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10. 原始国家로부터 専制国家로(2)

청 설모 2018. 5. 13. 23:55

10부.  原始国家로부터   専制国家로(2)


1.任那滅亡

継体朝의 말기이래、야마토정권과「百済」・「新羅」의 역학관계는、『好太王碑文』에 보이던 시대나 「倭의 五王」시대와는 달리 야마토정권 우위라고는 도저히 말할수 없게 되었다.

『日本書紀』는 대등이상의 記述을 시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防戦 일방이었다고밖에는  읽혀지지 않는다.

 그때의 야마토정권은, 「百済」에게「任那」四県 割譲을 인정할뿐만 아니라、欽明朝에 있어서는「新羅」의 「任那」침략이 눈에 띄고 있다.


欽明天皇도「百済」와의 협력에 의하여 「任那」부흥을 모색하지만, 「百済」는 뜻에 반하여,
「任那」진출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또한 돌연,「高句麗」가「百済」를 침공하므로써, 「任那」政策은 없었던「百済」에게、손을 빌려준 것은「新羅」였다.
이것으로인해「高句麗」軍은 격퇴되었다.


그결과、「新羅」는「任那」정책에도 머리를 들이밀고 오게 되었다.
평화적으로 해결할수 없었던 야마토정권은、군사적 해결을 시도했지만,『日本書紀』는 成否를 말하지 않는다.

   「23年春1月、新羅는 任那의 宮家를 망가뜨렸다」

이것은562年의 일이다.

   欽明은、臨終때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重病이 들었다. 뒷일을 너에게(敏達天皇)맡긴다. 너는 新羅를 무찔러、任那를  세워라. 또 일찌기와 같이  両者 相和하는 사이가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나、欽明이 親新羅派였으므로、欽明崩御까지의 일련의 기술은、갑자기 믿기 어려운 것이되었다.
사실은 야마토정권과 손잡고 있는 것은 「新羅」이며、그것은「百済」의 게릴라전에 의한 「倭国」침공을 방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기회도 허무하게、欽明崩御의 혼란을 틈타 「百済」는、「倭国」의 정권을 뺏고 말았던 것이다.


「百済」・「新羅」양국에 비해서 「倭国」의 야마토 정권은 건국이 빠르고, 그때문에 朝鮮外交도 유리하게 전개해왔지만, 건국후의 「百済」・「新羅」는 국내정세가 안정됨에 따라서, 타국의 높은 문명을 빠르게 흡수하였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땅이 맞닿아있는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문화.문명의 빛을 쬐어、급속히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国威의 우열은 雄略의 시대를 경계로 역전하기 시작하여, 継体의 때는 거의 열세로 된 이래, 欽明朝에 이르러서는 야마토 정권의 위세등은 다른나라에 미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것은 『日本書紀』의 記述이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欽明紀』에는、特筆할만한 割注가 기술되어 있다. 앞에서 소개했던

  「어떤 책에 따르면、・・・・」

 으로 시작하는 一文이지만、『欽明紀』야말로 巻頭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記述이기도 했다. 이것을 『10巻本』중 巻第1로 했지만,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야말로 序文이라고도 말할수 있는  割注가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기재되어있는 「泥部穴穂部皇子」(호시히도노 아나호베노미코)야말로 정식의 皇太子이며、割注 이전에 기재되어 있는「訳語田淳中倉太珠敷尊」、後일의 敏達天皇)은、敏達을 欽明의 系譜에 이어넣기 위하여、삽입된 기술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버리고, 실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欽明天皇의 16年春2月、「百済」의 王子「余昌」(後의 威徳王)의 弟「恵」가 奏上하여、「聖明王」의 죽음을 보답하고 있다.

   17年春1月에는、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百済王子인 恵가 帰国을 원했다. 그래서 많은 武器・良馬외에 여러가지 物을 내려서、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감탄했다. 阿部臣・佐伯連・播磨直을 보내서, 筑紫国의 軍船을 이끌고、호위하여 나라(百済)에 보내어 바래다주었다. 별도로  筑紫火君을 보내어、勇士 1千을 이끌고、弥弖에 보내어 、航路의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다」


무언가 과장스러운 記述이다. 「筑紫」는「百済」의 手中이라고도 읽히는 記述이며, 후에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군선으로 호위시키고, 더구나 항로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고 하는 것은 他方으로부터의 공격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他方이라고 하는 것은「新羅」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後의 敏達이 百済정권이라고 한다면, 야마토정권( 以後、倭国政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欽明朝 중간에 이미、「百済」는「倭国」으로 침공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欽明은 임종시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重病이 들었다. 뒷일을 너에게(敏達天皇)맡긴다. 너는 新羅를 무찔러、任那를  세워라. 또 일찌기와 같이  両者 相和하는 사이가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과연 정말로 「新羅」였을까?  欽明의 殯에「新羅」는 애도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新羅」를「百済」로 바꿔 읽는 편이 앞뒤가 맞는 것이다.

 

그리고 敏達의 代에、「蘇我馬子」는 大臣이 되어있다. 私見에 의하면 大臣이라고 하는 것은 大王과 동의어이다. 결국 「蘇我馬子」는 大王이 되어 있었으며, 欽明이 전권을 부탁한 사람은 「蘇我馬子」였다고 생각된다.

敏達은、「百済」의「威徳王」의 弟「恵」가 떨어뜨린 種이 아닐까? 皇后인 「石姫」는 継体의 아들인 宣化의 娘이다.

일찌기의 継体朝는「百済」와 동맹관계이며,「石姫」를 皇后로 뽑은 것에 대해 문제가 있을리가 없고, 차라리 황통유지를 위하여 적극적인 혼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畿内에 존재했던 2개의 王朝는、무력항쟁에 의하여 서로 제1정권을 교대하면서「壬申의 乱」이라고 하는 결말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종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系図로 만들면、대략 다음과 같이 된다.


     「倭国政権」                 「百済政権」
         
       蘇我馬子                              敏達                                                      

           ㅣ                                     ㅣ 
  物部鎌姫大刀自連公                   舒明                                                         

(聖徳太子,入鹿摂政時代)            ㅣ                   
           ㅣ                                     ㅣ
           ㅣ                                     ㅣ
       孝徳                              皇極(斉明)
           ㅣ                                     ㅣ
           ㅣ                                     ㅣ
           ㅣ                                   天智
           ㅣ                                     ㅣ
          天武                                   ㅣ
                                                  弘文

2.蘇我馬子의 崇仏


敏達朝는、三韓으로부터의 使者와의 사이에서도 몇개의 사건을 일어키고 있다.
예를들면, 敏達天皇 2年秋7月1日의 条로서、

「越의 海岸에서의 難波와 高麗의 使者들과 상담하여, 送使難波의 船人、大島首磐日과 狭丘首間狭을 高麗의 사자의 배에 태우고,  高麗의 2인을 送使의 배에 태웠다. 이와같이 서로 다르게 태워서 나쁜일을 꾸밀려고 준비를 했다. 함께 출발하여, 数里정도 갔을때、送使難波는 荒波를 두려워하여、高麗인 2명을 바다에 던져넣었다.」

외에도 帰国子女「日羅」살인이나、「高句麗」의 副使가 大使를 찔러죽인 説話등、『敏達紀』에는 많은 부분이 이러한 記事로 시종하고 있다.


三韓의 使者와 문제를 일어키고 있는 記述은、敏達朝 자신이 대단히 불안정한 정권이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敏達紀』의 13年秋9月의 条에、「百済」로부터 온「鹿深臣」이 弥勒菩薩石像 일체를, 「佐伯連」도 불상을 일체 갖고 왔다고 한다.
이것을 「蘇我馬子」가 받은때로부터 「馬子」의 崇仏,「物部守屋」의 排仏이 시작된 것같으면, 『崇峻紀』에는「蘇我馬子」와「厩戸皇子」와의 연합군이、「物部守屋」軍을 괴멸시켜 「守屋」을 敗死로 몰아넣은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흔히 말하기를、「蘇我・物部의 종교전쟁」이다.

즉 仏教公伝은、『欽明紀』13年冬10月의 다음 기록의 때라고 말하고 있다.

   「聖明王은 西部姫氏 達率 怒ロ利斯致契(노리사치계)등을 보내어、釈迦仏의 金銅像일체,
  ・幡蓋약간・経論약간巻을 바쳤다」


그런데 그「蘇我・物部의 종교전쟁」이지만、『日本書紀』로부터 본 그 경위를 조항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쓰면 다음과 같이 된다.


   ①用明天皇 2年夏4月、用明天皇의 崩御
   ②5月、物部守屋、가만히 穴穂部皇子를 天皇으로 추대하다.
   ③6月、蘇我馬子、穴穂部皇子를 죽이다.
   ④7月、蘇我馬子、諸皇子와 群臣(注)에게 권유하여 物部守屋의 滅亡을 주살하다. 
               (注)泊瀬部皇子・竹田皇子・厩戸皇子・難波皇子・春日皇子
               紀男麻呂宿禰・巨瀬臣比良夫・膳臣賀陀夫・葛城臣烏那羅・
               大伴連ロ歯・阿部臣人・平群臣神手・坂本臣糠手・春日臣
         
   ⑤朝廷軍은 3번 퇴각했지만, 厩戸皇子・蘇我馬子의 誓願에 의하여 승리한다.
   ⑥8月、泊瀬部皇子即位(崇峻天皇)


   이 사이에『日本書紀』는 다음과 같은 一文도 올리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며 말했다.『蘇我大臣의 妻는、物部守屋의 妹다.
       大臣은 경솔하게 妻의 計를 이용해서、大連을 죽였다』라고」


「物部守屋」의 私軍에 대하여、諸皇子・群臣 15人이 인솔한 朝廷軍이、3번이나 퇴각당했다고 하지만, 그정도 「守屋」이 강했다는 것인가?
 그 결과 「物部」宗家는 멸망하고、후세에 이름을 남겼던 「物部氏」는 傍流가 되었다고 한다.
또、「厩戸皇子」・「蘇我馬子」의 誓願이라고 하는 것은 寺塔을 건립하는 것이며, 각각 「四天王寺」・「元興寺」를 세웠다.

그렇지만、『崇峻紀』의 약 반분을 나누어 기술되어 있는 「蘇我・物部의 종교전쟁」이지만, 전쟁종결후의 人事는

  「蘇我馬子宿禰를 앞과 같이 大臣으로 했다.  群卿의 位도 또한 원래와 같았다」

라고 하고있어、「物部守屋」가 죽은 이외는 아무런 변화도 없은 것이 아닌가?


大連의 位는、이후 놓여진 것이 없었기때문에、정권담당 시스템이 이것을 계기로 변했다고 해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人事에 변경이 엇었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때문인가?

이러한 일련의『日本書紀』의 記述에、의심을 품게하는 문헌이 존재한다.
『先代旧事本紀』이다. 이 문헌은 「物部氏」의 私的史書라는 것이 통설이 되어 있지만, 「物部守屋」멸망에 관해서 일체 말하고 있지 않다.


또、「物部守屋」를 本宗家라고 記述하고 있는『日本書紀』에 대하여、傍流라고 한다.

『先代旧事本紀』는、왜 守屋을 멸망시켰던 「蘇我氏」를 목소리를 크게하여 비난하지 않는가?
그리고「蘇我氏」와 관계가 깊은 『元興寺縁起帳』는、「物部氏」의 박해에 대해서는 기록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는,「蘇我・物部」의 양자는 화해하고 있는 것같다.


『日本書紀』는、「蘇我氏」가「物部大臣」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은 「馬子」의 妻가「守屋」의 妹이며、母계쪽의 재력에 의하여 세상에 위세를 떨치고 있기때문인 것같지만,  그것은 오라비를 멸망에 빠트린 「馬子」와、혼인관계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너무도 사람의 심리를 무시한 記述이 아닌가?


「聖徳太子」에 대해서도 그렇지만(叔父인 崇峻天皇을 죽인 상대인 「馬子」와 정치를 분담하고 있다)、무모한 기술에는 반드시 조작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日本書紀』가 기록하는 것과 같은 대대적인 종교전쟁은 없었으며, 「守屋」邸를 중심으로 한 사소한 충돌정도의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守屋」멸망의 후에도「物部氏」는 要職에 머물고 있다.
예를들면、「壬申의 乱」때에는「大友皇子」에게 최후까지 따랐던 舎人에、「物部連麻呂」가 있지만, 그는 후에、筑紫総領、中納言、大納言、太宰師、右大臣을 역임하여、養老2年 左大臣 正2位로 죽었다.
 또 天武天皇의 殯에는、「石上朝臣麻呂」이 法官의 일을 애도하고 있다.


대략 『先代旧事本紀』에서 말하는「物部守屋」은 傍流가 진실한 것같고,「石上朝臣」이야말로「物部氏」의 本宗家였을 것이다.

大阪府 南河内郡 太子町에 「叡福寺」가 현존하고 있다. 最盛時에는 8町歩라고 하는 광대한 부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聖徳太子」의 墓가 있지만、「叡福寺」의 문전에 있는 「西方院」은、「太子」의 3人의 乳母인「善信」(蘇我馬子의 娘)、「禅蔵」(小野妹子의 娘)、「恵善」(物部守屋의 娘)가 출가하여, 太子御廟의 앞에 一宇를 건립했던 것이 시초라고 하는 것이 있다.

왜「馬子」의 娘과 太子에게 멸망당한 「守屋」의 娘이、함께 太子의 묘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이런 것이야말로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고밖에 생각할수 없다.


 여기에 9부에서 소개했던 系図를 생각하기 바란다


『元興寺縁起帳』

?──────大々王(物部氏  出身)         ?────── 巷奇有明子(蘇我馬子)  
           ㅣ                                                            ㅣ
           ㅣ                                                            ㅣ
           ㅣ                                                            ㅣ

   聡耳皇子(大王・元興寺를 만들다)            善徳<長子>(元興寺를 세우다)
      


『日本書紀』

蘇我馬子──────物部守屋의 妹
                  ㅣ
                  ㅣ
                  ㅣ
     善徳(元興寺의 初代管長)
     


『先代旧事本紀』

宗我嶋大臣─────物部鎌姫大刀自連公
(蘇我馬子)  ㅣ
                     ㅣ
                     ㅣ
          豊浦大臣、名을 入鹿
 


「物部守屋」의 妹는、「物部鎌姫大刀自連公」이라고 하는데、실제로는 、大大王이었지 않았는가?
「蘇我馬子」는 大臣이다. 大臣은 大王과 동급이라고 이미 말했지만, 그러한 馬子를 제켜두고大大王이라고 불리웠던 「物部鎌姫大刀自連公」이라는 것은、문자대로 大王이상의 大王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것으로부터「物部氏・蘇我氏」의 両者가운데에서、무언가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디까지나 추측만이지만,「馬子」가「守屋」의 妹인「物部鎌姫大刀自連公」과 혼인함으로써 、「物部氏」와 동족이 되어「馬子」는 그 지위를 「物部鎌姫大刀自連公」에게 譲位했다.
「馬子」는 無位가 되었지만, 無位라고 하는 것은、비교할 대상의 지위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정도의 최고위는 없다.


그리고、政治는「馬子」지도하에、両氏의 子인「聖徳太子」가 摂政으로서 수행하여、여기에 트로이카 체제가 확립되었을 것이다.

결국、「物部氏」宗家(守屋가 아니다)는、「蘇我氏」가 가지고 온 仏教를、당시의 政情으로부터 용인시킬수가 없었으며, 그 결과가 両者의  화해 동족화이라고 생각된다.

朝鮮諸国과「倭国」의 관계는、仁徳王朝를 전후로 하여 역전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결국、仁徳 이전은「倭国」의 朝鮮半島 정책이 색이 짙어갔지만, 이후는 서서히 朝鮮諸国으로부터의 영향이「倭国」을 위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눈에 보이는 逆転시기는、継体朝 시대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物部氏」는、고대로부터 神道를 계승하여 온 일족이었다. 그러나、「物部氏」라고 해도、대륙으로부터 건너온 불교를 받아들여 「倭国」의 근대화를 추진하지 않으면 「倭国」은 더욱더 쇠퇴해버리고 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찍부터 그것에 눈을 돌린 것이 「蘇我氏」이며、나쁘게 말하면 「物部氏」를 이용한 것이지만, 「物部氏」도 추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정권은 「百済」정권(敏達朝)였기 때문이다.


 단지、종교로서의 불교를 도입한 것이 아니고 문화로서의 불교를 도입한 것이지만, 어느것이건 教典을 다르는 것이므로、결과는 마찬가지였을런지도 모른다.

유일한 誤算은、「物部氏」의 傍流「守屋」의 반발이었지만, 이러한 崇仏・排仏을 둘러싼 분쟁에 대한 記事는、「物部氏」를 惡人으로 하는 飛鳥시대의 大寺院의 승려들의 史観에 의하여、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說도 제창되고 있다.


「蘇我氏」와「物部氏」가 융합한 최대의 이유는、敏達朝에 대항할수 있는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노력이 주효하여、敏達 사망후에  다시 정권을「倭国」이 탈취했던 것이다.

「蘇我・物部」의 융합의 사실은、『日本書紀』편찬자로서는、스토리의 전개상 어떻게 하던지 말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蘇我氏」가 大悪人이 되어야만、「中大兄皇子」와「中臣鎌子」(後의 藤原鎌足)가 꾀했던 「乙巳의 変」(大化改新)의 정당성을 주장할수 있으며, 실제『日本書紀』는、「蘇我氏」가 행했던 악행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①物部守屋殺害
   ②崇峻天皇暗殺
   ③山背大兄皇子殺害


또한、「太子」의 部民을 써서  大陵・小陵을 만들었다던가 기우제를 지냈다던가 자세하게 말하면, 많이 있지만, 요인의 살해가 제일 큰 악행일 것이다.

이러한 살해는 전부 天皇家에 대한 박해이지만,「中大兄皇子」가 「入鹿」살해를 결심한 것은 이해할수 있지만, 이대로는 「鎌子」가『日本書紀』에 어떠한 수식어로 찬양을 하려고 해도, 단순히 살해를  도와준 片棒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用明 2年夏4月2日、『日本書紀』는 어떤 사건을 기재하여 「中臣氏」에게까지 大義名分을 주고있다.

磐余의 河上에서 新嘗의 大祭가 행해졌지만, 天皇은 병이 걸려 다음과 같이 말한후, 궁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仏・法・僧의 三宝에 귀의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경들도 잘생각해주기 바란다」

(※각주: 皇室의 제사 가운데, 天皇이 친히 집행하는 祭典)


이것을 기화로하여, 崇仏・排仏논쟁이 시작되어, 「守屋」살해로 이어졌지만, 이것에 반대했던 것이「物部守屋大連」과「中臣勝海連」였다. 그리고 「物部氏」側에 붙었던「中臣勝海」는、「蘇我氏」의 군사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결국, 「蘇我・物部」의 융합이 있어서는、피해자「中臣氏」의 존재가 공중에 뜨서, 후의 「中臣鎌子」에게 대의명분을 줄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단지 현재의 역사관으로서는, 이 「中臣氏」와 「鎌子」는、동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古史 古伝의 하나인 『九鬼文書』는、「物部守屋」는 東北으로 도망갔다고 하지만, 이것이 의외로 진실일런지도 모른다.


3.蘇我氏의 출생과 2개의 百済


武内宿禰─石川─満智─韓子─高麗─稲目─馬子─蝦夷─入鹿


이것은 「蘇我氏」의 게보라고 하지만, 초기의 시기에는 어찌됐건, 皇統과 깊은 관계를 갖게된 「稲目」의 代 이후가 되어도、웬지 母계쪽 계보가 불명인 상태로 있다. 바로 수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것만으로도「蘇我氏」라고 하는 人物像이、창조된 것의 傍証의 하나로 되고 있다.


그런데, 『応神紀』25年 条에、

「25年 百済의 直支王이 죽었다. 그 아들 久爾辛이 왕이 되었다. 王은 나이가 어렸기때문에 、木満致가 국정을 잡았다. 王의 母와 通하여 무례가 많았다. 天皇은 이것을 듣고, 불러들였다───百済記에 의하면、木満致는 木羅斤資가 新羅를 토벌할때、그나라의 女를 취하여 낳은 것이라고 한다. 그 父의 功으로、任那를 자기의 것으로 했다. 우리나라에 와서 日本과 왕래했다. 職制를 주어, 우리나라의 정치를 맡았다. 권세가 강했지만, 天皇은 그 좋지 않은 것을 듣고 불렀던 것이다」


「木満致」와「蘇我満智」의 이름이 同音이고、이어서「韓子・高麗」라고 하는 이름이 朝鮮半島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부터、「蘇我氏」는 百済系 渡来人이라는 설이 있다.

「蘇我満智」는『履中紀』2年春1月4日의 条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平群氏」・「物部氏」・「円氏」등과 함께 国政에 몸담고 있다.
応神天皇=仁徳天皇이므로、「満智」의 등장시기와「満致」의 来朝시기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이것으로부터、「木満致」=「蘇我満智」는 사실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흥미깊은 것은 「満致」가「百済」의 국정을 장악하고、더구나「任那」까지 수중에 넣었다는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이것과 똑같은 説話가 『雄略紀』5年夏4月의 条와 이어지는 条에 기록되어 있다.


「夏4月、百済의 加須利君(개로왕)이、池津媛이 불에타 죽었다는 것을 인편으로 듣고、의논하여、『옛날、女를 바쳐서 采女로 했다. 그런데 礼에 어긋나게 우리나라의 이름을 업신여겼다. 이후 여자를 바쳐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동생 軍君(곤지)에게 고하여, 『너는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라고.  軍君은 대답하여、『君의 명령을 거역할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君의 婦를 주시어、저를 보내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加須利君은 임신한 女를 軍君에게 주어、『내 임신한 婦는、출산月이 되어가고 있다. 혹시 도중에서 출산하면, 제발 母子를 같은 배에 태워서、어디에서라도 빨리 나라로 보내도록』이라고 했다. 함께 朝에 보내졌다.
   
6月1日、아이를 밴 女는 과연 筑紫의 加羅島에서 출산했다. 거기에서 그 子를 嶋君이라고 한다.  軍君은 하나의 배에 母子를 태워 나라로 보냈다. 이것이 武寧王이다. 百済人은 이 섬을 主島라고 한다.
   
秋7月、軍君은 京에 들었다. 이미 5人의 子가 있었다.───『百済新撰』에 의하면, 辛牛年에  蓋鹵王이 동생 昆支君을 보내어、大倭에게 参向시켜、天王을 섬기도록 했다. 그리고 兄王의 바라는 바를 관리했다.」


먼저、본문중의「軍君」은『百済新撰』의「昆支君」이다. 또 『百済記』의「木羅斤資」는「목라곤시」라고 발음하는 것 같다. 「昆支」도「곤시」라고 읽힌다.
「筑紫」의 加羅島라고 하는 것도、伽耶諸国 가운데서 「加羅国」、그것은 「任那」일런지도 모른다.(거꾸로『日本書紀』에서 말하는「任那」혹은「日本府」는、筑紫에 있었다고 말하는 説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主島는 니이무나라고 발음되어, 「任那」그것이다)


『百済記』와『百済新撰』 이 2개의 설화의 연대차는、『日本書紀』에 따르면, 약 1세기이다.
그러나 原典은 동일한 설화이며, 2개의 史書에 채용된 때로부터,  개별적인 설화로 되고 말았거나, 『日本書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른 시대의 説話로서 引用한 것이 아닐까?

혹시 후자라고 가정한다면, 그 목적은 「蘇我氏」의 출생 숨기기라고 생각된다.


「武寧王」은「嶋君」이라고 칭해졌던 것은, 『日本書紀』자신이 인정하고 있지만,「嶋」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또 한명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일까?

「嶋大臣」「蘇我馬子」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자는、동일인물이거나 직계의 동족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면,「昆支」가、日本에 도항하기 위하여 兄(百済王)의 妃를 하사해 달라고
신청하는 것은、어떻던 조작냄새가 나지 않는가?


실은「武寧王」이「昆支」의 子라고 하는 記載가、『武烈紀』4年의 条에 있기때문이다.

「이해、百済의 末多王이 무도하여, 民을 고통을 주었다. 国人은 마침내 王을 폐하고, 嶋王을세웠다. 이것이 武寧王이다───百済新撰에서 말한다.
 末多王은 無道하고、民에게 暴挙를 더했다. 国人은 이것을 폐하였다. 武寧王을 옹립했다.
의미名은 嶋王이라고 한다. 이것은 昆支王子의 子이다. 즉 末多王의 異母兄이다. 昆支는 倭로 향했다. 그때 筑紫의 島에 도착하여 島王을 낳았다.
島로부터 돌려보내졌지만 京에 도착하지 못하고、島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러한 이름이 붙혀졌다.
 지금 各羅의 바다가운데 主島가 있다. 王이 태어난 섬이다.  그래서 백제인들이 主島라고 이름붙혔다.  지금 생각하니 、島王은 蓋鹵王의 子이다. 末多王은 昆支王의 子이다. 이것을 異母兄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자세히 모른다」


단지、「武寧王」은、王陵의 墓誌銘으로부터 523年62歳 죽어、逆算해보면, 462年 출생한 것은 확실하므로 「武寧王」=「蘇我馬子」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것을 고려하여 系図를 수정하면, 下記와 같이 된다.

   

            昆支(斤資)─武寧王(満致・嶋王)─稲目?─馬子(嶋大臣)─入鹿


「武寧王」을 「昆支」의 子로 하면서도、실은「蓋鹵王」의 子라고 하는 태도는 대단히 불온하며, 결국、「武寧王」의 출생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기때문이 아닌가?「武寧王」의 출생에는 공개적으로 할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木満致」는「百済」의 国政을 장악하면서、「任那」를 자기 수중에 두었다고 한다.
 그는 어린 「百済王」의 母와 밀통하고 있다던가 父인 「木羅斤資」와 「新羅」의 女와의 사이에서 난 子이라던가、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다분히 악의가 담겨진 記述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任那」를 수중에 넣었다고 하는 것은、「百済」와 마찬가지로 国政을 장악했다고 하는것이 아닐까?


이 기술의 악의적 부분을 빼면, 「百済」・「任那」両国에 걸친 執政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継体의 代、「任那」四県을 얻어、「百済」는 復興했다고 하지만, 이러한 「百済」의「任那」침공이、加羅島의「武寧王」의 出現에 연결되고 있다. 「武寧王」은「加羅」를 억누르고 있던 百済王族인지、혹은 次期 加羅国王 후보였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武寧王」이 百済王으로서 복귀했을때、「武寧王」을 중개하여 同国化하여、그것을 継体朝에게 승인받았을런지도 모른다.

또한、「武寧王」=「木満致」가 아닐까하는 냄새를 풍기는 문헌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三国史記』라고 말한다면 놀라운 것일까?


『三国史記』의 『百済本紀』에는、「木刕満致」(목협만치)가、「蓋鹵王의 시대에 등장하고 있고, 「木刕満致」가 「木満致」이란 것을、의심하는 것은  안될 것이다
 475年에 蓋鹵王이「高句麗」의 策略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百済」가 滅亡의 위기에 처했을때、죽음의 문턱에 다달은 蓋鹵王은、実子이며 후일의 「文周王」과、腹心의 「木刕満致」와「祖弥桀取」(소미겟슈)에 대하여

  「너희들은 반드시 兵을 이끌고 돌아와서、百済의 王統을 끊기지 않도록」

라고 말하고 있다.
 
「文周王」은「新羅」로부터 兵을 이끌고 돌아왔지만, 後의 두사람의 행방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것들에 의하여、「木満致」는『日本書紀』에서 말하는 応神=仁徳時代의 인물이 아니라、5세기 후반의 인물이란 것이 되어、「武寧王」과、「木満致」의 父의 이름이、공히 「곤시」(斤資=昆支)라는 것으로 보아도「木刕満致」는 腹心이 아니고、武寧王과 동일인물이라고까지는 말할수는 없어도、형제에 가까운 혈연관계였다고 추측할수 있다.


따라서「蘇我氏」의 祖는、「百済」와「任那」에 걸친 連邦國?의 왕족이었다는 것이 되어,
그 자손이라고 생각되어지는 「蘇我氏」가、「漢(아야)氏」系 씨족이나、「秦氏」등의 도래계 씨족을 (「加羅」로부터 온것도「百済」로부터 온 것도 말하고 있는)、산하에 두게 되었던 것도 一気에 설명이 된다.

이것에 대해서도 、「蘇我氏」가 葛城출신의 단순한 一豪族에 불과했다고 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 일것이다.
 
『日本書紀』는、「蘇我氏」는 天皇의 외척으로 하면서도、母게쪽의 血筋에 손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代代의 倭国정권이、親新羅였다가 親百済였다가 하는 것과 같이, 「百済」본국도 정권 이도앟 때마다、親倭国・親新羅등 동맹국이 바뀌었다고 생각된다.
   
『欽明紀』를 보면、「新羅」에게 정복된 「任那」를 어떻게던 부흥시키려고 하는 정책을 시도하지만, 「倭国」의 행동을 빼면, 「百済」와 대립자세를 보이는 「新羅」・「日本府」(「任那」인가?)와의 연합 図式에、「高句麗」가「新羅」측에 참전한다고 하는、완전한「百済」포위망으로 되어있다.
 
더구나 「日本府」에 있는 멤버는、「吉備臣」・「的臣」・「河内直」이며, 그들은 도래계 씨족들이다. 또한 「百済」에도「紀臣」・「物部連」등「倭国」으로부터 逆도래인들의 이름도 보인다.

継体朝 때의 倭国정권은、어떤 의미에서 二朝상태 였다고 말할수 있지만, 동시기에 「百済」도 분열상태였던 것이 아닌가? 또 「百済」만이 아니고,「新羅」・「任那」의 朝鮮諸国 모두가 분열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말하면, 예를들면, 「毛野臣」으로 대표되는바와 같이、국가의 테두리를 넘어서、一豪族이 성을 빼앗아 점거했던 지방에 自治権을 행사하는 (결국 건국하여 국왕이 되는 것이다)、마치 戦国時代의 様相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그 자치권을 제3국에 인정받기 위하여、동맹을 맺는다고 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당사자인 倭国정권은、朝鮮諸国에 대하여 使者에 의한 調停을 시도해보았지만, 朝鮮諸国 우위의 이 시대에 、調停이 성공할리가 없다.

『日本書紀』는 武寧王의 즉위를 구데타에 의한 것으로 추찰하기에 충분한 記載가 있다.
武寧王을 즉위시켰던 세력은、先代의 王朝와는 다른 세력이었다.

그리고、「武寧王」이 죽은후에 옹립된 百済王은「聖明王」이지만,
이 시대가 되면, 倭国정권은 「筑紫」를 정비하여 해외의 나라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정세가 되었다.

「百済」로부터 본다면、「武寧王」시대와는 외교정책이 바뀐 것이 된다.
 友好로부터 侵攻이다.
 

이 180도 전환했던 방침은、「聖明王」즉위의 배경에도 정변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결국 武寧王派와 聖明王派는、서로 적대하는 관계였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敏達은「聖明王」의子「余昌」(威徳王)의 弟로서、「恵」의 摘流라는 것은 이미 말했지만,
、바로 聖明王系이라고 말할수 있다.
欽明天皇 16年春2月、「聖明王」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恵」가 来訪했지만, 「恵」는 재미있는 일로「蘇我氏」에게 움추러들어 있었다.


   「・・<前略>・・들리는바에 의하면,  당신 国에서는、祖神을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이제는 前科를 회개하여、神宮을 수리하고、神霊을 제사지낸다면, 나라는 번성할 것이오.  당신은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오」


「神을 제사지내는」것은、선진숭불파였던 「蘇我氏」로서는 생각할수 없는 말이다.
문자대로 真意라고 한다면. 이것은 모순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蘇我氏」로서는、聖明王系 王朝를 잘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蘇我氏」의 祖를 생각했던 경우, 그것은 일층 확실해진다.

그것이「木満致」라고 한다면、国政을 잡고 있는 입장이면서「百済」로부터 추방당하고 있고、「武寧王」이라고 한다면 聖明王系는 적대하는 파벌이기때문에 어느쪽의 경우에도 敵視할 가치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앞에서와 같은 모순의 하나도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聖明王」의 摘流가 、「倭国」에서 百済정권을 세웠기때문에、「蘇我氏」가 잠잠히 있을리가 없다.


4.蘇我 호족 연합

欽明崩御 후의 틈을 타서 출현했던 百済정권 敏達朝였지만, 「蘇我氏」는 旧倭国정권의 구성멤바에게 제의하여、호족연합을 성립시킴으로써, 敏達朝의 専制政治에 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波多・平群・紀・巨勢・葛城」등의 주요 호족의 대부분을、「蘇我氏」와 同族으로 하는 系譜안에 집어넣고、또한 旧知의 도래계 협력자인 「忌部・秦・東文・西文」등의 씨족의  財源을 의지하여、「蘇我馬子」를 정점으로 한 정치조직을 확립한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物部守屋」의 妹를 大王으로 하는 것으로서、「物部氏」와 융합한 蘇我정권을 반석으로 만들었다.

敏達도「蘇我」도 공히 「百済」계 였다.이때의「倭国」에는、2개의 百済系 王朝가 성립했던 것이 되어, 「百済」의 정권투쟁이 그대로 「倭国」에 가져오게 된 것이다.


敏達崩御후는、「物部氏」의 끼어들기에 성공한  蘇我 王朝가 제1정권을 탈취하여、大王位를양위한 「守屋」의 妹「物部鎌姫大刀自連公」이 司祭者로 되고、「聖徳太子」즉「蘇我入鹿」摂政섭정시대가 시작한다.

동시에, 敏達 사망후 百済왕조는、舒明이 뒤를 이어 飛鳥의 岡本宮으로 옮긴다.

이 岡本宮은、後의 斉明天皇(重祚前의 皇極天皇)도 宮地로 정하여 後飛鳥 岡本宮으로 이름붙이고 있다.


斉明天皇 2年、이 宮에 대한 記述이 『日本書紀』에 게재되어 있다.

「이해、飛鳥의 岡本에 또한 宮地를 정했다.・・<中略>・・이윽고 宮殿이 완성되어 天皇이옮기게 되었다. 이름 붙혀 後飛鳥岡本宮이라고 한다.
   
多武峯의 정상에、주위를 둘러싼 담을 쌓았다. 정상에 2그루의 느티나무 부근에 高殿을 세워서  両槻宮이라고 이름붙혔다. 또 天宮이라고도 했다.
天皇은 工事를 좋아하여、水工에게 溝(도랑)을 파게하고, 香具山 西에서부터 石上山에까지  이르렀다.

舟 200隻에 石上山의 돌을 싣고、흐름을 따라 내려가、宮의 동쪽 산에 돌을 쌓아  담으로 만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비방하여、『노닥거리는 心의 溝工事。헛된 人夫를 三万余。 쓸데없는 담만들기의 헛된 七万余。宮材는 썩고、山頂은 망가졌다』라고 말했다.
또 비방하여, 『돌의 山岡를 만든다. 만들었던 끝으로부터 부서질것이다』라고.
  ───혹은 아직 얼마 만들어지지 않았을때、이런 비방을 했는가」


이것에 의하면、岡本宮(=後 岡本宮)은 多武峯에 있고、그 정상에는 사방을 담으로 둘러싼  両槻宮을 만들었다고 한다.

흡사 戦国時代의 天守閣과 石垣을 상상케하지 않는가?
표고 609미터의 多武峯에 있는 天守閣、이것은 이미 전쟁을 의식했던 築城 이외는 있을리가 없다.


이 多武峯 중턱에는 舒明陵跡도 존재하고 있고、여기가 敏達崩御後의 百済정권의 거점이었다는 것은 용이하게 상상이 간다. 
산을 내려가면 거기는「飛鳥」이지만、거꾸로 말하면 「飛鳥」를 쫒아낸 百済정권이 籠城을 정한 것이다.

더구나 、舒明의 岡本宮도 斉明의 後岡本宮도、하필이면 火災에 당했었다. 더군다나 舒明은 蝦夷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日本書紀』는 蝦夷를 소위 말하는 蝦夷와 같이 기록하고 있지만, 실은「蘇我蝦夷」즉 「蘇我馬子」의 軍勢였다고도 推察하고 있다.


이와같이 본 경우, 岡本宮의 火災라는 것은「蘇我氏」호족연합에 의한 공격에 의한 것이며、그리고 이 蘇我정권이야말로 旧倭国정권을 둥글게 안은 새로운 倭国정권 그 자체라고도 말할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多武峯이 百済정권의 거점이었던 증거는、여기에「談山神社」가 현존하고 있는 것에 있다.
이 神社의 유래는、「中臣鎌子」와 中大兄皇子가「入鹿」살해의 밀담을 했던 것으로부터、「談山」이란 이름이 붙혀졌다는 것이다.

敏達이 죽고 난후의 百済정권은、倭国정권의 脅威로부터 벗어나듯이, 多武峯에 배수의 진을 칠려는 것이지만, 대략 여기에서、倭国정권이 흐트러지는 틈을 엿볼수 있을 것이다.


단지、단순히 籠城하고 있는 것만이라면, 언젠가는 물자도 떨어져버린다. 따라서 密通, 内通의 유례는 당연 있었을 것이고、百済政権을 第一정권으로 하여 租税를 바치는 豪族도 있었을 것이다. 마아 이것은 百済정권이 主流였을때의、倭国政権에 대해서도 말할수 있는 것이지만...

 

혹시 당신이 이 상황에서 정권탈환의 목적을 가지고 倭国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압도적인 무력차이가 있다면, 一気에 싸움을 벌리는 것도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武力은 압도적으로 倭国 정권 우위였다. 百済정권측이 이기고 있다면, 정권교체는 없었을 것이다.


나라면, 内通・ 密通者를 이용하여,

大王에게는 참모격의 호족이、百済정권과 内通하고 있는듯하다고 거짓 정보를 전하고,

그 참모격에는 百済政権과 内通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大王이 의심하고 있는듯하다고 역시 거짓정보를 전한다.
말하자면、 정보착란에 의한 게릴라전이다. 이 내통자는、倭国政権의 측근이라면 일수록 더 좋다.
이것에 의하여 両者間의 신용은 실추하고、예를들면, 百済정권으로부터 초래된「よろしく」등이라고 말하는 伝聞이 기폭제가 되어、정권붕괴의 방아쇠가 되어가는 것이다.


多武峯에 숨은 百済정권이 택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가 최종적으로、「乙巳의 変」에 연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乙巳의 変」에 대해서는、일단 놓아두고, 『日本書紀』에 의하면, 舒明과「聖徳太子」에는 、1世代의 차이가 있지만, 나는 이 두사람을 二朝 併立에 의한 同年代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推古天皇 13年、「聖徳太子」는 斑鳩里로 宮을 만들어 옮겨 살고 있다.
이때의 首都는「飛鳥」임에도 불구하고, 聖徳太子는 왜 「斑鳩」에 옮겨 살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一説에는、이상주의자였던「太子」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계로부터 소외되어、 실각했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이러한 정보전에 의하여、실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聖徳太子」는 斑鳩里로부터 정치의 중추였던 「飛鳥」까지、하늘을 날아갔다고 하는 伝説도 있지만, 거꾸로 말하면, 당시의 감각으로는、하늘을 날지 않으면 통할수 없을정도로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가령 당시의 사람들이、이 전설을 믿고 있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때는, 「太子」는 이미 인간이 아니고、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되는 유일한 존재, 그것은 이미 霊魂였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죽어서라도 정치의 중추「飛鳥」에로 가려고 하는「聖徳太子」의 비극성은 그렇다치고, 7世紀 초엽의 역사적 사실로 극히 중요한 것은、中国 그 당시는 「隋」이지만、「隋」와의 사이에 처음으로  国交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 발단은、「倭国」보다「隋」의 「耀帝」(요우다이)에게 보내졌던 다음의 国書에 의한 것이었다.

   「해 뜨는 곳의 天子가、書를 해지는 곳의 天子에게 보낸다. 무탈한가云云」


 『隋書倭国伝』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一文이다. 이 国書는 大業3年(推古15年、607)에 보내진 것으로서、이때의 使者는、이것 또한 유명한 「小野妹子」이다.

  「帝는 이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고・・」


라고 계속되는 것이 당연하고, 다음해 「裴清」(『日本書紀』에서는 「裴世清」)을「倭国」에 보내고 있지만,  이것은 東海의 孤島「倭国」이 의기양양한 것을 수상히여겨 조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日本書紀』에 따르면  推古의 代이지만、실제로는 「物部鎌姫大刀自連公」大王、「聖徳太子」섭정시대이다. 따라서 그 記述은 欺瞞에 차있다.
먼저「隋」를「唐」으로 한 위에、「裴世清」가 지참했던 国書는、

   「大門앞의 책상위」

에 두어, 使者「裴世清」을 초대한 儀式은 종료했다고 한다.


흥미깊은 것은、「大門」으로쓰고「미카도」라고 읽는 것이다.
『日本書紀』의 記述에 의하면, 「裴世清」은 이때 「倭国」의 天皇을 만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일부러 大国「隋」로부터 国書를 가지고 방문했던 使者에 대하여、天皇이 면회조차 하지 않은 것은 도저히 생각할수 없다.

실은、이때의 모습을 『隋書倭国伝』은 극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王(倭王)은 清(裴清)과 서로 보고、대단히 기뻐하기에
『나는 바다 서쪽에 大隋 礼儀의 国가 있다고 듣고 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
나는 夷人、바다 구석에 편재하여、礼儀를 듣지 못한다. 거기에서 境内에 머물러、
바로 서로 보지 못했다. 지금、일부러 새삼스럽게 도로를 깨끗하게하고、館을 장식하여、
大使를 기다리고 있다. 바라건대 大国 惟新의 化를 듣지 않은 것을』이라고。


清가 대답하고 있는 것은、
『皇帝는 徳은 二儀(하늘과 땅)에 비기고、沢(습지)는 四海로 흘러간다.
王은、化를 사모하는 까닭으로、行人을 보내고 오게하여、여기에 宣諭하는 것이다」라고.

그러는 동안에、清을 끌어서 館에 자리에 들게했다. 그후、清은 사람을 보내어、그 王에게
말하는 것은『朝命은 이미 도달했다. 바로 칠을 다시 하도록 원한다』라고.
거기서、宴享을 마련하여 清을 보내어、또 使者로하여 清에 뒤따라와서 方物을 바치게했다.
이후、드디어 끊겼다」


이렇게「裴清」은 王(天皇)과 만나고、서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이 사실을『日本書紀』는、「大門」이라고 하는 애매한 형태로밖에 기술할수 없었다는 것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이 때의 天皇은 推古였지만、「裴清」이 만났던 인물이 남성이었던 이상, 王이라고는「聖徳太子」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王이「馬子」였을 가능성도 부정하지 않지만, 『日本書紀』가 「聖徳太子」를 섭정이라고 하고 있기때문에여기는 「聖徳太子」를 들고싶다.  대략、「馬子」는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쪽이라고 해도、이 偉業은 倭国정권이 썼던 시나리오이며,「蘇我氏」의 偉業이었던 것이다.

『隋書倭国伝』에 극명하게 記述되어 있는 이상、적대정권의 偉業이라고 말해、万世一系의 天皇家를 주장하는 『日本書紀』는 무시할수가 없었을 것이다.


본래라면 말살해버리고 말았을 사실이면서, 記録을 남긴 까닭이다. 애매하게 한 것도 당연한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隋」와「唐」을 誤記했던 것도 단순한 誤記가 아니다.「唐」의 시대는 百済政権이 부활했던 皇極・天智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隋」와 국교수립을 성공시켰던 倭国정권이었지만, 이 직후 前代未聞의 행동이 나오고 있다.
어떻게、「百済」의 숙적 「新羅」도 국교를 수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推古17年秋7月의 条로부터 시작하는 일련의 外交記事에 의하면、「新羅」와 「任那」의 使者가 「倭国」을 방문하여、使者들을 朝廷을 들어 대접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記事는、「裴世清」의 때와 손색이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任那」은 이미「新羅」가 점령할려고 하는 참이었으므로、「新羅」外交였다는 것이 된다.
 
多武峯에 은둔하고 있던 百済정권이、本国「百済」라는 뒷방패를 가지고, 대략 九州를 억누르고 있는 것에 대하여, 第一정권이라고 하는、倭国정권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정권을 유지할수 있는 이유가 없다.

「隋」와의 国交수립은 그 때문이었고、또한 「百済」를 억누르기 위하여서는、「新羅」와 손잡는 것이 일상이었다.

「蘇我氏」는 확실히 武寧王系의 백제왕족이었지만, 「百済」본국이 다른 계통의 파벌로서  자리잡고 있는이상、「倭国」에서 倭国人으로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기기 위하여 일찌기의 숙적「新羅」와 손잡은 것은 차라리 당연한 것일런지 모른다.


5.上宮 王家  멸망사건


通説에 의하면、「聖徳太子」는 점차로「蘇我氏」의 횡포에 의문을 품게되어、「蘇我氏」와 天皇家와의 사이에 끼게 된 끝에, 斑鳩里에로 은둔했다고 말한다.(『日本書紀』에 의하면, 太子는 天皇家의 피를 잇고 있다)

또한、그 땅에서 비명의 죽음을 당한 「太子」의 의지는、子인「山背大兄王」(야마시로노 오오에노미코)에게 引継되어、「蘇我入鹿」과 반목했던 「山背大兄王」은、一族 모두가「入鹿」의 수하병졸에게 죽게 되었던 같다.


그렇지만, 「蘇我入鹿」=「聖徳太子」이란 것을、이미 알고 있는 여러분들에게는 이 説話가 꾸며낸 것 정도는、금방 알았을 것이다.

더구나、「聖徳太子」와「山背大兄王」과의 親子関係를 의심하는、文献도 존재하고 있다.
   
「後의 人、父인 聖王과 서로 濫るといふは、그렇지않다」


이것은『上宮聖徳法王帝説』가운데 있는 記述이지만、후세의 사람들이 太子와「山背大兄王」이 親子가 아니라고  소문내는 것은 좋지않다고 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당시로부터 親子관계를 부정하는 소문이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부터 이러한 소문이 만연해 있었기때문에 사람들은 『日本書紀』의 거짓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両者가 親子가 아니라고 한다면, 「山背大兄王」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감추어진 十字架』의 저자인 梅原猛氏는、法隆寺를 「太子」의 霊을 위로하는 鎮魂의 寺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上宮 王家 멸망사건、즉「山背大兄王」憤死의 진실은、「藤原氏」의 黒幕에 의한 사건이었다고도 하고 있지만、「法隆寺」에는 직접의 피해자인「山背大兄王」은、왜인지 제사를 지내고 있지 않을뿐만 아니라、「山背大兄王」의 墓는、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결국、「山背大兄王」은『日本書紀』가 창조했던 인물이며、実在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가령 実在했다고 해도、百済정권의 舒明과 倭国정권의 摂政・「聖徳太子」는、동시기 併立의 존재였다고 생각되고 있기때문에、『日本書紀』가 말하는「田村皇子」(즉위하여 舒明天皇)와、太子의 子「山背大兄王」의 皇位다툼은 있을리가 없다.

또「山背大兄王」은「太子」의 子、결국 飛鳥의 聖者의 子와 같이 記述되어 있다.


「자신이 혹시 軍을 일어켜서 入鹿을 토벌하면, 이기는 것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내자신 一身을 위하여、人民을 死傷시키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몸 하나를 入鹿에게 주겠다」

上記는「入鹿」에게 急襲당한「山背大兄王」이 、자결하기 직전의 말인것 같다.
진정한 聖者의 子는 聖者라고 云해지는 말이다.

「入鹿」은 그러한 聖者를、자결로 몰아간 장본인으로 하고 있다. 결국, 「入鹿」에게 聖者살해의 오명을 입히기위해서만이、「山背大兄王」가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되어 지는 것이다.


天皇家를 능멸하는 「蘇我入鹿」、더구나 聖者살인을 하고 있다.
이것은、暗殺당하기에 충분한 이상의 이유가 되지 않는가?

『日本書紀』가 聖者라고 위치를 매긴 「山背大兄王」이지만、실은、그를 깔보고 있는 記述도 있다.

『舒明紀』에「山背大兄王」의 말로서、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소문을 듣고 叔父님은、田村皇子를 天皇으로 할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만、나는 이것을 듣고、서서 생각해보고、앉아서 생각해봐도、아직 그 이유를 모릅니다. 제발 확실히 叔父님의 생각을 알려주세요」


 이 叔父라고 하는 것이「蘇我蝦夷」이다. 이것에 의하면, 「山背大兄王」은 「蝦夷」大臣의 威勢를 빌려서、天皇이 되고 싶다는 욕구에 차있다.  앞에서의 말과 비교하면, 이것이 동일인물의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모순되고 있는 것에 알아챘을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고、『日本書紀』는 聖徳太子 일족을 깔보고  있는 표현을 몇번에 걸쳐 記述하고 있다.

예를들면、「太子」의 측근중의 측근이라고 말하고 있는 「小野妹子」는、遣隋使라고 하는 사명을 대성공으로 마치고 있다.「妹子」는 大徳冠라고 하는 冠位 12階의 최고위라는 것이、『続日本紀』和銅 7年 4月 15日에 기록되어 있다.


「夏4月15日 中納言・従三位兼中務喞・勲三等의 小野朝毛野가 죽었다.
 毛野는 小治田朝의 大徳冠・小野妹子의 孫으로서、小錦野毛人의 子이다」

그러나、『日本書紀』는 그것에 대하여、일체 언급하지 않을뿐만 아니라、「小野妹子」가「随」로부터 国書를 도둑맞았다고 하는 오명을 씌우고 있다.  국서는「裴世清」가 지참하여「大門」에 전하고 있으므로、「妹子」가 가지고 있을리가 없다.


聖徳太子에 대해서 말하면、敏達7年3月5日의 条에

「莵道皇女를 伊勢神宮으로 모셨다。그러나 池辺皇子에게 범하게 된적이 있어、 드러나게 되었기때문에 임무를 풀렸다。」이다.

이대로는「太子」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아보이지만, 이 皇女가 「太子」의 妃로 되어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池辺皇子」는、이외에는『日本書紀』에 등장하지 않지만, 어쨋건 그럭저럭 用明天皇인 것같다.  결국、「太子」는 、父에게 犯해진 皇女를 妃로 맞이했다고 하는 것이 된다.
 
더욱더、『日本書紀』는「莵道皇女」의 본성조차 애매하게 하고 있지만..

「莵道皇女」는 「莵道貝蛸皇女」라고 하며, 또다른 이름은 「莵道磯津貝皇女」라고 한다.
그녀는 推古와 敏達의 사이에서 난 皇女이지만、同姓同名의 皇女가 「息長真手王」의 娘「広姫」와、敏達와의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 이름이 虚名이라는 것으로부터、이 皇女의 実在性도 의심된다.


이와같이 『日本書紀』가 聖徳太子 일족을、어떻게 聖者로 記述하고 있으면서도, 자세하게 읽으면,  聖者가 아닌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저절로 판명되는 것이다.

親子関係를 의심하는 소문에 대해서 말하자면, 실은 『日本書紀』에서조차 「山背大兄王」은  聖徳太子의 子라고、직접 언급하고 있는 記述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에게 親子라고 알려진 이유는、「山背大兄王」이 斑鳩宮에 있었던 것,  上宮의 王으로 불려진 것, 「蘇我氏」를 叔父라고 부르고 있는 것등에 유래하지만, 단지 이것뿐만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 보면、「山背大兄王」도『日本書紀』에 의하여 造作된 인물상이라고 말할수 있고, 과연 実在했는지 의심스럽다.

実在했다고 해도、『日本書紀』의 記述을 정확하게 읽으면、단순히 天皇家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 된다.

上宮 王家 멸망사건등은 없었지 않았을까?

『日本書紀』는、上宮王家를 전원 자결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後世 1명 정도는上宮王家를 祖라고、자칭하는 인물이 있어도 좋아보이는 것이다.


上宮王家가 聖徳太子 일족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생각되는 것이 왜 존재하지 않는가?.
『神代紀』의 神을 祖로하는 일족은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인가?
 

 聖徳太子 일족이라고 하는 것은、바로『日本書紀』가 말하는「蘇我氏」3代(私見에 의하면「馬子」「入鹿」의 2代이지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蘇我氏」를 악한으로 하여 捏造당한 人物像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実体가 「蘇我氏」인 이상、아무리 聖者였다고 역설해도、悪意가 보일락 말락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日本書紀』가「山背大兄王」을、「太子」의 子로서 등장시켰던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乙巳의 変」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대의명분 이외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말하면、「乙巳의 変」에 정당성등은 없었던 것이다.


6.蘇我氏라는 것은,


「蘇我氏」의 경우、『日本書紀』에서는「蘇我」이지만、다른 문헌에서는「宗我」라고 쓴 예가 적지않다. 「蘇我」는 『日本書紀』가 채용했던 차자(借字)이며 일반적으로는「宗我」라고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日本書紀』에서는、「蘇我馬子」나「蘇我入鹿」이라고 쓰여있기때문에、「蘇我」가 현재에서 말하는 名字와 같이 생각되고 말지만, 「蘇我」에는 더욱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단순한 名字라면、現在에도「蘇我」를 이름붙인 일족이 많이 있어도 不思議한 것이 아니지만,웬지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

 단지、단 하나의 예외를 빼곤 하지만,

大阪府 南河内郡 太子町에 「叡福寺」가 현존하고 있지만, 이 寺의 옆에 西方院이라고 하는 尼寺가 있다는 것을 前述하였다.

여기에서 住職이 대대로 「蘇我」姓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太子町의 지명의 유래는 물론 「聖徳太子」로부터이며, 「叡福寺」는「太子」가 잠든 御廟인 것이다.
 

 그런데、그 西方院의 전승에 의하면, 聖徳太子가 죽은후、「蘇我馬子」의 娘・「善信」、「小野妹子」의 娘・「禅蔵」、「物部守屋」의 娘・「恵善」등이 出家하여、太子의 御廟의 앞에一宇를 건립한 것이 시작인 것 같다.

前述했던 関裕二氏는、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검증하고 있다.

「通説에서는 太子와 대립하고 있다고 하는 蘇我馬子의 娘과、지금까지 분명히 太子와 적대하고 있었던 物部守屋의 娘이 太子의 墓를 지키기 위하여 出家했던 것은、太子의 정체와 叡福寺의 존재의의를 아는 위에、귀중한 증언이 되었다.
   (『聖徳太子는 누구에게 살해되었는가』「学研」刊)」


그러면「蘇我」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은 이것도 関裕二氏가 대답을 준비해주고 있다.

「또 『風土記』는、이 “須賀”를“須我”라고 쓰고、혹은“宗我”라고 쓴다.
 
문제는 이 “宗我”이다・・・・<中略>・・・・또 出雲大社의 本殿真 뒤의 摂社는 素鵞社(소가샤)라고 칭하여 、수사노오를 제사지내고 있다. 또한,『粟我大明神元記』에는、出雲의 簸川의 川上에서 수사노오와  구시이나다姫와의 사이에 생긴 子가 、『蘇我能由夜麻奴斯弥那佐牟留比古夜斯麻斯奴』(소가노 유야마누 시미나사무루 히코야시마시누)였던 것 같다.
요컨대、수사노오의 최초의 宮 “須賀”와 연고가 깊은 일족 “蘇我”는、극히 出雲的인 一族이었던 것이 된다」(『抹殺된 古代日本史의 謎』「日本文芸社」刊)


즉 그는 出雲王朝를 縄文人国家、수사노오를 縄文人으로 하고 있기때문에, 「蘇我氏」는 「倭国」토착의 씨족이었다는 것이 되지만, 어디까지나 私見에 의한 「蘇我氏」는、「百済」武寧王系의 일족이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蘇我氏」가 수사노오와 연고가 깊은  씨족이라고 한다면, 武寧王이나 그 父인 昆支王도 마찬가지로、수사노오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된다.

수사노오族은「伽耶」로부터온 渡来集団이었다.

확실히「百済」자체는 扶余의 망명귀족들이、「馬韓」왕권을 뺏아서 건국했던 나라이다.

그러나 「武寧王」의 출생 秘話나、「武寧王」이 「大和」에 居座했던 「市辺押磐皇子」系의 残党(실제로는 이쪽이 本流일런지 모르지만)보다도,「河内」에 宮을 세웠던 継体朝와 손잡았던 것、혹은 「쿠다라」(본래 고대 일본어에는 濁音은 없었을 것이다)로 발음할수 없는 「百済」를、왜「쿠다라」라고 발음했는가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본 경우、「武寧王」은 扶余系가 아니고、수사노오의 「統一奴国」이며、그것이 倭国大乱후에 분열했던 「邪馬台国」연합의 숙적、「旧奴国」(「狗奴国」으로서「쿠나라」로 발음했을 것이다.「나」와「다」는 용이하게 音韻変化하기 때문에、「쿠나라」는「쿠다라」로 된다.)의 왕족의 피를 이은자 였을런지도 모른다고 하는, 이미지네이션을  부풀어오르게 하고 말았다.


일본의 역사에는 반드시 큰 2개의 潮流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때때로 모습을 바꿀때에는  충돌하고、어떤때는 동맹하면서 오늘까지 면면히 계속되고 있다.

通説・定説로 하고 있는 역사의 가운데에도、「邪馬台国」과「狗奴国」、「出雲」과「大和」、「吉備」와「大和」、「磐井」과「継体」、「蘇我氏」와「天皇家」、「天智」와「天武」、「平城」과「嵯峨」、「源氏」와「平家」、「足利」와「北条」、「南朝」와「北朝」、  근세에 있어서도 전국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豊臣」과「徳川」、「幕府」와「薩長」등
열거하자면 긑이 없다.
 혹은 戦前의「天皇」과「軍部」도、그 예에 넣을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역사는 반복된다」

 

이 말을 믿지않는 사람들에게는 일소에 부칠 내용이며 단순히 우연히 포착된 것을 승낙하고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壬申의 乱」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의 배경에는、覇王・수사노오를 祖로하는(血縁에 한정되지 않는다)「蘇我氏」로부터 天武天皇에 연결되는 本流와、天智天皇에연결되는「倭国」의 亜流(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이쪽이 本流가 될것이지만)와의 패권다툼이 언제나、根底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뿌리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 白村江의 전투  (0) 2018.06.12
11. 2대세력 항쟁의 행방  (0) 2018.06.09
9. 原始国家로부터 専制国家에로 (1)   (0) 2018.05.12
8. 歴史時代 (継体天皇)  (0) 2018.05.08
7. 謎의 4世紀  (0) 2018.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