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대 安閑天皇 広国押武金日天皇
父 継体天皇 母 目子媛 皇后 仁賢天皇의 皇女의 딸 春日山田皇女、
다음의 妃 許勢男人大臣의 딸 紗手媛
다음의 妃 許勢男人大臣의 딸 紗手媛의 妹 香香有媛
다음의 妃 物部木蓮子大連의 딸 宅媛
「磐井의 反亂」
継体21年(527年)에 大和国은 新羅의 支配下에 놓이게 된 南加羅、녹기탄을 再興하기 위하여、近江毛野臣에게
6万의 兵力을 주어 任那로 향하게 하였을때、新羅로부터 뇌물을 받은 筑紫国造 磐井가、九州로부터의 출발을
저지했다. 그러나 南加羅는 洛東江 河口 右岸의 金官国이고、金官国이 新羅에게 降伏한 것은 532年이므로、
任那로의 出兵은 532年 후의 사건이므로、筑紫国造 磐井의 반란과 大和国의 任那로의 出兵과는 관계가 없다.
뒤의 「継体天皇 전후의 천황의 재위기간」을 읽어보면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527년은 継体天皇이 죽고
安閑天皇이 즉위한 해로서 새로운 安閑天皇의 大和国에의 火国(ひのくに)、豊国(とよくに)을 병합하는 정책이
「磐井의 반란」의 원인일 것이다.
磐井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은 ひのくに 火(佐賀.、長崎.、熊本.)、とよくに 豊(福岡.東部、大分.)이다.
邪馬台国 확대의 과정에서 영토에 편입된 나라와 적대하는 隣国이 바로 火(ひ のくに), 豊(とよくに)과 겹친다는 것이다.
火国(ひのくに)의 佐賀県은 정복한 鬼国으로서
筑後川의 東側은 狗奴国으로부터 뺏은 나라로서
長崎県은 弥国(長崎県.北部)、鳥国(長崎県 南部)로서
熊本県은 狗奴国、狗国으로서 적대하는 隣国이고,
豊(とよくに) 의 으로서
大分県은 華国으로 적대하는 隣国이라고 말하고 있다.
邪馬台国의 때에는 佐賀県(鬼国),
神武天皇의 東征때에는 豊(とよくに)[福岡県.東部-姐国] [大分県-華国]
景行天皇의 熊襲征討때는 火(ひのくに), 豊(とよくに)을 몇 번이고 지배했다고 생각되고 있다.
邪馬台国은 神武天皇의 東征때 본거지를 福岡市 西区로부터 大和로 천도하여 大和国이 되었지만, 천도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大和国은 지배했던 국가의 王制를 인정하는 연방제를 채용하여 지역마다에 王制国家를 인정하는
大和연방의 맹주국이었을 것이다.
雄略天皇이 죽자 雄略天皇의 아들 星川稚宮皇子가 吉備王国의 再現을 꿈꾸고 거병했지만、大伴室大連、東漢掬直의
활약으로 멸망당했다. 星川稚宮皇子에 가세하려고 했던 吉備国은 吉備王国의 再現은 커녕 거꾸로 독립을 잃고
大和国으로부터 王制를 폐지당하여 병합되어 大和国에 편입되었다. 大和国은 인근의 거대왕국 吉備国의 병합에
힘과 자신을 붙혀 邪馬台国 이래의 지배하에는 두었지만 지역의 王制国家를 인정해왔던 정책을 安閑天皇의
즉위의 때에 변경하여 火(ひのくに), 豊(とよくに)의 왕국을 병합하는 것을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邪馬台国에의 병합에 반대하여 원래는 邪馬台国 이래 지배당한 反邪馬台国、反大和国의 의식이 강한 火. 豊의 각국의
왕이 연합하여 독립, 王制国家의 유지를 요구하며 大和国과 싸웠던 것이 磐井의 반란으로서, 반란의 대표가
筑紫国造 磐井가 아닌가. 磐井가 패한 결과 火. 豊은 大和国으로부터 王制가 폐지되어 大和国에 병합되었던 것이다.
安閑天皇의 諱 広国押武金日天皇의 [国을 넓게]의 의미는 「火、豊의 王制를 폐지하여 大和国에 병합하고, 힘을 내어
그 외의 나라의 王制를 폐지하여 大和国에 병합했다」일 것이다.
諱「広国押武金日天皇」은 国을 넓게, 武(安閑天皇)에 있어서 黄金의 日。
福井県의 田舎시골에 파묻혀서 일생을 보내게 될 것을 어느날 갑자기 천황이 되었기 때문에 安閑天皇에 있어서는 黄金의
日일 것이다.
28대 宣化天皇 武小広国排盾天皇
皇后 仁賢天皇의 皇女 橘仲皇女와 石姫皇女、小石姫皇女、上殖葉皇子(椀子라고 하며、丹比公、偉那公의 祖先)、
前의 妃 大河內稚子媛와 大焔皇子(椎田의 君의 祖先)을 만들다。
大伴金村大連、物部連ジ鹿火大連、蘇我稲目大臣、安倍大麻呂臣를 大夫
諱「武小広国排盾天皇」은、武는 약간 国를 넓혀 盾방패(국경의 수호)를 제거시킨 天皇。
仁德天皇(武内宿禰) 는 孝元天皇의 아들 武埴安彦命의 자손이므로 仁德天皇 이후의 천황은 苗字로서 武를 사용했을
것이다. 雄略天皇의大泊瀬幼武天皇, 清寧天皇의 白髪武広国押稚日本根子天皇, 安閑天皇의 広国押武金日天皇,
宣化天皇의 武小広国排盾天皇忌와 諱에 武를 넣음에 따라서 仁德天皇 이후는 継体天皇의 전도 후도 효원천황의 자손이
천황을 계승하고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継体天皇 전후의 천황의 재위기간」
継体天皇의 신원을 불명하게 하기 위하여 継体天皇의 전후의 천황의 재위기간을 일본서기는 주물럭거리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서기의 속임수는 고사기에서 수정하면 정정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사기의 継体天皇의 전후의
천황의 干支崩年으로부터 수정한 연표를 만들었다. 고사기의 雄略天皇의 干支崩年 巳巳(489年)、継体天皇의
干支崩年 丁末(527)年을 도입하고 古事記에서는 清寧天皇、顕宗天皇、仁賢天皇은 崩年、在位期間 不明이기 때문에
日本書紀의 在位期間을 도입하고, 무열천황은 나의 說에서는 천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위기간이 없어서 日本書紀의
무열천황의 재위기간을 무열천황의 父인 仁賢天皇의 재위기간에 합치면 日本書紀의 年表는 다음과 같이 된다.
천황의 이름 |
日本書紀의 재위기간 |
수정한 재위기간 |
雄略天皇 |
457 ~479 |
462 ~ 489 |
清寧天皇 |
480 ~484 |
490 ~ 494 |
顕宗天皇 |
485 ~487 |
495 ~ 497 |
仁賢天皇 |
488 ~498 |
498 ~ 516 |
무열천황 |
498 ~506 |
0 |
継体天皇 |
507 ~531 |
517 ~ 527 |
安閑天皇 |
531 ~535 |
527 ~ 535 |
이 수정된 年表에서 継体天皇을 다시한번 더 검증해보면 雄略天皇(武)의 使者가 462년에 宋에 가서 継体天皇이
幼少의 때 父가 죽어서 57세에 천황에 즉위했다고 씌어있기 때문에 517년에 즉위했다고 한다면, 幼少를 0, 1, 2세라고
생각하여 雄略天皇이 稚野毛二派皇子의 후계자 쟁탈에서 승리한 후 宋에 使者를 보내기까지의 시간도 1, 2, 3년이라고
생각하면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은 461년, 460년, 459년에 죽은 것이 되어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의
사망의 시기는 확정할 수 없지만 稚野毛二派皇子(若沼毛二俣王)의 아들 意富富杼王이 継体天皇이라고 하는데는
연령상의 문제는 없다.
継体天皇의 아들 欽明天皇은 539년에 즉위했을때 자신은 幼年이므로 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継体天皇이 507년부터
517년에 즉위했다고 하는 편이 가능성이 높다. 雄略天皇이 정권을 잡은 것은 불명이지만 462년부터 수년전의 가능성도 있다.
継体天皇이 죽은 것을 527년부터 531년으로 하여 4년 늦게 한 것은 、筑紫国造 磐井의 반란이 継体天皇이 죽고 安閑天皇이
즉위한 年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安閑天皇이 즉위한 해에 筑紫国造 磐井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지면 諱와도 연결되어、大和国의 根源的인 問題、大和国 의 루트、連邦制가 밝혀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継体天皇의
시대의 단순한 반란이라고 矮小化시키기위하여 継体天皇이 죽은 해를 4년 늧추었던것이리라. 安閑天皇의 승계가、倭国이
大和国盟主의 連邦制国家를 계속할 것인가 大和統一国家를 목표로 할 것인가의 問題에 얽혀있기때문이 아닌가하고 생각되어진다.
安閑天皇의 諱 広国押武金日天皇 으로부터도 国(大和国)가 확대한 것이 、安閑天皇의 時代라고 한다면 継体天皇이
죽은 것을 527년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日本書紀의 在位期間에 따라 、古事記의 雄略天皇의 干支崩年 巳巳(489年)、継体天皇의 干支崩年
丁末(527)年을 도입하여 修整한 在位期間의 편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29대 欽明天皇 天国排開広庭天皇 재위 539 ~ 571
젊어서 취임. 父 継体天皇、母 手白香皇女(仁賢天皇의 皇女)
大伴金村大連、物部尾輿大連、蘇我稲目大臣
황후 宣化天皇의 딸 妃姫皇女와 箭田珠勝大兄皇子, 訳語渟仲倉太珠敷尊(敏達天皇)、笠縫皇女、
다음 妃 稚綾姫皇女《継体天皇과 和珥臣河內의 딸 ハエ媛의 딸》 (宣化天皇과 황후 仁賢天皇의 皇女의 딸 橘仲皇女와의 딸
小石姫皇女의 착오인가)와 石上皇子(上皇子의 착오인가)
다음의 妃 石姫皇女의 妹로서 이름은 不明으로 日影皇女와 倉皇子를 낳았다。
《筆者注意:다음부터의 妃、堅塩媛, 小姉君은、蘇我稲目大臣과 蘇我馬子宿禰大臣의 아내이다. 천황을 정당하게
계승했다는 형태로 하기 위하여 欽明天皇의 妃로서 기입되어 있다》
다음의 妃 蘇我稲目大臣의 女 堅塩媛(堅塩, 이것을 岐タ志《키타씨》라고 한다)과 第一 大兄皇子, 橘豊日尊(用明天皇)
第二 磐隈皇女、第三 臘嘴野皇子(아도리노미코)、第四 豊御 食炊屋姫尊(推古天皇)、第五 椀子皇子, 第六 大宅皇女、
第七 石上部皇子 第八 山背皇子 第九 大伴皇女 .第十 桜井皇子、.第十一 肩野皇女, 第十二 橘本稚皇子, 第十三 舍人皇女를 낳았다.
다음의 妃 堅塩媛의 同母의 妹 小姉君과 第一 茨城皇子、第二 葛城皇子 、第三 하씨히토메穴橞部皇女(用明天皇의 皇后)
第四 하씨히토메穴橞部皇子(天香子皇子 一書에는 住迹皇子)第五 泊瀬部皇子(崇峻天皇)
다른 一書에는 第一茨城皇子、第二 住迹皇子, 第三 葛城皇子 第四 하씨히토메穴橞部皇子(天香子), 第五 泊瀬部皇子를 낳았다.
(*妃 堅塩媛、小姉君과 그 자식들이、蘇我稲目大臣과 蘇我馬子宿禰大臣의 가족이다. 검증은 뒤에 하기로 한다)
《筆者注意、다음의 妃는 진짜이다》다음의 妃에 春日日抓의 딸 糖子와 橘麻呂皇子를 낳았다.
欽明 31年 蘇我稲目大臣 죽다.
欽明 32年 欽明天皇 죽다.
欽明天皇의 諱「天国排開広庭天皇」은、天皇의 国은 支配下의 각 나라의 국경의 수비를 제거하여 국경을 열어서 모든
나라를 천황의 넓은 정원으로 했던 천황. 大和朝廷은 欽明天皇의 시대에 전국을 직접지배하에 둔, 즉 통일국가의 탄생이다.
「統一家의 誕生」
邪馬台国은 神武의 東征에서、魏와의 경험으로부터 中国의 위협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기 위하여 본거지를 福岡市
西区로부터 大和에 遷都하여 大和国이 되었지만, 천도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大和国은 지배하고 있던 나라의 王制를
인정하는 連邦制를 채용하여, 地域마다 王制国家를 인정하고 있었다.
盟主国 大和国의 雄略天皇이 죽었을 때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吉備国이 관여했던 기회를 포착하여 吉備国의 王制를
폐지하여 병합하고、磐井의 반란에서 北部九州、中部九州의 大和国 連邦內의 反大和의 나라들을 쳐부수어 王制를
폐지하여 大和国에 병합함에 따라서, 大和国 연방은 맹주국 大和国에 대항할수 있는 국가가 없어져서 倭国의 盟主国
大和国=倭国이 되어 후에 국명을 바꾸어 일본국이 되었다.
「欽明天皇과 妃 蘇我稲目大臣의 女 堅塩媛、堅塩媛의 同母 妹 小姉君에 대하여 생각한다。」
다음의 妃 蘇我稲目大臣의 女 堅塩媛(堅塩、이것을 岐タ志《키타시》라고 한다)라고 씌어있다.《키타시》는、
《키타나시》를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蘇我稲目、蘇我馬子宿禰의 마누라、자식을、欽明天皇의 妃、자식이라고 기록한 것이《키타나시》이다。
崇神天皇、応神天皇의 때의 계승의 속임수방법과 같은 방식이다.
欽明天皇의 家族을 한번 더 게재한다.
欽明天皇의 妃 堅塩媛、小姉君을 蘇我稲目의 마누라堅塩媛, 蘇我馬子宿禰의 마누라 小姉君으로 하면 蘇我稲目 、
蘇我馬子宿禰의 가족이 된다.
欽明天皇은、다음의 妃 蘇我稲目大臣의 女 堅塩媛(키타시)과
第一 大兄皇子、橘豊日尊(用明天皇)第二 磐隈皇女、第三 臘嘴鳥皇子(아도리노미코)、第四 豊御食炊屋姫尊(推古天皇)、
第五 椀子皇子、第六 大宅皇女、第七 石上部皇子、第八 山背九大伴皇女、第十 桜井皇子、第十一 肩野皇女(카타노히메)、
第十二 橘本稚皇子, 第十三 舎人皇女를 낳았다。
欽明天皇은、다음의 妃 堅塩媛의 同母의 妹 小姉君과
第一 茨城皇子(우마라키노미코)、第二 葛城皇子、第三 하씨히토메 穴橞部皇女(用明天皇의 皇后)、第四 하씨히토메 穴橞部皇子(天香子皇子《아마츠카고노미코》
一書에는 住迹皇子(스미토노미코)第五 泊瀬部皇子(핫세베미코)(崇峻天皇)
一書에는 第一 茨城皇子(우마라키노미코)第二 하씨히토메 穴橞部皇女(用明天皇의 皇后)、第三 하씨히토메 穴橞部(天香子皇子《아마츠카고노》 또 御名住迹皇子(스미토노미코)第四 葛城皇子 第五 泊瀬部皇子(핫세베미코)(崇峻天皇)
또다른 一書에는 第一 茨城皇子、第二 住迹皇子、第三 葛城皇子、穴橞部皇女(用明天皇의 皇后)、第五 泊瀬部皇子를 낳았다。
「蘇我稲目의 家族」
堅塩媛은 蘇我稲目의 마누라、大兄皇子、橘豊日尊(用明天皇)은 蘇我稲目의 長男、磐隈皇女는 蘇我稲目의 長女、
臘嘴鳥皇子(아도리노미코)는 蘇我稲目의 次男으로서 蘇我家의 跡取(후계자) 蘇我馬子宿禰、豊御食炊屋姫尊(推古天皇)은 蘇我稲目의 次女로서 豊御食炊屋姫尊(推古天皇)、以下는、蘇我稲目의 자식이지만 堅塩媛과의 사이에 생긴 자식이 아니고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자식인 椀子皇子、大宅皇女、石上部皇子、山背皇子、大伴皇女、 桜井皇子、肩野皇女、橘本稚皇子、舎人皇女。
蘇我馬子宿禰는 物部弓削守屋大連의 妹를 취하고 있다. 나는 이 妹가 小姉君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妹가 小姉君이면 堅塩媛은 小姉君의 妹가 되어 나의 주장대로 欽明天皇의 妃에 蘇我稲目, 蘇我馬子宿禰의 부인 堅塩媛, 小姉君을 기입해 넣은 것이 된다.
物部氏는 神武天皇의 정당한 후계자 開化天皇의 皇后의 実家로서 유서바른 血筋이라고 자타 함께 인정하고 있다.
「蘇我馬子宿禰의 家族」
堅塩媛의 同母의 妹 小姉君은 蘇我馬子宿禰의 마누라,
茨城皇子(우마라키노미코)는 蘇我馬子宿禰의 長男으로서 蘇我蝦夷、
하씨히토메穴橞部皇女(用明天皇의皇后)는 蘇我馬子宿禰의 長女로서 穴橞部間人皇女(用明天皇의皇后)、
하씨히토메穴橞部皇子는 蘇我馬子宿禰의 次男으로서 穴橞部皇子、
葛城皇子는 蘇我馬子宿禰의 三男、
泊瀬部皇子는 蘇我馬子宿禰의 四男으로서 崇峻天皇이다.
以上 올린 것은 蘇我馬子宿禰와 小姉君과의 자식으로서 다른 여자도 함께 자식이 있다.
천황이 될 가능성이 있는 血統의 物部弓削守屋大連의 妹의 자식들만 기록되어 있다.
혹시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蘇我馬子宿禰와 堅塩媛이 兄妹라고 한다면 妹의 4番째의 자식 推古天皇이
73세일때 蘇我馬子宿禰는 죽었으므로 90세 이상 살았다는 것이 된다. 또 蘇我馬子宿禰의 후계자 蘇我蝦夷도
蘇我馬子宿禰가 20세일때 태어났다고 한다면 大化改新의 때는 90세 정도라서 蘇我蝦夷가 20세 일때 蘇我入鹿이
태어났다고 하면 70세 정도라서 최고령의 지배의 사회이다. 현대에도 90세의 현역으로 일선에서 활약하는 것이
어려운데 2대에 걸쳐 90세까지 사회의 제1선에서 활약했다고는 생각할수 없다.
또 자신의 曾孫의 세대의 舒明天皇에게 자신의 딸 法堤媛을 출가시킨다고 하는 불가능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력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說의 蘇我馬子宿禰는 堅塩媛과 兄妹지간이 아니고 堅塩媛의 아들로서 推古天皇의 同腹의 형으로서
一世代 내려서 생각하는 쪽이 합리적이고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가?
蘇我氏의 祖先.
뒤에 「皇極天皇의 父 茅渟王에 대해서 생각해보다。」에서 적은 것과같이、日本書紀에서 씌어 있는 皇極天皇의 父
茅渟王은、聖德太子이며 皇極天皇의 父 聖德太子인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 창조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日本書紀에서의 茅渟王을 古事記에서는 漢王의 妹 大俣王의 아들 智奴王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智奴王이
聖德太子라고 한다면, 大俣王은 聖德太子의 母 穴橞部間人皇女를 나타내고있는 것이 되어,
穴橞部間人皇女는 用明天皇의 死後 用明天皇의 아들 田目皇子와 再婚하여 자식까지 낳았기 때문에 大俣王이라고
이름지었을 것이다.
穴橞部間人皇女는 나의 說에서는, 蘇我馬子宿禰의 딸이 되므로 穴橞部間人皇女의 兄 漢王은 蘇我馬子宿禰의 후계자
蘇我蝦夷가 된다. 蘇我本宗家의 跡取는 漢王이었다。
蘇我氏의 系譜는 、建内宿禰(武内宿禰)、満智, 韓子、高麗、稲目이라고 되어 있다。
나의 說에서의 天皇家는、仁德天皇은 武内宿禰이며 若沼毛二俣王은 仁德天皇의 아들이고, 継体天皇은 若沼毛二俣王의
아들이고 継体天皇은 57세때 천황에 즉위하고 나서 欽明天皇을 얻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世代를 헤아릴때 천황에
즉위하기전의 아들, 安閑天皇을 넣어서 継体天皇, 安閑天皇、欽明天皇으로 3세대라고 생각하는 편이 他家의 世代수와
비교할 때 세대수가 맞다고 생각된다.
欽明 31年에 蘇我稲目大臣이 죽었으므로、蘇我家의 武内宿禰.、満智、韓子、高麗、.稲目의 5世代와、나의 說에서의
天皇家를 仁德天皇(武内宿禰)、若沼毛二俣王、継体天皇、安閑天皇、欽明天皇이라고 헤아리면 5世代로 一致한다.
이것으로부터 나의 說의 天皇家도 蘇我家의 系譜도 맞고 있지 않는가
蘇賀石河宿禰가 蘇我臣、川邊臣、田中臣、高向臣、小治田、櫻井臣、岸田臣 等의 祖로 되어있다. 蘇賀石河宿禰는、
蘇我本宗家의 分家의 蘇我倉家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각각의 臣은 무언가 共通의 祖先을 가지고 있는
그룹이라고 생각된다. 각각의 臣의 居住地、「坂上系図」阿智王条所引의 新撰姓氏録으로부터 그 祖先은、阿知使主
(阿智王)과、阿知使主와 함께 渡来했던 七姓漢人으로 推測된다.
応神 20年에 倭漢直의 祖라고 하는 阿知使主는、党類 17県을 이끌고 來帰했다
応神 20年은 실제상은 없고 仁德天皇(武内宿禰)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시대로서 仁德天皇(武内宿禰)와
阿知使主의 딸 사이에 생긴 자식이 蘇我氏의 祖先 蘇賀満智로서、이미 仁德天皇의 아들 履中天皇 2년 10월
(履中 2年은실제상은 없고、仁德天皇(武内宿禰)의 자식이 천황으로 되었던 시대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에 平群、
物部와 함께 国事를 담당하고 있다. 蘇我氏의 祖先 蘇賀満智의 子孫이 代代로 蘇我本宗家를 이어받아 漢王이 되어、
阿知使主의 후계자가 代代로 倭漢直을 칭했다。이것으로부터 蘇我本宗家는 、漢王으로서 代代로 代代의 倭漢直을
支配下에 두었을 것이다.
阿智王、智奴王、天智天皇은 모두 智가 붙어있다. 聖德太子、天智天皇이 阿智王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智奴王、天智天皇과 함께 智를 붙였는지도 모른다.
「蘇我稲目、蘇我馬子는 왜 大和国에서 권력을 얻었는가」
蘇我氏가 国庫로서의 内蔵의 管理권을 실질적으로 掌握하고 있었으므로, 혹은 蘇我氏가百済出身이므로 大和国에서
권력을 쥐었다고 하는등 여러 가지 이야기되고 있지만 납득할 수 없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仁德天皇(武内宿禰)과
阿知使主(智奴王)의 딸과의 사이에 생긴 蘇我氏의 祖先 蘇賀満智는、日本書紀에서는 이미 仁德天皇의 자식 履中天皇의
2년 10月에 平群、物部와 함께 .国事를 잡고있다. 蘇我氏는代代로 仁德天皇(武内宿禰)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 후에도 언제나 大和朝廷의 중추에 들어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蘇我稲目의 時代에 왜 급히 大和国의 권력을 잡았던 것일까。
蘇我稲目이 活躍했던 欽明天皇의 時代의 국가체제의 변화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欽明天皇의 時代는 前述한 바와 같이 統一国家의 誕生의 時代이다.
統一国家가 誕生하기前은、畿內의 大和国의 內에서도 大和朝廷을 中心으로 하는 連邦制를 採用했을 것이다.
畿內의 大和国의 內에서도 小国家(藩)이라고도 불리는 것을 구축했던 것이 「連」이 붙은 物部連、大伴連、尾張連 등으로,
「臣」이 붙은 蘇我氏、平群、巨勢等은 大和朝廷의 直参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蘇我稲目이 欽明天皇의 時代에 권력을 잡은 理由는、戦国時代가 끝나고 徳川幕府가 탄생한 때, 幕末의 動乱으로부터
明治政府가 탄생한 때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것이라 생각한다.
戦国時代에는 伊達正宗、加藤清正、黒田長政 등은 크나큰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統一国家 徳川幕府가 탄생하고 나면、伊達正宗、加藤清正、黒田長政조차도 徳川家康의 本多正純、安藤名次
等의 徳川幕府의 幕閣에 신경을 쓰지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幕末의 動乱으로부터 明治政府가 탄생한 때도 마찬가지다.
幕末의 動乱의 때는 薩摩의 島津久光、土佐의 山內容堂、佐賀의 鍋島閑叟 等의 有力大名는 대단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단 통일국가 明治政府가 들어서고 나자 明治政府의 중추에 있는 西郷隆盛 大久保利通、
木戸孝允에게 어떤 藩의 有力大名도、力도 影響力도 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蘇我稲目、蘇我馬子宿禰가 徳川幕府의 直参의 幕閣, .明治政府의 西郷隆盛、大久保利通으로서, 物部連、大伴連、
尾張連을 幕府時代의 有力大名、幕末의 有力大名라고 생각하면、統一国家의 탄생에 따라 蘇我稲目, 蘇我馬子宿禰가
강력한 권력을 잡게된 구조를 이해할수 있지 않겠는가
蘇我稲目, 蘇我馬子宿禰가 권력을 잡게 된 것은, 国家체제의 변화가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즉 통일국가 大和国이 될 때,
大和朝廷의 중추에 있고 直参으로서 유능하고, 統一国家 大和国을 구축하기 위하여 대단한 활약을 했을 것이다.
蘇我氏가 国庫로서 内蔵의 管理権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기때문이거나, 혹은 蘇我氏가 百済出身이기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통일국가가 성립될 때 仁德天皇(武内宿禰) 와 畿內의 豪族과의 자손으로서 大和朝廷의 중추에 있던
直参의 平群、巨勢、波多등이 번성하고、畿內의 大和国의 小国家(藩)이라고 불리는 것을 구축했던 「連」이붙은
物部連、大伴連、尾張連등이 衰해갔다
30代 敏達天皇 渟中倉太珠敷天皇 在位572-585
物部弓削守屋大連、蘇我馬子宿禰大臣
皇后의 植長真手王의 딸, 広姫와 第一 押坂彦人大兄皇子(麻呂古皇子)(舒明天皇의 父)
第二 逆登皇女, 第三 莵道磯津貝皇女
다음의 妃 春日臣仲君의 딸 老女子夫人(薬君娘)과 第一 難波皇子、第二 春日皇子、
第三 桑田皇女、第四 大派皇子、
다음의 妃 伊勢大鹿首小熊의 딸 莵名子夫人과 太姫皇女(桜井皇女)、糠手姫皇女(舒明天皇의母)를 만들다.
広姫가 죽었으므로 원래는 蘇我稲目과 堅塩媛의 딸을, 欽明天皇의 系譜의 工作으로 欽明天皇과 堅塩媛의 딸로 했던
豊御食炊屋姫尊(推古天皇)을 皇后로 하여, 敏達天皇과 第一莵道貝蛸皇女(莵道磯津貝皇女、
東宮聖德《聖德太子》에게 시집가다)、第二 竹田皇子、第三 小墾田皇女(彦人大兄皇子《押坂彦人大兄皇子》에게 시집가다)、第四 ウ守皇女(軽守皇女)、第五 尾張皇子、第六 田眼皇女(息長足日広額天皇《舒明天皇)에게 시집가다)、
第七 桜井弓張皇女를 낳다 。
敏達 14年 敏達天皇 죽다.
敏達天皇의 諱 「渟中倉太珠敷天皇」은 「泥沼(수렁)의 中에서 倉에 굵은 珠를 보증으로서
바친 天皇」이다。다음의 天皇으로부터 蘇我氏의 系列이 天皇이 되지만, 또 敏達天皇의 系列의 子孫이 天皇이 되도록 、종자인 押坂彦人大兄皇子을 남겼다 。
'뿌리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의 역사-17.일본천황의 계보(10)- 임신의 난 (0) | 2013.08.14 |
---|---|
일본의 역사-16.일본천황의 계보(9)-武의 계통의 천황으로부터 蘇我의 계통의 천황으로 (0) | 2013.08.13 |
일본의 역사-14.일본천황의 계보(7)-구황족과 신황족의 대립 (0) | 2013.08.09 |
일본의 역사-13.일본천황의 계보(6)-倭 5왕의 정리 (0) | 2013.08.07 |
일본의 역사-12.일본천황의 계보(5)-履中-反正-允恭-安康-雄略 (0) | 2013.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