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7. 謎의 4世紀

청 설모 2018. 5. 7. 21:37

    謎의   4世紀                                                     http://www2.plala.or.jp/cygnus/k6.html


1.『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는 『百済記』

神功皇后의 新羅征伐은 그 자체가 신화라고 단언할수 밖에 없고, 그것을 史実로 파악하기에는 도저히 곤란하다. 그러나 4세기 후반에 조선반도로 향했던, 대규모의 군사행동이 있었다는 것은 史実이다. 그것은 『日本書紀』가 인용하고 있는 『百済記』나、『三国史記』혹은 『高句麗 好太王 碑文』으로부터 추측할수 있다.

 

나자신 보통으로 참여하고 있는 書籍에『日本의 歴史』(井上光貞氏著:中央公論社刊)가 있지만, 그 第一巻・『神話로부터 歴史에로』에서『百済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百済記』로서、百済에서 쓰여진 역사책이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주제로 되어있다. 三品彰英氏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7세기 초, 우리 推古朝에 해당하는 시대에 쓰여졌다고 한다. 百済는 大和朝廷과 비슷한 시기에 성립한 국가이지만, 일찍부터 중국과의 관계를 통하여, 문화의 발달은 일본보다 한발 앞섰다. 따라서 기록의 術도 일본보다 앞서서 4세기 중엽, 肖古王시대부터 기록이 시작되었다고 『三国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百済記의 記事는 상당히 믿을만한 資料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단、史書로서의 『百済記』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겨우『日本書紀』가 그 존재의 편린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또、『日本書紀』에서의『百済記』의 취급은、『日本書紀』자체의  史書로서의 体裁를 정비하기 위하여 『百済記』를 이용하고 있으므로, 그 編集은 일본측에 유리하게 끌려가는 언어를 사용하여, 고쳤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보이고, 또 제5부에서 말한대로 년수가  120년 끌어올려진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120년 이라고 하는 년수는 干支 2주갑에 해당하기 때문에 『日本書紀』에 기재되어 있는 干支는、그대로 읽을수가 있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하여 『百済記』를 읽으면 이 시대의 日・済관계가 명확하게 되지만,『日本書紀』가 전하는 日・済관계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2.朝鮮半島 정세와 「倭国」

이 시대의 조선반도의 정세는 역사의 일대 전환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조선반도에 영향을 준 나라라고 한다면 무어라 해도 단연 중국이다.
中国 古代帝国은、「晋」帝国이 멸망하여 江南에「東晋」을 건국하고, 북쪽에는 五胡라고 불리는 종족이 할거하여, 속칭, 五胡 南北朝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중국의 국력이 당연히 약화되고, 조선경영에 까지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된 결과, 楽浪郡을 멸망시킨 「高句麗」가 단숨에 영토를 넓히고, 또한 朝鮮半島로 남하할 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에 호응하듯이、扶余族이 旧「馬韓」지역에서 国家를 빼앗아「百済」국가를 형성하고, 그 동쪽에 있었던, 辰韓 12국도、「斯廬」에 의하여 통일되어 「新羅」가 성립되었다. 그 당시의 諸事情은、이미 말한대로이지만, 대개 4세기 중엽까지의 모습이다.


「百済」・「新羅」의 新生 2개국은、북방의 「高句麗」의 남하에 저항하면서도, 朝鮮半島남부의 小国家・弁韓 12국에 지배의 손을 뻗치고 있었다. 弁韓 12국 이라고 하는 것은, 「伽耶」諸国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어쩌면,  弁韓 12국중 어딘가의 나라에「倭国」의 자치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魏志 倭人伝』에 따르면、「狗邪韓国」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対馬・壱岐」를 경유하여, 왕성한 교류가 있었다고 인정된다.
『日本書紀』는、그러한 나라를 「任那」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읽히지만,「任那」가 어떤 一国을 가리키는지, 諸国 전체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任那」(미마나)의 국명으로부터  一国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ラ라・マ마・ヤ야・ナ나」라는 것은「나라 国」의 발음이다. 「任那」라고 하는 것은、미마라고 하는 나라国이며, 弁韓諸国중의 一国일 것이다. 그러나、弁韓諸国 즉 지금까지 말하는「伽耶」諸国은 通商国家였기 때문에, 「任那」도 그렇다고 본다면, 周辺 諸国과의 관계는 상당히 깊었을 것이다.


원래、日本 列島의 倭人이라고 하는 것은, 수사노오 이전부터「伽耶」로부터 渡来했던 민족과의 혼혈이었으므로,「伽耶」와「倭」는、동일 문화권에 속하고 있다고도 말할수 있고, 수사노오. 오오나무치에 의한 일본해 문화권의 확립에 따라 국경이 정해지지 않은 이 시대에서는 거의 동일국이라고 보아도 좋다고 말할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한 가운데에 있어서、畿内에 일시 존재하고 있던 崇神王朝와 그 후예는、東征해 왔던 「旧奴国」세력에게 구축되어、畿内大和의 崇神朝는 붕괴되고, 대신에、「旧奴国」세력에 의한 河内王朝가 일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의 「倭国」의 중심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旧奴国」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旧奴国」세력은、중앙집권 국가에로의 걸음을 보이고 있지만, 동시에 본거지였던 九州 地方의 통치가 、허술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은、旧奴・伽耶 連邦에 있어서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三国志』魏志 東夷伝은、「伽耶」諸国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国은 鉄을 생산한다。韓、濊、倭가 모두 따라서 이를 구한다.
      諸市에서 사는데 모두 鉄을 사용한다. 또 二郡에도 공급한다」


이것에 의하면、「伽耶」는 철의 산지였지만,「高句麗」의 남하정책은 자주 있었던 것으로,
인접국으로부터의 대규모의 침략이 없었던 것은 九州의「旧奴国」이나 日本海 연안에 성립해 있었던 나라들과의 동맹, 연합관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伽耶」諸国으로부터 구한 鉄은、주로 楽浪郡・帯方郡에 수출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通商国「伽耶」를 심리적으로 방위하고 있었던 것은、九州・日本海 연안의 군사력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확실히 신흥세력인 「百済」・「新羅」는 얕볼수 없었지만,「倭国」자체는 왕조의 교체가 있었다고 말할수 있어, 남조선반도 諸国보다 건국의 시기는 훨씬 오래되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문명차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


3.『百済記』로부터 본 「日・済」関係

그런데、『日本書紀』에 인용되고 있는『百済記』에、무언가 여유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내 혼자만의 생각일까?
『百済記』만을 가지고 본다면, 日・済관계는「倭国」이 献上받는 입장이라는 것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예를들면, 『神功紀』에 있는『百済記』에서는、「沙至比跪」(사치히코)의 배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壬午年、新羅가 日本에 朝貢하지 않았다. 日本은 沙至比跪를 보내 토벌하려 했다. 新羅人은 美女 2명을 치장하여、항구에서  맞이하여 속였다. 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아들여, 반대로 加羅国을 토벌했다. 加羅国의 国王 己本旱岐(고호旱岐) 및 児百久至(고노하쿠구치)・阿首至(아슈치)・国沙利(고쿠사리)・伊羅麻酒(이라마수)・爾もん至(니몬치, 니몬치는 그 백성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갔다. 백제는 이들을厚遇했다. 加羅国王의 妹 既殿至(게덴치)가、大和国에 와서 아뢰는데・・・。」

이 記述에 따르면、「沙至比跪」는 미녀 2명에게 간단히 속아넘어가는 정도의 무책임한 사람이었으며, 그러한 사람을 「倭国」이  나라를 대표하여 大使로 보냈던 것이 된다.


「沙至比跪」은 「葛城襲津彦」이지만, 『日本書紀』 본문중에는 배신했다는 記述은 없다.
그러나、『百済記』의 신빙성을 보다 확실한 것으로 믿는 입장에 있기때문에, 이 내용은 완전히 「倭国」을 무시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百済」가 「倭国」에 献上하는 입장의 나라였다면, 「加羅国」으로부터의 망명자를 厚遇할수 있었을까? 이 부분이 보호였다고 한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厚遇였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안된다.
  
 실제 『百済記』라고 하더라도、「百済」의 시간이동을 리얼타임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어느정도, 년수를 경과한 후, 과거의 기록을 편집했던 것이다.
따라서、『百済記』가 편찬되었던 시대에는、「倭国」과「百済」의 역학관계가 역전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百済記』를 포함하여『日本書紀』외교관계의 記述에、약간의 수정을 가했던 당시의 실상을 생각해 보고 싶다.


4.명백해진 「百済」의 実状

지금까지는, 畿内政権 혹은、畿内政権에 의해 군사통일이 된 나라를、原大和朝廷이라고 記述해 왔지만、지금부터 한동안은 畿内政権의 表記는 야마토 정권으로 통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데、応神天皇을 세웠던 河内王朝이지만, 『日本書紀』에 의하면, 両国의 국교를 중개한 것은 현재의 대구 부근에 있었던 「卓淳国」이었다.


366年、야마토정권은「斯摩宿禰」(시마노수쿠네)를 「卓淳国」에 보내고 있지만, 급하게 보낸 것이라고는 생각할수 없다.「旧奴国」시대부터 외교관계가 있었고, 「尾張氏」로 대표되는 호아카리系 氏族과、일본해를 끼고 무역관계나 군사원조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지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崇神系 王朝에、朝鮮과의 외교기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応神朝에 이르러서는  돌연 국교가 열린 것처럼 읽히는 것은、崇神系 王朝는 무역, 외교에 대해서는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斯摩宿禰」가 파견되기 이전, 甲子年 7월 중순에、百済人 3인이「卓淳国」에 와서 야마토 정권과의 국교의 중개를 의뢰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도 야마토와 「卓淳国」과의 관계를 엿볼수 있지만, 「卓淳国」은 「伽耶」諸国 가운데에서도 「新羅」에 인접하는 북방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야마토 정권은 원래는 「新羅」와 손잡을 생각이었지 않았을까?


実은、『三国史記』第16대 新羅王 訖解 재임중에、「倭国」으로부터 王子의 婚姻을 구하는 기록이 있다.

「訖解 3年春3月、倭国이 사자를 보내 王子의 花嫁을 구해 왔으므로, 阿 シ食 休利의 딸을 보냈다」
「訖解 35年春 2月、倭国이 사자를 보내 花嫁을 구해 왔지만, 딸은 이미 시집을 갔다고 하여  辞退했다」
「訖解 36年、倭王이 国書를 보내、국교를 단절했다」

물론、이「倭国」이라고 하는 것은 崇神王朝系가 아니고, 九州・日本海文化圏의 諸国連合이며, 그 대표는 尾張系 호무다마와카王이나、그 先代의 王일 것이다.


 甲子年이라고 하면, 대략、364年이므로、「斯摩宿禰」가 파견되기 2년전에 百済王은、「卓淳国」에 사자를 보내 야마토 정권과 손잡을 용의가 있음을 전해왔던 것이 된다.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는 「卓淳国」王의 口述을 믿으면,
「이전부터 東方에 귀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래도 교통이 열리지 않았으므로 그 길을 알수 없었다.  海路는 멀고 파도는 험하다. 큰배를 타면 어쨋건 통할수 있을 것이다. 」


이때「卓淳国」에 왔던 「百済」의 사자는、「久氏」(구씨)「弥州流」(미즈루)・「莫古」(막고) 3인이며、百済王・「近肖古王」의 직접 사자였던 것 같다. 이 3인은 배를 구해서 일단은 「百済」로 귀국하고 있다.

 이 2년후에「卓淳国」에 보내졌던 「斯摩宿禰」는、従者「爾波移」(니하야)와「卓淳国」의「過去」(와코) 2명을 「百済」에 보내고 있지만, 「斯摩宿禰」본인은「百済」에 가지 않은 것 같다.「斯摩宿禰」는「卓淳国」에 머물겠다고 명령할수 있는 입장인 것이 된다.

더구나、『日本書紀』의 내용으로으로부터 보면, 卓淳国王・「末錦旱岐」(마키무旱岐)를 옆에두고「過去」에게 명령하고 있어서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온 사자는, 「伽耶」諸国의 国王보다 발언권이 센 것으로 되고 말았다. 단순히 사자라기보다도 군사파견을 위탁받은 한 大隊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결국、通商国家였던「伽耶」諸国의 諸軍事는、貿易상대국이라고 생각되는 「旧奴国」이나、일본해 연안의 호아카리系 氏族이 담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말이 바뀌었지만,『百済記』에 있는「沙至比跪」야마토 정권의 使者・「葛城襲津彦」이、임무를 放棄하여 일방적으로 「新羅」와 손잡은 것은 「葛城襲津彦」을 대장으로 했던 軍隊였으므로 가능한 것이었다.

야마토 정권 자체는 왜 「新羅」가 아닌「百済」와 손잡았는가에 대하여 언급해두고 싶다.
   
前王朝의 崇神朝(三輪王朝)가、畿内統一의 협력을「百済」王朝의 전신인 扶余의 亡命貴族으로부터 구한 적이 있었다. 応神朝에도 崇神朝의 重臣이 적지않게 있었을 것이므로, 이것도 이유의 하나가 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前王朝의 것이고 더욱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원인은「新羅」가 花嫁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国号로서의 「百済」의 발음은 「쿠다라」인 것으로서, 「百済」는 漢字가 가진
발음으로도, 의미로도 「쿠다라」라고는 읽히지 않는다.
歴史言語学者인 加治木義博氏가 말하기를 百済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면,「호제」혹은「호제이」이며 沖縄발음으로는 「후지」가 된다고 한다.   현대의 韓国語 발음으로는 「백제」이다. 아울러「新羅」・「高句麗」는 각각 、「씰라」・「고구려」로 발음되는데、「百済」를 「쿠다라」라고 발음하면 한국어와는 전연 다른 것이다.


『高句麗好太王碑』에 記述되어 있지만 「百済」의 国号는「百残」이지만, 이것도 現代 韓国語 발음으로는「백제」와 同音声이다.「百済」가「쿠다라」라고 발음한다면, 「百残」도「쿠다라」라고 발음하지 않으면 안되지만,「쿠다라」라고 읽는 것은 현대의 일본인 뿐이다.
아울러 고대 일본어는 濁音의 발음이 없기 때문에 「쿠다라」로 된다.


加治木氏에 따르면、「쿠다라」라고 하는 것은 「馬韓」의 말레이語 읽기 인것 같고, 말레이語圏으로부터 온 대량의 사람들이、朝鮮半島나 日本列島에 정착한 결과、漢字문화의 扶余族이 、国号를 「馬韓」으로부터「百済」로 바꾼다고 해도、漢字를 모르는 말레이語圏人은 、 그대로「쿠다라」라고 계속 읽어간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여기와서 말레이語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쿠다라」라고 하는 것은 日本語에 의한 발음이라고 생각한다. 「쿠다라」는 일본열도의 倭人이 부르고 있던 「百済」국호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본래 「百済」는 「쿠다라」라고 발음되고、탁하지 않은 발음이었다면, 이것은 바로「쿠나라」의 음운변화가 아닐까?「쿠나라」라고 하는 것은 물론「旧奴国」에 다름 아니다.

 

결국 邪馬台国 연합이 붕괴한 후、畿内 大和지방에 건국했던 「新奴国」으로부터 보았던 「旧奴国」의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朝鮮半島의 「馬韓」지방에 옮겨 정착한 이래、그 지방도 「쿠나라」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훗날의 扶余族에게 왕권이 찬탈되어、국호가「百済」로 바뀌고 나서도、漢字를 모르던 日本列島人으로부터 본 경우 그 나라는、계속「쿠나라」라고 하는 땅이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후일에 왔던 「百済」라고 하는漢字도 、서민들에게는 「쿠나라」라고 읽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旧奴国」은「奴国」으로 보았던 적국 멸시의 호칭이지만, 이것을 오랜 세월 가운데에 国名으로서 정착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扶余族이 王権을 탈취하여 건국한「百済」였지만、그것은 지배자층이 변한 것일 뿐이고 국민 전체가 국경을 넘어서 대이동을 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당연 「旧奴国」으로부터 건너온 倭人도 수많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百済」와 이때의 야마토 정권은、정권지배층을 빼면, 같은 구멍의 너구리 였던 것이다.


5.『宋書』에 기록되어 있는 「倭 五王」과 日朝 군사연방.

 그런데、이후 「百済」와 야마토 정권은 친밀도를 높혀가지만,『日本書紀』의 記述은、「新羅」를 바로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왜곡된 역사이며, 記述로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翌年367年에는、「百済」・「新羅」가 나란히 야마토에 朝貢해오는 모습을 『日本書紀』가 기록하고 있기때문에 외교관계는 아직 「倭国」우위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 시대는 「謎의 4世紀」라고 불리고 있다.  그것은 266年에 「臺与」(『晋書倭国伝』에 기재되어 있는 倭의 女王)이「西晋」에 사자를 파견하고 나서、413年에 倭王「讃」(『晋書倭国伝』)이 「東晋」에 파견하기까지의 159年間、中国과의 국교의 기록이 없을 뿐만이  아니고「邪馬台国」과 大和朝廷을 연결하는 라인이 불명료하기 때문이다.

 국내로 눈을 돌려도、『記紀』를 넘어서는 문헌이 눈에 띄지 않는다.
조선의『三国史記』에 단서를 찾아보아도 대동소이한 것 같다.


「日・済」관계의 경위는、『日本書紀』에 붙혀서 소개해왔지만, 후일의 기록을 합쳐서 생각해보는 경우、「百済」・「新羅」・「伽耶」와 畿内 야마토 정권은、일종의 연방국가를 형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에 다다르고 만다.

그 記録이라는 것은『宋書倭国伝』에 記述된、倭王「武」의「表=手紙」이다. 倭王「武」는、자기가 지배하는 국명을 기록하여、安東大将軍의 칭호를 요청하고 있다.

「使持節都督・倭・百済・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七国 諸軍事・安東大将軍・ 倭国王」


「宋」은 이 가운데서「百済」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다른 6개국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일본이 이정도로 대단했을까 하고  감복하는 것은 약간 이른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것은 倭王「武」는 이 表의 記述에 있어서조차도、자기스스로 倭国王이라고 称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결코 다른 7개국의 王으로는 말하고 있지 않기때문이다.
 
7개국에 대해서는 7국 諸軍事에 있어서、자국을 포함한 7개국의  군사를 담당하기 때문에 安東大将軍의 칭호를 원한다고 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결국, 이러한 조선의 나라들과 야마토 정권과는 동일 정치권내였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당시는 정치=군사였으므로 7국 諸軍事라면 동일한 군사, 정치권이라고 말할수 있지 않을까?
이때의 동일 정치권은 바로 연방국가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닐까?


또、倭王「武」의 上表文에 대해서는、水野祐氏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倭王 武의 上表文은、漢文으로서는 실로 당당한 것이고, 5세기에 있어서 이러한 上表文이 일본으로부터 宋朝에 보내졌다고 하는 것은 경탄할만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찬란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고 차라리 일종의 호소문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上表가 보내진 것은、高句麗의 남하로 인하여, 百済가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나서 3년째인 478년의 일이다. 이점을 특히 중시해야 할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래에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倭王 武의 祖父, 弥의 시대로부터 武装하여, 맹렬하게 四隣을 정복하여 국력을 신장시켜 왔다. 국내에 있어서도、西는 九州로부터、東은 関東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平定한 위에、新羅・百済・任那・加羅・秦韓・慕韓등、南朝의 6国을 병탄하는 一大勢力을 구축해왔던 것이다.  돌아가신 父 済 때 이래로 水軍을 정비하여, 百済의  救援에 마음을 기울여 왔다. 그것은 高句麗가 無道하여, 南鮮諸国을 모조리 침략하려고 남하해왔기때문에、대군을 보내어 兵備를 갗추어, 그 無道함을 정벌하려고 노력해 왔기때문이다. 그러나 歴戦 오래걸린 지금도 強敵을 멸망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때、宋의 원조를 얻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데, 혹시 그럴수 있다면 신속히 高句麗에 압박을 간절히 바라고, 南鮮의 치안을 유지시켜준다면, 그것으로써 宋朝에 대하여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上表文의 冒頭를 장식하는 征服의 눈부심에 적합하지 않은、哀願에 가까운 愁訴状이다.」

水野氏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대로이고, 가령 倭王「武」가 7개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 황제였다고 한다면, 그 황제에 相応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宋朝의 원조를 얻으려고 하려면, 이렇게 겸손한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倭王「武」는、「百済」・「新羅」・「伽耶」・야마토 정권間의 日朝連邦의 諸軍事담당이었지만, 거듭되는「高句麗」와의 전쟁에 패하여, 그 지위와 권위도 사라졌다고 생각되어, 그것이 이 上表文의 내용에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日朝連邦은、아마 야마토 政権이 応神朝에 대신했던 때부터 였던 것 같다.


그것은 이때의 야마토 将軍에 「木羅斤資」(모쿠라곤시)・「沙沙奴跪」(사사노코)등의 百済系의 이름이 보이는 것과 앞서 말했던「卓淳国」과 야마토의 관계로부터 엿볼수가 있다.
또, 이러한 将軍에는、직접 天皇이 명령을 내리고 있을뿐만 아니라,「沙至比跪」討伐과 같은 나라를 좌우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기때문이다. 倭王이 連邦의 諸軍事를 담당하고 있어야만이 가능한 명령이고, 단순히 타국의 인질将軍이라면, 이러한 까닭이 될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日朝連邦은、対「高句麗」를 위한 軍事連邦이었지만, 통상은 각각 独立国이었다고 생각한다.


6.応神天応은 仁徳天皇이다.

그런데、倭王「武」에 대해서만 앞서 이야기했지만, 『晋書』・『宋書』・『梁書』의 倭国伝에는、倭王「武」를 最後로 413年부터 478年의 사이에、五人의 倭王이 적어도 9회 遣使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史書의 記述을 箇条 써보면 다음과 같다.


   413年 倭王「讃」、 「東晋」에 遣使
   421年 倭王「讃」、 「宋」에 遣使
   425年 倭王「讃」、 「宋」에 遣使
   430年 倭王「?」、 「宋」에 遣使
   438年 倭王 弥(珍) 「宋」에 遣使
   443年 倭王「済」、 「宋」에 遣使
   451年 倭王「済」、 「宋」에 遣使
   460年 倭国、          「宋」에 遣使
   462年 倭王世子「興 「宋」에 遣使
   477年 倭国、          「宋」에 遣使
   478年 倭王「武」、 「宋」에 遣使


이중에서 『梁書』는 倭王「弥」으로 기록하고、『宋書』는「珍」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동일인물이란 것이 통설이다.
또 倭王世子「興」은 倭王의「世子 興」인지、倭王의 후사를 잇는「興」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통설대로 、倭王의 후사를 잇는 「興」으로 한다.

또한 이러한 史書에 기록된 「倭 5王」의 系譜를 간단히 적어보면,

   『宋書倭国伝』          『梁書倭国伝』

   ┌讃               ┌讃
   ┤    ┌興          ┤   ┌興
   └珍  済┤           └弥─済┤
        └武              └武

로 되어, 『宋書倭国伝』은 倭王「珍」과 「済」의 親子関係를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梁書倭国伝』에서는 親子로 되어 있다.

問題는、이「倭 5王」이『日本書紀』의 4世紀 후반부터  5世紀에 활약하고 있는, 応神・仁徳・履中・反正・允恭・安康・雄略의 7天皇가운데 누군가 인가에 있다.


또 이 「倭 5王」은 畿内王朝가 아닌, 並立하고 있던 九州王朝의 大王이라고 하는 설도 있지만, 이 설은 채택하지 않는다. 私見으로는、東征한 九州의「旧奴国」이、畿内의 崇神政権을 흡수하여 성립한 야마토政権이라고 생각되고 있고, 그 본거지는 畿内의 河内로 옮겼던 것이다. 그것을 九州王朝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통설대로 河内王朝라고 하고 싶다.

더우기 놀라운 것은、応神과 仁徳이 동일인물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直木孝次郎氏의 説이 유명). 그것은、『古事記』応神記의 記紀 歌謡때문이다.


「品陀의  日의 御子 大雀 大雀 佩かせる太刀 本つるぎ
 末ふゆ 冬木如す からが下樹の さやさや」

「また吉野の国主ども、大雀の命の佩かせる御刀を見て歌ひて曰く」에서

「品陀の 日の御子 大雀 大雀」이란 부분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品陀天皇이라고 말하면, 물론 応神이며、그리고 「大雀」이라고 하면 仁徳이다. 한 구절의 歌謡안에,  2명의 이름이 연속하여 나오는 이 문제는、歌謡에 있어서 2명의 관계이다.

   従来、이 歌謡는  「品陀의 日의 御子인 大雀이여」라고 해석되었다. 결국
   「応神天皇의 자식인 大雀이여」라고 된다.


실제、大雀命이라고 불리우는 仁徳은 応神의 자식이므로、『記紀』 가운데서 보면, 의문은 생기지 않지만, 독립한 歌謡라고 생각하면, 아무리해도 그러한 의미로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品陀의 日의 御子」는 品陀天皇을 나타내는 말이고, 그것 이퀄(=) 大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르다고 말한다. 결국、応神과 大雀인 仁徳은、동일인물이라고 솔직하게 생각해버리는 것이지만, 그러한 관점에서 『記紀』의 応神・仁徳의 条를 보면은 그 설화와 유사한 것이 많이 보인다. 이하에 그러한 것을 적어보면,


 『仁徳記의 吉備海部 直黒日売의 説話』와 『応神紀의 吉備臣의 祖御友別의 妹、兄媛의 説話』

『仁徳記의 枯野、免寸河의 大樹를 베어 만들다』와 『応神紀의 枯野、伊豆에서 만들다』
『応神記 酒를 빚는 것을 아는 人、須須許理가 渡来』와 『姓氏録의 大鷦鷯天皇의 御代、兄曽々保利・弟曽々保利 二人이 渡来하다』

이러한 설화를 읽고 비교해보면,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르지만, 그 내용은 전적으로 같다고 할정도로 비슷하다. 이외에도 『播磨国風土記』의 応神天皇과 『日本書紀』의 仁徳紀의 가운데에 보이는 佐伯의 아가노코의 説話도 마찬가지이다.


応神=仁徳説은、記紀歌謡로부터 推察한 대담한 가설이지만 나는 이 설을 지지한다.

神功皇后의 御子인 応神은、그 実在性이 의심되는 창조된 인물일 것이다. 応神은、후일의 継体天皇 政権의 역사적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할수 있다. 결국, 仁徳王朝의 뒤에 오는 継体王朝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仁徳의 父라고 하는 応神을
창조하여、継体王朝의 箔을 입혔다고 하는 것이 뜻밖의 진상이 아닐까?

応神=仁徳이라고 한다면, 현존하고 있는 応神陵・仁徳陵은 일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二陵은、일본 최대의 古墳이며、세계적으로 보아도 그 규모는 최대라고 말할수 있지만, 이중의 어느 한쪽은 다른 사람의 陵이 되어버리고 만다.


『日本書紀』에 눈을 돌려보면, 仁徳陵의 기록은 있지만, 応神陵에 대해서는 기재하고 있지 않다. 『古事記』에는 각각의 記載가 있다.  이것은 通説에 반하여,『日本書紀』보다、『古事記』쪽이 成立年이 보다 새로운  이유도 있지만, 어떤 시기(6세기 후반경)에 天皇陵을 결정하여、현존하는 古墳에 比定했다고 하는 작업을 한 것이며, 정말로는 5세기로부터 전해진 것인지 어떤지는 전적으로 의문이다.

그것은 天皇의 系譜를 정리해 가는 과정,『帝紀』・『旧辞』의 편찬과정에 天皇陵도 결정해 갔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応神의 記載는 『帝紀』・『旧辞』는 없었다는 증명도 된다.


『日本書紀』편찬 이전까지는、応神은 없었던 것이며、없는 天皇의 陵등이 있었을리가 없다. 応神은 창조되었지만, 天皇陵은 만들어지지 않았으므로 『日本書紀』에 応神陵의 記載가 없다.
『古事記』에 記載가 있는 것은、世間이 応神을 인식하게 된 후、応神陵도 대략 저것일것이다라고 比定된 이후 편찬된 역사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존하는 応神天皇陵은、물론 応神의 陵이 아니다. 그렇다면、저 応神陵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陵墓인가? 그것은、応神=仁徳인 이상, 그의 養父인 「気比의 大神」이라고 記述되어 있는 尾張王・호무다마와카王의 陵임에 틀림없다.


7.『高句麗 好太王 碑文』과 仁徳天皇 ・ 倭王「讃」

그런데 지금부터가 『宋書倭国伝』에 기재되어 있는, 「倭의 5王」의 比定이지만, 応神과 仁徳이 동일인물이라면、『宋書倭国伝』의「讃」・「珍」・「済」・「興」・「武」의 5王이、『記紀』의 仁徳・履中・反正・允恭・安康・雄略의 6天皇중에 누구에 해당하는가?
 
먼저、倭王「讃」에서、仁徳의 이름「大鷦鷯」의 「鷦鷯」의 音読音「사사키」를「讃」으로 표현했다던가, 応神天皇의 이름,「誉田別」의 「誉」의 文字를、「讃」이라고 썼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応神=仁徳인 이상, 倭「讃」이 어느쪽 천황이냐 하는 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게된다.

또 倭王「讃」의 遣使는 413年과 425年인데、『古事記』에 의한 仁徳天皇의 干支崩御年은 丁卯 427年으로 보면、倭王「讃」의 시대와 중첩되어, 倭王「讃」은 仁徳으로 보일것이다.


그런데、倭王「讃」을 仁徳이라고 한다면, 『高句麗 好太王 碑文』에 기록되어 있는 倭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碑文에는 391年~404年까지의、朝鮮半島에 있어서 倭人들의 작전행동의 일단이 분명하게 된다. 倭人들은 물론 倭国軍이다. 또한 연대적으로 보아,「倭国」의 最高責任者는、어린 仁徳이던지 養父・호무다마와카王이 된다.
이 碑文 가운데서、「倭国」과의 渉外関係를 말하는 곳의 요점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元年 辛卯年(391年)、예로부터 高句麗에 속해있던 百残과 新羅가、近頃 倭와 通하여, 朝貢하지 않았다. 그것은 倭가 이해에 침략해 와서、百残・■■・新羅를 무찌르고, 、臣民으로 해버렸기 때문이다.」

「六年 丙申年(396年)、好太王이 百残에 원정하여、이것을 臣従시켰다」
「九年 乙亥年(399年)、新羅는、 国境에 倭軍의 兵이 충만해 있는 것을 호소해, 高句麗에 구원을 구해왔다.」
「十年 庚子年(400年)、好太王은 歩騎 五万 大軍으로 진격하여、中部朝鮮의 新羅의 국경에서 倭軍과 격돌했다. 그 결과 왜군은 궤멸하여 멀리 南鮮의 任那・加羅의 땅에 追撃되어 겨우 전멸을 면했다」

「十四年 甲辰年(404年)、四年後에 倭軍은 타격으로부터 회복하여 세력을 만회하여 다시 원정군을 파견하여 中部朝鮮에 진출하여, 帯方부근까지 진군했다. 거기서 다시 高句麗軍과 결전하여、다수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했다」


이러한 것은 倭王「讃」의 朝貢보다도 오래된 시대의 史実이며、266年을 최후로 中国에조공하지 않았던 야마토정권(이때는、九州의 「旧奴国」이지만)이、約150年만에 413年 돌연 조공했던 것은, 야마토정권 자체가 재정난에 의하여、위기적 상황에 빠져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추리를 하게 된다.


実은、이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記述이 『記紀』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仁徳記・紀』에 記述되어 있는 説話、『竈의 煙 부뚜막의 연기』이다고 생각한다.이 『竈의 煙』説話는、仁徳을 상징하는 미담으로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것을『日本書紀』로부터 인용하면,

「4年 春 2月6日、群臣에게 이르기를、『高殿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人家에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人民들이 빈한하여、밥을 짓는 사람이 없는 것일 것이다. 옛날、聖王의 御世에는、人民은 君의 徳을 칭송하는 소리를 내어、집집마다 평화를 하는 노래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정치를 맡은지 3년이 지나지만, 칭송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밥짓는 연기는 드문드문 나고 있다.  이것은 五穀이 맺히지 않고, 백성이 궁핍해있기 때문이다. 都 가운데에서 조차 이런 모습인데 都外에 멀리 떨어진 지방에는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말했다.


이것을 말한 사람은、물론 仁徳이다. 天皇은 이후、3年間의 모든 課税를 금하고, 人民의 고통을 완화시켰다고 하지만, 이설화가 진실이라고 한다면、聖帝라고 전해지는 仁徳天皇의  이전은 칭송받지 못한 천황이었다는 것이 된다.

결국, 仁徳이 新王으로 즉위했다는 것은、前王의 거듭되는 朝鮮出兵과 그 패전으로、国勢는최저였다고 생각되어、3年間 과세를 면했던 仁徳의 판단은、훌륭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정도로 궁지에 몰렸던 것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고 말지만, 원래는 仁徳인「大鷦鷯尊」은、天皇이 될 人物이지 않았고, 따라서 立太子도 아니었다. 本来의 天皇候補、즉 太子는、동생인「莵道稚郎子」(우지노와키이랏코)였다.

末子相続으로 한다면, 이것에 의문이 있을수 없지만, 「莵道稚郎子」은, 「大鷦鷯尊」에게완전히 皇位를 내주고, 자살해버리고 만다. 이 설화를 간단히 믿어서는 안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이후로, 상속순위가 자식으로부터 형제에게로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왕조의 교체를 示唆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 3년간의 免税 후, 仁徳은 어땠을까?
실은, 3년뒤에도 한동안 免税는 계속되어, 『日本書紀』에 따르면, 仁徳 10年에 처음으로
課税가 허용되었지만、『高句麗好太王碑』의 4年後에、다시「倭国」이 공격해 왔다고 하는 記述에 묘하게 符合하고 있지 않는가?

 결국、「高句麗」와의 전쟁에서 대타격을 입었던 야마토 정권은 그후、仁徳때에  国力을 충실히 한 위에, 「高句麗」攻略을 재개했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 결과도 다수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한 것으로 그것은 무참한 것이었을 것이다.


仁徳은、国土 부활을 위해서인지 토목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생각되는 것은 「高句麗」로부터의 보복이 아니었을까? 413年 돌연 中国에의 朝貢은、国力의 회복을 기대하고, 中国「宋」으로부터의 원조를 부탁하는 것일 것이다.
더우기「高句麗」도 同年에 「宋」에 朝貢하고 있는 것이다.


「高句麗」가 먼저인지 야마토정권이 먼저인지는 알수 없지만 야마토 정권으로서는 「高句麗」보다 먼저、「高句麗」가 선수를 치면 더더욱、어떻게해서건 大国「宋」에게 국가로서  인식받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悲哀에 찬 倭王「武」의 上表文으로부터도 推察할수 있을 것이다.
上表文에 「그런데 高句麗가 無道하여」라는 一文이、확실히 記載되어 있다.


8.「倭 5王」이 아니고「倭 6王」이었다.

다시한번,「倭 5王」의 系譜를 掲載한다.

   『宋書倭国伝』          『梁書倭国伝』

   ┌讃               ┌讃
   ┤    ┌興          ┤   ┌興
   └珍  済┤           └弥─済┤
        └武              └武

倭王「讃」이 仁徳이라고 한다면, 倭王「珍」은 누구에게 否定되었던 것일까?
「珍」은「讃」의 弟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仁徳의 弟는 자살했던「莵道稚郎子」이지만, 仁徳에게 皇位를 양보하면서 자살하고 있기때문에、即位는 하지 않고 仁徳이 즉위하기 전에 자살하고 있다.
이것으로는 해당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만,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 것인가?

거기에서『日本書紀』로 본 仁徳系 天皇의 系譜와 비교해보자.


仁徳系 天皇의 系譜를 간단히 적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日本書紀』


      ┌履中
    仁徳┼反正
      └允恭┬木梨軽皇子
         ├安康
         └雄略

설명은 別章에서 하지만, 倭王「武」가 雄略天皇으로 比定되는 것은、通説이며 異論이 없다.따라서、世子「興」은 安康天皇이나 「木梨軽皇子」(키나시노 카로노 미코)의 어느 人物이 된다. 그 父인 倭王「済」는、당연 允恭天皇이 된다.

단、允恭의 이름은,「雄朝津間稚子宿禰」(오아사츠마와쿠고노 수쿠네)이며, 왜「済」의 문자가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또、天皇의 이름에 신하의 姓身을 나타내는 「宿禰」姓이 붙어 있는 것도 모르는채이다.

 그러면 倭王「珍」은 履中이나 反正의 、어느 天皇에 比定될수 있지만, 앞에서 설명한대로、 이 두 天皇은 仁徳의 자식이며 동생이 아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열쇠는  11回의 外交記述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이 記述 가운데에、倭王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 것에 눈치챌수 있다.

   「430年 倭王『?』、『宋』에 遣使」

이것이 그 記述이지만、이 倭王을 「倭 5王」이 아닌 독립한 倭王으로 생각하면, 훌륭히 설명할수 있을 것 같다.

   『宋書倭国伝』에서는、

   「讃이 죽고 弟 珍 즉위하다」

라고 기록하지만, 실제는 倭王「讃」과 倭王「珍」의 사이에、430年에 朝貢했던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倭王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 倭王이「讃」의 자식이며, 倭王「珍」은 그의 동생이었다. 결국, 「倭 5王」이 아니고「倭 6王」이지 않았을까?
여기에 中国側의 오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説은、水野祐氏의 説로서 유명하지만, 그 倭王이야말로 『梁書』의 倭王「弥」이 아닐까 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倭王「珍」이「弥」의 誤記라는 것은、『宋書』・『梁書』를 비교 검토해보면, 분명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欠名의 倭王「?」인채로 두기로 하자.

그렇다면, 中国側의 기록의 「倭 6王」에 대하여, 『日本書紀』의 仁徳부터 雄略까지의 6天皇이 数가 1명 늘어난채로 꼭 그대로 일치한다.


   修正『宋書』의 系譜         『日本書紀』의 系譜


    ┌?                 ┌履中
   讃┤   ┌興           仁徳┼反正 ┌安康 또는  木梨軽皇子
    └珍 済┤              └允恭─┤  
        └武                 └雄略


 여기에서 지금까지 확실한 것을 정리해보면,
    「讃」=仁徳、「武」=雄略、「興」=安康  또는 木梨軽皇子、「済」=允恭이 된다.

또 즉위순서로 본 경우에는、「?」=履中、「珍」=反正이 된다.
反正은 본명이 「多遅比瑞歯別」이며、가운데의「瑞」字를「珍」에 해당하지 않을까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9. 允恭天皇 即位의 謎

『宋書』에서는「珍」과「済」의 혈연관계를 일체 기록하고 있지 않다.
『日本書紀』에서는 反正과 允恭은 형제이지만, 실은 이『日本書紀』의 系譜에는 의문을 갖고 있다. 『宋書』의 記述은 혈연관계의 記述을 누락시킨 것이 아니라、혈연관계가 아니었기때문에 記述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允恭의 이름인 「雄朝津間稚子宿禰」때문이다. 天皇의 이름에「宿彌」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상한 것이다.

 이것을 신분이 급상승한 天皇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雄朝津間稚子宿禰」는 즉위할때,
  「国家를 책임지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자신은 병든 몸으로、도저히 감당할수가 없다」
라고 즉위를 승낙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仁徳의 때와 마찬가지이다.


 仁徳은 왕조교체에 의하여 즉위한 천황이었다. 따라서、臣下의 간청으로 간신히 즉위했다고 『日本書紀』는 기록하고 있다.

후대의 継体도 王朝交替라고 말하지만, 역시 간청을 받고 어쩔수 없이 즉위했다고 한다.
允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日本書紀』는 기록하지 않은채로, 혹은 「宿彌」姓의 신하가 구테타를 일어켜 反正을 쓰러뜨리고、天皇에 올라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実은『日本書紀』는、反正의 업적을 무엇하나도 기록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欠史八代와 거의 비슷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것도 또 수상쩍은 材料이다.

『宋書』의 기술대로、「珍」=反正과 「済」=允恭과의 사이는 혈연관계가 없는 것이 아닐까? 『梁書』가 두사람을  親子로 한 것은、『宋書』를 읽고 추측하여 記述한 것일까?
万世一系를 주장하는 『日本書紀』는 王朝의 교체를 記述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일 정권아래였으므로、王朝의 교체라고는 말할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때 분명히 왕권의 혈연관계는 仁徳系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応神 혹은 仁徳부터 武烈天皇까지를、応神系 王朝라던가 仁徳系 王朝라고 말하고 있지만, 예를들면, 仁徳系 王朝는 仁徳・履中・反正까지이고, 允恭・安康・雄略과 武烈까지는、雄略系 王朝라고 부르고 싶다.

允恭系 王朝라고 불러도 상관없지만, 雄略=「武」의 事績의 크기로부터 雄略系라고 말하는 편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여기서 앞서 소개했던 倭王「武」의 上表文을 꺼집어내고 싶다.


 冒頭 부분에

  「우리나라에서 倭王 武의 祖父 弥의 시대부터 武装하여、」

「祖父 弥」이라고 記述했지만,  이것은 水野祐氏의 번역이므로 原文은「祖禰」인「弥」이 아니고 「禰」이다. 「禰」는「宿禰」의「禰」이며, 允恭天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그런데、候補가 安康・「木梨軽皇子」라고 하는 2명의 世子「興」이지만, 倭王「興」은 安康일 것이다. 이름은「穴穂皇子」(아나호노미코)이다. 


「穂」는 古音으로 횬・힌으로 발음되는 것같고, 同音인「興」에 해당한다는 것이 通説이다.
단, 『日本書紀』에 의하면、安康은 즉위후 3년에 죽고말아서, 倭王「興」의 朝貢으로부터 倭王「武」의 朝貢까지의 15년간은、약간 너무 길어졌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황실내에서의 우당탕거리는 연극이 원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은 본래、允恭의 皇太子는「木梨軽皇子」이며、「穴穂皇子」가 아니었다.


그렇지만,「軽皇子」가 同母 妹인「軽大娘皇女」(카루노 오오이랏츠메노 히메미코)를 범했기때문에, 諸臣 에 심복이 없게되고, 「軽皇子」는「穴穂皇子」를 죽일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즉위한 것이 安康이다.

그런데  安康은「眉輪王」(마유와노 오오키미)에게 살해되고 만다.
「眉輪王」은、仁徳의 皇子였던 「大草香皇子」(오오쿠사카노미코)와「中蒂姫」(나카시히메)와의 사이에서 난 子이지만, 父였던「大草香皇子」가 安康에 의해 죄없이 살해되고 말았다. 그후 「中蒂姫」는 安康의 皇后가 되어, 어린 「眉輪王」은 安康에게 양육되었지만, 엉뚱한 곳에서 그 전모를 알게되고 말았다.
 

그러한 가운데에「眉輪王」은 父의 복수를 하여、安康의 잠자는 목을 베고 말았다.

이것으로서는 倭王「武」가 즉위했다고 하더라도、朝貢도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倭王「武」의 즉위는、年月을 필요로 했을런지도 모른다.
가령,「興」이「木梨軽皇子」이었더라도 차세대에 영향은 적다. 차라리、仁徳天皇 이래 兄弟相続이었던 皇位가、「興」에 이르러서 아들에게로 되돌아갔다는 쪽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修正『日本書紀』의  系譜


     ┌履中
   仁徳┤     ┌安康 또는   木梨軽皇子
     └反正 允恭┤  
           └雄略



10.이제는 謎의 4世紀는 없다.


日本 最古의 漢詩集에 『懐風藻』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751年에 만들어 진 것으로서  撰者는 모른다. 関祐二氏의 著書에 흥미있는 부분이 있어 인용해본다.


「神代부터 지금까지、우리나라 법에 의하면, 子孫이 상속하여 天位를 이어가도록 되어있다. 혹시 兄弟가 상속하면, 반드시 乱이 일어났었다.
하늘의 마음을 추측할수는 없지만, 이 事態를 보면, 누가 皇位에 올라야 하는 가는 자연히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왜 이것 저것을 뒤섞어놓는가? 」(『天武天皇 감춰진 정체』)


이 一節은、「葛野王」(카도노오우)가 天武王朝의 後継者・「高市皇子」(다케치노 미코)의 죽음에 의하여 일어났던 후계자 문제를 결정해야하는 긴급회의의 장면인 것 같지만, 이 一説로서 다른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당연한 의견이었던 것이다. 天武王朝를 비꼬는 의견이라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兄弟가 皇位를 이으면 乱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보다 과거에 무언가  乱이 일어났던 것이다. 天武天皇은 天智天皇의 동생이라고 하므로 그 황위계승에는 「壬申의 乱」이 있었다.


継体天皇이 죽은후 皇位를 이었던、安閑・宣化 両天皇은 兄弟相続이었다.
『日本書紀』는 『百済本記』를 인용하여,

   「日本의 天皇 및 皇太子・皇子 모두 죽고 말았다.」

라고 하고 있다.


그외에 잘 알려져 있는 형제상속으로서는, 仁徳・履中・反正과 安康・雄略이지만,이 가운에에서 允恭의 후、「眉輪王」에 의하여 安康 살해가 일어났다.

또한 仁徳・継体・天武의 3天皇은、왕조교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 3天皇은 어쩐지 형제상속이라고 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安康天皇의 경우는 돌연 살해당해버리므로  형제상속으로 되는 것이 부득이할지 모르지만,
다른 경우는 왕조가 교체하고 있는 것이다.


允恭・安康사이는 子孫상속이므로、兄弟相続인 仁徳王朝와는 달랐다.
前述한 대로、允恭天皇으로부터는 仁徳系 王朝의 혈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알기쉽게, 왕조교체라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슬슬「倭 5王」의 정체가 보이지 않는가? 私見에는 5王이 아니고, 6王이었지만, 순서대로 기재해가면,

仁徳=「讃」
履中=「?」、
反正=「珍」이었다.여기에서 王朝의 교체가 일어나 아마 신하에 의한 구데타인것 같지만,
 

允恭=「済」가 즉위했다. 다음으로
安康=「興」、 최후로
雄略=「武」였다.
   

安康은 、前 王朝・仁徳의 皇子「眉輪王」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지만, 어찌저찌해서 동생 雄略이 王位를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尾張王・호무다마와카王 에게 데릴사위가 된 호무시와케는、「旧奴国」세력을 이끌고、崇神系 王朝를 무너뜨렸다. 단 여기까지의 지도자는 호무시와케가 아니고 호무다마카王이었다.


崇神系 王朝를 쓰러뜨린 尾張・旧奴国 연합세력은、그 세력 과시를 위하여, 朝鮮出兵을 꾀했다. 라고 해도 그 적국은「高句麗」이며、「統一奴国」이전때부터의 宿敵이었다는 것을 회상해두고 싶다.

또「百済」・「新羅」로서 보아도, 「高句麗」의 약체화는 国家安泰를 위해서도、필요불가결한 것일 것이다. 게다가、「高句麗」와 함께 最前線을 담당해주기 때문이다.


「倭国」軍의 침공은 「新羅」로부터 보면, 횡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큰 저항없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高句麗 好太王 碑文』은「倭国」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의하여, 「好太王」의 威勢를 보다 과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碑文에 있는대로「百済」・「新羅」가、「倭国」의 属国이 되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도 史実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百済」・「新羅」와 함께 야마토의 군사연방하의 산하로 된 것으로, 「新羅」는가만히 「高句麗」와 손잡은 것이다.
 
이러한 야마토 정권의 정책은、王朝가 바뀐 安康天皇 이후에도 받아들여져  갔던 것 같다.
단 거듭된 「高句麗」공략의 실패로、「百済」・「新羅」로부터의 신용도 실추하여,「倭国」軍은 얕보고 경시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후의 정책은 「高句麗」攻略으로부터 、南朝鮮의 安定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新羅」가 그 무거운 허리를 펴 공격했던 나라는 「高句麗」가 아니고、「伽耶」였던 것이다.

倭王들이、「宋」에 朝貢하여 받은 官号는、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国諸軍事・安東大将軍・ 倭国王」
이었다.


朝鮮半島의 諸軍事를 몸소 담당하면서도、왜인지「百済」는 인정받지 못했다.
통설로는 「百済」는「宋」에 朝貢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정말이고, 야마토정권보다도 앞서 朝貢하고 있었다면,야마토 諸軍事 담당의 件은、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新羅」는「百済」보다、文明・문화적으로도、군사적으로도 뒤쳐졌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늘「百済」의 침략의 손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을까? 「新羅」에게 있어서의 敵国은、「倭国」이전에「百済」였었다. 그것이 일찍부터 「高句麗」와 손잡은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新羅」가 가만히 「高句麗」와 손잡은 対抗上、「百済」는 「宋」에게 朝貢하여、야마토 정권과 손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 복잡한 조선반도 정세를 야마토 정권은、바르게 판단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倭王「武」인 雄略天皇의 세대를 전후하여,「倭国」우위의 조선외교에 그늘이 드리워져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야마토 정권은 이 両国、혹은「伽耶」까지 포함한 朝鮮半島의 정치정세를 무시하는 것 같이,「高句麗」대책에 전력을 걸고 있은 것 같았다.  그것은 倭王「武」의 上表文에 보여진다.


  「高句麗가 無道하여」


 라는 一言으로서、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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