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일본의 역사- 한반도 관련 기록들.1 -신공황후.3

청 설모 2013. 8. 23. 14:49

6.新羅의 격파와 가야7國의 평정. 百濟와의 우호(千熊長彦과 百濟王의 맹세)

 

다음 글은 부경대 이근우교수의  논문임

 

「神功紀」 가라 7국 정벌 기사의 성격에 대하여     

                                                                                                  이근우 (부경대)

가야7國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條에는 弁韓 12개국이 실려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12개 이상의 가야 소국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12개 이상의 가야 소국이 있었다는 것이 고대사 연구자들의 상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시간적으로 보면 변한 12국에서 역시 비슷한 수의 가야 소국이 4, 5세기 대를 거쳐 6세기 대 초반까지 존재하였다.

김해의 남가라국이 멸망하는 것이 532년, 고령의 가라국이 멸망하는 것이 561년이다. 함안의 안라국도 고령의

가라국이 멸망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멸망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가야니 6가야니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가야 소국들이 모두 멸망한 다음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후삼국시대의

상황에 굴절된 이후, 고려시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단편적인 가야 여러 나라에 대한 기억을 끌어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공기에는 가라 7국만을 언급하였다. 신공기의 기사가 실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의 여부는

이처럼 7국만을 언급한 것이 역사적인 실제인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일과 결부되어 있다.

 

1) 加羅 7국

神功紀의 三韓 정벌기사에서는 고려시대의 5가야 내지 6가야나, 3세기 대의 변한 12국, 혹은 12개 이상의 소국이 아니라,

가라 7국을 언급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繼體 欽明紀 등에서 12개 이상의 소국을 언급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비자벌,

탁순, 탁, 남가라, 가라, 안라, 다라의 7국만을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존재하였던 변한 및 가야 소국이 12개 이상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고려시대의 5-6가야 전승과 마찬가지로 7개의 가야 소국을 정벌했다는 내용 또한 특이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7개의 소국만 정벌했다고 기록했는지를 문제 삼은 연구는 많지 않았다. 막연히 이

7국이 가야 제국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긴 듯하다.

 

?삼국유사?의 5가야 내지 6가야의 전승이 후삼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성립된 인식인 것처럼, 가라 7국 전승 역시 특정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의 문제를 또 다른 시점에서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왜 신공기에는 가라 7국만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하였을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정벌과정에서 7개의 가야 소국이

동일한 경로 상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나라만 기록되었을 가능성이다. 우선 이들 나라의 위치를 생각해 보자. 가라 7국으로

거명된 나라들 중에서 제일 먼저 比自㶱이 있다. 이 국명은 의심의 여지없이 ‘빛벌’을 음차한 것으로, 非知火 比斯伐, 非火와

동일한 용법인 것으로 보인다. 그 위치는 현재의 ‘창녕’이다. 南加羅는 현재의 김해에 있던 가야국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김해의 가야국을 南加羅라고 한 시기가 문제가 될 것이다. 南加羅라는 용법은 고령의 통칭 대가야국 당시의

 ‘(大)加羅(國)’이 위세를 떨친 이후에 일반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령의 ‘加羅’의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479년에 중국 南齊 遣使를 중요한 획기로 볼 수 있다. 고령이 ‘加羅’로 성장하는 것은 늦으면 5세기를 넘어선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南加羅라는 용어가 神功紀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 기사의 원자료나 원자료에 담겨 있는

인식이 5세기 이후의 것임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탁國인데, 이 나라는 위치를 확정할 만한 단서가 부족하다. 이어서 安羅와 多羅로, 각각 현재의

함안과 합천 지역에 있었던 나라로 보는 데 큰 문제가 없다. 한편 卓淳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창원, 대구, 영산 등으로

견해가 나누어지고 있는데, 필자는 이미 창원으로 보는 설에 左袒한 바 있다. 백제가 倭로 건너가기 위해서 내륙지역에서

倭로 가는 길을 물었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또 반대로 倭가 가야의 여러 나라를 공격하는 집결지로 내륙을 선택하였다고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倭가 가야 여러 나라를 정벌하였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일찍부터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던

倭가 대구나 영산같은 곳에서 倭兵을 결집시켜 공격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탁순은 창원이며

현재 성산패총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에 성곽의 흔적도 있어서 그곳을 중심지로 한 골포국이 탁순으로 이름을 바꾼 게 아닌가 생각한다.

 

탁국을 제외한 나머지 6나라의 위치를 보면 해안가의 김해(南加羅), 창원(卓淳), 내륙인 창녕(比自㶱), 함안(安羅), 고령(加羅),

합천(多羅)이다. 만약 신공기의 기록순서가 의미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가라 7국을 정벌한 주체가 백제이든 왜이든 간에 대단히

이상한 경로를 밟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창원에서 시작된 공격은 일단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창녕을 치고 다시 원점인

창원, 그리고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탁국, 그리고는 김해. 이어서 다시 내륙 깊숙이 자리한 고령, 다시 창원에 인접해 있다고

할 수 있는 함안,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령에 인접한 합천을 공격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러한 공격루트는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7국의 배열순서는 공격한 순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7국은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2) 가라 소국들에 대한 다양한 기재

神功紀에 열거된 7국의 이름은 분명히 다른 사례들과 구별된다.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을 통해서 12개 이상의 가야 소국이

확인되는가 하면, ?일본서기? 자체에서도 10개의 나라가 있었다고 기록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欽明 23년

춘정월조에 의하면, “신라가 任那官家를 쳐서 멸하였다”고 하고 이 기사에 대한 주석에서는 “총괄해서 말하기를 任那라고 하며,

따로 말하면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湌國 稔禮國으로 모두 10개 나라”라고 하였다.

 

이 10개의 나라에도 이상한 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신공기의 7개 나라와 비교하면 비자발, 탁순, 탁국, 남가라가 빠져있다.

이 4개의 나라는 가야가 아니었을까? 김해의 南加羅는 그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분명히 加羅로 불리었으며 가야 여러 나라

중에서 대표적인 나라였다. 卓淳도 창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골포국을 계승한 나라였다고 생각한다면 의문의 여지없이

가야의 일원이다. 탁국도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른바 任那 부흥회의에서 거론된 나라의 하나이므로 당연히 가야의

일원이다. 결국 임나부흥회의에서 거론된 나라들이 임나의 구성원에서 빠져있는 셈이다.

 

그런데 神功紀의 7국으로 거론된 나라 중에서 4개의 나라가 흠명 23년조에서 나란히 빠져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들 4나라 중에서 남가라 탁순 탁의 세 나라는 임나부흥회의 기사 속에서 판단할 수 있는 바와 같이 531년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에 편입되어 버린 나라들이다. 나머지 비자발(빛벌) 역시 낙동강의 동안에 위치해 있었던 까닭에 한발 앞서 신라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흥왕 척경비가 세워진 것은 561년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신라에 종속 혹은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欽明 23년조에 任那로 기록되지 않은 4나라는 530년 무렵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560년대 경에

멸망한 여러 나라와 구별하였던 셈이다. 결국 가라 7국 중 4나라는 신라에 일찍 편입되었던 나라들이며, 그래서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나라의 기재순서는 정벌의 순서나 공격루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어떤 시점에서

이미 신라에 속해 있었던 나라들이다.

 

이에 대해서 加羅 安羅 多羅는 어떨까? 이들 나라들은 南加羅와 더불어 가야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나라들이자, 南加羅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도 여전히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존재하였던 나라들이다. 또한 신라와 마찬가지로 ‘羅’를 국명의 일부로

쓰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新羅와 대등하다는 의식을 표출하고 있었던 나라들이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점에서 가야를

대표하는 나라들이자 동시에 아직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나라들이다.

 

결국 加羅 7국에서 거명된 나라들은 신라에 병합된 나라들과 신라에 병합되지 않은 채 존속하고 있었던 가야의 대표적인

나라인 셈이다. 神功紀의 가라 7국은 적어도 남가라 탁순 탁 및 비자벌이 신라로 편입된 이후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신공기의 가라 7국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欽明 23년조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나라들도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남원에 있었던 己汶, 섬진강 하류의 帶沙,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언급된 바 없지만 사천의

史勿 등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들 나라는 5세기 말부터 530년 경 사이에 백제에 편입된 지역이다. 이들 나라는 가라 7국

기사에서도 임나 10국 기사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가야 여러 나라들에 대한 기술이 이렇게 편향성을 나타내는 것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가야에 관한 내용들이 대부분

백제계통의 사료라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가야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백제의 인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으로 보이는 己汶, 帶沙, 史勿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가라 7국 기사이든 임나 10국 기사이든 간에 그것이 가야 제국 전체를 언급한 것은 아니다. 임나 10국 기사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 신라에 의해 멸망한 비자벌, 탁순, 탁, 남가라, 그리고 백제에 의해서 멸망한 기문, 대사, 사물이 빠져 있다.

가라 7국 기사에서는 530년 전후에 신라에 편입된 것으로 생각되는 4국과 530년 이후에도 존속하고 있었던 가야 제국 중

대표적인 나라들이 거명되었을 뿐이다.

 

결국 가라 7국의 이름은 왜이든 백제이든 간에 실제로 정벌한 나라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들 국명은

분명히 어떤 인식에 의해서 선택된 것들이다. 4나라는 신라에 의해서 멸망 혹은 흡수된 나라이고, 나머지 세 나라는

가야제국을 대표하는 나라이다. 게다가 이러한 기록은 백제측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 원사료에 의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가라 7국은 백제가 영토로 편입하고 싶은 가야 영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신라에

편입된 가야지역, 그리고 여전히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가야 제국 중 대표적인 강국 3나라를 정복하고 싶은 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뿐이다.

현재 지명

가라 7국

임나10국

繼體欽明紀

우륵12곡

신라 편입

백제 편입

창녕

비자발

비자발

창원

탁순

탁순

김해

남가라

남가라

고령

加羅

加羅

상가라도

함안

安羅

安羅

합천

多羅

多羅

하가라도

의령 부림

斯二岐國

爾斯

함양

卒麻國

고성

古嵯國

(古嵯)

진주

子他國

子呑

합천 초계

散半下國

沙八兮

산청 단성?

乞飡國

의령

稔禮國

남원

下奇物

(상)기문

장수

上奇物

(하)기문

하동

達巳

대사

사천

思勿

(사물)

거창

居烈

고성 상리?

勿慧

사천 곤양?

寶伎

합천 대병?

師子伎

밀양

推封?

 

만약 백제가 실제적으로 가야지역을 정벌하고자 하였다면 당연히 그 국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또 현실적으로 영유하고

있는 지역들은 넣은 게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남원, 하동, 사천 등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또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김해, 창원, 창녕보다는, 좀더 손쉬운 곳에 있는 진주, 고성, 거창, 산청 등이 고려되었을 것이고, 그 지역부터 공격하였을

게 분명하다.

 

倭가 이 지역을 정벌하고자 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바다에서 접근하기 쉬운 고성, 사천, 하동 등이 먼저 고려되었을

것이고, 내륙 깊숙이 위치한 창녕이나 고령 합천 등을 공격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라 7국의 이름은 현실적인 군사적 작전과는 무관하게, 어떤 시점에서 자신의 영토로 편입하고자 한 희망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 나라의 이름들은 백제의 인식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시점은 비자발

탁순 탁 남가라가 신라에 편입된 사실이 확정된 이후임이 분명하다. 임나부흥회의에서 거명되고 있는 나라 이름들이

가라 7국에서 역시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繼體 欽明代에 임나 재건이 문제되는 시점과 시간을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4세기 중엽 단계에 내륙의 가라(고령)이나 다라 등이 백제 혹은 왜가 정벌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구체적인 실체를 갖추고 있는 세력이었는지도 문제가 될 수 있다.

 

3. 남만 침미다례의 정벌

神功紀의 기사 속에 6세기 이후의 사실 및 백제의 인식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多沙城의 존재이다. 神功紀에 따르면 多沙城을 하사하여 往還의 역로로 사용하도록 하였다고 되어

있다(神功 50). 그러나 繼體 欽明紀의 기사에 따르면, 繼體 欽明代에 들어서 帶沙江(섬진강)을 남하한 백제가

帶沙(多沙城)을 점령하였고, 이에 대해서 高靈의 加羅가 반발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단계까지 南原(己汶) 지역이 백제의 영토가 아니었으므로 4세기 중엽 단계에서 섬진강을 이용하여 백제가 왜와

교통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백제의 영토가 되는 시점은 510년을 전후한 시기다. 그런데도 加羅 7국과 全羅道 지역

평정이 끝나자 곧 河東 지역이 백제의 영토가 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이 언저리의 기사를 정확한 연대를 동반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은,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자 신라왕 婆娑寐錦이 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보냈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婆娑寐錦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80-111년 사이에 재위한 임금으로 되어 있다. 물론 그 연대관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물왕의 아들인 微叱己知波珍干岐(未斯欣, 美海)와 동시대에 나타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미사흔은 5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에 활동한 인물이다.

 

이처럼 정확한 기년을 반영한 기사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전승을 조합하여 만든 것이 분명한 신공기의 내용 중에서 유독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의 연대와 구체적인 군사작전으로서는 신공황후의 가라 7국 평정과 전라도지역 평정을 존중해서,

근초고왕과 근구수가 가라 7국을 평정하고 전라도 지역을 평정하였다는 사실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일까?

 

파사매금이나 미사흔이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본측에 전승이 남아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초고왕과

근구수도 七支刀와 관련하여 일본에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신공황후가 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일단 가라 7국 평정기사 속에 등장하는 7국의 명칭은 6세기 전반의 실제 상황과 백제측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신공기의 기록에 따르면 가라 7국을 평정한 왜는 그 다음에는 군사력을 서쪽으로 돌려 古奚津에 이르렀으며, 南蠻 忱彌多禮를

도륙하여 백제에 주었다고 한다. 이때 백제왕 肖古(근초고왕)와 왕자 貴須(근구수)가 내회하였는데 이때 比利 辟中 布彌支

半古의 4邑이 스스로 항복했다고 하였다. 이 기사 역시 백제를 중심으로 한 기사라는 점은 침미다례(일본서기 고훈에서는

토무다레)를 남만으로 불렀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침미다례는 현재의 강진 및 그 주변으로 생각된다.

 

강진 해남 등과 같이 전라남도 해안의 최남단까지 백제가 그 지배력을 미치게 된 시기는 언제일까? 흔히 神功紀의 기사를

근거로 해서 근초고왕대에 백제가 전라남도 전역을 석권한 것처럼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추론은 타당한 것일까?

 

무엇보다 먼저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조에는 이 시대에 남쪽으로 군사력을 동원했다는 기사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물론 기록된 사실만이 진실은 아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도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근초고왕이

고구려와 교전하였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으나, 남쪽의 전라도지역으로 출정한 사실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점을

분명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둘째 ?일본서기? 神功紀의 기사를 근초고왕대의 사실로 전환해도 문제가 없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신공황후가 신라, 가야, 전라도 지역을 정벌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당시 왜의 사회적 발전단계로 보아 한반도를

정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백제가 가야 및 전라도 지역을 정벌한 사실은 ?일본서기? 神功紀에서

찾고자 한다. 이렇게 왜를 주체로 한 기사를 백제로 주체로 한 사실로 바꾸어 읽어도 좋은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백제가 4세기 중엽에 전라도 남단까지 그 지배력을 미쳤다는 증거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

? 백제본기에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과 부합된다. 그런데도 문제가 많은 神功紀의 기사를 가지고 백제가 이 지역을 이 무렵에

공격해서 항복시켰다고 보는 입론은 성립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일본서기?는 신공황후의 행적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을 백제의 군사활동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하다. 또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은 6세기 초반이 가야지역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내용일 뿐, 결코 4세기

중반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일본서기? 신공기의 사료만을 근거로 근초고왕대에

대대적인 전라도 정벌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입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전라도 광주, 담양, 나주, 해남, 강진 등 전라남도 해안에 가까운 지역이

언제 백제의 영토가 되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문헌사료를 통해서 판단하는 한, 백제가 광주지역에 도달한 것은 동성왕대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삼국사기?의 기사를 다시 확인해 보기로 하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조에 따르면 476년 여름 4월에 耽羅國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를 은솔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어서 동성왕 20년(498)에는 耽羅(耽羅는 곧 耽牟羅이다)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으므로,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광주)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므로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이 기사를 제주도의 탐라국에 대한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이해를 방해하는 사료가

있다. 첫 번째는 ?일본서기? 繼體紀의 기사이다. 계체 2년(508년, 무령왕 8년) 12월 기사에서는 남해 가운데 耽羅人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사에서는 탐라가 남해에 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기사 속의 탐라가 제주도인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계체 흠명기의 백제 관계기사는 「百濟本記」라고 하는 일정한 사료적인 가치를 지닌 사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이 기사도 당연히 사료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또 임나지배 등 ?일본서기? 편찬의도와도

무관한 내용이므로 더더욱 객관적인 사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백제측의 자료에 바탕으로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 기사는 508년에야 비로소 제주도가 백제와 처음으로

교통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476년에 사신을 파견해 온 耽羅는 어떻게 된 것일까? 또 498년에 동성왕이 무진주까지

친정에 나서자 죄를 빌었다고 하는 탐라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사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애장왕대에 탐라국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탐라국을 별개의 국가로 인정하였다는 뜻이다. 즉 신라에

속해 있는 지방이 아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도 탐라국이 이러한 상황이었다면, 백제가 과연 제주도를 지방으로

지배할 수 있었을까?

 

耽羅國主佐平徒冬音律(一作津)來降. 耽羅自武德以來臣屬百濟. 故以佐平爲官號. 至是降爲屬國

哀莊王 二年 冬十月 大寒松竹皆死 耽羅國遣使朝貢

文周王 二年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拜使者爲恩率

東城王 二十年 八月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乃止(耽羅卽耽牟羅)

 

이처럼 탐라와 백제의 관계에 대한 기사들이 몇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문주왕과 동성왕대의

탐라를 제주도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근초고왕대에 이미 전라남도 남단까지 백제의 영토화 혹은

속국화되었다는 전제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문헌사료를 통해서 분명하게 입증된 내용이 이라고 하기 어렵다. ?일본서기

? 신공기의 삼한정벌기사를 부정하는 과정에서, 신공기의 삼한정벌기사를 이용하여 백제의 가라 정벌 및 호남지역 정벌이라는

역사상을 이끌어낸 것이다.

 

사료적 근거가 빈약한 근초고왕의 호남지역 정벌이라는 사실을 일단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문주왕과

동성왕대의 탐라(탐모라)에서 관한 기사도 다르게 읽을 수 있다.

필자는 이미 문주왕대와 동성왕대에 등장하는 탐라(탐모라)는 해남 강진 일대에 있었던 남만 침미다례와 동일하며, 그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동성왕 20년조의 탐라에 대하여 ‘탐모라’라고 하는 주를 단 것으로 보았다. 즉 흔히 생각하는 제주도의 탐라와

동성왕 20년조의 탐라가 다른 실체라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탐라(탐모라)’가 제주도가 아니라, 해남 강진과 같이 전남 해안의 남단이었다고 이해한다면,

?일본서기? 계체기의 남해중 탐라가 백제와 처음으로 508년에 통교했다는 기사도 제 자리를 찾게 된다. 또한 제주도의

탐라와 백제의 관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기도 한 까닭에 통교를 하고 또 제주도의 탐라가 백제의 屬國인 관계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제주도의 탐라 국주가 佐平이라는

백제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도 탐라의 특별한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백제의 지방에 좌평이 파견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주도의 탐라는 백제에 대해서 반독립적인 위치를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탐모라는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을 통해서 죄를 비는 등 직접적인 지배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탐모라

탐라

위치

南蠻 강진/해남

南海中(제주도)

神功紀

枕(耽)彌多禮

문주왕 2년(476년)

方物을 바침

동성왕 20년(498년)

貢賦를 바치지않음

武珍州 親征 乞罪

계체 (508년)

백제와 初通

武德 이래(618년~)

백제에 臣屬

문무왕대

탐라국 사신

渡唐

문무왕대

신라 屬國

문무왕대

탐라국 經略

애장왕

遣使 朝貢

백제

冬音縣․塞琴縣

편제되지 않음

신라

眈津縣․浸溟縣

편제되지 않음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서 이야기한다면, 476년은 한성의 백제가 그 왕과 도성을 잃고, 나라의 재건에 부심하던 때였다.

특히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상황이었으므로, 무엇보다도 지방세력의 동향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마침 강진 해남 지역의 지방세력이 스스로 方物을 바쳐 종속적인 자세를 취하였다고 하는 것은, 문주왕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다 건너에 있는 제주도였다고 한다면, 그 의미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498년에 탐모라가

貢賦를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성왕이 親征에 나서게 되는데, 동성왕이 무진주에 이르자 탐모라가 죄를 빌었다고

하였다. 무진주는 현재의 광주 지역으로 이 지역까지 이르렀는데 제주도가 죄를 빌었다는 것도 석연치 않다. 제주도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목포나 강진 해남과 같은 해안까지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광주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사태를 심각히 여기고 죄를 빌었다고 한다면, 이때의 탐모라는 광주에서 육지로 이어진 곳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동성왕의 친정을 통하여 광주를 비롯한 해남 강진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권이 확립되자, 해남 강진지역과 교류를 하고

있었던 제주도의 탐라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역의 상대가 바뀌게 된 것이다. 해남 강진의 백제의

지배지역이 된 이후 10년이 지난 508년에, 탐라는 백제와 처음으로 통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탐라와 백제의 관계는 당연히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탐모라와 백제의 관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관계는

어디까지나 通交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통일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시대까지도 제주도는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한 국가였으며,

신라나 고려에 대하여 조공을 바치는 조공국이었을 뿐, 신라나 고려의 직접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문무왕대에도

탐라의 國主가 와서 항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國主라는 표현은 백제나 신라의 경우에 서로 상대국의 왕을 國主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徒冬音津을 탐라국의 왕으로 인정한 것이다. 또한 탐라가 屬國이 되었다고 표현하였을 뿐,

지방관을 파견하지는 않았다. 801년에도 탐라국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遣使朝貢)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탐라국 출신은 빈공거 즉 외국인이 치르는 과거시험을 치렀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이러한 탐라국의 지위를 생각해 보면, 동성왕의 친정을 계기로 탐라가 백제의 지방으로

편입되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통교 즉 외교적인 관계를 맺고, 조공을 바치는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탐라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문주왕 내지 동성왕대에 제주도의 탐라국이 복속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4세기 중엽에 이미 전라도지역이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는 판단이 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라 7국 기사의 검토에서 알 수 있었던 바와 같이, 가라 7국

이라는 관념은 6세기 초반의 관념이다. 이제 이와 맞물려 남만 침미다례 및 비리 벽중 등의 4읍이 항복하였다는 기사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하자.

 

한편 南蠻 침미다례에 대해서 ?일본서기?가 강한 적의를 가진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가 사용하고 있는 ‘屠’는 달리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도살 도륙이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 도는 동물을 잡는다는 뜻이다. 사람을 죽이더라도 동물을 죽이듯이 죽였다는 뜻이다. 또한 이때 등장하는

나라이름이나 지명에 어디에도 특별한 수식이 붙어 있지 않은데 대해서, 유독 침미다례에 대해서만 南蠻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강렬한 적의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적의는 南蠻 즉 남쪽이라는 방향성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가

품은 적의라고 생각된다. 동시에 그 결과로 이 지역은 백제의 강력한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과연 바다

건너에 있는 제주도에 대해서 백제가 그렇게 강렬한 적의를 느꼈을 필요가 있을까? 제주도의 경우에는 육지의 물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또 교역을 통해서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육지의 어떤 지역과 심각한 대립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 광주 나주 강진 해남 등의 지역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추진한 지속적인 남하정책에 끝까지 저항하는

세력이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남단에 위치한 해남 강진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했을 수도 있다.

 

4. 木羅斤資와 木滿致

가라 7국 평정에 어느 정도 사료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을 들자면, 木羅斤資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가라 7국

평정기사를 백제에 의한 정벌로 보는 견해에서 주요한 사료적인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백제장군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木羅斤資의 존재다. 그렇다면 목라근자의 활동연대를 확정할 필요가 있다. 그가 의심의 여지없이 4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이어야만 백제가 가라 7국을 평정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조건 하나가 중촉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활동연대에는 의문이 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목만치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목만치는 475년 문주왕이

남하할 때 그를 보필하였다고 전한다. 만약 4세기 중엽에 목만치의 아버지인 목라근자가 활동하였다면, 목만치는 그의

아버지가 활동한 시기보다 무려 100년 뒤에 활동한 셈이 된다. 그래서 산미행구는 목라근자의 활동시기를 다시 60년 내려서

429년으로 편년한 바 있다. 그들이 부자관계라는 기록이 옳은 것이라면 木羅斤資의 활동시기는 5세기 전반으로 조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목라근자가 백제의 장군이라도 하더라도 그가 4세기 중엽의 가라 7국 평정 기사의 주인공일

수는 없는 셈이다.

 

목라근자의 기사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서기?의 수정 기년으로 382년에도 목라근자가 등장한다.

「백제기」에서 말하기를, “임오년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았다. 귀국은 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가 미녀 두 사람을 아름답게 꾸며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였다. 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아들이고,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왕인 己本旱岐 및 그 아들 百久至 阿首至 國沙利 伊羅麻酒 爾汶至 등이 그 인민을 거느리고 백제로 달아났다.

백제가 두터이 대우하였다. 가라국왕의 누이 旣殿至가 大倭로 와서 아뢰어 말하기를, ‘천황이 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미녀를 받아들여 (명령을) 버리고 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우리나라를 멸하였습니다.

형제와 백성들이 모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근심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와서 아룁니다’고 하였다.

천황은 크게 노하여 곧 목라근자를 보내어 병사들을 이끌고 가라에 모여서 그 사직을 회복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백제기에서 말하기를,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쳤을 때 그 나라의 여자를 취하여 낳았다. 그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를 오로지 하였다. 우리나라(백제)에 들어와서 貴國(왜)을 왕래하였다. 천조(왜)의 명령을 받들어 우리나라(백제)의

정사를 장악하였다. 권세의 중함이 세상에 미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 불러들였다.(414년)

 

이미 지적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일본서기?에는 본문과 주에서 비유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재위한 기간은

427년부터 454년이다. ?일본서기? 웅략기에서는 ?백제신찬?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 시기의 왕을 비유왕에서 개로왕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신찬?에서 말하기를 기사년(429년), 개로왕이 섰다. 천황이 阿禮奴跪를 보내어 (백제에) 와서 여자를 찾게 하였다.

백제는 慕尼夫人의 딸을 아름답게 꾸며서 適稽女郞이라고 하고 천황에 공진하였다.

비유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는 정묘년(427년)과 2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개로왕이 즉위한 455년과는 너무 큰 거리가

있으므로, 이는 비유왕의 즉위기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닌 것처럼, 목라근자의 7국 평정기사도 사실이 아니며,

전체적으로 삼한의 복속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종류의 사료를 이끌어 와서 만든 내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라근자에 의한 가라 7국 평정이 聖王 당시의 역사인식이라는 견해도 이미 제출되어 있다.

池內宏, ?日本上代史の一硏究?, 中央公論美術出版, 1970. p.45

 

맺음말 - 신공기 삼한정벌기사의 재구성

신공기 삼한정벌기사의 핵심은 왜가 신라를 정벌하고, 이어서 가라 7국을 평정하고, 다시 서쪽으로 군사를 돌려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치자, 비리 벽중 등의 지역이 스스로 항복하였으며, 남만 침미다례를 백제에 하사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근년의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나 문헌사료에 대한 새로운 검토를 통해서 전라남도지역이 4세기 중엽 경에 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거나 백제의 지배영역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들이 희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리,

벽중, 침미다례, 고해진 등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 단계적으로 백제로 편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가 광주 나주 강진 해남으로 진출하던 시기로 생각되는 5세기 말 경에는 남원 등 전라도 내륙지방을 거쳐 510년대에는

하동, 530년 경에는 함안까지 진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남원(己汶), 하동(帶沙, 多沙), 진주(子他), 사천(史勿) 등의

백제의 통제 하에 두고 郡令 城主를 파견하였다.

 

그 결과 가야지역은 서쪽으로는 백제가 남해안 방면으로 진출해 옴에 따라 함안 이동 지역과 내륙의 거창, 합천, 산청,

고령, 의령 등으로 축소된다. 한편 동쪽에서는 신라가 그 영역을 확장하여, 530년 경에는 김해 일대를, 또 늦어도 55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창녕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기문, 하동, (사천, 진주)을 지나 함안의 안라국 국경까지 진출한 백제는 새롭게 획득한 영토를 南韓이라고 하고,

郡令 및 城主를 파견하였다. 즉 이 지역을 백제의 행정구역으로 편제하여 직접적으로 지배하고자 한 것이다.

남한지역의 군령 성주 파견 문제는 안라국 고당회의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논의되고, 이 지역의 백제 지방관을

철수시켜줄 것을 가야 측에서 요구하였으나, 백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안라까지 끌어들여 김해지역을

거쳐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지역은 아직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하지 못한 여러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나라들이 바로 신공기의 가라 7국이다. 아직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安羅, 加羅, 多羅, 그리고 신라에 530년

이후 새로이 편입되어 있는 소국들 즉 남가라, 탁순, 탁이 언급되고 있다. 비자벌의 경우는 정확히 어느 시점에 신라에

편입되었는지 확정하기 어렵지만 창녕의 진흥왕비가 561년에 세워진 것을 보면 늦어도 550년대에는 신라에 예속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지역이 백제의 관심사가 될 수 있는 시기는 55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이러한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라 7국을 제외하고도 다른 여러 나라들이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다. 즉 백제로도

신라로도 편입되지 않은 소국들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들 소국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은 위의

표에서 정리된 내용을 참고하면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백제에 복속되지 않고 존속하고 있던 가야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라 7국 속에 이름이 없는 나라들 가운데 일부는 우륵 12곡에 보이는 나라들이다. 우륵 12곡에 나오는 나라들이

대가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의 일원이라고 한다면, 이들 나라의 경우는 가라와 다라를 언급함으로써 그 속에 포괄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신공기 가라 7국 정벌기사 속에 반영되어 있는 가야지역에 대한 가라 7국이라는 백제의 인식은 6세기 중엽 이후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가라 7국에 대한 인식은 백제가 남원으로부터 섬진강을 남하하여 하동, 진주를 거쳐

함안 지역까지 진출한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백제의 남한 진출 과정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는

「백제본기」의 서술내용 또한 주로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신공기의 한반도관계기사는 대부분 「백제기」에서 인용되었거나 그 내용을 바탕으로 述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백제기」는 목라근자와 목만치라고 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정리된 문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이미 필자가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신공기의 백제 장군 목라근자의 가라 정벌 기사가 반드시 사실인 지도 문제가 될 수 있고,

목라근자의 활동시기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 기사에 대하여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있는 상황에서, 신공기 기사의 일부만을 백제의 군사행동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문제가 많다. 신공기 기사의 핵심은 신공황후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신라를 공격한 이유와 과정은

그 나름대로 일관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지만, 가라 7국을 공격했다는 부분은 그 이유도 분명하지 않다. 탁순을

신라 공격의 거점으로 이용하고도 다시 탁순을 공격했다는 부분부터 그렇다. 마찬가지로 신라의 경우는 경주의 도성을

공격하는 일회적인 작전으로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경상남북도 여러 지역에 퍼져 있는 가라 7국을

평정한다는 것은 기사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한 측면은 가라 7국 평정의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대대적인 출병이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오랜 기간을 필요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공 49년 3월에 시작되어, 군사의 증파 요청, 이은 신라 정벌, 가라 7국 정벌, 남만 침미다례 도륙을 마치고

다시 백제왕과의 회맹 등이 모두 끝나고 황전별 등이 왜로 귀환한 것이 다음해 2월이다. 한반도에서 야마토 지역까지

왕래하는 데만 1달 이상 걸렸을 것이고, 왜에서 만약 군사를 더 파견하고자 했다면 이를 모집하고 필요한 배를 만드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둘째는 신공 49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성왕의 회고가 문제가 된다. 성왕은 근초고왕 근구수왕대의 일을 회고하면서,

“옛날 우리 선조 속고왕과 귀수왕이 옛날 (가야)의 한기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약속하고 이로써 형제가 되었다. 이에

우리는 너희들을 자제로 여기고, 너희들은 우리를 부형으로 여겼다.” “선조를 생각하면 옛날 한기들과 화친한 말들이

빛나는 해와 같은 바가 있다. 이후로 삼가 인호를 닦아 마침내 이웃나라에 돈독하여, 은혜가 골육보다 나았다.

좋게 시작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하는 것이 과인이 항상 바라는 바이다.”, 또 “옛날 우리 선조 速古王 貴須王의

시대에 安羅 加羅 卓淳 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서로 교통하여 두텁게 친호를 맺었으며 자제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교통하였다거나 화친을 맺었다고 하였고, 나아가서 백제와 가라 여러 나라들과 형제 부자와

같은 관계를 맺었다고만 하였으며, 군사적인 행동을 통해서 가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내용만 있다.

 

이 기사에 대해서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또 평정대상이 된 안라 가라 탁순이 일치하고 있음으로 가라 7국 평정이 사실임이

분명하다고 보는 논의도 있으나, 이는 분명한 사료로 불명한 사료를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다. 계체 흠명기의 경우에는

 「백제본기」가 주로 한반도관계기사의 출전이 되어서 당시 한반도의 상황에 대해서 극히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가라 여러 나라와 親好를 맺었다고 하는 내용도 성왕이 직접 발언한 것을 적은 것이다. 그밖에도 계체 흠명기에는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서 신공기의 전승은 백제와 왜의 통교사실을 말해주는 내용 이외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그래서

그 전승의 진위 여부를 따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체 흠명기의 내용이 과연 신공기의 내용을 입증해주는 자료로

쓸 수 있을까? 계체 흠명기의 기술을 중시한다면 근초고왕 근구수왕대에 있었던 일은 백제와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우호적인 통교관계를 맺은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과거에 백제가 가야 여러 나라와 통교를 맺었다고 하는 성왕의

외교적인 수사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백제의 무력이 下韓 지역에 파견되어 있고 군령 성주를

파견하여 직접 지배하려고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성왕은 보다 강경한 자세로 과거를 들추면서 이미 4세기 중엽부터 백제에

복속되어 있는 지경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조상을 언급하면서까지 과거에 있었던 실상을

왜곡하였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는 계체 흠명기의 내용이 실제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백제는 탁순으로 가서 왜와

통교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탁순의 중개로 왜와의 통교에 성공하고 있다. 그런 탁순을 돌아서서 바로 평정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을까? 또 당시에는 영산강 유역과 섬진강 유역에는 백제에 복속되어 있지 않은 세력들이 있었다.

이런 세력들을 뛰어 넘어서 바로 가라 7국을 평정하는 일이 용이하였을까? 오히려 그런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가라

여러 나라들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셋째, 신공 50년 5월에 久氐 등이 다시 왜에 오자, 신공황후가 久氐에게 한 이야기에서도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海西의 諸韓을 모두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또 왔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 諸韓이란 다름 아닌 東韓과

下韓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동한과 하한이 문제된 것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일이다. 東韓에서 특히 문제가 된 부분은

기문 즉 남원지역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하한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섬진강 하구에서 함안에 이르는 지역을 지칭하고 있다.

이 지역이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시기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인데 4세기 말에 신공황후가 백제에게 주었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또한 6세기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공황후의 물음에 久氐는 “天朝의 鴻澤이 멀리 우리 나라(弊邑)에 미치니, 우리 왕이 환희용약하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합니다. 그러므로 돌아가는 사신에 쫓아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비록 만세 이후라도 어느 해라고

조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황후는 다시 “너의 말이 참으로 착하니, 그것이 짐의 뜻이다”라고 하고,

多沙城을 다시 주어 왕래하는 驛路로 삼게 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신공황후가 주었다고 하는 多沙城은 이때 백제의 영역이 된 것이 아니다. 6세기 초에 이 지역이 백제와 가라 사이에

분쟁지역이 되었고, 가라국이 이 지역에 성을 쌓고 백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 지역이 완전히 백제의 영토가 된

것이 514년 3월 이후이다. 다사성의 연장선상에서 諸韓도 역시 문제가 된다. 계체 흠명기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가 하한

지역에 진출하는 것 역시 성왕 대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중국 사료와의 정합성도 문제가 된다. 백제가 왕후제를 실시하면서 충청도과 전라북도 일대에 왕후를 둔 시기도

5세기 중엽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梁職貢圖?에서는 반파 신라와 같이 기문과 같은 지역도 백제에 종속하고 있는

주변 소국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반파와 신라가 백제의 지배지역이 아닌 것처럼 상기문, 하침라도 백제의

영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양직공도?의 기술은 백제인에 의해서 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전라도 내륙지역으로

백제의 지배력이 미친 시기는 5세기 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신공기 49년의 기사를 백제가 주체가 된 한반도 남부 정벌이라고 읽으려고 할 때 다른 여러 사료들과 모순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본서기? 자체 내의 기사 사이에도 모순이 생기고, 중국 사료의 내용과도 모순이 생긴다.

 

그렇다면 가라 7국 정벌기사는 4세기 중엽의 사건으로 보기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주체가 ?일본서기?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왜인지, 혹은 우리 학계 일각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처럼 백제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가라 7국을 정벌하였다”는 내용 자체가 역사적인 사실일 수 없으며, 그것은 6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