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일본의 역사- 한반도 관련 기록들.2-允恭, 雄略 ~ 繼體天皇-임나4현 할양, 多沙津 문제

청 설모 2013. 9. 25. 02:58

다음글은 <일본서기>를 번역한 [다산을 찾아서]란 블로그의 <일본육국사>에서 옮겨 온 글이다

http://sambolove.blog.me/150172958454

 

允恭天皇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

新羅에 사신을 보내 醫員을 구함-
3년 봄 정월 辛酉 초하루(414년 음1월 1일)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뛰어난 醫員을 구하였다.  
 
新羅의 醫員이 천황의 병을 치료
3년 가을 8월(414년 음8월)-   醫員이 신라로부터 이르자 천황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천황이 기뻐하여 의원에게 후한 상을 주어서 자기 나라에 돌려보냈다. 

(古事記』卷下에 “此時 新良國主貢進御調八十一隻 爾御調大使金波鎭漢紀武 此人深知藥方 故治差帝皇之御病”이라 하여, 允恭天皇의 持病을 신라의 조공사 金波鎭漢紀武가 치유했다고 한다)
  
允恭天皇이 죽음. 新羅에서 弔問使 파견
42년 봄 정월 乙亥 초하루 戊子(453년 음1월 14일)  천황이 죽었다. 이 때 나이는 若干이었다. 신라왕은 천황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배 80척으로 조공하고 아울러 각종 樂人 80명을 바쳤다. 이들은 對馬島에 도착하여 큰 소리로 울고 筑紫에 이르러 또 큰 소리로 울었다. 難波津에 이르러 모두 흰 옷을 입었다. 조공물을 받들고 또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難波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울부짖기도 하고 춤추고 노래부르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屍身을 모셔둔 곳에 參禮하였다. 

 
新羅 弔問使 구금. 이로 인한 新羅의 貢物 감축
42년 겨울 11월(453년 음11월) - 신라의 弔問使들이 問喪의 예를 마치고 돌아갔다. 신라인은 늘 京城 근방에 있는 耳成山, 畝傍山을 좋아하였다. 琴引坂에 도착하여 그곳을 돌아보며 “내 사랑하는 우네메여, 미미여”라고 하였다. 이는 민간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아직 익숙지 않았던 까닭에 畝傍山을 ‘于泥咩(うねめ)’라 잘못 말하고 耳成山을 ‘禰禰(みみ)’로 잘못 말한 것이다.

 

이 때 왜의 飼部에 속해 있던 사람이 신라 사람을 따라갔는데, 이 말을 듣고 신라 사람이 *采女와 정을 통했다고 의심하여 돌아와 *大泊瀨皇子에게 아뢰었다. 황자는 곧 신라의 使者들을 모두 가두고는 사실여부를 캐물었다. 이 때 신라 使者들이 “采女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서울 근방에 있는 두 산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잘못된 말인 것을 알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이에 신라인들은 매우 원망하여 다음부터는 바치는 물건의 종류와 배의 수를 줄였다.

 

*采女 : 天皇 옆에서 음식 등을 시중드는 女官으로, 그 명칭은 後漢의 宮中官制에서 기원한다. 일본에서의 采女는 지방 호족들이 중앙조정에 복속하는 과정에서 충성의 保證物로 자신의 누이 혹은 딸을 바쳐 천황을 섬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大和改新 때 采女 貢進이 법제화되었다. 한편 신라 사신이 畝傍山을 찬미하여 ‘우네메하야’라 한 것을 일본 飼部가 采女를 범한 것으로 오해한 이유는 采女의 일본어 발음이 ‘우네메’였기 때문이다.

*大泊瀨皇子 : 允恭天皇의 다섯째 아들로 후에 雄略天皇이 되었다.


雄略天皇  大泊瀨幼武天皇
百濟에서 바친 池津媛이 음탕하여 죽임
天皇이 여자를 물색하자 百濟에서 適稽女郞을 바쳤는데 2년 가을 7월(458년 음7월) 백제의 池津媛은 천황이 장차 同寢하려는 것을 거스리고 石川楯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大伴室屋大連에게 명하여 來目部를 시켜 부부의 四支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


『百濟新撰』에는 “*己巳年에 蓋鹵王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阿禮奴詭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慕尼夫人의 딸 適稽女郞을 잘 꾸며서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己巳年에 ~ 즉위했다 : 『三國史記』 와 『三國遺事』에 의하면, 毗有王의 맏아들인 개로왕은 455년(乙未年)에 즉위하여 475년(乙卯年)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개로왕 治世 中에는 己巳年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日本書紀』에서는 『百濟新撰』을 인용하여 “己巳年에 개로왕이 즉위했다”고 한 것은 『日本書紀』 찬자의 誤寫일지도 모르겠다. 
 
百濟 加須利君(蓋鹵王)이 아우 軍君(昆支)를 보냄
5년 여름 4월(461년 음4월) -백제 *加須利君(蓋鹵王)은 池津媛(適稽女郞)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采女로 삼았다. 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나라의 이름을 失墜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軍君(昆支)에게 “네가 日本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軍君이 “임금님의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임금님의 부인을 저에게 주시면 그런 다음 떠나라는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加須利君은 임신한 부인을 軍君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다다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작별하고 조정에 파견되는 명을 받들었다. 

 

*加須利君 : ‘蓋鹵’ 혹은 개로왕의 이름인 ‘慶司’를 音寫한 표기로 보인다
*軍君 : ‘軍’과 ‘昆’, ‘君’과 ‘支’는 각각 음과 뜻으로 서로 상통하는 말이다. 『日本書紀』에서는 곤지를 개로왕의 아우라 하였으나, 『三國史記』권26에서는 개로왕의 둘째 아들로 東城王의 아버지라 하여 兩書間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문주왕 3년(477) 4월에 內臣佐平이 되었으며 그 해 7월에 죽었다. 458년에 宋으로부터 征虜將軍左賢王의 관작을 받은 餘昆과도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한편 『新撰姓氏錄』에는 昆支를 河內飛鳥戶造의 시조라 하였다.
  

武寧王이 各羅嶋에서 태어남-
5년 6월 丙戌 초하루(461년 음6월 1일) - 임신한 부인이 과연 加須利君의 말처럼 筑紫의 *各羅嶋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嶋君이라 하였다. 이에 軍君은 곧 한 척의 배로 嶋君을 본국에 보내었는데, 이가 *武寧王이 되었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主嶋라 일컬었다. 
 
*各羅嶋 : 지금의 長岐縣 東松浦郡 鎭西町의 加唐島에 비정되고 있다.
*嶋君 : ‘嶋’의 일본어 발음이 ‘시마’이므로 嶋君은 곧 ‘시마임금’ 혹은 ‘시마왕’이라 할 수 있다. 『日本書紀』 권 16, 武烈天皇 4년 是歲條에 인용한 『百濟新撰』에 武寧王의 이름을 斯麻王이라 하였으며, 『三國史記』 권 26에서도 斯摩라 하였다. 그리고 1971년에 발굴한 武寧王陵 안에 있던 왕의 지석에도 斯麻王이라 하였다. 이는 모두 ‘嶋君’을 音寫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武寧王 : 백제 제25대 왕(재위 501 ~ 523)으로 이름은 斯麻(摩)이다. 그의 계보에 관해서는, 東城王의 둘째 아들이라는 기록과 개로왕의 동생인 昆支의 아들로서 東城王의 異母兄이라는 두 설이 있다.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武寧王 지석에 의하면 그는 461년에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軍君(昆支)의 入京
5년 가을 7월(461년 음7월) - 軍君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을 두었다『百濟新撰』에 “辛丑年에 蓋鹵王이 아우 昆支君을 보내어 大倭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했는데*, 兄인 왕의 우호를 닦기 위해서였다”라고 한다. 

*辛丑年에 개로왕이 ~ 천황을 모시게 했는데 : 개로왕 재위기간 중의 辛丑年은 461년 즉 개로왕 7년에 해당한다. 『三國史記』 등 우리나라 史書에는 이 때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없다. 
 
7년(463년)
新羅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음. 百濟에서 바친 才伎를 데리고 옴
 
(7년) 이 해 吉備 上道臣 田狹이 궁중에서 侍從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稚媛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미인들 중에서 내 아내만한 이가 없다. 빼어나게 아름다워 온갖 좋은 점을 갖추었고 환히 빛나고 온화하여 여러 가지 좋은 용모를 구비하였다. 화장도 필요 없으며 향수를 바를 것까지도 없다. 넓은 세상에서 견줄 만한 이가 드무니 이 시대에 홀로 빼어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귀를 귀울여 멀리서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곧 자기가 稚媛을 얻어 시중드는 여자로 삼고자 하여 田狹을 任那國司(임나 지방장관)로 삼았다. 얼마 지난 후 천황이 稚媛과 동침하였다. 田狹臣은 稚媛에게 장가들어 兄君과 弟君을 낳았다. 田狹은 이미 任地에 가 있었는데, 천황이 그의 아내와 사통하였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얻고자 신라에 들어갈 생각을 하였다. 이 때 신라는 ‘中國’(日本을 가리킴)을 섬기지 않고 있었다.

 

천황이 田狹臣의 아들 弟君과 吉備 海部 直赤尾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懲罰하라”고 하였다. 이 때 西漢 才伎 歡因知利가 옆에 있다가 나아가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가 韓國(三韓의 總稱)에 많이 있으니 불러서 부릴 만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러면 마땅히 歡因知利를 弟君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 길을 취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재주가 뛰어난 자를 바치게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弟君은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신라)에 들어가는데 나라의 신이 늙은 여자(샤먼)로 변하여 忽然히 길에서 맞이하였다. 弟君이 나라의 멀고 가까움을 묻자 늙은 여자가 “다시 하루(한달을 의미)를 더 간 다음에야 다다를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弟君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길이 멀다고 여겨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백제에서 바친 재주있는 사람들을 큰 섬안에 모아놓고 바람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몇달 동안 머물러 있었다.

 

任那國司 田狹臣은 弟君이 (신라를) 치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기뻐하며 몰래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弟君에게 警戒하여 “너의 목이 얼마나 단단하기에 다른 사람을 치는가. 전하는 말을 듣건대 천황이 나의 아내와 사통하여 자식까지 있다고 한다. 이제 禍가 나에게까지 미치기는 발을 들고 서서 기다리는 것 만큼이나 순식간일 것이다. 내 아들인 너는 백제를 차지하고 앉아 일본에 통하지 않도록 하라. 나는 任那를 차지하고서 역시 일본에 통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弟君의 아내 樟媛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君臣의 義를 중히 여기며, 충성스러운 마음은 밝은 해보다 더하고 절의는 푸른 소나무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그 모반을 미워하여 몰래 남편을 죽여 집안에 숨겨 묻어두고 海部 直赤尾와 함께 백제에서 바친 손재주 좋은 기술자를 거느리고 큰 섬에 있었다.

천황은 弟君이 죽은 것을 알고 日鷹吉士 堅磐 固安錢을 보내어 함께 복명하게 했다. 마침내 倭國 吾礪 廣津邑(오사카 부근)에 안치하였으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로 말미암아 천황이 大伴大連室屋에게 詔를 내려 東漢直?에게 명하여 *新漢 陶部 高貴, 畫部 堅貴, 畫部 因斯羅我, 錦部 定安那錦, 譯語 卯安那 등을 上桃原, 下桃原, 眞神原의 세 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고 한다. 

*新漢 : 옛날에 귀화한 阿知使主, 都加使主 계열의 漢人과 대비하여 이 때 새롭게 귀화한 漢人이라는 뜻이다.  
 
新羅와 高麗의 대립. 新羅의 구원요청
8년 봄 2월(464년 음2월)   身狹村主靑과 檜隈民使博德을 *吳나라에 사신보냈다.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中國(일본을 말함)’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 하여 高麗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 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 사람을 말몰이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 사람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筑足流城(지금의 大邱地方)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任那王이 膳臣 斑鳩, 吉備臣 小梨, 難波吉士 赤目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膳臣 등이 아직 軍營에 이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려의 여러 장수들은 膳臣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膳臣 등은 힘써 군사를 위로하고 軍中에 令을 내려 속히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려군과 서로 10여 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地道(참호)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 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고려는 膳臣 등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왔다. 이에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신라와 고구려)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

 

膳臣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매우 약한데 매우 강한 나라와 부닥쳤다. 官軍(일본군)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반드시 업신여김을 당하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장차 다른 사람의 영토가 되었다면 이는 아마 이번 전쟁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 어찌 天朝를 배반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吳나라 : 464년 당시 중국에는 吳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吳는 중국 남조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新羅를 공격함
9년 3월(465년 음3월)  천황이 新羅를 직접 정벌하려고 하였다. 神이 천황에게 “가지 말라”고 경계하니, 천황이 이로 말미암아 가지 않았다. 그리고 紀小弓宿禰·蘇我韓子宿禰·大伴談連·小鹿火宿禰 등에게 칙명으로 “新羅는 본래 서쪽 땅에 있으면서 여러 대에 걸쳐 신하를 칭하며 조빙을 어기지 않았고 공물도 잘 바쳤다. 짐이 천하를 다스림에 미쳐 몸을 對馬의 밖에 두고 자취를  匝羅(경상남도 梁山으로 추정)밖에 감춘 채 高麗의 조공을 막고 百濟의 城을 병탄하였다. 하물며 다시 조빙을 이미 걸렀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았음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리 같은 사나운 마음이 있어 배부르면 나는 듯 달려가고 굶주리면 붙좇는다. 그대들 네 卿을 대장으로 삼으니 王師를 거느리고 가 쳐서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紀小弓宿禰는 大伴室屋大連으로 하여금 천황에게 호소해주도록 하면서 “신이 비록 미약하지만 삼가 칙명을 받들겠습니다. 다만 지금 신의 아내가 목숨이 다할 무렵이 되어 신을 돌볼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公은 이 일을 갖추어 천황께 아뢰어 주십시오”라 하였다. 大伴室屋大連이 갖추어 아뢰니 천황이 듣고 슬피 탄식하면서 吉備上道의 采女 大海를 紀小弓宿禰에게 하사하여 그를 따라가서 돌보게 하였다.

 

드디어 수레를 밀어 (군대를) 보냈다. 紀小弓宿禰등이 곧 新羅에 들어가 이웃 郡을 같이 공격하였다. 新羅王은 밤에 官軍이 사방에서 북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관군이) 㖨(慶山, 靈山·密陽등으로 추정)의 모든 땅을 얻었음을 알고 수백 騎와 함께 어지러이 도망갔다. 그러므로 크게 패배시키고 小弓宿禰는 (新羅軍을) 쫓아가 陣 속에서 적장을 베었다. 㖨의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남은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紀小弓宿禰는 또한 군사를 거두어 大伴談連 등과 만나 군대를 다시 크게 일으켜 남은 무리와 싸웠다.

 

이 날 저녁 大伴談連과 紀岡前來目連이 모두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談連, 시종으로 같은 姓인 津麻呂는 나중에 진영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주인을 찾았다. 진영에서 찾지 못하자 나와서 “우리 주인 大伴公은 어느 곳에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사람들이 “너의 주인 등은 적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알려주며 주검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津麻呂는 그 말을 듣고 땅을 구르면서 “주인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 혼자 살겠는가”라 소리치고 적에게 나아가 함께 죽었다. 얼마 후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가니 관군도 따라서 물러났다. 大將軍 紀小弓宿禰는 병에 걸려 죽었다.  
 
倭 장수들의 불화
9년 여름 5월(465년 음5월)   紀大磐宿禰는 아버지(紀小弓宿禰)가 이미 돌아가셨음을 듣고 新羅를 향하면서 小鹿火宿禰가 관장하던 兵馬와 船官 및 小官들을 장악하고 명령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므로 小鹿火宿禰는 大磐宿禰를 매우 원망하여 韓子宿禰에게 거짓으로 “大磐宿禰가 저에게 ‘내가 다시 韓子宿禰가 장악한 관리들을 뺏는 것이 머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원컨대 굳게 지키십시오”라고 고했다. 이로 말미암아 韓子宿禰는 大磐宿禰와 틈이 벌어졌다.

 

이 때 百濟王은 日本의 장수들이 사소한 일 때문에 틈이 벌어졌음을 듣고 韓子宿禰 등에게 사람을 시켜 “나라의 경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왕림하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韓子宿禰 등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갔는데, 강에 이르러 大磐宿禰가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이 때 韓子宿禰가 뒤에서 大磐宿禰의 말안장 뒤를 받친 나무에 활을 쏘았다. 大磐宿禰가 놀라 돌아보며 韓子宿禰를 쏘니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세 신하들이 앞에서 서로 다투었으므로 길에서 행렬이 어지러워져 百濟 왕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때 采女 大海가 小弓宿禰의 관을 따라 日本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大伴室屋大連에게 근심스럽게 상의하기를 “저는 장례치를 곳을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좋은 땅을 골라주십시오”라 하니, 大連이 곧 아뢰었다. 천황이 大連에게 명령하여 “大將軍 紀小弓宿禰는 용처럼 뛰어 오르고 호랑이처럼 노려보며 8方을 널리 바라보았고, 반역자들을 불시에 토벌하고 사방의 적들을 물리쳤다. 그러므로 몸은 만 리 밖에서 수고로웠고 목숨이 三韓에서 떨어졌으니, 매우 불쌍히 여겨 장례를 담당할 사람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또 그대 大伴卿과 紀卿 등은 같은 나라 가까운 곳의 사람으로서 유래가 오래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大連이 명령을 받들어 土師連小鳥로 하여금 田身輪邑(오사카의 한 지방)에 무덤을 만들어 장례지내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大海가 기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韓奴 室·兄麻呂·弟麻呂·御倉·小倉·針 6口를 大連에게 보냈는데, 吉備上道의 蚊嶋田邑 家人部가 이들이다. ……  

 
貴信이 百濟로부터 도망하여 옴
11년 가을 7월(467년 음7월) 百濟國으로부터 도망해 온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이름을 貴信이라고 하였다. 또 貴信은 吳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磐余의 吳琴을 타는 壃手屋形麻呂 등이 바로 그 후손이다. 
  
秦民을 秦酒公에게 맡김
15년(471년)   *秦의 백성을 臣·連 등에게 분산시켜 각각 원하는 바에 따라 부리도록 하고 秦造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秦造酒가 매우 근심스럽게 여기며 천황을 섬겼다. 그러므로 천황은 그를 총애하여 詔를 내려 秦의 백성을 모아 秦酒公에게 주니, 공은 이에 180種의 勝(村의 首長)을 거느리고 庸調로 絹縑을 바쳐 朝廷에 가득 쌓았다. 그러므로 姓을 하사하여 禹豆麻佐라 하였다

*秦의 백성 : 應神天皇 14년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한 弓月君의 후예이다.
 
秦民의 散遷
16년 가을 7월(472년 음7월)  詔를 내려 뽕나무 재배에 적당한 國縣에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또 秦의 백성을 분산하여 옮겨서 庸調를 바치도록 하였다.
 
高麗의 百濟 공격·尉禮함락, 蓋鹵王의 죽음
20년(476년)*  겨울 高麗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百濟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倉下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高麗의 장수들이 왕에게 “百濟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百濟國은 日本國의 官家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百濟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蓋鹵王 乙卯年(475) 겨울 狛(고구려의 별칭)의 大軍이 와서 大城을 7일 낮밤을 공격하였다. 王城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雄略天皇 20年 : 『三國史記』의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三國史記』백제본기 蓋鹵王 21년(乙卯)조에 따르면 고구려왕 巨璉(長壽王)이 9월에 군사 3만을 거느리고 漢城을 포위하였는데, 왕이 싸우지 못하고 달아나자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고 한다. 細註의 개로왕 을묘년이라고 한 『百濟記』의 기사가 『三國史記』 백제본기의 기사와 『三國史記』 고구려본기 長壽王 63년조와 일치한다. 한편 『三國史記』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년(개로왕 20, 장수왕 62) 7월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백제왕 慶이 아들 文周를 보내 도움을 구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도우려 하였으나 군대가 이르기 전에 백제는 함락되고 왕도 죽었다고 하였다.

 
百濟의 천도
21년 봄 3월(477년 음3월)  천황이 百濟가 고구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久麻那利(熊津, 지금의 공주)를 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百濟國은 비록 거의 망해 倉下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汶洲王은 蓋鹵王의 동생이다). 『日本舊記』에서는 “久麻那利를 末多王(東城王 牟大)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久麻那利는 任那國의 下哆呼唎縣의 別邑이다. 

*蓋鹵王의 동생이다 : 『三國史記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아우라 하였으니 확실하지 않다.
 

百濟 文斤王이 죽음. 東城王 즉위
23년 여름 4월(479년 음4월)  百濟의 文斤王(三斤王)이 죽었다. 천왕이 *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兵器를 주고 아울러 筑紫國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東城王이 되었다. 

 

*昆支王 : 雄略天皇 5년(461) 4월의 기사에는 軍君이라 하였고, 개로왕의 아우로 되어 있다. 그러나 『三國史記』 문주왕조에 의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곤지는 문주왕의 아우라 하였다. 한편 개로왕 4년(458) 중국 남조의 宋으로부터 征虜將軍 左賢王을 제수받은 餘昆과 동일인물로 보고 문주왕과 함께 개로왕의 아우라고 본 견해도 있다(이기동). 461년 고구려의 남진 압박에 왜와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그 후 귀국하여 문주왕 3년 4월 內臣佐平이 되었다가 7월에 죽었다.
 
*東城王 : 『三國史記』 권 26, 동성왕조에 의하면 諱는 牟大, 摩牟이며 『三國遺事』에 의하면 摩帝, 餘大라고도 한다. 재위기간은 479년 ~ 501년이다.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百濟의 調賦. 倭의 高麗 공격
23년(479년) 이 해 百濟에서 바친 調賦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筑紫의 安致臣·馬飼臣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高麗를 쳤다. 
 

雄略天皇의 죽음
23년 8월 庚午 초하루 丙子(479년 음8월 7일)  천황의 병이 더욱 심해져 관료들과 하직하고, 또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다. (천황이) 大殿에서 죽었다.…… 이 때 新羅를 정벌하러 갔던 장군 吉備臣 尾代의 행렬이 吉備國에 이르러 집을 지나갔다. 뒤를 따르던 500 蝦夷들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천황이 죽었으니 때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로 모여 이웃 郡을 침략하여 노략질하였다. 이에 尾代가 집으로부터 와서 蝦夷와 娑婆水門에서 만나 싸우며 활을 쏘니 蝦夷들이 뛰어오르거나 엎드려서 능히 화살을 피해 벗어나므로 끝내 쏘아 맞힐 수 없었다. ……

 

顯宗天皇    弘計天皇   
 任那에 사신을 보냄
3년 봄 2월丁巳 초하루(487년 음2월 1일)  阿閉臣事代가 명을 받들고 任那에 사신으로 나아갔다. 이 때 月神이 사람에게 의탁하여 “나의 조상 高皇山靈은 이미 天地를 녹여 만든 공이 있었으니, 백성의 땅으로 月神인 나를 받들어야 한다. 만약 청에 따라 나에게 바친다면 복과 경사가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事代가 이로 말미암아 서울로 돌아와 갖추어 아뢰니 歌荒樔田으로써 받들었으며歌荒樔田은 山背國 葛野郡에 있다 壹伎縣主의 선조인 押見宿禰가 사당에 모셨다. 
  

任那와 百濟의 대립
3년(487년)  이 해 紀生磐宿禰가 任那를 점거하고 高麗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三韓의 왕노릇하려고 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神聖이라고 칭하였다. 任那의 左魯·那奇他甲背 등이 계책을 써서 百濟의 適莫爾解를 爾林(충남 대흥, 또는 전북 김제-고려의 땅)에서 죽이고 帶山城(정읍)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百濟의 왕이 크게 화가 나, 領軍 古爾解·內頭 *莫古解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帶山城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生磐宿禰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膽力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뜨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任那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이 左魯·那奇他甲背 등 300여 인을 죽였다. 

 

*莫古解 : 백제 근초고왕 24년(369)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침입하자 태자와 함께 출전하여 격퇴한 장군의 이름이 막고해인데, 약 120여 년간의 연대 차이가 있으므로 동일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仁賢天皇  億計天皇

高麗에 日鷹吉士를 사신으로 보냄
6년 가을 9월 己酉 초하루 壬子 (493년 음9월 4일)  日鷹吉士를 보내 高麗에 사신으로 보내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불러오게 하였다. 
 
高麗로 간 麤寸의 妻 飽田女의 상심
6년 가을(493년)  이번 가을 日鷹吉士가 사신으로 파견된 후에, 어떤 여인이 難波의 御津에 살았는데 곡을 하며 “어머니에게도 兄이요 나에게도 형이며, 어린 풀 같은 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 하였다(어머니에게도 형이요 나에게도 형이며’라 한 것은 우리말로는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이다.‘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고 한 것은 우리말로는 阿我圖摩播耶라 한다. ‘어린 풀’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옛날에 어린 풀로 부부를 비유하였으므로 어린 풀을 남편이라 여겼던 것이다) 곡소리가 매우 슬퍼 사람들의 腸을 끊는 듯하였다.

 

菱城邑 사람 鹿父가 듣고 앞으로 나아가 “어찌 슬피 우는 것이 이처럼 심한가”라고 하니, 여인이 답하기를 “가을 나무의 슬픔이 더하여 두 배로구나. 받아들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鹿父가 “그렇다”라 하며 말하는 내용을 알았다. 동반자가 있었는데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찌 알았습니까”라고 물으니, (녹부가) 답하기를 “難波玉作部鱜魚女(鱜魚女라 한 것은 우리말로 浮儺謎라 한다)가 韓白水郞(韓白水郞이라 한 것은 우리말로 阿羅摩能波陀該이니, 은 보리밭을 경작하는 것이다)에게 시집가서 哭女를 낳았고, 哭女(哭女라 한 것은 우리말로 儺俱謎라 한다)는 住道人 山杵에게 시집가서 飽田女를 낳았다.

 

韓白水郞과 그 딸 곡녀는 모두 일찍 죽었는데, 住道人 山杵가 앞서 玉作部鱜魚女와 간통하여 麤寸을 낳았다. 麤寸은 飽田女를 부인으로 맞아 들였다. 이 때 麤寸이 日鷹吉士를 따라 高麗를 향해 출발하였으므로 그 처인 飽田女가 배회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돌아보고, 마음의 갈피를 잃고 상심하여 곡소리가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장을 끊을 듯하였다”라고 하였다.
 
 高麗로 간 日鷹吉士가 돌아옴
6년(493년) 이 해 日鷹吉士가 高麗로부터 돌아와 工匠 須流枳·奴流枳 등을 바치니, 지금의 大倭國 山邊郡 額田邑의 熟皮高麗가 그 후예이다. 
 

武烈天皇  小泊瀨稚鷦鷯天皇
 
百濟의 意多郞이 죽음
3년 11월(501년 음11월) 이 달 백제의 意多郞(백제 왕족으로 추측)이 죽어서 高田언덕에 장사 지냈다.
 
百濟 武寧王의 즉위[武寧王의 출생]
4년(502년) 이 해 백제 末多王이 無道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마침내 제거하고 嶋王을 세우니 바로 武寧王이다『百濟新撰』에 이르기를 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함께 제거했다. 武寧王이 즉위하였는데 諱는 斯麻王이고 琨支王子의 아들이니 末多王의 異母兄이다*

 

곤지가 왜로 갈 때에 筑紫嶋(지금의 長崎縣 東松浦郡 鎭四町 加唐島로 추정)에 이르러 斯麻王을 낳았다. 섬으로부터 되돌려보냈는데 서울에 이르지 못하고 섬에서 낳았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지금 各羅의 바다 가운데 主嶋가 있는데 왕이 태어난 섬이어서 백제인들이 주도라 부른다. 지금 생각건대 嶋王은 곧 蓋鹵王의 아들이고 末多王은 琨支王의 아들이다.  
 
*武寧王이 ∼ 異母兄이다 : 『三國史記』에서 武寧王의 諱는 斯摩(또는 隆)이고 牟大王 즉 東城王(479~501)의 第二子로서 동성왕이 재위 23년만에 죽자 즉위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성왕은 文周王의 아우 昆支의 아들로서 三斤王이 죽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文周王은 蓋鹵王(455~475)의 아들로 되어 있으며 문주왕의 아우 昆支는 문주왕 3년 4월에 內臣佐平이 되었다가 같은 해 7월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日本書紀』에는 무령왕이 문주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로서 末多 즉 동성왕의 異母兄으로 되어 있고 『三國史記』에는 모대 즉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

 
百濟의 貢調
 6년 겨울 10월(504년 음10월) 겨울 10월 백제국이 麻那君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천황은 백제가 해가 지나도록 조공의 직무를 닦지 않았다고 하여 붙잡아 놓고 보내지 않았다. 
 
 百濟의 貢調
 7년 여름 4월(505년 음4월) 백제왕이 斯我君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전에 調를 바친 사신 麻那는 百濟國主의 骨族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斯我를 보내어 조정을 섬깁니다”라 하였다. 드디어 아들이 있어 法師君이라 하였는데 곧 *倭君의 선조이다. 
 *倭君 :  『新撰姓氏錄』左京諸蕃에 “和朝臣 出自百濟國都慕王十八世孫武寧王也”라고 되어 있다. 和朝臣은 武寧王의 아들 純陀太子의 자손으로 보통 和史의 末이 되었다고 한다.
 

繼體天皇   男大迹天皇 
耽羅와 百濟의 통교
2년 12월(508년 음12월) 남해의 *耽羅人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
 
*耽羅人 : 제주도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三國志』 東夷傳 馬韓조에 의하면 州胡 곧 제주도 사람들이 배를 타고 육지를 왕래하며 무역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한때 제주도는 김해의 본가야 사람들에 의해서 개척된 하나의 무역 중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三國史記』 권 26, 文周王 2년(476) 4월에 탐라국이 方物을 바쳤다고 한 기록이 보이며 東城王 20년(498) 8월조에도 탐라와의 관계기사가 보인다.
 
百濟에 사신을 보냄
3년 봄 2월(509년 음2월)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百濟本記』에 久羅麻致支彌가 일본으로부터 왔다고 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 任那의 日本 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으로 도망하여 호적에서 빠진 지 3·4代 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백제로 옮기고 호적에 넣었다.
 
百濟에 사신을 보냄
6년 여름 4월 辛酉 초하루 丙寅 (512년 음4월 6일)   穗積臣押山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어 筑紫國의 말 40필을 주었다. 
 
百濟의 貢調. 任那 4縣을 百濟에게 줌
6년 겨울 12월(512년 음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任那國의 上哆唎·下多唎·娑陀·牟婁의 *4현을 청했다. 哆唎國守 穗積臣押山이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는) 아침 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어느 나라의)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주어서 나라를 합치더라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태로울 것인데, 하물며 다른 곳이 된다면 몇년이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 아뢰었다.

 

大伴大連金村이 이 말을 다 듣고 같은 계책을 아뢰었다. 이에 物部大連麤鹿火를 칙을 선포하는 사신으로 삼았다. 物部大連이 難波館을 향해 출발하여 百濟客에게 칙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그의 妻가 진실로 간하기를 “主吉大神이 처음에 바다 밖의 金銀의 나라 고려·백제·신라·임나 등을 胎中의 譽田天皇에게 주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大后 息長足姬尊과 大臣 武內宿禰가 나라마다 처음으로 官家를 두어 바다 밖의 蕃屛으로 삼았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고 또한 까닭이 있습니다. 만약 떼어서 다른 곳에 주면 본래의 구역을 어기게 되니 길이 이어질 비난이 어찌 입에서 떠나겠습니까”라 하였다.

 

大連이 응답하기를 “가르쳐 준 것이 이치에 맞으나 天勅을 거스를까 두렵다”라 하였다. 그 처가 간절하게 “병이라고 핑계대고 선포하지 마십시오”라 하자 大連이 이를 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바꾸어 칙을 선포하고 내리는 물건과 制旨를 붙여서 表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大兄皇子가 전에 다른 일이 있어서 나라를 내려주는 데 관여하지 않았는데 뒤늦게 칙을 선포한 것을 알고 놀라서 뉘우치며 고치고자 하였다. 令을 내려 “胎中의 천황 때부터 官家를 두었던 나라를 경솔하게 번국의 요청에 따라 갑자기 줄 수 있느냐”라 하였다.

 

이에 日鷹吉士를 보내어 百濟客에게 칙을 바꾸어 선포했다. 使者가 답하여 아뢰기를 “아버지 천황이 편의를 도모하여 칙으로써 주는 것을 이미 마쳤습니다. 아들인 皇子가 어찌 천황의 칙을 어기고 함부로 고쳐서 명령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이는 가짜일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진짜일지라도 큰 막대기를 가지고 때리는 것과 작은 막대기를 가지고 때리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프겠습니까”라 하고 드디어 파기했다. 이 때 혹 떠도는 말로 “大伴大連과 哆唎國守 穗積臣押山이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任那國의 ∼ 4현 : 왜가 백제에게 任那 4현을 割讓하였다는 기사와 뒤의 繼體紀 7년(513) 11월조에 보이는 己汶, 帶沙 두 곳의 할양 기사는 백제가 왜병의 지원을 얻어서 이 지방에 진출한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이 해되고 있다. 4현의 위치 比定은 학자마다 견해가 다른데, 金廷鶴은 이를 蟾津江 河口에서 洛東江 유역에 이르는 가야와 백제 사이의 완충지대로 보았고 千寬宇는 이를 낙동강 상·중류 방면에 비정하였으며 末松保和는 전남 서부로 보았다.
 
百濟가 五經博士 段楊爾를 보냄
7년 여름 6월(513년 음6월)  백제가 *姐彌文貴장군과 州利卽爾장군을 穗積臣押山에 딸려 보내어 五經博士 段楊爾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伴跛國이 저희 나라 *己汶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天恩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姐彌文貴장군 : 姐彌氏는 백제의 複姓으로 『三國史記』에는 ‘祖彌’로 되어 있다. 즉 『三國史記』 蓋鹵王 21년조에서 고구려 長壽王이 와서 漢城을 포위하자 文周는 木刕滿致, 祖彌桀取와 함께 南으로 갔다고 한 기록이 그 예이다. 백제의 王妃族 眞씨를 姐彌의 漢譯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伴跛國 : 『三國志』 東夷傳 辰·弁韓條에 보이는 24國 가운데 弁辰半路國과 같은 곳으로 믿어진다. 弁辰半路國의 위치는 종래에 星州 또는 巨濟郡 長承浦에 비정되어 왔는데 이를 陜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半路國은 梁의 「職貢圖」에 백제의 ‘旁小國’으로 나오는 叛波와 동일한 小國으로 생각되며 이를 本彼와 관련시켜 주로 星州에 比定해 왔으나 최근 이를 5세기 후반에 이르러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한 高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己汶 : 종래 『翰苑』 雍注 所引 『括地志』의 ‘基汶河’를 蟾津江으로 보고 이를 섬진강 河口의 南原, 谷城에 비정해 왔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新撰姓氏錄』 左京皇別, 吉田連조에 나오는 ‘三己汶地’가 任那의 東北에 있고 신라와 相爭하는 위치에 있다고 한 것에 근거하여 洛東江 상·중류 방면에서 찾아 경북 金陵의 開寧, 甘文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며 이를 종래와 같이 南原, 任實지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百濟太子 淳陀의 죽음
7년 가을 8월 癸未 초하루 戊申(513년 음8월 26일)  백제 태자 *淳陀가 죽었다

*淳陀 : 우리측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데 『續日本紀』에 皇太后 高野新笠의 傳에 “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라는 기록이 보인다. 
 
 百濟에게 己汶과 帶沙를 줌
7년 겨울 11월 辛亥 초하루 乙卯(513년 음11월 5일)  朝庭에서 백제의 姐彌文貴장군과 斯羅(신라)의 汶得至, 安羅(咸安에 있던 가야국)의 辛已奚와 賁巴委佐, 伴跛의 旣殿奚와 竹汶至 등을 불러놓고 恩勅을 선포하여 己汶과 滯沙(하동)를 백제국에 주었다*

*백제국에 주었다 : 종래 일본학계에서는 이 기록 그대로 倭가 백제에게 己汶, 帶沙의 두 곳을 賜與하였다고 보아 왔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백제가 낙동강 상류 방면으로부터 대구 방면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가야를 지배 점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伴跛에서 己汶을 요구
7년 겨울 11월(513년 음11월) 이 달 伴跛國이 戢支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己汶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伴跛가 倭에 대비
8년 3월(514년 음3월)   伴跛가 子呑(섬진강 부근)과 帶沙에 성을 쌓아 滿奚와 이어서 봉수와 軍倉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爾列比와 麻須比에 성을 쌓아 麻且奚와 推封(밀양부근)에 걸치게 했다. 士卒과 兵器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百濟 사신의 歸國(物部連과 함께)
9년 봄 2월 甲戌 초하루 丁丑(515년 음2월 4일)  백제의 使臣 文貴장군 등이 물러가기를 청했다. 이에 명을 내려 物部連이름은 빠졌다을 딸려 보내어 돌아가게 했다『百濟本記』에는 物部至至連이라 하였다.
 
伴跛가 帶沙江에서 物部連과 대치 
9년 봄 2월(515년 음2월) 이 달 沙都嶋(거제도로 추정)에 이르러 伴跛人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 데 없음을 전해 들었다. 物部連은 水兵 5백 명을 이끌고 곧바로 帶沙江으로 나아갔으며 文貴장군은 신라로부터 갔다. 
 
伴跛의 擧兵征伐 
9년 여름 4월(515년 음4월) 物部連이 帶沙江에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伴跛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했다. 옷을 벗기고 가지고 간 물건들을 빼앗고 막사를 모두 불태우자, 物部連 등이 두려워 도망해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汶慕羅에 머물렀다.
 
百濟가 己汶에서 物部連을 위로
10년 여름 5월(516년 음5월) 백제가 *前部의 木刕不麻甲背를 보내어 物部連 등을 己汶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끌어서 나라로 들어왔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옷과 斧鐵·옷감을 내어 國物에 더하여 조정에 쌓아놓고 은근하게 위로했으며 상과 祿이 매우 많았다. 
 
*前部 : 백제의 王京의 행정구획은 上(東), 前(南), 中, 下(西), 後(北)의 5部로 구분되고 다시 部는 각기 5巷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前部는 바로 王京의 5部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믿어진다.
 
百濟가 己汶의 땅에 대해 謝禮함. 五經博士 段楊爾를 漢高安茂로 교체 
10년 가을 9월(516년 음9월) 백제가 州利卽次장군을 보냈는데 物部連을 따라 와서 己汶의 땅을 내려준 것에 사례하였다. 따로 五經博士 漢高安茂를 보내어 博士 段楊爾와 교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청에 따라 교대시켰다.
 
百濟와 高麗의 來朝 
10년 9월 戊寅 (516년 음9월 14일)  백제가 灼莫古장군과 일본의 斯那奴阿比多를 보내었는데 고려의 사신 安定 등이 따라와 來朝하여 우호를 맺었다. 
 
百濟 武寧王의 죽음 
17년 여름 5월(523년 음5월)  백제의 王 武寧이 죽었다.
 
百濟太子 明의 즉위
18년 봄 正月(524년 음1월) 백제의 태자 明(성왕, 明王, 聖明王)이 즉위했다.

磐井이 新羅의 요청으로 南加羅·탁기탄(㖨己呑)를 任那에 합하는 것을 방해함 

21년 여름 6월 壬辰 초하루 甲午(527년 음6월 3일) *近江毛野臣이 군사 6만을 이끌고 任那에 가서 신라에게 멸망당한 南加羅(김해의 본가야)·㖨己呑(경북 慶山 또는 경남 密陽, 靈山으로 비정)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 때 筑紫國造 磐井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꾸물거리다가 해를 넘겼다.

 

일을 이루기 어려울까 염려하며 늘 틈을 엿보았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磐井의 居所에 뇌물을 보내어 毛野臣의 군대를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磐井이 火와 豐 두 나라에 세력을 뻗쳐 직무를 행하지 못하게 했다. 밖으로는 海路를 끊어 고려·백제·신라·임나 등의 나라에서 해마다 조공을 바치는 배를 꾀어서 이르게 하고, 안으로는 임나에 파견되는 毛野臣의 군대를 막고 무례하게 말하기를,

 

“지금 使者가 된 사람은 전에 나의 동료로서 어깨를 맞대고 팔꿈치를 부딪치며 같은 그릇에 함께 밥먹던 자이다. 어찌 별안간 사신이 되어 나로 하여금 자기 앞에 스스로 엎드리게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드디어 싸우고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교만하게 스스로 뽐내었다.

이 때문에 毛野臣은 길이 막혀서 중도에서 지체했다. 천황은 大伴大連金村과 物部大連麤鹿火·許勢大臣男人 등에게 “筑紫의 磐井이 반란을 일으켜 西戎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누가 장수가 될 만한가”라고 조를 내렸다. 大伴大連 등이 모두 “正直하고 어질고 용감하며 兵事에 능통한 것은 지금 麤鹿火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라 아뢰었다. 천황이 “좋다”라고 하였다.
 
*近江毛野臣 :  近江毛野臣은 529년부터 530년까지 安羅에서 활약했는데 그는 大和조정이 가야지역에 파견한 최초의 ‘倭臣’이었다. 원래 近江씨는 武內宿禰의 후예씨족인데, 近江毛野臣은 역사상 활약하는 최초의 近江씨라고 한다. 近江毛野臣에 관해서는 그를 大和王朝로부터 파견되어 加耶經營에 종사한 官人으로 보기도 하고, 또 大和王朝의 파견으로 出兵하여 安羅에 任那日本府를 성립시킨 공훈을 세운 인물로 보기도 하며, 大和王朝의 단순한 使臣이나 大和政權과는 별개의 倭로부터의 파견관으로 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新羅에게 ~ 㖨己呑 : 南加羅는 김해의 本加耶를, 㖨己呑은 경북 慶山 또는 경남 密陽, 靈山으로 비정된다. 김해의 本加耶가 신라에 복속되는 것은 사실 532년이므로 『日本書紀』의 이 기사는 잘못된 것이고 부정확한 기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㖨己呑이 신라에 항복한 것도 529년을 전후한 2~3년 사이의 어느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百濟의 加羅 多沙津 이용 요청 
23년 봄 3월(529년 음3월)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穗積押山臣에게 이르기를 “무릇 조공하는 使者는 늘 嶋曲(바다 가운데 섬의 굽은 해안)을 피하느라 매번 風波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젖어서 모두 상하여 보기 흉합니다. 加羅의 多沙津(河東)을 臣들이 조공하는 나루길로 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押山臣이 듣고 아뢰었다. 

 

百濟에게 多沙津을 준 것에 대한 加羅의 불만. 加羅와 新羅의 연합 
23년 3월(529년 음3월) 이 달 物部伊勢連父根과 吉士老 등을 보내어 (多沙)津을 백제왕에게 내려 주었다. 이에 加羅王이 勅使에게 이르기를 “이 津은 官家를 둔 이래로 臣의 조공하는 나루터였습니다. 어찌 갑자기 바꾸어서 이웃나라에 줄 수 있으며 처음에 봉해 주었던 것을 어길 수 있습니까”라 하였다. 勅使 父根 등이 이 때문에 바로 줄 수 없어서 大嶋로 되돌아 왔다가 따로 錄史를 보내어 결국 扶餘(백제를 지칭)에게 내려 주었다.

 

그러자 加羅가 신라와 한 편이 되어 일본을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 王女를 아내로 맞아* 드디어 자식을 두었다. 신라가 처음에 왕녀를 보낼 때에 100人을 함께 보내어 왕녀의 從者로 삼았다. 받아서 여러 縣에 나누어 두고 신라 衣冠을 착용하게 했다.

 

*阿利斯等이 복장을 바꾼 것에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어 되돌아 가게 했다. 신라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생각을 바꾸어 왕녀를 되돌아 오도록 하려고 “전에는 너희들의 요청을 받아 우리가 문득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와 같으니 왕녀를 돌려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加羅의 己富利知伽가 “夫婦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자식이 있으니 버리고 어찌 가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신라는) 마침내 길목의 刀伽·古跛·布那牟羅의 3城을 쳐부수고 또 북쪽 경계의 *5城을 쳐부수었다. 
 
*가라왕은 ~ 아내로 맞아 : 『三國史記』 法興王 9년(522) 3월조에 加耶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婚姻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伊湌 比助夫의 누이동생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의 가야국왕은 대개 大加耶의 王으로 보고 있는데 大加耶王이 522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신청한 것은, 512년에서 513년에 걸쳐 백제가 倭兵의 지원을 얻어서 이른바 任那의 4縣, 2地에 진출하였으므로 백제에 대한 견제를 목적으로 신라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고 이 해된다.

 

*阿利斯等 : 뒤의 4월조에 보이는 任那王 己能末多干岐를 阿利斯等이라고 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동일인으로 믿어지고 있다. 阿利斯等이라는 이름은 垂仁天皇 2년조의 一書에 나오는 都怒我阿羅斯等의 傳說이 있고 敏達天皇 12년 7월조에 火葦北國造 阿利斯登의 아들 百濟人 達率 日羅 등의 예가 있다. 阿利斯等과 己富利知伽를 동일인으로 보고 둘 다 이름이 아닌 加羅王 또는 執權大臣의 位號 또는 尊稱으로 보는 설이 있으며, 己富利知伽를 加羅의 大邑君 또는 王으로 보고 阿利斯等을 加羅에 있던 日系官人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같은 계통의 位號를 쓰는 별개의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阿利斯等은 繼體紀 24년 9월조에 보이는 阿利斯等과 동일 인물로 창원 일대에 있던 在地勢力家로서 卓淳國王 또는 그에 버금가는 유력자였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刀伽·古跛·布那牟羅 ~ 5城 : 대개 뒤의 24년 9월조에 나오는 백제·신라가 함락시킨 5城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이를 대구에서 昌寧에 걸치는 지역이라고 보아 왔다. 그러나 최근 3城과 5城을 昌原 북부지역으로부터 낙동강 對岸의 靈山, 密陽일대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도 있다. 한편 이 시기『三國史記』 법흥왕 11년(524)조에 “왕이 남쪽 경계에 巡幸하여 地境을 개척하자 加耶國王이 來會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3城과 5城을 攻略한 主體를 신라가 아니라 加羅의 己富利知伽의 행위로 보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