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일본의 역사- 한반도 관련 기록들.1 -신공황후.6. 광개토왕 비문에서

청 설모 2013. 9. 10. 00:45

(앞의 내용에서 이어짐)

5.광개토왕 비문

(1)신공황후 49년의 기록과 비슷한 내용은 삼국사기나 중국사서 어디에도 없고 단지 내용상 가장 근접한 기록을 찾아보면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391년의 기록이다. 두 기록은 모두 왜(倭)가 우위에 서서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고 하는 점에서 줄거리가 같다. 광개토왕릉비 외에는 신공황후 49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은 391년에 있었던 사건을 옮겨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두 기록에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왜(倭)와 백제의 관계에 있어서 광개토왕릉비는 왜(倭)가 백제를 정복했다고 하고 일본서기는 왜(倭)가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런데 백제와 왜(倭)가 군사적으로 충돌했다는 이야기는 광개토왕릉비 외에는 아무데도 나오지 않는다.

 

広開土王陵碑에 倭와 관련된 기사가 나타나는 조항은

辛卯年 記事、永楽 9年己亥(399)条、 10年庚子(400)条、14年甲辰(404)条이다.

10年庚子条는 주로 新羅와 加耶의 접경지대에서 펼쳐진 왜군정벌과 그결과를 기록하고있다. 14年甲辰条는、高句麗와 百済의 접경지대이던 帯方界에 들어왔던 왜군을 격퇴한 경과를 기록하고 있다

 

( 2005년 6월23일에 현재의 광개토왕 비문의 탁본인 酒匂本 이전에 작성된 탁본이 중국에서 발견되었는데, 酒匂本이 1881년에 작성된 현재 가장 오래된 탁본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2006년 4월에는 중국사회과학원의 徐建新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구 일본육군에 의해 개찬 조작되었다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①辛卯年 記事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百残□□新羅」이 倭의 臣民으로 되었다고 볼수 있는가의 문제

 

첫째、倭가 百済를 臣民으로 했다고 한다면, 永楽 6年条에서 高句麗가 百済를 공격할 때 倭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안되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가 항복하는 장면에 있어서 타협을 왜의 총독이 아닌 백제왕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가 백제를 왜의 신민으로 인정할 여지가 없다.

 

둘째, 永楽 9年条로부터 볼때 倭는 백제와 和通하는 대상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것은 永楽 6年에 백제왕이 고구려의 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한 이후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혹시 그 전에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했다거나 또는 고구려가 그 사실을 인정했다고 한다면 碑文의 이 일절에도 그 威勢의 차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和通」이라고 하는 것은 대등한 상대와의 협약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셋째, 碑文에 나타나는 「民」의 개념에는 오로지 고구려의 民이 있을 뿐이지 다른 나라의 백성을 民으로서 기록한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百済王조차도 民에 미치지 못하는 「奴客」에 지나지 않는데 倭国의 民을 「奴」가 아닌 「臣民」으로 표기할 리가 없다.

 

[ 왜(倭)와 백제의 관계에 있어서 광개토왕릉비는 왜(倭)가 백제를 정복했다고 하고 일본서기는 왜(倭)가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런데 백제와 왜(倭)가 군사적으로 충돌했다는 이야기는 광개토왕릉비 외에는 아무데도 나오지 않는다. 또 광개토왕릉비가 기본적으로 백제를 비하하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 사건도 백제가 왜(倭)에 협조한 사실을 정복당한 것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이 크다.] 

 

②9年己亥(399)条

九年 己亥 百残 違誓 與倭和通王 巡 下平穰 而 新羅 遣使 白王云 倭人 満 其 國境 潰破 城池 以奴客 爲民 歸 王請 命 太王恩 後 稱 其忠□                                                                 時 違使 還告 以□訴

 

百残이 약속을 어기고 倭와 和通했기 때문에 -- 永楽 6年(396)에 백제 아신왕이 패전후에 [지금부터 이후는 영원히 奴客이 되겠다]고 서약한 것을 어겼다는 것을 말하고 倭와 和通했다는 것은 백제 阿莘王 6년(397년)에 倭国과 우호를 체결하고 태자 腆支를 인질로 보낸 사건을 말한다

 

「以奴客為民」의 의미-

新羅王=倭民説-

新羅王=高句麗民説에 의하여 新羅使臣의 말을 해석해보면、「倭人이 국경에 차 있고, 城池를 부쉈기 때문에 奴客(=新羅王)은 (高句麗의)百姓이 된자로서 王에게 帰依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는 말이 되어 문맥이 바르고 뒷 문장과의 연결에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百済는 371年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던 강국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속민이지도 않고 조공관계를 확인할 수도 없다. 永楽 6年의 고구려의 백제 토벌의 명분은 고국원왕의 피살에 대한 보복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에 고국원왕이 백제에게 피살당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의 동맹군이었던 倭의 행위를 과장하여 기록하므로써 원수인 百済百残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제에 대한 모욕과 극도의 적개심이 포함되어 있다.

 

③ 10年庚子

十年 庚子 敎遣 歩騎 五萬 住救 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満 其中官兵 方至 倭賊退

□□□□□□□□來 背息 追 至任那 加羅 從抜城城 即 歸服 安羅人 戍兵 抜 新羅城城 倭満 倭潰城□□□□□□□□□□□□□□□□□□九 盡臣 有安羅人 戍兵満□□□□□□□□□□□□

□□□□□□□□□□□□□□□□□□□□□□□□□□□□□辭□□□□□□□□□□□□□□潰□□□□安羅人 戍兵 昔 新羅 安錦 未有身 來朝貢□□□□□開土境 好太王□□□□□□□□□□

□□□朝貢

 

ㄱ. 5万을 보내 신라를 구원시켰다. 男居城으로부터 新羅城까지 倭人이 가득찼다.

ㄴ.관군이 바로 도착하여 왜적을 격퇴시키고 뒤를 쫓아 任那加羅의 従抜城에 이르렀다. 성이 바로 함락되고 바로 귀순하여 복종했기때문에 巡邏兵을 두어 지키게 했다 .

ㄷ. 新羅 □農城을 공격하자 倭寇는 萎縮하여 潰滅당했다. 성안 남자의 열중 아홉이 전부 죽거나 강제적으로 이주되었고, 巡邏兵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ㄹ.師는(中略)□□城을 □하고, 巡邏兵을 두고 지키게 했다.

ㅁ.전에는 신라의 寐錦이 손수 와서 복종하여 섬기지 않았지만, □□□広開土境好太王의 時(에 이르러 )、(新羅)寐錦이(中略)朝貢했다.

 

任那加羅는 원래 任那(昌原)와 加羅(金海)의 合称이며、広開土王陵碑의「任那加羅」는 金海의 加耶国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체를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정적인 근거는 전쟁이 일어났던 직후인 5세기초에 김해의 대성동 고분군이 급격히 몰락하고 高霊의 池山洞 古墳群이 서서히 대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었던 곳, 즉 任那加羅가 김해지역의 세력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高句麗는 平定한 任那加羅의 城에 巡邏兵을 두어 지키게 했다는 표현으로부터 正規軍의 대규모 주둔이나 막부설치에 의한 지배가 아니고 、「羅人(=邏人)」 즉 巡邏兵을 安置한 것으로 주변에서 반복되던 전투조차 종결되어 현저한 적대위협이 없게되면 철수시킬 정도의 부대였을 것이다.

 

④14年 甲辰

十四年 甲辰 而 倭 不軌 侵入 帯方界□□□□□石城□連船□□□□□□□□□平穰□□□□相遇 王要截刺 倭寇 潰敗 斬殺無數

 

十四年 甲辰에 倭가 法度를 지키지 않고 帯方界에 침입했다. (中略)石城을 □하고、 船를 이어합쳐、□□□했다. 王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여, 平壌으로부터 □□하자, □鋒이 遭遇했다. 王의 군대가 敵의 길을 도중에서 끊어 席巻하자, 倭寇가 潰滅했다. 참살당한 자가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帯方界 즉 黄海道방면에 倭軍이 침입했지만 、 高句麗 광개토왕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토벌되었다고 하는 大筋은 명백하다. 다만, 이 비문만으로는 倭와 백제의 連繋性이 불확실하나 碑文의 永楽9 年(399) 己亥条에 「百残違誓、与倭和通」라고 하는 글도 있고, 『三国史記』百済本紀에도 、阿莘王 6 年(397)에「王與倭國結好」라고 하는 記事가 나타나기 때문에 碑文의 永楽14年 甲辰条의 記事는、百済와의 공동작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00年에 倭軍이 任那加羅의 城으로 쫒겨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부터 任那加羅의 수도인 김해까지는 상당한 원거리에 달한다. 그 당시 고구려군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倭兵이 배를 타고 任那加羅로 퇴각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군이 가까운 甘浦나 蔚山、또는 迎日등으로부터 배를 이용하여 퇴각하지 않고 여기까지 육로로 도망해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유가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三国史記』新羅本紀에 따르면、船를 타고 온 倭兵이 新羅의 수도를 공격하려고 했다면, 동해안쪽에 배를 대어두고 들어오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아니면, 永楽 10年条에 보이는 왜군의 인원구성의 主力이 加耶人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倭側의 海上輸送能力을 문제로 하여、広開土王陵 碑文의 倭는 、대부분이 倭를 詐称한 加耶人이며、여기에다 加耶에 거주하는 倭人이 약간 섞여있었을뿐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후일, 6世紀 중엽의 管山城 전투의 경우, 수만명이 참가하는 百済-加耶-倭 연합군에 있어서、倭軍의 숫자는 1,000名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碑文의 倭賊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百済의 후원을 받은 加耶-倭 연합군이며、人員의 주축은 가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고구려는 복식이 다른 왜를 과다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또 『三国史記』朴堤上伝에서 、堤上이 倭国에 도착했을때 (新羅 訥祗王 2年、418)의 記事에 따르면、 전에 百済人이 倭에 들어와서 、新羅와 高句麗가 倭王国을 침략하려고 한다고 「讒言」하여, 倭가 兵士를 보내 「新羅의 国境밖에서」「邏戍」시켰지만、高句麗가 공격해 와 倭의 「邏人」을 전부 잡아 죽였기 때문에 倭王이 百済人의 말을 정말로 믿고 있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여기에서의 백제인은 백제태자인 腆支이며, 腆支는 인질이 아니고 왜국군대의 출병을 유도하기 위해 보내진 사신이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여기에서 倭의 巡邏兵이 신라국경의 바깥, 즉 가야지역내에 들어와 주둔했다는 것을 알수 있지만, 그들은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보내진 巡邏兵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의 군대가 아닌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왜군의 동원에 백제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백제로서는 가야와 왜 사이의 우호관계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후방인 신라를 견제하고, 유사시에는 왜군을 동원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任那加羅는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따라서 왜의 巡邏兵을 받아들여 、新羅방면의 辺境의 城에 주둔시켜、그들에게 신라나 고구려의 동정을 정찰시키는 것을 맡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倭軍은 任那加羅로부터 상당한 댓가를 받아서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 任那加羅와 倭의 관계는 대등한 계약에 의한 고용관계라고 말할수 있다.

 

한편, 新羅는 가야가 왜와 동맹하여 자신들의 영토내에 출몰하고 辺境의 세력을 통합해가는 것을 혼자서 견뎌낼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는 급격한 수단으로 고구려를 끌어들여 任那加羅의 세력을 꺾으려고 하여, 왜군의 존재를 과도하게 부풀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전투는 고구려측의 碑文의 記述에 의하면, 고구려군과 왜군이 행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해당지역에 있는 낙동강유역을 둘러싼 2대세력, 즉 신라와 가야간의 패권투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이 전쟁의 결과, 가야의 일부 소국이 신라에게로 이탈하고,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新羅-加耶文化圏이 본격적으로 분화되는 양상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임나가라 종발성의 가야-왜 연합군은, 추격해 온 고구려-신라 연합군에게 곧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결국 <비문>에서 신라를 구원한다든가 왜적이 신라성 주변에 있었다든가 하는 것은 고구려군의 대외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적인 전투는 임나가라 종발성에서 처음 벌어진 것인데, 그 전투는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간단한 승리로 끝났다. 그 직후에 고구려는 평정한 임나가라 종발성에 羅人, 즉 巡邏兵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高句麗의 歩騎 5万의 大軍은 、소수의 왜군을 노리고 왔던 군대가 아니고 、新羅의 요청에 의하여 그 배후의 加耶連盟의 핵심부를 공격하기 위하여 동원된 것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서 前期 加耶連盟을 주도했던 金海의 加耶国은 멸망했다. 金海 大成洞 古墳群의 최후의 大型古墳인 大成洞 1号墳이 축조된 후, 돌연, 묘의 축조가 중단된 것은 가야왕실의 몰락을 반영한 것이다. 高句麗는 加耶征伐을 통하여 百済와 倭를 견제하는 효과만이 아니고 신라로부터도 일정의 반대급부를 얻었을 것이다.

 

404年에는 倭軍이 왜 九州、加耶、百済를 지나 、帯方界에까지 나타나 高句麗와 싸웠을까?  帯方界는 당시 高句麗와 百済의 경계지역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 그 왜군이 가야를 도우기 위한 군대였을까 아니면 백제를 도우기 위한 군대였을까 하는 점이다. 文献史料上에서는、397年에 阿莘王이 倭国과 結好했다던지, 広開土王이 399年에 百済와 倭가 和通했다고 하는 것을 듣고、平壌城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을 보아,  먼저 백제의 원병이었다고 생각할수 있다. 40 4年에、 帯方界에 나타나 (残兵과 和通하여?)배를 연결하여 공격했지만 궤멸당했다고 하는 「倭寇」는 百済를 위해 동원된 것이라고 할수 있다 、

 

그 당시 外国의 軍兵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은  広開土王의 즉위이후 、高句麗에 비해서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였던 백제였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397 년에  百済의 왕자 腆支가 처음으로 倭国에 갔건, 아니건간에 대규모의 왜병을 동원할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百済王子가、高句麗가 倭를 치러 올것이라고 하여 어떻게던 위기의식을 불러일어켰다고 해도, 또 倭가 加耶에 파견시킨 소수의 巡邏兵이 高句麗軍에게 패배했다고 해도 이 이유만으로는 倭軍이 高句麗-百済間의 전선에 대거 투입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399年과 400年에 、新羅에 침입했다고 하는 倭軍은 、행동반경으로 보아 가야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또 그간의 考古学的 発掘成果나 記録으로 보아도 왜군은 가야를 위한 군대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의 일본열도에 가야의 문물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백제의 문물이라고 보이는 것은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04年의 倭兵은、百済가 위기의식이 심해져 끌어들인 것이라고 해도 역시 가야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실상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倭賊’ 또는 ‘倭寇’는 가야-왜 연합군이었고, 그 내부에서 왜군은 가야군에 부속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