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시대、大和 葛城지방(현재의 奈良県 御所市・葛城市)에 있었던 유력한 고대 지방 호족.
고대 일본 씨족에 대해 가장 관심이 가는 씨족이 葛城氏이다.
신무천황이 大和지방을 정복할때의 사정에 대해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高尾張邑에는 土蜘蛛(토착호족)이 있었는데、키가 작고、손발이 길었다. 侏儒(난장이) 같았다.
皇軍은 葛網(칡으로 만든 망)을 덮어 씌워서 죽였다. 그래서 이 邑을 葛城이라고 했다.
그러나 葛城을 가쓰라키라고 하는데 내게는 이것이 加羅城, 가야성으로 보였다.
그 조상들을 추적해보니 역시 高魂命 (高皇産霊尊)에 연결되어 있다.
高皇産霊尊은 일본신화에 나오는 神이지만
나는 이 사람이 가야의 왕이고 葛城의 주인은 가야왕자들의 후손일거라 추측된다.
1.剣根命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鴨県主系図」의 「諸系譜」에는
고대 賀茂氏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系図가 있다.
여기에는 玉依毘古로부터 시작하여 그 아들 「五十手美命」과 「剣根命」이 기록되어 있다.
剣根命의 계보:『古代豪族系図集覧』
高魂命−伊久魂命−天押立命−陶津耳命−玉依彦命−ㅣ--生玉兄日子命 - 賀茂氏( 賀茂県主와 鴨県主)
ㅣ--剣根命 - 夜麻都俾命−久多美命(葛城直祖)
이 剣根命에 대해서 日本書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日本書紀】神武天皇 2年
珍彦を以て倭国造とす。
又、弟猾に猛田邑を給ふ。因りて猛田県主とす。是菟田主水部が遠祖なり。
弟磯城、名は黒速を、磯城県主とす。
復、剣根といふ者を以て、葛城国造とす。
神武東征의 논공행상에 의하여
珍彦을 倭国造로 삼고
高尾張을 葛城이라고 하여、剣根을 葛城国造로 삼았다.
剣根命이 초대 葛城国造에 임명되었고, 葛城氏의 始祖로 되었다.
神武천황이 大和지방을 정복한 후 国造로 임명한 것은 「倭国造」에 임명된 「珍彦(槁根津日子)」과 葛城国造「剣根命」 둘뿐이다.
지금의 奈良분지에 「葛城国」과「倭国」이라고 하는 두나라가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倭国造에 임명된 珍彦(별명:椎根津彦-日本書紀, 槁根津日子-古事記, 倭宿禰, 槁根津日子)는
神武天皇이 東征할 때, 速吸門(豊後水道,一説에는 明石海峡)에서 小舟로 마중나가 船路의 안내를 하고,
후에 倭(야마토)의 兄磯城(에시키)를 쳐부순 功이 있어서, 倭国造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剣根命에 대해서는 뚜렷한 공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旧事紀에서는 剣根命을「葛木土神」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葛木土神은 国造에 임명되기전부터 葛城의 首長(土神)이었는데,
(「土神」이라는 것은 葛木에 살던 国栖民(토착민)、土蜘蛛の民(쓰치구모족-땅거미족)의 頭領을 말함)
神武軍이 大和로 왔을때 조부였던 少彦名命(陶津耳命)이 神武의「八咫烏(야다가라스)」가 되어 進軍을 도왔던「功」에 의해、
剣根이 「葛城国造」의 지위를 얻었다.(이 氏族에게 붙이고 있는『葛城』이란 명칭은、그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는 것을 말한다)
【先代旧事本紀】(平安前期경 成立)天孫本紀에,
天忍男命은、葛木土神、劔根命의 딸 賀奈良知姫(가나라지히메)를 妻로 맞아 二男一女를 낳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것은 剣根命(葛木彦命)이, 딸 世襲足姫命(賀奈良知姫-가나라지히메= 加豆良支根命-가시라기네)를 尾張連의 祖인 天忍男命(瀛津世襲命)에게, 손녀・ 瀛津世襲命(葛城避比売命-가츠라기 히메)를 그 아들 建額赤命에게 시집보내어,
神武에게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있던 尾張 (高倉下-天香語山命을 선조)과 閨閥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후 야마토 정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池心朝 (孝昭天皇)때는 大連이 되기에 이르렀다.
賀茂氏와 葛城氏는 형제간이였고 (劍根命과 형제였던「生玉兄日子命」의 자손들인 賀茂氏는 、山城으로 진출하여 賀茂県主와 鴨県主가 되었다) 당시 賀茂氏와 葛城氏 그리고 尾張氏의 祖先들이、이 葛城의 땅(현재의 奈良県 御所市・葛城市)에 동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https://ameblo.jp/chiangmai1971/entry-12355656362.html
剣根命(葛木彦命)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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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魂命 (高皇産霊尊-일본서기, 高御産巣日神-고사기) ※高皇産霊尊 의 別名: 高御産巣日神: 高御牟須比命:
l 高木神: 高魂尊: 高御魂命: 天高御魂乃尊: 別高皇産霊尊:
l
伊久魂命
(아마테라스, 天神玉, 生魂命、生産霊神、天活玉命)
l
l
天押立命
(神櫛玉命, 天櫛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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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l
陶津耳命 都留支日子命(出雲国에鎮座) 海部氏의 系図
(鴨建角身, 三嶋湟咋、大陶祇 ---------------
陶津耳, 天八咫烏) 彦火明命 + 豊玉姫
l ( 天照国照彦火明,櫛玉饒速日尊 ) ㅣ
l -------------------------------------------ㅣ ㅣ
玉依彦命 玉依姫命(活玉依比売, 鴨玉依姫, 奇美加比咩、 天香語山命
(玉依毘古,玉依日子, 事代主神 (大物主神의妻) ㅣ
鴨建玉依彦命) ㅣ 伊加里姫 + 天村雲命 + 阿俾良依姫
ㅣ ㅣ (丹波- 葛城) (日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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剣根命 生玉兄日子命 太田田根子 ㅣ
(土神剣根,荒田直祖 (五十手美命, 鴨県主、 ( 剣根命 과는 이종사촌) ㅣ-------------------------------------ㅣ
初代葛城国造) 賀茂県主祖, 鴨氏의 祖) l---------------l l-----------l------------ㅣ
l 葛木出石姫 + 倭宿禰命 天忍人命 天忍男命 忍日女命
l -------------------l (椎根津彦) (尾張氏의 祖) ㅣ
ㅣ ㅣ 倭의国造,倭氏의祖 ㅣ
夜麻都俾命 賀奈良知姫(加奈知比咩命) ㅣ
ㅣ 尾張連祖의 天忍男命의妻) ㅣ------------ㅣ-----------ㅣ
ㅣ ㅣ ㅣ ㅣ
ㅣ 瀛津世襲命 建額赤命 世襲足媛
l (葛木彦命) [日置日女命]
l ---------------------------l (尾張連의祖) 孝昭天皇황후
(葛城의尾治置姫를 妻) 孝安天皇을 낳음
久多美命 葛城避姫(葛城避比売命)
(葛城直祖) 尾張国造祖の天戸目命의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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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豆良支根命 葛城尾治置媛命(建額耳命의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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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見宿禰
(大諸見足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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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牟久足尼 葛城の鸇姫(鸇比売命) 諸見己媛命
( 伊牟久宿) (開化天皇의后) (建諸隅命의妻)「依羅阿比古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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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戸彦宿禰 長島
(宮戸彦足尼) (役直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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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田彦足尼 止波足尼(成務天皇朝、初代比多国造)
[葛城国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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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具足尼 葛比売 카쓰라히메 伊止支古(保止支古)
(孝元天皇의子孫인 武内宿禰의妻) (荒田直의祖)
l l
l l
「葛城襲津彦」(葛城襲津彦比古)
楯乃直 l
l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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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田宿禰 磐之媛 葦田宿禰 腰裾宿禰 戸田宿禰 熊道足禰 l
布爾奈 (仁徳天皇后) l l l l l
l l l l l l l
l l 蟻臣---黒媛 〔下神氏〕 〔的氏〕 〔忍海原氏〕 ◇
円大臣 --毛媛 l(履中天皇妃) 〔朝野氏〕 l
伊多伎 l (吉備田狭妻) l l
l l 荑媛 l
l 韓媛 (市辺押磐皇子妃) l
(雄略天皇妃) ◇
宇倍 l
l
菟上足尼
l
l
〔穂国造〕
주로 여자이름 앞에 출신지방을 나타내는 명칭이 붙는다.
賀奈良知姫-가나라지히메= 加豆良支根命-가시라기네, 葛城避比売命-가쓰라기 히메등...
안동댁, 목포댁등, 宅號같은 그런 의미일까?
※ 고대의 母系制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더라도 住居、職業、財産등은 고대의 母祖로부터 받은대로 바뀌지 않고 대대로 승계되었다.
따라서 母祖의 氏名은、주거지、財産、職業등을 근거로 하여 오랫동안 계승되고, 실제의 혈통도 母系를 이어나갔다.
결국、葛城氏라고 하는 母家에 尾張氏로부터 신랑이 와서 그 자식들을 낳으면, 그 자식들은 母家에서 양육되고, 葛城氏를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게 된다.
통상、신랑은 母家와는 다른 장소에 거주한다. 예를들면、欠史 8代의 天皇家의 宮은、그 母家의 소재지에 있었다고 생각된다(즉 葛城에)
天忍男의 아들인 奥津余曾는 母家(葛城氏)에 있었고、
母家의 職을 물려받아 그 땅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은 그의 이름인「葛木彦」으로 분명해진다.
葛城国造 劔根命의 딸에 의하여、葛城氏가 되었고、
그후 尾張의 大印岐(大稲置)의 딸 眞敷刀婢에 의하여 尾張氏가 되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国造本紀에 따르면 乎止与의 代에 尾張国造를 하사받는다)
그러므로 、尾張氏의 이름은 妻家에 의하여 얻어진 것으로、尾張国造는 尾張大稲置의 昇格으로밖에 생각할수 없다.
대체로,国造는 大県主、大稲置등의 昇格이었던 것이 많았다.
또 父祖의 이름은 기록에만 머무르고 씨족으로서의 실제의 생활은 母氏를 받아서 행해진 경우가 많았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父氏의 주거가 명확하지 않은데、 母氏의 주거는 언제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
이러한 것은 모두 古記録이나 古系譜를 통하여 인정되어진 특징이다.
2. 葛木出石姫와 伊加里姫
神武記에는 彦火明命(饒速日命)의 손자인 天村雲命이 伊加里姫(井氷鹿)와 결혼하여 葛木出石姫를 낳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葛木出石姫의 이름에는 日本海로부터 葛城까지의 흐름을 나타내는 지명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葛木出石姫의 出石은 但馬의 出石일 것이다. (저 出石神社에는 天日矛命이 들여왔다는 8종의 神宝가 봉안되어 있다.
神主家는 大和로부터 神宝의 検収를 갔던 長尾市의 子孫이 현재까지도 맡고있다)
出石으로부터 葛城으로 왔던 長尾市의 자손이 葛城의 長尾氏가 되었고、이 집안의 딸이 葛木出石姫었던 것이다.
여기서 葛城의 세력과 丹後、但馬의 세력이 연대했던 모습이 보인다.
系譜중에 倭宿禰命도 보이는데 長尾市 倭直의 祖인 椎根津彦이다. 伊加里姫의 아들이자 葛木出石姫의 남동생이 倭宿禰命이다.
『日本書紀』에 나오는 倭国造의 珍彦、葛城国造의 剣根가 가지런히 놓여졌다.
「彦火明命(饒速日命) 의 후손 -- 長尾氏」
3. 葛城之高額比売命(葛城高顙媛)과 神功皇后
稲羽와 丹後와의 사이에 但馬가 있다. 但馬(다지마)의 지명은 葛城의 當麻(다기마)郷으로서 大和분지에 나타난다.
但馬에 거점을 둔 天之日矛의 후손인 清日子와 多遲麻毛理가 大和로 나오게 되었다.
『日本書紀』垂仁天皇 88년에 天日槍이 가지고 왔던 宝物을 보고싶다고 하자, 天日槍의 曽孫인 清彦이 직접 갖다바쳤다라고하는 기록이 있다.
『紀』에서는 清彦의 아들인 田道間守가 非時의 香美를 찾아 여행에 나선다. 清彦이후 日槍의 후예는 大和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古事記』에서는、清日子는 當摩之咩斐(다기마노 메희)를 처로 맞아서、菅竃由良度美를 낳았다.
當摩之咩斐(다기마노 메희)는 當麻출신일것이다. 딸 菅竃由良度美는 葛城의 高額比賣命의 母親이다.
즉 息長帶比賣命(神功皇后)의 祖母가 되는 것이다.
(神功皇后의 부친은 息長氏 (開化의5대孫)이고, 모친은 葛城高額比賣命로서 天之日矛의 후손이다)
葛城의 高額比賣命의 高額、바로 日槍의 후손들의 거주지와 상응하는 곳인 香芝市의 畑(밭)에 比定되고 있다.
當麻郷은 도로의 요철도 심하고 河内와의 경계지로서 각지방으로부터의 사람들과 異文化를 받아들여 왔다.
石部와 日矛가 크로스되는 그곳에 倭文과 銅鐸이 풍성하게 되었다.
清日子는、멀리 当摩의 咩比에게 장가들어서、1남 酢鹿之諸男、 1녀 菅竈由良度美를 낳았다.
但馬氏의 清日子가 葛城氏에게 와서 낳은 자식이 葛城氏를 받아들여 葛城氏를 자처하고、
또 葛城땅에서 사는 것은, 母家본위의 당시의 제도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서
清日子의 딸뿐만 아니라, 清日子의 兄 比多訶가 동생 딸 菅竈由良度美와 결혼하여 낳은 딸(즉 손녀)이 葛城之高額姫로 이름지은 것도
자연스런 것이다.
葛城之高額姫는、이름에 모친의 씨족을 받아들여、어머니가 사는 땅인 葛城을 이어받는 것을 엿볼수 있다
(高群逸枝 母系制의 研究 (上) 講談社文庫42、43頁)
(葛城之高額姫의 모친은 菅竈由良度美이고 부친이자 큰할아버지인 比多訶로서 모친의 씨족은 天之日矛의 후손이 아닌가?
모친의 씨족을 받아들여 葛城氏를 자처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속지주의? )
神功皇后는 葛城氏의 姓氏를 이어가는 葛城高額姫와、息長宿禰王(開化의5대孫)과의 사이에 태어났다.
高額比賣命와 葛城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父係姓도 아니고 母係姓도 아닌 葛城氏를 따른 것은 어떤 이유때문일까?
자신은 天之日矛라는 유력한 씨족의 후손인데도 단지 그 지방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父係도 母係도 아닌 葛城氏의 성씨를 따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할수 있는 일인가? 혈연을 중시하는 고대 씨족사회에서....
応神天皇부터는 그때까지의 천황가와는 다른 흐름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부근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天日槍의 후손+息長氏의 후손, 息長氏는 開化의5대孫)
(그리고 神功皇后는 신라왕자 天日槍의 후손인데 왜 신라를 공격하였을까? 조상들의 나라이고..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추측컨대 天日槍은 신라왕자가 아니라 신라에게 적의를 가진 나라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신라가 주변국을 정복하여 확장해 나갈때 그 주변에 있던 소국으로서 신라에게 합병된 어떤 왕자..
일본서기를 쓸 당시에는 이미 그 나라는 신라에 병합되어 존재하지도 않고,
이름도 남아 있지 않은, 예를들면 185년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에게 정복된,
경북 의성에서 부족국가로 발전해 가던 초기의 조문국(召文國) 같은 나라등... 그냥 상상이지만.....
神功皇后는 신라에 금이 많으므로 신라를 치자고 했는데, 조문국에는 금광이 있었다)
4, 葛城襲津彦
葛城氏에는、크게 葛城直와 葛城臣의 2系로 나눌수 있다.
葛城直系는 神武동정 이후부터 剣根命의 후손들이 葛城땅에서 葛城氏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던 剣根命(초대 葛城国造) 을 이어가는 계보이고
葛城臣系는 武内宿祢(孝元天皇의 曾孫)의 아들인 葛城襲津彦을 祖로 하는 氏族이다.
『紀氏家牒』에서는「武内宿祢가 葛城国造 荒田彦의 딸 葛比売를 취하여 襲津彦宿祢를 낳았다」고 한다(武内宿祢의 자식들은 합쳐서 7男2女)
武内宿禰(誕生 302年)가 25세 일때 장남으로 태어났다(대략 326년 경)
葛城襲津彦의 妻에 대해서는 史料가 없지만、母 ・葛比売의 형제의 자식이었을 것이다.
母 ・葛比売의 자식을 취함으로서、祖父 葛城国造 荒田彦의 領地、葛城지역의 北半分(葛下郡 ・忍海郡)의 대부분을 물려뱓아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紀氏家牒』에 의하면、襲津彦은「大倭国 葛城県 長柄里(現在 御所市名柄)」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와있어서、
이 땅과 그 주변이 그의 본거지였을 거라고 생각된다.
襲津彦 이후의 후손으로서는、葦田宿禰 ・玉田宿禰 ・円大臣 ・蟻臣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고, 玉手臣 ・的臣등의 祖가 되며
그 系譜는 단편적으로 복원가능하다(系図参照)
(1) 襲津彦의 伝承
351年 (神功皇后, 攝政) 5년 봄 3월 癸卯 초하루 己酉
神功皇后가 新羅침공때 、新羅 国王이 인질로 보냈던 微叱許智伐旱(未斯欣 또는 美海, 未叱喜)을 데려오려고 생각하여
신라왕이 汗禮斯伐 ․ 毛麻利叱智 ․ 富羅母智등 3명의 사신을 倭로 보낸다. 그들중 毛麻利叱智는 삼국사기의 毛末(박제상)으로서
전에 볼모로 와 있던 微叱許智伐旱(微叱許智旱岐, 未斯欣 또는 美海, 未叱喜)를 신라로 돌아가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毛麻利叱智(박제상)가 許智伐旱을 꾀어
“사신 汚禮斯伐과 毛麻利叱智 등이 나에게 ‘우리 왕이 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에 연루시켜 처자를 모두 종으로 삼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잠시 본토에 돌아가서 그 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 속이게 하였다.
황태후가 곧 들어 주었다. 葛城襲津彦은 父 ・武内宿禰의 후광으로 26歳가 되던 351年에、사신들과 동행하여 신라에 파견되었다.
3명의 사신과 함께 毛末(박제상)이, 對馬에 도착하여 鉏海의 水門註에 머물렀다.
이 때 신라의 사신 毛麻利叱智(박제상) 등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微叱旱岐(未斯欣)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풀을 묶어 사람 모습을 만들어 微叱許智(未斯欣)의 자리에 두고 거짓으로 병든 사람인 체하고 襲津彦에게
“微叱許智(未斯欣)가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襲津彦이 사람을 시켜 병자를 살펴보게 했는데, 속은 것을 알고 신라 사신 세 사람을 붙잡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신라로 나아가 蹈鞴津( 오늘날의 부산 다대포로 추정됨)에 이르러 草羅城(오늘날의 梁山지방인듯하다)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이 때 사로잡혀 倭로 끌려온 인질들이 오늘날의 桑原과 佐糜·高宮·忍海 葛城4邑의 漢人 등의 시조이다( 韓人의 시조라해야지 않는가?)
(實聖王代의 倭兵 침입기사는 同王 4년 4월, 6년 3월에 보이며 7년 2월에도 倭의 침공에 대비한 기사, 14년 8월에 왜인과 風島에서 싸워 이긴 기사 등이 보인다)
367 年[応神 14 年]襲津彦 42 歳 때에、新羅가 방해를 하여 加羅国에 머물고 있던 百済의 弓月君의 120県의 人夫(秦氏에 가까운 渡来民)를 소환하기 위해 加羅에 파견되었지만,3年이 지나도 귀국하지 않았다. 369年[応神16年]에 平群木菟宿禰(武内宿禰의 자식중 一人으로서、襲津彦과는 이복형제)와 的戸田宿禰(襲津彦의 子)의 군대가 新羅와 대치하게되자 신라왕이 、襲津彦이 귀국하게 되었다.
375 年경、襲津彦 51 세 경에 武内宿禰가 죽자、襲津彦은 장남으로서 武内宿禰의 墓(室宮山古墳)를 造営하고、武内宿禰의 본거지인 葛城지역의 南半分(葛上郡)의 땅도 인계받았다. 葛城襲津彦이 지배하는 영역이 葛城지역 전체로 넓어졌다.
382 년에 襲津彦의 딸 ・磐之媛이 [仁徳2年]에 仁徳天皇의 황후가 되었다. 이 382 年(壬午)에 襲津彦은 57 歳로、朝貢하지 않았던 新羅를 토벌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본문은 짧지만, 이때의 이야기가 적힌 分注에 『百済記』를 인용한 것이 나온다
「壬午年에 新羅가 貴国(倭国)에 조공하지 않았기때문에、貴国은 沙至比跪(사치히코)를 보내어 치게하였다.
沙至比跪는 新羅가 보내준 美女에 미혹되어 미녀를 취하고、반대로 加羅를 쳤다.
加羅王은 百済로 도망가 倭国으로 가서、그 사실을 호소했다. 天皇은 대노하여、木羅斤資를 加羅로 보내어、나라를 회복시켰다고 한다.
一説에는、沙至比跪가 天皇의 노여움을 겁내어, 조용히 귀국하여 숨어 있으면서 황궁에 있는 여동생에게、
天皇의 분노가 가라앉은지를 살피게 했다.
妹는『오늘 꿈에 沙至比跪를 보았습니다』라고 天皇에게 말하자, 天皇은「沙至比跪는 왜 돌아왔는가?」라고하며 성을 내었다.
妹가 天皇의 말을 전하자 沙至比跪는 용서받지 못함을 알고、石穴에 들어가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百済記』의「沙至比跪」와 襲津彦을 동일인이라고 하는 설-『書紀』紀年을 수정하여 干支2運을 내려서、壬午年을 382年으로 해석하여,
襲津彦은 4世紀 末에 실재했던 인물로서 朝鮮으로부터 俘虜를 데려왔던 武将(통설)
「皇宮에 있던 妹」는 磐之媛일 것이다.
「石穴」이라는 것은 古墳의 横穴式石室로서、襲津彦이 石穴에 들어가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고나서 横穴式石室에 매장된 것으로 생각함.
그러나 이후에도 襲津彦은 仁徳朝에 加羅에 파견되어 対百済 외교에서 활약하고 있기때문에,
朝廷을 배반하여 新羅에게 동조하여, 天皇后인 누이에게 부탁하여 귀국했으나 갈곳이 없어 자살해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沙至比跪와 襲津彦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도 있다.
新羅史料에 나오는 葛那古로서 新羅의 대장군 于老를 살해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仁徳紀 41年」 無礼가 있었던 百済王族을 연행해 간다.
일본서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葛城襲津彦 이전의 葛城氏나 賀茂氏의 존재를 애매하게 해놓고,
武内宿禰도 황족출신이기는 하나 수백년의 수명을 가진 불가사의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記紀에서는 편찬 당시의 정권의 사정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개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천황과 葛城氏의 양대세력
葛城襲津彦은、朝鮮반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올때 데려온 渡来人집단으로부터 鍛冶생산을 하기 시작하여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천황가와 맞먹는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襲津彦은、神功皇后 ・応神天皇 ・仁徳天皇 3代에 종사하면서、후일 蘇我氏도 부러워했다고하는 권세를 朝廷내에서 휘두른다.
葛城氏의 특징으로서、5세기의 천황가와의 계속적인 혼인관계를 들수 있다
記紀에 의하면、襲津彦의 딸인 磐之媛은 仁徳天皇의 皇后로 되어、履中 ・反正 ・允恭의 3天皇을 낳고、
葦田宿禰의 딸 黒媛은 履中天皇의 妃가 되어、市辺押磐皇子등을 낳았다.
蟻臣의 딸 荑媛은 押磐皇子의 妃가 되어、顕宗天皇 ・仁賢天皇를 낳았다.
円大臣의 딸 韓媛은 雄略天皇의 妃로서、清寧天皇을 낳았다.
仁徳으로부터 仁賢에 이르기까지 9天皇중에서、安康天皇을 뺀 8天皇이 葛城氏의 딸을 后妃나 母로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당시의 왕권의 기반이 미숙한 단계에 있고 천황의 지위가 각지역의 수장으로부터 구성되는 연합정권의 맹주에 지나지 않은 정도였다.
5,6세기의、高市郡(明日香村 ・高取町)으로부터 御所市에 걸쳐서는 渡来人들의 거주지였다. 葛城氏도 渡来人으로서、
襲津彦은、葛城으로부터 고향땅으로 공격해 들어갔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군사적 통솔력 때문에 仁徳朝에서 중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平民의 딸이 正妃로 된 것은 、崇神天皇 이후에서는 이 葛城氏가 처음이었다. 당시의 朝廷에 있어서 大将軍과도 같은 지위에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葛城氏는 仁徳朝이래 수대에 걸쳐、皇后家가 되어서「大臣」이 되었다. 외척이 되었던 葛城氏의 권세가 、이윽고、天皇家와 대등한 씨족이 되었던 것을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권세때문에 그것을 부러워한 다른 호족들에 의하여 멸망당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고도 말할수 있다. 이러한 館跡은、円이 아니고, 襲津彦의 館跡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襲津彦의 墓라고 전해지는 宮山古墳도 이 부근에 있다.
(3) 葛城氏의 쇠퇴
反正天皇이 일찍 죽자, 동생인 允恭天皇이 뒤를 잇게되었다. 당시 仁徳天皇의 아들로서 允恭天皇의 숙부가 되는 大草香皇子와 왕위계승의 경쟁자가 되었으나 允恭이 群臣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게 된 것이다.( 즉위에는 群臣의 지지가 필요한데 葛城氏의 독주를 싫어하는 다른 씨족들이 允恭을 지지 ) .
允恭天皇의 后는 葛城氏 출신이 아니고 応神의 皇子인 稚野毛二派皇子의 딸 忍坂大中姫였다.
允恭은 葛城氏를 억압하려고 했다.
葛城襲津彦의 孫、玉田宿禰를 죽였다.
允恭天皇의 후계자로 되어 있던 木梨軽皇子는, 群臣의 견제를 받아 실각하고, 忍坂大中姫 소생 穴穂皇子가 즉위한다(安康天皇)
(475?)安康3年、天皇이 眉輪王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安康天皇의 친동생인 大泊瀬皇子(雄略)는 安康의 횡사소식을 듣고나서 재빠르게 배다른 형이었던 八釣白彦皇子를 의심하여,
「眉輪王이 大王을 죽였다. 꼬드겨서 죽이게 한 것이 너지?」라고 몰아부쳤다.
八釣白彦皇子는 아직 安康 사망 소식조차도 듣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부정했지만, 大泊瀬는 듣지 않고 죽여버린다.
계속하여 또한명의 배다른 형인 坂合黒彦皇子를 죽이려했지만 皇子는 眉輪王과 함께 도망쳐서 葛城氏의 当主 ・葛城円에게 도움을 청했다.
葛城円은 大臣으로서 당시 최고집정관이었다. 円은 그들을 숨겨주었다.
그러나 大泊瀬는 손을 늧추지 않았다. 대군을 끌고와 집을 포위하여 무자비하게 공격하였다.
드디어 円은 항복하고 딸 韓媛(가라히메)와 領地7개소를 헌상하겠다고 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雄略은 「딸과 領地는 가져간다. 그러나 너는 죽는다」
라고하며 저택에 불을 질러 眉輪王 ・坂合黒彦皇子 ・葛城円등 전부를 불태워 죽였다.
그후 大泊瀬皇子는 市邊押磐皇子 ・御馬皇子 형제도 속여서 살해하고,
丁酉年11月13日 泊瀬朝倉宮에서 雄略天皇으로 즉위한다.
이것이 日本書紀에 전하는 雄略天皇(大泊瀬皇子)의 즉위담이다.
최근의 신문기사에 당시에 불에 검게 탄 기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葛城氏의 遺構」
야마토 왕권의 중심은 奈良분지에 있었다. 그 남쪽을 다스렸던 葛城氏는 천황가의 외척으로서 세력을 자랑했다.
金剛山(1125m)기슭 일대에 여러가지 遺跡 ・遺構가 남아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水축제장인 것 같은 수도시설, 신전으로 보이는 대형건물, 工房、倉庫群、거주구역등 거대한 건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葛城氏「王宮」跡、
(4세기 말부터 5세기 전반 경)将軍 襲津彦이 朝鮮半島에 출병했던 당시의 일본은、讃、珍、済、興、武의 「倭五王」이 中国에 使者를 보내어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있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天皇家와 깊은 연결을 통해 정치기반을 다져왔지만, 5왕중 「武」로 보이는 雄略天皇이 등장하자、天皇의 정적으로 보이는 皇子들과 함께 공격당하여 葛城氏는 세력을 잃게 된다.
葛城円이 죽고나자 여기서、葛城 本宗家는 멸망하고、이후 2번 다시 大臣으로 취임하는 자가 나타나지 못했다.
이때 雄略天皇의 측근으로서 대두한 것이 大伴氏와 物部氏였다.
그들은 이후 大連의 地位에 올라서 大化政権의 執政官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大伴 ・物部系」의 平群真鳥가 大臣으로、大伴室屋 ・物部目가 大連에 임명되는 것으로보아 당시의 2대세력의 후원을 받아 천황에 즉위한 것을 알수 있다. 좀더 상상을 가하자면, 安康天皇 암살을 꾸민 것은 雄略 자신일지도 모른다.
雄略天皇은 大伴 ・物部를 중심으로 한 伴造系 씨족의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葛城系로 보이는 眉輪王등의「葛城系세력」을 배제하여 즉위한 것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雄略天皇은、잔학, 비정한 폭군으로서 기록되어 있다.
市邊押磐皇子를 죽일때의 방법은 잔혹하여, 몸을 토막내어 말 여물통에 집어넣어 땅속에 묻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雄略2年、妃를 기대하고 왔던 百済의 池津姫가 石川楯과 밀통한 것이 발각되었다. 天皇은 격노하여 大伴室屋 大連에게 명하여 来目部를 파견하여 두사람을 기둥에 묶어 불에 태워죽였다.
또 吉野宮에 行幸했을때、사냥 포획물의 일로 부하의 말에 성을 내어, 베어죽이고 바로 궁으로 돌아갔지만, 백성들은 두려워했다.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죽여, 대단히 나쁜 천황이란 평가를 후세에 남긴다
그러나、葛城氏가 몰락한 이후에도、武内宿禰의 후계자가 천황을 보좌한다고 하는 体制에는 변함이 없었다.
葛城氏의 후에는 平群氏가 대두하여、大臣이 된 平群真鳥가 국정을 농단하였다(武烈紀)
平群真鳥가 망하고 난 뒤는 巨勢氏가 大臣이 되었고 그 뒤는 蘇我氏에게로 넘어갔다.
이것이 大臣制로서 大化改新까지 계속되어갔지만 이들이 모두 武内宿禰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神功 ・応神의 체제를 떠받치는 武内宿禰의 존재가 컸다는 것을 엿볼수 있는 현상이다
6. 蘇我氏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物部氏와 蘇我氏가 대립하였으나 결국 蘇我氏가 승리하고 정권을 쟁취한다.
그러다가 仲大兄皇子에게 암살당하여 몰락한다.
『日本書紀』皇極 원년条에、蘇我蝦夷(소가에미시)가 「자신의 祖廟」를 葛城의 高宮에 세웠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蘇我氏의 祖라고하면 武内宿禰의 子 蘇我石川宿禰가 생각나고,
蘇我(曽我)는 高市郡의 지명으로서、그곳이 蘇我의 발상지라고 하면, 葛城에 祖廟를 세웠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蝦夷의 父인 馬子도、推古32年10月1日에「葛城県은 원래 臣의 本居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 땅을「封県」하고 싶다는 뜻을 推古天皇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 葛城이 蘇我氏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신뢰할만하다.
그렇다고해서 葛城이 그들의 発祥地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蝦夷가 高宮에 세웠다는 「祖廟」는 蘇我石川宿禰의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葛城과 깊은 縁을 가진 武内宿禰의 廟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高宮에 造営했다는 것은 高宮이 武内宿禰에게 유서깊은 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高宮이 襲津彦의 근거지였으므로 高宮은 武内宿禰로부터 襲津彦에게 이어받았을 것이다.
결국、武内宿禰의 세력권 중에서 平群이나 高市에 속하는 주변지역이 年長子들에게 계승되고,
최후로 武内宿禰 자신의 본거지인 高宮이、어린 襲津彦에게 상속되었고、
후일 襲津彦에 의해 연행되어 온 新羅의 포로들을 뿌리로 하는 「漢人」들도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渡来人의 앞선 기술도 葛城襲津彦과 그 후계자들을 있게한 원인이 되었다.
蘇我氏가 木滿致의 후손인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木滿致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木劦滿致, 蘇我氏의 시조인 蘇我滿智가 동일인물인가?
「일본서기」에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하기 전에 「(백제와 왜의 군사들이) 함께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부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木滿致가 태어났다는 「討新羅時」라는 사건의 시점은 369년에 해당한다.
木劦滿致는「삼국사기」百濟本紀 개로왕(蓋鹵王) 21년(475년)에 , 고구려군이 백제의 수도 尉禮城으로 쳐들어오자 개로왕이 죽음 직전에 왕자文周를 호위하여 남쪽으로 갔던 인물이다. 369년에 태어났다면 이때 106세가 된다. 연대가 맞지 않다.
蘇我滿智와 木劦滿致가 동일인이라면 백제의 명문씨족이 자신의 성을 버리고 蘇我氏를 자칭한다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木劦滿致가 「남쪽으로 떠났다」고 해서 「남쪽」을 굳이 왜국으로 지목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점(실제로 木劦滿致가 호종했던 문주왕은 왜가 아닌 신라에서 원병을 얻어 돌아왔다)
蘇我高麗는 백제의 명문 씨족인데 손자이름에 왜 개로왕을 죽이고 그들을 멸망시키「고려」(고구려)라는 이름을 붙혔을까?
蘇我馬子는 말새끼?
雄略朝에서、葛城氏는 몰락하지만, 이윽고 大伴 ・物部系 호족도 멸망당하고 주지하는바와 같이 蘇我氏도 大化改新때 멸망당한다.
태고로부터 天皇家와 손잡고 권세를 휘두른 호족들도 결국은 대항해오는 신흥호족과 天皇에 의하여 망해가는 것이다.
日本史上、유일한 예외가 藤原家이며、이 가문은 天皇家 유일의 신하로서 현재도 살아 남아 있다(近衛文麿도 昭和天皇皇后도 藤原家이다)
◆欠史8대
神武天皇의 아들「綏靖天皇」부터 安寧 ・懿徳 ・孝昭 ・孝安 ・孝霊 ・孝元 ・「開化天皇」까지 8대는 欠史 8代라고하여 実在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지만
반대로 이때의 천황은 葛城지방에 있었던 「葛城王朝」였다고하는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崇神이후와는 다른 왕조였다며 선을 긋는, 다른 정권이었다는 実在説..
葛城山麓에 天皇들의 伝承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葛城山麓은、古来부터 権勢의 땅이었을 가능성이 강하다.
葛城襲津彦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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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元天皇
彦太忍信命
屋主忍男武雄心命
武内宿禰
l
l--- 葛城襲津彦 〔生江氏〕 〔玉手氏〕 〔塩屋氏〕祖
ㅣ
ㅣ
玉田宿禰 -----------磐之媛 -------- 葦田宿禰 ------------腰裾宿禰 -----戸田宿禰-----熊道足禰 ------------ -
ㅣ (仁徳天皇后)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円大臣--- 毛媛 ㅣ ㅣ ㅣ ㅣ ㅣ
ㅣ (吉備田狭妻) 蟻臣---黒媛 〔下神氏〕 〔的氏〕 〔忍海原氏〕
ㅣ ㅣ(履中天皇妃) 〔朝野氏 ◇
ㅣ ㅣ
韓媛 荑媛 ㅣ
(雄略天皇妃) (市辺押磐皇子妃) ㅣ
◇
ㅣ
ㅣ
菟上足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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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穂国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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