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글은 <일본서기>를 번역한 [다산을 찾아서]란 블로그의 <일본육국사>에서 옮겨 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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繼體天皇 男大迹天皇
安羅에 사신을 보냄
23년 3월(529년 음3월) 이 달 近江毛野臣을 安羅에 사신으로 보내어 명령을 내려 신라에게 南加羅와 㖨己呑을 다시 세우도록 권하게 하였다. 백제는 장군 *君尹貴와 麻那甲背·麻鹵등을 보내어 安羅에 가서 조칙을 받게 했다. 신라는 번국의 官家를 없앤 것이 두려워서 大人을 보내지 않고 夫智奈麻禮와 奚奈麻禮등을 보내어 安羅에 가서 조칙을 듣게 했다. 이에 安羅는 새로이 높은 堂을 세워서 勅使를 오르게 하고 國主는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국내의 大人으로서 堂에 올랐던 사람은 한둘 정도였다. 백제의 사신 장군 君 등은 堂 아래에 있었는데 몇 달간 여러 번 당 위에 오르고자 하였다. 장군 君 등은 뜰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君尹貴와 麻那甲背·麻鹵 : 이들 세 사람의 이름은 欽明天皇 2년 4월조와 4년 12월조에도 보인다. 麻那는 武烈天皇 6년 10월조에도 백제의 사신으로 온 기록이 보인다. 이들은 佐平級에 속하는 백제의 高位 官職者로서 聖王의 명령을 받아 安羅의 회의에 참석한 公式 使臣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新羅의 침략에 대한 任那의 구원 요청
23년 여름 4월(壬午 초하루 戊子 음4월 7일) 任那王 *己能末多干岐가 와서 조회하였다(己能末多란 대개 阿利斯等이다). 大伴大連金村에게 아뢰기를 “바다 밖의 여러 번국들은 胎中天皇이 內官家를 두었을 때부터 본토를 저버리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봉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臣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大伴大連이 요청한대로 아뢰었다.
*己能末多干岐 : 任那王으로 나오는 己能末多를 金官加羅王인 仇衡王으로 보는 설도 있으며 日本系의 加耶人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고, 또 昌原 일대의 卓淳國王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干岐는 小國의 王號로 생각된다.
新羅王과 百濟王을 소집하였으나 使臣을 보냄. 新羅가 4개 촌을 공략
23년 4월(529년 음4월) 이 달 사신을 보내어 己能末多干岐를 보냈다. 아울러 임나에 있는 近江毛野臣에게 명령하여 “아뢴 바를 알아보고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화해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毛野臣은 熊川(昌原의 熊川面)에 머물면서어떤 책에는 任那의 久斯牟羅(昌原 또는 마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불러 모았다. 신라왕 佐利遲(法興王 휘는 原宗)는 久遲布禮(居柒夫)를 보내었고어떤 책에는 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라 하였다 백제는 恩率 彌騰利(彌縢利)를 보내어 毛野臣이 있는 곳에 가서 모이게 하고 두 왕은 참석하러 오지 않았다.
毛野臣이 매우 화를 내며 두 나라 사신을 꾸짖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이다. 무엇 때문에 두 나라의 왕이 몸소 와서 천황의 명령을 받지 않고 가벼이 사신을 보내는가. 이제 비록 너희 왕이 스스로 와서 명령을 받겠다 하더라도 나는 칙을 선포하지 않고 반드시 쫓아가서 물리칠 것이다”라 하였다.
久遲布禮와 恩率 彌縢利가 마음속으로 두려워 각각 돌아가서 왕을 부른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그 上臣(대신) 利叱夫禮智干岐(將軍 異斯夫)로 바꾸어 보냈는데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毛野臣이 멀리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고 무리가 수천 명인 것을 보고, 熊川으로부터 任那의 己叱己利城(任那의 久斯牟羅와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伊叱夫禮智干岐는 多多羅原(부산의 多大浦)에 머물며 공경하여 돌아가지 않고 세 달을 기다리며 칙을 들으려고 자주 청했으나 끝내 선포하려고 하지 않았다.
伊叱夫禮智가 거느린 士卒들이 마을에서 걸식하고 있었는데 毛野臣의 從者 河內馬飼首御狩와 마주쳤다. 御狩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 숨어서 걸식하는 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주먹으로 쳤다. 걸식자가 보고 “삼가 세 달을 기다리며 勅旨를 듣고자 했으나 아직도 선포하려고 하지 않고 칙을 들으려는 사신을 괴롭히는 것은 곧 속여서 上臣을 죽이고자 함임을 알겠다”라 하였다.
이에 所見을 모두 上臣에게 아뢰었더니 上臣은 4개의 村(金官·背伐·安多·委陀가 4개 촌이다)*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多多羅 등의 4개 촌을 노략질하게 한 것은 毛野臣의 잘못이다”라 하였다.
*金官·背伐·安多·委陀가 ~ 4개 촌이라 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4개 村의 위치는 모두 洛東江口에 있는 지방으로 추정된다. 金官과 須那羅는 같은 곳으로 金海에, 安多와 多多羅는 多大浦에, 背伐과 費智는 熊川 부근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委陀와 和多는 같은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任那가 毛野臣의 횡포를 고함. 百濟와 新羅의 毛野臣 공격
24년 가을 9월(530년 음9월) 임나의 사신이 “毛野臣이 드디어 久斯牟羅에서 집을 짓고 2년을 머물며 다스리기를 게을리 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인과 임나인이 자식 때문에 자주 다투었으나 해결하기 어려웠고 처음부터 판결할 수도 없었습니다. 毛野臣은 즐겨 誓湯* 을 설치해 놓고 ‘진실된 사람은 문드러지지 않을 것이고 거짓된 사람은 반드시 문드러질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탕에 던져져 데어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吉備의 韓子( 那多利·斯布利大日本人이 蕃女를 취하여 낳은 자식을 韓子라 한다)를 죽이고 人民을 괴롭혔으며 끝내 화해시키지 못하였습니다”라 아뢰었다. 이에 천황이 그 행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불러 들였으나 오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河內母樹馬飼首御狩로 하여금 서울에 나아가 “臣은 王命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서울로 되돌아간다면 힘써 갔다가 헛되이 돌아가는 것이 되니 부끄러워 편안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國命을 이루고 조정에 들어가 謝罪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요”라 아뢰게 하였다.
使者를 보낸 후 다시 스스로 꾀하기를 “그 調吉士(조정의 使臣)는 또한 皇華의 使者이니 만약 나보다 먼저 돌아가서 사실대로 아뢰면 나의 罪過는 반드시 무겁게 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調吉士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伊斯枳牟羅城을 지키게 했다.
이에 阿利斯等은 (毛野臣이) 사소한 일만 일삼고 맡은 바 임무에 힘쓰지 않는 것을 알고 歸朝할 것을 자주 권했으나 오히려 돌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阿利斯等은 毛野臣의) 행적을 다 알아서 배반하려는 마음이 생겼으므로 久禮斯己母를 보내어 신라에 가서 請兵하고 奴須久利를 백제에 보내어 청병했다. 毛野臣이 百濟兵이 온다는 것을 듣고 背評에서 맞아 토벌했는데 부상하거나 죽은 자가 반이었다.
백제는 奴須久利를 붙잡아 형틀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놓고 신라와 함께 성을 에워쌌다. 阿利斯等을 책망하며 꾸짖기를 “毛野臣을 내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毛野臣은 城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으므로 사로잡을 수 없었다. 이에 두 나라는 편리한 곳을 찾아 한 달을 머물다가 성을 쌓고 돌아갔는데 久禮牟羅城이라 한다. 돌아올 때 길목의 騰利枳牟羅·布那牟羅·牟雌枳牟羅·阿夫羅·久知波多枳의 다섯 성* 을 쳐부수었다.
*다섯 城 : 騰利枳牟羅 등 5성을 함락시킨 주체에 관해서는 이 기사를 앞의 23년 3월조에 보이는 3城과 5城의 공략사건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 그 주체를 신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두 기사를 별개의 것으로 보고 여기서의 주체를 백제로 보는 설이 있다. 5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대구에서 昌寧에 걸치는 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창원 북부지역으로부터 靈山, 密陽 일대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阿夫羅는 경북 서남부의 玄風 방면, 久知波多枳는 達城郡 求智面 城山洞이 아닐까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毛野臣의 횡포를 고함
24년 겨울 10월(530년 음10월) 調吉士가 임나로부터 와서 “毛野臣은 사람됨이 거만하고 거칠며 다스리는 것을 익히지 않아 끝내 화해시키지 않고 加羅를 소란하게 했습니다. 거침이 없고 마음대로 하여 환난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라 아뢰었다. 그리하여 目頰子를 보내어 불러 들였다.
毛野臣을 소환. 毛野臣의 죽음
24년(530년) 이 해 毛野臣은 소환당하여 對馬에 이르렀는데 병에 걸려 죽었다. 장례를 치를 때 강을 따라 近江으로 들어 왔다. 그 처가 “枚方을 통하여 피리를 불며 오른다. 近江의 毛野의 젊은 남자가 피리를 불며 오른다”라고 노래하였다. 目頰子가 처음에 임나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노래를 바쳤는데 “韓國을 어떻게 말했길래 目頰子가 왔나, 옛날에 온 壹岐를 건너서 目頰子가 왔나”라 하였다.
繼體天皇의 葬禮[高麗의 安藏王과 天皇의 卒年]
25년 겨울 12월 丙申 초하루 庚子(531년 음12월 5일) (천황을) 藍野陵에 葬事지냈다. 그러나 여기에서 25년 辛亥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百濟本記』를 취하여 쓴 것이다. 거기에 “辛亥年 3월에 군대가 나아가서 安羅에 이르러 乞?城(함안 또는 진주부근)을 쌓았다. 이 달에 高麗는 그 왕 安을 죽였다* 또한 일본의 천황과 太子·皇子가 함께 죽었다고 들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말한다면 辛亥年은 25년에 해당한다. 뒤에 校勘하는 자는 알라.
*왕 安을 죽였다 : 『三國史記』에서는 安臧王(519~531)의 諱를 興安이라 하였으며 1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三國史記』에는 안장왕의 죽음에 대하여 단지 죽었다고만 하였고 『日本書紀』처럼 왕을 살해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安閑天皇 廣國押武金日天皇
百濟의 貢調와 上表
元年 5월(534년 음5월 1일) 백제가 下部의 修德(관등명칭) 嫡德孫과 上部의 都德 己州己婁 등을 보내어 常例의 調를 바치고 따로 表를 올렸다.
欽明天皇 天國排開廣庭天皇
天皇의 秦大津父에 대한 총애
(卽位前紀) 欽明天皇은 男大迹天皇(繼體天皇)의 嫡子이다. 어머니는 手白香皇后라고 하는데, 천황이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두었다. 천황이 어릴 때 꿈에 어떤 사람이, “천황이 *秦大津父라는 자를 총애하면, 커서 반드시 천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 사람을 보내어 널리 찾으니, 山背國 紀郡의 深草里에서 찾아냈다. 姓과 이름이 과연 꿈꾼 바와 같았다. 이에 매우 기뻐하며, 아직까지 없던 꿈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그대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고 물으니, (秦大津父는) “없었습니다. 다만 臣이 伊勢에 가서 장사하고 돌아오는데, 산에서 두 마리의 이리가 서로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에 마주쳤습니다. 곧 말에서 내려 입과 손을 씻고 기도하며, ‘너는 귀한 신인데 거친 행동을 즐기고 있다. 만일 사냥꾼을 만나면 잡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여, 억지로 싸움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피묻은 털을 씻어주고 놓아 보내 다같이 생명을 보전하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반드시 이것이 그 보답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까이에 두어 섬기게 하고 총애함을 날로 새롭게 하니, 크게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천황이 즉위하자 大藏省에 임명되었다.
秦大津父 : 秦氏는 應神朝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弓月君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중국계라고도 한다. 그들의 출자가 辰韓 즉 秦韓이었으므로 秦氏라 불렸던 것이다. 이 기사는 欽明天皇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百濟系의 도움을 받았음을 보여준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百濟人 己知部의 投化
원년 2월(540년 음2월) 百濟人 *己知部가 투화하였다. 倭國 添上郡 山村에 살게 하니, 오늘날 山村己知部의 선조이다.
*己知部 : 『新撰姓氏錄』 大和諸蕃에 己智 및 그 同族인 三林公·長岡忌寸·山村忌寸·棲田連의 이름이 보인다. 己智는 秦의 太子 胡亥의 후예라고도 한다.
高句麗, 百濟, 新羅, 任那가 사신을 보냄
원년 8월(540년 음8월) 高句麗·百濟·新羅·任那가 함께 사신을 보내고, 아울러 공물을 바쳤다. 秦人, 漢人 등 여러나라에서 투화하여 온 사람을 불러모아, 國郡에 안치하고 호적을 편성하였다. 秦人의 戶數가 총 7,053戶였다. 大藏掾(秦大津父로 추정)을 秦伴造로 삼았다.
新羅征伐 모의
원년 9월 乙亥 초하루 己卯 (540년 음9월 5일)
難波祝津宮에 행차하였다. 大伴大連金村·許勢臣稻持·物部大連尾輿 등이 따라갔다. 천황이 여러 신하에게,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新羅를 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物部大連尾輿 등이, “적은 군사로는 쉽게 칠 수 없습니다. 지난 번 男大迹天皇(繼體天皇) 6년에 百濟가 사신을 보내 表를 올려 任那의 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의 네 縣을 청하였는데, 大伴大連金村이 表에서 청하는 대로 구하는 곳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의 원망이 여러 해 동안 쌓여 갔으니 가볍게 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때 大伴大連金村은 住吉의 집에 있으면서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 나아오지 않았다. 천황은 靑海夫人 句子를 보내 은근하게 위문하였다. 大連은 두려워하여 사죄하면서, “臣이 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 여러 臣 등은 臣이 任那를 멸망시켰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두려워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장식한 말을 사신에게 주어 후하게 접대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靑海夫人이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명령을 내려, “오랫동안 충성을 다하였으니, 여러 사람의 말을 근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드디어 허물삼지 않고 총애함이 더욱 깊었다.
百濟 등의 任那 재건의 계책 모의
2년 여름 4월(541년 음4월) 安羅(咸安지역에 있던 加耶)의 次旱岐 夷呑奚·大不孫·久取柔利 등과 加羅(고령의 대가야)의 上首位 古殿奚, 卒麻(경북 금릉군 조마면)의 旱岐, 散半奚(초계 )의 旱岐의 아들, 多羅(협천)의 下旱岐 夷他, 斯二岐(의령)의 旱岐의 아들, 子他(거창)의 旱岐 등이 任那의 日本府의 吉備臣과 더불어 百濟에 가서 함께 詔勅을 들었다.
百濟의 聖明王(성왕)이 任那의 旱岐들에게, “日本의 천황이 명령한 바는 오로지 任那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任那를 다시 일으키겠는가. 어찌 각기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마음을 받들어 펼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任那의 旱岐 등이, “전에 두세 번 新羅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도모하려는 뜻을 다시 新羅에 이른다 하여도 여전히 대답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게 아뢰어야 합니다. 任那를 재건하는 일은 대왕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공경하게 (왕의) 敎旨를 받드려 하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任那의 경계는 新羅와 접해 있어서 卓淳(거제 또는 대구)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였다
(卓淳) 등이라 함은 㖨己呑(경산 또는 밀양) 加羅를 말한다. 卓淳 등의 나라와 같은 패망의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聖明王은, “옛적에 우리 선조 速古王, 貴首王의 때에, 安羅·加羅·卓淳의 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서로 통교하여 친교를 두터이 맺어* 子弟의 나라로 여기고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新羅에게 속임을 당하여 천황을 노엽게 하고 任那를 한에 사무치게 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下部 中佐平 麻鹵, 城方 甲背昧奴 등을 보내어 加羅에 나아가 任那의 日本府에 모여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음을 두고 任那를 재건하려고 하는 일을 아침 저녁으로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천황이 명령을 내려, ‘속히 任那를 재건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과 함께 계책을 모의하여 任那 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잘 생각하여야 한다. 또 任那의 경계에서 新羅를 불러, (조를) 받들 것인가의 여부를 물어야겠다.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 아뢰고 삼가 교시를 받들자.
만일 사자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新羅가 틈을 엿보아 任那를 침략해 오면 나는 마땅히 가서 구원할 것이니 근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잘 방비하고 삼가 경계하기를 잊지 말라. 또한 그대들은 말하기를, 卓淳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新羅가 혼자 강하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㖨己呑은 加羅와 新羅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任那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卓淳은 위아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지녔는데, 군주가 혼자 항복하려고 新羅에 내응하여,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살펴보니 三國의 패망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옛적에 新羅가 高麗에 구원을 청하여 任那와 百濟를 쳤으나*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는데, 新羅가 어찌 혼자서 任那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任那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옛 적에 ~ 친교를 두터이 맺어 : 近肖古王과 近仇首王 두 왕대에 諸旱岐가 百濟와 우호를 맺었던 것은, 神功皇后 46년조에 보이는 卓淳王과 百濟와의 교섭(실제 연대는 364년) 및 동 62년조의 百濟記에 보이는 加羅國王 一族의 百濟로의 도망 등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옛적에 ~ 百濟를 쳤으나 : 「高句麗廣開土王陵碑」『朝鮮金石總覽』上, p.4에 永樂 9년(399) 新羅가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 것이 보이는데, 이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百濟가 安羅와 新羅의 공모를 힐난
2년 가을 7월(541년 음7월) 百濟는 安羅의 日本府가 新羅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前部 奈率 鼻利莫古, 奈率 宣文, 中部 奈率 木刕眯淳, 紀臣 奈率 彌麻沙 등을 보내(紀臣 奈率이라는 사람은 아마도 紀臣이 韓의 여자를 얻어 낳은 자로, 百濟에 머물러 奈率이 된 사람일 것이다. 아버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모두 이와 비슷하다) 安羅에 가서 新羅에 온 任那의 執事를 불러 任那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安羅 日本府의 河內直이 新羅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百濟本記』에는 ‘加不至費直·阿賢移那斯·佐魯麻都 等’이라고 하였으나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왕은 任那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速古王, 貴首王이 옛날의 旱岐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우리는 그대를 子弟로 여기고, 그대는 우리를 父兄으로 생각하며, 함께 천황을 섬기고 함께 강적에게 항거하며,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왕실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선조가 엣날에 旱岐와 화친할 때의 말을 생각하면 해와 같이 밝음이 있다. 그 후 이웃과 삼가 우호를 닦아서 드디어 다른 나라와 (관계가) 돈독하게 되었으니, 은혜가 골육보다 더하였다. 처음을 잘 하고 끝도 좋아야 한다는 것은 과인이 항상 원하는 바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가벼이 헛된 말들을 하고 몇 해 사이에 한탄스럽게 뜻을 잃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옛날 사람들이 ‘후회막급이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이로구나.
위로 하늘에 다다르고 아래로 지하에 이르기까지 이제 神에게 맹세컨대, 옛날의 허물을 고치겠으며, 하나도 숨김 없이 행할 바를 밝히겠다. 정성이 신령에 통하고 깊이 자기를 책하는 것은 역시 취할 만한 바가 있다. 듣건대 先代의 뒤를 계승한 자는 조상이 남긴 궤범을 이어받고, 선조의 업을 번성하게 하여 공훈을 이루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 先世의 화친한 우호를 받들고 삼가 천황이 명령한 말에 따라, 新羅에게 빼앗긴 나라인 南加羅와 㖨己呑 등을 취하여 본래대로 돌이켜 任那에 옮기고, 길이 父兄의 나라가 되어 항상 日本을 섬기려 한다.
이는 과인이 먹어도 맛이 없고 자도 자리가 편안치 못한 바이다. 지난 일을 뉘우쳐 오늘날을 경계하는 것이 힘써 생각할 바이다. 新羅가 감언으로 속이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그대들은 망령되이 믿었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빠졌었다. 바야흐로 지금 任那의 경계는 新羅와 접하고 있으니, 항상 방비를 하여야 한다. 어찌 경계를 게을리할 것인가.
속이는 함정에 빠져 국가를 망하게 하며, 남에게 사로잡히게 될까 두려우니, 과인이 이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어 편안히 지낼 수 없다. 저으기 들으니 任那와 新羅가 계책을 꾸미는 자리에 벌과 뱀이 괴이함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그것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대개 괴이한 조짐은 행동을 경계하는 것이며, 재난과 이변은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다. 곧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이고 조상이 징조를 보이는 것이니, 화가 이르른 다음에 후회하고, 멸망한 후에 부흥하기를 생각하여도 누가 미칠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가 나를 따라 천황의 명령을 들으면 任那를 일으킬 수 있으니,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만약 본래의 땅을 길이 보존하고 원래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고 싶다면, 그 계략이 여기에 있으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聖明王이 다시 任那의 日本府에, “天皇이 명령하여, ‘任那가 멸망하면 너희는 의지할 데가 없어질 것이고, 任那가 일어나면 너희는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마땅히 任那를 일으켜 세워 옛날과 같게 하여, 너희의 도움으로 삼고,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삼가 조칙을 받들고 나니 송구스러운 마음이 가슴에 가득차서,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任那를 융성시킬 것을 기약하였다. 영원히 천황을 섬기기를 지난날과 같이 할 것이며, 먼저 앞의 일을 생각한 후에 편안히 쉴 것이다. 이제 日本府가 (천황의) 조에 따라 任那를 구하면, 이는 천황이 반드시 칭송하는 바가 될 것이며, 그대 자신도 당연히 포상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日本府의 卿 등은 오랫동안 任那國에 머물러 있고, 新羅의 경계와 가까이 접하고 있어서, 新羅의 정세를 역시 알 것이다. (新羅가) 任那를 해치고 日本을 막으려고 모의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단지 올해만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가까이는 百濟를 경계하고, 멀리는 천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新羅는) 거짓으로 조정(日本)을 섬기고 거짓으로 任那와 화해했다. 이와 같이 (新羅가) 任那의 日本府를 기쁘게 한 것은 아직 任那를 빼앗지 못했으므로 거짓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제 그 틈을 염탐하고 그 방비하지 못함을 엿보아, 한 번 군사를 일으켜 (任那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천황이 조를 내려 南加羅, 㖨己呑을 세우라고 권한 것은 단지 수십 년 동안만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新羅가 한결같이 명을 듣지 않는 것은 卿들도 아는 바이다. 천황의 조칙을 삼가 믿고 任那를 세우려고 하는 데 어찌 이와 같은가. 卿 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任那國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卿들은 그것을 경계하고 남에게 속지 말라”라고 말하였다.
百濟가 下韓과 任那의 일로 사신을 보냄
2년 가을 7월(541년 음7월) 百濟가 紀臣 奈率 彌麻沙, 中部 奈率 己連을 보내어 *下韓과 任那의 정사를 아뢰고, 아울러 表를 올렸다.
*下韓 : 下韓‘南韓’이라고도 표시되어 있다. 下韓은 南加羅와 같은 뜻이지만, 南加羅는 이미 新羅에 병합되었으므로 南加羅는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下韓은 특히 加耶의 남부, 즉 南加羅에 진출한 新羅의 前面에 있었던 지역이 아닐까 한다. 위치비정에 대한 견해는 섬진강 유역의 전남 내지 경남 서남지역으로 보는 설(鮎貝房之進)과, 낙동강 유역의 新羅·安羅 사이의 국경분쟁지역으로 보는 설(山尾幸久)이 있다.
百濟 사신의 歸國
4년 여름 4월(543년 음4월) 百濟의 紀臣 奈率 彌麻沙 등이 물러갔다.
百濟가 사신을 보냄
4년 가을 9월(543년 음9월) 百濟 聖明王이 前部 奈率 眞牟貴文, 護德 己州己婁와 物部 施德 麻奇牟 등을 보내어, 扶南(인도차이나 남부 메콩강 하류에 있던 나라)의 재물과 奴 2口를 바쳤다.
百濟에 사신을 보내 郡令·城主의 귀속 요청과 任那 재건을 촉구
4년 겨울 11월 丁亥 초하루 甲午 (543년 음11월 8일) 津守連을 보내어 百濟에 명령하기를, “任那의 下韓에 있는 百濟의 郡令과 城主는 日本府에 귀속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詔書를 가지고 가서 선포하여, “그대가 여러 번 表를 올려 꼭 任那를 세우겠다고 말한 것이 10여 년이 되었다. 表에서 아뢴 바는 이와 같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대저 任那는 그대 나라의 棟梁이다. 만일 동량이 부러지면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짐의 걱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는 모름지기 빨리 세우도록 하라. 그대가 만약 빨리 任那를 세운다면, 河內直등은 자연히 물러나게 될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 날 聖明王이 칙을 듣기를 마치고 三佐平과 內頭 및 여러 신하에게, “조칙이 이와 같으니, 또한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하고 두루 물었다. 三佐平이, “下韓에 있는 우리 郡令과 城主 등은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일은 빨리 칙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任那 재건을 위한 百濟의 群臣會議
4년 12월(543년 음12월) 百濟의 聖明王이 다시 앞서의 詔書를 群臣들에게 널리 보이며, “천황의 조칙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上佐平 沙宅己婁, 中佐平 木刕麻那, 下佐平 木尹貴, 德率 鼻利莫古, 德率 東城道天, 德率 木刕眯淳, 德率 國雖多, 奈率 燕比善那 등이 함께 의논하여,
“臣들은 품성이 아둔하고 도무지 지략이 없습니다. 그러나 任那를 세우라고 명령하셨으니, 빨리 칙언을 받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任那의 執事와 각국의 旱岐들을 소집하여 함께 계책을 모의하고 表를 올려 뜻을 말하십시오. 또 河內直·移那斯·麻都 등이 여전히 安羅에 있게 되면 아마도 任那는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表를 올려 本處로 옮겨달라고 구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聖明王이, “群臣이 의논한 바가 심히 과인의 마음에 맞는다”고 말하였다.
百濟의 執事 소집
4년 12월(543년 음12월) 이 달 (百濟가) 施德 高分을 보내어 任那의 執事와 日本府의 執事를 불렀다. 모두, “정월 초하루를 지내고 가서 듣겠다”라고 대답하였다.
百濟의 執事 소집
5년 봄 정월(544년 음1월) 百濟國이 사신을 보내어 任那의 執事와 日本府의 執事를 불렀다. 모두, “신에게 제사지낼 때가 이르렀으니 제사를 마치면 가겠다”라고 대답하였다.
百濟의 執事 소집
5년 정월(544년 음1월) 이 달 百濟가 또 사신을 보내어 任那의 執事와 日本府의 執事를 불렀다. 日本府와 任那가 모두 執事를 보내지 않고 지위가 낮은 사람을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가 任那國을 세울 것을 함께 모의하지 못하였다.
任那 재건을 위한 執事소집에 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 百濟가 문책함
5년 2월(544년 음2월) 百濟가 施德 馬武, 施德 高分屋, 施德 斯那奴次酒 등을 任那에 사신으로 보내어 日本府와 任那의 旱岐 등에게, “나는 紀臣 奈率 彌麻沙, 奈率 己連, 物部連 奈率 用奇多를 보내어 천황에게 조회하고 알현하였는데, 彌麻沙 등이 日本에서 돌아와 조서를 선포하여, ‘그대들은 거기에 있는 日本府와 함께 빨리 좋은 계획을 세워 짐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라. 그대들은 경계하여 다른 사람의 속임에 빠지지 말라’고 하였다.
또 津守連(津守連己麻奴跪)이 日本에서 와서 조칙을 전하고 任那의 정사를 물었다. 그러므로 日本府와 任那의 執事와 함께 任那의 정사를 의논하여 천황에게 아뢰려고, 사자를 보내어 부른 것이 세 번이나 되는데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任那의 정사를 도모할 계획을 함께 의논하여 천황에게 아뢰지 못하고 있다. 이제 津守連을 머무르도록 청하고, 따로 빠른 사자로써 상황을 갖추어 천황에게 아뢰고자 한다.
3월 10일에 日本에 사자를 보내겠다. 이 사자가 도달하면 천황은 반드시 그대들을 문책할 것이다. 그대 日本府의 卿과 任那의 旱岐들은 각기 사자를 보내어 내가 보내는 사자와 함께 천황이 베푸는 조서를 들으라”라고 말하였다.
따로 河內直에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대의 악행만을 들어왔다. 그대의 선조들도(『百濟本記』에는, ‘그대의 선조 那干陀甲背, 加獵直岐甲背’라고 하였다) 모두 간악함을 품고 거짓되이 말하였다. 爲哥可君이 그 말만을 믿어 국난을 걱정하지 않으며, 내 뜻을 어기고 포악한 일을 마음대로 자행하다가, 이 때문에 쫓겨났으니 오로지 그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대들은 任那에 와서 살면서 항상 나쁜 짓을 행하였다. 任那가 나날이 해를 입는 것은 오로지 그대들 때문이다. 그대는 비록 하찮다고 할지 모르나, 비유컨대 작은 불이 산야를 태우고 마을로 번지는 것과 같다. 그대들이 악행을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任那는 패망할 것이고, 마침내는 바다 서쪽 여러 나라의 관가로 하여금 길이 천황의 곁에서 섬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게 아뢰어 그대들을 옮겨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도록 청하겠다. 그대 또한 가서 들으라”라고 말하였다.
또 日本府의 卿과 任那의 旱岐 등에게, “任那國을 세우는 일은 천황의 위엄을 빌리지 않고서는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천황에게 가서 군사를 청하여 任那國을 도우려 한다. 병사들의 양식은 내가 운반해야 하겠으나, 군사의 수를 아직 모르고 군량을 운반할 곳도 역시 혼자 결정하기 어렵다. 한 군데에 모여서 같이 可否를 의논하고, 그 좋은 것을 택하여 천황에게 아뢰기를 원하나, 여러 번 불러도 그대들이 오지 않아 의논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日本府가 답하여, “任那의 執事가 부름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보내지 않았던 까닭으로 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황에게 아뢰기 위하여 보낸 사신이 돌아와서, ‘짐이 印奇臣을 新羅에 보내고, 津守連을 백제에 보내겠다. 그대는 칙을 들을 때를 기다리고, 혼자 수고로이 新羅·百濟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합니다.
칙이 이와 같았는데 마침 印奇臣이 新羅에 사신으로 간다는 것을 듣고, 쫓아 보내어 천황이 말씀하신 바를 물었습니다. 조에는 ‘日本府의 臣과 任那의 執事는 新羅에 가서 천황의 칙언을 들으라’하였고, 百濟에 가서 명을 들으라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후에 津守連이 이 곳을 지날 때, ‘지금 내가 百濟에 파견되는 것은 下韓에 있는 百濟의 郡令·城主를 내보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직 이 말만을 들었고, 任那와 日本府가 百濟에 모여서 천황의 칙언을 들으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않았으니 任那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에 任那의 旱岐들이, “사신이 와서 부르므로 곧 가려고 하였으나 日本府의 卿이 떠나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못했습니다. 대왕은 任那를 세우려고 자세한 것까지도 지시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기뻐함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百濟가 사신을 보내 任那 재건에 대한 그간 사정을 보고함
5년 3월(544년 음3월)
3월 백제에서 奈率 阿乇得文·許勢의 奈率 奇麻·物部의 奈率 奇非 등을 보내어 表를 올려 말하였다. “奈率 彌麻沙·奈率 己連 등이 臣의 나라에 이르러 詔書를 받들어 ‘너희들은 저 日本府와 함께 좋은 계책을 꾀하여 빨리 *任那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니, 너희는 경계하여 저들(신라)에게 속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 津守連 등이 신의 나라에 이르러 勅書를 받들어 任那를 세우는 일을 물었습니다. 삼가 勅에 따라 감히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 함께 도모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어『百濟本記』에는 烏胡跛臣을 보내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的臣인 듯하다 日本府와 任那를 불렀으나 모두 대답하기를 ‘새해가 이미 왔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므로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부르니 모두 대답하기를 ‘이미 제사지낼 때가 되었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나,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불렀는데, 미천한 자를 보낸 까닭으로 함께 도모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任那가 부름에 나아오지 않은 것은 본심이 아니라, 阿賢移那斯·佐魯麻都가 간교하게 속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무릇 任那는 *安羅를 兄으로 삼아 오직 그 뜻을 좇고, 安羅人들은 日本府를 하늘로 삼아 오직 그 뜻을 따르므로『百濟本記』에는 安羅를 아버지로 삼고 日本府로써 근본을 삼았다고 하였다, 이제 的臣·吉備臣·河內直 등은 모두 移那斯·麻都의 지휘를 좇았을 따름입니다.
移那斯·麻都는 비록 小家의 미천한 자이나 日本府의 정치를 오로지 제멋대로 하며 또 任那를 제압하여 (길을) 막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함께 꾀하여 天皇에게 답변을 아뢸 수 없었으므로, 己麻奴跪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특별히 나는 새와 같이 빠른 사신을 보내어 天皇에게 받들어 아뢰기를,
‘만일 두 사람이 安羅에 있어 간특하고 아첨하는 일을 많이 행하면 任那도 세우기 힘들 것이며, 바다 서쪽의 여러 나라도 반드시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두 사람을 옮겨 그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日本府와 任那에게 칙을 내려 任那 건설을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신이 奈率 彌麻沙·奈率 己連 등을 己麻奴跪에게 딸려 보내어 표를 올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조를 내려, ‘的臣 等(吉備弟君臣·河內直 등을 말함)이 신라를 왕래한 것은 짐의 뜻이 아니다. 옛날 印支彌와 阿鹵旱岐가 있을 때 신라의 핍박을 받아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못하였는데, 백제는 길이 멀어 그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다.
的臣 등이 신라를 왕래함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고 짐은 일찍이 들었다. 만일 이미 任那를 세웠다면 移那斯·麻都는 자연히 물러났을 것이니 어찌 족히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이 조를 듣고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며, 신라가 천조를 속이고 칙명을 따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신라는 봄에 *卓淳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久禮山 수비병을 내쫒고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安羅에 가까운 곳은 안라가 논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고, 久禮山에 가까운 곳은 *斯羅가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는데, 각각 경작하여 서로 침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移那斯·麻都가 남의 경계를 넘어 경작하다가 6월에 도망하였습니다.
印支彌의 뒤에 온 許勢臣의 때에는『百濟本記』에는 “우리가 印支彌를 머무르게 한 뒤에 온 旣灑臣의 때” 신라가 다시 남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安羅는 신라의 핍박을 받아 농사짓지 못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신이 일찍이 듣건대 신라는 매년 봄과 가을에 군사와 무기를 많이 모아놓고 安羅와 *荷山을 습격하고자 한다 하며, 또는 加羅를 습격하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서신을 받고서 바로 군대를 보내어 任那를 굳게 지키는 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자주 날랜 군사를 보내어 필요할 때마다 가서 구하였습니다. 이로써 任那가 때에 따라 농사를 짓고 신라가 감히 침범하여 핍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길이 멀어 능히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는데, 的臣 등이 신라를 왕래하면서부터 바야흐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뢰었으니, 이는 위로는 천조를 속이는 것으로서 매우 간특한 일입니다. 사실의 명확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천조를 속이니 그 밖에도 거짓됨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的臣 등이 여전히 安羅에 거주하고 있다면 임나의 나라를 건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마땅히 일찍 물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매우 두려워 하는 것은 佐魯麻都가 비록 韓 출신으로서 지위가 大連에 이르러 일본 執事의 사이에 섞여 명예롭고 권세있는 자리에 들어섰지만, 이제는 오히려 신라 奈麻禮의 冠을 썼으니 곧 몸과 마음으로 귀부하여 다른 사람에게 쉽게 드러나는 바입니다. 행한 바를 자세히 보면 도무지 두려워 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악행을 아뢰고 모두 글을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아직도 다른 나라의 관복을 입고 날마다 신라의 땅에 나아가 公·私의 일로 來往하면서 도대체가 꺼려하지 않습니다.
무릇 㖨國의 멸망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㖨國의 函跛旱岐가 加羅國(金官加耶)에 두 마음을 품어 신라에 내응하고 加羅는 밖에서 싸움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망한 것입니다*
만일 函跛旱岐로 하여금 내응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㖨國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반드시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卓淳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만일 卓淳國의 왕이 신라에 내응하여 적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여러 나라가 패망하게 된 화근을 살펴 보면 모두 안에서 응하여 두 마음을 품은 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제 麻都 등이 신라에 마음을 두어 드디어는 그 나라의 옷을 입고 아침 저녁으로 내왕하면서 속으로 간악한 마음을 굳혀왔습니다. 이에 任那가 이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까 두렵습니다.
任那가 만일 멸망한다면 신의 나라가 고립되어 위태할 것이니, 朝謁하고자 생각하나 어찌 다시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천황께서는 깊이 살피시고 멀리 헤아리시어, 속히 본래 있었던 곳으로 옮기셔서 任那를 안정시키십시오.”
*任那 :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보이는 弁辰 24국 가운데 하나인 彌烏耶馬國(彌馬耶烏國) 곧 彌麻那의 略稱이다. 이는 낙동강 중류지역인 고령 일대의 大加耶(上加羅)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가야제국을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곧 「廣開土王碑」의 “追至任那加羅”, 『三國史記』 强首傳의 “臣本任那加良人”, 「鳳林寺眞鏡大師碑」의 “其先任那王族” 등에 보이는 ‘任那’는 모두 加羅를 가리키는 말로서, 특히 「광개토왕비」와 강수전의 경우는 마치 五加耶, 六加耶처럼 가야제국을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라 하겠다. 일본의 경우도 『日本書紀』 欽明天皇 23년 춘 정월조의 註記에 “總言任那 別言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이라 하여 임나를 가야제국의 총칭으로 일컬었지만, 加羅와 任那를 서로 혼동하여 사용한 예가 많다(李丙燾, 「洛東江流域의 地理와 上·下加羅」,『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p. 304).
*阿賢移那斯·佐魯麻都 : 同王 2년 7월조 세주의 『百濟本記』 기사에 보인다. 이들은 日本府의 親新羅派로서 지위는 낮았지만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移那斯는 同王 10년 6월·11년 4월조에는 延那斯로 나온다.
*安羅 : 6가야 중의 한 나라로 『三國遺事』 권1, 五伽耶條의 ‘阿羅’에 해당한다. 이는 지금의 경상남도 咸安 지방으로 비정된다.
*卓淳 : 가야의 한 나라로 지금의 대구지방에 비정된다. 同王 2년 여름 4월조에서는 卓淳이라고 하였다.
*斯羅 : 新羅의 別稱이다. 『三國史記』 권 4, 지증마립간 4년조에 신라의 국호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라고 하여 이 이름이 보인다. 또 같은 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迎日冷水里新羅碑」에도 “斯羅 綠 斯夫智王 乃智王 此二王敎 ……”라고 하여 이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6세기 초엽 중국인의 對新羅觀을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526~539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梁의 「職貢圖」에도 “百濟 …… 旁小國 叛波·卓·多羅·前羅·斯羅 …… 等附之”라고 보인다.
*荷山 : 경북 高靈郡 斗谷面 荷山에 비정된다.
*신라는 ~ 들었습니다 : 매년 봄과 가을에 실시하는 신라의 閱兵 행사에 대한 백제의 의구심을 나타낸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閱兵은 군사훈련과 군사통수권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베풀어졌지만 유사시에는 바로 군사작전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金瑛河,「百濟 新羅王의 軍事訓練과 統帥」, 『泰東古典硏究』 6, 1990). 신라의 경우 탈해이사금 때 居道가 변경의 官長이 되어 매년 한 번씩 馬匹을 모아 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들판에 모아 놓고 즐겨 놀게 하다가 于尸山國과 居柒山國을 불의에 쳐들어가 멸망시킨 일이 있으며(『三國史記』 권 44, 居道傳), 지증왕 때에 異斯夫가 居道의 權謀를 이어 받아 ‘馬遊’로써 加耶를 속여 취한 사례가 있다(『三國史記』 권 44, 異斯夫傳). 이에 대해 상고사회 전쟁과 유희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基東, 「新羅上古의 戰爭과 遊戱」, 『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4).
*加羅國 : 낙동강 하류지역에 있었던 本加耶 곧 金官加耶로 지금의 金海 지방에 위치하였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傳의 弁辰 24國 가운데 狗邪國에 해당하는데, 3세기 무렵에 首露가 금관가야의 首長이 되어 6가야 연맹체를 결성함으로써 대가야를 대신하여 가야제국의 연맹장이 되었으며, 이로써 加羅가 가야를 총괄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 『韓國古代史硏究』).
*加羅는 ~ 망한 것입니다 : 加羅國 곧 金官加耶의 멸망을 『三國史記』에서는 “法興王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與妃及三子 …… 以國帑寶物來降”이라 하여 법흥왕 19년(532)으로 보았다.
百濟 사신의 歸國
5년 겨울 10월(544년 음10월)
겨울 10월 백제의 사신 奈率 得文·奈率 奇麻 등이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였다『百濟本記』에는 “겨울 10월 奈率 得文·奈率 奇麻 등이 日本으로부터 돌아와 ‘河內直·移那斯·麻都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이에 대한 칙은 없었다’고 말하였다”라 하였다.
百濟 聖明王의 任那·新羅에 대한 세 가지 계책
5년 11월(544년 음11월)
11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日本府 臣과 任那 執事를 불러, “천황에게 조알하기 위하여 보낸 奈率 得文·許勢의 奈率 奇麻·物部의 奈率 奇非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제 日本府 臣과 任那國 執事는 마땅히 와서 勅을 듣고 함께 任那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日本의 吉備臣, 安羅의 下旱岐 大不孫과 久取柔利, 加羅의 上首位 古殿奚, 卒麻君, 斯二岐君, 散半奚君의 아이, 多羅(陜川 지방)의 二首位 訖乾智, *子他旱岐, *久嗟旱岐가 이에 백제에 나아갔다.
이 때 백제왕 聖明(聖王)이 대략 詔書를 보이며, “내가 奈率 彌麻佐·奈率 己連·奈率 用奇多 등을 보내어 일본에 조공하였는데, (천황이) 조를 내려 ‘조속히 任那를 건설하라’고 하였다. 또 津守連이 칙을 받들어 任那를 만드는 일을 물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대들을) 불렀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 任那를 세울 수 있겠는가. 각각 자신의 계책을 말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吉備臣·任那旱岐 등이 “무릇 任那國을 세우는 일은 오직 대왕에게 달려 있습니다. 왕을 따르고자 하니 모두 갖추어 아뢰어 (천황의) 勅을 듣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聖明王이 이들에게 일러, “任那라는 나라는 우리 백제와 예로부터 子弟가 되기를 약속하였다. 이제 日本府 印岐彌(任那에 있던 日本 신하)가 이미 신라를 토벌하고 다시 장차 우리(백제)를 치려고 하며, 또 신라의 허망한 거짓말을 즐겨 듣는다. 무릇 印支彌를 任那에 보낸 것은 본래 그 나라를 침탈하여 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라는 무도하며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거스려 卓淳을 멸망시켰다. 충직한 나라를 속히 회복코자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후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어 (日本府의 臣과 任那의 執事를) 오게 하여 함께 恩詔를 받들어, 任那의 나라를 일으켜 맥을 잇고 옛날처럼 길이 형제가 되기를 바랬다.
가만히 듣건대 新羅·安羅 두 나라 사이에는 큰 강(낙동강)이 있어 적을 방비하기 좋은 곳이라 한다. 내가 이를 차지하여 6성을 수축하려고, 삼가 천황에게 3천 병사를 청하여 매성마다 5백 명씩 배치하고 아울러 우리 병사들이 (신라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걱정스러운 것은 久禮山의 5城이 거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는 점이다.
卓淳의 나라 또한 다시 부흥시켜야 할 것이니, 청한 병사는 내가 옷과 식량을 지급할 것이다. 이를 천황에게 주청하고자 하는 계책이 첫째이다.
오히려 南韓(下韓)에 郡令과 城主를 두는 것이 어찌 천황을 거스려 貢調의 길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바라는 바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강적(고구려)을 물리치는 것이니, 무릇 그 흉칙한 무리들이 누구인들 부용하려고 꾀하지 않겠는가.
북쪽의 적(고구려)은 강대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니, 만일 南韓에 郡令·城主를 설치하여 방호시설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 강적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신라를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 핍박하여 임나를 위로하고 휼문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해 조빙할 수 없을까 두렵다. 이를 천황에게 주청하고자 하니 그 책략의 둘째이다.
또 吉備臣·河內直·移那斯·麻都가 오히려 任那國에 있기 때문에, 천황이 비록 조를 내려 任那를 세우라 하였으나 이를 시행할 수 없었다. 이 4명을 옮겨 각각 그 本邑에 돌려보낼 것을 천황에게 아뢰어 청하는 것이 그 계책의 셋째이다.
마땅히 日本 臣·任那 旱岐 등과 더불어 모두 받들어 사신을 보내어 함께 천황에게 아뢰고 恩詔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吉備臣과 旱岐 등이, “大王이 말한 세 가지 책략은 또한 우리의 뜻과 같을 뿐입니다. 이제 돌아가 日本 大臣任那에 있는 日本府의 大臣을 일컫는다, 安羅王·加羅王에게 공경히 아뢰고 모두 사신을 보내어 함께 천황에게 주청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진실로 천 년에 한 번 올 정도의 기회로,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계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子他 : 지금의 경남 晋州 혹은 거창으로 비정된다. 특히 경남 거창읍 東部洞과 거창군 南上面과 南下里 등지에 6세기 초, 중엽 경의 고분유적이 산재해 있는 점에 주목하여 이 곳을 子他國의 유력한 후보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金泰植, 『伽倻諸國聯盟의 形成과 變遷』,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2, pp.134~136 및 171).
*久嗟 : 同王 23년 春正月條의 古嵯國과 같은 이름으로, 지금의 경남 고성으로 비정된다.
6년 봄 3월(545년 음3월)
百濟에 사신을 보냄
6년(545) 봄 3월 膳臣(膳部의 長) 巴提便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6년 여름 5월(545년 음5월)
百濟가 사신을 보냄
여름 5월 백제가 奈率 其?·奈率 用奇多·施德 次酒 등을 보내어 표를 올렸다.
6년 가을 9월(545년 음9월)
百濟가 任那에 사신을 보냄
가을 9월 백제가 中部 護德 菩堤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吳나라의 財貨를 日本府의 臣과 여러 旱岐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6년 가을 9월(545년 음9월)
百濟의 丈六佛像 주조
이 달에 백제가 丈六佛像을 만들어 願文을 지었는데, “대개 듣건대 丈六佛을 만들면 功德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이제 공경히 (이를) 만드니 이 공덕으로 천황께서 매우 훌륭한 德을 얻으시고 천황께서 다스리시는 *彌移居國이 모두 福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늘 아래 모든 중생들이 모두 해탈하기를 원하여, 이를 만듭니다”라고 하였다.
*彌移居國 : 屯倉 또는 官家 곧 ‘미야케(みやけ)’의 音寫이다. ‘미야케’란 大化 前代에 있어서 朝廷 직할의 농업경영지를 일컫는데, 여기에서는 가야의 땅을 가리킨다.
6년 겨울 11월(545년 음11월)
百濟에 보냈던 사신의 歸國
겨울 11월 膳臣 巴提便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신이 사신으로 파견되자 처자도 뒤따라 백제의 바닷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해가 저물었으므로 머물러 숙박하였는데, 아이가 홀연히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큰 눈이 내려 새벽녘에서야 비로소 찾아 나서니 호랑이 발자국이 연이어져 있었습니다. 신이 이에 칼을 차고 갑옷을 입고 찾아 나서 바위 동굴에 이르렀는데, 칼을 빼어 ‘삼가 왕의 명을 받들어 뭍과 바닷길에 수고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니느라 어려웠으며, 풀섶을 깔고 가시와 함께 잤던 것은 자식을 사랑하여 아비의 업을 잇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오직 네가 위맹한 신일지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한 가지일 것이다. 어젯 밤에 아이가 없어져서 뒤쫓아 찾아 나서 이에 이르렀다.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아니하므로 원수를 갚고자 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 호랑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입을 벌려 물려고 하니, 巴提便이 갑자기 왼손을 빼어 그 호랑이의 혀를 잡고 오른손으로 찔러 죽이고 가죽을 벗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6년(545년)
高麗의 內紛[麤群과 細群의 대립, 安原王의 죽음]
이 해 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百濟本記』에는 “12월 갑오에 高麗國 細群과 麤群이 宮門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細群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細群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에 狛國의 香岡上王(國岡上王은 故國原王을, 香岡上王은 陽香 곧 陽原王을 가리킨다)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7년 봄 정월(546년 음1월 3일)
百濟 사신의 歸國
7년(546) 봄 정월 甲辰 초하루 丙午 백제의 사신 中部 奈率 己連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에 좋은 말 70필과 배 10척을 내려 주었다.
7년 여름 6월(546년 음6월 12일)
百濟가 사신을 보냄
여름 6월 壬申 초하루 癸未 백제가 中部 奈率 掠葉禮 등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7년(546년)
高麗의 內紛[麤群과 細群의 대립]
이 해 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百濟本記』에는 “高麗가 정월 병오에 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麤王에게는 세 夫人이 있었는데 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中夫人이 世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麤群이었다. 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細群이었다.
狛王(고구려왕)의 질병이 심해지자 細群과 麤群이 각각 中夫人과 小夫人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細群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8년 여름 4월(547년 음4월)
百濟의 구원 요청
8년(547) 여름 4월 백제가 前部 德率 眞慕宣文·奈率 奇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리고 下部의 東城子言을 보내어 德率 汶休麻那를 교대하게 하였다.
9년 봄 정월(548년 음1월 3일)
百濟 사신의 歸國, 구원요청에 대한 확답
9년(548) 봄 정월 癸巳 초하루 乙未 백제의 사신 前部 德率 眞慕宣文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청하는 구원병을 반드시 보내어 구원할 것이니, 마땅히 빨리 가서 왕에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9년 여름 4월(548년 음4월 3일)
百濟가 사신을 보내 安羅 등이 高麗와 통함을 보고함
여름 4월 壬戌 초하루 甲子 백제가 中部 杆率 掠葉禮 등을 보내어 “德率 宣文 등이 칙을 받고 臣의 나라에 이르러 ‘청하는 구원병을 때에 맞춰 보내겠다’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삼가 은혜로운 조를 받고 기쁘고 즐겁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馬津城의 전투에서정월 辛丑에 高麗가 군대를 이끌고 馬津城을 포위하였다.
사로잡은 포로가 ‘(고려가 馬津城을 공격한 것은) 安羅國과 日本府가 불러 들여 벌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정으로 미루어 상황을 보더라도 진실로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밝히고자 하여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으므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공하신 천황께서 먼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청했던 구원병을 잠시 멈추시고 臣의 보고를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를 내려 “법식에 따라 올린 글을 보고 근심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日本府와 安羅가 이웃의 어려움을 구하지 않은 것은 짐이 또한 매우 싫어하는 바이다. 또 그들이 몰래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짐이 명하였다면 스스로 보냈을 것이지만 명하지 아니하였는데 어떻게 갔겠는가. 원하건대 왕은 흉금을 터놓고 안심하여 편안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任那와 함께 지난 번의 칙에 따라 힘을 다하여 모두 북쪽의 적을 막고 각각 봉토를 지키라. 짐이 마땅히 약간의 사람를 보낼 것이니 安羅가 도망한 빈 땅을 채우도록 하라”고 하였다.
9년 6월 2월(548년 음6월 2일)
百濟에 사신을 보내, 高麗를 막을 것을 당부
6월 辛酉 초하루 壬戌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를 내려, “德率 宣文이 돌아간 후에 잘 도착하였는가. 또한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너희 나라는 ?賊(고구려)의 침해를 받았다고 하는데, 마땅히 任那와 함께 힘써 도모하여 전과 같이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9년 윤7월(548년 윤7월 12일)
百濟 사신의 歸國
윤7월 庚申 초하루 辛未 백제의 사신 掠葉禮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9년 겨울 10월(548년 음10월)
百濟에 사람들을 보내 得爾辛 축성
겨울 10월 370명을 백제에 보내어 得爾辛(論山郡 恩津 지방)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왔다.
10년 여름 6월(549년 음6월 7일)
百濟 사신의 歸國. 구원병 중지를 百濟에 통보함
10년(549) 여름 6월 乙酉 초하루 辛卯 將德 久貴·固德 馬次文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延那斯·麻都가 몰래 사사로이 高麗에 사신을 보낸 것은 짐이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허실을 물을 것이며, 청한 군사는 청원에 따라 멈추겠다”라고 하였다.
11년 봄 2월(550년 음2월 10일)
百濟에 사신을 보냄
11년(550) 봄 2월 辛巳 초하루 庚寅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百濟本記』에는 “3월 12일 신유에 일본의 사신 阿比多가 배 세 척을 거느리고 都城 아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짐이, 施德 久貴·固德 馬進文 등이 올린 表의 뜻에 따라 하나하나 교시하여,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자세하게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大市頭가 돌아온 뒤로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지만, 이제 다만 보고한 말을 밝히고자 하여 사신을 보낸다. 또 다시 짐이 듣건대 奈率 馬武는 왕의 아끼는 신하로서 위의 말을 받아 아래에 전하는데 왕의 마음에 매우 흡족하도록 하며 왕을 잘 보좌한다고 한다.
만일 국가가 무사하여 오랫동안 *官家가 되어 길이 천황을 받들려고 한다면 마땅히 馬武를 大使로 삼아 조공토록 하라”고 하였다. 다시 조를 내려 “짐이 듣건대 북쪽의 적이 강하고 사나우므로 화살 30具(1,500隻)를 내리니 한 곳 정도는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官家 : 屯倉(미야케, ミヤケ)과 같은 의미로, 백제를 가야지역과 함께 大化朝廷의 직할령으로 보았던 데서 비롯한 듯하다.
11년 여름 4월(550년 음4월 1일)
百濟에 보낸 사신의 歸國
여름 4월 庚辰 초하루 백제에 있는 일본왕의 사람이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百濟本記』에는 “4월 1일 경진에 日本 阿比多가 돌아갔다”고 하였다.
백제왕 聖明이 왕의 사람에게 “任那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고, 延那斯·麻都의 일은 문책할 것인지와 않을 것인지를 오로지 칙에 따르겠다”라 말하고, 高麗奴 6口를 바치고, 따로 왕의 사람에게 奴 1口를 주었다모두 *爾林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奴이다.
*爾林 : 충남 大興(任城)지방이나 전북 김제군 利城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11년 4월(550년 음4월 16일)
百濟가 사신을 보냄
乙未 백제가 中部 奈率 久斤·下部 施德 灼干那 등을 보내어 狛(고구려)의 포로 10口를 바쳤다.
12년 봄 3월(551년 음3월)
百濟에게 麥種을 보냄
12년(551) 봄 3월 보리 씨앗 1,000斛을 백제왕에게 내려 주었다.
12년(551년)
百濟 聖明王이 高麗에게 빼앗긴 故地를 회복함
이 해 백제 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두 나라는 新羅·任那를 말한다 高麗를 정벌하여 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平壤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 해에 ~ 차지하였다 : 『三國史記』 권 44, 居柒夫傳에는 성왕 29년(551, 신라 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먼저 平壤을 쳐부수고 竹嶺 이북 高峴 이남 10郡의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때 백제도 漢江 하류의 옛 영토를 빼앗았던 것으로 보인다.
*平壤 : 南平壤 곧 北漢城으로 추측된다. 『三國史記』 권 37, 地理志, 백제조에 인용된 古典記에는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이라 하여 漢城과 南平壤이 같음을 보여주고 있어, 본 기사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聖王이 한성을 쳐부수고 진군하였다는 평양은 南平壤일 것으로 추측된다.
13년 5월(552년 음5월 8일)
高麗와 新羅의 화친
(13년, 552) 5월 戊辰 초하루 乙亥 百濟·加羅·安羅가 中部 德率 木?今敦·河內部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高麗가 新羅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任那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를 내려 “지금 百濟王·安羅王·加羅王이 日本府의 신하들과 함께 사신을 보내 아뢴 것을 다 들었다. 역시 任那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하나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황공하신 천황의 靈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3년 겨울 10월(552년 음10월)
百濟 聖明王이 佛像·經論 등 불교를 전함
겨울 10월 百濟 聖明( 聖王)이 西部의 姬氏 達率 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釋迦佛金銅像 1軀와 幡蓋 약간, 經論 약간 권을 바쳤다. 따로 表를 올려 (佛法을) 유통시키고 예배하는 공덕을 찬양하여, “이 법은 여러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이 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周公과 孔子라도 오히려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법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福德과 果報를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위 없는 菩提를 이루게 합니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隨意寶를 품고 있으면 필요한 바에 따라 모두 뜻대로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오묘한 법의 보배도 그러하니 기원한 것이 뜻대로 되어 부족한 바 없습니다. 또 멀리 天竺으로부터 三韓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따르고 받들어 지녀 존경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王 臣 (聖)明은 삼가 陪臣 怒唎斯致契를 보내 황제의 나라에 받들어 전하니, 畿內에 유통하시어 부처가 ‘나의 법이 동쪽으로 흘러갈 것이다’라고 授記한 것을 이루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날 천황은 표를 보고 뛸듯이 기뻐하며 사신에게 조를 내려 “짐이 예로부터 이와 같이 미묘한 법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짐이 혼자 결정할 수 없다”라 이르고,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서쪽 번국이 바친 불상은 모습이 단아하고 엄숙하다. 일찍이 전혀 없었던 것이니, 예배해야 되겠는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蘇我大臣稻目宿禰가 “서쪽 번국 여러 나라가 한결같이 모두 예배하는데, 豊秋 日本이 어찌 홀로 거스리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物部大連尾輿·中臣連鎌子가 “우리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항상 天地 社稷의 180神을 제사지내고 절하여 섬긴 때문인데, 바야흐로 이제 바꾸어 번국의 신을 섬긴다면 國神의 노여움을 부를까 두렵습니다”라고 함께 아뢰었다.
천황이 “원하는 사람인 稻目宿禰에 맡겨 시험삼아 예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대신이 무릎꿇고 받아 기뻐하며 小墾田의 집에 안치하고 삼가 出世間의 業을 닦아 因으로 삼았으며, 向原의 집을 깨끗한 마음으로 희사하여 절로 삼았다.
그 후 나라에 돌림병이 돌아 백성들이 죽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많아졌으나 치료할 수 없었다. 物部大連尾輿·中臣連鎌子가 함께 “지난날 臣의 계책을 따르지 않으시더니 이렇게 병들어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오래지 않아 바로 돌이킨다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불상을) 빨리 던져 버려 삼가 후일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라 아뢰었다.
천황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有司가 이에 불상을 難波의 堀江에 던져 버리고, 또 가람에 불을 놓으니, 다 타버려 남은 것이 없었다. 이 때 하늘에는 바람과 구름이 없었는데 갑자기 大殿에서 불이 났다.
13년(552년)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리고, 新羅가 漢城에 거하게 됨
이 해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牛頭方·尼彌方이다*
*百濟가 ~ 버렸다 :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다시 차지한 것은 欽明天皇 12년조에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 들어가 살았으니 : 『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의 동북부지역을 차지하여 新州를 설치한 것이 진흥왕 14년 곧 다음해의 일이라 하였다.
14년 봄 정월(553년 음1월 12일)
百濟의 구원 요청
14년(553) 봄 정월 甲子 초하루 乙亥 百濟가 上部의 德率 科野次酒·杆率 禮塞敦 등을 보내 군사를 청했다.
14년 정월(553년 음1월 15일)
百濟 사신의 歸國
戊寅 百濟의 사신인 中部의 杆率 木刕今敦과 河內部의 阿斯比多 등이 (使行을) 마치고 돌아갔다.
14년 6월(553년 음6월)
百濟에 사신을 보내 諸博士의 교대와 서적·약물 등 요청
6월 內臣을 百濟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좋은 말 2필, 同船 2隻, 활 50張, 화살 50具를 주었다.
칙을 내려 “청한 군대는 왕이 바라는 바에 따르겠다”고 하고, 다른 칙을 내려 “醫博士·易博士·曆博士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야 한다. 지금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바로 교대할 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 卜書·曆本과 여러 가지 藥物도 보내라”고 하였다.
14년 가을 7월(553년 음7월 4일)
王辰爾의 船賦 기록
가을 7월 辛酉 초하루 甲子 樟句宮에 행차하였다. 蘇我大臣稻目宿禰가 명령을 받들어 *王辰爾를 보내 船賦를 세어 기록하였다. 바로 王辰爾를 船長으로 삼고 성을 船史라 내려 주었으니, 오늘날 船連의 선조이다.
*王辰爾 : 『續日本紀』 延曆 9년 7월의 百濟王仁貞 등이 올린 上表文에서는 辰爾의 祖가 백제 貴須王의 손자인 辰孫王으로 應神天皇 때 來朝하였다고 하였다.
14년 8월(553년 음8월 7일)
新羅, 高麗와 百濟, 任那의 대립
8월 辛卯 초하루 丁酉 百濟가 上部의 奈率 科野新羅, 下部의 固德 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지난 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內臣 德率 次酒·任那 大夫 등을 보내 바다 밖 여러 彌移居(みやけ: 官家)의 일을 아뢰었습니다.
엎드려 은혜로운 조를 기다리기를 봄에 돋은 풀이 단비를 기다리듯 하였습니다. 올해 문득 들으니 新羅가 狛國(고구려)과 함께 모의하여 ‘百濟와 任那가 자주 日本에 나아가니, 생각건대 군사를 빌려 우리나라를 치려는 듯하다. 이 일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라의 패망은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日本의 군대가 떠나기 전에 安羅를 공격해 빼앗아 일본과의 통로를 끊자’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 계획이 이와 같으니, 신 등이 이를 듣고 두려운 마음을 깊이 품었습니다. 바로 빠른 배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아룁니다. 천황께서 빨리 前軍과 後軍을 보내 서로 이어 와서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가을까지는 바다 밖 彌移居를 굳게 지키겠습니다. 만약 지체하여 늦는다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보낸 군대가 신의 나라에 도착하면 옷과 식량은 신이 마땅히 공급할 것이고, 任那에 도착하여도 다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만약 (任那가)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신이 도와 충당하여 부족하고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的臣이 삼가 천황의 칙을 받들고 와서 신의 나라를 위로하고 일찍부터 늦게까지 쉬지 않고 모든 일에 힘썼습니다. 이 때문에 바다 밖의 蕃들은 그의 훌륭함을 칭송하여 ‘틀림없이 영원히 바다 밖을 깨끗이 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죽었다 하니 깊이 추모하여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任那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천황께서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任那를 진정시키기 바랍니다. 또 바다 밖의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한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천황에게 받아 강한 적을 막았으니, 천황께서 활과 말을 많이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14년 10월(553년 음10월 20일)
百濟의 高麗 공격
겨울 10월 庚寅 초하루 己酉 百濟의 왕자 餘昌(明王의 아들 威德王)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高麗國을 향했는데, 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 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餘昌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頸鎧를 입은 자 1騎, 징을 꼽은 자 2騎,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騎 모두 합해 5騎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餘昌이 “姓은 (高麗 왕실과) 同姓이고 관위는 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百濟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百濟는 高麗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高麗軍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百濟軍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副將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高麗王( 陽原王)을 東聖山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15년 봄 정월(554년 음1월 9일)
百濟의 구원 요청
15년(554) (봄 정월 戊子 초하루) 丙申 百濟가 中部의 木刕施德文次, 前部의 施德 曰佐分屋 등을 筑紫에 보내 內臣·佐伯連 등에게 묻기를 “德率 次酒·杆率 塞敦 등이 지난 해 윤달 4일에 와서 ‘신 등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말할 뿐 자세하지 않았습니다.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또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자세한 내용을) 약간이나마 들어 미리 軍營을 쌓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또 따로 “이제 들으니 ‘황공하옵신 천황의 조를 받들어 筑紫에 나와서 보내줄 군대를 살펴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기쁨은 이루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올해의 싸움은 전보다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줄 군대를 정월에 도착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에 內臣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15년 2월(554년 음2월)
百濟의 구원 요청. 諸博士, 僧 등 교대
2월 百濟가 下部의 杆率 將軍 三貴와 上部의 奈率 物部烏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德率 東城子莫古를 바쳐 전에 番을 섰던 奈率 東城子言을 교대하고, 五經博士 王柳貴로 固德 馬丁安을 대신하고, 僧 曇慧 등 9인으로 승 道深 등 7인을 교대하였다.
따로 명령을 받들어 易博士 施德 王道良, 曆博士 固德 王保孫, 醫博士 奈率 王有?陀, 採藥師 施德 潘量豊·固德 丁有陀, 樂人 施德 三斤·季德 己麻次·季德 進奴·對德 進陀를 바쳤는데, 모두 청에 따라 교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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