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履中天皇 (去来穂別天皇) (河內系)
父가 16대 인덕천황, 母는 磐之媛命으로 葛城襲津彦의 딸이다《母는 五百城入姬로、景行天皇의 娘:著者注》
인덕천황과 磐之媛命황후 사이에는 大兄 去来穂別天皇(履中天皇),住吉仲皇子、瑞歯別天皇(反正天皇)、雄朝津間稚宿禰天皇(允恭天皇)이 태어났다.
同腹의 형제는 3명인데 住吉仲皇子를 菟道稚郞子皇子의 대신으로 넣어서 4인 형제로 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덕천황이 죽고나서 바로즉시 履中天皇이 황태자로 있었을때, 황태자는 黒媛과의 혼약이 조정되어 혼인날짜를 맟추기 위하여 보냈던 住吉仲皇子가 자신이 황태자라고 속이고 黒媛을 범하고 말았다.
黒媛을 범한 것이 들통나서 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住吉仲皇子가 황태자를 살해하려고 가만히 兵을 일어켜 황태자궁을 포위한다. 황태자는 도망쳐서 겨우 따라온 瑞歯別天皇(反正天皇)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과 같은 편이라면 住吉仲皇子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瑞歯別天皇(反正天皇)은 이겨서 방심하고 있는 住吉仲皇子의 부하를 매수하여 住吉仲皇子를 죽이고 그 부하도 죽였다.
이 이야기는 黒媛을 천황으로 바꾸고 住吉仲皇子를 菟道稚郞子皇子로 바꿔 읽어야한다.
履中天皇은 菟道稚郞子皇子에 앞서서 천황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천황의 치적이야기에 황태자의 약혼자를 동생이 범하고 하마터면 죽을뻔했다가 다른 동생에게 그 동생을 죽여달라고하는 창피한 이야기를 기록에 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덕천황(武内宿禰)은 중애천황의 자식들을 중심으로 하는 길비세력과의 싸움에서 황후 磐之媛命(五百城入姫)의 母(八坂入媛)의 実家 尾張大連의 힘을 빌렸을 것이다. 磐之媛命과 그 아들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이 황후, 천황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덕천황(武内宿禰)는 和珥臣의 祖 武振熊을 重要視하여 武振熊의 娘을 宮主에, 菟道稚郞子皇子를 천황으로 하고 院政을 행하여 정치를 자신의 뜻대로 했다.
履中天皇이 황태자였을때 성무천황과 공모하여 菟道稚郞子皇子를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반대로 성무천황이 죽게되고 履中황태자는 도망쳤을 것이다. 이것을 동생이 황태자인 자신의 약혼자를 범하고 그 자신도 죽이려고하자 도망쳤다고 기록한 것일 것이다. 공포심과 회의심으로 응고되어 꼼짝할 수 없던 履中天皇을 대신하여 동생인 瑞歯別皇子(反正天皇)이 사건을 원만히 처리하여 정권을 탈취했을 것이다. 고사기에서는 瑞歯別皇子(反正天皇)은 蝮(살모사)의 水歯別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履中天皇에게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反正天皇이 천황을 잇는 변칙적인 황권승계가 이루어졌다.
宋書에 따르면 讚의 421년, 425년의 후에 讚의 弟 珍이 除正을 求하고 있다. 17대 履中天皇과 18대 反正天皇은 7세 차이가 나서 住吉仲皇子의 모델인 菟道稚郞子皇子를 履中天皇과 反正天皇 사이에 넣어두고 있으므로 나이순은 履中天皇, 菟道稚郞子皇子, 反正天皇이 될 것이다. 履中天皇을 빼서 건너뛰고 菟道稚郞子皇子의 「讚 」으로부터 反正天皇인 배다른 동생 「珍」에게 천황이 계속 이어졌다고 생각할수밖에 없다. 菟道稚郞子皇子는 傀儡의 천황으로 실질적으로는 인덕천황이 정치를 했을 것이다. 뒤에 천황의 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武内宿禰를 인덕천황으로 했을 것이다. 武内宿禰는 살아있는 때에는 천황을 칭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일본서기에서는 葦田宿禰의 娘 黒媛을 皇后로하여、磐坂市辺押羽皇子、御馬皇子、靑海皇女、다음의 妃인 幢梭皇女에게 中磯皇女가 태어났다고 적혀있다.
고사기에는 응신천황의 妃 弟比賣命(黒日賣)의 娘 三腹郞女라고 記載되어있지만、仁德天皇(武内宿禰)의 妃 弟比賣命(黒日賣)[景行天皇의 妾의 子 高城入彦皇女(黒日賣)]의 딸인 淡路御原皇女이다.
妃의 幢梭皇女는 古事記의 応神天皇의 妃、日向 泉 長媛의 딸 幢日之若郞女라고 記載되어있지만 仁德天皇(武内宿禰)의 妃 日向 泉 長媛의 딸 幢日之若郞女이다.
履中天皇 자신은 정권탈취의 履行을 中止했기때문에 諡가 履中天皇이 되었을 것이다
17대 履中天皇은 명예천황으로 정권은 담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履中天皇의 아들, 市辺押磐皇子에게 천황을 계승시키지 못했지만, 孫의 顕宗天皇、仁賢天皇이 천황으로 되었기때문에 諱가 去来穂別天皇. (穂는 천황을 상징하고 있다.)
17대 履中天皇의 생존연대 400~ 不明. 재위년도 없음으로 수정한다.
18대 反正天皇 瑞歯別天皇 (河內系)
17대 履中天皇의 同腹의 차남이다. 反正天皇이 처리하여 인덕천황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했을 것이다. 17대 履中天皇의 곳에서 말했다시피 履中天皇은 명예천황으로서 정권을 담당하는 것 없고, 아들도 천황을 잇지 못했다. 결과로서 履中天皇을 건너뛰고 菟道稚郞子皇子의 「讚 」으로부터 배다른 동생 反正天皇의 「珍」으로 宋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의 천황이 「済」로서 443년에 宋에 사신을 보내고 있으므로 442년 까지 정권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大宅臣의 木事의 딸 津野媛을 皇夫人으로하여 香火姫皇女, 円皇女를,
夫人의 妹의 弟媛에게 財皇女, 高部皇子를 태어나게 했다.
고사기에서는 丸邇許碁登臣의 娘, 都怒郎女에게 甲斐郎女、都夫良을、
弟比賣에게 財王, 多詞辧郞女를 낳게했다.
都怒郎女는 응신천황의 妃, 弟比賣命의 娘木의 菟野呂郞女와、三野郞女라고 기재되어있지만 皇夫人津野媛과 弟媛은 仁德天皇(武内宿禰)의 妃로서 경행천황의 妾의 子 高城入彦皇女(黒日賣)의 娘、紀之菟野皇女와、三野皇女이다.
정권탈취를 위해 자신의 父 인덕천황, 배다른 형 菟道稚郞子皇子를 죽인 것이 정의에 反하기 때문에 諡가 反正天皇이 되고 反正天皇의 정권탈취의 결과 인덕천황의 자손은 磐之媛命皇后, 野伊呂賣、息長真若中比賣와의 子孫 仁賢天皇의 계열, 雄略天皇의 계열, 稚野毛二派皇子의 系列의 3개파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諱가 瑞歯別天皇일것이다.
18대 反正天皇, 宋書「珍」, 생존연대 407~442, 재위연대 428전후~442
19대 允恭天皇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 (河內系)
17대 履中天皇, 18대 反正天皇과 同腹의 3男이다.
允恭天皇은 忍坂大中姫를 황후로 세워、木梨軽皇子、名形大娘女、境黒彦皇子、穴穂天皇(安康天皇), 軽大娘皇女、八釣白彦皇子、大泊瀬稚武天皇(雄略天皇)、但馬橘大娘皇女、酒見皇女를 낳았다.
忍坂大中姫는,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천황의 딸로 인덕천황(武内宿禰)의 異母兄妹로서 叔母로 되어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바와 같이 忍坂大中姫는 인덕천황(武内宿禰)의 딸로서 允恭天皇과는 배다른 남매지간이다.
「妃 葛城의 野伊呂賣는、伊奢能麻和迦王、妃 迦具漏比賣는、川原田郞女、玉郞女、忍坂大中比賣、登富志郞女、迦多遲王을 낳았다」라고 했으므로、忍坂大中姫의 母는 迦具漏比賣(神功皇后)이다. 登富志郞女이므로、木梨軽皇子의 妹 衣通郞姫는 登富志郞女로서、木梨軽皇子는 迦多遲王이 된다。
境黒彦皇子는 古事記에서는 黒日子王으로 기록되어있고、黒日賣의 娘 黒媛과 履中天皇의 아들 御馬皇子이다。穴穂天皇(安康天皇)은、允恭天皇과 忍坂大中姫와의 아들일 것이다.
八釣白彦皇子는、八重歯의 反正天皇의 아들 高部皇子일것이다.
大泊瀬稚武天皇(雄略天皇)은、仁德天皇(武内宿禰)와 妃 葛城의 野伊呂賣의 아들 伊奢能麻和迦王(이자노마와가오우)이다。長井寛氏의 古事記 干支崩年에 기초한 年代의 추정에 의하면 雄略天皇은 427年에 태어났는데、415年生인 允恭天皇과 忍坂大中姫의 7번째의 아들이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윤공천황이 천황이 될때 「오랫동안 중한 병에 걸려있었기때문에 천황에 적합하지 않다 」고 천황에 사퇴했지만 주위의 강한 요청으로 마지못해 즉위했다. 이때 신라 国主가 大使 金波鎮漢紀武에 貢物을 많이 가지고 왔다. 金波鎮漢紀武는, 약의 사용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때문에 천황의 병이 나앗다고 고사기에 적혀있다.
응신 20년에 倭漢直의 祖 阿知使主는 党類 17県을 이끌고 來帰하여 履中天皇의 위기를 구하고, 20년도 지나지 않아 윤공천황의 시대에는 천황조차도 눌러 붙일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있다. 또 당시의 倭国은 신라의 国主로부터 공물을 받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宋에 451년에 「済」죽고 세자 「興」으로부터 사신이 왔다
19대 윤공천황은 450년인가 451년에 죽었을 것이다.
고사기의 干支崩年에 기초한 연대 추정에서는 安康天皇은 13이나 14세이다. 仁徳天皇의 皇后 磐之媛命은、자신의 孫 安康天皇(윤공천황의 아들)을 天皇으로 삼고싶었지만、兄弟가 順番대로 천황이 되는 것이 3대 계속되어 관습화되었던 것과 物部氏를 무시할 수도 없고, 日子坐皇(彦坐王)과 日本武尊의 피를 이은 神功皇后의 妹, 息長真若中比賣의 아들 稚野毛二派皇子를 천황으로 했을 것이다. 이것이 宋書의 「興」일 것이다.
稚野毛二派皇子와 雄略天皇(伊奢能麻和迦王)이 아직 어렸을때 父 仁德天皇(武内宿禰)가 反正天皇의 구데타로 살해되었기때문에 형인 允恭天皇이 養父로서 길렀을 것이다.
稚野毛二派皇子가 允恭天皇의 뒤를 이었을때 済(允恭天皇)의 世子「興」과 雄略天皇(伊奢能和迦王)은 亡考済라고 宋에 배다른 형 允恭天皇을 父로서 告하게 되었을 것이다.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은 倭課除け二派皇子(倭課抜け二俣王)로서 課를 除け제외(課를 抜け누락)하면 世의 中은 「興」으로 되어, 倭課除け(倭課除け)는 倭興과 같은 의미로 되어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은 宋書의 「興」을 나타내고 있다.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의 子가 継体天皇이다. 일본서기의 윤공천황의 후반은, 윤공천황의 사후 宋書에서 「興」으로 불리는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가 천황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는 이후의 천황이 雄略天皇의 계열과 継体天皇의 계열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二派, 二俣가 붙여졌다고 생각된다.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가 천황으로 10년정도 지난 것을 감추기위해 일본서기에서는 거꾸로 천황의 자손이라고 성명을 속이는 자가 나오고 있기때문에 盟神探湯을 행하자 성명을 속이는 자가 없어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가 죽자 황태자인 木梨軽皇子(迦多遲王)이 다음의 천황으로 되고 만다. 葛城一族은 安康天皇(윤공천황의 아들)이 24세가 되어있고, 이번에는 참지않고 木梨軽皇子(迦多遲王)을 죽이고, 安康天皇을 강제로 천황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木梨軽皇子(迦多遲王)과 妹의 이야기는 날조된 것이다.
允恭天皇의 諱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은 夫浅妻若子宿禰天皇으로서 다른 여자에게 바빠서 오래간만에 처와의 사이에 생긴 宿禰의 若子. 武内宿禰의 아이들이라고 넌지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19대 允恭天皇, 宋書의 「済」 생존연대 415~450, 재위연대 443~450
稚野毛二派皇子, 宋書의 「興」, 생존연대 不明~461, 재위연대 451~461
20대 安康天皇 穴穂天皇 (河內系)
父는 19대 允恭天皇, 母는 忍坂大中姫命
忍坂大中姫命은 자신의 자식을 천황으로 하기 위하여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
安康天皇은 남은 인덕천황의 아들인 日向 泉 長媛과의 大葉枝皇子(大草香皇子)、小葉枝皇子(眉輪王)、葛城의 野伊呂賣와의 伊奢能麻和迦王(大泊 瀬稚武天皇、雄略天皇)이 脅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安康天皇은 즉위하자 바로、먼저 大草香皇子(大葉枝皇子), 眉輪王(小葉枝皇子)의 형제를 공격해 멸망시켰을 것이다.
「穴穂天皇」은 穴掘天皇으로 자신이 墓穴을 파서 웅략천황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20대 安康天皇은 생존연대 437~461, 재위년도 461년의 수개월.
21대 雄略天皇 大泊瀬幼武天皇 (길비계)
父는 仁德天皇、母는 葛城의 野伊呂賣(弟姫皇女)이다. 천황이 된 것은 35세로 상당히 나이를 먹고있다.
황후는 草香幡梭姫皇女. 妃는 葛城円大臣의 딸 韓媛으로、자식은 白髪武広国押稚日 本根子天皇(清寧天皇)、稚足姫皇女(栲幡姫皇女)、
다음의 妃는 吉備上道臣(吉備窪屋臣)의 딸 稚姫로、 자식은 磐城皇子, 星川稚宮皇子、
다음의 妃는 春日和珥臣深目의 딸、童女君으로 자식은 春日大娘皇女.
妃 韓媛은 인덕천황과 迦具漏比賣의 딸 玉郞女일 것이다. 迦具漏比賣가 韓国으로부터 移住해 온 天日槍의 子孫의 피를 이어받았기때문에 韓媛이라고 불리는 것일것이다.
安康天皇이 남은 인덕천황의 아들들을 살해하자 신변의 위기를 느낀 雄略天皇(伊奢能麻和迦王)은 자신에게는 병력이 없기때문에 物部氏의 兵力을 빌려서 거꾸로 安康天皇을 공격하여 멸망시켜버린게 아닐까.
物部氏는 17대 履中天皇을 도와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의 母인 息長真若中比賣가 彦坐王의 자손의 관계인고로 힘을 기르고, 다음의 천황으로 생각되어지는 木梨軽皇子(迦多遲王)의 母도 息長真若中比賣의 姉의 迦具漏比賣(神功皇后)로서、勢力확대의 찬스였는데、木梨軽皇子(迦多遲王)가 제거되어 安穂天皇이 천황이 되어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雄略天皇은 이러한 物部氏의 心理를 간파하여 꾀어들이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雄略天皇은 승리하자 인덕천황과 황후 磐之媛命 의 男의 자손, 履中天皇의 아들 市辺押磐皇子、境黒彦皇子(御馬皇子)、反正天皇의 아들 八釣白彦皇子(高部皇子)를 차례차례로 죽였다.
雄略天皇은 정권을 탈취하자 宋에「武」로서 사신을 보냈다
462년 宋에 「興」이 죽고 「武」가 즉위, 자칭 官位를 이름붙혀 「武」의 사신이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稚野毛二派皇子의 「興」이 형이고 雄略天皇의 「武」가 동생인 것은, 고사기, 일본서기를 기초로한 일본의 역사서에는 맞지않지만,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은, 응신천황의 아들이 아니고, 雄略天皇은 野伊呂賣의 아들 伊奢能麻和迦王으로서、雄略天皇은 允恭天皇의 아들이 아니고, 2인은 인덕천황의 배다른 아들이라고 하는 나의 說과는 꼭 맞는다.
일본서기에서는 우연히 吉備上道臣(吉備窪屋臣)의 딸 稚姫의 美貌에 빠져서 雄略天皇이 謀略으로 稚姫를 손에 넣어 星川稚宮皇子를 낳았다지만, 星川稚宮皇子는 마음속에 악의를 품고 형제의 義를 잃고 있으므로 星川稚宮皇子에게 国家를 다스리지 못하도록 大伴室大連、東漢国直에게 遺詔를 내리고 있다。雄略天皇이 죽고나자、단지 星川稚宮皇子가 天皇이 되고싶어서 병을 일어켰다라고만 적혀있다. 이것으로는 吉備上道臣이 吉備의 国運을 걸고 援軍을 일어킨 이유로 부족하다
인덕천황의 편에서 하기와 같이 적었다.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천황의 시대의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인덕천황의 만년일 것이다. 姉媛(黒日賣、高城入彦皇女)가 吉備에 돌아오고、仁德天皇이 吉備에 行幸하여 姉媛、弟姫皇女(葛城의 野伊呂賣)의 兄吉備兄彦皇子(吉備의 兄日子命.吉備의 祖御友別)의 자식들에게 吉備의 나라를 分割하여 주고 있다. 인덕천황이 길비의 나라를 분할하여 주었을때、妥女의 葛城의 野伊呂賣를 첫눈에 반하여 하룻밤을 함께했을때 생긴 것이 葛城의 野伊呂賣의 자식 伊奢能麻和迦王으로、雄略天皇이 아닌가。日本書紀에는 雄略天皇이 妥女의 童女君과 하룻밤을 함께하여 생긴 아들을 자신의 아들인가 의심했다는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지만, 의심받은 것은 웅략천황 자신이 아닌가. 그것이 인덕천황의 사망과 웅략천황의 탄생이 427년으로 일치하는 것이 이야기하고 잇지 않은가
畿內勢力은 長年의 吉備勢力의 支配로부터 벗어나、정권을 잡았던 仁德天皇이、吉備国의 王制를 폐지하고 吉備国을 大和国에 합병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덕천황이 吉備国을 분할하여 주었던 것이 인덕천황의 기반이었던 畿內勢力의 지지를 잃고 인덕천황의 실각의 원인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응신천황시대가 아니고 인덕천황의 만년일 것이다」
雄略天皇이 景行天皇의 딸 弟姫皇女(葛城의 野伊呂賣)의 아들 伊奢能麻和迦王이란 것의 証으로 妃에 吉備上道臣(吉備窪屋臣)의 딸 稚姫를 들수 있다. 妃 稚姫는、雄略天皇의 母 弟姫皇女의 兄 吉備兄彦皇子의 아들들이 吉備国 계승하고 있기때문에 그 딸이 아닌가。
천황이 7대 효령황제의 계열(吉備国)으로부터 8대 효원황제의 계열(河內)로 바뀌어 인덕천황과 경행천황의 딸 弟姫皇女의 아들이 웅략천황으로서 웅략천황은 母가 吉備兄彦皇子의 妹 弟姫皇女이기때문에야말로 吉備上道臣(吉備窪屋臣)의 딸 稚姫를 妃로하여 아들 星川稚宮皇子를 낳게했다. 雄略天皇이 죽자 아들 星川稚宮皇子가 吉備王国의 再現을 꿈꾸어 거병했던 吉備上道臣도 雄略天皇이 경행천황(7대 효령황제의 계열-吉備国) 의 딸 弟姫皇女의 아들이고, 그때문에 雄略天皇의 시대 吉備国의 국력도 부활하여(吉備国에서는 거대한 고분이 작게되고 다시 큰 고분이 출현했다) 星川稚宮皇子가 吉備上道臣의 딸 稚姫의 아들이므로、吉備上道臣은 吉備王国(7대 효령천황의 계열)의 재현의 꿈을 공유했으므로 吉備의 国運을 걸고 원군을 보낸 것이다. 또 거꾸로 8대 효원천황의 계열을 지탱했던 大伴室大連、東漢掬直은 星川稚宮皇子가 천황이 되는 것을 저지했다
웅략천황이 죽자 星川稚宮皇子가 吉備王国의 재현을 꿈꾸어 거병했지만, 大伴室大連、東漢掬直의 활약으로 멸망되고 吉備上道臣은 원군을 보냈지만 星川稚宮皇子의 죽음을 도중에 알게되어 발길을 되돌려, 罰로서 山部를 빼앗겨 吉備王国의 재현의 꿈은 영원히 꺼진다.
雄略天皇의 諱 大泊瀬幼武天皇은 대략 世幼武天皇으로 大鷦鷯天皇 (仁德天皇=武内宿禰)이 죽었을때 雄略天皇은 어렸을 것이다.
21대 雄略天皇. 宋書 武, 생존연대 417~479 부터 뒤는 不明. 재위연대 462~479부터 뒤는 不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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