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8. 歴史時代 (継体天皇)

청 설모 2018. 5. 8. 21:04

 8부.  歴史時代 (継体天皇)


1.신시대의 到来


 수수께끼의 4세기도 완결하고, 5세기 후반으로부터 6세기로 옮겨가고 있다.、

 여기서 정리를 위하여、私見에 따른「誉津別命」이후의 年表를 적어두고 싶다.


  366年 야마토정권(호무다마와카王)은、「斯摩宿禰」를 대장으로 한 군대를 「卓淳国」에 보내어、  対「高句麗」에 대한
                   「百済」와의 군사외교를 의뢰한다.
      
  391年 「百済」와 손잡은 야마토정권은、「加羅」에 군대를 주둔시켜 계속, 「新羅」를 견제했다
                 「新羅」는 가만히 「高句麗」에 밀사를 보냈다.
      
  396年 「高句麗」軍(好太王)이,「百済」에 진입했기때문에, 야마토군은 이것에대한    防戦、몸소 최전선에 들어섰지만, 어이없게

                   敗退한다. 그결과, 「百済」의  일부는 「高句麗」에게 점령된다.
              
   399年 야마토군은、「新羅」를 경유하여,「高句麗」에 도전하려고 했기때문에, 「新羅」는「高句麗」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400年 「高句麗」軍과 야마토군은, 「新羅」의 국경부근에서 격돌하지만, 야마토군이  궤멸당한다. 겨우 「加羅」주둔지까지 

                  탈출하여,   궤멸을 면했다.
  
   404年 세력을 회복한 야마토정권은,  다시 군대를 원정시켜、帯方부근까지 진군했다.   거기서 다시 「高句麗」軍과 결전을 벌여

                  큰 타격을 입어, 호무다마와카王이  죽고 「誉津別命」가 즉위한다(仁徳天皇)
  
    413年  仁徳天皇、「東晋」에 遣使。
  421年    仁徳天皇   「宋」에 遣使。
  425年  仁徳天皇、「宋」에 遣使。
  430年  履中天皇、「宋」에 遣使。
  438年  反正天皇、「宋」에 遣使。
  
    442年   구데타가  발발. 宿禰姓의 「雄朝津間稚子」가 즉위(允恭天皇).
  443年  允恭天皇、「宋」에 遣使。
  451年  允恭天皇、「宋」에 遣使。
  460年  倭国、「宋」에 遣使
        木梨軽皇子 失脚。
  
    462年  穴穂皇子、「宋」에 遣使.    穴穂皇子 즉위(安康天皇)
  465年~ 安康天皇、眉輪王에게 살해당함.
        「市辺押磐皇子」는「大泊瀬幼武皇子」에게 살해당함.
  
    466年~ 「大泊瀬幼武皇子」即位(雄略天皇).  東国遠征을 위해 「尾張国」과 동맹맺다
  477年  倭国(雄略天皇)、「宋」에 遣使。
  478年  雄略天皇、「宋」에 遣使。
  489年  雄略天皇、「近江・尾張」연합국을 구성하던 一氏族「五百木氏」에게 토벌당해、能褒野에서 사망하다.  飯豊皇女 即位。
        「高句麗」가「百済」를 공격하다.


    그리고 드디어, 継体天皇이 출현하게 되어 고대사는 역사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또한 여기에서 『記紀』에 있는、雄略이후의 干支崩御年으로부터 본  각 天皇의 활약연대를    알아보기로 한다.
  
  干支崩御年으로 본 年代 誤差는 다음과 같다、


        『古事記』  『日本書紀』   誤差
        干支  西暦    干支 西暦
   推古天皇 戊子 628  戊子 628  0
   崇峻天皇 壬子 592  壬子 592  0
   用明天皇 丁未 587  丁未 587  0
   敏達天皇 甲辰 584  乙巳 585 -1
   安閑天皇 乙卯 535  乙卯 535  0
   継体天皇 丁未 527  辛亥 531 +4
   雄略天皇 己巳 489  乙未 479 -10

   

        注、宣化天皇、欽明天皇에 대해서는、『古事記』에 干支崩御年의 記載가 없다.


『古事記』는、推古天皇까지밖에 記載가 없었기때문에、이 이후의 『記紀』비교는 할수 없지만, 이것으로부터 본 推古 이후의 天皇활약 연대는、『日本書紀』의 記載를 확실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干支崩御年에 대해서는『古事記』를 우선시해왔으므로, 雄略에 대해서도, 『古事記』의 崩御年을 확실한 것으로 채택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梁書倭伝』이나 『南斉書倭国伝』에는、「武에게 征東将軍이란 号를 주었다」

 라는 記述이 있다.  


이 記述은、天監元年(502)의 일로서、雄略이 이때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정직하게 말해서 이것은 곤란에 직면하게 된다.


2.越前로 부터 온 天皇

『日本書紀』를 믿으면, 武烈天皇 시대 쯤에, 倭王「武」가 雄略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나로서는, 상당히 쓰라린 史料이다.

그러나 倭王「武」=雄略説은、文献만이 아니고, 考古学的  出土品으로 보아도、흔들림없는 史実이라고 생각한다.
  
대략 이 시기는,「武」의 遣使朝貢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梁書』에는 建元元年(479)의 일로서,

   「武를 使持節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六國 諸軍事 鎮東大将軍에 除한다」


 라고 하고 있지만, 이러한 502年과 479年의 記述에、공통하여 말할수 있는 것은, 「倭国」이 遣使 朝貢했다고 하는 記述이 없고、그러한 것은 中国 国家交替 元年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다.

   

         建元 元年에 대해서는、『南斉書』가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建元元年、使持節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六國 諸軍事 鎮東大将軍 倭王
  武에게、새로이 鎮東大将軍의 号를 주다」


479年에는「南斉」의「高帝」가、
502年에는「南梁」의「武帝」가 즉위했었으며, 이것으로부터 황제즉위에 근거한 특권에 의하여 받은, 단순한 称号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결국, 야마토정권의 諸事情을 알지못하는 新中国 王朝가、前王朝의 기록에 있던 우호국의 왕을 、特赦・恩赦의 예에 의하여、役職만을 出世시켜 기록했다고 생각하고, 倭王「武」가 죽은 후  称号만의 授与였을 것이다.


그리고 敏達天皇의 誤差1年은、그 전후로 생각해본 경우, 誤差라고 간주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継体天皇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検証해 나가겠지만, 그 출생이나 没年은 몇가지 설이 있고, 전적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대략 『日本書紀』가 편찬될 당시에 이미 수수께끼의 베일에 싸여 있었다.

현대의 天皇 歴代表에서는 26代에 해당하는 継体는、그 출생과 성장에 대하여 『記紀』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古事記』

 「品太天皇의 5世孫、袁本杼를 近淡海国으로부터 맞아들여, 天下를 다스리는 位에 올랐다.」

『日本書紀』

 「男大迹天皇(다른 이름은 彦太尊)은 誉田天皇의 5世孫、彦主人王의 子이며, 母는 括目天皇의 7世孫인 振媛이다.


彦主人王은 振媛이 미인이라는 것을 듣고, 近江国 高島郡의 別邸로부터 越前 三国의 坂中井으로부터 불러들여 妃로 삼아, 男大迹을 낳았다.

男大迹의 幼年에 父王이 죽었기때문에、母 振媛은 친정인 越前 三国의 高向으로 돌아가, 男大迹을 양육했다.」

이러한 것들에 의하면, 「男大迹天皇」(오오도노 스메라미코도)인 継体의 출신지는、「近江」이나「越前」의 어딘가인 것이 되지만,

『釈日本紀』인용의 『上宮記』도、출생지를 「近江」양육지「越前三国」으로 하기때문에, 여기서는 『日本書紀』説을 채용하기로 한다.

단, 『上宮記』는 推古朝시대의 遺文이라고 말하고 있기때문에, 『日本書紀』가 『上宮記』를 인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그러나, 「男大迹」이 父系의 「近江」、母系의 「越前」의 세력에게 지지받고 있던 大王이었다는 것은 대략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近江・尾張」연합정권이라고 기록했지만, 정확하게는「近越・尾張」연합정권이라고 기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 애초부터 妃는「尾張連草香」의 娘「目子媛」이었기때문에、「近越・尾張」연합정권 내에서의 「尾張氏」의 세력을 엿볼수가 있을 것이다.

이 『上宮記』에는、『記紀』에 記述되어 있지 않은 父系 ・ 母系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고, 그 系譜는 다음과 같다.

   凡牟都和希王─若野毛二俣王┬太郎子   ─    乎非王  ─  汗斯王(彦牛人王)→
                ├践坂大中比弥王
                ├田宮中比弥
                └布遅波良己等布斯郎女

   →乎富等大公王(継体天皇)


 이 系譜는、応神天皇=仁徳天皇은 垂仁天皇의 皇子 호무시와케 였다는 것을、넌지시 암시하고 있지만,  이것에 의하면, 継体는、応神의 5世孫이 아니고, 垂仁의 6世孫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父系  ・母系 공히 垂仁을 祖로 하고 있고, 수상쩍은 応神天皇 5世孫説보다도, 그 皇統은 훨씬 튼튼하게 된다.


『日本書紀』편찬자가 垂仁天皇 6세孫보다도、応神天皇 5世孫을 採用했던 이유는, 継体야말로『日本書紀』가 편찬되기 시작할때 즈음의、

天皇의 직접의 祖라고 생각되어, 멸망된 垂仁보다도 、新王朝였던 応神 ・仁徳의 쪽이、보다 相応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日本書紀』는 継体 즉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2月 21日、大伴金村大連이 모두에게 의논하여、『지금 전혀 흔적이 없다. 天下의 사람들은 어디에 마음을 기대면 좋을까?  옛부터 지금까지、天下의 禍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다. 仲哀天皇의 5世孫인、 倭彦王이 丹波国 桑田郡에 오시게 된다. 시험삼아, 兵士를 보내어 御駕를 지키고 모셔서, 군주로서 받들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大臣・大連등은 모두 이것을 좇아서 計画한대로 영접하게 된다. 그렇지만, 倭彦王은、멀리서 영접하러 온 兵士를 멀리서 보고 두려워、顔色이 바뀌었다. 그리고 산중으로 도망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 
 
 元年春 1月4日、大伴金村大連은 또 의논하여, 『男大迹王은 性情깊은 親孝行으로 、皇位를 이어받는데 적합한 분이다. 정중히 권유하여, 황통을 번성시켜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物部麁鹿火大連  ・許勢男人  大臣들은 모두、『子孫을 조사해 선택해보면, 賢者는 확실히 男大迹王뿐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6日에 臣・連등이、君命을 받은 깃발을 가지고 御駕를 갗추어、三国으로 영접하러 갔다」

그뒤「男大迹王」은 몇번이고 고사했으나 드디어 청을 받아들여 즉위하였다. 그 장소는、河内国 交野葛葉의 宮이라고 한다.
  
그러나、실제의 즉위사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継体紀』는『武烈紀』의 다음이지만, 清寧  ・顕宗  ・仁賢  ・武烈은 야마토 정규정권이 認知했던 천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때문에, 前代는「飯豊皇女」다.
「飯豊皇女」는、雄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황위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말하자면 연결天皇이다.  어떻게던 体裁는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雄略의 죽음은 야마토 정권이 붕괴해가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학자들간에는、雄略에 의하여、야마토 정권의 전국지배가 완성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지만,『稲荷山 古墳   鉄剣銘文』에도 있는 바와 같이、

「와카다케루大王의 寺가 斯鬼宮에 있었을때、나는 天下를 다스렸다」

에서、銘文의 어디를 보아도 와카다케루大王이、야마토政権의 지방 지배를 넓혔다고는 읽혀지지 않는다.
결국 이 시대의 지방호족과 야마토 정권의 관계는 먼저 그 지방호족의 首長인 王을 통솔하는, 그 지방의 大王이 존재하고 있고, 그 大王의 위에 군림했던 것이 야마토 정권의 大王(天皇)이었지만、그것은 지배관계가 아니고 많은 경우, 상하관계가 애매한 협력관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吉備国」은 야마토 정권에 협력하고 있다고 해도, 복종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럼으로써, 雄略의 死後、왕조전복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私見으로、「五百木氏」가 雄略을 살해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実際、이때의 「吉備国」과「尾張国」은、입장적으로 매우 닮아있었다고 생각한다.

 「吉備」는 瀬戸内를 정복하고 있고, 「尾張」는 伊勢湾을 정복하고 있었으며, 「吉備」의「稚媛」、「尾張」의「宮簀媛」 둘다 雄略의 妃가 되었다.   단지、「稚媛」이 大和에 데리고 온 人質이었던 것에 대하여、「宮簀媛」에는 通婚이었다.

『日本書紀』雄略天皇 3年夏 4月의 条에


「阿閉臣国見이 、栲幡皇女와 廬城部 連武彦을 참언하여, 『武彦은 皇女를 더럽혀 妊娠시켰다』고 말했다. 武彦의 父 키코유는 이 뜬소문을 듣고, 화가 자신에게 미칠것을 두려워하였다.  武彦을  廬城강으로 꾀어내어 속여서 물속으로 잠기게하여, 물고기를 잡는 가마우지의 모양을  하고 있을때에 불의의 타격을 가하여 죽이고 말았다」
라고 하고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近越・尾張」연합정권은、야마토정권을 좋지않게 생각하게 되고 말았지 않았을까?


『日本古代氏族辞典』에 의하면、「廬城部連」는「伊福部連」이며、「五百木部連」이다.
정확히 말하면「五百木氏」다.

「武彦」은 父인 키유코에게 살해당했다고하지만, 雄略의 悪癖이 「武彦」을 죽였다고도 말할수 있을 것이다.
栲幡皇女」는 伊勢의 斎宮이며、 湯人이라고 하는 것은 皇子・皇女들의 목욕 시중을 드는 職이다. 父가 죽이지 않고도、재판도 없이 雄略이 죽였을 것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天皇은 자신의 마음만으로 先決하는 경우가 있어서、잘못하여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많았다.  天下의 사람들은 이것을 誹謗하여『대단히 나쁜 天皇』이라고 했다.

『日本書紀』는 雄略을、이렇게 記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雄略의 성격을 「近越・尾張」연합정권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아무래도 강건너의 불이었던 것이다,
雄略에 의하여、同族이 죽음에 이르렀던 터라 이제는 강건너 불이 아니었다.
 
雄略이 「대단히 나쁜 천황」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그 傍若無人함을 보여주는 것은, 雄略 자신이、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이고, 야마토 정권하에서 諸 豪族의 유일한 사람으로서, 의견이 될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雄略도、「宮簀媛」의 주변에서 丸腰(칼을 차지않)은채 외출하여, 「五百木氏」의 계략에 걸려 「近江」의 伊吹山에서 살해당했다. 어떻게던「能褒野」까지 도달한 것으로 여기가 최후의 땅이 되고 말았다.
  
이즈음의 사정은、『景行紀』의 야마토다케루説話로서 기록되어 있고, 特別編「日本武尊」의 真実에서 해설하고 있지만, 伊吹山의 神이라고 하는 것은、바로「五百木氏」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야마토정권은、지방을 통치하는 王과의 애매한 협력관계로부터 성립하고 있어서, 부족연합이라고도 말할수 있는 원시국가였다는 것은 前述한바 있다.   그러므로 지방의 왕들이、「大和」의 大王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있을때는 평온했지만, 大和 大王家의 세력이 실추하면, 흡사 戦国時代의 양상을 보이고 마는 것이다.
 
雄略의 죽음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야마토 정권은 사태수습을 위하여,「飯豊皇女」를 세웠다. 그러나 유력호족은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서서히 이탈해갔다.
야마토 정권의 최대세력은 「大伴氏」였다. 야마토 정권의 붕괴는 「大伴氏」의 몰락을 의미한다. 거기에서 「大伴氏」가 취했던 행동이 外圧에 의한 정권의 재건이었다.

「近越・尾張」연합정권의 大王으로 군림하고 있던、「男大迹王」을 받들어모심으로서、「大伴氏」自氏의 勢力의 안정을 획책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추리해봤지만, 「男大迹王」으로서는,  「越前・近江」을 장악하고있어,「尾張」의 전면협력이 있으면, 「近越・尾張」연합정권하에서 자신의 왕권은 안정적인데, 뭐하러 새삼스럽게 야마토정권을......하는 기분이 강하지 않았을까?

『日本書紀』에서는 継体가 82歳에 죽었다고 하므로, 즉위년은 57세 였을 것이다、
야마토 정권은、畿内를 核으로한 원시국가였지만,

   「倭国은 옛 倭奴国이며」 『旧唐書』倭国日本伝

   「日本国은 본래 倭奴国이며」『宋史』日本伝

라고 이해되고 있는 것과 같이, 「統一奴国」의 붕괴로부터「邪馬台国」연합정권 시대를 지나、 야마토 畿内政権시대로 이행되어, 왕권이 바뀌어,   좋건 싫건 상관없이 『漢委奴国王』의 「奴国」으로부터 연속했던 나라였다.  그 표상이 「奈良」이며、「奴国」이라고 하는 国名이 의식속에 있었던 것이다.


일찌기「丹波・但馬・近江・越」은 「奴国」이나「邪馬台国」연합국의 重臣의 영향아래 있던자들이 세력을 휘두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짤라 말해서 호아카리系 諸豪族들이다. 그러나 그 대표라고도 말할수 있는 「尾張氏」가 신천지를 尾張地方에 구하고 나서는、近江은「息長氏」의 세력범위로 되고 있다. 라고 하기보다는、원래 琵琶湖를 漁場으로 했던 海人族「息長氏」의 세력범위가 되었을때, 「越」에 흔적을 남긴「尾張氏」系 호아카리族이、지원을 구해왔다고 생각한다.


「男大迹王」이「近江 오우미」출신이라면、「息長氏」와는 밀접한 관계라고 추측할수 있고, 또  「息長氏」自氏는、호아카리系「尾張氏」이외、「奴国」이나「邪馬台国」과의 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男大迹王」으로 보면、야마토국은 三関의 저쪽에 있는 단순한 외국이며, 전통따위는 알지 못했다.  하물며, 나이를 생각하면, 천황에 즉위하는 것은 불속에서 밤을 줍는 것 같은 것이다. 더구나 그 외국은 정치투쟁의 한가운데 있지 않는가?

 승락하지 않은 것도、당연한 것이다.

결국은 마지못해 승락하여 즉위하게 되었지만, 즉위한 곳은 河内의 樟葉宮이고, 大和에서가 아니다. 심지어는 山城의 綴喜、乙訓을 지나고 있다.    大和의 磐余의 玉穂宮으로 옮긴 것은 즉위후 20년이 지나서였다.


3.2개의 皇統

仁徳朝에서 대두하고 있던 「葛城氏」도 、円大臣이 雄略에게 살해되어 몰락하고,  国政을 제멋대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平群氏」도、「大伴氏」와의 정치투쟁에서 패하였다.
그 결과, 継体 즉위 직전의、야마토 정권하에서의 최대세력은 「大伴氏」였으며, 계속하여「物部氏」、「巨瀬氏」였던 것으로 읽힌다.
  
継体의 옹립은、「大伴氏」가 발안자이며, 「物部氏」가 추인하는 형태로 이뤄졌던 것이다.

大和에 들어갈수 없었던 이유도, 外様天皇에게 납득할수 없었던 호족연합이 大和에서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고 추측할수 있다.

継体는、「大伴氏」의 권유로 仁賢天皇의 皇女였던 「手白香皇女」를、機内政権의 皇后로 맞이했지만, 이것은 前天皇家의 皇統을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仁賢(億計天皇)은「市辺押磐皇子」의 子이며, 그 前代의 顕宗天皇(弘計天皇)은 동생이다.
이 두 天皇은「飯豊皇女」가 죽은후、大和圏内에 한정되었던 天皇으로서 인정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요약하면, 河内의 継体朝와 大和의 仁賢・顕宗朝는、어떤 시기、二朝가 병립상태에 있은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경망스럽게 二朝라고 말할수 없다고 한다면, 야마토 정권과 대항하는 세력들이라고 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이 2대세력은 각각 다른 皇統을 지지하면서, 정통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顕宗紀』에 、清寧天皇의 2年冬 11月의 일로서, 「億計」・「弘計」의 2王子 발견의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지만,「弘計皇子」는 만엽집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石神振の神椙、本伐り末截ひ、市辺宮に天下治しし天万国万押磐尊の 御裔僕らま。」

번역하면,

「石の上(이소노가미)의 、布留(후루)의 神杉(신성한 삼목)을、그루를 베어 끝을 후려쳐서、
四周를 휘둘러, 市辺宮에서 天下를 다스리게 되었던、押磐尊의 아들이다、나는」


 이 노래는、履中天皇의 皇子인「市辺押磐皇子」는 、市辺宮에서 즉위하여, 천하를 다스렸다.  그 천황의 子가 나 「弘計」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日本書紀』의 어디를 보아도、「市辺押磐皇子」가 즉위한 사실은 기재되어 있지 않고,  단지 이 노래만이 즉위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후、「億計」・「弘計」의 2왕자는 바로 소환되고 있어서, 이 노래에 의심을 품고 있지 않다. 이 노래는 진실한 외침을 외치고 있는 것일까?


「市辺押磐皇子」가 즉위하고 있다고 한다면, 反正天皇의 다음 允恭天皇과 동시에 2 황통이 된것이 된다.
允恭은 「宿禰」姓의 家臣이、구데타를 일어켜 즉위한 말하자면, 갑자기 신분이 급상승한 천황이었다.

돌연, 氏・姓을 정리한다던지, 그때까지 하지 않았던 「盟神探湯」(쿠가다치)에 의한 재판은、前皇統이 단절된 증거라고 생각된다

다음으로、雄略은 황위 계승 자격이 있는 황자를 모조리 죽이고 있다. 그것을 열거하면,

   「八釣白彦皇子」
   「坂合黒彦皇子」
   「眉輪王」
   「市辺押磐皇子」
   「御馬皇子」

의 5손가락에 달한다.


이중에서、「市辺押磐皇子」・「御馬皇子」는 前王朝였던 履中의 皇子이며,「眉輪王」은 仁徳의 皇子로서 「大草香皇子」의 子이다.
「八釣白彦皇子」・「坂合黒彦皇子」에 대해서는、雄略의 同母 형제이지만, 이 두사람은, 「眉輪王」을 편들기하고 있어, 「眉輪王」과 함께 살해당하고 있다.


정리하면, 이러한 5명은 仁徳朝 직계의 황자이거나、「眉輪王」에 마음을 기울인 雄略의 형제였던 것이 된다.

결국 雄略이 주살했던 이 5명의 皇位 계승 자격자들은、어떠한 식으로건 仁徳과  관계가 있던 황자들이며, 「市辺押磐皇子」가 仁徳、즉 대립하는 정권(允恭天皇은 구데타의 결과 즉위했으므로 적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대어로 말하자면 당내파벌) 의 천황으로서 즉위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雄略이 죽인「市辺押磐皇子」는、仁徳의 피를 이어받은 천황이 된다. 이와같이 皇統이 2개가 있었다는 것은、後醍醐  ・ 光厳의 남북 両朝시대와 같이 야마토 정권은 분열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것을 검토하여、『日本書紀』에 따른 仁徳부터 仁賢까지의、天皇의 陵墓와 宮居의 소재지를 밝히고 싶다.

         宮居     陵墓所在地
   仁徳天皇 難波高津宮  大阪府堺市大仙町
   履中天皇 磐余稚桜宮  大阪府堺市石津丘町
   反正天皇 丹比柴籬宮  大阪府堺市北三国丘町
   允恭天皇 遠飛鳥宮   大阪府藤井寺市国府
   安康天皇 石上穴穂宮  奈良県奈良市宝来町
   雄略天皇 泊瀬朝倉宮  大阪府羽曳野市島泉
   清寧天皇 磐余甕栗宮  大阪府羽曳野市西浦
   飯豊皇女 角刺宮    奈良県北葛城郡新庄町
   顕宗天皇 近飛鳥八釣宮 奈良県葛城郡香芝町
   仁賢天皇 石上広高宮  大阪府藤井寺市青山



4.継体天皇과 朝鮮外交

 雄略天皇  20年、「高句麗」가 대군을 끌고와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있다.  그후 21년 춘3월、雄略의 威光에 의하여「百済」가 부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記述은 과장이라고 생각된다.

『日本書紀』가 인용하는 『百済新撰』에 의하면, 武烈天皇 4年에「百済」에서는「武寧王」이 옹립되었다고 기록하지만, 이「武寧王」은「筑紫」의 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훗날의 大王이 이국땅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것이란 것을 알것이다.
「百済」가 건재했다면, 일어날수 없는 것이다.
 
継体天皇 6년冬 12月、「任那」의 상타리(上哆唎) · 하타리(下多唎) · 사타(娑陀) · 모루(牟婁)4 현을「百済」에 양도하고 있다.

대략 雄略의 御代에「加羅」는、단독으로 중국에 조공하고 있으므로 실제로는「百済」가「任那」四県으로  侵攻했던 사실을 양보했다고 하는 말로 바꿔치기한 것으로 생각한다.


「任那」라는 것은『日本書紀』독자적인  表記이지만、朝鮮的으로 적으면 「伽耶」이다.
 왜 『日本書紀』만이「任那」라고 기록하는가?
 「任那」는 朝鮮語로「임나」라고 발음하여, 「君主의 나라」라고 하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군주라고 하면 天皇밖에 없다. 결국 「任那」라고 하는 것은 天皇家에 있어서의  祖国인 것이다.(따라서、본래의 皇統은 아마테라스가 아니고 、曽戸茂梨로부터 온 수사노오라고『日本書紀』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 된다)


앞에서「吉備氏」의 祖라고 하는「御友別」을「任那」왕족 출신이라고 했지만, 「任那」의 의미를 알면, 『日本書紀』가 「御友別」이라고 표기한 것도 납득할수 있을 것이다.

 실은,  継体朝와 「百済」의 사이에는、무언가 밀약이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실마리가 있다.


 현재、東京 국립 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는、「隅田八幡宮」(和歌山県 橋本市 隅田町)의 人物画像鏡에 48文字의 銘文이 있다.
前文을 게재해보면,

   「癸未年 8月 日18王年 男弟王 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奉遣開中費直穢
       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自己流로 번역하면,
「503年 8月 某日に、開中費直(가와치의 아다이)와 穢人今州利(와이비도 이마수리)의 2사람이 二百貫物 銅을 사용하여 만든 거울을、意柴沙加宮(오시사카미야)에 있는 男弟王이 大王의 年에、斯麻가 長寿를 기원하여 바친다」

通 説에서는 癸未를 443年、大王을 仁賢이나, 武烈 혹은 允恭天皇에 比定하고 있지만,「男弟王」은「男大迹王」으로 일치하고 있다.
이 설에 따르면、某天皇의 御代에 忍坂宮에 있던「男大迹王」이라고 번역하게 되어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다.

503年으로 한 것은, 継体즉위년이라고 추측하기 때문이다.『日本書紀』継体 재위년으로부터 계산한 즉위년은 507年이지만、『古事記』의 崩御干支로부터 계산하면, 503年으로 된다.  그러나、처음부터 이러한 계산은 무의미한 것이다.
 
결국、「男大迹王」이 天皇에  즉위한 기념으로、「斯麻」가 보낸 것으로 본다.
단지 忍坂宮은 奈良県 桜井市 忍坂에 比定되는 河内는 아니지만、일단「息長氏」와 관계 깊은 忍坂宮에서 즉위하여、곧바로「大和」로 와서 「河内」에 遷都했던 사실을, 『日本書紀』가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매우 있을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도 무의미하다.
 
問題가 되는 것은、선물主인「斯麻」이다.『日本書紀』에는「斯麻宿禰」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것으로 유추할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1971年、한국의 충청남도 공주의 송산리에 있는  古墳으로부터、「武寧王」의 墓誌가 발견되어、諱가「斯麻」란 것이 판명되었다. 그것을 논거로 하여, 한국 원광대학의 蘇鎮轍氏는、이「斯麻」는「百済」25대왕「武寧王」이라고 하는 新解釈을 발표하였다.『日本書紀』도 「武寧王」을「嶋王 시마왕」으로 하고 있다.(武烈天皇 4年夏 4月의 条)


그렇다면 継体에게 거울을 보낸 인물은「武寧王」이 된다. 開中費直은「河内直」일 것이다.
「河内直」등은 「武寧王」의 명령으로、거울을 주조한 것이 되지만, 「河内直」는 出身이「伽耶」(혹은「百済」)인 것으로, 그 姓은 야마토의 이름 호칭이다.


「武寧王」은 「筑紫」의 섬에서 태어났다. 이 自体、「百済」가 건재했다면 일어날수 없었겠지만, 「武寧王」은、「百済」부흥까지의 기간을 日本列島에 있었고, 継体朝와 同化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本国을 잃어버린 「百済」가 継体朝와 손잡은 것은 그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継体朝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여 記述한 『日本書紀』에 있어서도、20年까지도 大和에 들어갈수 없었던 것은、依然 旧야마토 정권의 세력이 우월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百済」는 旧勢力을 의지하는 편이 得策이 아니었을까?
「百済」와 継体朝의 연결은、『日本書紀』가 인용하는 『百済新撰』에 따르면, 辛丑(461年)이후이지만, 이 기록이 『雄略紀』에 기록되어 있어도 이것은 允恭天皇의 御代에 比定할수 있다.
   
允恭天皇의 42年 春 1月4日의 条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新羅王은 天皇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놀라고 슬퍼하며, 많은 배에、다수의 楽人을 태우고 와서 바쳤다. 이 배가 対馬에 정박하여、크게 슬프게 울었다. 筑紫에 도착해서 또 크게 울었다. 難波津에 정박하여 모두 흰 麻服을 입었다. 여러가지 악기를 갗춰、많은 調를 바쳐 難波로부터 京에 이르기까지 울고 춤추고 하였다.그리고 殯宮에 参会했다.」


이러한 「新羅」의 행동은、『允恭紀』를 빼면『天武紀』뿐이다.

「壬申의 乱」이、「新羅」와「百済」와의 대리전쟁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도 있다.
親新羅派인 天武天皇과、親百済派인 天智天皇의 뒤를 이은 것이 弘文天皇이다.
 

允恭朝도「新羅」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이 기록으로부터 추측할수 있다.

당시의 정권이던 允恭朝가 「新羅」와 친밀했다면, 「百済」는 対抗上、다른 세력과 손잡지 않으면 안된다. 候補로는、「吉備」나「近越・尾張」연합이지만, 「吉備」는「任那」와 同国이므로、결국「男大迹王」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 「男大迹王」이 일본해측을 세력권으로 하고 있었던 것도 플라스 材料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百済」는「高句麗」의 침략을 받아 망하게 되지만, 「任那」4県을 얻어 (침공하여)부흥한다. (私見에 의하면 509年)이것은「大伴氏」주도로 행해진 것일 것이다.
「大伴氏」가  強引한 정책에 반대했던 「物部氏」도、결국은 이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고、도중에 참견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百済」의 強引한 행동에、다른「任那」諸国이 입다물고 있을 리가 없고、「任那」의 대표국이었던 「伴跛国」은、「사타」의 北部「己汶」의 땅을 탈환했다.「伴跛国」은「新羅」에도 侵入한 위에、「日本」과의 전쟁에도 대비했다고 한다.
「物部氏」는 水軍500척을 이끌고, 「伴跛国」과 전쟁상태에 들어가지만,  物部水軍은 패전한다.
継体朝는「己汶」에 덧붙혀 「사타」까지、「百済」에 주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百済」의 한층 거세지는 침공일 것이다.

그런데、允恭朝이후 야마토 정권과 손잡았던 「新羅」였지만、정권이 継体朝로 옮겨가고 나서도 계속 旧政権을 지지했을 것이다.
   
즉위후 20年이 경과하고 나서야、継体天皇이「大和」에 들어갈수 있었던 것은, 「大和」에 있었던 旧勢力을 일소했다고 하는 것이다.
継体朝에 점령됨으로서、갈곳을 잃어버린 旧勢力의 残党은、「新羅」의 안내에 의해、「筑紫」의「磐井」와 同化했다고 생각되어진다.
   
『継体紀』21年夏 6月3日의 条

「近江의 毛野臣이、兵6万을 이끌고 任那에 가서、新羅에게 파괴된 南加羅・ 卓淳国을 회복하여 、任那에 합치려고 하였다.  이때 筑紫国造

磐井가、가만히 反逆을 꾀한다.  毛野臣이 어물쩡거려   해를 지나、일이 어려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라가 이것을 알고, 몰래 磐井에게 뇌물을 보내、毛野臣의 軍을 방해하도록 부추겼다.」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는、磐井의 乱의 도입부이다.「磐井」은 「肥前・肥後・豊前・豊後」의 세력과、본거지인「筑前・筑後」의 세력을 모우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磐井」는、九州의 과반수를 세력하에 두고 있는 것이 된다.


5.磐井의 乱

『日本書紀』에 따른 理解는、「磐井」는 大和朝廷에 속하는 筑紫国造이며, 그 国造가 반란을 일어켰다고 하는 것이지만, 近年에는、「磐井」는 大和朝廷에 복속하고 있던 国造가 아니고, 독립한 세력으로, 磐井의 반란이 아니라 고대 최대의 내전이었다고 하는 理解가 일반적으로 되었다.

 이 결말은、継体로부터 명을 받은 「物部大連麁鹿火」(모노노베노 오오무라지 아라가히)가 「磐井」를 토벌하여、22年 11月 11日、「筑紫」의 三井郡에서 교전하여 「磐井」는 敗死했다.  그 결과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翌 12月、「筑紫君葛子」(츠쿠시노 키미쿠즈코)는 父「磐井」의 죄에 연좌되어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여, 糟屋의 屯倉을 献上하여 死罪를 면하고 있다.


「磐井」가 독립한 세력이었다고 하는 설에, 반대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조금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먼저、「磐井」는「新羅」로부터 뇌물을 받아、「毛野臣」의「任那」渡航을 저지하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毛野臣」의 渡航이、磐井의 乱의 계기가 된 것처럼 말하지만,  23年 春 3月의 条에、전적으로 같이 「毛野臣」의 「任那」渡航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21年의「毛野臣」의「任那」渡航은 없었지 않았을까?


21年의 渡航이 사실이라면, 이때 「毛野臣」가 이끌고 온 兵6万은、戦乱의 한가운데를 지나온 것인가? 「毛野臣」의 兵은、「任那」부흥을 목적으로 했다. 国力을 건 정예부대 였을 것이다
그러한「毛野臣」을 제쳐두고、「磐井의乱」을 진압한 것은 뒤에 온 「物部氏」였다. 이것은 「磐井」를 朝敵으로 하기 위하여, 합성된 説話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毛野臣」의 渡航이라고 하는 大義名分이、필요했다라고밖에 생각할수 없다.


이 고대 최대의 내전의 이유는、「筑紫」는 朝鮮渡航의 거점으로 되었고, 国造「磐井」는 그때마다 激務를 알려왔다. 그리고  継体의 「任那」부흥을 위하여 출병의 강요에 드디어 참지못하였기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継体의 「大和」입성으로부터 겨우 9개月 後에、이런 내전이 발발했다는 것으로부터, 「大和」를 쫒겨났던  旧政権의 残党과、「磐井」가 손잡은 결과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뇌물을 받았다고 『日本書紀』가 기록한 것처럼、「筑紫国」과「新羅」는 동맹관계였을 것이다.

또 그 세력범위를 생각하는 경우, 仁徳의 養父 호무다마와카王이 수행했던、朝鮮半島에의 군사행동이나、「倭 5王」将軍들의 渡航도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한다.「新羅」와 同盟하면서도、야마토 정권과는 독립국으로서 협력관계였다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磐井」는 近江의「毛野臣」를 가로막아、


「지금이야말로 너는 朝廷의 使者로 되어 있지만, 옛날은、친구로서 어깨와 팔꿈치를 맞대고
같은 솥의 밥을 먹던사이이다. 使者로 되었다해도 갑자기,  너한테 나를 복종시킬수가 있느냐?」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이야말로, 협력은 하고 있었지만, 복종하고 있지 않은 증거가 아닐까?
또 이 말은 전쟁에 착수하고 있었던 자의 말이라고 생각할수 없다.   
또한, 「毛野臣」도 独立国을 영위하고 있던 것으로 읽혀지는 것이 중요하다.

継体의 옹립으로부터 「磐井의 乱」까지의 스토리는、즉위한 후 20年을 경과후, 드디어 旧大和勢力을 구축하여 「大和」에 입성한 継体朝가、그 旧大和세력의 亡命先이었던 「筑紫国」까지、旧야마토 세력을 쫒아가서 일방적으로 공격한 것으로 생각된다.

『記紀』에 의하면, 「磐井」는 호전적인 인물로 읽히지만, 「磐井」자신은 対抗上 防 戦했을뿐이라고 생각한다.

旧야마토 세력에서 보면, 혹은 継体를 옹립한「大伴氏」와 같이, 「磐井」를 天皇으로 받들어모셔, 정권탈환을 노렸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혹시 이 내전에서 「磐井」가 승리했다고 한다면, 침략자「男大迹王」을 정벌했던 応神天皇의 5世孫、磐井天皇의 즉위라고 기록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磐井」의 세력범위는,「筑前・筑後・肥前・肥後・豊前・豊後」의 6国 이외에, 本州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것은 継体가 친히 말하고 있는 箇所가 있다.

「天皇은 将軍의 印綬를 大連에게 주어서, 『長門부터 동쪽은 자신이 다스리고.
筑紫부터 西는 너가 통치하여、상벌도 생각대로 행하라 一보고할 것 없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서,「物部大連麁鹿火」는「磐井」세력을 진압하러 갔는데,

「長門으로부터 동쪽은 자신이 다스리고」라고 하는 継体의 말의 이면에는、
「磐井」의 세력이 長門부터 東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長門부터 東은、현재의 広島県에 걸친 정도일 것이다.


『筑後國風土記逸文』에서는「磐井」의 墓域에 대하여,
石人石馬를 세워 新羅風의 墓로서、현재 岩戸山 古墳이라고 불리고 있다.

古墳자체의 全長은132m로서、後円部経70m  ・前方部幅 95m의 크기로, 이것을 둘러싼 湟과 外提가 있고, 畿内의 天皇陵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또「別区」는、흡사 재판의 양상을 모조하고 있어, 독립하고 있었던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충분한 증거가 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磐井」는 단순한 筑紫王이 아니고、수개국에 올라타서 군림하고 있던 연방국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와같이 생각하면, 「近越・尾張」연합정권의 大王、「男大迹王」과 같은 입장이다.
   
최종적으로 정권투쟁에 승리하여, 중앙집권 국가를 이루었던 정치집단이야말로 야마토 정권이었기때문에, 말은 아무래도 야마토 정권에 의하여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継体즉위 직전에서는, 関東으로부터 西만으로 한정되지만, 크게 나눠서
「筑肥豊・長門」연합정권、「近越・尾張」연합정권、그리고 이 세력에 끼여있는 것 같은、야마토 정권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磐井」의 말로부터 알수 있듯이, 이 3국 이외에도 독립국은 적지않게 존재하고 있었다.
 
「磐井」의 家係는、「旧奴国」세력이나「邪馬台国」연합이라고 했던 세력등이 九州로부터 사라진 뒤, 혼란스러운 중소호족을 총괄한, 상당한 実力者였을 것이다.

 여기에서、継体가「物部大連」에게 했던 말을、반복해보자.
「筑紫부터 西쪽은 너가 다스리라고」하는 말은、「九州에서 物部王国을 만들어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継体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大伴氏」의 막후조종이겠지만,  잘되면, 「磐井」・「物部」를 둘다 쓰러뜨리려고 획책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이면만을 읽는 것일까?
 
「磐井」를 토벌했던 장군은 「物部大連麁鹿火」이었지만、이것은「大伴大連金村」의 推挙에 의한 것일것이다.
또 그「大伴金村」은 欽明天皇의 시대에、「任那」정책의 책임을 지고 失脚하고 있지만, 그것을 讒言한 것은「物部氏」이다.

실제、継体朝는 大伴정권이다. 그 가운데 있었던 「物部氏」는、쇠퇴가 있었다고 해도, 崇神朝시대로부터、天皇家의 외척으로서 번창했던 호족이다.   그것에 비해서 역사가 얕은 「大伴氏」는、「物部氏」의 존재를、내심 껄끄럽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物部大連麁鹿火」는 「磐井」를 진압했지만, 그후「物部氏」가 九州를 통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磐井」의 후예는、패배했어도 그럭저럭  건재했던 것 같았다.

『筑後國風土記逸文』에는、「磐井」는 이겼을 것 같지도 않고 도망쳐버려,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또 、岩戸山 古墳에 있는 福岡県 八女市 吉田의 八女丘陵은、외에도 10基의 前方後円墳과 数십基의 円墳이 알려지고 있지만, 이러한 古墳의 축조연대는 6세기 말경에 이르기 때문에 乱後에도 筑紫族은 쇠퇴하지 않았던 것이다.


「磐井의 乱」은 결과적으로 국내통일 전쟁으로 위치지워져, 「筑肥豊・長門」은、継体朝에게 통합되어 갔지만, 「磐井의 乱」의 본래의 목적은, 앞에 말했듯이 旧야마토 세력의 일소였다고 생각한다.
筑紫国王인「磐井」는、자기 방위를 위하여 応戦한 것이며, 결코 반역을 꾀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단독정권을 목표로 한「大伴氏」의 정치야심이 어른거리지만, 최종적으로 「大伴氏」는 「物部氏」와의 정치투쟁에서 패하여、欽明朝에 失脚했다.



6.継体王朝의 석양

23年 春3月、加羅国王은 新羅国王家의 娘과 혼인했지만, 이것은「新羅」의「任那」침공의 포석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이달에 近江의「毛野臣」은、「任那」부흥의 使者로서、「安羅」에 부임하고 있지만, 「毛野臣」이 취했던 행동은「百済」・「新羅」와 마찬가지로「任那」침공이었다.

「毛野臣」2년간、「新羅」와 대치하면서도「任那」의「久斯牟羅」를 점거하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독립한 자치구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毛野臣」는 「近江毛野臣」이라고도 記載되어 있다.「近江 오우미」라고 하면, 継体天皇의 고향이기도 한 땅이다.  따라서、「毛野臣」은 継体朝의 친위대장 혹은 근위대장이라고도 말할수 있는 입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毛野臣」이 귀국하지 않았던 것은, 「磐井의 乱」후의 継体朝에、장래를 맡기지 않았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毛野臣」의 渡航은、527年의 일이라고 말한다.
『継体紀』의 巻末에는、『百済本紀』를 인용하고 있다.

「25年 3月、진군했던 安羅에 도착하여、乞屯城을 만들었다. 이달에 高麗는 그 왕 安을 시해했다. 또 듣는 바에 의하면, 日本의 天皇 및 皇太子・皇子 모두 죽고 말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磐井의 乱」은、1年반 계속되고 있다. 나라를 건 전쟁이었다. 거기에서 써버린 戦力、国力등은 상상하기 어렵다.

継体朝는、바로 大伴政権이었다.「百済」관계에서의 「任那」실책, 혹은 「物部氏」배척의 실패가 「大伴氏」의 입장을 위험하게 하여、継体朝를 서서히 약체화시켜 갔던 것이다.


결국「毛野臣」은、「新羅」・「百済」軍과의 공방에 의하여、「対馬」까지 부득이 퇴각하게 되어, 마침내 죽고만다.

 그다음해 早春에、継体도 病死하지만, 天皇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면서도  즉위했던 그 후반생은、야마토 정권의 재건을 대명사로 했던 「大伴氏」에게 농락당하여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