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영 박사가 들려주는 한국 상고사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 블로그에서 발췌함.
http://blog.daum.net/hearo9mars/4531376
89세 때인 1988년 4월 이병창 박사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에 갔는데 그의 소개로 '궁하(宮下, 미야시다)문서'를 연구하는 삼륜방광(三輪邦光, 미와구니히카리)씨를 만났습니다. 삼륜방광씨를 따라가 후지산(富士山) 밑의 후지황태신궁(富士皇太神宮) 깊숙이 소장된 한자로 쓰여진, 두루마리로 된 일본황실이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궁하문서를 소장자인 궁하(宮下, 미야시다)씨의 안내로 직접 봤습니다.
궁하문서를 연구,정리하기에 몰두했던 삼륜의희(三輪義熙; , ~1933)씨의 아들인 삼륜방광씨의 말에 의하면 {궁하문서는 일본의 국사라고 생각해 온 약1천년 전의《기기(記紀)》(고사기,일본서기)보다 수 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논급한 사서(史書)이다}, {이 문서에 비하면《기기》는 허구이며,《기기》를 역사서라고 일컫는 것도 잘못이다.}, {궁하문서에 수록된 우가야 왕조사의 진상을 규명하기에 몰두한 결과 1921년에 신황기(神皇記)를 발표하였었다. 그러자 일본의 유력한 신문,잡지들은 일제히 절찬하는 논평을 실었으나 일본의 권력층과 군부 등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궁하(宮下, 미야시다)문서를 규명하여 선전하는 재단법인 부사문고(富士文庫)는 탄압을 받고, 활동정지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이 무렵이 일제가 조선총독부에서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말살하던 시기입니다.
얼마 전엔 삼륜방광(三輪邦光, 미와구니히카리)씨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박사님이 89세에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이곳에 오셔서 저와 같이 후지산 밑의 후지황태신궁에 소장된 궁하문서를 보고 가셨는데 금년에 제가 벌써 85세가 되었습니다. 궁하문서를 같이 보던 기념사진이 박사님께 있을 텐데 저도 그 사진을 간직하고 싶으니 그것을 저한테 하나만 보내주십시오}라는 편지가 왔습니다.
우가야 왕조사(일본의 역사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피력하는 역사) 중, '상기(上記, 우후미) 문서'는 지금 일본 황실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왕실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는 '우가야 왕조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1987년 발행된 동경대 인류학 잡지의 영문판《고대일본 이주자 수 추정》이란 하니하라(埴原和郎) 인류학자의 주장을 보면,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한국개척자들)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지방은 도래인들이 거의 전부다}, {따라서 야요이 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 대륙(한반도)으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 만 명이다}라는 '추정통계 보고서'를 발표하여 대량집단이 이주한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나라시대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문화 말기(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즉 '한,일 관계사'에 서 그 기원은 일찍이 '단군조선' 말기의 민족의 대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단군조선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일본열도는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이룩되어 왔는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단군 조선인들을 비롯 가야,고구려,백제,신라계라는 것은 이미 밝혀져 왔고, 또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의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삼한 등에 이어, 가야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앞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九州)로 대거 이주, 선주(先住)세력을 흡수한 후 규슈 전역을 장악, 고대 일본 국가형성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그들의 천황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고분들을 비롯 당시 지배자들의 묘제는 3~4세기에 걸쳐 성행했던 '가야고분' 의 형태이며 5세기 중엽부터는 백제 전기의 석실분이 나타납니다.
일본 일왕 즉위식에서 전달되는 일왕가의 삼종신기(三種神器)라는 이른바 동경(銅鏡), 동검(銅劍), 곡옥(曲玉)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에 의심을 하는 한,일 학자는 없습니다. 그리 고 이 세 가지는 가야의 고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대마도와 북규슈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오키노시마(沖ノ島)'는 고대유물의 정창원(正倉院)으로서, 출토된 유물이 대부분 '가야계'가 틀림없으나 일본 사학자들이나 궁내청(宮內廳)은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더기로 출토된 국보급 유물들에 대해 일본 궁내청은 오키노시마에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접근조차 엄격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 오키노시마는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중간기착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처럼 일본은 고대 유적지 발굴 특히 일왕가와 연관된 유적조사는 금기로 하고 있습니다. 출토물들이 1만 여점이 넘는데 전부 비밀에 부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서해를 거쳐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와 도쿄인근의 오이소(大磯)해안으로 상륙, 사이타마현(埼玉縣)과 도쿄(東京)를 개척하였고, 백제는 남해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긴키(近畿)평야의 중심지인 오사카(大阪)로 상륙하여 죽내가도(竹內街道, 다케노우치가이도)를 따라 나라(奈良)지방에 정착하였고, 신라는 동해를 거쳐 니가타(新潟)의 사도(佐渡)섬을 거쳐 일 본전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왜(倭)라는 국명은 15대 응신(應神)천황 때 생긴 것이고,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38대 천지(天智)천황 때 생긴 것으로, 즉 왜국은 가야인들이 세운 것이고, 일본은 백제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가야(伽倻)는 그간 한국사에서 가야사가 많이 누락된 채 엮어져 왔습니다. 최근 김해지방 고분에서 가야 유물을 발굴하는 등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해 그 공백이 급속히 메워져 가고는 있지만 옛 문헌으로는 단지 ≪삼국사기≫에 그 일부분과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짤막한 내용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야는 서기 42년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의해 건국되어 520년간 존속하다가 서기 562년 신라에 병합되기 전까지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국 시대를 이루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철기문화를 꽃피우며, 김해만을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일본에 진출해 일본왕실의 기원이 되는 등 동북아 문화의 젖줄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가 가야사를 포함하여 사국사기가 되어야 함에도 가야를 병합한 신라가 의도적으로 가야사를 누락시켜 버렸고, 그 후 ≪삼국사기≫ 등을 편찬하였던 고려마저도 가야사를 외면한 채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위주로 역사를 엮어왔고, 특히 일제침략시대 때 '가야사'는 일본왕실의 기원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철저히 왜곡,말살되었습니다.
일제침략시대 때 일제는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일본 일왕가의 본관 감추기, 즉 일본의 기원인 단군조선을 비롯 {가야세력과 백제 망명정권이 일본 일왕가를 이루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고문서를 불태우는 등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말살하였습니다.
1915년 6월 29일 일제는 치안상의 이유를 내세워 총독부 극비지령인 경무령을 발동하여 가야 김수로왕을 시조(始祖)로 하는 김해 김씨 족보 발행을 금지했고, '가야사'를 보존한 김해 김씨 문중을 약탈했습니다. 가야인들이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두고 규슈지방 등으로 집단 이주한 이유는 가야지방과 일본열도 특히 규슈와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고, 당시 일본열도는 인구가 적은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개척의욕이 강한 가야인들로서는 개척의 대상이 되었고, 문물이 발달한 가야인들은 성품이 온화하여 투쟁을 싫어해 좌,우에서 백제와 신라 의 크고 작은 협공을 수없이 받게되자 항쟁하는 것보다 차라리 신천지 개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993년 4월에 고려대 교우회관과 인천(경기은행 본점 대강당) 에서《역사적 뿌리 탐구의 여정》의 저자인 일본인 사학자 다카모도 마사도시(高本政俊; 1928~)씨를 초청 {일본 속의 가야문화 ─ 일본 사람에게서 한,일 고대사를 듣는다}라는 초청강연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다카모도씨의 '고본(高本)'이란 성은 고구려의 후손으로서의 고(高)자와 일본에 건너온 것을 의미하는 본(本)자를 따서 만든 성씨라고 밝히더군요.
다카모도씨는 일본 각처의 지명, 신사와 절의 이름, 인명 등 을 열거하면서 많은 한국인이 수 차례 걸쳐 집단으로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민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일본의 고대 왕조 와 깊은 인연을 가졌다고 밝혔는데 비교적 양심적인 학자들까지 한 꺼풀을 감추고 있는 일본에서 '가야인'이 일본을 건국했고, 모든 선진문화를 일본에 가져왔다고 솔직하게 주장한 다카모도씨야 말로 진정한 사학자다운 양심적인 사학자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가야계의 일본내의 지명, 신사와 절의 이름, 인명, 생활 용어 등 100여 개를 찾아내었는데 다카모도씨는 300가지 이상 수 없이 찾아내 나를 보여주더군요.
일본열도는 서기전 3세기 무렵인 단군조선 말기부터 7세기후 반인 백제 멸망 이후까지 1천 여 년 동안 우수한 농경문화와 철기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끊임없이 이동한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의 보고임과 동시에, 우리 선조들의 신천지 개척사이면서 정복자들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삼한 등에 이어, 가야와 백 제,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나라를 통일하는 흥망성쇠의 소용돌이 가운데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땅으로 피신해 간 '망명집단'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말(언어)은 지배자에 의해 지배되듯이 결국 일본말의 '기원과 뿌리'도 한국말입니다. 극히 소수의 원주민을 제외한 선(先)주민 자체가 한국계였으므로 각 지방의 우리 '고대어(고대방언)'가 1천 여 년에 걸쳐 쌓이고 쌓여 오늘날 일본말의 뼈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룩된 7,8세기의 고대 일본말은 곧 '일본식 한국 고대방언'입니다.
일본인 다니가와(谷川健一)씨는 "일본왕가의 제1대 신무(神武)부터 제14대 중애(仲哀)까지는 모두 다 가공(架空)의 인물이고, 제15대 응신(應神)이 실존 인간인 최초의 일본왕인데 응신의 혈맥은 한국 태생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985년 3월에 발행된 구라다(倉田康夫)씨의 "일본역사요설(日本歷史要說)"에 보면, 6세기초에 백제로부터 각 분야의 학자들이 일본에 초청되어 왔던 사실을 기재하고 나서, {6세기초 일본 천황의 주변은 지식인으로서의 귀화인에 의 해서 차지되어졌고, 대담한 추측이 허락되어진다면 천황가(家)도 귀화계의 민족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학자 가시마(鹿島昇)씨는 "일본황통보(皇統譜)가 한국의 가락과 백제의 두 왕통을 합하여 이룬 것이고, 제38대 천지(天智)천황은 백제의 끝 왕 부여풍(扶餘豊)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시마씨의 논술인, 1980년《역사와 현대》에 실린〈단군고기와 야마대국〉의 내용을 보면, {금일에는 한반도를 포함해서《기기(記紀)》, 즉 고사기(古事記) 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일본열도의 진실한 사서(史書)라고 진심으로 믿으려는 사학자와 고고학자는 없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백제인이고, 천지(天智)천황(626~672)이 백제인이라고 본다면 그에 의하여 창작된 사서의 원본은 백제사의 일본 번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승리를 과장하고, 패배를 고쳐 쓰게 하고, 망명은 기입하지 않는 그 수법은 그들의 사서작성의 기본 법칙이었다}, {우가야 왕조사를 말소해서…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왕조였다고 하는 허구로써 사서를 작성했다. 우가야 왕조는 단군조선으로부터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왕조이다}, {무엇보다도 명치유신 때의 권력자들은 일본이 일본열도 내의 '자생왕조'라는 허구에 대하여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한국의 역사서적들이었으므로 조선총독부는 이마니시(今西龍)를 중심으로 하여 긴 세월에 걸쳐서 한국의 '역사'자료들을 대규모로 약탈하여 태워 없앴으며, 대마도의 종가(宗家)에 전해 내려온 역사책들도 몰수하여 그것들을 일본 궁내성의 문고속에 감추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왕실은 백제인의 후손
백제가 서기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군사에게 멸망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일본에 있던 그의 누님인 제37대 '제명(齊明, 사이메이)천황'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도중에 제명천황이 죽자, (제명천황의 조카이면서) 일찍이 왜로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 인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이 이끄는 구원군은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지만 서기 663년 금강(錦江)하구로 추정되는 곳 (일본 문헌에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대패했습니다. 현재 일본왕실이 이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서기 663년 최후의 거점인 주유성(州柔城 또는 周留城)이 함락되자, 일본열도에서는 {이제 주유성을 잃었구나.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들의 묘소에도 이제 다시 못 가게 되었구나}라는 비통의 노래가 유행했다고《일본서기》(663년 천지(天智)2년 조(條))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유성은 부여와 공주 부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열도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또 한번의 소용돌이를 치는 데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망명해 들어오자 일본열도의 백제계는 다시 뭉치게 됩니다.
백제 재건의 꿈도 무너지자 중대형은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일본 각지에 산성(山城)을 서둘러 쌓는데 전력투구하였습니다.
산성쌓기는 66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북규슈 후쿠오카 현(福岡縣)에 태재부(太宰府)를 건립하고, 그 주변에 백제식 토성(土城)을 쌓아 신라군이 공격해 올 경우 수공(水攻)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城)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는 높이 14m, 길이 1.2km, 기저부의 폭이 80m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뒷산에는 백제의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백제산성을 모방하여 축성한 성이 8km에 걸쳐, 토담과 석벽으로 산의 정상 부를 두르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667년에는 대마도의 하도(下島, 시모섬)에도 축조하는데 이 대마도 산성이 유명한 금전성(金田城, 가네다노키)으로 러,일전쟁 때와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대포 등을 놓고 요새로 삼았습니다.
7세기 후반에 쌓은 이 산성이 20세기 실전에 쓰일 정도로 견고하게 잘 쌓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당시 백제인의 높은 건축기술 수준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제38대 천지(天智)천황이 된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은 668년에 왕으로 정식 즉위하고, 백제계 중심의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혈통인 중대형이 {천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본격적으로 출범시키는데 '일본(日本)'이란 국호는 서기 670년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제40대 천황이 된 천무(天武)는 도읍을 다시 아스카(飛鳥)로 옮겨 이른바 황족과 일반 호족의 신분을 명확히 하고 천황 중심으로 씨성제(氏姓制)를 재편성하고, 193개의 성씨(姓氏)를 하사하여 지배계층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천무천황이 죽자 그의 부인이 왕이 되는데 제41대 지통(持統) 천황은 이름 그대로 전통을 지킨다는 뜻에서 천황의 이름을 지통이라 했고, 백제계 중심의 호적을 재편성하고, 백제계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
일본열도에서 세력을 장악한 백제계는 왕권을 강화하고, 그들 중심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43대 천황인 원명(元明)의 지시로 당대의 문장가인 백제인 안만려(安萬侶)가 712년에 ≪고사기(古事記)≫ 3권과 720년에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日本書紀)≫ 30권을 엮어 냈습니다. ≪일본서기≫라는 이름은≪백제기≫(백제의 역사)에서 따온 것이고, ≪일본서기≫는 ≪백제기(百濟紀)≫를 토대로 쓴 것입니다.
그러나 백제의 멸망으로 한반도와의 관계가 끊어진 이상 ≪일본서기≫ 집필자들은 일본 전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가야,고구려,백제,신라의 도해(渡海)집단을 하나의 혈통으로 묶어 역사성을 부여했습니다. 즉 제1대 신무(神武)천황의 후손으로 접목하여 한 계통,한 왕조로 꾸몄습니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인 에도(江戶, 동경의 옛 이름)시대 (1603~1867)의 일본 국학자들은 막부의 지배를 유지, 강화하려고 일본의 고대사 등 고전을 연구, ≪일본서기≫ 등 옛 사서류에서 건국기원이나 천왕의 신화를 조작하여 {일본의 신(神)과 천황이 옛 한국을 지배했고 다스렸다}는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대사 연구를 빙자해서 고대사를 이 같이 왜곡, 재해석해 일본을 신의나라(神國)로 미화하면서 '민족의지'를 단합하는데 노력한 국학자들은 덕천막부(德川幕府) 말기 급기야는 정한론(征韓論)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국학자들에 의해 한국침략과 한국 병탄, 한국지배의 사상적 근거를 받은 1868년 근대화 개혁을 단행한 명치(明治)연간에 그 들은 ≪일본서기≫를 교정이란 명분으로 많은 부분을 또다시 왜곡하였습니다. 현존하는 ≪일본서기≫는 편저자인 안만려의 이름을 삭제해 버렸듯이, 원제작자인 백제인 안만려의 이름이 빠지고 일본인 이름으로 ≪일본서기≫가 일반인들에 공개된 것은 편찬 후 1천 여 년이 훨씬 지난 '명치유신' 때입니다. ≪일본서기≫를 근세에 와서 일반에 공개하며 그들이 유리한 대로만 악용,유포하고 있는 배경에는 그들이 생각할 때 자신있게 조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고대 역사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정복자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일본 국학자들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역사를 날조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일본서기≫에서 정한론의 골격을 조작해 냈습니다.
그들은 신라를 정벌한 인물로 14대 중애(仲哀)와 15대 응신(應神)천황 사이에 나오는, 즉 중애(仲哀)의 제3부인으로 나오는 {신공황후(神功皇后)}를 내세워 대한침략사관의 자료로 악용하였습니다. 제1대 실존 천황인, 가야인의 후손인 제15대 응신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더욱이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생기기도 전에 한 여인(女人)이 당시 강대국이었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 등 삼국을 싸우지도 않고 정복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일본의 대화(大和,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일본왕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가야'에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했고, 거의 2세기 동안 가야 지방을 지배, 식민지를 경영하다가 서기 562년 신라가 가야제국을 정복하자 소멸하였다는 엉터리 {임나경영설}을 내세워 {한국을 병탄하는 것은 원래의 식민지를 되찾는 것에 불과하다}는, 즉 {실지(失地, 잃어버린 땅)의 회복과 같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일반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결국은 대한침략을 합리화했고, 또한 외국인들에게도 이를 선전하여 일본의 한국병탄은 '역사회복'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일본학계는 패전 후까지도 {임나경영설}이라는 이 엉터리 연구를 물고 늘어져 정설(定說)로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일본의 교과서에 {임나경영설}이 사실로 기록되는 등 역사왜곡이 심한데 더욱이 외국에서는 그 일본교과서를 통해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당시 일본열도의 길비(吉備), 지금의 강산(岡山, 오카야마)에 있었습니다.
가야는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소국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자신의 조국 이름을 따라 '임나(任那, 가야)'라 했습니다. 왜(倭)가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동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가야)를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로 잘못 해석한 결과입니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가야)의 북쪽에는 바다가 있으며'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한반도 가야는 지금의 경상남도에 있었으므로 그 북쪽에는 바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은 그들의 초대 신무(神武)천황부터 현재 천황까지 125대로 이어지는 천황가의 혈통이 단일혈통이라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줄곧 주장했지만, 그들은 이런 만세일계를 위해서는 가공인물의 왕을 등장시켜야 했고, 실존왕들의 나이와 재위시기를 조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세일계에 의하면, 제1대 신무천황이 서기전 660년에 왕권을 잡았으니 1998년이 그들의 황기로는 2658년이 되는 셈인데 이는 한,일 두 나라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크게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일본은 이처럼 역사를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민족기원과 누가 일본열도를 장악하고 지배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천손족(天孫族) 운운하는 '신화'만을 일본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민족처럼 가장하고 있으면서 고대 유적의 발굴, 특히 일왕가와 연관된 유적조사는 금기로 삼고 있습니다.
일본 국학자들이 제나라의 역사를 끌어올리고, 한국역사를 깍아 내리면서 그들의 역사상에 나타나는 한반도계는 {귀화인}, {도래인(渡來人)}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실체, 즉 자생왕조의 허구와 일본열도를 정복한 실체를 숨기려는 저의인 것입니다.
일본열도의 역사를 일왕가의 가계(家系)로 채워 신격화하면서 ≪일본사≫를 만들어 낸 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단군조선을 철저히 부정하고, 그들의 종주국이었던 가야,고구려,백제,신라를 오히려 그들의 식민지 또는 조공국가로 격하시키면서 이 지구상에 없던 사실(史實)을 만들어 냈습니다.
신대(神代)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왜곡된 한,일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1888년에 완간된) ≪국사안(國史眼)≫은 일본 교과서의 저본이 되어 일본 국민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한국침략의 구실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명치(明治)유신 때의 일본 권력자들은 일본이 일본열도 내의 '자생왕조'라는 허구에 대하여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그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단군조선 관련 사서 등 올바른 한,일 관계 역사를 담고 있는 사서였으므로 대마도의 종가에 전하여 내려오던 사서들을 몰수, 그것들을 일본 궁내성의 문고 속에 감추었습니다.
명치(明治)유신 때의 일본 권력자들은 일본이 일본열도 내의 '자생왕조'라는 허구에 대하여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그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단군조선 관련 사서 등 올바른 한,일 관계 역사를 담고 있는 사서였으므로 대마도의 종가에 전하여 내려오던 사서들을 몰수, 그것들을 일본 궁내성의 문고 속에 감추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어용학자는 그들의 국보라고 자랑하는,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칠지도(七支刀)}의 명문(銘文) 중 그들에게 불리한 부분을 삭제하고, {광개토대왕비문}마저 '역사' 왜곡을 위해 첨삭하여 그들의 정사인 ≪일본서기≫의 허구를 합리화하려 했습니다.
현재 중국 길림성 태왕향 태왕촌에 있는 1880년 무렵에 발견된 {광개토대왕비}를 일제는 2년 뒤 비밀리에 비문조작과 연구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만주를 정탐여행 중이던 일본 육군참모본부 파견간첩인 사꼬오(酒勾景信)중위가 능비를 답사하여 현지 탁공을 매수하여 탁본을 떠갔는데 이 때의 {쌍구가묵본}이 비문조작의 출발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라고 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가야,백제,신라 등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를 말합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 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훨씬 전인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요서지역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에서는 제후국이라 부름)이었고, 그 위치는 후대의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에 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습니다.
이 두 고구려는 그들의 존재시기와 지리적 위치는 달랐으면서도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서기전 12세기는 단군조선 중기이고, 서기전 37년은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이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옛 문헌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 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周)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에는 서주(西周)가 성주(成周, 지금의 낙양(洛陽))에서 개최한 성주대회에 고구려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회에는 서주가 건국된 후 제(齊)에 봉해졌던 태공 망(望)도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망은 주족(周族)이 상(商, 은(殷))나라를 칠 때에 선봉장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던 인물입니다. 망(望)이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서주 초인 서기전 12~11세기경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고죽(孤竹),예(濊),맥(貊),추(追),진번(眞番),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 ),숙신(肅愼),청구(靑丘),양이(良夷),양주(楊州),발( 發),유(兪),옥저(沃沮),기자조선(箕子朝鮮),진(辰),비류( 沸流),행인(荇人),해두(海頭),개마(蓋馬),구다(句茶),조 나(藻那),주나(朱那),한(韓, 삼한(三韓)) 등의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부여,고구려,고죽,예,맥,추,진번,낙랑,임 둔,현도,숙신,청구,양이,양주,발,유,옥저,기자조선 등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진,비류,행인,해두,개마,구다,조나,주나,한 등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이 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겠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과 관련을 갖지 못한 거수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단군'은 각 지역의 거수(渠帥)들만을 통솔하고, 각 거수국(渠帥國)의 주민들은 거수들에게 위임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거수들은 '단군'에게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 면서 단군을 그들의 공주(共主)로 받들었습니다. 해모수는 우리말의 해머슴아가 한자화된 것으로 '단군'에 대 한 다른 칭호였습니다. 단군조선인들은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체제와 경제상황속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인, 지금의 중국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 하( 河) 동부유역에는 일찍이 서기전 12세기경에 기자 일족 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기전 195년에 위만(衛滿)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 터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 부터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서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유역 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게 되었고, 이런 와중에 요서지역에 있었던 거수국들의 지배층과 주민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곳에 정착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요서지역에서는 또 한번의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였는데 중국의 서한(西漢) 무제 는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켜 그곳에 {낙랑(樂浪),임둔,진번,현도(玄 )} 등 4개의 군(郡)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단군조선의 서부영토였던 지금의 요서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아직까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일부 단군조선인 들은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뒤 단군조선이 통치능력을 잃게 되자 그들은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동부여,고구려(지금의 요동과 평안북도 지역),읍루(연해주 지역),동옥저(함경도 지역),최씨낙랑(평안남도 지역),동예(강원도 지역),대방(황해도 지역),한(삼한; - 지금의 경기도,충청남북도,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 등이 그런 나라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열국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부여(扶餘)는 원래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북부유역에 있었습니다. 난하 동부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자, 다소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한(西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자, 동으로 이동해 지금의 중국 길림성 북부 에 도읍하고 내몽골 자치구 동부와 흑룡강성 전부를 영토로하여 이를 부여 또는 '동부여'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동부여)를 북부여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단군조선 거수국였던 북부여가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입니다.
이 시기에 지금의 요하 서쪽과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동일한 명칭이 병존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서한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대부분 단군조 선에서 사용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고구려현, 옥저 등과 후에 낙 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단군조선 인들이 세운 최씨낙랑, 고구려, 동옥저, 대방 등의 나라가 요 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를 혼동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던 이러한 국명들을 중국의 군현 명칭으로 해석해 중국의 군현이 만주와 한반도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데 요서지역에는 고구려현이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고구려국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곳과 새로 나라를 세운 곳에서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즉 서기전 37년에 요동에 세워진 고구려국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입니다. 이 나라는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과 그 집단에 의해서 건국되었는데 이들은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추모왕(주몽)을 포함한 건국 주도세력이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옛 고구려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군조선은 후기에 단군의 후손을 각 지역의 거수(渠帥)로 봉하여 혈연조직을 강화한 바 있는데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그 때 거수가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에 의해서 지금의 요동에 세운 고구려는 난하 동부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거수 국 가운데 하나인 옛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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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첫왕은 한국인 단군 73대손…사실 숨긴 日 왕실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spot.html?ID=42565 에서 발췌
일본 궁내성도서관에 보관 되어 있는 <상기(上記-うえつふみ)>는, 전문(全文)이 풍국문자(豊國文字)라고 하는 고대문자(神代文字)로 쓰여 진 점이 특징이다. 이 고서에는 단군의 73대(代)손(孫) 응신(應神)이 일본의 첫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이도 숨기고 있다.
이 <상기(上記-うえつふみ)>는 풍후대우(豊後大友)씨의 조(朝)오오도모요시나오(大友能直)의 명(命)으로 편찬된 고문헌이라고 되어있는데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 즉 기기(記紀)는 단지 왕조발전사에 불과한데반해 상기(上記-うえつふみ)는 ‘단군의 73대손 응신(應神)이 일본의 첫 왕이 되었다’는 기록에서 보듯 일본왕조의 선대(先代) 72대가 조선의 왕조이고 일본의 첫 왕이 단군의 73대 자손임을 전하고 있다.
명치시대 기라요시가세(길(吉良義風-きらよしかぜ)라는 사람이 <상기(上記-うえつふみ)>의 일부를 [상기초역(上記抄譯)]이라 공개한 이후 잘 알려졌으며 그 편찬(編纂)에는 15종의 사료가 사용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 15종의 사료는 다음과 같다.
[상륙국신치문(常陸國新治文)], 고천대궁사가문(高千穗大宮司家文)], [일향국주원웅전서(日向國主元雄傳書)] [출운국조상세기(出雲國造上世記)] [상륙록도국조문(常)陸鹿島國造文)], [이두가무삼도전서(伊豆加茂三島傳書)] [미장중도역수기(尾張中島逆手記)] [이세도회문(伊勢度會文)], [섭진길대세좌기(攝津住大世座記)], [비후팔대현문(肥後八代縣文)],[아파전촌기(阿波田村記)][축전후노가문(筑前後老家文)], [풍전후가문(豊前後老家文)], [살마무도기(薩摩霧島記)], [월백산지주인문(越白山之舟人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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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가는 백제 성왕의 3남으로 임성태자가 맞고 그 후손들이 족보도 갖고 있었다
신 백제사 1 KBS Vhs DivX 2ch Inu
https://www.youtube.com/watch?v=Ywe02MY0qQY
성왕은 백제 26대 왕으로서 무령왕의 아들이다.
538년에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남부여로 칭했다.
554년 충청북도 옥천군 관산성에서 신라와 전쟁을 벌이던중 아들 위덕왕을 구하려다 전사했다.
26대 성왕
27대 위덕왕, 성왕의 장남,
28대 혜왕 , 성왕의 차남, 재위 1년, 그 동생이 임성태자인 듯하다.
29대 법왕, 재위 1년
30대 무왕
31대 의자왕 --
아들 부여융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 귀순하여 백제 부흥운동 토벌에 협조하고 백제군공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여 백제 유민들을 위무하였다 . 나중에 웅진도독부가 요동으로 옮겨졌음
아들 부여태, 부여효, 부여연,부여풍,부여용(선광),부여충승, 부여충지
아들 부여풍(장) -일본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백제멸망후 5만의 구원병을 끌고 갔으나 백촌강 전투에서 패하고 고구려로 망명.
아들 부여용(선광)-- 풍장왕의 형제로서 본래 이름은 부여선광(扶餘禪廣, 扶餘善光)으로,
일본 정착 후 지토 천황으로부터 百濟王氏를 사성받고 (百濟王善光 또는 百濟王禪廣)라 이름하였다.
일본 3대사찰중 하나가 선광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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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계 천황의 시작은 天智天皇으로부터...
乙巳의 変 - 中大兄皇子가、中臣鎌足과 함께 당시 실권자이던 蘇我入鹿을 暗殺하고 실권을 잡는다.
나중에 天智天皇이 되고 大化改新정책. 백제계 천황의 시작이다.
이 中大兄皇子가
부여풍이라는 설 -- 위 최태영 박사의 글과 일본인 학자들
翹岐라는 설이 있다.
부여교기(扶餘翹岐)는 백제 무왕의 서자이자, 의자왕의 이복 남동생이다. 외가는 사택(砂宅)
또는 백제국주 의자왕의 동생왕 새상(塞上)의 아들이며. 교기도 벌써 어린 아들이 있었다.
塞上이 스스로 축자왕을 자칭하니, 백제본토에서 塞上王의 모후를 모시고 남아있던 塞上의 장자 翹岐와 그 일가를 塞上에게
보낸 것이다.
推古의 실체는 馬子였다. 蘇我馬子→蝦夷→入鹿의 3대가 계속되는 蘇我王朝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그리하여 推古도
聖徳太子도 舒明도 皇極도 모두 가공인물이며、日本書紀의 万世一系는 天智의 次女인 持統에 의한 조작이며、乙巳政変에서
蘇我入鹿 大王을 암살함으로써 倭人의 蘇我王朝의「倭国」을 멸망시키고「日本」을 건국했던 것은 中大兄皇子 즉 天智인
百済王子 翹岐(ぎょうき)였다.
「記紀」의 편찬목적은 蘇我王朝를 말살시켜 万世一系 神話를 만들어 낼것.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의하여、日本의 歴史를 조작한 목적은 크게 2가지가 있다.
(1)百済王子 翹岐를 万世一系化하여 倭人王朝의 혈통안으로 집어 넣을 것.
(2)가공의 神功皇后가 三韓征伐케 하여 応神의 三韓 永久神授権을 주장한다
(1)은 斉明天皇과 天智天皇에 관계하고、(2)는 神功皇后와 応神天皇에 관계한다.
이 2組의 母子를 祭神으로 하는 것이 百済의 旧王宮터에 세워진「扶余神宮」으로서、
「扶余神宮」은 바로 日本書紀의 진수를 표현한 이 세상에 둘도 없는(伊勢神宮과 나란히)핵심신사이다.
또 天智로서는 전혀 타인이었던 天武도 万世一系化하기 위해서, 같은 혈통으로서 舒明과 皇極을 同父同母로 하는 天智의 동생으로 하였다.
天智에게는 大友皇子라고 하는 훌륭한 아들이 있는데 적어도 天智의 「同父同母」의 동생으로 하는 외에는 天武를 天智朝의 皇太子(皇太弟)로 할 방법이 없었다.「同父異母」로도「異父同母」로도、적당하지 않다. 「同父同母의 兄(天智)의 딸을4명이나 동생(天武)가 妻로 삼았다」라고 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있었지만、「同父同母」의 兄弟라고 하는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http://www.rui.jp/ruinet.html?i=200&c=400&m=341009 에서 발췌
中大兄皇子를 도와 일본을 세운 中臣鎌足.. 藤原후지와라노 성을 하사받아 藤原鎌足이 되고 그 두째아들이 藤原 不比等(후히토)가 일본서기 고사기를 편찬하여 일본역사를 조작하였고(日역사학자 오야마 세이이치 교수 주장-"만세일계는 후지와라 후히토의 조작")
그의 후손이 천황의 외척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여 헤이안 시대 때 섭정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천황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일본의 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타치바나(橘), 후지와라(藤原)중 하나.
미나모토가 겐지(원씨), 타이라가 헤이시(평씨)로 불리듯 후지와라도 도우지(藤源氏)라 불리기도 했다.
奈良시대에 南家 ・北家 ・式家 ・京家의 4家로 분화되고, 平安시대에는 北家가 皇室과 인척관계를 맺어 섭정정치를 했다.
藤原氏 일족은、奈良시대부터 平安시대까지 本姓인「藤原」을 칭했지만、鎌倉시대 이후로는 藤原이 아닌、「近衛」「鷹司」「九条」「二条」「一条」등의 家名을 썼으며, 공식적인 문서 이외에서는「藤原」라는 이름을 써지 않았다. 이것들을 합치면, 특히 朝廷에 출사하는 비율은 압도적으로 많았고、지방으로 흩어졌던 후예들을 포함하면, 日本에 있어서 皇室(그리고 그 흐름을 이어받은 源平등)에 이은 광대한 역사를 가진 家系였다. 江戸시대의 朝廷에 있어서 大臣으로 취임할수 있는 자격을 가진 상위 公卿 17家系(摂家、清華家、大臣家)중에 14家系가 藤原家이고、나머지 3家系가 源氏이며、徳川를 비롯하여 주요 武家의 대부분도 源平나 藤原流를 칭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皇統과 藤原家의 2 혈통만이 지배계급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세계에서도 보기드문 상태였다 (Wikipedia)에서 발췌
일본문화 근원은 한국"-동양미술사학자 코벨
일본의 문화원류가 한국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코벨은 가야지역 유물 분석을 통해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정통으로 부정하며 한국의 기마민족이 고대 일본을 정벌했다는 `부여족 일본정복설'을 주장하고 있다.
출발이 일본미술이었던 저자는 급기야 자신이 동양미술에 심취하던 초기 한국을 몰랐던 1930년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동양미술사와 역시 한국문화를 접하기전 자신이 대학강단에서 가르친 모든 것은 `가짜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90204104300726
고대에 한반도와 일본열도 양쪽에 걸쳐 나라를 세웠던 가야는
한반도에서는 신라에게 망한뒤 삼국사기에 의해 그 존재가 잊혀졌고
일본열도에서는 백제유민들에게 망하고 일본서기에 의해 사라졌다.
그들이 남긴 고분과 유물에 의해서만 당시의 사정을 희미하게 추적할수 있을 뿐.
중국사서에만 간간이 왜5왕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금관가야가 신라에게 망한 이후는 완전히 사라진다.
의문점
1.일본 황실에서 천황가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증거물로서 3종신기를 인정하고 있으며 현재도 즉위할 때「검새 등 승계의 의식」
(剣璽等承継の儀)으로써 신기를 계승한다고 한다.
3종신기 : 야타노카가미(八咫鏡)-거울-- 아마테라스가 니니키토 미코토에게 주었다고 한다
야사카니노 마가타마(八坂瓊曲玉)--곡옥,
구사나기노타치(草那藝之大刀)--칼-스사노오가 이즈모에서 머리 여덟 달린 구렁이 야마타노오로치의 꼬리에서 빼냈다는 검이다
백제계 천황들이 가야계의 유물을 가지고 뭐하러 이런 절차를 취하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2.신상제 --일본 왕실은 매년 11월 23일, 추수감사의 의미로 천황이 왕궁 신전에서 직접 제주가 되어 원신(園神) 1좌(座)와 한신(韓神) 2좌에
대해 제사를 지낸다.
원신(園神)은 소노카미로 牛頭天王인 스사노오노미코도(須座之男命)신이고
한신(韓神)은 가라카미로 왜나라 정복왕인 오우진 천황과 왜나라에 불교를 포교한 백제의 성왕으로 금목신(今木神,
이마키노 카미) 라고 한다.
이 제사를 지낼때 큰소리로 축문을 낭창하는데 그 노래가 초혼의 뜻으로
'아지매 어서 오시오' 라는 경상도 말이라고 한다.
延喜式--일본 천황가에서 이와 같은 신라신의 원신제와 백제신의 한신제를 거행한 금중 (禁中, 왕실)의 기록으로 제1권의 첫머리부터
상세한 기록들이 전한다.
각종 제물(祭物)이며 폐백용의 비단과 천 등, '원병한시삼좌제'(園竝韓神三座祭)에 관한 각종 기사는 제1권부터 제 50권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신제(韓神祭, 카라카미노 마쓰리)는 중고(中古) 때에 천황의 궁내성(宮內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제사를 드렸던 한신(韓神)의
신전의 제사로서, 2월 축일(소날)의 춘일제 (春日祭) 후와 11월 축일의 신상제 전에 거행했다. 같은 날 원신제(園神祭)의 제사도
거행했다. 한신은 궁내의 북쪽 신전에, 원신은 남쪽 신전에 모셔오고 있다. 제사드리는 순서는 같지 않으며, 어느 쪽을 먼저
제사드리는 순서는 같지 않으며, 어느쪽을 먼저 제사드린다는 규정은 따로 없었다
韓神- 가라카미 - 가야신이 아닌가? 왜 백제신이라고 하지?
쿠데타를 일어켜 전복시켜버린 왕실의 조상들한테 무슨 얼굴로 제사를 지내는 건지?
왕실의 대를 끊어 미안한 마음에 후손들 대신해서 제사를 지내주겠다 이런건가?
3.최태영 박사의 글에서
우가야를 기록한 문서를 가진 일본인이 백제의 후손이란 것도 기이한 일이다.
윗가야(우가야)는 고령가야, 아랫가야(아라가야)는 함안가야를 의미한다는데 (박병식 주장)
우가야 문서를 가진자가 백제의 후손이라니 이해가 안감. 일본천황, 조정대신, 쇼군등이 모두 백제천하의 나라에서
백제계 후손이 뭘 그리 감출게 있다고....
한국인들의 정서의 밑바닥에는 情恨이 있는데 일본인의 마음속에는 征韓이 있는 것인가?
만주에서부터, 한반도에서도 밀리고 쫒겨서 이제 더 갈데도 없이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그들인데
지진많고 태풍많은 그곳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들이 늘 .. 쫒겨났던
한반도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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