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6. 崇神系 王朝와 応神系 王朝

청 설모 2018. 5. 5. 13:50

崇神系 王朝와 応神系 王朝                                                                      http://www2.plala.or.jp/cygnus/k5.html


1.開拓者로서의 尾張氏

大和를 떠나 丹波地方에 도착하여、丹後王朝(로 생각되어지는)의 선구가 되었던「尾張氏」도、同族인 히코이마스오우가、原大和朝廷과 同盟을 맺음으로써、丹波地方을 떠나게 되였다.


대략、二派로 갈라져、한편은 新潟에、또 다른 한편은「近江・美濃」를 지나「尾張」로 향했던 것으로 상상된다.

尾張地方으로 향했던 「尾張氏」는、그곳이야말로「尾張」의 本宗家가 되었지만,
新潟로 향했던 별동대는、弥彦山을 聖地로 받들어、이 지방의 개척의 선구자로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新潟県 西蒲原群 弥彦村에 있는 「越後」의 一宮・彌彦神社의 伝承으로부터 추측된다.


海路를 통해 왔던 아메노카구야마는, 이 땅에 상륙하여,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자, 싹이트고 뿌리를 벋어내려 거목이 되었다고 하므로 일본해의 巨木文化와 깊은 관계를 엿볼수 있다.
그렇게 말하면, 長野의 諏訪大社의 御柱祭도 巨木이다. 祭神은、다케미나카다이지만, 出雲神인 이세시히코와 동일신이라는 것은 前述한대로이다.
이 지방의 安曇族도 海人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水上交通이 노련한 海人들은, 巨木을 다루는  솜씨도 익숙했을 것이다. 현재에도 貯木場은 運河이다.

또다른 同族으로는 海人族의 용맹을 증명하는 「大海」혹은「凡海」(오오아마)라고 칭하거나, 「五百木」・「伊福」(이호키도)라 불리는 씨족도 있다


 또、「尾張氏」를 시작으로하는 海人族들이  정주했던 지역이, 海部이며, 「海部氏」라고 호칭했던 것도 용이하게 알수있다. 住吉大社의 宮司家에 있었던「津守氏」도、「尾張氏」와 동족이었지만, 바로 항구의 등대수란 이름의 칭호인 것이다.


尾張地方을 왜 「尾張」라고 했느냐하는 것에 대해,
『熱田国風土記逸文』에、야마다노오로치의 꼬리를 짤랐던 剣이 『草薙剣』이었으므로、尾張의 어원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하지만, 억지로 끼워맟춘것 같다.
또 尾張地方은、大和朝廷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東国地域、 大和로부터 보자면, 鈴鹿山脈이라고 하는 천연요새를 넘지않으면 도착할수 없는 끝지역(終わり)이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이 주장도 사견으로는「葛城」의 高尾張邑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된다.


前述했던 歴史言語学者・加治木義博氏는 『謎의 天存降臨과 大和朝廷의 秘密』에서.「尾張」의 명칭에 대해서、 흥미로운 설을 전개하고 있다.
「尾張」의 발음은 원래 오와리가 아닌 오와이로서는 『憂婆畏 우바이』라고하는 여성불교국의 지배자를 가리키는  대명사 였다고 한다. 즉 尾張가 倭国女王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尾張」는 尾張地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大阪市에 있었던 「安宿郡」을 구성하던 3개의 村、「賀美」(가미)・「尾張」・「資母」(시모)중의 「尾張」라고 한다(10세기「源順」이란 사람이 쓴『倭名類聚鈔』에서)

「憂婆畏」는 「우바이」라고 발음하는 것 같고,「尾張」는「憂婆畏」가 변한 발음이며,「賀美 가미」=上, 「資母 시모」=下인것 같다.「憂婆畏」가 여성불교국과 그 지배자를 가리키는 의미라면, 여왕 히미코가 다스리던 「邪馬台国」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旧唐書日本国伝』에「日本은 旧小国, 倭国의 地을 병합했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日本이 倭의 땅을 통일하기 전에는 「日本国」과 「倭国」이 並立하고 있었다.  私見에는「倭国」이라고 하는 것은、「奴国」의 将来이다.

「女王・히미코의 鬼道라고 하는 것은 原始仏教이며、아메노카야마가 히미코의 측근(『魏志倭人伝』에서 말하는 男弟)이었다면、女王国의 支配者層이다. 거기서 아메노카야마 일족은 「憂婆畏」, 즉「尾張」로 호칭하고 정주지는 「尾張国」으로 했다.
仏教는 原始仏教였지만、현대에서 말하는 仏教나、欽明天皇 시대에 「百済」로부터 전래된 「蘇我氏」가 가녀온 불교와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하면, 尾張氏」는 처음부터 「尾張」란 명칭을 썼고, 葛城의 高尾張邑의 語源도 설명이 되지만,  別姓同族의 설명이 안된다.
그것은 지금까지의「尾張氏」라고 하는 단일씨족으로 생각해왔지만, 혈연으로 결합된 씨족이 아니고, 「尾張氏」나 「津守氏」・「五百木氏」등、호아카리를 神祖으로하는 복수의 海人族의 씨족집단이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호아카리도、神호아카리이면서 人間 미케히코였던 것이다.


그리고  「尾張氏」는「邪馬台国」시대부터、「尾張」란 이름으로 불려졌지만,「尾張氏」가 최종적으로 정주했던 곳이 우연히 、大和로부터 볼때는 끝(終わり)이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던 것이 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동음이 아니고, 大和측으로 볼때 멸시하는 칭호였을 것이다

 

  「尾張(오와리) 놈들이、끝(오와리)땅으로 도망쳤다」고하며 비웃었다

「尾張氏」는、尾張地方에 정주했지만, 소위 말하는 호아카리족은、「尾張」로부터 伊勢湾을 건너서 伊勢地方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2.縄文人과「尾張氏」

實은 해상교통을 생각할 경우, 「尾張」보다도「伊勢」쪽이 보다 편리하고 東国経営도 꾀하기 용이하다. 大和朝廷이 성립하기 전에 伊勢神宮에서는 「瀧祭神」을 모시고 있었지만,  그후 바뀌었다. 瀧祭神은 호아카리이다.

海人들에게는 바다가  육로보다 몇배나 많은 물자를 신속하게 이동시킬수가 있다.
尾張氏系 호아카리족은、 東国経営을 통해 국력의 충실을 기했을 것이다.
후일 大和朝廷이 東国支配를 하기 위해「伊勢」로 눈을 돌린것도 당연한 일이다.
훗날 강력한 九鬼水軍도 이 지방에 있었다.

「尾張氏」가 政庁을 둔 곳은 물론 尾張地方이었는데 이 땅이 「愛智郡」(아이찌고오리)라고 불린다.
 
大和朝廷의 古代의 関所에 「三関」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岐阜県 不破郡 関町 부근 (不破의 関)
・福井県 敦賀市 南部의 旧愛発村 부근 (愛発의 関)
・三重県 鈴鹿市 関町 부근이다.
謀反人이 東国으로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고, 東国에 사자를 보내 東国의 거병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하지만, 1974년 발굴결과 不破의 関은 畿内를 향해 설치된 것을 확인하였다. 西国으로부터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尾張族이 설치했던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愛発」라는 지명 - “아찌라”라고 발음한다.
滋賀県에는「愛知川」・「愛知郡」이 존재하고, 여기는 “에찌”라고 발음한다.
대략、「아이찌」・「아찌」・「에찌」는、同音韻이라고 생각된다. 越의 国도 越前・越後라고 쓰면, 「에찌」라고 발음한다.「에찌」・「고시」라고 불리는 지방에는 「越」의 문자가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대략、「越」이라고 하는 것은、高句麗族이 살았던 땅이었으므로 붙혀진 지명이지만, 이 지방을 「에찌」라고 부른 민족이 후일에 이주해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越後」의 한 宮이었던「彌彦神社」에、主祭神으로서 아메노카야마가 제사지내고 있고, 또한 개척자라는 유래가 있으므로「越国」에 이주해온 것은、「尾張氏」임에 틀림없다.


「越」이란 문자를 사전에서 조사하면, 「건너다」라던가「경과하다」등의 의미로 쓰인다.
이것을 「고시」라고 발음하면 高句麗族이 건너와 살았던 의미를 가지고,
「에찌」라고 발음하면「尾張氏」가 옮겨와 살던 땅이라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어느것이건 후세에서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함께 「越」의 文字가 해당된다.
 
「尾張氏가 이동하기 시작한 최초의 땅이、「愛発」(아찌라)이며, 移住先을「越」(에찌)・「愛知」(아찌)・「愛智」(아이찌)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본래 同音韻이었지만, 시간이 경과하여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尾張氏」는、각 移住先에서 토착 호족들과 혈연관계를 맺으면서 후일의 継体王朝의 기초를 놓아갔던 것이다.
또한、濃尾平野로부터、바다를 건너「伊勢」로 옮겨와, 先住하던「磯部氏」와 결합한 씨족이「度会氏」였다. 이 지방에도 「邪馬台国」과 같은 시기에 그 이전부터 호아카리족이나 수사노오족에 의한 선진문명을 가져왔던 것이다. 尾張氏系 호아카리族은、伊勢湾을 건너 伊勢地方에서、同族과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度会라는 것은、「건너오다」혹은、「건너서 만나다」라는문자에 해당된다고 생각된다.
「渡会氏」와「磯部氏」의 관계는『続日本紀』에 따르면、元明天皇의 和銅四年(711)三月六日에

  「伊勢国의 人、磯部祖父・高志의 二人에게 渡相神主의 姓을 내렸다」 에서 증명된다.

高志는 「고시」이며、「에찌」이므로、「伊勢」도 尾張氏系「호아카리族」의 移住의 땅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생각된다.
  
長野県 上伊那郡 辰野町에 있는、矢彦神社에도 다케미나카다 伝承이 남아있다.
主祭神은、다케미나카다이지만, 같이 아마노카구야마가 제사지내고 있다.
또한 神社名이 矢彦神社로서 「矢彦」은「彌彦」이므로 神社 伝承学的으로 말하면
다케미나카다=  아마노카구야마이다.


 長野県 松本市의 北쪽에 위치하는 安曇郡은、安曇族에서 유래하는 지명으로、南安曇郡 穂高町에 있는 穂高神社에는、

   「『安曇族』은 海神系의 종족으로서 北九州에 번성하고、大陸과도 교섭하는 문화높은 씨족이며, 四国・中国・近畿・中部로 이동하여, 信濃国의 땅에  안주하여、安曇을 開拓、벼농사文化를 보급시켰다」

이 神社의 祭神은「穂高見命」이지만、穂高町는 좁고 긴 호수였던 것을 다케미나카다가 간척하여、水田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므로、「穂高見命」은 다케미나카다의 別名일 것이고, 각각의 땅에서 개척자로서 제사지내게 되었다.


 「安曇族」의 祖는 「海神」이지만、같은 祖를 가진 씨족에 「凡海連」이 있다.「凡海」라고 하는 것은「大海」(오오아마)이지만、『新撰姓氏録』에는「凡海連」을 호아카리의 末裔라고 하고 있다.「安曇」族도「尾張氏」과 동족으로서 호아카리族인 것이다.
穂高神社의 伝承은、바로 호아카리족의 移動의 역사라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中部・北陸은「尾張氏」와 그 관계씨족에게 점령당하고 있은 것이 되어
「三関」을 사이에 두고、東西二国으로 나뉘어진  様相이었다.
 
『尾張国熱田太神宮縁起』는、「尾張氏」가「尾張国」에 정주했다는 것은 崇神天皇의 시대로서、「乎止与命」(오토요노미코도、以下 오토요)가「尾張国」의 初代国造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国造制度는 훨씬 더 후세에 있었으므로 이 시대에는 있었을리가 없다. 이 경우에는 「一国王」이며、『日本書紀』편찬때에 崇神天皇 시대때부터、중앙집권국가가 성립했던 것 처럼 보일려고 捏造시킨 것이다.


이 시대보다 이전의 일본열도의 인구분포는、西低東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西로부터 일어났던 稲作文明의 東進에 따라、급속히 평균화되어 갔다. 이때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엽이며 大和에 前方後円墳이 출현하는 것과 거의 동시기이다. 稲作文明은、조직력을 한층 강화하고, 개간을 위하여 철기는 무기로 변화하고 있다. 貧富의 격차도 생긴 시기였고 그 정점에 위치한 것이 天皇家였었다.

 縄文人은 아직 수렵채취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하여 中部・北陸地方은 급속히 弥生化해 갔지만, 尾張地方보다 더욱 東国쪽은 、아직 縄文文化圏인채로 있었다. 이렇게하여、東国의 稲作전파는、문명의 진행상으로 보아 늦어진 것이 아니고、弥生文化의 진입 자체가 없었기때문에 전해지지 않았다라고 생각한다.

濃尾平野에 정주하게 된「尾張氏」・오토요는、대략 토착의 縄文人의 족장인「尾張大印岐」(『先代旧事本紀』尾張氏의 系図에 의해、오와리오오이키)의 딸、「真敷刀俾」(마시키도베)를 妃로 맞고 있다.

「尾張氏」와 縄文人의 결합이、大和朝廷으로서는 크나큰 위협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日本書紀』가、「蝦夷」라고 記述하는 것은、바로 그들이 아니었을까?

또한、前方後方墳는 東日本에 많고、특히 東海地方에 많다.「尾張氏」가、旧奴国王・미케히코의 한 갈래를 이루는 일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尾張氏가、東日本 경영을 시야에 넣고 尾張地方에 정주했던 것은、前方後方墳의 지역분포로부터 용이하게 예상할수 있고, 東国・縄文人의 족장들과 손을 잡고 세력을 키워 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畿内세력의 진입을 거부하기 위하여 三関을 설치하고、関ヶ原 以東에 大和朝廷에 속하지 않는、「尾張王朝」를 형성해 갔던 것이 아닐까?   大和朝廷에는 그 이전에는 배조차도 없었다. 정말로 粗末한 朝廷이었다.


3.日本列島의 세력분포와 朝鮮半島

 垂仁天皇이 활약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4세기 초엽의 세력분포를 정리해보자,
 
먼저、原大和朝廷인 「新奴国」、이당시는「出雲」과 「丹波・丹後・但馬」의 三丹과「近江」를 포함한 지방, 그리고「吉備」도「新奴国」의 협력국이었기때문에 군사, 정치적으로 총괄하여 一国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越・尾張・諏訪・伊勢」등「三関」以東의 「호아카리族 連合国」이 있고, 그보다 더 동쪽에는、関東・東北・北海道등에도 각각의 지방에 왕국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九州에는、「旧奴国」이 건재하고 있었다.  四国에도 族長클래스가 이끌던 王国 비슷한 것이 당연히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政治圏的으로는、九州、 本州 西日本、 中部・北陸、 関東以東으로 크게 4개로 나누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朝鮮半島에서는、313年부터 다음해에 걸쳐、中国(西晋)의 出先機関이었던 帯方群과  楽浪郡이 「高句麗」에게 멸망되고, 中国은 316年에 五胡一六国의 시대로 들어간다. 곧바로 「西晋」은 멸망하게 되어, 中国의 국력 저하를 기화로、朝鮮半島 남부의「馬韓」・「辰韓」・「弁韓」은 각각、「百済」・「新羅」・「伽耶」로서 독립해 간다.

「伽耶」는『日本書紀』에서「任那」라고 기록되어 있는 나라이다.「六伽耶国」이라고도 불리우고、小国家 연합체 였던 것 같지만 562年에 신라에게 흡수되고 말았다.

「百済」는、「馬韓」의 왕권을 「扶余」의 망명귀족이 뺏아서 건국한 나라인 것은 앞에서 설명했지만, 실은 고구려도 부여족이 건국한 국가였다.


余談이지만、第二部에서、수사노오의 출신지를「伽耶」라고 주장했는데, 『日本書紀』를 편찬할 당시에는 이미 「伽耶」가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에、수사노오가 新羅로부터 왔다고 하는 『日本書紀』의 記述도 견강부회이기는 하지만、반드시 틀렸다고만은 할수없고, 아메노히보코도、『日本書紀』에서는 新羅王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수사노오의 孫에 해당하므로 꼭  틀린 것이라고만 할수도 없게된다.
 
이 시대까지、倭의 땅에 존재하고 있었던 氏族들을、이후에 来訪해 왔던「渡来者」와 구별하기 위하여 굳이、「倭人」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倭人」이라는 것은、이때보다 과거에 朝鮮半島나 남방 해상의 나라로부터 来訪했던 씨족이나, 그 민족과 융합했던 先住氏族、오래 전부터 토착씨족이었던 縄文人등、이 시대까지 일본열도에 살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다.

예를들면, 「尾張氏」의 祖는、南方系의 씨족과 北方 수사노오系 氏族과의 결합했던 것이며, 분명히 「渡来者」이지만、이 시대에 이미 일본열도에 定住하고 있었으므로 「倭人」인 것이다.


이 가운데「伽耶」에 대해서는、그 諸国중에서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일부는「百済」「新羅」와는、용모가 달랐던 것 같다.
예를들면, 「百済」・「伽耶」의 위치에 대하여、『後漢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百済・「그 北은 楽浪과、南은 倭와 접하고, 辰韓은 東에 있다」
   伽耶・「그 南 또한 倭와 접한다」


『三国志』에도 마찬가지로
   百済・「南은 倭와 접한다」
   伽耶・「倭와 境을 겹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後漢書』・『三国志』에 기록되어 있는「百済」・「伽耶」는 각각,「馬韓」・「弁韓」이지만、이러한 4개의 증언으로부터 보면, 中国으로부터 「倭」라고 인식되고 있던 나라가、후일의「百済」・「新羅」・「伽耶」사이에 끼어있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任那」였지 않았을까?  결국、「伽耶」=「任那」가 아니고, 「任那」는「伽耶」가 독립할때、伽耶連邦에 참가했던 一小国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4. 만들어진 神功皇后

이리하여、朝鮮半島의 정세를 비교 검토한 위에、『応神紀』를 보고 싶다.
景行・成務・仲哀의 3천황은、후술하고 싶다.


応神天皇을 말하는 경우、어떻게 하던지간에 応神의 母・神功皇后의 실재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日本書紀』에서는、神功을「邪馬台国」의 히미코에 比定하려고 하고 있다.
神功 39년, 40년, 43년에 『魏志倭人伝』의 一文을 게재하고 있다.

「39년、이 해, 太歳己未-魏志倭人伝에 의하면、明帝의 景初 3년 6월에 倭의 女王이 大夫  難斗米등을 파견하여 帯方郡에 도착하여、洛陽의    天子를、뵙고 싶다며 貢物을 가지고 왔다. 大守 鄧夏는 役人을 붙혀서 洛陽으로 보냈다」

「40년-魏志에, 正始元年、建中校慰 梯携등을 보내어 詔書와 印綬를 가지고、倭国으로 가게했다」

「43년-魏志에, 正始四年、倭王은 또 使者 大夫 伊声者掖耶등, 八人을 보내어 献上品을 바쳤다」


「難升米」가、처음으로 「魏」의 帯方郡에 朝貢한 것은、239年(景初 三年)인데、그것이 神功皇后 39년의 일이었다면, 神功=히미코説은、절대로 성립할수 없다. 왜냐하면, 히미코는 늦어도 248년에는 죽었기 때문이다. 이해는 神功 48년에 해당되지만、神功은 69년에 죽었다고『日本書紀』가 증언하고 있기때문이다.


또한 神功 46년에는、「百済」의「肖古王」이 등장하지만、「肖古王」은、재위기간이166年부터 213年까지、48年間이라고 전하고 있어서、神功 46년에는、죽고 없기때문이다.
더구나、이 年代에는「百済」가 건국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옳은 연대는 언제인가하면, 실은, 『日本書紀』에 그 힌트가 감추어져 있다.

「52年秋 9월 10밀, 久氏등은 千熊長彦을 따라서 왔다. 그리고 、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 및 각종의 重宝를 바쳤다」

지금 石上神宮에 현존하고 있는「七枝刀」가、이때의 것이라고 말하지만、그 銘文을 판독하면、대개 다음과 같다.
「東晋의 泰和 4年(369年)4월 11일에、百済王과 그太子가、倭王을 위하여 鋳造하여 壬申年에 献上한다」

鋳造된 것이 369年이라면、 그 다음의 壬申年은 372年에 해당되고, 『日本書紀』는 七枝刀의 해를 252年으로 하고 있기때문에 、実際와는 120年의 간격이 생기게 된다(2주갑 인상설)

『日本書紀』에서는、120年을 끌어올림으로써 히미코를 神功으로 만들어 낼려고 했으나, 『魏志倭人伝』의 記述과 저촉되지 않도록、捏造하고 있는 것이다.


이 神功이 조작이라는 증거를 『日本書紀』가 남기고 있다.
그것은、前述한 七枝刀가 372年에 献上된 것으로서 이때의 百済王이、「肖古王」이라고『日本書紀』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三国史記』에 따르면、第5代「肖古王」도, 第13代「近肖古王」도,「肖古王」이다.
헷갈리기때문에  第13代를「近肖古王」으로 구별하고 있지만, 2명의「肖古王」은 분명히 조작이다.

「近肖古王」의 재위가 345~375年이므로、『神功紀』는「近肖古王」시대에 해당한다. 또한 第6代와 第14代에「仇首王」이 기록되어 있지만 마찬가지로, 第14代를「近仇首王」으로 부르고 있다.
『神功紀』에서는「肖古王」의 孫으로서「枕流王」을 등장시키고 있지만, 그는「近仇首王」의 자식으로 되어있기때문에、여기에서는 第5代「肖古王」은 해당되지 않게 된다.
 
가령『日本書紀』의 記述대로 七枝刀가 252年에 献上된 것으로 치자.
그렇다고 해도「肖古王」의 시대가 될수가 없다. 이 때의 百済王은「古爾王」이기 때문이다.
神功이 架空인물이라면、『神功紀』에 記述되어있는 朝鮮半島와의 외교관계의 記述까지 모두 부정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神功과 직접 관계도 없는 外交記事까지 捏造해서는、『日本書紀』는 諸外国으로부터 歴史書로서 인정받지도 못할뿐더러、大和朝廷의 신용도 없어지고 말게 된다.
따라서 外交関係의 記述은、신용할 가치가 있는 記録이라고 생각한다.
  
또한「新羅」침공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결코 엉터리가 아니다.
以下는、『三国史記』에 기록되어 있는「倭」의 「新羅」침공의 기록과 그 시대의 왕의 재위연도이다.


   倭의 侵攻記録          三国史記の在位年

   南解王11年*          西暦4~24年
   脱解王17年         西暦57~80年
   祇摩王10~11年      西暦112~134 年
   奈解王13年         西暦196~230 年
   助賁王3~4年        西暦230~247 年
   沾解王3年          西暦247~261 年
   儒礼王4・9・12年*       西暦284~298 年
   訖解王37年         西暦310~356 年
   奈勿王9・38年         西暦356~402 年
    (実聖元年 倭国에 未斯欣을 人質로 보내다)
   実聖王4・6・14年        西暦402~417 年
   訥祇王2・15・24・28年        西暦417~458 年
   慈悲王2・6・19年        西暦458~479 年

   

上記 記録에 관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記述되어 있다.

「南解11年、倭人이 兵船 백여척을 보내, 해변의 民戸를 약탈하다. 六部의 勁兵을 보내어 이것을 막다.」
「儒礼12年春、王、신하에게 말하여、倭人들이 때때로 우리 城邑을 범한다.
百姓이 평안하지 못하다. 나는 百済와 함께、一時에 、바다를 통해 들어가서 저나라를 공격하기를 원한다.」

단,  『三国史記』의 재위연대는 『日本書紀』와 마찬가지로、보다 오래 된 것으로 연대를 끌어올리려고 하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지만,「新羅」의 초대 왕인 「赫居世」(『三国史記』在位年、前57~4年)의 즉위년을、「邪馬台国」이후라고 생각하고 있기때문에 3世紀 후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事実、『三国志・魏志東夷伝・韓条』에는、「邪馬台国」시대의「新羅」에 대하여「辰韓」12개국을 기록한 것뿐이며,「百済」도「馬韓」54개국중 한나라로서만 기록되어 있을뿐이다.

연대를 끌어올린 증거로서 다음의 기록을 게재하고 싶다. 또 이 기록의 原典이야말로、히미코를 모델로하여 神功을 만들어낸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阿達羅 25年夏 5月、倭女王 卑弥呼가 사자를 보내어 来訪했다」

『三国史記』에 따른「阿達羅王」은 第8代 新羅王이며 、재위 年154~184年이지만、실제로는 4세기 중엽 이후의 인물일 것이다.

『三国史記』의 記録에 주목해야 할 것은,
「実聖元年 倭国에 未斯欣을 人質로 보내다」라는 부분이다. 이것에 호응하는 기사가 『神功紀』에 보이기 때문이다.
『神功紀』9年 冬 10月3日의 条에
「新羅王 波沙寝錦은、微叱己知珍干岐(미시고치도리 칸키)를 인질로 하여, 金・銀・彩色・綾・羅・카토리絹을 배에 가득 실어 軍船을 따르게 했다.」

이 부근의 연대는 七枝刀가 献上된 해로부터 보아도 특히 整合性이 있어보여, 「倭国」의「新羅」공략은 史実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倭国」은 당시의 政権勢力、즉 原大和朝廷이 아니다.  応神을 即位시켰던 勢力이라고 생각된다.

『神功紀』는、応神의 출생에 문제가 있었기때문에  捏造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応神天皇을 即位시킨 세력은「尾張」의 勢力이었기 때문이다.


5.応神天皇의 謎

応神의 出生秘話는、『日本書紀』의『神功紀』、『古事記』의『仲哀記』에 기록되어 있다.
『記紀』에 의하면、応神의 父는 仲哀天皇이며、母는 神功이다. 神功에게 신이 내려、新羅를 토벌하라는, 神의 계시를 믿지 않았던 仲哀는、

熊襲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죽고 말았다.


神功은、계시대로「新羅」에 출병하여 승리하였지만, 이 전쟁때 이미 출산월이었으나 허리에 돌을 달아서 약 2개월 출산을 늧추었다고 한다.
그리고、神功은 몸소 斧鉞(오노키사카리)를 손에 들고、戦場의 최전선에 서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소위 말하는 三韓征伐이지만, 실제로 토벌한 것은「新羅」뿐이었고、「百済」・「高麗(高句麗)」는、스스로 항복해왔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神話라고밖에 말할수 없지만, 또한 『応神紀』에는、각주로서 신경쓰이는 一説을 소개하고 있다.

「옛사람들은、활을 쏠때 왼쪽 손목에 대는 가죽을『호무다』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天皇이 처음으로 皇太子로 되었을때、越国에 오셔서、敦賀의 笥飯大神(게히노오오카미)에게 참배를 하게 되었다. 그때 大神과 太子는 서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그것으로 大神을 이름붙혀 去来紗別神(이자사와케노카미)라고 하고, 太子를 誉田別尊(호무다와케노미코도)라는 이름을 붙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大神의 원래의 이름이 誉田別神、太子의 원래의 이름이 去来紗別尊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그래도 그렇게 말한 記録은 없고 자세하지가 않다.」

이 記述을 믿는다면, 応神의 원래 이름은「去来紗別尊」이었지만, 왜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이 부분에 応神의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현재의 気比神宮(기비神宮)은、福井県 敦賀市 曙町에 있고、「伊奢紗別命」(이자사와케노 미코도)를 主祭神으로 모시고 있지만、그 摂社에 角鹿神社(쓰누가神社)가 있다.

角鹿神社의 祭神은 시누가 아라시토이며、이 땅을「敦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시누가 아라시토의 「시누가」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지명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気比神宮의 主祭神이 「伊奢紗別命」인것은、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본래、気比神宮의 主祭神은 시누가 아라시토였으며, 예를들면, 『日本書紀』가 성립될때 어떤 사정으로부터、摂社格으로 떨어뜨린 것은 아닐까? 祭神을 바꿔치기한 것이 아닐까?

祭神을 바꿔치기하는 것은, 믿기 어려울런지 모르지만, 현대에도 유명한 例가 있다.
東京都 千代田区 神田・湯島台에 있는 神田神社에서는, 昭和59年5月14日 午後7時부터、将門公을 새로이 主祭神으로 맞이하기 위하여、遷座祭가 집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사정을 『毎日新聞』朝刊・東京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明治7年、明治天皇의 同神社 참배때、明治政府는『将門公은 朝廷에 저항했다』고 하여, 格이 낮은 末社로 내리고, 대신에 少名彦命을 맞이했다」
神田神社라고 하면, 神田明神인「平将門」을 제사지내는 것으로, 누구라도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祭神이  바뀌어 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神社를 조사해보면 얼마던지 있고,  気比神宮에서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시누가 아라시토라고 말하면, 아메노히보코와 동일인물이란 것을 이미 증명하였다.
더구나 아메노히보코=호아카리=神武天皇이다.
『日本書紀』의 記述에 따르면, 応神과 이름을 바꾼자는, 아메노히보코였던 것이 되지만, 시대적으로 보아도 맞을리가 없다. 그러나 아메노히보코系의 인물과 무언가의 연관이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推論은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件에 대하여 『日本書紀』는、이 이상의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古事記』에는、더욱더 흥미깊은 記述을 하고 있다.
                         
『古事記』에는、「品陀和氣命」(『日本書紀』에서는「誉田別尊」)이「品陀眞若王」(호무다마와카王)의 三人딸을 처로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3명의 딸은、「高木之入日賣命」・「中日賣命」・「弟日賣命」이다.(순서대로 다가키노이리히메, 나카히메, 오토히메이다)
그위에 각주가 삽입되어 있다.

「이 女王들의 父、品陀眞若王은、五百木之入日子命、尾張連의 祖、建伊那陀宿禰의 女、志理都紀斗賣를 처로 맞이하여 낳은 子이다」라는 것이다.


「五百木」姓이 「尾張氏」과 동족인 것은 이미 말했지만, 호무다마와카王이 이호키이리히코의 子이며、 호무다마와카의 딸이 応神의 皇后로 되었다는 것은、이 시대가 婿取り婚(데릴사위제)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応神은 호무다마와카王의 養子로 되었다고 바꿔 말할수 있다.

호무다마와카王은、이 系譜로부터 尾張族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은, 応神도 尾張族에게 흡수되었다는 것이 되는가?
崇神朝가「物部氏」系의 王朝이었던 것에 対하여、応神朝는「尾張氏」系의 王朝였다는 推論이 성립되지 않는가?


『古事記』의 증언이 진실이라면、応神은 왕조의 교체에 의하여 천황이 된 인물일 것이다.
그렇지만、応神이 왕조교체로 즉위했던 천황이었다고 하더라도,『日本書紀』가 応神의 출생을 신화로 만들어버린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또 한번『垂仁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지만, 거기에는 의외의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


6.「誉津別命」

『垂仁紀』에서는、垂仁의 第一皇子로서「誉津別命」(호무츠와케노미코도)가 등장하고 있지만, 「誉津別命」은 第一皇子임에도 불구하고、다음 皇位를 물려받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대단히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다. 이때의 천황인 景行은、垂仁의 第三子로서、더구나、後妻인「日葉酢媛命」의 子였다.
왜 최초의 皇后였던「狭穂姫」의 第一皇子였던「誉津別命」가 황위를 물려받지 못했던가?


정당한 황위계승자가 제1황자인「誉津別命」이란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할 것이다.

그것은、「誉津別命」의 母親인「狭穂姫」가 崇神朝 이전의 왕조였던、葛城王朝 출신인것과, 兄「狭穂彦王」이 謀反을 했기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이유가 그것만이 아닌것 같아보인다.「誉津別命」의 原像은、『記紀』에 따라 어느정도의 異同이 있지만, 『古事記』의 記述이 상세하므로 발췌해보면,


「反乱軍의 将・『狭穂彦王』의 타오르는 稲城의 가운데서 탄생한다。」
「수염이 가슴앞에 닿을 정도로 성인이 되었어도、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白鳥가 우는 소리에 반응하여 처음으로 입을 움직여 소리를 내었지만, 아직 말은 못했다」
「벙어리의 원인은、出雲大神의 재앙때문이었다.。出雲참배를 결행하여、도중에 皇子의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誉津部를 정하여、出雲大神를 예배한 후에 돌연 말을 할수 있게 되었다.」
「肥長比売」와 하룻밤을 보냈지만, 그녀의 정체가 뱀인 것을 알고 도망쳐 돌아왔다」


이렇게 신비적인 색채가 강한 인물이지만, 이 후로는『記紀』에 모두 전연 기록되어 있지 않다.『日本書紀』에 따르면, 이때 30세였다고 한다.
垂仁의 第一皇子・「誉津別命」은、그 소식조차 알수 없게 되고 말았다.

出雲 참배도중에는 「誉津別命」이란 이름을 남기려고 誉津部를 정하고 있을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무언가 비밀이 있었다고밖에는 생각할수 없다.


그렇지만, 이 謎는 上古代에 이미 해명되어 있었고, 그것을 전하는 문헌이 『釈日本紀』에 있는 것 같다.

1994年4月号의 『歴史読本』에 게재된、篠原幸久氏의 『古代 英雄의 神話的 性格』이라고 하는 小論文에서、「誉津別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호무시와케 이야기는、原初 이 인물이“大嘗祭神話”의 주인공이며, 王権을 떠맡는 위대한 聖者로서 나타나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 形跡을 느끼게 한다.
그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은、推古朝遺文이라고 하는 『上宮記』逸文(『釈日本紀』所引)에서、応神天皇의 이름에『凡牟都和希』(호무시와케)가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記紀로 結実맺는 7世紀 이후의 왕권의 통일적 修史事業(王権史의 固定化)이 완성에 가까와지기 이전에는,  応神의 이름으로서 각각 호무다와케, 호무시와케를 주장하는 伝承과 伝承者가 並存하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호무시와케는 호무다와케와 기본적 속성에 있어서는 같은 像을 이뤄나가면서도, 伝承 加担 씨족의 정권내에 있어서의 위치나 이해관계에 따라, 일정정도 호무다와케와의 사이에 괴리가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中略》・・・・그는 천황으로 되는 것을 부정당하고, 그의 후반生이 묘사되지 않고, 후예도 남기지 않은 존재로서, 垂仁의 皇子의 자리로 남아 있었다. 동시에 그는 나이를 먹어도 어린애같이 벙어리와 같아서, 천황의 자질이 결여된 존재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応神에게 남은 영웅적인“王者登場”을 말하는 神話는、그 그림자를 끌어내리면서도 王者로 될수 없었던 인물의 이야기로 바꾸어졌다 」


『釈日本紀』에서 주장하는 「誉津別命」=「誉田別尊」가 진실이라면、葛城王朝의 후예인「狭穂姫」의 아들「誉津別命」은、応神과 동일인물이 되어, 応神의 출생이 신화적인 것과, 동시에 「誉津別命」의 후반생이 묘사되지 않은 것도 한꺼번에 설명이 되고 만다.
정당한 황위계승자였던 「誉津別命」은、그 혈통의 불리함때문에 황실을 쫒겨난 형태로 빠진 것이다.

気比의 大神과 이름을 교환했다고 하는 『日本書紀』의 증언은,「誉津別命」=「誉田別尊」이란 것을 감추기 위한 記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들게 만든다.
사실은、尾張族의 호무다마와카王과 손을 잡고 정권교체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応神의 시대에 「葛城氏」가 활약하는 것도 이렇다면 납득이 가는 것이지만...


7.「武内宿禰」

『日本書紀』는 垂仁朝의 최후를 극명하게 記述하고 있다.
『神功紀』에는、山城国으로 공격하려는 神功과「武内宿禰」에 대하여 仲哀의 皇子・「카고坂王」과 「忍熊王」(오시쿠마王)이 상대하는 장면이 보여진다.
결국 「카고坂王」은 붉은 멧돼지에게 잡아먹혀 버리고 말아, 「忍熊王」 1명만이 군을 이끌고 宇治에 진을 치지만, 「忍熊王」은、「武内宿禰」의 계책에 의하여 琵琶湖에서 죽고만다.


仲哀의 실재성은 검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이 두 황자가 정당한 황위의 계승자인 것은 상상할수 있을 것이다.

또한、応神을 인솔한 「武内宿禰」군대는、畿内를 공격하는 것이므로, 畿内를 제압하는 자가 실권을 잡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아무런 언급도 없던 한 사람이 두 황자의 후견인처럼 記述되어 있다.
「五十狭茅宿禰」(이사치노수쿠네)이다. 더구나 「忍熊王」이 죽음을 확신했을때 「五十狭茅宿禰」을 부르면 노래를 부르고 있다.

 

  「率吾君五十狭茅宿禰・・・《後略》」
읽어보면

   「자 우리 君、五十狭茅宿禰・・・《後略》」


로 되어 있어, 얼핏보면 별것 아닌것 같은 이 노래 가운데에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氏姓은「臣」・「君」・「連」・「宿禰」등이 있지만, 이중에서 「君」은、渡来人에게 흔히 보이는 姓이다. 그러나、「우리君」라고 부르는 경우는 天皇家에 한정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忍熊王」이 君라고 부르는 「五十狭茅宿禰」는、「忍熊王」이상의 皇族이 된다.


「五十狭茅宿禰」은、이 외의 장면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수수께기의 인물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垂仁의 和風名이、「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이다. 이것을 분해하면「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으로、「五十狭茅宿禰」이라는 것은 垂仁 그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단 이때는 4세기 중엽이므로、垂仁이 생존해 있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이 記述은、「忍熊王」이 垂仁 직계의 皇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하게 된다.
   
「誉田別命」=「誉津別命」가 垂仁의 実子이며、「忍熊王」이 垂仁의 直系라면、「誉津別命」은 垂仁이、 상당히 노령이 되고나서의 아들로서、「武内宿禰」에게 인솔되어 畿内로  침공했던  応神도 또한 이때 이미 노령인 것이 된다. 또한 『日本書紀』의 어디를 보아도 그러한 記述은 일체 없지만..
단「五十狭茅宿禰」의 정체는 알수없는 것도 아니다.「忍熊王」옆에 있었던 자는、「五十狭茅宿禰」외에 또 한사람 있었다.「倉見別」(쿠라미와케)이다.


이 이름에 있는「別」을 가진 자는、「大足彦忍代別天皇」(오오다라시히코 오시로와케노 수메라미코토) 즉 景行의 皇子라고 、『景行紀』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景行의 皇子 중에는「倉見別」은 기록되어 있지않지만, 『景行紀』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君라고 불리는 「五十狭茅宿禰」도 또한、景行에 혈연적으로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되어 지는 것이다.


『古事記』에 의하면、「카고坂王」・「忍熊王」은 景行의 娘・「大中比賣命」(오오나카츠히메미코도)가 母라고 기록하고 있다.
「誉田別命」=「誉津別命」라고 해도、『垂仁紀』로서 記述되어 있는 것이、사실상、景行의 子일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年代的으로 논리가 맞게된다.
 
応神의 출생을 애매하기 위하여、『日本書紀』편찬자등이、의도적으로、『垂仁紀』로서 記述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垂仁의 実子라고 생각한다.  따라서、応神은「忍熊王」의 弟등이 결코 아니다. 叔父・甥의 관계가 될 것이다.

또한、景行의 和風名인「大足彦忍代別天皇」에서「忍代別」은、이름같은 것으로 느껴지게 하지만, 仲哀・成務天皇에 이르러서는 각각「稚足彦」(와카다라시히코)・「足仲彦」(다라시나카츠히코)로서、美辞名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으로는 가공의 천황으로밖에는  말할수 없다.
景行에서도、『日本書紀』는 熊襲을 평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記述에 따르면, 仲哀는 熊襲에게 토벌당했으며 도저히 平定했다고는 생각할수 없다.

崇神이 扶余族의 힘을 빌려、 일단은 연방국가적인 통일을 보였다고 생각되는 西日本이었지만、垂仁의 死後、그 통합은 崩壊되어 갔던 것이 아닐까?   垂仁의 死後、景行이 어쨋건 大王으로 된것은、邪馬台国시대로부터의 官이었던 崇神・垂仁과는 달리、大王으로서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応神朝이래 한동안、王朝는 大和를 떠나 河内에 基礎를 놓아갔다. 속칭 河内王朝이지만, 大和의 잔존세력을 싫어해서였다고도 볼수도 있다.
 그 河内의 大王이 파트너로 선택한 豪族이야말로 「葛城氏이다. 이것들은、応神의 출생의 謎를 생각하는 경우、차라리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応神朝에 이르러서 「物部氏」가 政界로부터 추방되어 가는 모습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記述이『日本書紀』에 보여진다.

『崇神紀』・『垂仁紀』에서는、아마테라스를 宮廷밖으로 내어 笠縫邑에 모신후、諸国을 돌아서 伊勢地方에 도착했다고 하는 記述이야말로、「尾張氏」몰락을 은근히 비추는 것이지만, 『応神紀』에서는「武内宿禰」의 弟・「甘美内宿禰」(우마시우치노 수쿠네)가、「武内宿禰」는 천하를 노리는 야심가라고 천황에게 讒言하는 등 일련의 행동이 그러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되어 진다.


이 결말은,  죄없다는 것을 변명하는 「武内宿禰」가、「甘美内宿禰」와 探湯(쿠가다치)를 하여 승리하였지만, 「甘美内宿禰」가「物部氏」의 祖・우마시마찌와 발음이 꼭 같아서、「甘美内宿禰」=「物部氏」라는 것으로 쉽게 상상되지만, 「武内宿禰」는 어떠냐하면、이것은 무언가 다카쿠라지(高倉下)를 말바꾸기한 것이며, 다카쿠라지(高倉下)=아메노카야마(天香山命)를 祖로 하는 「尾張氏」의 예라고 생각되어진다.

(※각주:探湯 -쿠가다치- 상고 시대의 점술의 한 가지로 시비·정사(正邪)를 가리기 위해 신에게 맹세하고 끓는 물에 손을 넣게 하였던 일로 죄 없는 자는 데지 않는다고 믿었음)


또한「武内宿禰」는、「葛城氏」의 祖라고 『日本書紀』가 증언하고 있고, 「葛城氏」는 단일씨족이 아니고, 일찌기의 葛城王朝를 구성하고 있던 복수씨족의 총칭이었으므로,「尾張氏」를 포함한 旧葛城王朝系 호족의 부활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武内宿禰」는、孝元天皇의 孫으로서 태어났으면서, 활약기는 6대후인 仲哀天皇이므로, 연대적으로 보아도 부합되지도 않고 실재성이 의심스럽다.

『記紀』에는 記述되어 있지 않지만, 「武内宿禰」의 母親은 実은「尾張連」의 娘이라고 하는 설도 있고, 「武内宿禰」라고 하는 인물은 架空인물이지만, 그 事績은 応神天皇의 義父・호무다마와카王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応神이 호무다마와카王의 데릴사위가 됨으로써、尾張以西의 日本列島는 정치적으로 통일되게 된다. 그것은 일찌기「旧奴国」세력에 의하여 달성되었던 것으로 수사노오의 「統一奴国」의 부활이었다.


8.歴史年表
  
253年頃 ~ 磯城地方을 大和(首都)로 정해、「奈良」(新奴国)의 자치권을 행사했던  崇神朝였지만, 
        先住民으로부터 反乱・反逆에 부닥쳐 정치활동은 곤란을 당하다
              
   254年頃 ~ 「物部氏」의 정책에 의하여、宮廷内에 모셔졌던 니기하야히를, 선주민들이 숭배하는 神・오오모노누시로서
         三輪山에 모시고、또한「日本大国魂神」로  이름을 바꿔서까지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것들은、神威에 의해 奈良를안정화시키려고 한 것이지만 동시에 、宮廷内의 아마테라스는、笠縫邑의
                      작은 祠로 옮겨졌다.
  
   255年 ~「物部氏」와의 정치투쟁에서 패했던 「尾張氏」는、아마테라스와 함께  大和를 떠나, 「丹波国」으로 도주한다.
                    토착의 호족들과 연합하여 호아카리系 連合国家」(丹波・但馬・丹後の三丹連合国家)를 성립시킨다.


   259年 ~ 崇神天皇의「奈良」는、朝鮮半島 西北部의 遼東郡의 覇権싸움에 지친 扶余貴族들의 망명을 허락하고、군사지원을 약속받는다.
        扶余의 亡命貴族의 軍事応援을 받아 畿内는 안정되고、「奈良」는 日本列島   최대규모의 군사국가로 되어간다. 葛城族은 孤立.
  
   四世紀初頭 ~「吉備国」・「三丹連合」과 연합한 「奈良」는、더욱더 세력을 확대하여、「出雲国」의 내전에 관여해간다.
       「奈良」는 西出雲세력에 가담하여, 東出雲을 제압한다. 이 결과,「出雲国」도 연합에 참가하게 되어、九州・四国・東日本을 뺀

                    西日本連合国(大和朝廷 )이 성립되게 된다.
       「尾張氏」호아카리系 氏族은,「近江」・「越」・「諏訪」「伊勢」・「尾張」 지방등에 분산정주하여, 각각 나라를 형성해간다.
       崇神天皇이 죽다. 旧邪馬台国의 官・「伊支馬」가 황위에 오르다(垂仁天皇)       
  
   四世紀前期 ~ 葛城王朝 최후의 왕・「狭穂彦王」이、大和朝廷의 전복을 도모하다가 실패,
                 「狭穂彦王」의 妹로서 垂仁天皇의 后인「狭穂姫」과 함께 자살한다.
       皇子・「誉津別命」만 생환하지만, 황위계승권은 박탈되고, 추방당한다.
        垂仁天皇이 죽다. 景行天皇이 위에 오르지만 국력은 현저하게 저하된다.


  362年 ~ 景行天皇、九州원정을 결행하다. 熊襲(旧奴国)정벌을 꾀하지만, 오히려 반격을 받아 전사한다.
  
    四世紀後期 ~ 西日本連合国이 완전 붕괴된다.
      ~  中頃  가만히「誉津別命」을 밑으로 끌어들인 旧奴国勢力은、일거에 東征하여  「奈良」의 王・「忍熊王」을 무찌르고
         河内에 新王朝를 형성한다.  東征했던「旧奴国」세력은「誉津別命」을 大王으로 하여、東国의 대표  호무다마와카王과        
                      동맹함으로써、尾張以西의 日本列島는 거의 통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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