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清寧天皇 白髪武広国押稚日本根子天皇 (길비계)
父 웅략천황 母 韓媛(仁德天皇과 迦具漏比賣의 딸 玉郞女)
清寧天皇은 근친결혼의 폐해가 나타난 것인지 태어날때부터 백발이었다.
자식은 없다.
웅략천황이 죽고나자 웅략천황의 아들 星川稚宮皇子가 길비왕국의 재현을 꿈꾸어 거병했지만, 大伴室大連、東漢掬直의
활약으로 패퇴하고, 吉備上道臣은 원군을 보냈지만 星川稚宮皇子의 죽음을 도중에서 알고 되돌려, 罰로서 山部를 빼앗기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大和国은 최초부터 통일국가를 표면상의 원칙으로 했는데 일본서기에서 大和国에게「 罰로서 山部를 빼앗기었다 」는 것은,
길비국이 길비왕국의 재현은 커녕 거꾸로 王制를 폐지당해 大和国에 병합되어 大和国에 편입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諱 白髪武広国押稚日本根子天皇「国을 넓혀」의 의미는 길비국을 大和国에 병합시킨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것이다.
23대 顕宗天皇 弘計天皇 (河內系)
父는 17대 이중천황의 아들 市辺押磐皇子、母는 ハエ姫(波曳姫 )、
皇后는 難波小野王으로 19대 윤공천황의 曾孫인 丘稚子王의 딸、仁德天皇의 皇后 磐之媛命의 子孫의 復活이다。
24대 仁賢天皇 億計天皇 (河內系)
23대 顕宗天皇의 同腹兄으로 顕宗天皇이 자식이 없으므로 황위를 잇는다.
황후는 웅략천황과 春日和珥臣深目의 딸, 童女君과의 딸, 春日大娘皇女
황후와의 자식은 高橋大娘皇女、朝嬬皇女, 手白香皇女、樟氷皇女、橘皇女,小泊瀬稚鷦鷯天皇(武烈天皇), 真稚皇女,
妃의 和珥臣日爪의 딸 糠君娘이 春日山田皇女 낳다.
諱 弘計天皇, 億計天皇은 「御家天皇」으로서 인덕천황의 장남 履中天皇의 子이기때문에 家系의 정당한 跡取의 天皇일 것이다。
25대 武烈天皇 小泊瀬稚鷦鷯天皇
諱 「小泊瀬稚鷦鷯天皇」은 「小果つ世鷦鷯天皇」으로서 武烈天皇은 조그만할때 죽어서 천황으로 되지 못한 詐欺의 천황이란
의미일 것이다.
万世一係의 사상으로부터 武内宿禰를 仁德天皇(大鷦鷯天皇)으로 하고
宋書의 倭의 五王을 의식하여 莵道稚郞子皇子、宗書의「讚」을 천황으로부터 빼고, 稚野毛二派皇子、宋書「興」도 천황으로부터
누락시켰기때문에 천황의 인원수가 부족하게되어 武烈天皇(小泊瀬稚鷦鷯天皇)을 천황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葛城氏와 大伴氏
葛城氏의 祖先 襲津彦은、日本書紀에서는 神功의 時代 新羅討伐의 장군으로서 派遣되고、 仁德天皇은 襲津彦의 딸 磐之媛을 皇后로
맞아들여 履中天皇、反正天皇、允恭天皇을 낳고、履中天皇은 襲津彦의 아들 葦田宿禰의 딸 黒媛을 皇后로 하여 市辺押磐皇子를 낳고,
市辺押磐皇子는 襲津彦의 曾孫(襲津彦의 孫 蟻臣의 딸)ハエ姫를 妃로하여 顕宗天皇、仁賢天皇을 낳게하고、雄略天皇은 允恭天皇의
아들 坂合黒彦皇子를 숨긴 葛城円大臣을 멸망시키고、葛城円大臣의 딸 韓姫를 妃로하여 清寧天皇을 낳게하고、襲津彦의 孫 玉田宿禰는、
교만부리다가 允恭天皇에게 살해당했다고 적혀있다.
나의 說에서는、磐之媛의 父는 景行天皇이기때문에、襲津彦은 景行天皇이 되고、또 黒媛의 父도 景行天皇이기때문에、葦田宿禰도
景行天皇이 되어 、襲津彦과 葦田宿禰는 同一人物이라고 생각된다.
韓姫는 景行天皇의 딸이지만、葛城円大臣은 景行天皇이 아니고、景行天皇의 자식이나 孫일 것이다。
仁德天皇(武内宿禰)은 反正天皇、磐之媛의 구테타로 살해되었다는 나의 설에서는、景行天皇과 八坂入媛의 자식
稚足彦命天皇(成務天皇), 五百城入皇子、忍之別皇子、五百城入姫 皇女(磐之媛)의 가운데 稚足彦命天皇(成務天皇)、
五百城入姫皇女(磐之媛)을 제외했기때문에 五百城入皇子、忍之別皇子가 葛城氏일 것이다。
葛城氏는 景行天皇과 八坂入媛의 자식들과 그 子孫으로서、忍之別皇子의 字의 意味로부터 딸 ハエ姫가 顕宗天皇、仁賢天皇을
낳은 蟻臣가 忍之別皇子이고、雄略紀分注에 玉田宿禰는 襲津彦(景行天皇)의 子라고 씌어있는 것으로부터 五百城入皇子일 것이다.
나의 修整系譜로부터 八坂入媛은 8代 孝元天皇과 尾張大海姫 와의 아들 八坂入彦命의 딸이므로、葛城氏는 尾張連과는 親戚이
되기때문에 襲津彦의 孫 玉田宿禰가 교만을 떨었을 때、允恭天皇은 尾張連吾襲을 玉田宿禰에게 사자로 보내고 있고、또 葛城氏는
奈良盆地東南部의 葛城、金剛山脈의 山麓을 본거지로 하고 있으므로 그 땅은 八坂入彦命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것이다.
大伴氏
仁德天皇(武内宿禰)은 反正天皇、磐之媛의 쿠테타로 살해되었다는 나의 說과、雄略天皇이 葛城円大臣을 멸하고 大伴連室屋、
物部連目을 大連으로 했다는 것에 따라、安康天皇과 葛城氏를 멸할즈음에 葛城에 원한이 있는 大伴氏와 物部氏의 힘을 빌렸다고
생각하는 나의 修整系譜로부터 8代 孝元天皇과 埴安媛(河內의 靑玉繋의女)와의 아들 武埴安彦命은 仁德天皇(武内宿禰)의
祖父에 해당하기 때문에 大伴氏는 武埴安彦命의 子孫일 것이다。
大伴室屋大連은 雄略天皇의 系列이 끊어졌을때는、仁德天皇(武内宿禰)의 長男이기도하며 仁德天皇(武内宿禰)에 대한 쿠테타에
참가하지 않았던 履中天皇의 孫 顕宗天皇, 仁賢天皇을 찾아서 천황으로 삼았지만, 履中天皇의 계열이 끊어지면 大伴金村大連은
仁德天皇(武内宿禰)에 대한 쿠테타에 참가했던 反正天皇、允恭天皇의 子孫이 아니고、稚野毛二派皇子의 아들 継体天皇을 찾아서
천황으로 세웠다.
26대 継体天皇 男大迹天皇
継体天皇은 男大迹天皇 「更의 名은, 彦太尊 」으로 응신천황의 5세의 孫으로 父는 彦主人王、 母는 振媛이다. 振媛은 수인천황의
7세의 孫으로 男大迹天皇의 父 彦主人王이 近江国 高島郡의 三尾의 別邸로부터 使者를 보내 三国 의 坂中井(福井県 坂井郡 三国町)
으로부터 妃로 맞이했다. 振媛은 彦主人王이 男大迹天皇의 어렸을때 죽어서 男大迹天皇을 데리고 친정의 高向(福井県 坂井郡
丸岡町付近)으로 돌아왔다. 男大迹天皇이 57세일때 武烈天皇이 죽어서 後嗣가 없어、男大迹天皇이 天皇에 즉위했다。
古事記에 응신천황의 자손으로서 다음의 인물을 들고 있다.
응신천황이 母의 妹 百師木伊呂辧、亦의 名 弟日賣真若比賣命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 若沼毛二俣王(稚野毛二派皇子)로서、
若沼毛二俣王(稚野毛二派皇子)의 子는 、大郞子、亦의 名은 意富富杼王、다음에는 忍坂의 大中津比賣命、
다음으로 田井의 中比賣、다음은 田宮의 中比賣、다음은 藤原의 琴節郞女 다음은 取賣王、다음은 沙禰王.
意富富杼王은 三國君、波多君、息長坂君、酒人君、山道君、筑紫의 末多君、布勢君等의 祖이다。
지금까지의 검증으로부터 응신천황을 인덕천황으로 바꿔서 읽는다.
若沼毛二俣王(稚野毛二派皇子)의 아들은、大郞子、또다른 이름은意富富杼王이다。
意富富杼王과 男大迹天皇은 동일인물이다. 동일인물이라고 한다면,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가 男大迹天皇(継体天皇)
의 父가 된다. 倭의 五王의 곳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는、461年에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男大迹天皇이 어렸을때 父가 죽어서 、57세에 천황에 즉위했다고 한다면 継体天皇의 즉위는 515年 前後의 年代가 된다.
日本書紀記에서는 武烈天皇은 武烈 8年(506년) 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継体天皇의 아들 欽明天皇이 539년 즉위했을때 자신은
幼年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기껏해야 15, 16세 정도 일 것이다. 57세의 継体天皇이 16, 17년 후부터 6, 7년 후에 仁賢天皇의 딸
手白香皇女에게서 欽明天皇을 낳게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나의 說에서는 武烈天皇은 어린애일때 죽어서, 천황으로 되지 못했기 때문에 武烈 8年은 있을수 없고. 継体天皇의 신원을 알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細工된 것으로 신용할 수 없는 연대이다.
継体天皇의 아들 欽明天皇의 탄생년도를 생각하면 継体天皇의 즉위는 507 年부터 515年 前後의 쪽이 可能性이 높기 때문에
継体天皇은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의 아들일 것이다.(後에「継体天皇의 전후의 천황의 재위기간」에서 継体天皇의
즉위년이 517년인 것을 해명하겠음) 515년 전후의 즉위라고 하면 継体天皇이 즉위 후 大化國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린 문제도
해소된다. 継体天皇의 続柄(혈연관계)도 확실히 하고 있는데 응신천황의 5세손이라고 일부러 애매하게 하여 앞의 천황을
찾지못하게 했던것이다.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와 継体天皇 2대 계속하여 신원을 불명하게 함으로서 응신천황으로부터
인덕천황의 관계를 親子의 관계로 하고, 천황의 계보와 宋書의 倭의 五王의 続柄(혈연관계)를 불명하게 했던 것이다.
武内宿禰를 仁德天皇으로 하고, 宋書의 倭의 五王중 讚이라고 생각되는 천황의 계승의 거짓이 탄로나지 않게 천황으로부터
탈락시켰던 稚野毛二派皇子 「興」이 계체천황의 父였던 것이다.
継体天皇의 즉위 후는 연대를 특정할 수 있는 치적을 나열한다.
継体 17년, 523년 백제의 무령왕이 薨하다.
継体 18년, 524년 백제의 태자 明(聖王=聖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즉위년은 불명이지만 523년에는 継体天皇은 즉위해 있었다.
継体天皇이 稚野毛二派皇子의 아들인 객관적 증거는 継体天皇이후에 継体天皇의 父 稚野毛二派皇子의 母 息長若中比賣의 관계로부터
息長氏의 딸을 취하여 息長足日広額天皇(舒明天皇)을 내게 되었다.
「왜 武内宿禰와 仁德天皇을 따로 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인가?」
그것은 蘇我氏의 자손의 문제이다. 武内宿禰의 자손 蘇我, 許勢、的等과 같은 武内宿禰의 자손으로서 壬申의 乱후의
天武天皇의 계보의 천황은 神武天皇의 東征이후의 자손과 畿內의 豪族의 딸과의 사이에 난 자손과의 차이와 정당화를
헤아리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雄略天皇의 시대로부터 継体天皇, 欽明天皇의 시대로 내려옴에 따라서
武内宿禰와 畿內의 豪族의 딸과의 사이에서 난 자손들(蘇我, 許勢、的等)의 활약이 눈에 띄게된 것은, 武内宿禰가
단지 宰相으로서 훌륭하고 오래 역임했다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지금까지 말해왔다시피 武内宿禰는 仁德天皇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는가?
仁德天皇과 畿內의 지방豪族과의 사이에 생긴 자손이, 仁德天皇 이후 대대로 천황에 오름으로써, 같은 천황의 자손으로서
새로운 황족으로서 대두해 왔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 새로운 황족과 神武天皇의 東征이후의 황족(구황족)과의 최초의 충돌이 蘇我氏와 物部氏의 전쟁이고, 최종전이 壬申의 乱이다.
壬申의 乱에서 旧皇族의 승리로 끝난 결과, 1명의 인물인 武内宿禰와 仁德天皇을 별개의 인물로 나뉘어 이야기를 만들어
仁德天皇과 畿內의 지방豪族과의 사이에 생긴 자손을 武内宿禰의 자손으로 하여 황족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제2의 蘇我氏계열인
用明天皇、崇峻天皇、天智天皇을 내보내지 않게 할 必要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武内宿禰와 仁德天皇을 나뉘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天武天皇이 日本書紀、古事記를 쓰게 한 목적의 하나는 仁德天皇과 畿內의 지방豪族과의 사이에 생긴 자손을 武内宿禰의
자손이라고 하는 생각을 퍼트리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天武天皇과 天武天皇의 자손에게 있어서 최대의 위협인
仁德天皇과 畿內의 지방豪族과의 사이에 생긴 자손을 천황의 자리로부터 멀리 제껴두는 것일 것이다.
그 때문에 천황이 아닌 武内宿禰의 자손의 氏名을 줄줄이 늘어놓았던 것이다.
継体天皇 이후의 천황
継体天皇 이후의 천황을 생각할 경우, 기본적으로는 継体天皇까지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2冊을 대조해서 맟춰보면 문제점과
그 해답이 이해되어 확인할수 있는 장치로 되어 있었지만, 고사기가 継体天皇 이후에 대해서는 거의 씌어져 있지 않아 해답을
확인하는 것이 어렵다.
「神武天皇 東征이후의 皇族과 仁德天皇과 畿內의 地方豪族과에 생긴 子孫과의 天皇을 둘러싼 전쟁으로서 일본서기를 읽어 왔다」
継体天皇은 즉위하자
이전부터의 妃 尾張連草香의 딸과 勾大兄皇子(広国排武金日尊, 安閑天皇), 檜隈高田皇子(武小広国排盾尊, 宣化天皇)의 자식들 외에
새로이 手白香皇女(仁賢天皇의 皇女)를 황후로 하여 天国排開広庭尊(欽明天皇)을 낳고,
외에 三尾角折君의 妹、坂田大跨王의 딸 広媛、息長真手王의 딸 麻績娘子、茨田連小望의 딸(妹)関媛, 三尾君堅ヒ의 딸 倭媛、
倭珥臣河內의 딸 ハエ媛、根王의 딸 広媛을 妃로 하여 다수의 자식을 만들었다.
継体天皇의 父의 母 息長真若中比賣의 관계로부터 息長氏의 딸이 재빨리 妃로 등장하고 있다. 息長氏는 開化天皇의 系列이므로
物部氏도 台頭하고 있다。
大伴金村大連、許勢臣人大臣、物部連ジ鹿火
'뿌리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의 역사-16.일본천황의 계보(9)-武의 계통의 천황으로부터 蘇我의 계통의 천황으로 (0) | 2013.08.13 |
---|---|
일본의 역사-15.일본천황의 계보(8)-磐井의 反亂과 통일국가 (0) | 2013.08.10 |
일본의 역사-13.일본천황의 계보(6)-倭 5왕의 정리 (0) | 2013.08.07 |
일본의 역사-12.일본천황의 계보(5)-履中-反正-允恭-安康-雄略 (0) | 2013.08.07 |
일본의 역사-11.일본천황의 계보(4)-인덕천황의 최후 (0) | 2013.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