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수수께끼의 歴史書『日本書紀』와 『古事記』
2.『漢書』에 기록된 「倭国」
山海経 - 일본에 대하여 최초로 기록
前漢書 - 「楽浪 海中에 倭人이 있는데、百余国이 흩어져 있다. 歳時로 와서 献見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後漢書 - 다음 구절이 유명하다.
「建武中元二年(57)倭奴國、貢物을 바쳐 朝貢하다・・<中略>・・ 印綬를 하사받다」
(志賀島에서 발견된 漢委奴國王이란 金印은 이때의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安帝永初元年(107)에는、倭国王・「帥升」이 朝献하고 있다」
※ 後漢은 魏보다 앞시대의 나라이지만 後漢書는 三国志보다 늦게 씌어졌으므로 後漢書의 倭国伝은 、『三国志』의 魏志倭人伝을 참고로 하여 저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구절만은 後漢書 독자의 記述로 보인다.
기원후에 일본에서 邪馬台国 이전에 중국에 朝献할수 있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 비록 소국이지만 「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前漢書』에는
楽浪 海中에 倭人이 있는데、百余国이 흩어져 있다. 歳時로 와서 献見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倭国이 100개 이상의 나라로 분열되어 존재하고 있고 그 나라들이 楽浪郡에 通貢하고 있다고 한다
※ 前漢書의 기술연대는 기록되어 있지않지만 、「前漢」은 기원 8년에 멸망당했으므로 위 기록의 내용은 대략 기원전 1~2세기경의 「倭」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고 이 시대에 이미 일본해를 항행하여 중국에 朝献할수 있는 정도의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다
3.『後漢書』의「倭面土国」과『魏志倭人伝』의「邪馬台国」
『三国志、魏志東夷伝・倭人条』에는 日本을「倭国」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을 「와고꾸=와국」으로 발음할수도 있지만 『古事記』에는「倭」를「야마토」라고 표기하고 있다
『後漢書』에는、「倭面土国」이라고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야마토의 발음을 中國風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翰苑』의『後漢書』에는「倭面上国王師升」이라고 하고있고、「倭面土国」이라고 하는 것은 北宋版他의『通典』이다)고대로부터 일본의 국호를 야마토라고 발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중국으로부터 본 「倭国」이란 것은 일본의 국호로서가 아닌 동방해상의 섬이란 뜻으로 사용하여(조선반도의 일부도 포함되었는지 모르나) 「倭人」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魏志倭人伝에는 「倭国」안에는 21개의 국명이 기록되어 있지만 「倭国」자체는 국호로서 사용되지는 않았다.
宋書倭国伝은「倭의 五王」을「讃」・「珍」・「済」・「興」・「武」一字로 기록하고 있고
「야마토」도「倭面土国」의 一字로서 「倭」를 표기하고 있다
『旧唐書、倭国・日本伝』에는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其人入朝者、多自矜大、不以實對、故中國 ...
「日本国은 倭国의 別種이다。해가 뜨는 방향(동쪽)으로 나라가 있기 때문에, 일본이라고 하는 국명으로 했다.
혹은、倭国이 국명으로 부끄러워 스스로 일본이라고 개정했다고도 한다. 혹자는 日本은 旧小国、倭国의 땅을 병합했다고도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日本이라고 쓰고 일관되게 야마토로 발음하고 있다.
『魏志倭人伝』에는、「邪馬台国」이 등장한다 -「야마다이고꾸」
「邪馬台」는「야마토」이지 않는가?
言語学者 加治木義博氏는、「邪馬台」를 고대일본에서는 「쟈무데이」로 발음하며 그 의미는「首都」라고 말하고 있다. 그 당시 큐슈의 어딘가에 있었던、「邪馬台国」은、큐슈지방에 존재했던 나라의 수도였던 것이며
近畿의 大和는 大和조정시대의 「首都」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近畿의 大和는 오랫동안 「首都」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지명으로서 정착했다고 생각할수 있다.
4.倭国王・「帥升」
前漢書 - 「楽浪 海中에 倭人이 있는데、百余国이 흩어져 있다. 歳時로 와서 献見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대는 弥生시대 초기였으며 弥生문화권을 가진 대집락으로부터 縄文文化圏의 가족단위까지 여러 집단 이 점재해있었을 것이다)
後漢書 - 「建武 中元 二年(57년)倭奴國、貢物을 바쳐 朝貢하다・・<中略>・・ 印綬를 하사받다
( 이 시대 印綬했다는 漢委奴國王의 金印이、志賀島에서 발견되었다.
그 위치로부터 큐슈의 어딘가에 어느정도 통일되고 중국에 朝貢할수 있을정도의 국력을 가졌던 국가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 나라가 「倭奴国」인가、「倭」의「奴国」인가라고 묻는다면 「倭」의「奴国」이었다.
이 시대의 중국에서는 「倭」를 국호로서 보고 있다고 생각할수 없다.
이어서、安帝 永初 元年(107년)에는、倭国王・「帥升」(수이쇼우)가 朝献하고 있다. 이「倭国」이 앞에서 말한 「倭面土国」이다.「倭奴国」과 「倭面土国」은 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安帝 永初 元年(107년)에 朝献했던 「帥升」은、정확하게 말하면、「倭」의 땅으로부터 온, 국호가 「奴国」이고 王의 이름은「帥升」이었고 「奴国」의 首都야말로「倭面土国」이었던 것이다
「奴国」은、일반적으로「나고꾸」, 혹은「누고꾸」로 발음되며「帥升」은「수이쇼우」로 발음되고 있다
이 倭의 奴国王・「帥升」는『後漢書』에 의하면、漢의 수도、落陽까지 가서 皇帝 孝安帝를 会見했다라고 하므로 상당한 세력자였을 것이다. 대략 상당히 통일된 국가였음에 틀림없다. 일본열도인「倭」의 땅에서 처음으로 외국에 그것도 그당시 최대의 나라 後漢에 인지된 나라이기도 하다.
또『後漢書』에는
「桓・霊간에 倭国에 큰 혼란이 일어나・・몇년이 지나가다」
倭国大乱이다 - 通説로는、167年~168年에 걸쳐서 倭国大乱이 발발했다는데 이론이 없다
倭国大乱의 이유가、70~80年간 계속되었던 男王이 죽고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후 女王을 共立하여 다스리기 시작했는데 그 여왕이 바로 『魏志倭人伝』에서 말하는 히미꼬이다
이 문맥으로부터 추측하면 「倭」의 땅의 奴国王・「帥升」의 죽음이 倭国大乱의 원인일 것으로 생각된다
「奴国」은「帥升」의 죽음에 의해 분열하여 일제히 독립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된다.
「奴国」자체가 「帥升」에 의해 통일되어 있던 다민족국가이었을 것이다.
奴国王・「帥升」이 죽음으로써、「奴国」이 분열하고 독립전쟁을 시작한 것이 167년이며 가령 남왕시대를 70년간이라고 한다면 倭国王・「帥升」이 왕위에 있었던 것이 97년경이었던 것이 되어 57年에 朝貢했던「倭奴国」은、「帥升」의 시대로는 도저히 있을수 없다. 더구나 「師升」가 대단히 젊어서 왕위에 오른 것이 된다.
가령 85세에 죽었다고 한다면 15세에 왕위에 오른 것이 된다.
또 선왕으로부터 「帥升」에게 왕위가 넘어온 시기에는 、『漢書』에 전쟁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다민족국가가 아닌 「奴国」의 이야기이며 그후 、「帥升」에 의해 주변제국을 병합시켜 다민족국가가 되었다고 생각할수 있다. 이것을 、「統一奴国」이라고 한다면、「統一奴国」이 가능했던 것은 、「帥升」이 朝献했던 皇帝에게 会見을 신청했던 107年 직전의 일일 것이다.
젊은 왕이、「統一奴国」을「漢」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朝献했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앞에서의 연령으로 계산하면 이때 「帥升」은 25세이다. 나는 이 倭国王・「帥升」이 사람이야말로 젊은 수사노오였다고 생각한다.
수사노오는 「帥升王」(수이쇼오우)의 음운변화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帥升」은、「統一奴国」의 초대왕이므로 「始祖」이며、「始祖王」(시소오우)라고 불리는 인물을 漢書가「帥升」이라고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神社伝承学으로부터、「수사노오는 建国의 始祖」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또 「奴国」의「奴네」는、「な나」「ぬ누」로 발음되지만, 이것을「ね네」의 변화라고 한다면「奴国」은「根国」이며、「根国 뿌리의 나라」이다.『記紀』에 의하면 「根の国」라는 것은、「伊弉冉尊」(이자나미노미코도 이하 이자나미)가、죽어서 갔던 나라이며、수사노오가 다스렸던 나라「出雲」이었다.
이시대의 발음은 상당히 변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현재에도 出雲지방은、東北弁에 가까운 즈ー즈ー弁이다。
「수이쇼우」・「시소오우」・「수사노우」을 입을 열지않고 ズーズー弁으로 発音해보라.
거의 같은 발음이 된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なこく나고꾸」도「ねこく네고꾸」도 같은 발음이 된다
이자나미는 伊弉諾尊(이자나기)의 妻이면서, 『記紀』에는 死後의 모습과、悪意를 가지고 기록되었다고 밖에는 생각할수 없을 정도이다. 결국 이자나미도 出雲系의 神으로서、묘사되고 있다.
수사노오가 이자나미의 実子인지 아닌지는 추정할수 없지만 「出雲」은 이자나미가 「根의国」에 갔다고 하는 『記紀』의 기록으로부터 본래는 女王国이었는지도 모른다
5.渡来集団・수사노오族
「帥升」이라는 것은「始祖王」이며、수사노오였다고 결론지었다.
또한、「奴国」은『記紀』에서 말하는 「根の国」라고 기록되어 있는 나라、즉、「出雲」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奴国」이전의 수사노오의 행동은 전혀 불명이며 그것이야말로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日本書紀』一書・第四에 의하면、수사노오는、高天原을 떠나서 「新羅」에 강림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배로 、「出雲」으로 건너갔다.
또한 一書・第五에는、배의 재료로 적합한 목재까지 언급하고 있다. 朝鮮半島로부터 온 渡来人일 가능성이 크다. 九州가、일찌기「筑紫」(츠쿠시)라고 불리었으며, 이 음운이 ズーズー弁으로 発音했던「츤구시」와 마찬가지였다는 것으로부터 몽골계였다는 것을 생각할수 있다. 또한 일본인이 몽골로이드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로 지금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朝鮮半島로부터 日本海를 거쳐 다다른 땅이라고 말하면 北九州와 新潟의 가운데 였을 것이다.
도착지점이、「出雲」이었다는 것도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지만, 여기는 朝鮮半島로부터 壱岐・対馬를 지나 、北九州의 어딘가에 다다랐을 것이다.
물론 수사노오만이 아니고 、一族(수사노오族)에 따른 集団渡来이었을 것이다.
渡来했던 직접의 원인은、朝鮮半島를 남하해 온 高句麗族에、抵抗할수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日本海측의 철자원을 구하여 도래했을런지도 모른다
『魏志東夷伝』을 보면、조선반도는、「馬韓」・「弁韓」・「辰韓」으로 갈려져있으며, 남조선에서는 철이 나기 때문에 「倭」와 그 외의 제국들은 그 철을 구하기 위하여 왕래했다고 하며, 수사노오족은 남조선에서 제철에 종사하던 일족으로 지배계급이었을 것이다. 당연, 이 땅은 침략지배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결국 전쟁에 지친 수사노오족은 고향을 떠나 일본열도에서 활로를 구한 것이다.
고대의 문명은 조선반도를 거쳐서 왔으므로 수사노오족의 문명은 당시 일본열도의 문명보다는 발달해있었다는 것은 틀림없고, 농업, 어업, 항해술에 뛰어났던 수사노오족이 九州의 토착세력들을 회유해나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백여국에 달했던 일본열도의 나라들(이라고 해도 서일본의 일부였지만)중에서 수사노오족을 중심으로 결속했던 「奴国」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漢」에의 朝貢은、만반의 준비를 갗춘 것이었다. 그리고、초대 奴国王이야말로、수사노오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당연히、그외 100여개국이 있었으므로 방해공작이나 앞서 조공을 시도했던 나라도 없지 않았겠지만『漢書』에는、
「奴国」이외의 朝貢기록이 없으므로 、다른나라들도 납득하지 않을수 없을정도로 「奴国」은 강대한 나라였을 것이다. 또 수시노오는 九州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初代 奴国王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수사노오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대략 기원전 97년이었다
6.建国의 始祖「素戔嗚尊」수사노오
초대 奴国王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수사노오는 추정 15세 무렵이지만, 수사노오의 사망연령으로부터 추정하면 이때 10~20세 였다는 것은 틀림이 없을것으로 생각된다. 젊은 왕에게 일국을 다스릴 힘이 있을 리가 없고 당연히 참모격인 武将이나 智将등이 정무를 관장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もののふ 모노노후」라 불리는 武士들이며, 呪術集団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자야말로 후일의 「物部氏」이다
수사노오를 왕으로 한 「奴国」은、107年까지는 九州 전토를 거의 장악했다고 생각된다.
수사노오와 그의 아들・「大歳」(오오토시)가 함께 鹿児島県에 이르기까지 、九州지방의 神社에 넓게 제사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해, 「奴国」을「倭面土」(首都의 의미)로 한 일대국가・「統一奴国」의 국왕이 된 수사노오는 「後漢」의 수도、洛陽을 향해 떠나、孝安帝에게 면회를 요청한 것이다. 이때의 나이는 대략 20~30세 경으로 추정된다.
大国・「後漢」의 皇帝에게 직접 면담을 구한 대담한 발상은 혈기왕성한 젊음이 아니고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포로 160명을 데려갔다고 후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수사노오는 세력을 이끌고 시모노세키 해협을 걸쳐 「出雲」으로 향해 갔다. 「出雲」의 鉄자원의 소문을 어딘가로부터 들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땅에는 이미 八岐大蛇(야마다노 오로치)가 지배하고 있는 땅이었다.
『記紀』神話에서는、高天原을 쫒겨난 수사노오가 、出雲의 땅에서 야마다노오루치의 人身御供에 받치려고한 「櫛稲田姫」(쿠시이나다히메)를 야마다노오루치를 타도하고 구출하여, 부부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古事記』에서는、「高志」(고시)의 、야마다노오루치라고 하고 있다.「高志」는「越」로서、지금의、新潟県이지 않는가?
또『日本原紀』의 저자인 朴炳植氏에 의하면 、「越」은、「高句麗」이며、朝鮮半島로부터 日本海를 건너、高句麗人이 정착하고 있던 땅이 「越」이라고 한다。야마다노오루치라는 것은 、큰 무리의 「오리」또는 「오로」라고 불렸던 「越」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오리베훈도시」라던가「오롯베훈도시」가、「越中훈도시」인것으로부터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語りべ 카타리베」・「下僕 げぼく」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べ베=人」이며 이외에도 사람의 의미를 나타내는 古語로서、「ち치」가 있다고 한다
『記紀』에는、「越」의 중심지대인 能登半島에、「高句麗国」사절이 늘 도착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고구려국은 、건국후 약 70년을 경과하고 있으며 국력도 충분히 신장되어 있었다.
「高句麗」는、「고우구리」라고 발음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코-리」이며 「리」는 간단히 「시」로 음운변화하는 것으로부터 (예:「얏바리」가、「얏바시」), 오로치라고 하는 것은 「高句麗」인, 高句麗族인 것이다.
더군다나 수사노오族은 牛頭山을 聖山으로서 「高木의 神」을 숭배하고 있던 「伽耶」의 제철집단의 지배계급이었다.
朝鮮半島를 남하해오는 고구려족의 세력에 떠밀려 일본열도에 망명해왔지만, 고구려족은 이미 일본열도에까지 도달해있었던 것이었다. 더욱이、「越」부터「出雲」에 이르는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었다.
또한 前述한 朴炳植氏는、야마다노오루치에게 매년 바치고 있다고 하는 「櫛稲田姫」(쿠시이나다히메)의 姉七人이라는 것은、벼농사의 収穫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越」(新潟県)으로부터 온 高句麗族이、「出雲」의 斐伊川의 水利가 좋은 평야에서 벼농사를 짓고있던 사람들로부터 매년 갓수확한 벼를 빼앗는 폭거가 7년간 계속되어 왔다고 말할수 있다.
朴氏는、벼농사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을 「伽耶인」이라고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수사노오족도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반도로부터 온 다른 도래자 집단이라고도 생각할수 있다
매년 「越」의 高句麗族에게 시달리고 지배당해왔던 「出雲」의 사람들에게는、「物部」의 대군을 끌고온 、젊은 수사노오의 모습에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마침내는 고구려족 추방을 위하여 함께 싸울 결심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出雲」의 주민들에게는、항해술이 우수하고、「統一奴国」을 성취했던 수사노오가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수사노오와 「出雲」은、同郷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両者간 거래가 이루어졌다. 수사노오에게 「出雲」의 통치권을 약속하는 대신에 고구려족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出雲」이라는 것은、西出雲지방이다.
거래에 응했던 수사노오는 그해 가을 아무것도 모르는 고구려족을 격파하고 西出雲을 지배하에 두어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草薙剣(쿠사나기노 츠루기) 天叢雲剣(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는、고구려족으로부터의 전리품일 것이다
天叢雲剣에 대하여、『日本書紀』는、
「큰뱀이 있는 위에는 늘 구름이 서려있어서 이름붙혀졌다 」
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구름이 낀 하늘과 같은 광채라고 해석되는 鉄剣이며, 수사노오의 剣은 큰뱀의 꼬리를 짤랐을 때 칼이 망가졌다고 하므로 청동검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神社伝承学에서는、그후、오로치족으로부터 보복을 두려워한 수사노오가 「出雲」의 나라를 피해 숨었다고하고 있으므로 우연적인 요인으로 승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후 어쨋건 고구려족을 제압하므로서 수사노오는 「出雲」의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수사노오는 그 본거지를、島根県 大原郡 大東町 須賀에 있는 현재의 「須賀神社」에 정했을 것이다
「八雲立つ 出雲八重垣 妻ごみに 八重垣つくる この八重垣を」
이 노래는 수사노오가 이 땅을 거주지로 정했을 때 부른 노래라고 고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 和歌의 시초--出雲의 몇겹이나 둘러친 울타리에 아내를 두고란 뜻,
八雲-여러겹의 구름, 八重垣-몇겹이나 둘러친 울타리)
이후로 이땅을 「出雲」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결과 수사노오는 큐슈지방과 西出雲지방을 장악하게 되었다.
수사노오는 이 지방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것 같고 、神社伝承学에 의하면 이 지방에서 죽었다고 한다.
죽은 장소는、松江駅으로부터 南13Km의 八束郡 八雲村의 땅에서 、거주지와는 반대측의、意宇川 부근이었던 것 같다.
주거지로 이 땅을 선택한 이유는、清太(西利太)製鉄所에 가까운 점、그 清太로부터、당시에도 요충지였던、松江市로 통하는 길목이었던 것등이지만, 거주지였던「須賀神社」의 후방에 현재에도 八雲山이 있는 것은 후일의 스토리에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고대 八雲山은、三室山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神社伝承学에서 수사노오는 대단히 용맹하며 강하여 평생 싸워서 패할줄 모르고、「出雲」・「隠岐」을186村으로 나누어 각각에 村長을 두어 (이 村長이、현재 그 지방의 神社에、神으로서 모셔지고 있다)、西出雲에는、支庁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神社伝承이외에는、조사할 수단이 없지만 인자한 명군이었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을 것 같다.『出雲国風土記』에는、名君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수사노오의 바뀐 이름은 「神祖熊野大神奇御食野尊」(카무루기구마노 오오가미 쿠시미게누노미코도) 라고 하며 현재、島根県 八雲村의「熊野神社」에 모셔져있다.
「出雲」의 신이라고 말하면、出雲大社의 「大国主命」(오오구니노 미코도, 이하 오오쿠니누시)가 연상되지만、「出雲国」에서、더욱더 존경받는 신이라고 말하면,「大穴持命」(오오나무치노 미코도 이하 오오무치)와「熊野加武呂乃命」(쿠마노가무로기노 미코도)이다.
오오나무치는 오오쿠니누시이며、 「熊野加武呂乃命」라는 것은「神祖熊野大神奇御食野尊」결국、수사노오였던 것이다.
『出雲国風土記』에는、『記紀』와는 전혀 다른 나라끌어오기 神話가 있다.
「八束水臣津野命」(야스카 미즈오미 츠누노 미코도 이하 얏츠카미즈오미츠누)가、「新羅」와「北門」과「越」의岬으로부터 땅을 끌어당겨서 작은「出雲」이 크게 넓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나라들은 고구려족이 지배하고 있던 나라들이었다.
그후 더욱더 東出雲지방으로부터、「越」에까지 군을 진격시켜 고구려족을 제압했던 수사노오 (실은 오오나무치命을 軍師에 임명하고 있다)는、고향인 남조선의 철자원을 구하여 도항했다고 생각한다. 수사노오의 무용담은 바다를 건너 조선반도에 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노오족을 일본열도로 쫒아냈던 조선반도의 고구려족은 큰 저항도 보이지 않고 분산해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하여 北九州로부터 「越」에 걸쳐서 南朝鮮과 日本海 文化圏을、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7.「大国主」가 된「大己貴命」
『出雲国風土記』에서는、나라끌기 神話의 얏츠카미즈오미츠누 야말로、出雲国의 이름이 붙혀진 신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얏츠카미즈오미츠누가 이 땅을 「八雲立つ出雲」이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古事記』에 기록되어 있는 수사노오의 노래와 똑같은 내용이다. 고사기에는 얏츠카미즈오미츠누가 수사노오의 4세孫으로 되어있지만 의외로 수사노오의 別名이다. 그것은 수사노오의「出雲」에 있어서의 호칭일런지도 모른다
서두가 바뀌었지만 、西出雲을、高句麗族의 세력으로부터 탈취했던 수사노오는 고구려족의 격심한 저항을 마주하면서도 東出雲지방에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意宇郡에 도달할 즈음에 이 지방에도 고구려족에 괴롭힘을 당하던 인물이 있었다. 오오나무치이다. 오오나무치는 수사노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前述한、言語学者인 加治木義博氏는、古代에는 나라를「ラ라・マ마・ヤ야・ナ나」의 하나로 발음했다고 한다.
따라서 오오나무치라고 하는 것은 인명이 아니고 오오나의 귀하신분이란 의미로서 오오나라는 것은「意宇国」(오오나)이다. 즉 수사노오에게 도움을 청해왔던 것은、東出雲지방의 「意宇国」의 국왕이었다.
고사기에 따르면 오오나무치는 수사노오로부터 、生大刀、生弓矢、玉장식이 붙은 琴을 뺏아 도망쳤는데 수사노오는 그것을 허락하고 있다. 이것은 오오나무치를 軍師에 명했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때의 수사노오는 50세에 달했다고 생각된다. 오오나무치가 軍師로 된 것은、수사노오의 딸이었던 「須勢理姫」(수세리히메)가 오오나무치에게 반했다고 하는 고사기의 기록을 신용할 수밖에 없지만 이외에도 정말일런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건 수사노오의 뒷배경이 없으면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軍師였다는 것은 수사노오가 인솔해왔던 、「物部」의 대군을 자유로이 썼던 것이다.
오오나무치가 、「越」의 八口를 무찔렀다고、『出雲国風土記』는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越」의 高句麗族의 최후의 모습이었다.
이것에 의하여 「出雲」・「越」이 평정되어、수사노오는 그 후 남조선으로 건너가 앞에서 말한대로 남조선을 포함한 일본해 문화권을 형성해갔다.
이 문화권은 철자원을 근거로 한 通商連合이었다. 貿易을 생업으로 한것이었다.
통상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게도 굴하지 않는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번 메릿트가 사라지게되면 간단히 붕괴되고 만다(江戸시대의 堺衆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오무치는 수사노오의 배경을 가지고 최대의 무역상대였던 「少彦名命」(수쿠나히코나노 미코도, 대략 조선반도의 「昔」《석》씨姓의 일족 이하, 수쿠나히코나)와 공동으로 무역에 손잡고 국토를 경영해 나갔지만, 그 수쿠나히코나가 죽고 만다. 그 결과 오오나무치는 스폰서를 잃고 만다.
오오나무치는 고사기에 따르면 다양한 지방의 여성들을 처로 삼고 있다.
수사노오의 딸인「須勢理姫」(수세리히메)를 시작으로、「因幡」의「八上姫」(야가미히메)、「越」의「沼川姫」(누마가와히메)、「宗像」의「多紀理姫」(다기리히메)、「鳥取」의「鳥取神」(도도리카미)、「神屋楯姫」(카무야다데히메)등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출신지로부터 바다를 통한 교류의 모습을 엿볼수 있다.
「神屋楯姫」의 출신지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오오나무치의 地元、「意宇国」이었을까?
그런데 오오나무치는 오오쿠니누시라고 하는 별명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 쪽이 더 잘 알려져 있지만『但馬故事記』에는、「彦坐王」(히코이마스오우)이、「丹波」・「但馬」의 두 나라를 받아 「大国主」의 칭호를 받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오오쿠니누시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県知事와 같은 직제상의 칭호였던 것이다.
오오나무치는 수사노오로부터 오오쿠니누시의 칭호를 받아 「出雲」의 자치권을 허락받은 것이었다.
다른 지방에는 그 지방의 오오쿠니누시가 있었고、『記紀』에 기록된 오오쿠니누시의 별명이 대단히 많은 것도 이것으로 설명이 된다.
이때쯤의 오오나무치의 세력범위는、「大和」까지 확대되고 있었던 것 같다.
고사기에는 「出雲」으로부터 「大和」(倭国)에 오오쿠니누시가 출장가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須勢理姫」의 노래와 함께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須整理姫」는、오오쿠니누시에 대하여 「八千矛神」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大和」를 세력범위에 넣은 것은 수사노오였는지도 모르겠다. 神社伝承学에 따르면 「八千矛神」이라고 하는 것은 수사노오였기 때문이다.
「昔」씨 姓의「少彦名命」이 죽음으로써 스폰서를 잃어버린 오오나무치는 남조선의 자금원(철자원)이 끊겨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더더욱, 남조선의 철자원은 수사노오족이 후원하고 있었지만, 그후에 고구려족에게 빼앗겼다.
수사노오는、「統一奴国」을 이루어 고구려족을 추방하므로서 다시 남조선의 철자원을 탈취했던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地盤을 오오나무치가 이어가고 있었지만 、「昔」族은、수사노오族과 同郷이었을 것이다.
「昔」族도 수사노오족도 모두 、「高皇産霊尊」(다카미무스비노 미코도、以下、다카미무스비)를 숭배하는 일족이었을 것이다.
8.「高皇産霊尊」과「素戔嗚尊」수사노오
『記紀』에서는、수쿠나히코나「昔」는、다카미무스비「高皇産霊尊」의 子라고 말하지만、다카미무스비의 別名에「高木의 神」이 있다.
고대、韓国 사람들은、天上界 신들은、山岳에 우뚝 솟은 高木으로부터 降臨한다고 믿고 있었다.
「高木의 神」이라는 것은 극히 朝鮮的인 神인 것이다.
前述한 朴炳植氏는、수쿠나히코나의 일을、「昔」姓의 王家가、「金」姓의 王家에게 그 왕위를 빼앗긴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사건을 355年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私見과는 年代가 맞지 않지만 수쿠나히코나의 죽음은 이것과 가까운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수사노우가、「出雲」을 침공한 이래、「統一奴国」의 本拠地는「出雲」이었을 것이다. 따라서「統一奴国」의 국토경영은、「出雲」에 政庁을 두고 전개해나가고 있었다.「出雲」의 오오쿠니누시(大国主命)였던 오오나무치는、「統一奴国」의 総理大臣격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인물이야말로、「牛頭天王」인 수사노오였던 것이다. 文字대로、天皇이었다.
그러나 스폰서였던 수쿠나히코나「昔」가 죽음으로써 이 법칙이 붕괴되었다. 조선반도에서의 기반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위에 오오나무치에게 닥친 충격의 사건이 일어났다. 수사노오의 죽음이었다.
『記紀』에는、죽은 수쿠나히코나를 오오나무치가 탄식하고 있자, 바다를 비추던 신이 다가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神은、「大和」의 三諸山에 살고 있다고도 말하고, 三輪山의 神이라고도 하지만 이 이야기야말로 수사노오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日本書紀』에서는、이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한다.
「혹시 내가 없었다면, 너는 이나라를 어떻게 다스릴수 있었겠느냐?
내가 있었으므로 너가 큰 나라를 만드는 수완을 세울수가 있었다」
이것은 수사노오가 죽을 때 오오나무치에게 최후의 말을 한 것에 다름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사노우는 자신을 三諸山에 모시도록 오오나무치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물론 「大和」의 三諸山는 결단코 아니다.
오오나무치가 국토경영을 성공시켰던 것은、「出雲」에 있어서이다. 거기에 대략 관계도 없다고 생각되는 、三輪山의 神이、어떻게 끼어들것인가? 확실히、「大和」가 勢力範囲에 있었을런지도 모르지만 、三輪山의 神으로 比定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三諸山은 三諸山이라도、「出雲」의 三室山 즉、八雲山이다. 그곳은 수사노오가 주거지로 정한 장소이며、出雲 発祥의 땅인 것이다.
9.倭国大乱
거칠고 큰 神 수사노오의 죽음은 삽시간에、「統一奴国」전체에 전해졌다.
이 순간부터 다민족 국가였던 「統一奴国」에、긴장이 일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찍이 중국대륙을 통일한「秦」이、「始皇帝」가 죽자 급속히 국력이 쇠퇴하여 각국이 독립전쟁을 일어킨 것과 같이 카리즈마가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죽고난 후의 대국의 말로는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결국은 수사노오에 의한 통일국가였지, 각 민족의 사정에 의한 통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독립기운이 높아지고 전쟁상태로 들어갔다. 자치권 확보를 위해서이기도하고, 왕권쟁탈때문이기도 했다.
다행히 「出雲」은 오오나무치의 국토경영과 수사노오의 본거지였으므로 화를 면한 것 같았다. 큐슈와 바다건너 이었다는 것도 원인의 하나였다. 이 시점에서 「出雲」은 독립국으로 되어 있지만 후세에,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九州지방은、독립을 걸고 전쟁상태였다. 이 때가 167년, 후한서에서 말하는「倭国大乱」이다.
수사노우의 죽음으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九州의「奴国」도 戦火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타국과는 약간 사정이 달랐다.「奴国」은 독립하는 측이 아니고 독립을 저지하는 측이었다. 「物部」를 将으로 한 「奴国」은、독립파를 제압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統一奴国」의 차기 왕권은 、「奴国」의 오오쿠니누시가 잡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다시 통일은 없었다.
이 전쟁상태는、『後漢書』에 기록된대로、「桓・霊 間」계속되었다. 桓帝147~167年、霊帝168~188年이므로 20년 가까이 긴 시간동안에 걸쳐 전쟁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초기전쟁은 민족을 건 대 전쟁이었지만 후반은 소강상태였다고 생각된다. 자치권을 행사할수 있는 범위내에서 작은 경합정도였을 것이다. 소국으로 분열한 후에도 길게 계속된 전쟁상태에 의하여 각국의 국력이 열악하게 되고、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간섭할 여유가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0. 連合国의 出現
推定185年、긴 전쟁상태였던 九州지방도、드디어 사태수습의 길이 열리고 여왕을 共立하여, 연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사노오의 시대와는 달리 스스로 연합의 길을 선택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유를 기록한 문헌은 없지만, 전쟁상태가 길어져 자치권을 확보한 각국의 국력이 쇠퇴해져 있었고, 「奴国」의 뒷방패가 되어 주었던 「後漢」이、184年의 黄巾의 乱을 기화로 하여、中国은 戦乱의 시대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따라、九州지방이 일찍부터 시달림을 받아왔던、高句麗族의 脅威에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수사노오족이、高句麗族으로부터 朝鮮半島를 쫒겨난 시대는、漢王朝 말기의 전란의 시대였었다. 결국 、中国과「高句麗国」의 힘의 발란스가 붕괴되었을 때、高句麗族은 朝鮮半島를 남하해 왔던 것이었다.
漢王朝 末期에는、「後漢」이 일찍 성립되고, 수사노오가 「統一奴国」을 이룩함으로써 위기를 면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어떻게 될지 알수가 없었다.
小国단위의 방어로는、「高句麗国」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連合의 제창이었다. 어느쪽이냐하면 연합이라기보다는 동맹이었을 것이다. 제창을 호소한 것은 역시 「奴国」이었을 것이다. 女王을 共立하는 것은 상당히 좋은案이었다. 이 여왕이야말로、「邪馬台国」의 히미코이다.
이때의 히미코는 15세정도 일 것이다. 대략 히미코는 수사노오의 피를 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孫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각국은 납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사노오의 孫으로서 젊은 여성이었다는 점이야말로 이 共立이 존재할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수사노오의 孫이라는 것이 대의명분을 갗추고, 젊은 여자가 정치를 감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다.
당연히 각국의 대표가 정치의 중추를 담당하게 되어 여왕은 傀儡라고 누구도 예상하게 되었다.
이 제창은 한편으로는 잘되어 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복병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일찍이 「統一奴国」의 보수파가 맹렬히 반대했던 것이었다. 「奴国」은、「後漢」으로부터 「漢委奴國王」의 印綬를 받았던 명문중의 명문이었다. 일찍이 「統一奴国」의 속국에 지나지 않았던、諸国과 대등한 연합에는 절대 찬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결과 「奴国」은 연합추진파와 연합에 반대하는 보수파로 분열했다.
연합이 성공하고, 연합각국의 저항도 있어서 보수파는 「奴国」으로부터 추방되고 말았다. 그중 대부분이 멀리 南九州의 땅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 연합국측은 보수파가 건국한 나라를 「旧奴国」이라고 불렀다.
魏志倭人伝에 기록되어 있는 「邪馬台国」의 최대의 적국、「狗奴国」이다.
11.狗奴国과 邪馬台国
연합관계가 된 九州지방의 각국은 일찍이 「統一奴国」의 수도와는 별도의 땅에다 새로운 수도를 정했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땅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邪馬台国」이며、「邪馬台」라는 것은、首都의 의미였다.
연합국의 정부기관이 설치된 장소를 가리키고, 수도가 있는 나라, 즉 「邪馬台国」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여왕의 共立에 반대하고, 연합에 반기를 든 「奴国」의 보수파는 、南九州 지방에 나라를 건국하고、「狗奴国」(以下、旧奴国이라고 記述)이라고 불리며 연합국측과는 대치하게 된다. 후일 이 「旧奴国」이、혼자서 연합국측에 전쟁을 걸었으므로、「奴国」의 대다수 세력이、「旧奴国」으로 되었던 것 같다.
히미코는 수사노오의 孫이었지만, 정당한 「奴国」의 왕위계승자는 아니었던 것같다. 정당한 왕위계승자는 『魏志倭人伝』에서 狗奴国王으로 기록되어있는 「卑弥弓呼」였다.
첫째 이정도로 닮은 이름은 姉弟였다고밖에 생각할수 없다. 일반적으로는 、「히미코코」「히미쿠코」「히미큐우코」등으로 발음되고 있는듯하지만, 히미코가「日의巫女」라고 한다면、「卑弥弓呼」도「卑」의 字를 뺀「弥弓呼」의 부분이 직업이라던지, 이름이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히미○코」、이 ○의 부분에 들어갈 발음은, 「けひ 게히」가 아닐까?
「미게히코」、이것에『日本書紀』風으로 漢字를 맟추면 「三毛彦」이 있다.
「卑弥弓呼」는「日의 三毛彦」혹은、「火의 三毛彦」이다.
「히노미게히코」라면,「히노미큐우코」로 들려도 이상하지 않고, 「큐우코」만을 본다면、宮崎県에 있는「日向」(휴우가)가 같은 음이라고 할수 있다. 즉, 神武天皇은 日向의「三毛野命」이、本名이다.
혹은、『魏志倭人伝』의「狗奴国」의 官「狗古智卑狗」가「키쿠치히코」가 아닐까라고 이야기되고 있으므로、「か카・き키・く쿠・け케・こ코」는 同音으로 들린다는 것도 추측할수 있어,「히미키코」로도 생각할수 있다.
「き키」는「ひ히」로 간단히 변화하므로써 「卑弥弓呼」는「히미히코」였다고도 말할수 있다.
무리하게 끌어붙혀 말하면 「히노미야코」일런지도 모른다.
히미코도 「卑弥弓呼 미게히코」도、수사노오의 孫이고, 미게히코는 차기 奴国王、히미코는 태어나면서부터 태양신에 斎祀지내는 巫女로서 키워졌다. 후일의 시대에、天皇家의 皇女가「伊勢神宮」의 斎宮으로 된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의 奴国王(대략 수사노오로부터 임명된 오오쿠니누시職에 있는 者)는、「統一奴国」으로부터 독립을 목표로하는 주변 각국에 대하여 남하하는 고구려국의 위협을 호소했다. 「奴国」의 기초를 놓은 수사노오족은 高句麗国의
위협에 직접 시달려왔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後漢이 쇠퇴한 지금、高句麗国은、이번에는 일본해를 넘어 큐슈까지 진출해 올런지도 모른다. 内乱에 휩쓸려 있어서는 안된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後漢」으로부터 인정받았던 「奴国」에 의한 재통일이 가장 소망스럽다. 그러나 수사노오가 없는 시대에 「奴国」에 그만한 실력도 없고, 뒷방패가 되었던 「後漢」도、黄巾의 乱이 일어난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들은 물러나고 미게히코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奴国」이 정권을 주도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연합을 위해서 여왕을 세워 더군다나 정치의 중추를 「奴国」이외의 지방에 둔다고하는 조건을 도저히 묵과할수 없는 것이었다.
12.「邪馬台国」
보수파가 건국했던 「旧奴国」과、추진파에 의한 連合国이라는 두나라로 분열했던 「奴国」의 모습은 、다행히도 『魏志倭人伝』에 기록되어 있다.
女王・히미코의 수도에 속한 나라、
「対馬国」(千余戸)
「一大国」(三千許 家)
「末廬国」 (四千余戸)
「伊都国」(千余戸)
「奴国」 (二万余戸)
「不弥国」(千余の家)
「投馬国」(五万余戸)
등이 주요국들이며 그 남쪽에 위치하는 것이 히미코의 수도 「邪馬台国」(七万戸)가 있다고 한다.
현재 발표되고 있는 『魏志倭人伝』에 적힌 文에는、
「南、邪馬台国에 다다르다。女王의 都로 하는 所되다。」
라고 되어 있으므로 「邪馬台」가 首都의 의미라는 것은、「魏」의 使節団도 알고 있는듯하다
『魏志倭人伝』에는 、그외에、멀리있는 소국으로서 21개국을 게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쪽에 「旧奴国」이 있다. 여왕의 나라의 東側、바다를 건너 천여리의 곳에 또 倭種의 나라가 있는듯하므로 이것이 「出雲」일까? 조선반도의 남해안에「狗邪韓国」이 있지만 이 나라에 대해서는 여왕국과의 관연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伽耶韓国」으로 이해되고 있다.
일찍이 수사노오족과 동족이며 적대하지 않고, 연합국이지도 않은 나라이다.
이 각국의 호수는、「邪馬台国」시대이므로、連合国과 대등하게 전쟁할수 있는「旧奴国」도 대략 10만호 정도 일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런데、景初 二年(238年、三年이라는 설도 있음)六月、히미코가 파견한 「難升米」등이、帯方郡에 朝貢하고 있다.「難升米」는、魏의 首都、落陽까지 보내졌다. 魏의 明帝는 대단히 기뻐하며、献上物과는 비교가 안될정도의 선물목록을 「難升米」에게 전하고 있다. 이 景初 二年에는、帯方郡은 「魏」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고、「燕」이 지배하고 있었다.
「燕」의「公孫淵」을 襄平城에 포위했던 달이 6월이었다.「難升米」는、戦場의 한가운데를 뚫고 조공하러 달려온 것이 되어 그 꼴을 상관하지 않고 달려왔던 「難升米」에 대하여 、明帝는 특별히 기뻐하고 있다. 이것이 히미코의 策略이라면 히미코는 대단한 외교 전문가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후「魏」가 중국을 재통일한다.
明帝는、「難升米」에게 최대한의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그와 걸맞는 선물을 약속했다. 難升米로부터의 외교는 대성공이었다.「親魏倭王」의 印綬는 이때의 것이다.
13.『魏志倭人伝』
「難升米」가、帯方郡에 朝貢했던 것이 6월이었으며, 落陽에서 明帝의 찬사와 함께 선물목록을 받은 것이 실은 12월이었다. 帯方郡으로부터 、洛陽까지 도착하는데 6개월이 넘게 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朝貢했던 年은、景初 三年이 아니고 戦争中이던 景初 二年이 틀리지 않다. 戦争中이었으므로 6개월씩이나 걸렸던 것이다.
히미코는 왜 238년에 魏에 조공했을까? 연합국의 성립은 私見에는 185년이다. 53년의 시차가 있다.
연합당초는 「邪馬台国」에 정부기관을 두면서도 연합각국의 견제가 계속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히미코의 傀儡政権을 목표로 한 각국의 요인은 『魏志倭人伝』의 記述로부터 보면, 히미코가 祭事에 마음을
뺏기고 있은 것 같은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히미코정권이 공고해져 갔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斎王으로서 교육을 받았는데 드디어 本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53년은 너무 길다. 이것은 「旧奴国」과는 늘 전쟁상태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쟁당초는 국력이 충실하지 않고 국경부근의 작은 경합정도였지만「邪馬台国」으로서도 내정에 절차탁마하며 조공은 그 다음순서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魏」・「呉」・「蜀」가 대치하고 있었다. 차기동향을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53년이 지난 시기에서조차 큰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히미코가 여왕으로 共立된 것이 15세 경이었다. 朝貢을 보낸때는 히미코는 68세였다.
히미코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죽은 뒤, 연합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각국은 수사노우가 죽은때처럼 독립전쟁을 일어키기 시작할 것인가?「旧奴国」이 점령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근심이 머리를 스쳤을 것이다.
그것이 大国・「魏」에 朝貢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단지 「魏」를 택한 것은 히미코의 선견지명이었다.
그리하여 「魏」와의 외교는 성공했다. 「魏」의 明帝는、히미코에 대하여 「親魏倭王」의 칭호를 주어「邪馬台国」은、大国「魏」라고 하는 뒷방패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魏」의 사절단은 九州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魏」의 사절단이 도착한 것은 正始 元年(240年)으로 이때 히미코는 이미 죽고 없었다.
『魏志倭人伝』에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魏志倭人伝』은、「魏」의 사절단이 、九州에 도착하기까지의、倭国王의 記述은、일관되게 여왕으로 통하고 있다.그것이、使節団에게 만났던 왕은、倭이며 여왕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년 4년, 8인의 사절단을 「魏」에 보낸 것도 倭王으로 記述되고 있기 때문이다.
『魏志倭人伝』에 기록되어 있는、「邪馬台国」의 지리적 記述과 그 모습을 빼고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郡使들이、『邪馬台国』을 방문했을때는 히미코는 이미 老齢이었다.
여왕이 된 이래, 사람들 앞에는 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명의 남성만이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宮殿・高楼가 있고, 城柵이 厳重히 방비되고 있었고, 宮殿은、보초와 호위가 서있고、城柵의 주위를 병사들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었다.
景初 二年 六月、難升米 등이 朝貢하고 왔다. 12月에、洛陽의 都에서 皇帝로부터 『親魏倭王』의 印綬를 비롯하여 많은 선물목록이 『難升米』등에게 건네졌다.
先帝의 喪이 끝나던 正始 元年、그때의 약속대로 선물을 가져갔다.『魏』의 使節団이、『倭』에 와서 倭王을 만나고, 倭王은 몸시 감격했다.
四年、倭王이 8人을 사자로 보내 朝貢해왔다.
六年、皇帝의 명령으로、『魏』의 軍旗인 黄色의 旗가、帯方郡을 경유하여 『難升米』에게 주어졌다.
八年、帯方郡 太守가 洛陽에 와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倭의 女王 히미코는、『狗奴国』의『卑弥弓呼』를、원래부터 宿敵으로 간주하고, 양국은 지금 전쟁상태입니다.
『倭』로부터 、使者가 원조를 청하여 왔습니다. 이번 수년간의 형편으로부터 사태는 상당히 심각합니다.
지금바로、魏의 軍旗와 詔書를 軍事顧問에게 지니게 하여、『倭』에 파견했다. 이러한 것들은 『難升米』에게 전해졌고、『魏』측에서 작성한 격문을 가지고 타일렀다.
히미코가 죽었으므로 큰 墓를 만들고、노예등 백여명이 순장되었다.
히미코의 死後、男王이 옹립되었지만, 国内는 따르지않고, 난입하여 서로 죽이고하여, 그 때문에 천명 가까이가 죽었다. 그후 히미코의 血縁으로 13세가 된 『臺与』를 女王으로 세울무렵에 국내가 수습이 되었다.
『魏』의 군사고문은,『壱与』를 왕으로서의 심득을 깨닫게 하였다. 군사고문이 귀국할 때 『臺与』는、사절단 20인을 함께 파견하여 보냈다」
히미코의 墓의 記述이「倭王의 死」으로 기록되어 있으면、이러한 의심은 갖지 않았을 것이다. 여왕으로 설명하고 있고, 後의 記述은 倭王으로 통일했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미코의 후사를 이은 왕이 여자이면 記述하고 있는 점으로부터、『魏志倭人伝』은、남녀를 명확히 구별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져, 倭王은 남자이며 절대로 히미코가 아니다. 魏皇帝가 직접내린 명령에 따른 軍旗가 히미코가 아닌「難升米」에게 전해진 것은 왜일까?
통신수단이 부족했던 시대에 황제가 직접 내린 격문이라고 하면 말하자면 현대의 대통령간의 핫라인이다.그것을 외무대신이라고 할 수 있는 「難升米」가 상대를 하는 것은 大国「魏」에 대하여 대단히 무례한 행위이다.
결국 이때쯤 그녀는 이미 죽고 없었으며、「難升米」가 倭王의 대리를 하고 있다. 히미코의 죽음은、倭王이 등장하는 正始 元年보다 이전으로、최초의 朝貢보다 뒤의 일이었다.
魏의 使節団이 만났던 倭王이라는 것은 「難升米」였다. 老齢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히미코는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히미코가 살아있는 것처럼 읽히는 것은 문맥이 전후하여 기술되어있기 (대략 의도적으로) 때문이며 、명사에 주의하여 읽으면 통설과는 다른 모습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旧奴国」으로부터의 攻撃도 나날이 강해지는 가운데, 히미코는 「魏」에 朝貢을 하기로 결의를 했다. 무언가의 병이 진행중이었다고 생각된다.
238年、히미코는 「難升米」에게 朝貢을 명했다. 히미코의 死後 内乱과、旧奴国의 침공으로부터 방위하기에는、大国의 뒷방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難升米」일행은、「魏」와「燕」과의 戦場에 있던 帯方郡으로 달려갔다. 놀란 것은「魏」側의 大守・「劉夏」였다.전쟁터로 바다를 넘어 조공하러 왔던 것이다. 꼴에 신경쓰지 않는「難升米」등의 모습에 감격했던 「劉夏」는、戦火가 수구러드는 것을 기다려、首都・洛陽에、使節과 함께「難升米」등을 보냈다.
「難升米」등이 지참했던 貢物은、奴隷 男4人 女6人、斑布 2필 2장 이라고하는 粗末한 것이었다.
同年 12月、使節로부터 보고를 받았던 明帝는、대단히 감격해 보였다.
「難升米」등에게「親魏倭王」의 印綬와 함께 과대한 선물을 보낼 것을 약속하여 여기에서 히미코의 외교는 성공했다.
明帝는、언젠가 朝鮮半島에 진출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위해 「倭」를 우군으로 두는 것은 원해마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서、明帝는「倭」를 과대평가함으로써、「魏」의 저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수개월이 지나 、「難升米」등은 帰国하여、히미코에 그 모든 것을 보고했다.
히미코의 죽음은 천천히지만 九州 전토에 퍼져나갔다. 후계자 부재인 상태로 히미코의 죽음이었다.
「邪馬台国」의 要人은 감추고 감추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推定 241年、히미코의 죽음을 확인한 「旧奴国」이、드디어 국경을 넘어 통솔력이 느슨해진 연합국의 수도「邪馬台国」으로 쳐들어갔다.
14.다시 倭国大乱으로
「旧奴国」軍의 침입을 알게 된 首都・「邪馬台国」은 、그것이 지금까지 있어왔던 작은 경합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되었다. 히미코의 죽음이 드디어 「旧奴国」에게 알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양국은 국력을 걸고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邪馬台国」도『魏志倭人伝』의 記述로부터 상당한 군사력을 비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을 놓치면、「旧奴国」본래의 영토를 탈환할수 없다고 생각한「旧奴国」은、공격의 고삐를 늧추지 않았다. 여왕을 잃어버린 連合国과、영토탈환에 불타오른 「旧奴国」。양국의 세력의 차는 분명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연합관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나날이 열세가 되었던 「邪馬台国」은、243年、「魏」에 원군을 요청했다.
「魏」의 援軍이 도착한 것은 그후 2년이었으며 그마저도 「魏」의 軍旗뿐이었다는 모습이었다.
大国의 威勢만으로、「旧奴国」의 공격이 멈출리도 없고、「旧奴国」의 세력에 공포에 싸인 連合各国은、수사노오의 죽음의 때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 事態에 놀란「魏」의 大使는、당황하여 되돌아가、皇帝에게 直訴했다。
그 2년후、「魏」의 斉王 命令으로 군사고문인 「張政」등이、詔書・軍旗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이 2년간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이러한 것은 모두 「難升米」에게 주어졌지만、『魏志 倭人伝』에는 군사고문「張政」등의 活躍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미 「邪馬台国」은「旧奴国」의 손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男王이 세워졌지만 国中은 納得시키지 못하고、千人이 서로 죽였다」
고 하는 記述은 『魏志倭人伝』에 기록된、「邪馬台国」의 官吏・「弥馬升」,「弥馬獲支」,「旧奴国」의 미케히코였다고 생각된다. 히미코가 죽은후 「伊都国」은 外務大臣・「難升米」가 首都・「邪馬台国」의 관리였던 「弥馬升」나「弥馬獲支」가 통솔하고 있었을 것이다.
「伊都国」에서、「難升米」가「張政」을 환영할때、「邪馬台国」은「旧奴国」에게 괴멸되었고 손을 쓸수조차 없었다.「張政」등은 먼저、首都・「邪馬台国」으로 향했던 것으로、「張政」등의 목전에서 독립을 호소하여 각국이 난입하여 争乱이 넓혀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중심은 「旧奴国」이었다.
「旧奴国」軍이 반란분자를 토벌하는 한가운데서、「張政」은、미케히코에게 면회를 구했다.「張政」은、13歳의「臺与」를 女王으로 세울 것을 제안하여 미케히코는 이것을 허락했다. 「臺与」가 미케히코의 孫娘(손녀)였기 때문이다.히미코와 미케히코는 혈연관계였으므로、「臺与」가 히미코의 宗女였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후 、「難升米」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략 이 난리에 살해되었을 것이다.「張政」등을 京城까지 보낸 것은、「掖邪狗」였다.
「臺与」를 세움으로써、「奴国」은「旧奴国」에 의하여 다시 통일되었지만, 이전의「統一奴国」과 같은 세력은 갖지 못했다. 그 중추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九州를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首都・「邪馬台国」은 타오르는 들판이 되어 기능하지도 못했다. 「奴国」은、새로운 장소에 首都・「邪馬台国」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九州지방에「山門」(야마토)의 지명이 복수 산재하는 것은 그때문이었다.
『晋書倭国伝』에 의하면、266年「臺与」는、「魏」의 후신인「晋」에 朝貢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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