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너머

신약성경의 배경(3)

청 설모 2014. 5. 11. 00:13

신약성경의 배경(3)

7. 60년대의 교회의 중대위기


(1)헬라파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끊은 헬라파들은 시리아.페니키아의 연안지방의 이쪽 저쪽에 아직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초의 세력을 상당히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신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그때문에 그들은 유대인 가운데서 고립하고 말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전도를 추진하여 가는 것을 확실히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야곱의 순교

요세푸스의 이야기(유대 고대지 XX 9.1) 야곱과 [그외 몇명이 ]62년 로마의 총독의 교대기간을 노린 대제사 안나스가 유대의회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거기서 모세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아 돌로 쳐죽였다고 되어있다. 


 헤겟스포스의 이야기에서는 야곱의 죽음은 69년의 로마군에 따른 예루살렘 포위개시때와 가까운 시기로 되어있고 야곱의 선교의 성공에 불안을 느낀 [서기들과 바리새파]의 그룹에 따른 私刑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후계문제에 대한 알력

에수의 숙부 클레오파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는 자를 선택하여 조직을 유지해나갈려고 했다(유세비우스의 교회사 4의 22.4)

예수의 동생 유다의 2명의 손자가 드미트리누스제(81-96)의 앞에 출두하여 위험한 곳에서 죽기직전 도망하여  트라야누스제의 시대까지 전교회를 지도했다고 말한다.

 

(3)바울의 순교

예루살렘을 방문- 체포,감금-로마에 이송 (서기 63년)  64년에 처형

바울이 창립한 몇개의 교회-바울이 투옥되어 사형에 처해지자 망연자실.에게해 주변지역에 모여있고, 각자의 도시의 시나고구와 관계가 끊겨 있어서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내버려지고 있었다.

 

(4)베드로의 순교

베드로도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순교하고 , 그에 필적할만한 거물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64년 로마 화재때 네로가 명령한 그리스도교의 대학살때 베드로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타키투스 연대기 ).


(5)네로의 박해

64년 로마를 덥친 대화재로 큰 피해를 당하고, 네로는 이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워 많은 처형자들이 생기게 되었다(타키투스의 연대기)


네로의 그리스도인들의 대량학살후 로마제국 당국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를 구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레리기오.리기다]로서 인정되고 있던 유대교의 지위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도들이 보호받고 있던 것이 이제부타는 없어지게 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강제권이란 이름으로 행정당국이나 경찰의 전단적인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8. 70년의 신전파괴
신전파괴-66년부터 로마에 대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란과 로마의 탄압으로 인해 70년 경 예루살렘의 함락과 신전이 파괴된다. 이때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들은 젤롯당의 행위를 시인하지 않고 동조하지 않았다(요셉푸스의 유대전기4(5.4).(70년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평화를 지지하는 그룹의 리더중의 한사람인 발라기야의 아들 제카르야가 살해됨)

유세비우스의 교회사3(5.3)에서는 로마군의 예루살렘 포위전 전에 그리스도교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트란스요르단에 있는 데가폴리스의 이방인 마을에 있는 베라에 도망갔다(교회사 3의 5.3) 리더를 잃어버렸기때문에 공동체는 분해되어 멤바의 일부는 젤롯당에 연결되었으나 지도적이었던 자들은 베라에 정착하고, 나머지들은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지역으로부터 멀리 피난해 있었으리라


그위에 야곱을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의 지위를 맡게 된 것은 예수의 종형제였던 시몬이었으며 (유세비오 교회사 3의   11.1 및 4의 22.4)  또 예수의 형제였던 유다의 2명의 손자가 드미티아누스의 시대의 교회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유세비아누스 교회사3의 20.6 및 32.6) 


 1세기 말경에는 에수의 혈족에 있은 자들에 의한 일종의 집단적 감독제가 존재해 있었다고 상상된다. 그리고 예수의 가족이 이리하여 교회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은 교회내부에   대립을 불러 일어키고 있다고 생각된다(유세비우스 교회사 4)


유대전쟁의 결과로서 팔레스타인의 제교회는 황폐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이리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전체적 질서가 없어지게 되었다. 순례가 소멸해 버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배적 지위가 붕괴되어버렸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거의 교황제와 비슷한 시스템이었지만 제교회 연합제로 급격하게 이행하게 되였다. .


9. 얌니야의 유대교 개혁

①유대교 개혁

유대교는 신전을 잃고 분해될 위기에 처했지만, 이 위기는 예루살렘의 바리새파중 나이든 랍비였던 요하난.벤.쟈카이의 지도하에 급속히 수습된다. 로마에 대한 무장봉기에는 전적으로 반대


 얌니아라고 하는 예루살렘 서쪽 40키로 지점에 있는 연안평야의 마을에 정착하는 것을 허가받는다.  그의 학교는 대성공을 거두고, 얼마후에 새로운 유대인 의회 산헤드린을 창립하여, 예루살렘 대제사들이 쥐고 있던 권한의 일부를 -특히 曆의 결정권-요구하고, 그리하여 유대교에 종교적 중심지를 제공할려고 노력했다. 요하난.벤.쟈카이는 바리새파로서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시나고구에 제안되었던 것은 바리새파적 사고방식으로, 이 사고방식이 다음 4반세기동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의 그 외의 흐름 (사두개파, 젤롯당,엣세네파)는 유대전쟁에 의하여 멸망되고 말았고,유대교의 바리새파적 형태가 도처에 지배적 으로 되었다.


②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단절

성서 정전에 속하는 문서의 리스트를 결정하여 시나고구에서 낭송하고 있던 18인의 축복의 12번째에 [미니움](=이단자들)을 저주하는 문구, 그리고 그것에 더해진 대략 나사렛파를 저주하는 문구를 부가시킬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시나고구의 멤바로서 남아있던 그리스도교도들은 시나고구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고,또 제 복음서에 의하면 시나고구쪽에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신봉자들을 쫒아내기 시작했던 것이다(요한 9.22  12.42)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단절


밋슈나로부터 탈무드까지 이르는 선택은 1세기의 최후의 30년간에 걸쳐서 야무니아 세력에 의한 선택이고 이것이 랍비적 유대교의 조직의 기초로 되고 있는것이며 그것이 현재에도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10.  70년대부터 100년까지-유대적 크리스토교 분투
바울기원의 공동체는 유대교 조직의 공동체로부터 이미 완전히 독립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에 넣을 필요가 없다.


(1)유대교의 동요와 유대적 크리스트교의 노력

70년대부터 100년까지의 로마로부터 유프라테스, 폰토스로부터 이집트에 걸친 지역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간의 관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신앙을 지키려고하는 힘이 대단히 약해지고  그리스도교의 주장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고 있다. 일부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러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그때까지 거부하고 있던 자들이 복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란 기대를 하기에 이른다. 유대인들이 확신하고 있던 많은 점이 동요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그때까지 극복하기 힘들었던 장애를 회피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약간 새롭게 이야기하면 좋았던 것이었다.


(2)야고보서

①저자, 성립연대, 장소

야곱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대처방식에 어떠한 것이 있는가의 일례이다. 이 짧은 문서는 양질의 양질의 그리이스 어로 집필되어 있어, 주의 형제 야곱이 그리이스어를 이정도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할근거가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가 이 문서를 써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문서의 성립연대는 기원 80년대경이란 것이 더욱더 현실적인 가설이다. 집필장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이사랴나 티베리아스라고 하는 팔레스타인에 있던 헬레네즘적 도시가 집필장소로 생각되어 질수 있다.


이문서는 유대교문서로서 [주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표현이 두번 (1.1  2.1) 사용된것 외에는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도 있다. 그러나 신앙에 의한 구원인가 행위에 의한 구원인가에 대한 논의가 존재하고 있고(2.14-16) 이 논의에서는 사도 바울의 생각에 대하여 어느정도의 지식이 전제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흡사 스캔들을 일어키는 것을 피하고 있는 듯하다.


 야고보서의 저자가 보기에는 바울의 교회가 종교적 신앙과 도덕적 생활과의 관계가 정확히 설정되어 있지 않은 여러가지 신비종교가 존재하는 헬레네즘 세계의 환경 가운데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활동에 의하여 탄생한, 시나고구로부터 독립한 공동체로서 조직되어 있는 그리스도교 소수집단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왜 이뤄지고 있는가?  대략 유대인들을 복음쪽으로 끌어 넣어려고 할때에  그 방해가 되는  일종의 형제들을(*바울쪽*) 잘라버리기 위해서였다.


②교의

신의 개념은 완전히 유대적인 것이고 성령은 전혀언급하지 않는다. 유대인 독자들에게 대단히 친근한 이러한 틀의 내부에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도덕적인 동시에 영적인 충고를 권유하고 있고,그를 위해 율법에 의거하고 있고(참조 2.8-13) 또 예수의 말씀에 의거하고 있기도 항다(산상수훈에의 시사는 수없이 인정됨).  이 윤리적인 가르침의 더욱더 뚜렷한 특징은 이미 말한바와 같이 부자에 대한 엄격한 태도이며 [가난함]을 우선시키는 태도이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로부터 야고보의 편지는 유대교를 더욱더 완벽하게 완성한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적 멧세지를 나타내려고 하는 하나의 시도이며 그리이스어를 말하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이 시도가 이뤄진 것은 바리새파적인  개혁이  아직 그렇게까지 진전되지 않고, 시나고구에 있어서는 신전에서의 예배도 순례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 자기들의 신앙생활을 해 나갈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던 때라고 생각해도 그렇게 모험적인 생각이 아닐것이다

 

(3)마태복음

①저자, 성립연대, 장소

얌니아 일파가 최종적인 승리를 걷우기 전에 그리이스어권의 시나고구를 그리스도교 쪽으로 끌어넣기 위한, 그리스도교 주류의 싸움의 모양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마태복음서이다. 야고보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이 복음서의 집필장소도 확실히 알수없다.(시리아, 페니키아등 추측)  마태복음서가 목표로하고 있는 독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리이스어권의 디아스포라 전체이다.


집필시기로서는 서기 90년으로부터 95년 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자는 바리새파 개혁자들에 의하여 점차 장악되어 가고 있는 시나고구를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이러한 시나고구의 멤바가운데서 상당한 수로서 특히 새로운 정통파(바리새파)를불유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들을 복음으로 이끌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있다.


②교의

야고보서의 저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도, 그리스도교가 신전이 소멸한 시기에 있어서 유대교의 더욱더 완성한 형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론에 관하여는 야고보서의 저자와는 전혀 달리하고 잇다. 유대인이 부정적인 반응을 일어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론을 거의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의 저자는 그리스도론을 저작 전체에 서 강조하고 잇다. 그의 입장으로부터 본 그리스도론은 진짜 유대교의 핵심이며, 시나고구의 성실한 멤바가 그리스도교에 가입하는 것은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파적인 개혁이 상당히 진전되고 잇고, 그때문에 유대인 신자의 대중에 대한 호소에는 시나고구의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포함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태복음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파들]에 대하여 대단히 엄격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23장은 개혁 담당자인 이 그룹에 대하여 더할수없이 격한 공격의 예를 모아놓고 있다.  복음서 기자가 특히 공격하고 잇는 것은 그들의 대단히 엄격한 가르침과 불명예스럽기짝이 없는 타협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행동의 모습에 놓여있는 위선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격한 논쟁을 넘어선 곳에 그리스도교도와  서기들.바리새파간에 하나의 근본적인 상위점이 존재한다. 바리새파는 여러가지 계명을 통상의 생활에 문자대로 적응시키는 것을 가능케하는 타협적 해석을 하고, 대신에 복음서 기자는 같은 계명에 대하여 근본적인 해석을 강하게 권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의 계명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그러한 절대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해되어야하며 그러한 의미만이 하나님의 존재에 적합한것이다. 마태복음서에 인용되고 있는 십게의 계명에 대하여 복음서 기자가 행하고 있는 해석에 의하면(5.17-48) 사회생활을 조직하기 위하여 이러한 계명이 개인적인 영웅주의에의 호소로되어 있고, 이 개인적인 영웅주의는, 믿는자가 자신의 신앞에 서 있는듯한 때에만 적절한 것인듯하다.


 대다수의 유대인은 바리새파적인 개혁쪽에 서 있었기때문에  그리스도교측으로부터의 반격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 된다. 1세기 말경, 그리스도교는 아직 수만명정도를 모을수 있는 작은 운동이었지만 유대교는 여러가지 재난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백만명을 넘고 있으며 로마제국의 영역내만이 아니고 동방국경을 넘은 지역에도 퍼져있었다.

 

11.   바울의 후계자들의 각성

①바울의 후계자들의 수난 과 각성

바울이 죽고, 네로 대박해에 의해 그리스도교도가 유대인과는 다르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70년에 신전파괴로 유대교가 큰 타격을 입어 어쩔줄을 몰라하던 유대인들을, 시나고구에 가까운 입장에 있던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들을 그리스도교쪽에 끌어넣기 위한 시도를 하자 바울의 후계자들은 더욱더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바울의 후계자들은 우대교 동료를 위험에 빠뜨릴 위험성이 있는 자들로서  다수 유대인들의 찬동을 얻을 가능성을 위하여 부인되어져야 했다(참조 야곱 2.1-3.18)


70년에서 80년은 바울의 후계자 교회들은 더없이 어려운 상태였다. 형제들의 거의가 시나고구에 돌아가는 흐름이 생기고, 이것은 대단히 강했으므로 여기에 저항할수 없었다. 그러나 80년대 초가 되면 바울적인 제교회의 음성이 다시 들리게 된다. 처음에는조심스러웠으나 점차 대담해졌다.


②누가복음

누가문서(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집필은 80년부터 85년경이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거기서는 아직 조심스러운 태도가 지배적이다. 확실히 누가복음서는 대단히 야심적인 저작으로서 마가가 이미 집필한 복음서에 긴 도입부가 붙혀있고, 로마에 바울의 도착까지 긴 속편이 부가되어 있다. 이때까지 그리스도교가 만들어 낸 것을 훨씬 넘어서는 듯한 이정도로 눈에 뜨이는 저작을 만들어 낸 의지와 능력이 이 작은 교회 그룹에 존재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누가 문서에서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방인의 전도로 성취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의 최종적인 모양이라고 하는 주장이 이야기의 결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이 긴밀한 이야기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운동의 근원이 유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로도 되어있다. 2개의 전승-세레요한의 탄생에 관한 전승과 예수의 탄생에 관한 전승-이 교묘하게 연결되어 잇고, 이것에 의하여 예루살렘 신전에서 , 그리고 유대인의  더욱더 열심인 경건주의적 그룹의 틀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또 복음서이 4장에서 시작되는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이방인이 활동의 대상이 되는 것이 넌지시 암시되어 있지만(4.24-27)  마가 복음서에 있어서 이방인의 토지가 무대로 되어있는 장면은 거의 모두가 누가복음서에는 삭제되고 있다. 확실히 예수의 기적중 몇개는 이방인을 위해 실현되엇고(누가 7.1-10  8.26-37  17.11-19),  예수의 비유 가운데 하나는 사마리아인이 모범적인 인물로 보여지고 있다(10.29-37).  그러나 갈리리로부터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장면을 빼면 (9.51-56  17.11) 누가의 예수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의 영역을 결코 떠난적이 없다. 이러한 서술방식을 보아, 예수가 유대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적대자로부터의 의심이 표명되고 있고, 그때문에 예수가 유대적이라는 것을 재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는것 같다. 마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율법의 모양을 문제시하고 있는 부분이 2군데 존재하지만(마가 7.17-23   10.2-9) 누가복음서에는 이 두개소도 같은 이유로  소멸된다.


③사도행전

사도행전의 중심테마로 되어 있는 것은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 옮겨가는 이야기이며 그 주인공은 사도 바울이다. 이점이 대단히 눈에 띄는 것으로 누가문서와 같은 저작이 생겨난 환경으로서 생각할수 있는 것은 바울에 의하여 창립된 제교회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누가복음서에 보여지는같은 호교론이 사도행전에도 존재하고 잇다. 예루살렘의 원시교회도 완전히 유대적이며 오순절조차도 선교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유대인만이다(참조 사도 2.5).


④[목회서한]딤전후, 디도서

 85년부터 90년 경 바울적 제교회는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하여 공동체 조직의 정비를 돕기위해 충고나 모범을  보여줄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바리새파적 개혁이 진전함에 따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시나고구로부터 쫒겨나게 될 시기였다. 이것이 소위 [목회서한](딤전후, 디도서)의 기원으로 이러한 편지의 저자는 바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다른 바울편지에 비해서 스타일도, 사상도 상당히 달라서 사도 바울의 제자들의 저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유대적 경향의 교의는 물리치지 않으면 안된다(율법에 관한 교의-디도 3.9) (유대적 전설이나 우화를 통해 전해진 교의-딤전 1.4  디도 1.14) (어떤 종류의 식물에 있어서 금지에 관한 교의-딤전 4.3)


잘못된 교의를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예, 부활은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 주장(딤후 2.18)과 그러한 주장을 단호히 물리치지 않으면 안된다(딤전 1.7 , 10) 결국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 중요한 것은 부활의 그리스도에의 경건을 유지하는 것으로서 질서와 도덕의 실천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바울의 사신과 양립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바울의 사신에 비교하면 대단히 색이 바래는 것이다.


⑤ 에베소서

85년부터 90년 경에 집필된  에베소서는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바울의 사고방식을 연장하여 훨씬 근본적인 교회론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에베소서에서는 서두로부터 바울의 저작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의 골로새서 이외의 다른 편지와는 크게 다르다.  다른 한편, 골로새서와는 수많은 병행부분이 존재하고, 이때문에 두개의 텍스트 사이에는 문학적 관계의 문제가 생기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레벨에 있어서 몇가지 상위한 점이 존재하고 있고, 이 두 텍스트가 동일한 저자에 의하여 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바울의 후게자들은 시나고구의 틀 바깥에 조직을 갗추지 않으면 안될 각지의 교회의 조직에 대해 모델을 제공하는 것 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교회 존재 그 자체와 그리스도교도의 도덕을 기초짓는 원칙을 표명하고 있고,비바울적인 공동체의 형제들도 또 거기에 자신들의 독립한 방식의 기초를 발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바울의 진정한 텍스트를, 그것을 모르는 자들의 손에 들어갈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95년경 까지는 이러한 것은 그들에게는 도저히 할수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부를 지고 있는 바울은 이탈자이며 이단자로서 제교회의 대부분에게는 스캔들의 대상이었고, 더구나 바울의 저작중에는 너무 과격하여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갈라디야서).  그렇지만 시나고구에서의 개혁이 추진되고,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갈라져 고랑이 깊어짐에 따라 이제는 주저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목회서간과 에베소서를 세상에 나오게 함으로서 바울이라고 하는 인물은 이미 말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 자신에게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을 사양할 이유가 이미 없게 된 것이다.


95년경에 나타난 바울의 서간집은 13종류가 되었는데 그중 4개는 (목회서간과 에베소서) 바울의 사후로부터 1세대가 경과한  후에 사도 바울의 제자들이 쓴 것이 확실하다.

바울 서간집은 교회원만이 아니고 로마제국의 지식인 간에도 베껴져 읽혔다고 생각된다. 사실 로마제국의 지식인사이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호기심이 어느정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서간집의 주요독자는 역시그리스도교도들이었다.


바울을 진중히 받아들인 것은 마르키온(85-160) 뿐이었으며 목회서간집을 뺀 후의 바울 서간집이  구약성서 대신으로 만든 마르키온 독자의 성스러운 책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바울에게 본래의 위치를 주기위해 행동을 감행한 사람이 이 분열자이며, 더구나 이단자였던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교회의 주류는 이방인 사도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2세기의 초에 누가 복음서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도행전이 대단히 오랜기간에 걸쳐 권위없는 문서의 범주로 쫒아보낸 사실로도 알수있다. 사도행전이 1세기 가까이 물리쳐졌던 것은 이 문서 가운데서 바울이 특권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원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바울의 후계자들은 최초는 자기들의 스승이 사라졌기때문에 기원 80년까지는 침묵을 지켰지만 20년도 지나지 않은 가운데 자신을 찾고, 시나고구에 가까운 입장에 있는 형제들에게, 자신들의 제교회의  작은 그룹의 사이에 보존되고 있는 전통의 재산을 전하려고 하는 용기를 회복한것이다.그들은 이 활동을 차차 대담하게 행하고 거기서 뚜렷한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12. 어른으로 성숙한 그리스도교를 향해..
서기 100년이 되면 시나고구 와 그리스도교 제교회를 연결하던 끈이 거의 끊어지게 된다.


112년에는 비치니아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박해가 일어난다.-이때는 유대교와의 혼동은 이미 없어진다.(소플리니우스[서간]) 이때가 되면 그리스도교인들도 자신들이 유대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

 

(1)1세기 말 및 2세기 초의 그리스도교의 역사


1)제1그룹-

①다다케(가르침)-다양하고 그 중요도도 한가지가 아니다. 그것들은 교회생활에 관한것이고 도덕적인 권고도 포함하고 있다.

②요한2서, 요한 3서( 장로에 의해 씌어짐)

③)로마의 클레멘스에 의해 고린도인들에게 쓴 편지는 95년 전후에 씌어진것으로 생각되어진다.


2)제2그룹

히브리서-그리스도론의 논문,대단히 강력한 그리스도론적 사색이 전개되고 있다.


3)제3그룹

요한문서-요한복음, 요한1서, 요한계시록

요한문서(제2,3요한은 제외)-독창적이고 힘있는 신학사상이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신학사상은 하나의 흐름의 표현이며 또 유대교로부터 해방되어 개화한 하나의 신학의 모습이다. 이 3문서는 지리적, 연대적으로 접근해 있고 스타일,및 어휘에 어느정도 유사성이 있으나 혼동해서는 안되고 독립하여 검토해야한다.


서기 100년 전후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시나고구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그치고, 또 자기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를 포기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넓은 세계가운데 내보내진 것을 깨닫고 있다.

 

(2)유대봉기-

①1차 유대봉기

115년-117년에 걸쳐 유대인들은 로마지배에 대해 봉기했으나 그리스도교인들은 가담하지 않았므로 로마당국은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을 확실하게 구별하게 된다.


②2차 유대봉기-

132년 -135년 발콕트의 지도하에 팔레스타인에서 로마와 유대의 최후의 대결을 벌렸으나 하드리아누스는 엄하게 탄압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고 아에리아.카피토리나라고 이름이 바뀌고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되엇다. 이때도 그리스도인들은 참가하지 않았고 이후 로마제국에 대하여 일층 충실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의 유대교가 파괴되고 바빌로니아의 유대교가 이것에 대신하게 되자 팔레스티나의 그리스도교도 영향을 받게되었다.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교는 완벽하게 혼란에 빠져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이리하여 로마제국내부에 있어서 유대교와 관계를 가지고 있던 최후의 그리스도교도들의 그룹의 하나가 소멸해버리고 만다.(유대적 크리스토교)


(3)크리스토교의 헬레네즘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간의 고랑은 깊어지게 됨에 따라 특히 로마제국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이스. 로마문명에 녹아들 필요가 한층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시리아의 텍스트인 도마복음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기원의 2 텍스트 베드로후서, 위바나바서)(로마의 2텍스트인 헤르메스의 목자, 제2의 클레멘스서)


①도마복음서

예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한 말씀은 독립한 전승에 의하여 전해진 것으로서 서기 1세기의 상당히 오래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 전승은 아람어로부터 그리이스어로 옮아가고,  구전전승의 상태로부터 기록으로 옮아가는 것으로, 예수의 멧세지의 재구성을 위하여 대단히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정전 복음서와 같은 텍스트 형성을 더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2세기 전반의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아무 정보도 얻을수 없다.


단지 도마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에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통치의 정의가 비종말론적이라는 것을 지적할수 있다(예를들면 말씀 3 , 109,113).  이것은 종말론을 거부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그리이스적인 사고태도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또 단식, 기도, 자선이라고 하는 유대교적 경건의  실천형태는 완전히 거부되고 있고(예를들면 말씀6,14), 할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말씀53). 안식일 준수는 구약성서의 규칙에 대하여 대단히 자유로운 해석에  따르도록 하고있다(말씀 27). 이리하여 유대교적 실천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 소멸하게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로마교회에 동화하는 경향을 시사하는 것이다.


②베드로후서--

 집필시기는 서기 130년경. 알렉산드리아 기원. 이 문서가 신약성서 정전으로 인정된 것은 상당히 오랜 후의 일이다. 이것은 1.1이 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를 저자로 하는 입장이 문제가 없다고 간주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베드로후서는 어휘 및 스타일에 있어서 신약성서 전체중에서 더욱 우아한 문서이다. 저자는 헬레네즘 문화의 지식인이며 교양있는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는 유대교 성서의 제문서 및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의 문서를 대량 인용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전통적인  개념을 정력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변호를 이렇게 하지않으면 안되는 것은 이 작은 문서의 독자로 상정되어 있는 자들이 이 교의를 방기하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은 대체로 그들의 헬레네즘화가 대단히 진전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장 및 3장에서 저자가 격하게 공격하고 있는 이단자들도 또  헬레네즘화 되고 있는 자들이다.  유대인의 성서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지만 유대인 그 자체의 문제는 전혀 문제삼지 않고 있다.이 문제는 이미 시대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③僞바나바의 편지--

집필시기는 130-140년 전후. 집필장소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기원.(학자들 중에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기원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알레고릭한 해석이 가능케하는것은 그리스도교가 그리이스 문화의 범주의 가운데 들어가 있기때문이다

 

④헤르메스의 [목자]-

⑤로마의 클레멘스의 제2의 편지-격려문

⑥아테네의 쿼도라두스

⑦아리스디데스의 [아포로기아]


Etienne Trocme-크리스토교의 요람기외 글 몇개
발췌편집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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