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近江朝의 붕괴
1. 天智天皇의 崩御
「9月、天皇이 병이 나셨다 」
「17日、天皇이 病이 위중하여、東宮을 불러서、寝所로 오라고 명하여、
『나는 病이 중하여 後事를 너에게 맡기고 싶다』등을 말했다.
東宮은 病이라고 称하여、몇번이고 固辞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부디 大業은 황후에게 주십시오. 나는 天皇을 위하여 出家하여, 仏道수행을 하고싶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天皇은 이것을 허락하였다.」
天皇은 天智天皇、東宮은「大海人」이며、『天智紀』에 보이는 説話이다.
이제 막,「大海人」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는 순간이다.
譲位를 고사하여 받지않는 것은, 次期 天皇의 상투수단이지만, 이번은 어쩐지 형세가 수상하다.
고사한「大海人」은 天皇이 되지않고, 大后「倭 姫 王」을 추천하고 있지 않은가?
「倭 姫 王」은「古人大兄皇子」의 딸이지만, 私見으로는「古人大兄」=「大海人」이기때문에、「倭 姫 王」은「大海人」의 딸이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 때의 天智의 속셈은,「大海人」이 譲位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謀反의 뜻이 있다고하여 벌을 받아야하는 것이지만,
「大海人」의 대답은 天智의 생각으로부터、크게 벗어난 것 같다.
이 부근의 記述은、『壬申紀』가 되면 한층 상세하게 되어、
「4年 冬 10月17日、天皇은 와병중으로 중태였다. 蘇我臣安麻呂를 보내어, 東宮을 불러들여、寝所로 데리고 들어갔다.
安麻呂는 원래부터 동궁에 호감을 가졌다. 가만히 東宮을 청하여、
『잘 주의해서 대답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東宮은 감춰진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여, 조심했다.
天皇은 東宮에게 皇位를 譲位하고 싶다고 말했다.
東宮은 사양하여
『저는 불행하게도 원래부터 병이 많고,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불가능합니다. 바라건대 陛下는、皇后에게 天下를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大友皇子를 세워서、皇太子로 삼아주십시오. 저는 금일에라도 出家하여、陛下를 위하여 仏事를 수행할 것을 희망합니다.』
라고 말했다. 天皇은 이것을 허락하였다.」
로 되어있지만, 『天智紀』가 後事로 되어 있는 것에 対하여、『壬申紀』에서는 皇位로 되어있다.
이 2개를 비교하여보면, 『壬申紀』의 쪽이 보다 상세한 記述로 되어있는 것으로보아、이쪽이 後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본래는 後事였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後事라는 것은、文字대로 後의 일이다.
天智는 譲位의 의도를 나타냈을런지 모르지만, 後事는 後事이다.
『壬申紀』에서 譲位로 했던 것은、그 裏에 음모가 있다고 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에 다름없다.
그것에 대한「大海人」의 대답이지만,
「大業은 大后에게 맡겨주십시오」
「大友皇子에게 諸政을 행하게 해 주십시오 」(『壬申紀』에서는 皇太子)
의 2점이었다.
大業이라는 것은『壬申紀』에 따르면、天下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을 바꾸고 있지만, 諸政보다 위의 역할이라고 말하면, 그대로 統治이외에 생각하기 어렵다. 즉, 天皇에 즉위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天智가 말했던 後事라는 것은、
「天皇位는 大后와는 다른 자에게 譲位하고、諸政은 大友皇子가 행하지 않는다.」
太政大臣인「大友」가 政治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降格人事가 되는 것이지만, 보통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될수가 없다.
그렇다면 昇格일 수밖에 없다. 太政大臣의 위라면, 그것은 天皇밖에 없다.
그렇다면、政治는 누가 행하는 것인가? 말할것도 없이 「大海人」이라고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결국 天智가 맡기고 싶었던 後事라는 것은、「大友皇子」를 즉위시키므로、「大海人」에게 諸政을 행해주기바란다고 하는 것이었다.
天智의 말은、「大海人」이 모반의 뜻이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것이었다등으로 흔히들 말하고 있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에누리없는 본심이었던 것이 된다. 더구나 그것은、통설에서 말하는바와같이, 「大海人」에게 譲位의 타진이 아니고,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하는 의미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3日、大友皇子는 황거의 西殿의 織物 仏像 앞에 계셨다.
左大臣 蘇我赤兄臣 ・右大臣 中臣金連 ・ 蘇我果安臣 ・ 巨瀬人臣 ・ 紀大人臣이 기다리고 있었다.
大友皇子는 손에 香鑪를 쥐고, 먼저 일어나서、
『6人은 마음을 같이하여、天皇의 詔를 삼가 받자옵니다. 만일 위반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오』
云云이라고 맹세하셨다 . 거기서 左大臣 蘇我赤兄등도 손에 香鑪을 쥐고, 순서에 따라 일어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
『臣들 5人은 殿下와 함께, 天皇의 詔를 받잡습니다. 혹시 거기에 위반하는 점이 있다면、四天王이 우리들을 치고, 天地의 神들도 또한 罰을 주실것이오. 33天도 이것을 확실히 알아주십시오. 자손도 바로 끊기고, 家門도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
云云하며 다짐했다」
「29日、5人의 臣은 大友皇子를 받들어、天皇앞에 맹세했다.」
이상은 天智의 임종때、「大友」와 5重臣의 誓盟이야기이지만,
後世、「豊臣秀吉」이 서로 주고받았던 병상에서의 誓書와、놀라울만치 닮아있다.
『天武紀』天武 8年 5月6日의 条에、
「天皇은 皇后 및 草壁皇子 ・ 大津皇子 ・ 高市皇子 ・ 河嶋皇子 ・ 忍壁皇子 ・ 芝基皇子에게 명하여,
『나는、오늘、너희들과 함께 조정에서 맹약하여、천년후에까지, 継承 분쟁을 일어키지 않도록 꾀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어떨까?』
라고 말했다. 皇子들은 함께 대답하여、
『지당합니다』라고 말했다.
草壁皇子尊이 먼저 자진해서 나와 맹세하여,
『天地의 神들 및 天皇이시어、
분명히 들어 주십시오. 저희들 兄弟 長幼 합쳐서 십여人은、각각 母를 달리하지만, 同母든 아니든、天皇의 말씀을 따라 、서로 도와 다투지 않겠습니다. 혹시 금후 이 맹세를 위반하면, 생명도 끊기고 자손도 끊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5人의 皇子는 뒤를 이어 순차적으로 맹세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天武天皇은、太政大臣은 물론 左大臣 ・ 右大臣도 두지않고, 皇族만으로 정치를 행했다.
이것을 皇親政治라고 한다. 따라서 皇子들은 大臣 그 자체였다. 이들 皇子들을 모조리 「近江朝」의 5重臣으로 바꿔놓으면, 大津宮闕의 西殿에서의 맹세와 그대로 같은 것이 된다.
이것이 대답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막연히 후계자문제였다고 해도, 누구를 후계자로 인정했는지까지는 모른다.
「大友」섭정、이것은 의심할 바가 없을 것이다.
天皇의 詔은、다음과같은 내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①倭 姫王의 즉위
②大友皇子의 섭정
③葛野王의 皇位계승 실현
이것은, 「大海人」이 꺼낸 原案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近江朝」의 성립은、「鎌足」의 중개에 의하여、「倭京」政庁을「近江朝」기구에 통합한 것이 시작이다.
「원래 政治의 要는 軍事이다」
라고하는 「大海人」의 방침이、敗戦을 경험으로부터 잘 생각하지 못했던 天智가、
「大海人」을 실각시켜、「大友」를 太政大臣으로 해버리고 말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달리 적임자가 없었다면, 「大海人」에게 협력을 구하는 것으로、적으로 만드는 일을 피할 속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문에 「大海人」의 제언을 、일방적으로 거부할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그 자체는 정론이니 더욱 그렇다.
단, 天智에게 형편이 안 좋다는 뜻이 아니었다. 「葛野王」의 즉위가 실현되면, 실질적으로 天智의 피가 이어져가는 셈이고、이것에 의하여, 「大友」즉위의 가능성이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大海人」에게도 皇位계승권이 남는 것도、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감쪽같이「大津宮」을 탈출할수 있었던 「大海人」은、그 시점부터, 天智政権의 잠재적인 적으로 되고 말았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서 들판에 놓아 둔 것이다」(『壬申紀』)
라고 누군가가 말했다고 한다.
뒤에가서 보면,「大海人」을「大津宮」에서, 半감금상태로 둔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후회가 남았을 것이다.
이것이、詔에 다음의 一節을 추가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大海人』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2. 大津宮 탈출
「大海人」의 제언을、모두다 허락해버리고 말았던 天智였지만、어느것도 天智의 생각이 불충분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大海人」에게서 본다면, 오랫동안 「大津宮」으로부터 탈출을 생각한 끝에 、겨우 날아들은 최초이자 최후의 챤스였을 것이다.
天智가 「大海人」의 제언을 、모두다 허락하고 말았던 것은、그 이야기의 조립법도 그렇고 모든 게 이치정연한 정론이요 무엇보다도 기백으로 이겼기 때문에 틀림없다.
「遠山美都男」氏는、著書『壬申의 乱』가운데서、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倭 姫王의 즉위를 하는 것만으로는、역시 大友 옹립에 역심이 있는 것으로 하여, 그자리에서 大海人은 생명을 잃을수밖에 없었다.
王位계승의 가능성만은 교묘하게 버티면서 、무력행사 ・무장봉기의 의지를 위장하기위하여,
다음으로 大海人은 출가하여 僧侶가 되는 것. 사실상 왕위계승 자격을 포기하는 것을 天智에게 청원하는 것이다.
그리고、大海人은 天智에게 아니라고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大津宮의 仏殿의 남쪽에서 삭발해버리고 만다. 또한 大海人은、그의 지위에 대해 주어지고 있었다고 생각되어지는 무기를 반환함으로써, 挙兵을 위하여 필요한 물질적인 기반을 스스로 부정하도록 보여、天智에게 틈탈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
이와같이、大海人의 天智에 대한 대답은、天智의 혐의를 피하여 『臥内』=『大殿』으로부터 무사귀환한다고 하는 保身을 가늠하면서、동시에 자신의 왕위계승권의 최저한의 챤스를 保留한다고 하는 실로 교묘한 것이었다。
요컨대 그의 대답은、
①大友옹립 구상에 대한 협력 요청에 대한 謝絶
②倭 姫王 즉위 ・大友 執政(大友 옹립 구상의 수정안)의 제언
③자신의 출가지원, 무기반환
이라고하는 3段階로서、
前段에서는 天智에게 생길 疑惑(大友 옹립 구상에 대한 叛意)을,
次段에서는 마치 삼키듯이 해소해간다고 하는 교묘한 구성으로 되어있다.
①②③은 이 순서대로 입에 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大海人」에게는「近江朝」下의 황위계승권등은, 전연 안중에 없었으므로、왕위계승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부산물이었을 것이다.
애당초「近江朝」는、諸 외국으로부터 보면 단순한 한 지방도시에 지나지않고,
설사 합병이 성립하였다고 해도、「倭国」의「倭京」이야말로 인식된 국가였다.
「大海人」은「倭京」으로 돌아가、首都기능을 회복하기만하면、大王位는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近江朝」의 존재는 무시할수 있었던 것이다.
『旧唐書 ・巻一九九上 ・東夷伝』에 수록되어있는、『倭国日本伝』의 본문중에는、타이틀대로「倭国」과「日本国」의 両条가 나뉘어 적혀있다. 이중에서 「日本国」의 부분에 대해서는、孝徳天皇의 大化4年(648)에 해당하는 해의 遣使와、
文武天皇의 大宝3年(703)에 해당하는 해의 遣使의 記事의 사이에 갑자기 삽입되어있다.
그것에 따르면,
「日本国은、倭国의 別種이다。그 나라는 해가 돋는 곳에 가까왔기때문에、 日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倭国이 자신들의 이름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싫어하여、고쳐서 日本으로 했다고、
혹자는 말한다. 日本은 원래 小国이었지만、倭国의 땅을 합쳤다라고..
그 나라의 사람으로서 入朝하는 자는, 대부분 스스로 뽐내며 거들먹거리지만 실속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中国은 이것을 의심하고 있다.
또 이르기를 『그 나라의 경계는、東西南北、각각 数千里이며,
西界 ・ 南界는 모두 大海에 닿고、東界 ・北界는 大山이 있어서 끝을 이루고、
山外는 즉 毛人의 国이다』라고」
라고하여, 「倭国」과 「日本国」을 併記하면서도、별개의 나라로서 취급하고 있다.
이전에도 썼지만, 「해가 돋는 곳」이라고 하는 감각은、본래 日本 列島에 사는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다를 가운데 두고 日本 열도보다 서쪽에 있는 諸国에게 있어서、한마디로 말하자면、朝鮮반도로부터 본 경우가 아니라면 알수없는 감각인 것이다. 결국 「日本」国号의 뿌리는 朝鮮半島에서 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唐入朝는 어느 시대인가?
『旧唐書』만으로는 알수 없으므로 、『新唐書』와 비교해보면, 『新唐書』에는,
「咸亨元年(670)、사자를 보내어 高麗 평정을 축하하다. 後、차츰 夏音을 배우고、倭의 이름을 혐오하여, 고쳐서 日本이라고 칭하다.
사자 스스로 말하다. 나라、해 돋는 곳에 가깝다. 이로써 이름으로 삼는다고 ・・」
라고 독자의 記事를 게재하고 있다. 이후의 문장은『旧唐書』와 거의 같지만、이 단계에는、天智天皇의 때、蝦夷人을 동반하여 入唐했던 記事가 있어, 이것이 670年과 동일한 년도가 아닐까라고 생각되어진다. 혹은、「後」로 되어잇으므로、「日本国」에의 改名은、翌年의 新体制로 되었던 시점(大友皇子가 太政大臣으로 되었던 天智10年(671)일지도 모르지만, 어느것으로 하더라도 天智朝였다.
즉『新唐書』에서는、巻二二〇『東夷伝 ・日本』으로 되어있고, 그 내용도、「日本」・「倭国」을 구별하지 않고、「日本」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꾸로 말하면、『旧唐書』의 꾸밈이 없는 거칠은 모습이、오히려 事件의 중대성을 엿볼수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때「唐」은「日本」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日本」으로부터 온 使者는、「日本」과「倭国」은 시간적으로 연속한 동일국가라고 설명하고 있지만、「日本」이라고 하는 国名의 유래로부터、제대로 말을 못하고 있다.
「日本」은、바로「近江朝廷」이다.
그 中枢는、「白村江」의 敵国、「百済」의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使者가 대답이 궁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唐」에게 있어서는、東海의 孤島의 友好国은「倭国」이었으며、「倭国」으로부터 온 使者가、国号改名을 알리러 온 것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으므로 말하자면, 엉뚱한 이야기이다.
또、「筑紫都得府」에 상주하고 있던 점령군으로부터도、정보는 가져오고 있었을 것이므로、「日本」이「近江朝廷」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不信感이었을런지도 모른다.
「倭国」이 主権表明만 하면、「郭務宗」들이 이끌던 二千人의 軍隊에 의하여、「倭京」奪回作戦도 가능했을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런데、감쪽같이 天智를 따돌린 「大海人」은 、똑바로「吉野」로 향했다.
仏道修行을 명목으로 「大津京」을 나갔던 것이다.「倭京」을 뒤돌아 볼 리가 없다.
「蘇我赤兄臣」・「中臣金連」・「蘇我果安臣」등이、「宇治」까지 배웅했다고 하지만, 監視役으로 정해져있었다.
中国식으로 생각하면, 이 때 「大海人」이 살해되어버리고 말 것이지만, 그렇게되지 않았던 것은、武士道를 중시하기때문에、卑怯한 행동은 못하는 것일까? 혹은 、監視役이던 三人이 서로 견제했던 것이었을까?
어느쪽이냐고 묻는다면 후자쪽이다.
「蘇我氏」二人과 「中臣氏」一人. 이 三人은「壬申의 乱」後의 처벌이지만、정반대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대조적이다.
「蘇我果安臣」은 数万의 兵을 이끌고 「不破」를 급습하는 도중、같은「近江方」이던 「山部王」을 죽이고, 自軍을 混乱에 빠트려 자신은 自殺한다.
「中臣連金」은 戦争犯罪人으로 死罪.
「蘇我赤兄臣」본인과 그 자손,「蘇我果安臣」의 자손은 함께 流罪이다.
다른 重罪 8人이 死罪이지만、이중의 1명으로서「中臣連金」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 별개인가는、 어느 쪽과도 연결이 되는 그런 記述이다.
단지、死罪(『日本書紀』에는、그냥 斬했다라고만 되어있지만)에는 틀림이 없으므로 동등하게 重罪인 것이다.
「金」은 右大臣、「赤兄」은 左大臣이었기때문에、「赤兄」쪽이 重職이었지만、「金」만이 死罪이었던 것은、보통 생각으로는 납득할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金」이외의 重罪人은、중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기재되어있지 않으므로 그 존재자체가 의심스럽다.
결국、死罪는「金」혼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金」이 死罪이고「赤兄」이 流罪. 「果安」도 살아있다면、그 子孫도 流罪일 것이다.
그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壬申紀』에 의하면、「大海人」에게 귀띔하는「蘇我臣安麻呂」가 기록되어있다.
「安麻呂」는「大海人」에게 호감을 받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은, 「蘇我氏」는「大海人」과 친분이 있었던 것이다.
実은、「赤兄」의 流罪라고하는 것은、「太宰府」로의 赴任이었다고 생각된다.
(土佐, 또는 上総国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天智 7年7月、「栗隈王」이「筑紫率」로 임명되고 있다.
翌 8年1月、이번은「蘇我赤兄臣」이「筑紫宰」로 취임하고 있다.
天智 10年、「栗隈王」은 다시 「筑紫率」로 되어、『壬申紀』에 이르고 있다.
天智 10年에「赤兄」은 左大臣이었기때문에、이때「栗隈王」으로 再就任했던 것이지만,「太宰府」는「都督府」이다.
「唐」의 占領政府인「都督府」는「倭京」과는 友好関係이고、「近江方」과는 敵対関係이었다.
그것이 証拠로、『壬申紀』에서「栗隈王」은,
「筑紫大宰 栗隈王과、吉備国 守当摩公広嶋의 二人은、원래부터 皇太弟가 맡고 있었다」
라고 증언하고 있기때문이다.
「近江朝」의 重臣이었던「赤兄」이、「唐」의 占領政府인、「筑紫都督府」의「筑紫宰」였다는 것은 전연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近江朝」에「筑紫都督府」의 人事権등이 있을리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太宰府」와「筑紫都督府」는、별개였던 것일까?
따라서、天智 8年의「筑紫宰」就任의 기록은、뒤섞인 것으로 생각된다.
『日本書紀』의 流罪의 경우、그 행선지를 기록하고 있지만、「赤兄」의 경우는 단지 流罪라고만 기록되어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天智紀』・『壬申紀』에 등장하는「蘇我氏」는、「近江朝」의 重臣임에도 불구하고、그 일련의 행동은 흡사 「大海人」이 꽂아놓은 密偵과도 같다.
그 행동으로부터 추측하면、「宇治」까지 배웅했다고 하는「赤兄」과「果安」은、「大海人」의 警護였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손으로부터 지킬려고 한 것일까?
그것은 목전에 있는 刺客、「中臣連金」으로부터의 보호였다. 5重臣가운데서「金」만이 참수된 이유야말로、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배웅했던 곳이「宇治」까지였다는 것은, 宇治川까지가「近江朝」의 勢力圏이었을 것이다.
「大津」으로부터「宇治」까지는、직선으로 십수키로이므로、도보로도 4시간 정도의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이 시간 쭉 절박했던 공기가 이어졌던 것도 상상할수 있다.
「金」의 행동은 자신의 의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天智의 意志라고 確信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의 중대함을 눈치챈「蘇我氏」가、동행을 한거겠지만 、「金」에서 본다면、거절하면 의심받을 수 있으니 거절할 수 없었다. 잘못해서라도 「大海人」을 치면、 스스로 내린 사명을 완수하는 거지만、「赤兄」・「果安」의 人間의 縦이、조용히 가로막았다.
대략、한마디의 말도 없었을 것이다.
宇治川까지 다가와 있다. 또 이것을 빼면 찬스가 있지 않다.
「金」이 命을 내려、일을 완수할려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에 날아들어온 것은, 수많은「蘇我氏」의 私兵이었다.
「金」은 이미 할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라고 멋대로 상상해보았지만, 宇治川을 넘어서 「大海人」이 일단 향했던 곳이、「嶋宮」이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明日香村島의 庄의 離宮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嶋宮」이라면 떠오르는 것이、「嶋大臣」이라고 불리던 「蘇我馬子」이다.「嶋宮」은 旧「馬子」의 邸宅跡이 아니었던가?
宇治川으로부터의 行程이、「大海人」혼자만의 행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嶋宮」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당연히「蘇我氏」에게 호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다음날、드디어「吉野」로 들어가게 된다.
『日本書紀』에는、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0日、吉野에 도착했다. 이때 많은 舎人을 모아서
『자신은 지금부터 仏道에 들어가 수행을 하므로 자신과함께 修道를 할려고 생각하는 자는 머물러도 좋다. 朝廷에 출사하여 이름을 떨치고자하는 자는、되돌아 관청으로 돌아가도록』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자는 없었다. 다시 舎人을 모아서 앞서와 같이 고하자、舎人의 반은 남고 반은 돌아갔다」
이후 「近江朝」에서는、앞에서 소개했던 内裏의 西殿에서의、「大友」와 5重臣의 맹세이지만,
11月24日、「大津宮」大蔵省의 第三倉으로부터의 出火를、「吉野」方의 소행이라고 본 걸까、
29日、「大友」와 5重臣은 다시 天智앞에서 誓盟을 확인하고 있다.
「吉野의 叔父(私的으로 말하면 伯父이지만)는、어떻게 오느냐 」
「大友」는 憂慮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2月3日、天智는「近江宮」에서 崩御했다.
「朝廷」은 伝令을 통해、「吉野」쪽에 이것을 알렸다.
伝令은 이것을 기일에 빈번히 행해지게 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大海人」은、표면상으로는 仏道의 수행을 위해 「近江」을 떨어져있는 것에 지나지않으므로、무언가의 交流가 있었다고 해도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며, 「近江」・「吉野」쌍방 모두、서로의 동향에 신경쓰지 않으면 안될정도로、情報를 필요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3. 挙兵決意
『天智紀』巻末에、3개의 童謡가 기록되어있다.
「み吉野の、吉野の鮎、鮎こそは、島辺も吉き、え苦しゑ、水葱(なぎ)の下(もと)、芹の下、吾は苦しゑ。」
(요시노의 은어, 그 은어라면 섬 주변을 헤엄치는 것도 좋으리라.
그렇지만 나는 은어가 아니므로 물옥잠이나 미나리 밑에 있는 것이 괴롭다 )
「臣の子の、八重の紐解く、一重だに、未(いまだ)解かねば、皇子の 紐解く。」
(臣下인 나는, 자신의 끈을 한겹조차 풀지 못하는데、御子는 자신의 끈을 완전히 풀고 있다)
「赤駒の、行き憚る、真葛原(まくずはら)、何の伝言(つてごと)、直にし吉けむ。」
(붉은 말이 지나가는 칡이 무성한 벌판、그런 식으로 아직까지도 伝言 따위는 전하지 않고, 직접 말씀하시면 좋을 텐데)
以上이 그것이지만, 설명에 따르면,
「一은,『吉野』에 들어간 『大海人』의 괴로움.
二는 『吉野』쪽의 戦争準備가 이루어졌다는 것.
三은『近江』쪽과 『吉野』쪽의 직접 교섭을 권하는 것」
으로 되어있다.
「直木孝次郎」氏는、第一首와 第三首의 歌에 대해서는、
「第一首는、大海人皇子를 은어에 비유하여、섬주변에 있는 은어는 좋지만, 水葱(물옥잠)이나 芹(미나리)가 살아있는 탁한 小川에 있는 은어는 괴로울 것이라고、吉野에 있는 皇子에게 同情하는 歌。
第三首는、大海人皇子의 再起를 바라는 소리를 吉野에 전하고 싶지만, 真葛原(칡이 무성한 벌판)등으로 막혀서 전하기 어려워、皇子는 伝言등을 기다리지 말고 직접 행동을 취하면 좋을텐데.. 라고 決起를 待望하고 있는 歌라고 말해지고 있다」
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童謡는、「吉野」쪽의 正当防衛를 긍정하는 材料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대략 後世에 덧붙여진 것일 것이다.
그러나、실제로 巷(시정)에서 유행했다고 한다면、世論은「大海人」에게 동정적이었다고 말할수 있지만, 과연 민간인이、이러한 皇室의 집안소동을 알 도리가 있었을까?
「吉野」의 葛(칡)으로 말하면、식품의 브랜드로서도 유명하지만, 칡덩굴은 단단한 털이 나고、그 길이는 10 미터나 된다. 그러한 칡이 群生하고 있는 平原에서는、童謡대로、가기도 당기기도 곤란할 것으로 생각된다.
서로 정보를 필요로하고 있으면서도、마음에 맡기지 않는 상태였던 건 아닐까?
그러한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는 에피소드가、『壬申期』의 巻頭 부근에 있는 挙兵決意에 결부된 다음의 伝聞情報이다.
「이 달、朴井連雄君은 天皇에게 奏上하여、
『제가 私用으로 혼자 美濃에 갔습니다. 이때 近江朝에서는、美濃 ・尾張 両国의 国司에게 말씀을 하여
『天智天皇의 山稜을 만들기 위하여、미리 人夫를 지정해두라』라고 命했습니다. 그렇지만, 각자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山稜을 만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変事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신속히 피하지 않으면 더욱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朴井連雄君」가 奏上했던 天皇은、天武이다.
즉위하지 않은「大海人」을 天皇이라고 기록한 것은, 시간착오이다.
『日本書紀』編纂開始때에 天皇이었기때문에 이러한 표현이 되었겠지만, 실은「吉野宮」에서 가만히 即位했던 것으로도 생각할수 있다.
어느 것이건、여기서는 問題로 삼지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吉野」쪽으로서도、첩보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 「雄君」의 보고가 제 1보였다고 한다면,「近江」의 동향을 「美濃」에서 알게 되어、諜報省(省이라고 말할수 있을런지 어쩔런지는 제쳐두고)이 가지고 온 정보는、늦지 않은 일이 된다.
라고 하기보다는, 敵의 通交를 막는 것은、당연한 것이면서도 아군도 저지하는 것이었다.
「吉野」地方은、예로부터 都로부터 쫒겨난 사람들의 은신처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熊野」에 이르는 一帯의 山岳은、修験者들의 道場으로서 이름 높지만, 그들은 密使로서 활동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南쪽은 산들로 둘러싸여 공격을 받기 어렵고、「紀伊」・「伊勢」와의 연락은 어느정도 곤란하지 않은 이점을 가진다. 그러나 北은 奈良盆地가 기다리고 있어서、現代에서는 진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馬의 歩行을 거부하는 칡의 群生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연의 바리케이트이다.
「大海人」을 시작으로、「義経」・「後醍醐天皇」등、「吉野」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은 유명하지만, 왜 「吉野」였던가?
「奈良」와 인접하고 있는 「吉野」는、現代的으로 생각하면 이해할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奈良」・「京都」로부터의 進入은 騎馬隊로서는 불가능했다고하는 例의 童謡가 가르쳐주고 있다
4.唐羅開戦
668年、이 해「白村江의 전투」에서 승리했던 「唐羅」連合軍은、「高句麗」를 멸망시켰다.
「中大兄皇子」가 天智天皇으로서 즉위했던 해이다.
「白村江」의 翌年으로부터「唐」은、「筑紫都督府」를 경유하여「倭国」에 대하여、使者를 파견해오고 있다. 그리고 조선반도 통일후의 「新羅」도 또한、「倭国」에 사자를 보내오고 있다. 물론 이「倭国」이라는 것은「近江朝」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倭京」이 있는 「奈良」이다.
両国의「倭国」에 대한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朝鮮半島 지배를 노리는 「唐」과、朝鮮半島의 독립국가를 목표로하는「新羅」.
다같이、「倭国」을 우군으로 하여、自国의 입장을 우위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2국의 위세를 배경으로 하여、「倭京」의「近江朝」공략계획이 벼루어져갔다.
또한、旧「百済」세력의 一掃는、「唐羅」의 의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倭京」은「唐」의 占領政庁였던「筑紫都督府」의、전면적인 지지를 얻어、都督「定恵」는、「唐」에서 몸에 익혔던 지식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그러나「近江朝」는、「唐」으로부터의 援軍이「筑紫」에 도착하는 것을 꿰뚫어 본 것처럼、「大友」를 太政大臣으로 한 新体制를 발족하여、「大海人」을 軟禁해버렸던 것이다.
「倭京」의 首都기능의 부흥에는、「大海人」이라고 하는 우두머리가 필요했던 것인데、이것에 의하여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라、「近江朝」에 대하여、쉽게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大海人」의 옆에는、密使에 의한 정보전달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人質로 되고 말았던 「大海人」은、身辺은 보증되면서도、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을 움직일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도、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고해도、말할 수 없는 혐의를 받아、묻혀 버릴뿐이므로 무섭도록 신중해져갔다.
결국、저쪽에서 찾아와 주는 사소한 기회를、오로지 계속 기다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면서、그것이 실행될수 있는 기회가 왔을때、出家한다고 하는 시나리오만은、완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618年에 건국했던 「唐」은、天智天皇 즉위년까지、겨우 50年밖에 지나지 않았다.
「新羅」의 조선반도 平定에 힘을 보태어줬지만、실은 内政의 충실에 바빴을 것이라 생각한다.
「白村江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흥정에 의하여、「唐」은「新羅」와 연합해왔지만, 敵国이었던「百済」도 아직、「唐」에게 구원을 청하고 있던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新羅」를 택한 이유는、「新羅」의「唐」에 대한 追従의 자세였다.
「新羅」는 法律이나 제도는 물론이고 、唐服까지 채용했던 것이다.
半島지배를 눈셈하는 「唐」이、이것에 기뻐하지 않을리가 없었다.「新羅」가 이기고 남으면 、「唐」주도의 半島지배는、실현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때「唐」은、「突厥」을 쓰러뜨린 직후라서 、반드시 국력이 충실해 있지도 않았다. 이것도、연합으로 기울어진 요인일 것이다.
당황한 것은 「百済」였다.「百済」는、같은 입장에 서게된、「高句麗」와 손을 잡고, 단숨에 起死回生의 도박을 하려고 했지만, 660年、「唐」의 원정군과 신라에게 협공을 당해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百済」조차 없어지면, 「高句麗」공략의 計算도 세우기 쉽게되어、약체화되어 있던 「百済」를 먼저 第一로 노렸던 것이다.
663年、王朝부흥을 노렸던 「百済」잔존세력이、日本諸国을 한패로 끌어들여、「白村江의 전투」를 했지만, 여기서도 완패했던「百済」는 최후의 영유지 ・「筑紫」도 잃고 敗走하여 混迷해간다.
그리고 668年、「唐羅」연합군에 의하여「高句麗」가 멸망되어、朝鮮半島는「唐」・「新羅」가 독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唐」과「新羅」는 급속하게 사이가 나쁘게 되어갔다.
원래 朝鮮半島라고 하는、같은 목적으로 연결된 것에 지나지 않은 両国이었으므로、그 목적이 달성되면, 관계도 해소해가는 것이지만, 최대의 원인은、「唐」이「新羅」를 属国취급한 것이었다.
「新羅」国王조차도、「唐」으로부터 보면 州知事였던 것이다.
오랜 전란의 세상을 견뎌내어 、「唐」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新羅」는、669年、「高句麗」에서 봉기했던 반란군에게 동조하여、「唐」을 半島로부터 쫒아냈던 것이다.
이「唐羅」戦争은、676年(天武5年)에、「新羅」의 독립국가로서 조선반도 통일이라고 하는 결과로서、막을 내리지만, 혹시 、「白村江의 전투」後 바로、朝鮮半島 문제가 해결되고 말았더라면、「近江朝」의 번영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긴박했던 반도 정세때문에 「倭」에게까지 손이 미치지 못하고 전후처리를「筑紫都督府」부설로 해치우고 말았던 「唐羅」에、적절하게「近江朝」는 구원받은 것이다
이 긴박했던 시기와、天智天皇 즉위 ・ 新体制 발족의 시기가、묘하게 겹쳐지고 있다는 것이 흥미깊다.
「倭京」과「新羅」는 관계가 밀접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唐羅」의 공격이 없을 것으로 본 「中大兄」은 스스로 即位.「大海人」을 몸이 좋은 연금 상태로 만들고 、「大友」太政大臣에 의한 新体制를 발족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다.
天智의 엄청난 점은、律令国家 건설을 추진시켜、唐風의 국가만들기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夏 4月25日、漏刻(水時計)을 새로운 台의 위에 두고, 처음으로 鐘 ・ 鼓를 쳐서 시각을 알렸다」
이것들도、唐風文化의 모방일 것이다. 또한 漢詩 ・ 漢文이 왕성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日本은 이후、단숨에 唐風文化가 花開해 가지만, 天智가 무엇이든지 唐風을 좋아했기때문이 아니다.
「壬申의 乱」이 종결되고나서 3년후인 674年、「唐」과「新羅」는 전면전쟁이 되었다.
「唐羅」戦争은 2년간 계속되었지만, 676年、드디어「新羅」는 朝鮮半島로부터 「唐」을 쫒아내는데 성공했다. 이것을 「統一新羅」라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해도 朝鮮半島를 수중에 넣지 못한 「唐」이 취한 정책은, 天武政権에도 서서히 압력을 가해왔다.
그것은 当面、「日本」이「唐」의 敵으로 되지않도록 하는 것이다.
대략「唐」은、朝鮮半島 공략후는 日本列島 침공을、생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시대는 말하자면、天武政権下였다.
「唐」의 군사력 앞에서는、天武政権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너무 무력했다.
본의 아니게「唐」에 협력하는 수밖에는、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것은 이 시기,「日本」이、크게 唐風의 제도에 치우친 것으로부터도 알수있다. 즉, 律令制度를본격적으로 도입함으로써、天武政権이 親「唐」政権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近江朝」에도 들어맞는 것이 아닐까?
결국、天智가「唐」風에 傾倒해 간 배경에는、天智가「唐」의 문화를 좋아해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고、그렇게하여 공순한 뜻을 나타냄으로써、나라의 생존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孝徳天皇의 白雉 2年의 条에、
「이 해、新羅의 貢調使 知万沙(注1)食들은、唐나라의 옷을 입고 筑紫에 도착했다. 朝廷에서는 맘대로 制服을 바꾼 것을 나쁘게、책망하여 쫒아냈다.」
라고 했다. 朝廷이라고 하지만, 이때의 皇太子는「中大兄皇子」이었다.
孝徳天皇을 제치고、스스로의 의지로 遷都해버릴 정도로、절대권력을 가진 皇太子였다.
朝廷이라고 하는 것은「中大兄」에 다름아니라고 생각한다.
「新羅」、「天武朝」가 그랬다고 한다면、「天智朝」로서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天智朝」도 역시、「唐」에게로 傾倒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天智의 노력도、遣唐使에 대해서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것 같다.
이미 말한대로、670年、「近江朝」는「日本」의 国号를 걸고 遣唐使를 보내지만, 그것이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高句麗」攻略이후、나날이 험악해져 갔던 「唐羅」관계중에서、자신의 발밑에 불이 붙은 両国은、日本列島의 火消에까지 신경을 쓸수 없었다.
「大海人」의 近江 탈출과、그 후 天智 사망을 알고서、재빨리 軍隊와 使者를 올려보냈던 것이다.
「倭京」은「唐」・「新羅」의 両国과、우호관계에 있었기때문에、그 어느쪽 일방에게 짐을 짊어질 수는 없었다.
天智 10年11月10日의 条에、「郭務宗」들의 二千人의 来訪기록이 있지만,
이것은 671年의 일이 아니고、「白村江」의 直後인 663年이었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으므로 상세한 것은 그쪽에 맡기고,
『壬申紀』의 天武元年3月18日에、
「朝廷은 内小位阿曇連稲敷을 筑紫에 보내어、天皇이 붕어했다는 것을 郭務宗들에게 고했다. 郭務宗들은 모두 喪服을 입고、3번 挙哀를 하고、동쪽을 향해 절했다.」
이것에 계속하여 21日
「郭務宗들은 再拝하여、唐의 皇帝의 書函과 信物을 바쳤다.」
라고 했다.
朝廷이라는 것은「近江朝」에 대한 거 같겠지만 、「遣唐使」를 보냈을 정도이므로, 그러한 것도 생각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21日의 条는、前文에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한다면、너무 준비가 지나치게 돼 있다. 中 사흘밖에 열지 않았고、이것으로는 마치 天智가 죽을 것을 予期하여、준비했던 書函이었던 것이 된다.
더욱 그러한 것은 있을수 없는 이야기이므로、이 2개의 문장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郭務宗」으로부터 건네받은 皇帝의 書函에 대한 응답이、 더 계속되는 5月12日의 条에서는 없었던 것일까?
「갑옷 ・ 갑 ・ 활과 화살을 郭務宗들에게 주었다。」
이 선물이、「近江京」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말했지만, 書函의 内容으로서는、「筑紫都督府」를 경유하여「倭京」에 도달했던、対「新羅」전쟁으로의 応援요청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
눈앞의 적「近江朝」를 앞에두고、応援을 보낼리가 없는 「倭京」으로서는、武具의 供出로 불똥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天武朝」에서는「新羅」로부터의 交流가 많아지고 있었지만, 「天武朝」의 親唐政策을 싫어했던「新羅」로서는、「天武朝」가 맞닥뜨린 것으로 힘의 균형을 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국가간에 있어서의 三角関係이다.
그러나、「倭京」의 살림사정은、한층 괴롭게 되어갔다.
・・・・
한층이라고 하는 것은、「大海人」은、出家를 称하여「大津京」을 뒤로 했을때、自家의 武器를 모조리공개적으로 바쳐 왔기 (『壬申紀』)때문이었다.
더우기、그렇게 하지 않으면, 「大津京」탈출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에 더하여, 의지하고 있었던「倭京」세력의 무기를、「唐」으로 공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였으므로、「大海人」측에는、武器다운 武器가 없었다.
거기다가 아군이 될 倭豪族은、「庚午年籍」에 의하여 戦力이 알몸이 된 위에、그 가운데서 武器를 내어、믿고있던「唐羅」의 협력이 얻을수 없게되면, 공격하는 데도 知力만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倭京」의 旧豪族들에 의한、「近江攻略」에의 높아진 기대감을 딴데로 돌리고、
「大海人」은 무언가의 戦略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
「4年冬10月17日、天皇은 병으로 누워 중태였다.」
『壬申紀』는、이렇게 기록한다.
天皇은、天智天皇을 말한다. 4年에 대해서는、 이제 와서 기록할 것도 없지만, 葛城天智 4年의 일이다.결국 『日本書紀』가 말하는 天智天皇이다.
이때의 朝鮮半島 정세는,
「冬10月6日、新羅는 唐의 戦艦 70여 鑑을 공격하여、郎将 鉗耳大侯를 비롯하여 士卒 百余人을 포로로하고, 그외 빠져 죽은 자는 셀수도 없었다.」 (『三国史記 ・ 新羅本紀第七』)라고 되어있다.
10月7日、「新羅」의 「沙食金万物」이 訪朝하여、調를 바치고,
12月17日、帰国의 帰路에 올랐다.
調라는 것은 律令制度하의 税에 의한 것이다.
이때에는 아직、「近江」・「吉野」라고 하는 명확한 구별은 없지만, 이때에 来訪했다고 하므로, 앞에서 말한、「倭」・「唐」・「新羅」三国의 힘의 균형으로부터 되는 접근이었다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倭」의 상태를 엿보기 위해 왔다고 하는 것이 대략 본심일 것이다. 그러나 「唐羅」가「倭国」문제에관여할수 없었던것과 같이、「倭国」(「近江」・「吉野」쌍방 모두를 가리킴)도 아직、朝鮮半島 문제에 관여할수 없었던 것이다.。
5.小子部連鋤鉤
그래도、「大海人」에게는 운이 있었다.
『壬申紀』를 보면、「近江朝」은「美濃・尾張」로부터 人夫를 조달하고 있다.
이것도「庚午年籍」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기때문일 것이다.
「近江朝」가 指令을 내릴수 있다고 한다면、이 国司는「近江朝」가 임명했던 자 일 것이다.
이者가 赴任한 것인지 土着인지는 알수 없지만, 農民을 보낼정도의 힘은 갖고 있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大海人」이「不破」에 도착할 즈음에、
「尾張国司 小子部連鋤鉤가、2万의 兵을 이끌고 帰属했다」
라고 하여、이 2万의 兵이야말로、본래「近江朝」이 조달했던 兵이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렇다면、이 당시 朝廷이 지방에 주었던 영향력은, 이름뿐으로 거의 없었던 것이다.
「大海人」의 運이라는 것은、그의「湯沐」이「美濃国 安八磨郡」(岐阜県 安八郡)에 있었다는 것이다.
「畿内 ・ 畿外」、「近江 ・ 遠江」라고 하는 말이 나타내는 것은, 大和朝廷의 세력범위였다.
関ヶ原 以東、하물며「尾張」는 문자대로 「終わり, 끝」의 나라였던 것이다
언제나 中国 ・ 朝鮮문화 문명에 노출되어 있던 畿内에 비하여 열등한 面은 있었을런지 모르지만, 海外出兵이나 天皇家의 집안소동등、中央의 変事에 계속 물들었던 畿内의 豪族보다도、国力에 관해서는 훨씬 충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大海人」의 측근중의 측근、
「村国連男依」(무라쿠니노 무라지오요리)는, 「美濃国各牟(가가미)郡村国郷」、
「身毛君広」(무게노키미히로)는,「美濃国武藝(게)郡」의 출신이며、
「和珥部君手」(와니베노 오미키미데)도、어찌됐건「美濃国」의 사람이다.
『壬申紀』에 돌연 등장하는 그들은、「近江朝」혹은 그 이전부터의 측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대략、「朴井連雄君」(에이노무라지 오키미)가、「美濃」에 私用으로 갔을때,
「이달、朴井連雄君은 天皇(大海人)에게 奏上하여
『제가 私用으로 혼자서 美濃에 갔습니다. 그때 近江朝에서는、美濃 ・尾張 両国의 国司에게 분부를 내려、
『天智天皇의 山稜을 만들기위하여、미리 人夫를 指定해 두게』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각자에게 무기를 지니게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山稜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変事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신속하게 피신하지 않으면, 필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 부분이지만, 変事를 알아채고 、데리고 왔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雄君」의 한마디가 방아쇠가 되어、『壬申의 乱』이 발발했다.
『壬申의 乱』의 근원은、역시 天皇家의 집안소동이다. 이런 집안 소동은 과거 몇번 일어났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종래에 있었던、宮廷内에서 일어났던 집안소동과는 스케일이 틀린다.
그러한 의미에서、『壬申의 乱』은 단순한 집안소동이 아니다.
畿内 ・ 東海와 西日本을 東西로 나누어서、고대사상 첫 천하를 가르는 대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는, 승리했던「大海人」측의 전황만 클로즈업 되고있지만, 정치적으로 보아 중요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近江朝」의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近江朝」、이라고 하기보다「大友」는、『壬申의 乱』을 틈타서 무엇을 할려고 했던 것일까?
「大友皇子」는「庚午年籍」에 절대적인 자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大友」는「大海人」이 東国으로 들어가도、 추격대를 보내지 않았다.
「庚午年籍」의 데이타에 의하여、동원되었던「尾張 ・ 美濃」의 数万兵이,「吉野」쪽으로 가로막아섰기때문이다.
「大友」는 그외에도、「吉備」・「筑紫」에도 파병을 요청하고 있다.
「吉備」는 징병에 성공한듯하지만, 「筑紫」가 징병에 응했을 리가 없다.
일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畿外」에도 파병을 재촉했다고 하는 것은、「畿内」、소위 말하는「山城 ・大和 ・河内 ・和泉 ・ 摂津」의 5国으로부터의 동원은, 완료했던 것으로 보아야겠다.
『壬申紀』를 보면、「畿内」에 있어서의「近江」쪽의 세력은、「吉野」쪽의 大隊를 패배시킬 정도의 세력이었다. 이런 점으로부터 생각해보아도、「畿内」의 動員을 완료하고 있었으므로、더욱더 動員을 目的으로 하여「畿外」에, 使者를 파견했던 것이다.
특히「美濃」에의 派兵요청은、「大海人」에의 도발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湯沐令이었던 「多臣品治」(오오노오 미혼지)가, 이끌고 있던 兵力이 3千명이었다. 이 병력이야말로, 「美濃」의 全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庚午年籍」의 데이타로부터、「美濃」의 실세는 대략 파악하고 있었다.
兵力은 많아진 것에 넘어간 적은 없지만、겨우 3千兵을 東国으로부터 징병하는 모험은 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함에 따라서, 「大海人」이 얻어맞은 심리적인 대타격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고, 남겨진 한줌의 手勢로서는、이미 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기회에 다시 말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大海人」이 승리한 것은, 律令制라고 하는 새롭게 도입된 제도보다도, 同族 ・ 同門이라고 하는 旧지배체제가 이겼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이 시대의 大和朝廷의 威光은、「畿外」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기때문에,「畿内」・「畿外」라고 하는 구별이 있는 것이다.
「大友」는、「庚午年籍」에 의한 팽대한 데이타를 토대로, 兵力의 動員이라고 하는 기회로 축복받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
대략 内心은、자신의 号令下에、어느정도의 兵力이 동원될수 있을까, 알고 싶어서 근질근질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에 경악하여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大友」가 시도하려고 했던 라이브는、「尾張」라고 하는 外国으로부터、2万兵이 징병된 시점에서 완벽한 리허설이 끝나고, 本番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데이타를 활용하면서까지 고대했던『壬申의 乱』에、「大友」는 패배했다.
데이타로부터 마음의 움직임을 읽지는 못했기때문이다.
결과는 결과이다.
그러나、결과야 어떻든 「大海人」도、데이타의 위력을 실감했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大海人」을 승리로 이끈 要因은、이후 자기자신을 敗者로 만들 要因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이 「大友」의 실패로부터 얻은 경험이, 「大海人」을 더욱더 律令制의 필요와 충실에로 기울어져 갔다고 생각한다.
「大友」는「庚午年籍」을 기초로하여 징병을 한다고 하는、장대한 실험을 성공시켰다.
그러나、그것이 실천되었을때、구지배체제 앞에서는、너무도 간단히 날아가 버렸다.
이 新旧 2개의 제도 가운데서 괴로워하다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있었다.
『日本書紀』에는 짧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이것보다 먼저、尾張国司 小子部連鋤鉤는、山에 숨어서 자살했다. 天皇은
『鋤鉤는 공이 있는 자였지만, 죄없게 해서 죽을 수도 없으니、무언가 숨긴 모략이 있었던 걸까』라고 말했다」
「国司」라고 하는 것은、朝廷이 屯倉의 経営을 위해 설치한「나라의 관리」에「国司」의 字가 사용되었다
「大化改新」後에 본격적으로 확충 정비되었을 것이다.
「国司」의 권한은 경찰로부터 인민의 교화등 행정으로부터 司法에 미치고 있지만, 「大宝律令」이후는 어쨋건、이즈음의「国司」라는 것은、朝廷으로부터 부임한 것이 아니고, 朝廷으로부터 임명되었거나、고용된 지방의 名士로서、말하자면, 「나라의 관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小子部連」는、神武天皇의 皇子「神八井耳命」의 후예로 칭하여, 「尾張」의「丹羽氏」와는 同族에 해당한다.
당연、民衆으로부터의 신뢰가 두텁고、지시계통은 용이하게 확립했을 것이다.
그렇지않았다면、朝廷의 権限이 멀리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의 데이타수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본래、신체제는 구체제에 의존함으로써、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며,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통일도 되지 않은 채로 급진된 律令制度아래였기때문에、일어난 悲劇이었다고도 말할수 있을 것이다.
「鋤鉤」는、新旧 2개의 제도에 몸을 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결과, 자신의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6.年表
「白村江의 전투」이후、지금까지의 整理를 위해、年表를 紹介한다.
말할 것도 없이、 私見이 많이 포함된 것이다.
662年 1月 葛城皇子 즉위.
663年 8月 白村江의 전투 대패.
663年 某月 浜廊事件. 大海人皇子、酒宴 가운데、長槍으로 床을 꽂음.
663年 10月 鎌足天智 崩御.
663年 11月 唐의 郭務宗등 6百人、送司沙宅孫登등 千4百人、総計 2千人이、船 47隻을 타고 比知 島에 도착하다.
某月、占領政府인 筑紫都督府가 설치되다.
664年 3月 冠位 26階를 제정.
665年 某月 都의 쥐들이 近江国을 향해 이동했다.(倭京의 荒廃를 냄새 풍기려고 한 것인가?
667年 3月 葛城天智、近江国 건국
668年 1月 葛城天智、近江宮을 披露.(『日本書紀』의 즉위기록)
668年 2月 大海人皇子의 딸、倭 姫王을 세워 황후로 하다.
669年 12月 高安城을 지어서、畿内의 田税를 거기에 모아두었다. 斑鳩寺로부터 出火.(倭京과 近江朝와의 対立인가?)
670年 2月 庚午年籍을 만들다.
670年 4月 法隆寺로부터 出火.(反庚午年籍으로부터 대립의 격화인가?)
670年 某月 近江朝、遣唐使를 보내다. 日本을 자칭하다.
671年 1月 大友皇子、太政大臣이 되다. 大海人皇子、軟禁상태로 되다.
671年 10月 大海人皇子、近江 탈출 성공. 吉野에 들어가다.
671年 11月 5重臣과 大友皇子 회담.
671年 12月 葛城天智 崩御.
672年 5月 大海人皇子、挙兵결의. 近江軍과 격돌.(「壬申의 乱」)
672年 7月 瀬田의 決戦으로 近江軍 패배. 大友皇子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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