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4. 人皇의 時代

청 설모 2018. 5. 1. 22:18

4. 人皇의  時代       http://www2.plala.or.jp/cygnus/k3.html

1.欠史 八代

①일본서기는 746年에 淳仁天皇의 명령에 의하여 弘文天皇의 曾孫・淡海의 真人・三船가 편찬한 것으로  본래는 和風(일본식) 天皇名만이 쓰여졌다 --예를들면 神武天皇은「神日本磐余彦天皇」、崇神天皇은「御間城 入彦五十瓊殖天皇」(미마키이리히코 이니에 수메라미코도)등

②神武・綏靖・安寧・懿徳・孝昭・孝安・孝霊・孝元・開化・崇神등의 漢風(중국식) 天皇名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는 듯하다. 天皇이라는 칭호는 天武天皇이후부터 사용된것으로 생각되고 그 이전은 대왕이나 아니면 다른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③神武로부터 崇神까지의 사이에 있는 8대의 천황은 (綏靖・安寧・懿徳・孝昭・孝安・孝霊・孝元・開化)실재하지 않은 가공의 인물이란 설이 있고(欠史八代라고 불린다)

④神武로부터 開化天皇까지를 葛城王朝라고 하여 실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鳥越憲三郎氏)


⑤『魏志倭人伝』은、邪馬台国시대에、30 여개국이 존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러한 首長이나 大王으로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神社伝承学에서는 이러한 8대가 혈연관계를 갖고 실재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계보를 보더라도 전부가 실재했다고는 볼수 없고 혈연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10대 崇神을 『記紀』와 함께「하씨쿠니시라스 스메라미코도」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実在性을 부인할수 없다. 일본서기에서는 초대 神武도 「하씨쿠니시라스 스메라미코도」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畿内政権의 초대는 神武이다. 그러면 神武가 가공의 천황이냐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神武이건 崇神이건 천황의 칭호는 후대에 붙혀진 것이므로 대왕으로 부르는 것이 더 좋겠지만, 神武의 모델이 호아카리 란 것이 앞에서 증명되었다. 崇神의 정체를 밝혀봄으로써 이것을 명확히 해보자.


⑥일본서기에서는 神武이래 天皇의 首都를 모두 大和로 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異論이 있다
『記紀』를 보면 천황가의 기초가 되었던 세력이 九州지방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다(神武東征説話)

⑦『古事記』에 기록되어있는  崇神의 干支崩御年으로부터 (崇神은 戊寅 12월에 죽는다) 崇神의 활약시기를 도출하면 3~4세기 초엽으로 비정된다(戊寅年은 258년, 318년, 378년등이 된다)


⑧히미코가 죽고 「旧奴国」의 침입으로 「倭」가 다시 戦国時代에 돌입한 것이 私見으로 241년 경이다. 247년에는 「旧奴国」의 「臺与」를 여왕으로 세움으로서 「旧奴国」은 과거의 「統一奴国」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266년 「臺与」는 「晋」에 조공하고 있다. 가령 崇神의 崩御年을 258년으로 하면 崇神朝의 시대와 「邪馬台国」의 시대가 꼭 들어 맞는다. 단  崇神朝가 그대로「邪馬台国」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崇神이 「邪馬台国」이 있던 시대에 활약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수 있는것이다.

魏志倭人伝에 기록되어있는 邪馬台国의 官名에 「伊支馬」(이키마)가 있고, 副官 2명에 각각 「弥馬升」(미마시요우), 「弥馬獲支」(미마카키)가 있다.


崇神은 「御間城入彦」이고, 皇后는 「御間城姫」이다. 「弥馬升」・「弥馬獲支」와「御間城」는 꼭 그대로 일치하고, 「御間城」는「미마죠우」로도 읽을수 있다. 더군다나 11대 垂仁天皇의 이름은 「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이쿠메이리비코이사치노미코토 이며, 「伊支馬」와「活目」도 꼭 그대로 일치한다.
역시 崇神朝=「邪馬台国」인가? 이것이야말로 「邪馬台国」=大和説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두손을 흔들며 즐거워할 검증이지만, 결코 그렇게 생각할수 없다.

『魏志倭人伝』을 보통으로 읽으면 「邪馬台国」은 九州지방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3인은 틀림없이 동일인물이다.


2.邪馬台国과 大和

①241년 경부터 본격화된 「旧奴国」과의 전쟁을 피해 연합국의 수도「邪馬台国」을 버리고 탈출하여 멀리 大和지방으로 도망친 세력이 있었고 그들은 거기서 자치권을 확보했다. 그것이 畿内정권이다.
일본서기에서는 「奈良」라고 하는 표기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風土記』나『日本霊異記』에는、「那良」이나「諾楽」이란 표기가 종종 나타난다. 발음은 모두 「나라」이므로 고대부터 이 지방은 나라라고 발음되고 있었다.  言語歴史学者인 加治木義博氏는 고대 일본국에서는 나라(国)를 「ラ라・マ마・ヤ야・ナ나」로 발음한다는 것을 소개한적이 있다.  「나라」의 「라」도 당연히 「国」을 발음한것이란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奈良」는 「나国」이 된다. 즉 『魏志倭人伝』에 나오는 「奴国」에서 음을 취한  国였던 것이다.


②히미코의 死後、「難升米」가 잠정적으로 대왕으로 세워졌으나 연합각국은 납득하지 못하고 연합각국은 또다시 독립활동을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 「旧奴国」이 수도 「邪馬台国」으로 침입해오자 사태수습에 고전하던 「伊支馬」・「弥馬獲支」・「弥馬升」등은 자신들의 안전도 도모하고 「邪馬台国」을 버리고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파를 이끌고, 瀬戸内海를 통과하여 大和로 멀리 도망친 것이다. 대략 이 탈출코스가 『記紀』에 나오는 神武東征 으로서 生駒山에 다다르기 까지의 기록과 거의 일치할것이다.

大和에 다다른 일행은 토착민들과 때로는 적대하고 때로는 융합하며 그 땅에 건국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그들은 일찌기 「統一奴国」이 분열한후 미케히코등을 추방시켰던, 말하자면  「奴国」의 邪馬台国 連合推進派였다. 신천지를 「奴国」으로 했던 것이다. 헷갈리기때문에 「新奴国」이라고 하지만 大和(邪馬台)라는 것은 「首都」의 의미이기때문에 「新奴国」의 수도가 大和인 것이다. 따라서 「奴国」의大和가 바르다.


私見으로는、
「弥馬獲支」는 崇神이고、皇后는「弥馬升」로「御間城姫」、「伊支馬」(以下、이쿠메)가 垂仁이다.
「弥馬升」과「弥馬獲支」는 거꾸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弥馬獲支」(以下、미마키)를 崇神으로 한다.  官이었던 이쿠메를 누르고 副官이었던 미마키가 왜 앞선 천황이 되었는지는 알수없지만, 推察하면 미마키는 군사고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천지를 제압하는데는 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군사고문이 없어진 「邪馬台国」이「旧奴国」에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수년후 연합국은 붕괴하고 「旧奴国」에 의한 새로운 「統一奴国」이 성립하였다.


미마키는 崇神朝야말로 「奴国」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때문에 九州의 「統一奴国」을 전과 변함없이 「旧奴国」이라고 불렀음에 틀림없다. 그것이 「旧奴놈들」,「熊族」이며,「旧奴国」이전에 그땅에 살고있던「阿蘇族」과 混同시켜「熊襲」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미마키가 「奴国」의 국호에 집착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倭」의 땅에서 「奴国」만이 「漢」에서 시작하여 때때로 중국으로부터 유일하게 인정받았던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실, 『旧唐書倭国伝』・『新唐書日本伝』・『宋史日本伝』등에는 이즈음의 사정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倭国은、옛 倭奴国이며」・・『旧唐書倭国伝』   
「日本은、옛 倭奴이며」・・・『新唐書日本伝』   
「日本国은 본래、倭奴国이며」・・・『宗史日本伝』   
『新唐書日本伝』이나『宗史日本伝』에는、국호를「日本」으로 바뀐것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지만, 중국의 인식은、「奴国」으로 일관하고 있다.


「奴国」이란 이름을 붙혀야만 중국과의 정식 외교권을 얻을수 있었기때문이다.「邪馬台国」은 수도이며 국가가 아니기때문에  邪馬台国連合도 어떤 의미에서는 「統一奴国」과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의 大和지방에 「新奴国」을 건국하고, 大和朝廷의 기초를 놓았던 崇神은 미마키이지만, 大和에 들어간후 『日本書紀』의 崇神紀에 기록되었던 것에는 異論이 없다. 그러나 그 記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기때문에 추적하여 검증해보고자한다.


③그런데 그후 「邪馬台国」의 일이지만, 「臺与」를 여왕으로 세워 「奴国」은 다시 통일되었지만, 그때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魏」의 군사고문 「張政」과 魏軍을 데리고、「邪馬台国」으로 왔던「難升米」는、旧奴国王・미케히코의 軍勢에 의해 首都・「邪馬台国」은 이미 파괴상태가 된 것을 알았다. 더군다나 연합각국도 뒤섞여 독립을 요구하며 전쟁을 걸어오는 상태였으므로 敵은 旧奴国軍만이 아니었다. 또한 「邪馬台国」의 중추를 이루고 있던 「奴国」의 상층부 미마키등은、탈출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3.『記紀』에 기록되어 있는 「邪馬台国」의 最後

①지금부터의 사건은 『記紀』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難升米」가 『記紀』에서는 어떠한 인물로 등장하는가를 알면 사실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알수있다.


 「難升米」는「나씨메」・「난쑈우마이」・「난쇼우메」등으로 발음되지만、『記紀로 邪馬台国을 읽는다』의 저자 永井寛氏는 그의 著書 가운데에서 、母音의 공통성으로부터 「難升米」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

   「難升米」:NAN-SHO-ME( 난쏘메)
   「長髄彦」:NAGA-SU-NE-HIKO(나가수네히코)

 「難升米」는 나가수네히코였던 것이다.

  나가수네히코라고 하면、神武東征에 있어서 神皇에 저항하다 살해된 남자이다.
 

『日本書紀』에서는、나가수네히코는 니기하야히에게 참수되었다고 記述하고 있지만. 니기하야히의  비존재성은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先代旧事本紀』의 記述이 더 신빙성이 깊다.
그것에 의하면 나가수네히코를 벤 것은、「可美真手命」(우마시마지노 미코도 以下 우마씨마지)일 것이다.
   
  우마씨마지는 『魏志倭人伝』에서 누구일까?
  역시 모음의 공통성으로부터
   우마씨마지 :(U)MA-SHI-MA-JI[(우) 마씨마지)]
   「都市牛利」:   TU-SHI-GO-RI  (   투씨고리)

  로 되어,  우마씨마지는, 『魏志倭人伝』의、「都市牛利」였다.
  이것도、永井寛氏의 說이지만、「都市牛利」는、『魏志倭人伝』에 의하면、「難升米」와、첫번째「魏」에 사절로 동행하고 있다.
  
 나가수네히코와 우마씨마지는 『記紀』의 神武紀에 등장한다. 따라서 「邪馬台国」末期의 모습은『記紀』의 神武紀에 기록되어 있다.  神武가 공격했던 것은 近畿의 大和가 아니고, 나가수네히코가  있던 九州連合国의 首都・「邪馬台国」이었다.

또한 永井寛氏는、자신의 著書중에서、武智鉄二氏가 쓴 『古代出雲帝国의 謎』를 소개하면서,
  
「歌舞伎에의 깊은 造詣를 토대로、『魏志倭人伝』에 登場하는「難升米」는 나가수네히코라고  읽어라고 指摘하고 있다」

  라는 구절을 실어 핵심을 찌르고 있다.

  

「邪馬台国」을 최후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자는、「難升米」=나가수네히코였다.
『記紀』에서도 大和를  明渡하기전、최후까지 저항했던 사람은 나가수네히코라고 적고 있다.
 神武天皇과 나가수네히코와의 대결을、등장인물을 바꿔읽음으로써,「邪馬台国」의 최후의 순간이 기록되어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難升米」=나가수네히코、「都市牛利」=우마씨마지 라면, 大和를 공격했던 神武는、「邪馬台国」    을 공격했던 미케히코=「卑弥弓呼」가 된다. 

神武의 본명은、「三毛野命」(미케누노미코도)이다. 火의 미케히코는, 『記紀』에서 神武란 인물이었다.
   

『記紀』를 따라서、「邪馬台国」의 최후의 순간을 좇아가보자.
神武東征의 전반부분은、崇神의 大和입성의 記述이므로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다、
  

「旧奴国」의 군대를 이끌고、미케히코가 「邪馬台国」에 침입해왔다.
「邪馬台国」의 군대도 잘 훈련된 정예병이었는데、官이 도망쳐버자 통솔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더구나 미케히코는 원래의 奴国領을 회복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승부는 불을보듯 뻔했다. 邪馬台国軍은 점점 밀려났고, 邪馬台国軍이 궁지로 몰리게 된 것을 알게된 연합각국은 독립을 할것인가 원군을 보낼것인가를 선택받게 되었다. 어떤 나라는「旧奴国」 을 환영하고 어떤 나라는  「邪馬台国」을 援護했다.  

 이즈음의 내용이 、「高倉下」・「八咫烏」・「兄磯城」・「弟磯城」등의 説話로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노력도 헛되이、「邪馬台国」은、旧奴国軍에게 괴멸되기직전이었다.
그때, 伊都国王・나가수네히코가 「邪馬台国」에 왔다.

나가수네히코는、미케히코에게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天神의 아들이 하늘의 磐船를 타고 하늘로부터 강림했습니다. 이름을 수사노오라고 합니 다. 수사노오를 神으로서 섬겨 왔습니다. 그런데 天神의 아들이 두사람입니까? 어째서 또 天神의 아들이란 이름을 붙힌 사람이 와서 땅을 뺏으려 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은 가짜이지요? 」


 나가수네히코는、「統一奴国」을 이룬 수사노오 한사람만이、天神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나가수네히코는 어려서부터 伊都国王으로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수사노오에 의한 「統一奴国」의 역사, 「統一奴国」의 분열로부터 연합국이 성립된 역사등,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혹시 수사노오가 出雲政庁을 세웠을 무렵, 九州지방의 오오쿠니누시는 대대로 伊都国王이었으며,
倭国大乱이 없었더라면, 순서대로 나가수네히코가 오오쿠니누시의 직을 맡아, 수사노오가 사망한 수대후에 奴国王이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倭国大乱후에 연합국이 성립되고 히미코가 여왕으로 세워졌다. 그에따라 선대의 伊都国王은「邪馬台国」의 重臣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 「伊都国」은 「統一奴国」의  분열후 연합추진파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히미코를 추천한 자도 伊都国王이었을런지 모른다,
 
「魏」와의 외교를 성공시키고, 「魏」로부터 정식으로「卒善中郎将」의 位를 받은 것도 나가수네히코였다. 「邪馬台国」에 대한 충성심도、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나가수네히코에게 미케히코로부터 답장을 가진 사자가 돌아왔다.
 미케히코는 말한다

 「天神의 아들은 많이 있다. 당신이 스사노오를 神으로 섬긴다면 반드시 그 표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이시오.」

   

나가스네히코는, 「伊都国」에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오오쿠니누시의 임명표시를 보였다.

『日本書紀』에서는 이것을 「天의 羽羽矢=깃이 넓은 화살」과「歩靫」화살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는、「十種의 神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수사노오의 孫인 미케히코도 당연히 같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미케히코는 祖父・수사노오에 대한    나가수네히코의 기분을  이해했을 것이다. 사는 땅은 달라도 원래는「統一奴国」이라고 하는 同郷의 인간이었다.

미케히코는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진 선대들의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싸울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책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때에 「魏」의 군사고문이었던 「張政」이 미케히코에게 면회를 요청했던 것이다.
옆에 있는 자는 우마씨마지였다. 「張政」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나가스네히코는 우마씨마지가 베었다. 이것으로, 『邪馬台国』에서는 당신에게 거스리는 힘을 가진자는 없다. 이쯤해서, 지금까지하던대로 여왕을 세우는 조건으로 화목해주지 않겠는가」

싸움을 부끄러워했던 미케히코였다. 나가스네히코의 죽음에 분노를 느꼈으므로 조건에 응하지 않았다. 우마씨마지는 「物部」의 부하들을 데리고 미케히코에게 귀순했다.
  

이때의 여왕 「臺与」는 미케히코의 孫이나 曾孫이었으며, 물론 히미코의 혈육이기도 하다.

『古事記』에서 말하는 「伊須気依媛」(이수케요리히메)가 아닐까?

(여담이지만, 이스케요리히메는、
『古事記』에서는 神武天皇의 大和의 后로 기록되어 있지만,
『日本書紀』에서는、「五十鈴媛」(이스즈히메)로 기록하고 있다.
 「臺与」를 이스케요리히메로 比定했던 이유는 나중에 다시 기술하고 싶다)


4.수수께끼의 인물・「伊聲耆掖邪狗」

 나가스네히코와 神武의 대결은 奈良의 大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神武는、大和에서 즉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의 증거로、神武를 모시는 橿原神宮은、明治이후에 건설된  神社이며、神武의 존재 그 자체가、『記紀』가운데서만이 증명할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神武의 모델이、旧奴国王・미케히코란 것과, 「難升米」=나가스네히코란 것이 판명됨으로써,
 神武가 공격했던 나가스네히코가 있던 大和는、九州에 있던「邪馬台国」이란 것임을 알았다.
 또한, 神武=미케히코라는 것은, 미케히코 = 호아카리이기도 한 이유이다.

 호아카리는 『先代旧事本紀』에 따르면、「物部氏」의 祖인  니기하야히와 동일인물이란 것, 이것은
 우마씨마지가 미케히코에게 귀순함으로써、자신들의 祖라고 우러러모셔 성립된 전승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魏志倭人伝』에는 지금까지 관계된 인물외에 또 한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張政」등을 帯方郡까지 보냈던 「掖邪狗」이다.
지금까지 관계인물을 정리하면(좌측의 칭호는 「魏」로부터 받은 것이다)

   「親魏倭王」 「卑弥呼」
   「卒善中郎将」「難升米」(나가스네히코)
   「卒善校尉」 「都市牛利」(우마씨마지)
            「卑弥弓呼」(미케히코)
            「臺与」(이스케요리히메)


 『魏志倭人伝』
  正治四年(243)에、魏에 朝貢하기 위해 방문했던「伊聲耆掖邪狗」가 있다.
 「伊聲耆」와 「掖邪狗」의 두사람이라고 보는 학설도 있고( 일반적)
  이것을 한사람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難升米」와「都市牛利」의 記述은、『大夫難升米次使都市牛利』라고 명확하게 두사람이라고 기록 하면서、「伊聲耆掖邪狗」의     記述은、『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人』이라고 기록한 것과 같이 어떻게 보아도 「伊聲耆掖邪狗」는 한사람의 인물이다.
  
이 인물도 또한「卒善中郎将」에 임명되어 있고,「邪馬台国」의 大夫이며,「魏」에 파견된 것으로 보아、「難升米」에 필적할만한 인물이라고 말할수 있다. 발음은 이세키에키야쿠가 통설이지만、前述한 永井寛氏는「이호키이야히코」가 아닐까 말하고있다.

「이호키」라고 말하면、『魏志倭人伝』에、邪馬台国連合国의 일원으로서、「巳百支国」가 기재되어 있으므로、「伊聲耆掖邪狗(以下、이호키이야히코)가, 이나라 출신이란 것을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親撰姓氏録』에 의하면 「五百木」・「伊福」姓은、「五百木部君」혹은,「伊福部連」라고 쓰여져、  「尾張連」과 同族이라고 한다。결국、「物部氏」도「尾張氏」도、그 前身은、「統一奴国」의 구성원  이었다는 것이고,「奴国」分裂後에는、「邪馬台国」측에 섰던 것이다.
 
 또한、우마씨마지는 次使로서、이호키이야히코는 大夫로서、「魏」에 파견된 것이므로、「邪馬台国」에서의 지위는、官이었던 미마키=崇神天皇보다도 상급자라고 말할수 있지 않을까?

 外務大臣이나 総理大臣이 외교를 담당하는 일이 있어도、県知事가 外交를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호키이야히코가 누구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을까? 문제는、「掖邪狗」에 해당하는 이야히코라는 이름이다.

 新潟県 西蒲原郡 弥彦村에、越後의 一宮인 彌彦神社(야히코神社)라는 式内社가 있다.
 이 神社의 祭神이「伊夜比古大神」(이야히코 오오카미)이며、越後開拓의 祖神이다.
 이대로는 「伊夜比古大神」과「尾張氏」를 연결할수 없지만、「伊夜比古大神」이라고 하는 것은、
 아메노카구야마의 別名이라고 한다. 아메노 카구야마라는 것은、国宝・『海部氏本紀』에 의하면、
「尾張氏」의 祖神・호아카리의 子이다.


 호아카리는 미케히코이므로 아메노 카구야마와 미케히코의 사이에는 얼핏보아 혈연관계가 없어보인다고 생각할수 있지만, 이 당시의 혼인관계를 생각해보면, 자신조차도 잘 모르고 있는 친자관계가 상당수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당시는 夜這い(요바이-남자가 밤에 여자 침실에 숨어들어감), 妻問い婚(남편이 처의 집을 찾아오기만 하고, 동거하지 않는 혼인 양식)등의 혼인관계가 성립하여, 태어난 아들은 모친에게 양육되고, 재산,  地域地盤은 모친쪽을 계승하고, 선조는 부친쪽을 계승하는 변형된 모계사회였다.
『日本書紀』에는 오오모노누씨의 妻였던 「倭迹迹日百襲姫命」(야마토도도비모모소히메노미코도 以下、야마토토토비모몬히메)의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신은 언제나 낮에는 계시지 않으므로 얼굴을 볼수가 없습니다. 제발, 잠시 머물러주세요.아침이 되면 아름다운 자태를 볼수 있도록」       당시의 혼인관계를 추찰할수 있다、

 따라서 미케히코와 아메노카구야마간의 친자관계는 긍정까지는 할수는 없다하더라도 부정만 하기는 힘들다 . 성인이었던 미케히코가 국경을 넘어서 「巳百支国」까지 妻問い를 했다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수 있는 것이다.
  

「巳百支国」에 草薙剣이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五百木姓과 尾張姓은 동족이다.
 현재, 尾張의 熱田神宮에 草薙剣이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부터、그 전신이라고 말할수 있는「巳百支国」에、草薙剣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수사노오가 손에 넣은 草薙剣은、모계사회 가운데에서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딸에게로 전해져 내려온 것은 아닐까?
 
 후일、「三種의 神器」중 하나가 된 草薙剣이、수사노오의 분신이라고도 말할수 있는 剣이,「巳百支国」에 전승되었다고 한다면 그 의미는 크다.
아메노카야마를 택한 것은、倭王・나가스네히코였다. 수사노오의 御霊을 빌어서、「魏」의 군단을 데리고 가라는、최후의 도박을 걸었던 것이다.  확실히、「魏」의 군단이 왔지만, 너무 늦게 왔다. 2년후에 왔던 것이다.
또한『魏志倭人伝』에 기록되어 있는 히미코를 시중들고 있던 男弟도、아메노카구야마가 아니었을까?


「邪馬台国」은、군사고문이던 官 미마키가 탈출해버려, 방위능력이 전무에 가까웠다.「邪馬台国」으로  旧奴国軍이 밀려들어옴으로써 연합각국은 자국방위를 위해 독립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旧奴国」에 의한 통일외에는  전쟁을 종결시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記紀』에서는、神武東征의 때、「高倉下命」(다카쿠라지노미코도、以下、다카쿠라지)가、「후쓰노미다마의 剣」을 献上헌상하고 있다. 다카쿠라지는 다름아닌 아메노카구야마였다.『先代旧事本紀』를 시작으로하여、神社伝承学에서도 증명되고 있기때문에 틀림없을 것이다.

神社伝承学에서 「후쓰노미다마」라고 하는 것은, 石上神宮에 전하는 「剣의 霊」이며, 수사노오가 야마다노오로치를 벤 剣이라고 하지만 실제에는「草薙剣」이 아닐까?  미케히코는、「草薙剣」을 눈에 목도하고, 그것이 자신의 후쓰노미다마 祖父 수사노오의 것이란 것을 알았다. 당연, 아메노카구야마에 대하여 그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메노카구야마도 또, 나가스네히코와 마찬가지로 「十種의 神宝」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近畿地方의 最奥의 秘境으로서、信仰을 집중시켰던 玉置神社에는, 『玉置文書』라는 古文書가 존재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古代文書研究家인 吾郷清彦氏가 해설하고 있다.(『さすら』平成六年十一月号)
 

玉置山에 神社를 창건했던 것은「玉置峯直」(다마키노 미네노 아다이)이며 그 出自에대한 설명에 따 르면

   「玉置峯直는 니기하야히의 孫으로서、天手栗彦命의 後孫이며、尾張連의 遠祖이다.
     玉置峯은 手栗彦命이 살던 곳이다.
    天手栗彦命은、또한 이름을 天香語山命이라고도 하고, 高倉下命이라고 하기도 하며 物部連의 遠祖이다」

    

이 전승자체는 「物部氏」와 「尾張氏」가 동족이라고 하기때문에 니기하야히와 호아카리가 동일신이 되어、「物部氏」와「尾張氏」가 연합했던 大和시대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메노카구야마에게、「手栗彦」이라고 하는 別名이 있었다고 하는 伝承은、아메노카구야마가 수사노오의 딸 다구리히메의 딸 系譜였다는 나의 견해에 진실이 더해져 간다.
「手栗彦」은、「데구리히코」혹은「다구리히코」일 것이다.
 이 이름으로부터 추측해도、同系譜이라고 생각한다.

 

또한、『玉置文書』에는「十種의 神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先代旧事本紀』에 따르면「十種의 神宝」라고 하는 것은、
   「沖都鏡」(오키츠가가미)
   「辺都鏡」(헤츠가가미)
   「八握剣」(얏츠카노剣)
   「生玉」  (이쿠다마)
   「死反玉」(마카루카에시노다마)
   「足玉」  (다루다마)
   「道反玉」(치가에시노다마)
   「蛇比礼」(헤비노히레)
   「蜂比礼」(하치노히레)
   「品物比礼」(쿠사구사노모노노히레)

   이며, 이것을 흔들면서

   「ひふみよいむなやことと言って、ふるへ。ゆらゆらとふるへ。」
라고 노래하면 、죽은자를 불러온다고 한다.

 (『先代旧事本紀』에는、「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布留部 由良由良止 布留部 ---
 (ひと  ふた  み  よ  いつ  む  なな  や  ここの  たり、ふるべ ゆらゆらと ふるべ)」와
十種神宝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러한 물품들을 흔들면、죽은자를 불러올정도의 呪力을 발휘한다고 한다.

   
 이것은、「物部氏」의 秘宝로서、현재도 奈良의 石神神宮에 존재하고 있다고 하지만,
 玉置山에도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玉置의 유래는、「十種의 神宝」를 안치한 것에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十種의 神宝」는、「三種의 神器」이전의 皇位継承의 표시인것 같지만, 이와같이, 「十種의 神宝」자체는 많이 존재하는 것 같기때문에 넓은 의미에서의 수사노오족의 증명같은 물건이었을 것이다. 결국, 수사노오로부터 인정받은 首長이나、수사노오의 친족에게、同族의 신분증명으로서 주어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것이 대대로 전승된 것이다.


玉置神社의 창건은、崇神의 代에 이루어진것 같고, 「十種의 神宝」를 玉置山에 매장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면, 石神神宮에 전승되고 있는 「十種의 神宝」이외는、그 역할이 끝난 것이 된다. 더군다나 崇神의 代였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증언이기도 하다. 하나의 「十種의 神宝」만이 황위계승의 표시로서 전승되어갔기때문이다.

石神神宮은「物部氏」의 神社인 동시에、天皇家의 武器庫였던것 같다. 거기에、「十種의 神宝」가 현존한다고 한다면、皇位継承의 표시로 되었던「十種의 神宝」는、「物部氏」가 소유하고 있던 것이 된다.
결국 정권투쟁에 이긴 것이、「物部氏」였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벗어났지만, 미케히코는, 우마시마지를 필두로 하는「物部」軍과 아메노카구야마등과 함께
「奴国」을 통일한 기세를 몰아、九州지방을 뒤로 하였다. 그것은 마치「統一奴国」을 이룩한 수사노오를 방불케하는 것이었다.


5.崇神天皇과 싸웠던 神武天皇

『記紀』에 따르면, 神武는 初代天皇、崇神은 第10代 天皇이지만、이 두사람이 동시대인이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스토리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神武는 旧奴国王・미케히코이며、崇神은、「邪馬台国」을 탈출했던 미마키였던 것이다. 미마키는 近畿지방에 새로운 「奴国」을 건국하여 大和(首都)를 정했다、말하자면 奈良의 大和인 것이다.
 
 미케히코는、九州지방에서「旧奴国」의 세력에 의하여 다시、「統一奴国」을 이룩한 후에, 미마키의 뒤를 좇아, 전쟁을 했다. 이것은 神武와 崇神이 싸웠다고 하는 것이 되지만, 『記紀』의 어디를 읽어봐도 그것이 기록된것이 없다는 힐책을 받을 것이다. 그것을 검증해보자.

먼저,『神武紀』에서,


「九月五日、天皇은 宇陀의 高倉山 頂에 올라서、나라의 가운데를 내려다봤다.
그무렵 国見丘 위에、80봉이 있었다. 女坂(완경사 길)에는 女軍을 두고, 男坂(급경사의 길)에는 男軍을 두고, 墨坂에는 피운 숯을 두었다. 女坂・男坂・墨坂의 이름은 이때부터 일어났다.
또 兄磯城의 軍은 磐余邑에 넘쳐났다. 적의 거점은 모두 요충지이다, 길은 끊기고 차단되어 지날 곳이 없었다. 天皇은 이것을 분개하여, 이날밤, 神에게  기도하며 잠들었다. 꿈에 天神이 나타나 가르쳐 주었다.『天의 香具山의 社가운데 있는 흙을 가지고,平瓦(기와) 80장을 만들고, 같은 수량의 神酒를 담을 瓶(병)을 만들어, 天神地祗에게 제사지내라. 또 몸을 정결케하여 呪詛를 하라. 이와같이 하면 적은 자연적으로 항복할 것이다』


天皇은 꿈에서의 가르침을 행하였다. 그때  弟猾이 또 아뢰기를、『倭国의 磯城邑에、磯城의 용맹한 장수가 있습니다. 葛城邑에, 赤銅의 장수가 있습니다.  이자들은 모두 천황에게 등을 돌려, 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천황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지금、天의 香具山 赤土를 가지고 平瓦를 만들고, 天神地祗에게 제사지내주십시오. 그것이 적을 무찌르기 쉽습니다」
 
이후、椎根津彦과 弟猾에게 명하여、天의 香具山의 흙을 가지러 가게 하였다. 또한、兄磯城의 軍을 공격하도록 했지만, 먼저 사자를 보내어 兄磯城를 불렀다、兄磯城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椎根津彦가 계략을 세워서 말하는데,『지금은 먼저 여군을 보내되, 忍坂의 길로 가시죠. 적은 반드시 精兵을 내보낼 것입니다. 이쪽은 強兵을 달리게 하여, 바로 墨坂을 목표로하여, 宇陀川의 水로서、敵軍이 일어킨 숯불에 쏟아부어 깜놀순간에 불의의 공격을 하면, 반드시 패퇴시킬것입니다」


 이에대한 내용이、다음의 『崇神紀』에 기록되어 있다.
「九年春三月十五日、天皇에게 神人이 나타나 가르침을 주었다.
『赤楯(붉은 방패)를 8장、赤矛(붉은 창)을 8자루로 하여、墨坂의 神에게 제사지내시오. 또、黒楯(검은 방패)를 8장、黒矛(검은 창)을   8자루로하여, 大坂의 神에게 제사지내시오』라고.
 四月十六日、꿈의 계시대로 墨坂神・大坂神에게 제사지냈다」


 그리고、이야기는 「武埴安彦」(다케하니야스히코)의 謀反으로 계속되었다.

「武埴安彦」의 謀反을『崇神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武埴安彦가 謀反을 꾀하고 있다는 표시일것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武埴安彦의 妻 吾田媛이、몰래와서、倭의 香具山의 흙을 가지고 、頒巾에 싸서 呪言을 하여、『이것은 倭의 国를 대신하는 흙』이라고 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으로 조속히 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늦게 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諸将을 불러모아 논의했다. 얼마지나지 않아、武埴安彦과 妻인 吾田媛이、軍을 끌고 왔다.


이러한 『崇神紀』와 앞前의 『神武紀』를 비교하여 읽으보라고 권하고 싶다.『崇神紀』는 방어하는 쪽의 記述이고、『神武紀』는 공격하는 쪽의 記述로서、각기 입장을 달리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미케히코는 미마키가 近畿지방에 건국했던 「新奴国」의 大和를 공격했던 것이다.
「武埴安彦」의 妻・「吾田媛」(아다히메)라는 것은、神武天皇의 日向시대의 妻、吾田邑의 「吾平津媛」(아히라츠히메)임에 틀림없다.「新奴国」의 미마키가、멋대로「武埴安彦」의 妻라고 굳게 믿어버린 것이었다. 

『神武紀』의「忍坂」은 『崇神紀』의「大坂」이며、「墨坂」은 그대로 「墨坂」이다.
 또한、『神武紀』의「赤銅 80장수」는、『崇神紀』의 「赤楯 붉은 방패 8장、赤矛 붉은 창 8자루」이며、「磯城邑의 80장수」는、「黒楯 검은 방패 8장, 黒矛검은 창 8자루」에 比定할수 잇다.「兄磯城」라고 하는 것은 물론 磯城를 都로 했던 미마키 본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神武紀』의「椎根津彦」이 『崇神紀』의「武埴安彦」이 아니라면 이 說은 성립되지 않게 되는데、

「椎根津彦」은 「시이넷츠히코」이며, 
「武埴安彦」은 「다케하니야스히코」라고 읽음으로서 다른 사람으로 생각할수밖에 없다.
「武埴安彦」의「武」字는、美辞句이므로 없애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런데、「椎根津彦」는『古事記』에서는、「槁根津彦」(사오넷츠히코)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고사기의  現代訳本에서 (하시넷츠히코)로 번역한 사람이 있다(東大国文学科를 卒業한 文学博士로서 現代訳에 오류가 있다고는 생각할수 없다)
   「하니야스히코」 HANIYASUHIKO
   「하시넷츠히코」 HASINETUHIKO

모음으로 본 경우 이것은 어떻게 보아도 동일인물이다. 단지 듣는 편의 차이에 따라 다른 글자를 맟춘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神武紀』9月5日「天의 香具山의 土・・운운」하는 것이「埴安」이라고 하는 地名의 由来가 되었다는『日本書紀』의 記述도 、흘려넘겨 지날수가 없다.


미케히코는 최후까지 「邪馬台国」을 지키려고 하면서 죽어갔던 나가스네히코의 일을 생각하면,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여 급하게「邪馬台国」을 버리고 도망친 미마키를 용서할수 없었을 것이다.
「奴国」을 재통일한 미케히코는、「新奴国」의 미마키에 대하여 공격을 늧추지 않았다. 대략, 이 전쟁은 격한 공방전의 결과,「旧奴国」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어떤 중대한 약속이 있었을까?


前述했던、“다른 事件의 내용도 섞어 넣어서 편집했다”라고 하는件은、이 神武와 崇神의 전쟁있던 것이다. 결국 神武東征神話는、「邪馬台国」에서의 미케히코와 나가스네히코의 사건과  大和에서의、미케히코와 미마키의 사건을 하나의 사건처럼 편집했던 것이다. 더우기 같은 사건이면서도 『神武紀』와 『崇神紀』에 나눠서 기록함으로써 전연 다른 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편집했던 것이다. 이 편집인이 「藤原不比等」였다면、그는 역사의 천재이다.「不比等」라는 의미는 이 세상에서는 비교할자가 없다라는 의미이지만, 본래는、「史人」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日本書紀』에서 崇神의 后는「御間城姫」이다. 이것은 邪馬台国시대의 또한명의 官이었던 「弥馬升」이라는 것은、前述했다. 그런데 그다음 妃가「尾張大海媛」(오와리 오오아마 히메)이다.
「尾張大海媛」는、『海部氏本紀』에 따르면、호아카리의 7세손인「建諸隅命」(다케모루스미노 미코도)의 妹다.「建諸隅命」도、『日本書紀』의 崇神朝에서 활약하고 있다. 즉「尾張氏」이다.

중대한 약속이란 것이 바로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神社伝承学에 따라 解明된 大和조정의 성립을 떠올리시길 바란다. 그것에 따르면、天皇은 九州王家로부터, 그 황후는 出雲王家로부터 하여, 황후쪽의 친족이 정치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図式을 적용시켜보면, 天皇은 미마키의 新奴国으로부터, 皇后는 수사노오의 系譜인、미케히코의 「旧奴国」으로부터 결정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미마키를 천황으로 하고, 그 정치를 황후측의 「尾張大海媛」와 「建諸隅命」즉、「尾張氏」가 담당하는 것이었다.


흥미깊은 것은、『日本書紀』의 崇神朝에 있는、야마토 토토비모몬 히메 라는 존재이다.
야마토 토토비모 몬히메를 샤먼적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학설에서는 그녀야말로 히미코라고 말하기까지도 하지만 야마토 토토비모몬 히메의 父는 孝霊天皇、母는「倭国香媛」(야마토노 쿠니카 히메)이다.「倭国香媛」등、実名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신빙성도 없다,  그렇지만、孝元天皇과 皇后「欝色謎命」(우츠시고메노 미코도)의 사이에、倭迹迹姫命」가 기록되어 있어서 어쩌면 동일인물이 아닐까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欝色謎命」은「穂積連」의 祖이다.「穂積連」는、「物部氏」로부터 나왔으므로、「穂積連」의 祖라고 하면,「物部氏」인 것이다. 그리하여,야마토 토토비모몬 히메는 「物部氏」라고 말할수 있다.
또한、孝霊天皇・孝元天皇조차도 実在했다는 증명이 없지만....


결국, 崇神朝의 구성은、미마키를 天皇으로하여, 정치는「尾張氏」가、祭는「物部氏」가 담당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旧奴国」과 「新奴国」과의 사이에 이루어진 약속이었다.

왜 미케히코 자신이 大王으로 추대되지 않았을까? 대략 이 전쟁의 한 가운데 미케히코가 죽고 말았다고 생각된다. 전쟁에서는 이겼던 「旧奴国」이었지만..


6.天日槍」

前章까지、『神武紀』와『崇神紀』에 기록되어 있는 공통된 사건으로부터、神武天皇과 崇神天皇은、싸우고 있었던 것을 증명해 보였다. 神武는、미케히코이며, 崇神은 미마키였다.
결국 이 두사람의 전쟁은、「新奴国」과「旧奴国」의 전쟁이었으며、日本列島의 覇者(라고 해도 기껏、北陸을 포함한 西日本에 한하지만)였던 수사노오가、실현했던「統一奴国」을 계승한다는 프라이드를 건 싸움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증명은、『記紀』의 어디에도 이것이 싸움의 증명이라고 단정할 만한 記述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崇神紀』에는 前述했던 것 이상의 대발견은 없었고, 있다고해도 겨우 이것도 증명의 수단이 될까하는 정도의 발견밖에 없었다.


좀더 앞으로 진도를 나아가,『垂仁紀』를 보면、
崇神의 시대에、「大加羅国」의 人「都怒我阿羅斯等」(쯔누가아라시토、以下、씨누가아라시토)가 「越」의「게히」浦에 도착하여, 「角鹿」이란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記述이 있다.
씨누가아라시토에 대해서는 『日本書紀』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이 씨누가아라시토와 전적으로 똑같은  記述이 다른 사람으로서 『古事記』의 『応神記』에 기록하고 있다. 이 인물은 「天日矛」(아메노히보코, 『日本書紀』에서는 「天日槍」)이다. 이것으로부터 씨누가아라시토와 아메노히보코는 틀림없이 동일인물이라고 말할수 있다.


『日本書紀』의『垂仁紀』에서 아메노히보코는 배를 타고「播磨国」에 도착하고 있다.
「八種의 神宝」를 지참하고 천황에게 바쳤다. 天皇은「播磨国」의 宍栗邑과、淡路島의 出浅邑을 주었으나 아메노히보코는 이것을 거부하고, 「近江国」의 吾名邑에 잠시 머물다,「但馬国」을 居로 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近江国」로부터 「但馬国」에 걸쳐서 아메노히보코가 지배지역으로 했다는 것에 다름아니지만、天皇의 제안을 무시하는 이런 행동을, 천황이 허락했으므로, 입장이 천황보다 위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메노히보코의 記述은、『垂仁紀』・『応神記』에 있기때문에 씨누가아라시토가 崇神의 시대에 방문했다고 『日本書紀』에 확실히 記述되어 있기때문에, 아메노히보코가 崇神시대에 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垂仁紀』・『応神記』는 구체적으로 시대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

  아메노히보코는,『記紀』에 의하면, 「新羅」王子였던것 같지만, 「新羅」로부터 왔다면, 일부러 瀬戸内를 빼고, 「播磨国」으로부터 上陸했을까? 日本海쪽으로부터가 훨씬 편리하고, 어느정도 일본의 지리에 상세하지 않다면, 関門海峡을 통과하여, 瀬戸内을 지나가려고하는 発想은、생겨날수가 없다.


瀬戸内를 빼고「播磨国」에 상륙할수 있는 者의 조건은 상당히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朝鮮半島에 살고 있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九州의 어딘가、혹은、四国에 한정되어진다고 생각된다. 지금 風으로 말하면, 일본인이다. 아메노히보코는、틀림없이 일본인이었다. 아니 일본 출생이다. 그렇다면 왜 『記紀』에서는 新羅人이라고 기록했을까?  이것은  수사노오가「新羅」로부터 왔다고 기록되어있는 것과 큰 관계가 있다.『日本書記』는, 철저하게 친백제, 반신라적인 양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일의 조정에서 사정이 나쁜 역사는 모두 신라, 즉 가상적국이었다. 수사노오는 三貴神의 한명으로서 「尊」의 칭호를 주면서도「新羅」로부터의 도래인이라고 하는『日本書紀』의 記述은 수사노오의 系譜를 멸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수사노오는 조선반도, 「伽耶」로부터 온 도래인이며, 지금식으로 말하면 難民이었지만, 수사노오의 시대에 「新羅」는 아직 성립되지도 않고 견강부회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뒤에 다시 後述하겠지만,  아메노히보코의 系譜에 神功皇后가 있다.『日本書記』에서는 『神功紀』로서 皇后이면서、다른 천황과 같은 급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생각해보면, 아메노히보코는 天皇家의 祖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노오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고 확실히 수사노오系라고 말할수 있지 않을까?

 

 아메노히보코의 神宝라고 하는 것이 『記紀』에 記述되어 있다.

『日本書紀』로부터 인용해보면,
 ・「葉細의 珠」
 ・「足高의 珠」
 ・「鵜鹿鹿의 赤石의 珠」
 ・「出石의 刀子」
 ・「出石의 槍」
 ・「日의 鏡」
 ・「熊의 神籬」
 ・「胆狭浅의 太刀」등이다.


표현과 수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十種의 神宝」와 똑 같다.

아메노히보코의 記述은、『記紀』에 한정되지 않는다.『播磨国風土記』에는、그 지명의 유래와 함께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메노히보코는 8천명의 군대를 이끌고「播磨国」의 揖保川河口로부터 상륙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저지하는 자가 있었다. 「葦原志許乎男」(아시하라 니시고오)이다.
 아시하라 니시고오는、오오쿠니누씨・오오나무치의 別名과 같이 말해지고 있지만,『播磨国風土記』에서는 이 이름에 별도의 인격을 부여하고 있다. 즉 다른 사람으로서 구별하고 있다、


아시하라 니시고오의 이름은 물론 인명이 아니고、「葦原의 훌륭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아메노히보코가 온 것은、崇神天皇의 代이다.
뚝 짤라 말해서, 아메노히보코는 「旧奴国」의 미케히코이다. 이 아시하라 니시고오는 崇神天皇이다.
『播磨国風土記』는、『日本書紀』가 애매하게 쓴
 아메노히보코 = 미케히코,  崇神天皇=미카키의 싸움의 역사를 記述하고 있다.
 
그리고   아메노히보코와 수사노오를 祖로하는 미케히코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新羅人으로 취급하는 이유도 저절로 판명되는 것이다.

미케히코는 어떻게해서던지 강행돌파하여, 내륙으로 진로를 향하고 있다. 미카키는 방어일변도로 서서히 나라를 빼앗겨 갔다. 더우기 이때의 미카키의 세력은 겨우 大和의 三輪山 기슭의 소국 (이라기보다 마음대로 점령했던 자치구, 이때의 나라는 이 정도의 것이라고 생각된다)이었을 것이므로, 미케히코의 東征을 들었던 미카키가 방위를 위해 서쪽을 향하다, 「播磨国」에서 미케히코의 군대와 조우했던 것으로, 압력에 밀려서 후퇴했던 것이 진상이 아니었을까? 


 유감스럽게도 미케히코는 「播磨国」에서의 공방전의 한가운데서 죽고 말았다.
『播磨国風土記』以外、아메노히보코의 足跡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없다.

 그것은 「但馬国」에서 끊기고 있다. 그외에는 약간、『記紀』의 에피소드 정도이다.
 『播磨国風土記』에 의하면, 아씨하라 노씨고호와 아메노히보코는、葛篭(つづら 옷고리짝)을 걷어찼다고 한다. 히보코의 葛篭은 전부 「但馬의 出石」에 떨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메노히보코의 魂이 이땅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한다.

『神武紀』에서는、神武 본인을 죽이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계속되었고、神武의 兄「五瀬命」가 공격당했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미마키의 「新奴国」을 항복시킨 것은、미케히코가 죽은 후의  「尾張」와「物部」의 連合軍일것이다. 어느것이건 미마키는、「旧奴国」側의 요구를 받아들여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이라고 해도 미마키는 大国・「奴国」의 정식의 大王의 지위를 손에 넣었으므로 전후처리로서는 기대이상이었다.

미마키의 外戚으로서、「尾張氏」・「物部氏」는「新奴国」의 政祭権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이 천황과 外戚의 역학관계는 후대의 시대까지 면면히 계속되었으므로 대단히 중대한 약속이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리고 이때부터、「尾張氏」의 祖神인 호아카리와、「物部氏」가 모시는 니기하야히가、同殿에 모셔지게 되어 동일시되어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物部氏」는 그 본거지를「河内国」에 두고、「尾張氏」는 葛城族과 결합하여, 葛城山麓의 高尾張邑을본거지로 했다.

 

단지, 어느 시대에서건 연합정권이라는 것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尾張」와「物部」의 역학관계는 이제는 「物部」의 독재에로 변해갔다.
「十種의 神宝」는、「物部氏」와「尾張氏」쌍방이 소유하고 있던 것이지만, 황위계승의 표시로 된
「十種의 神宝」는、「物部氏」가 소유하는 것으로 계승되었다. 이것은「物部氏」가 呪術集団이었던 것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은、「物部氏」가 政祭의 祭를 담당했던 이유이기도 하지만, 占이나 신내림등의 방법에 의해  정치적 판단을 함으로써 「尾張氏」보다 「物部氏」쪽이 발언기회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尾張氏」의 「十種의 神宝」는、前述한바와 같이 玉置山에 매장되었던 것이다. 대등했던 「尾張」・「物部」의 관계가 이제는 「物部氏」에게로 기울어져 같던 것이다.


葛城지방에서、「尾張氏」와 결합했던 豪族은、훗날의「葛城氏」일 것이다.
 国宝・『海部氏本紀』에는、아메노무라쿠모노의 子로서、「葛木出石姫命」이란 이름이 보여、아메노히보코와「葛城氏」・「尾張氏」간의 강한 결속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出石」이라는 것은、「但馬国의 出石」을 연상시킨다. 이 땅이야말로 아메노히보코의 전승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