 공격했다. 日本은 百済를 구하기 위하여 兵을 보낼려고 했다.
大織冠이던 藤原臣은 그때문에 九州에로 下向하여、豊前国 中津郡에 陣을 치고, 거기에서 軍兵을 모았다.

그후 群国에 漂泊하며 수개월을 보냈다)

『日本書紀』는「鎌足」의 이러한 행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만,  이러한 기록으로서 남아있는 이상,  무언가의 액션을 일어키고 있었던 것은 당연히 생각할수 있다.
   
「乙巳의 変」에 있어서는、「中大兄皇子」와 함께 가장 큰 주역이었던 「鎌足」이 아닌가?
「白村江의 전쟁」의 前「中大兄皇子」에게 협력하여 軍兵을 모집했다고 왜 『日本書紀』는 기록하지 않았을까?

또한、
   「其後漂泊群国送数月」   이라고 한다.

漂泊이라고 하는 것은 漂流를 말하며、방랑하며 걷는 것이다,

「百済」구원군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百済」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漂泊하기를  数개월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때문인가?
推察하기에、『日本書紀』는 기록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기록할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天智 2年(663、癸亥)2月、「百済」의 将「佐平 鬼室福信」이 왔다.
   
「이달、佐平福信이、唐의 捕虜  続守言등을 바쳤다」

上記가 이때의 기록이지만, 「福信」의 来訪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百済王子・「余豊璋」을 멸망후의 百済王으로서、맞이하자고 요청한 것도 그였고,「百済」멸망후에도 고군분투하며、「新羅」・「唐」의 연합군과 격렬하게 싸우고, 부흥을 목표로했던 名将軍이었다.

더우기『日本書紀』는、

「福信은 神武의 権을 일어켜、한번 멸망한 나라조차도 부흥시켰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그러한「福信」이었지만、이후 5月에 謀反의 혐의가 있다고 의심받아, 반역자로서 다음달 처형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역자・「福信」의 子이었던「鬼室集斯」는、「白村江의 大戦」에서 패배후、亡命者로서 渡来한「福信」의 공적에 의하여、小錦下의 지위를 하사받았다.


이것도 이상한 이야기이다. 이것으로는 반역행위 그 자체가 功績이었다고 하는것이 되고 만다.

「福信」의 반역행위가 功績을 받을 만하다면、位를 하사하는 측인 天智朝는、「百済」지원을 달가와하지 않았다고 하는것이 되고,

「鎌足」도 당연히 그것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鎌足」은 왜 漂泊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원래부터 倭国政権의 摂政이었던「鎌足」에게、「百済」遠征의 의지등은 있을리가 없었다.

그리고 斉明天皇이「百済」원정군을 挙兵하고나서、第一軍이 도항하기까지 약 8개월, 또한 메인인 2만7천兵이 도항하기까지는 2년 가까이를 보내고 있다.


확실히 斉明天皇이 朝倉宮에서 죽고나서 사태는 급변하였지만, 사태는 일각을 다투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건 아니었을까?

「鎌足」이 軍兵을 모집하려 漂泊했던 이유로서는,「百済」원정의 阻止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원정군은 쉽게 도항할수 없었던 것이다.
朝倉宮의 雷神(뇌신)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
그리고「福信」에게는 어떤 식으로든、謀反을 갖다붙인 것이 아닐까?
물론 그러기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조건을 제시한 것에 틀림이 없다.

「福信」의 반역행위는 바로 功績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鬼室集斯」에게 官位의 授与는、그 보답이었다는 것은 말할것도 없다.
그리고 이로 인해、「百済」원정을 결행했던 「中大兄皇子」와、「白村江의 전투」후의 「中大兄皇子」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하는 副産物까지 들러붙고 말았다


「鎌足」은「百済」지원정책을 강행하여, 통일정권을 이탈했던 多武峯・百済보다도、율령국가 실현에 움직이기 시작했던 蘇我・倭国에、「鎌足」자신이 지도자가 되는 것에 의하여「倭国」의 미래를 모험했을 것이다.
물론 「新羅」나「唐」과 은밀히 결부된 것은 、당연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덧붙여 이야기하면、漂泊후의「鎌足」은 朝鮮半島에 도항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한번 언급할 예정이지만, 여기서는 상세한 記述은 피하지만, 이것은 결코 推測이 아니다. 사실『日本書紀』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2人의「中大兄皇子」에 대해서도 다른 기회에 다시 기록하지만,「鎌足」에 대해서도 말하면, 「乙巳의 変」의 그와는 다른 사람이 아닐까라고 의심이 들정도로의  변신의 빠르다
이 몸놀림은 「鎌足」의 人物像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鎌足」에 대해서는 特別編・「藤原鎌足」을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鎌足」의 理想은、多武峯・「百済」가 蝦夷등에 관련된 동안에 朝鮮문제가 결판이 나서, 「倭国」이  他国에게 일절 간섭받지 않는, 新生「倭国」으로서 자립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먼저는 斉明 5年(659)4月、「秋田」과「能代」에 蝦夷등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同年11月、「有馬皇子」의 謀反을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策은 모조리 빗나가 찢겨 나갔지만 、그 최대의 목적은, 多武峯・「百済」에 援軍을 보내지 않기위하여, 시간 끌기만 한다면 좋았으므로, 成否는 2차문제였을 것이다.


同年 7月3日에는、蝦夷을 데리고 가서「唐」에 遣使를 하고있다.
이것이 목숨을 건 遣使이었던 것 같다.

2隻으로 출항했던 배중 1척은, 옆으로부터의 逆風에 떠내려가、大使인 小錦下「坂合部石布連」는、漂着했던 섬사람에게 살해당했다.

남은 5인은,(원래 몇명이 출항했는지는 不明)、섬사람의 배를 훔쳐서 括州에 도착、주 현 관리에게 낙양까지 보내진 모양이다 。

이 遣使는、「唐」에 대한 恭順의 의지를 나타내는 목적이지만、「唐」측은 2정부상태를 이해했는지, 몰랐는지 遣唐使를 幽閉시키고 말았다.

「우리 国은 내년 반드시 海東의 政을 할 것이다(朝鮮과 戦争할 것)。너희들 日本의 客도、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

라고 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 遣使는 多武峯側의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지지만, 敵国으로 遣使한다고하는 감각은,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다.
또、『斉明紀』에 인용되어 있는『伊吉連博徳의 書』에는、

「이 해(660)8月、百済가 이미 평정된 後、9月 12日에 日本의 客人을 本国으로 放免했다.
19日、長安을 출발했다.


10月16日、洛陽으로 돌아가서, 처음으로 阿里麻등 5人을 만날수 있었다.
11月1日、将軍 蘇定方등에게 포로로 잡혔던 百済王 이하 太子 隆등、諸王子 13人・大佐平 沙宅千福・国弁成 이하 37人、합쳐서  50명 정도의 사람을、아침에 갓 모시기 위해 、갑자기 데리고가서 天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天子는 은혜를 베풀어、楼上으로부터 눈앞에서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19일 우리들의 노고를 위로받았다.
24일 洛陽을 출발했다.」


따라서 遣使가、「倭国」측의 의지에 따른 遣使였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또한 660年3月에는、숙신을 움직이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藤原氏」를 제사지내는 「大原神社大神宮」은、大神宮이라고 이름 붙인 것치고는 、너무도 초라하고 작은 祠堂으로서、威勢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땅이「鎌足」의 탄생지라고 하는 전설까지 있지만, 그것을 알리는 팻말은 、나무로 만들어진 粗末한 것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희대의 영웅처럼 전해져가면서 이 인기 없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화살을 연이어 시위에 대듯 빠른 책략이、私見대로「鎌足」의 것이었다고 한다면,  좀 더 대책을 강구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4.百済滅亡

660年、「唐」・「新羅」의 연합군(이하「唐羅」軍)은、「百済」의 수도 扶余를 함락시키고, 「百済」최후의 왕이었던 義慈王을 사로잡아、중국으로 압송했다.
唐軍의 大将軍은「蘇定方」이었다.


『日本書紀』에 인용되어 있는 『日本世記』에는、

「新羅의 春秋智는、唐의 大将軍 蘇定方의 힘을 빌려서, 百済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다른 説에서는 百済는 自滅한 것이라고도 한다. 王의

大夫人이 무도하고, 자행하는 대로 국권을 내주며, 훌륭한 사람들을 벌하여 죽임으로써 禍를 자초했다고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되어있고, 『三国史記』新羅本紀 ・百済本紀에도、같은 記述이 보인다.
단지 무도했던 것은  夫人이 아니고、義慈王 본인이었던 것 같지만,『日本書紀』 원문에서는,


「或曰。百済自亡。由君大夫人妖女之無道。撃奪国柄。誅殺賢良」
혹자는 말한다. 백제는 스스로 망했다, 왕의 대부인이 요녀로서 무도했기때문이라고.
국가통치권을 뺏고 현명한 신하들을 죽였다.
 
라고 되어있으므로, 「義慈王」이 寵妃에게 약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데、『三国史記・百済本紀』에 따른「百済」패전후의 처리로서、

「蘇定方은、王 및 太子 考、王子 泰 ・隆 ・演 및 大臣 ・将軍 88인, 百姓 12,807인을 唐의 수도로 보내었다.

百済国은 5郡 ・37都 ・200城 ・76万戸였다.
이때에  旧百済国을 쪼개어서、熊津 ・馬韓 ・東明 ・金漣 ・徳安의 5都督府를 설치하고, 각각 州 ・県을 총괄하여, 在地의 수장을 발탁하여, 都督 ・刺史 ・県令으로 하여, 각각의 府 ・州 ・県을 다스리게 했다. 또 蘇定方은 郎将 劉仁願에게 旧百済 都城을 지키게하고, 또한、左衛郎将 王文度를 熊津都督으로하여、百済에 잔류하던 사람들을 위무시켰다.
   
蘇定方은 포로들을 上 高宗에게 接見시켰다.  高宗은 그들을 책망한 후 용서했다. 그 후, 王이 病死했기때문에 金紫大夫、衛尉卿의 칭호를 보내어  旧臣들에게 王의 임종에 서로 만나는 것을 허락했다.」

라고 되어있어, 결국 「義慈王」과 그의 忠臣은、죽을때까지「唐」에 유폐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唐」이   旧百済国領에 설치했던 5都督府의 「都督府」가、후에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다.


660年8月、「唐」이 점령하고 말았던「百済」였지만、이대로 終戦을 맞이한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白村江의 전투」의 序章으로 나아간다.

「百済」의 旧将・「鬼室福信」등이、残兵을 끌어모아 挙兵한다고 하는 暴挙에 나선 것이다 。
그리고 「福信」이 다음에 취한 행동은、多武峯・「百済」에 있던 百済王子・ 余豊璋」을 맞이하여, 百済国王으로 하는 것이었다.
                       ・・・
「福信」은 先先代의 王、武王(「余璋」)의 사촌동생이라고 한다.
特別編「藤原鎌足」의 가운데서、「余豊璋」은「義慈王」의 子가 아니고、「武王」의 子일 것이라고 했지만, 이러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이때의 「余豊璋」에 대하여、『日本書紀』는 몇번을 더 기록하고、더구나 시간의 혼동이 보인다.
이하에 모든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斉明 6年(660)冬10月、百済의 佐平 鬼室福信은 佐平 貴智(키치)등을 보내어,  唐의 포로 백여명을 바쳤다.・・・・또 援軍을 부탁하여、
동시에  王子 余豊璋을 모시겠다고 말하여、・・・・『百済国이 天朝로 보냈던 王子 豊璋을 맞이하여、国王으로 옹립했던 것입니다』라고 전하고 있었다」 

  「──어떤 책에, 天皇이 豊璋을 세워 王으로 하고、寒上(豊璋의 弟)을 그 도우미로 하여、礼를 다해 보냈다고 한다」


「斉明 7年(661)夏4月、百済의 福信이 使者를 보내어 表를 바쳐、百済의 王子 糺解(쿠게、豊璋)을 맞이하고 싶다고 청했다

 ──釈道顕의 日本世記에는、百済의 福信은 書를 바쳐서、그 왕 糺解의 건을 東朝에 청했다고.」

「斉明 7年(661)9月(天智紀)、皇太子는 長津宮에서、織冠을 百済의 王子 豊璋에게 하사했다.・・・・軍兵5千余를 이끌고、豊璋을 본국으로 보내었다. 豊璋이 나라에 들어가자, 鬼室福信이 맞이하러 와서 부복하여 国政을 모두 맡기어 말씀드렸다」


「天智元年(662)3月4日、百済王(余豊璋)에게、布 三百端을 하사했다.」
「天智元年 5月에、大将軍 阿曇比邏夫連등이、軍船 170 艘을 이끌고、豊璋등을 百済에 보내어, 명령하여 豊璋으로 百済王位를 잇게하였다.」

그러면『三国史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하면, 역시 混同이 보인다.

「文武 3年(663)5月、百済의 旧将軍 福信과、승려 道深등이 旧王子  扶餘豊을 맞이하여 百済王으로 세웠다.『新羅本紀』」

「武王의 従子(형제의 아들, 조카?) 福信은、옛날에 軍隊를 이끌었다. 승려 道深과 함께 周留城에서 반란을 일어켜, 앞서 倭国에 人質로 갔던

 旧王子 扶餘豊을 맞아하여, 왕으로 했다.・・・・ 때는 龍朔元年(661)3月이다.『百済本紀』」


이러한 것을 어떻게 整合的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대하여 『日本書紀』가 하나의 힌트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은『斉明紀』의 巻末에 記述되어있는 다음의 一文이다.

「──日本世紀에는、11月에 福信이 사로잡은 唐人 続守言등이 筑紫에 도착했다고.
 또 어떤 책에는、 이해 百済의 佐平 福信이 바쳤던 唐의 포로 106인을, 近江의 墾田에 머물게했다.昨年 이미 福信은 唐의 포로를 바쳤던 것으로 보이고 있다. 지금 적어두니 둘 중 하나를정해라」


결국 『日本書紀』가 중복해서 나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가 약 1년이기 때문에, 「余豊璋」관련해서도 약 1년, 時期의 어긋남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편집단계에서 시기가 다른 자료를、전부 기록해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편집의 자세는『日本書紀』의 随所에 보여지고 특히 『斉明紀』・『天智紀』에 特出하고 있다.

『百済本紀』와 합쳐서 보면, 『天智紀』에 기록되어 있는 斉明 7年 9月과、天智元年의 記録은 어쨋건 『百済本紀』의 기록과 동종의 것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月까지는 단정할수 없지만,「余豊璋」의「百済」입국은 661年으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게하면 「福信」이 使者를 보낸 것이、「百済」滅亡이 660年으로 이 기록이 初出인 10月이지만、시기적으로 무리가 없어지게 된다.


5.白村江의 전투

『日本書紀』에 의하면、斉明 6年12月24日、「百済」를 구원하기위해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
또「駿河国」에 명령하여 배를 건조하게 하고 있지만,  造船 후 한밤중에 艫(선미)와 舳(선수)가  뒤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싸우면 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정도로 急造한 것이었다.


7年 春1月6日、西를 향하여 출항하고 있다.
8日、「太田姫皇女」가 女子를 출산하고 있지만, 이 皇女는「中大兄皇子」의 子로서「大海人皇子」의 妃이다.

따라서 이 원정에 「大海人皇子」도 동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확고한 증거는 없다.

그후 朝倉宮으로 옮겨、7年 秋 7月24日、斉明天皇은 朝倉宮에서 崩御한다.


그리고 이 사이에 異変이 일어났다.

「5月9日、天皇은 朝倉橘広庭宮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朝倉社의 나무를 베어 이 宮을 지었기때문에、雷神이 노하여 御殿을 부쉈다.
 또 궁전내에  鬼火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大舎人이나  近侍의 사람들에게、병이나서 죽는자가 많았다.」


또한 葬儀에도 괴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8月1日、皇太子는 天皇의 喪을  마치고,  돌아가 岩瀬宮으로 돌아갔다
이날 저녁 、朝倉山의 위에 鬼가 나타나서、삿갓을 쓰고 喪의 의식을 엿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扶桑略記』에 따르면、「豊浦大臣」즉「入鹿」의 怨霊의 소행과、 소문난 걸로 되어 있지만,
朝倉宮을 덥쳤던 神이「雷神」이었다고 하는 것이 흥미롭다.
마아 보통으로 생각하면, 벼락이 떨어진 정도이겠지만... 

「雷神」이라고 말하면、예를들면「上加茂大社」의「別雷神」이나、「葛木坐火雷神社」의 「火雷神」을 연상시키지만, 이런것들은「尾張氏」의 姐神이다.

그렇지만, 「雷神」은、또 한명? 존재하고 있다.『記紀』의 国譲渡神話로 유명한 다케미카지치(「武甕槌命」、『古事記』에서는「建御雷命」)이다.


다케미카지치라고 하는 것은、「藤原氏」의 氏社로서 이름높은 「春日大社」의 主祭神이다.(단지『記紀』神話에 등장하는 다케미카지치라고 하는 것은, 「尾張氏」의 「雷神」으로、「尾張氏」가 취한 행동으로 생각하고 있다)

朝倉宮을 부순 「雷神」이라는 것은、筑紫에서 漂泊中인「鎌足」의 軍이었지 않았을까하는 유쾌한 추리를 넘겨보았지만, 의외로 이것이 정답일런지도 모른다.


朝倉山의 鬼도、「鎌足」이 자초지종을 내다보고 있던 、比喩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이후의「鎌足」의 행동은 정해지지 않았고, 추리할수 있는 재료가 아무것도 없지만, 의외로「唐羅軍」에 가담하여, 후방지원을 행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데、「中大兄皇子」의 皇太子 摂政時代가 되자 이야기는 단번에 「白村江의 전투」에로 에스컬레이트해 간다.
또 이 대격전은 전승국인 「唐羅」軍이나、패전국인「百済」・「倭国」(이하「倭済」軍)의 문헌에조차 거의 비슷한 記述이 보여지기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할수 있다.

 

거기서、「倭国」참전으로부터「百済」멸망까지를 、『日本書紀』와『三国史記』의 기록을 발췌하여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보고 싶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기서 말하는 「倭国」이라고 하는 것은 倭国連合軍이 아니고, 多武峯・百済의 단독군이다.

또한、말미에 적혀있는 『紀』는『日本書紀』、『済』는『三国史記・百済本紀』、『羅』는『三国史記・新羅本紀』로부터의 인용을 의미한다.
또 필요가있는 暦年은、모두 西暦으로 통일하고、중복하여 나온다고 생각되는 記録은、굳이 掲載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日本書紀』의 다음의 一文으로부터 시작한다.

「661年 7月、이달에 蘇将軍과 突蕨(투르크)의 王子 契必加力등이、水陸両道로부터 진격하여、高麗의 성밑으로 다가왔다.

皇太子는 長津宮으로 옮겨갔다. 거기에서 海外軍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皇太子는 물론 「中大兄皇子」이다.

이하는、年表형식으로 소개하고 싶다.


661年 8月 前軍의 将軍 大花下阿曇比邏夫連・小花下河辺百枝臣등、
                    後軍의 将軍 大花下阿倍引田比邏夫臣・大山上物部連熊・大山守君大石등을 보내어、
                     百済를 救援시켜、武器나 食糧을 보내었다.
                                                   『紀』

661年 9月 皇太子는 長津宮에서、織冠을 百済王子 豊璋에게 하사하였다. 또 多臣蒋敷를 그의 처로  삼았다. 
                    그리고 大山下狭井連檳榔 ・小山下秦造田来津을 보내어、軍兵  5천余를 이끌고、 豊璋을  本国으로 보내었다.

                    이 豊璋이 나라에  입국하자、鬼室福信이 맞이하러 와서 부복하여,  国政을、모두 맡겨 말씀드렸다.
                            『紀』(662年 5月의 条에 같은 기록 있음)

        이달(5月)、百済의 旧将軍인 福信과 승려 道深등이、旧王子 扶餘豊을 맞이하여、百済 王으로 옹립했다. 그들은 留鎮郎将軍

                    劉仁願을 熊津城에서 포위했다. 唐 皇帝는 劉仁軌 에게 検校・帯方州 刺史의 官職名을 주어, 전의 都督 王文度의 兵과

                    우리나라의  兵을  統轄시켜서、百済의 軍営으로 향하게 했다. 이 군은 각지를 転戦하여、적군을 함락시켜,  향하는 곳에 
        대적할 것이 없었다. 福信등은 劉仁願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 任存城을 지켰다. 이때 이미 福信은 道深을 죽이고, 그 兵을

                    통합하였다.  旧百済 領内에서 반란을   일어키거나, 도망친자를 불러오게하여, 그 세력은 매우강했다    
                                                               『羅』

       武王의 従子(조카) 福信은、예전에 軍隊를 통솔하였다. 거기에서 승려 道深과 함께 周留 城에서 반란을 일어켜 앞서 倭国에

                   인질로 가있던 旧王子 扶餘豊을 맞이하여、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거기서 旧百済의 서북지방은 모두 이것에 호응하여, 군대를

                   이끌고 劉仁願 을 旧都城에 포위했다. 당 황제가 명령하여, 劉仁軌를 検校・帯方州刺史로 기용하여,  王文度의 군대를 軍隊를

                   이끌고 지름길로 가서、新羅軍도 동원하여, 劉仁願을 구했다.
                                                               『済』

         그러고나서 福信이 道深을 죽이고, 그 군대를 병합했지만, 扶餘豊은 이것을 제어할수가 없었다. 단지 祭祀를 관장하는 것

                   뿐이었다.
                                                                『済』

662年 3月 이달、唐・新羅의 군이 高麗를 토벌했다. 高麗는 일본에게 구원을 요청해왔다. 그래서
                    日本은 将兵을 보내어 跿留城에 진을 쳤다. 이때문에 唐軍은 그 南쪽 경계를 범하지 못하고、新羅는 그 西쪽의 塁를 얌전히

                    둘 수 없게 되었다
                                                                             『紀』

          이 해, 百済를 구하기 위하여、무기를 다듬고 、배를 준비하여 兵糧을 비축했다.      『紀』

662年 7月 劉仁願・劉仁軌등이 福信의 군대를、熊津의 東에서 대파하여, 支羅城 및 尹城、大山  ・ 沙井등 柵을 함락시켜, 죽이거나

                    사로잡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               『済』

663年 3月   前軍의 将軍 上毛野君稚子・間人連大蓋、
                    中軍의 将軍 巨勢神前臣訳語・三輪君寝麻呂、
                    後軍의 将軍 阿倍引田臣比邏夫・大宅臣鎌柄을 보내어、2만7천人을 이끌고 新羅를 치게했다.            『紀』


663年 5月 犬上君이 高麗에 급히 가서、出兵사실을 고하고 돌아왔다.
       그때 糺解(豊璋)과 石城에서 만났다. 糺解은 犬上君에게 鬼室福信의 罪에대해 말했다.                    『紀』

          

663年 6月 前軍의 将軍 上毛野君稚子등이、新羅의 沙鼻・岐奴江 2개의 城을 취했다.  百済王 豊璋은、福信에게 謀反心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손바닥을 가죽으로 묶었다. 그러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 곤란하여, 諸臣에게 물었다.「福信의 罪는 이미

                     명백하지만, 베어야 할지 어떻게 할지」라고.  그때 達率 徳執得이、「이 悪者를 용서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자、

                     福信은 徳執得에게 「썩은 개 바보」라고 침을 뱉어내며 말했다. 王은 兵士에게 명하여, 福信을 참수하여、효수하기위해

                    식초로   절였다.
                                                                                『紀』

        이때 福信은 실권을 쥐고, 扶餘豊과 서로 의심하여 싫어했다. 福信은 칭병하여 움막의  방에서 누워있었지만, 扶餘豊이

                    병문안하러 온 것을 포착하여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扶餘豊은 그 계략을 알고, 親衛隊를 끌고 불의에 福信을 습격하여 죽였다.
          扶餘豊은 使者를 高麗와 倭国으로 파견하여、援軍을 요청하여、唐軍을 막아냈지만, 孫仁師는 도중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기다렸다가 공격하여 그 軍을 쳐부수어, 劉仁願의 군대와 합류하여, 唐軍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済』

663年 8月 新羅는、百済王이 자신의 良将을 베었다는 것을 알고, 바로 공격에 들어가 먼저 州柔를  취하려고 했다. 여기에서 百済王은

                    적의 계획을 알고, 諸将에게 고하여,「大日本国의 救援将軍 廬原君臣이、병사 1만余를 이끌고 지금 바다를 넘어오고 있다.
                   제발 諸将軍들은 그럴 작정으로 있어주면 좋겠다. 나는 스스로 나가서 白村江에서 모시고 온것 같이 」라고 말했다.   
                                                                        『紀』

663年 8月 17日에 敵将이 州柔로 와서 城을 포위했다. 大唐의 将軍은 軍船 170 척을 이끌고, 白村江에 진을 쳤다.
                     27日에 日本의 先着으로 水軍과、大唐의 水軍이 合戦했다. 日本軍은 져서 물러났다.
        大唐軍은 진을 굳히고 지켰다.
            
             28日、日本의 諸将과 百済의 王은 그때의 전황등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함께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공격하면, 敵은 저절로 물러날 것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日本軍에서 隊伍가 흐트러진 中軍의 兵을 이끌고、자진해서 대당군의   견진군을 공격했다. 그러자 大唐軍은

                     左右로부터 배를 끼워서 공격했다. 순식간에 일본군은 패했다. 水中으로 떨어져 익사하는 자가 많았다. 배의 뱃머리를

                     돌려볼 수도 없었다
                     

                     朴市田来津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결사를 맹세하고 이를 악물고 화를 내어、적 수십인을 죽였지만, 마침내 전사했다.

                     이때 百済王 豊璋은 몇명과 함께 배를타고 高麗로 도망쳤다                        『紀』

         唐 高宗은 右威衛将軍 孫仁師의 파견을 명하여, 孫仁師는 兵 40만을 이끌고, 徳物島로  도착하여,熊津府城으로 향해 갔다.

                     文武王은、金庚信등 28人의 将軍을 이끌고 이들과 합류하여、豆陵尹城이나 周留城등의 諸城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扶餘豊은 단신 탈주하고, 王子 忠勝 ・忠志등은 그 兵을 이끌고 투항했다. 단 1명, 遅受信만이 任存城에 의하여、항복하지

                     않았다.
                                                                                    『羅』

           孫仁師・劉仁願 및 新羅王 金法敏은、육군을 이끌고 진격하고 劉仁軌 및 別将의 杜爽 ・扶餘隆은 水軍 및 兵糧船을 이끌고

                     津江으로부터 白江으로 향하였다. 육군과 합류하여, 공동으로 周留城으로 다가갔다.
                     唐 ・新羅연합군이 倭軍과 白江口에서 조우하여 4번 싸워 모두 이겨 倭軍의 배 400 艘을 불태웠지만,  그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비비고 、海水는 붉게되었다. 王 扶餘豊은 몸으로 탈주하여 행방을 알수없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高句麗로 

                     도망갔겠지」라고 말했다.
      

                     그러나、唐・新羅 연합군은 扶餘豊의 宝剣을 얻었다. 王子 扶餘忠勝・忠志등은、그 軍을   이끌고, 倭軍과 함께 항복했다.

                     그러나 1人、遅受信만은、任存城에서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済』


663年 9月 7日、百済의 州柔城은 唐에 항복했다. 이때 国人은 서로 이야기하기를 「州柔城이 떨어 졌다. 아무리 해도 할 수 없다.

                      百済의 이름은 오늘로써 끝이다. 先祖의 墓에도 2번 다시 갈수가 없다. 단지 弖礼城에 가서、日本의 将軍들과 만나、

                      금후의 처치를 상담합시다」라고 말했다. 진작에 枕服岐城에 있었던 妻子에게 가르쳐、드디어 나라를 떠날 것을 알렸다
      11日、牟弖을 出発、13日 弖礼에 도착했다. 24日、日本의 水軍과 佐平 余自信 ・達率 木素  貴子 ・谷那晋首 ・億礼福留과、
              일반 인민은 弖礼城에 도착했다. 
                      翌日 배가 출발하여 처음으로 일본으로 향했다. 
                                                                                                        『紀』

663年 10月 冬10月21日부터 任存城을 공격했지만,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羅』

            먼저、黒歯常之는 도주하여 뿔불이 흩어져 있던 자들을 불러모았는데, 10일만에 3만余人에  달했다. 蘇定方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것을 공격하게 했지만, 黒歯常之는 방어하여 이것을  쳐부수고, 200余城을 탈환했다. 蘇定方은 이길수가

                      없었다.    黒歯常之는 別部将의 沙ロモ相如  와 함께 험준함에 의하여、福信에게 호응하고 있었지만, 이때에는 모두 항복했다.

                      劉仁軌는 진심을 黒歯常之등에게 보이고, 그들에게 스스로 자진해서 임존성을 탈취시키려고 하여  兵器나 食糧을 주었다.

                                                                                                           『済』

                      

            黒歯常之등 2人은、드디어 그 城을 취했다.  遅受信는 妻子를 그들에게 맡기고, 高句麗로   도망쳤기때문에、残党은 모조리

                      평정되었다.                                                                     『済』


「白村江의 전투」에 대해서는、거의 同国이라고 말할수 있는「倭国」과「百済」이지만,『日本書紀』와 『百済本紀』의 사이에서、「余豊璋」의 취급이 크게 다르고, 『日本書紀』가 国政을 모두 맡겼다고 기록한 것에 대하여, 『百済本紀』는 제사를 관장하는 것만으로 하고 있다.

또 일단은 「唐羅軍」에 의하여 멸망되어,「唐」의 점령하에 있었던 「百済」이며、더구나 百済王「余豊璋」은 多武峯・百済로부터 나온 까닭으로, 이 시점부터는 多武峯・百済야말로「百済」宗国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따라서、「倭国」에 의한「百済」구원이라고 말하지않고, 「百済」에 의한 旧地 탈환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余豊璋」에 대해서는、『日本書紀』가「高句麗」로 도망쳤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百済本紀』는 도망쳤을 것이라고 언급을 피하고 있다. 결국 그 종적은 不明인채로 이다.

그런데、「倭国」・「百済」의 패전군은、朝鮮半島를 출발한 후 대략 九州 博多 부근으로부터 상륙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 지역은 両国 병사들에 의하여,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占拠되었다고 해도좋을런지 모르겠다.

또、「中大兄皇子」는 近江으로 遷都했지만、요즘 한번도 政治의 중심지인 大和에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天智3年(664)、

「이 해、対馬・壱岐・筑紫国등에 防人과 烽을 두었다.
또 「筑紫」에 큰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했다. 이것을 水城이라고 이름붙혔다.」

水城은 昭和 50年에 발굴 조사되었지만, 幅50미터・ 깊이 9미터의 堀이 확인되고 있다.
防人이라고 하는 것은 東国으로부터 보내어 진 「筑紫」방비를 위한 兵士이지만、記録에 있는 것은 이것이 처음일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는, 帰国후에 半島로부터의 攻撃 경계를 위하여、「築城」과 같이 말해지고 있고, 확실히 그대로이지만, 한편으로는, 「中大兄皇子」가 近江 遷都까지 얼마간의 시간,「筑紫」을 점거하여 建国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敗戦으로부터 近江遷都까지의 4年間、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수없게 되고 말며, 「筑紫」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6.2人의 中大兄皇子

「中大兄皇子」는 그 이름쪽이 유명하지만, 그는 「葛城皇子」라고하는 어엿한 호칭을 가지고 있다.
 
舒明天皇 2年의 条에、

「2年 春1月12日、宝皇女를 세워서 皇后로 삼았다. 皇后는 2男 1女를 낳았다.
第1은 葛城皇子、第2는 間人皇女、第3은 大海人皇子이다」

라고 되어있지만, 「葛城皇子」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1회뿐이고, 이후는 「中大兄皇子」1本이다.


그외 「大兄」이란 이름을 붙인 인물은、
   「山背大兄皇子」
   「古人大兄皇子」
   「彦人大兄皇子」

등이 있지만, 머지않아 후술하겠지만, 「大兄」이라는 것은 皇太子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따라서「大兄」은 敬称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그 이름의 부분은 각각 「山背」・「古人」・「彦人」이라고 것이 될것이다.
   
「中大兄皇子」의 경우도 이  図式에 따르면, 「中」의 부분이 이름인 것이 되지만, 이것을 이름으로 하는 것은 나로서는 저항감이 생기고, 첫째로 전연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히 의미를 찾는다고 하면, 한가운데의 皇太子라고 하는 의미가 되는 것일까?

그에게는 본래 「葛城皇子」라고 하는 훌륭한 이름이 있었다.「葛城大兄皇子」로도 좋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日本書紀』는、「中大兄皇子」라고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 作爲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다.


요약하자면,「中大兄皇子」=「葛城皇子」라고 하는 図式이、완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며,
편찬자측에서 보면, 「葛城皇子」가 「中大兄皇子」로 되면 곤란한 것이 있을 것이다.

「中」이라고 하는 문자는、입을  한가운데에서 둘로 나누고 있다. 정곡을 찌르는 견해에 의하면, ‘중대형 황자’란 두 황태자의 뜻으로도 생각되어진다.

 그대로,「中大兄皇子」는 2인이라는 것이다.

2人의 中大兄皇子를  証明하는 証拠로 말하면, 『日本書紀』에 기록된 다음의 件일까?
   
天智天皇 4年 春2月의 일로서,

「이달에、百済国의 官位의 등급을 검토했다. 佐平 福信의 功績에 의하여、鬼室集斯에게 小錦下의 지위를 하사했다.」

라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던 「鬼室福信」의 반역행위의 대가로서, 아들 「鬼室集斯」에 대하여 官位를 하사했던 것이다.
「福信」은「百済」를 배신하였으며, 그러한 그의 아들에 대하여 官位를 하사했으므로 반역행위는 그때의 大和朝廷에 있어서는、功績이었던 것이 된다.


中大兄皇子는「百済」구원군의 지휘자였으므로、배신자인「福信」의 子에게 冠位를 하사하는 것은 생각할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日本書紀』가 冠位를 하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功績이라고 생각하는 中大兄皇子가 별도로 있었던 것이 된다.   그렇지만,「百済」원정기사에「中大兄皇子」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때 그는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一説에는、「筑紫」에서 全軍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패전이었던, 연합국의 총대장으로서, 기록되어 있어서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기록도 없는 것은, 「百済」원정을 결행했던 「中大兄皇子」라는 것은,「余豊璋」자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白村江의 전투」에서의 패전후、「余豊璋」은「高句麗」로 도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겠다.  의외로、「百済」의 諸将과 함께「筑紫」까지、도망해 왔는지도 모른다.

「筑紫」는、바로 多武峯・「百済」의 지배지역이었다.


『真説 日本 古代史』第10部에 있어서、다음의 『欽明紀』17年 春1月의 条를 소개하고 있다.

「百済王子의 혜가 귀국을 기원했다. 따라서 많은 무기와 良馬외에 여러 가지 물건을 주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감탄했다. 阿部臣・佐伯連・播磨直을 보내어、筑紫国의 軍船을 이끌고、 호위하여 나라로 보내게 했다. 별도로 筑紫火君을 보내어, 勇士 1천인을 이끌고, 弥弖(미데)의 港에 보내져 航路의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이것을,
「『筑紫」는 『百済』의 手中이라고도 읽히는 記述도 있다.」
라고 해설하지만, 사실 그대로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天智天皇 6年 11月9日의 条에、

「百済의 鎮将 劉仁願은 熊津都督府 熊山県令 上柱国 司馬法聡등을 보내어
 大山下境部 連石積등을 筑紫都督府로 보냈다」

라고 하지만, 問題로 삼고 싶었던 것은 이 「筑紫都督府」이다.
「都督府」라는 것은, 전승국인「唐」이 점령국 통치를 위하여 깔았던 정부의 명칭이다.


「唐」이「百済」의 旧領地에、「熊津・馬韓・東明・金漣・徳安의 5都督府」를 두어 점령정부로 한 것은,『百済本紀』에 확실히 적혀있다.

패전국인「倭国」에도「都督府」가 설치된 것이다.그것이「筑紫都督府」였다.
『三国史記』를 읽으면,、「唐羅軍」에게 패한 「百済」가、엄격하게 전쟁범죄를 묻는 처분을 받은 것에 비하여, 마찬가지로 패전국인 「倭国」이 전쟁범죄를 어떻게 면할수가 있었던가?
 
당연히 점령정책이 펴졌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 여지가 없다.

多武峯・「百済」의「大和」에서의 거점은 확실히 多武峯이었지만,
「筑紫」는 「倭国」에서 「百済」의 飛び地 (원격지에 있던 영지)이었다.
「筑紫」가 「百済」의 것이었으므로、이 땅에 「都督府」가 설치된 것이었다.


 반대로 「大和」는 蘇我・倭国政権이 지배하는 土地였다.「鎌足」의 활동으로부터 알수 있듯이, 倭国政権은「唐羅軍」에 협력적이었다. 라고 말하기보다 차라리 同盟国이지 않았을까?
「白村江의 전투」에서 倭済연합군이 패했기때문에、倭国政権은 결과적으로 전승국으로 되었다.

전승국인 倭国政権에「都督府」가 설치될리가 없다.
또 「百済」가 멸망하고「百済」의 식민지였던 「筑紫」에、「都督府」가 설치됨에따라서 「倭国」의百済政権도 또한 소멸한 것이다.
   
「白村江의 전투」이후에、「唐」의「郭務宗」(実際의「宗」의 문자는, 「小」에「宗」이라고 씁니다)등이 来訪하고 있지만, 이것이 대략 「筑紫都督府」의 開府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天智紀』에는「郭務宗」来訪의 기록이、대충 다음의 4가지가 보인다.


「天智 3年夏 5月17日、百済에 있었던 鎮将 劉仁願은、朝散大夫 郭務宗등을 보내어, 表凾과 献物을 바치었다」

「天智 4年 9月23日、唐이 朝散大夫 沂州司馬上柱国 劉徳高등을 보내왔다.─1等 이라고 하는 것은
右戎衛郎将上柱国百済禰軍・朝散大夫柱国郭務宗를 말한다. 전부 254인, 7月 28日에 対馬 도착하다.
9月20日、筑紫에 도착하여, 22일에 表凾을 바쳤다」


「天智 8年 12月、大唐이 郭務宗등 2천人을 보내어 왔다」

「天智 10年 11月10日、対馬国司가 使者를 太宰府에 보내어서、『今月의 2월에、沙門道久・筑紫君薩野馬・韓島勝裟婆・布師首磐의 4人이 唐으로부터 와서, 『唐의 使人 郭務宗등 6백人、送使沙宅孫登등 천4백人、총계 2천人이、 배 47 隻에 타고 比知島에 도착했습니다. 서로 이야기하여、 지금 우리들의 사람도, 배도 많다. 바로 저쪽으로 갔다면, 아마도 저쪽의 防人은 놀라서 쏘아올 것이다 .우선 道久등을 보내서 미리 来朝의 뜻을 밝히게 한다 』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단지 패전군은 9월 24일에 朝鮮半島를 출발했으므로, 처음의 「郭務宗」来訪이 天智 3年 夏5月17日이라고 하는 것은、좀 사이가 너무 빈 것처럼 생각되지만 、「白村江의 전투」후에도、旧「百済」의 将軍「黒歯常之」가、兵 3만人을 끌어모아 저항하고 있었던 것도 있어, 朝鮮半島에 있어서 전후처리후、「筑紫」의 제문제에 착수했다고 한다면、시간적인 모순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天智 3年夏5月17日을、「筑紫都督府」설치를 위한 来訪이었다고 치자 .

그 후는、天智 8年12月인지、天智 10年11月의 기록이 그 후에 계속되고 있지만, 이 2개의 기록은 중복되어 나온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다.


확실히 총계 2천人은 同数이며、기록만으로는 중복되어 나오는 것이라고도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筑紫」가「唐」의 점령하에 있는 이상, 교류는 기록이상으로 빈번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없고, 차라리 그쪽이 무난할 것이다.

 단순히 人数만 보고 重出(중복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라고 생각한다.

「筑紫都督府」라는 것은、「倭・済」의 패전군이 상륙후 잠시후에、「筑紫」에 상륙했던 점령군이 開府했던 것이다.

「筑紫」로 도망왔던  旧「百済」의 諸将들 및 그 병력은, 「百済」가 망했다고는 하지만, 거듭된 격전을 꿰뚫어 온 정예들이었다.


따라서, 점령군 상륙전의 「筑紫」는「百済」그 자체였고、그러한 그들을 총괄하는「都督」이 되기에는, 보통사람들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들면, 旧「百済」의「熊津都督府」는、元百済王子의「隆」이 임명되고 있다.
「筑紫都督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 좋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余豊璋」이 적당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는『日本書紀』・『三国史記』가 함께「高句麗」로 도망갔다고 하여, 文献上으로부터 행방을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先述한 바가 있다.


가령 日本列島에  도착해 있었다고해도, 전쟁범죄인인「余豊璋」이「都督」으로 임명될리는 없다.
그전에 「唐羅」軍에게 체포되어 살해되고 말것이다.

달리 해당자를 찾아보면,「唐」에 포로로 되어 있던 학문승「定恵」나, 皇極 2年2月22日에 来訪했던「翹岐」(교기)정도가、다음 후보자가 될 것 같다.
 
단지「定恵」는 665年에 귀국후,(그해 12月23日에 死没한 것으로 되어있다)「都督」으로 임명되어 귀국한 것이라고 한다면, 시기가 좀 너무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서 「翹岐」가 아니었을까라고도 추측되지만, 「翹岐」는 私見으로는 「鎌足」이다.
         ・・
「都督」으로는 우선「鎌足」이 옹립되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한번은 大王이 되었던 「鎌足」이、 "중신"이라고 자칭한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그렇지만, '우선'이라는 단어를 앞에 둔 것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2代째의「都督」에는「定恵」가 選任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때문이다.

실은 『多武峰略記』・『多武峰縁起』에는、「定恵」의 귀국을「鎌足」이 죽고난 후라고 하고 있어, 『日本書紀』와 모순되는 記述을 보이고 있다.


「定恵」가「唐」에 파견된 것은, 653年의 遣唐使에 帯同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쨋건 史実일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旧唐書』高宗本紀 永徽5年(654)의 条에、倭国使를 받아들인 기록이 있기때문이다.

또『日本書紀』가 인용하는 『伊吉博徳의 書』에 기록되어 있는,
「『定恵』는 乙丑年(665)劉徳高등의 배를 타고 돌아갔다」

도, 天智 4年 9月23日의
「唐이 朝散大夫沂州 司馬上柱国 劉徳高등을 보내 왔다」

와 대응하고 있어,「定恵」665年 귀국도 史実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日本書紀』가 기록하는「鎌足」의 서거는 669年이므로、일반적으로는 『多武峯略記』의 기록이 무시되고 있는듯하지만, 다음의 一文에 의하여 (『日本書紀』가 기록하는「鎌足」의 서거기록은)신뢰할 가치가 있는 문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更待後賢之正決可詳旧記之違文者」

즉, 이러한 旧記의 違文을 상세하게 解明하여、후세에 한층 더 바른 결론이 내려지는 것을 기다려,
라고 하는 신중한 태도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鎌足」은「定恵」의 귀국을 기다리지 않고、죽었을런지도 모른다.
라고하기보다는 차라리, 「鎌足」薨去야말로「定恵」귀국의 직접 원인이 아닐까 라고 추리하고 싶어진다.
「定恵」는「唐」에 差出된 인질이었으리라 했지만, 「貞慧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한다.

   「而忽承天勅、荷節命駕、又詔廊武宗劉徳高等、旦夕撫養、奉送倭朝、仍逕海旧京
        (『新説日本古代史』文芸社、西野凡夫著1999年8月15日発行)」)


즉 西野氏의 著書는、이후 氏의 見解로서

  「蕃国의 일개 学問僧의 귀국에 唐帝가 天勅을 내려、廊武宗과 劉徳高에게 명하여、
  『倭朝로  보내주라 』라고 하는 이상한 記述이다」

라고 계속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을 인질로 되어있던「定恵」의 귀국시의 모양이라고 보고 있기때문에, 이것이 단순한 인질의 해방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너무도 과장된 묘사일 것이다.  바로 氏가 말하는대로, 이상한 記述인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定恵」의 귀국은 인질의 해방이상의 의미가 있었다라고 생각해야만하지 않을까?
「都督」이었던「鎌足」이 서거하고、새로운「都督」으로「定恵」가 임명되어、「筑紫都督府」에 부임한다고 생각되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日本書紀』가 말하는 天智8年「鎌足」薨去는 史実이 아니었으며,「鎌足」薨去후의 665年에「定恵」가 귀국했던 것으로 하고싶다.


「鎌足」의 薨年가 『多武峰略記』와『日本書紀』와의 사이에서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은, 天智天皇의 즉위년에 문제가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日本書紀』는 天智7年(668)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天皇의 元年은、그 天皇의 즉위년으로 하는 것이다. 天智만이 예외인것은 왜일까?
그것은 『日本書紀』가 2人의 皇子이었음에도 불구하고,「中大兄皇子」라고 하는 한명의 皇子로서、記述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中大兄皇子」의 모델이 2人 있다고 한다면, 天智도 또한  2人 있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혹은, 그 이상일런지도 모르겠다.

즉 天智는、天智元年(또는 그 前年)에 즉위했던 天皇과、天智 7년(혹은 6年)에 즉위했던 天皇이라고 하는 2人의 天智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日本書紀』는、2개의 天智元年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는 箇所가 있다.

天智의 病状의 악화를 『天智紀』에서는、
「17日、天皇은 병이 위중하여・・・」

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天智 10年 冬10月의 일로서、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天武紀』에서는

「4年 冬10月17日、天皇은 病으로 자리에 누워 重態였다」

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령 天智元年 즉위를「余豊璋」이라고 한다면、天智7年 즉위는「葛城皇子」로 되겠지만, 단지 현단계에서는, 그 어느쪽도 단정할수 없고, 전혀 다른 인물일런지도 모른다.

더우기、『扶桑略記』에는、天智의 忌日을 12月3日로 한 위에, 2人의 天智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 일설에는 말한다.(天皇)말을 타고、山階郷으로 행차하다. 더욱이 문은 고리가 없다 」이며、

「오랫동안 산림에 어울려 、무너질 곳을 모르고. 단지、신발이 떨어지는 곳을 따라서 그 산등성이로 하다. 여러 천황의 往을 통해 인과를 알지 못하다. 항상 살해 事る」


라고하는 割注가 있다. 『水鏡』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하지만,「新井白石」의『天智朝』는、
『扶桑略記』와 거의 同文을 기록하여,

「혹자는 말하기를、帝의 마지막은 상세한 내용으로 할수가 없다」

라고 맺고 있다. 山階라고 하는 것은 山科이다.


이것에 대하여  『日本書紀』는、

「12月3日、天皇은 近江宮에서 崩御했다.」

라고하고 있어 그 최후는 전혀 다르게 되어있다.

한편에서는 山科에서 暗殺당한 것처럼 기록하면서、다른 한편으로는 近江宮에서 崩御했다고 한다.

이 시대는 『日本書紀』성립으로부터 50年 정도 前밖에 안되고, 엉터리는 기록하기 힘들다.
또「新井白石」의 詮索하지말라고 하는 말을 합쳐서, 합리적으로 해석하면, 2人의 天智(라고 하기보다는 天智의 모델이 되었던 2人의 인물)説이야말로 正論이지 않을까?


『日本書紀』에는、또하나 그것을 추측할수 있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日本世紀에 말한다。『内大臣은 50歳에 자택에서 죽었다. 遺骸를 山科山 남쪽으로 옮겨서 殯所를 차렸다. 하늘은 어째서 인정없게도, 한동안 이 노인을 남겨두지 않았을까? 슬프구나.
碑文에는 春秋 56세로 죽다』 라고」


『藤氏家伝』은、「鎌足」의 탄생일을 推古 22年(613)으로 하고 있다.

『日本書紀』대로、「鎌足」은 天智 8年(669)에 사망했다고 한다면,  碑文의   「春秋 56세로 죽다」
로 되지만, 引用한 『日本世紀』에서는 50歳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어느쪽이 바른 것인가는  알아 맞힐수 없다.
天智8年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연령이 변해버리고 말기때문이다.

天智8年이 『日本書紀』에서 말하는 年紀라면 56歳로 되지만, 天智7年이나 6年을 元年으로 하면,
天智8年은 天智2年・3年에 해당되어、계산상으로 약 6年의 차가 생긴다.


이것이 이대로 年齢差의 표현으로 된 것으로 생각되어, 天智 즉위년이 2설이 있다는 것을 엿볼수 있다.

물론,  「鎌足」의 죽음은 一点으로밖에 있을수가 없지만, 西暦의 개념이 없었던 이 시대에는, 채용한
史料도 당연히 天皇年에 따른 것이므로, 이러한 것도  왕왕 생긴다.


그런데、天智8年 5月5日의 条에、

「天皇은 山科野에 薬사냥을 하셨다. 大皇弟・藤原内大臣 및 群臣등이 모두 동행했다」

     (각주 : 薬狩り-단오절에 들판에 나가서) 약초를 캐던 행사(くすりがり)

고 되어있지만, 이 薬사냥이 『扶桑略記』등에 있는、天智天皇 살해기록과 대응하는 기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과연 이 天智 8年은、어느쪽일까?

『日本書紀』・『扶桑略記』 공히 天智의 忌日을 12月3日로 하고 있다.


이외에도 中世의 史書는 天智 忌日을、12月3日로 하고 있어 異伝은 없는것 같다.
단  忌日이 같아도、年代는 고사하고 내용까지도 다른 것은, 동일한 史料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말할수 없다.
채용한 史料가、전연 다른 것인지, 어느쪽인가가 의도적으로 捏造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말했듯이「新井白石」는、

「혹자는 말하기를, 帝의 마지막은 상세한 내용으로 할수가 없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진실을 알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가장 빠른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럴까 하고 추구를 멈춰버리면,  진실을 알 챤스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