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덕천황의 말년(일본서기에서는 응신천황의 시대의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인덕천황의 만년일것이다) 자색이 뛰어난 길비의
黒日賣(高城入彦皇女)가 황후의 시기 때문에 길비로 돌려보내지고 인덕천황은 그녀를 잊지못해 길비로 行幸하여 1년여간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인덕천황은 黒日賣(高城入彦皇女)의 兄 吉備兄彦皇子의 아들들에게 길비국을 분할하여 주었다(인덕천황이 길비국을
분할하여 주었을때 妥女의 葛城의 野伊呂賣을 보고 첫눈에 반하여 하룻밤을 같이 하여 생긴 것이 葛城의 野伊呂賣의 아들
伊奢能麻和迦王(雄略天皇)인데 일본서기에는 雄略天皇이 妥女의 童女君과 하룻밤을 함께 했을때 생긴 아들이 자신의 아들인가
라고 의심하고 있는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지만 의심받은 것은 雄略天皇 자신이다. 그것이 인덕천황의 사망과, 웅략천황의
탄생이 427년으로 일치하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吉備兄彦皇子, 黒日賣(高城入彦皇女), 弟姫皇女(葛城의 野伊呂賣)는
경행천황과 妾 사이에서 생긴 자녀들)
장년간 길비세력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정권을 잡은 畿內勢力은, 인덕천황이 길비국의 왕제를 폐지하고 길비국을 大和國으로
병합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인덕천황이 길비국을 분할하여 주었다는 것이 인덕천황의 기반이던 畿內勢力의
지지를 잃고, 인덕천황의 실각의 원인이었다고 생각되기때문에 응신천황의 시대가 아니고 인덕천황의 만년일 것이다.
菟道稚郞子皇子의 천황추대, 인덕천황의 院政의 체제에 참을수 없었던 것은 磐之媛命(高城入姬)황후, 長男 去来穂別尊(額田大
中彦皇子, 履中天皇), 차남 反正天皇(大山守皇子), 3남 允恭天皇(去来真稚皇子)이다. 자신들이 천황, 황후가 될 생각으로
중애천황의 아들, 가고坂皇子와 忍熊皇子의 길비세력과 목숨걸고 싸웠는데, 이대로는 菟道稚郞子皇子의 천황추대로 끝나버릴
것 같았다. 인덕천황의 길비국을 분할하여 독립시키는 정책이 畿內에서 인기가 없음을 놓치지않고, 인덕천황의 院政의 체제에
더욱더 참을수 없었던 강경파인 차남 反正天皇(大山守皇子), 磐之媛命(高城入姬)황후가 중심이 되어 菟道稚郞子皇子의 천황,
인덕천황(武内宿禰)를 일거에 죽이고 정권을 손에 넣게 된다.
이것이 일본서기에 적혀있는 [飛騨国에 2개의 얼굴을 가진 宿禰가 있는데, 얼굴은 서로 반대로 향하고, 몸체는 하나로, 수족은
각각 붙어있고 膝(무릎)은 있지만 膕(오금)은 없었다. 宿禰는 세게 약탈하여, 황명에 따르지 않았기때문에 武振熊에게 죽임을
당했다]라는 이야기다.
2개의 얼굴을 가진 宿禰라는 것은 武内宿禰와 인덕천황의 2개의 얼굴을 가진 武内宿禰일 것이다. 武振熊은 武内宿禰의 2人 3脚의
상대이므로 [武振熊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거짓말이고 武振熊도 武内宿禰와 함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다음의 이야기이지만,
인덕천황이 陵을 짓고 있는데 들 가운데에서 사슴이 뛰어들어와 急死한다.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슴의 내부를 마구 먹어치운 百舌鳥(지빠귀)가 耳(귀)로부터 튀어나온, 각각의 땅을 百舌鳥耳原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斎藤道三이 蝮(살모사)라고 말해지는 것과 닮아있어서 인덕천황의 자식들이 아비인 인덕천황을 죽이고 탈취한 것을
말하고 잇는 것이다. 고사기에서는 인덕천황의 아들 瑞歯別皇子(反正天皇)은 蝮(살모사)의 水歯別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의 이야기이지만,
毒気를 내는 大蛇가、吉備의 中国의 川嶋河의 分岐点에 있어서、通行人에게 방해를 주고 있었다. 大蛇에 匏(瓢箪표주박)을 3개
가라앉히면 허락해 준다고 말하지만 大蛇를 가라앉힐수 없었기때문에 大蛇를 힘차게 내리쳐 죽이다. 뱀의 일족도 엄청 많이 있었는데
모조리 잘라 죽였다.
배반자도 나왔지만 천황이 솔선하여 선정을 베풀었기때문에 나라는 치유되었다. 87년에 인덕천황이 崩했다.
오랜기간동안 길비세력(7대 효령천황의 자손)에게 지배당해왔던 畿內勢力(8대 효원천황의 자손)은 인덕천황이 정권을 잡은 것에서
일거에 길비세력의 王制를 폐지하여 大化國에 병합하는 것을 기대해 왔지만, 인덕천황은 길비에의 行幸에서 黑日賣, 葛城의 野伊呂賣
에게 넋을 잃어, 길비국을 大化國에 병합하는 것 없이 경행천황의 妾의 子 吉備兄彦皇子의 아들에게 3분할하여 주고 말았던 것으로
인덕천황의 기반인 畿內勢力의 지지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前記의 大蛇의 이야기는 이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리라.
宿禰의 2개의 얼굴은 서로 반대쪽으로 향해, 몸체는 1개로써 수족은 각각에 붙어있고 膝(무릎)이 있지만 膕(오금) 없었다.
[宿禰는 膕(오금)이 없었다]는 인덕천황의 기반인 畿內勢力의 지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인덕천황의 기반인 畿內勢力의 지지를 잃어버렸던 때를 놓치지않고 菟道稚郞子皇子의 천황, 인덕천황의 院政의 체제에 오랫동안
참아왔던 磐之媛命(五百城入姬皇女)황후, 長男去来穂別尊(額田大中彦皇子, 履中天皇), 反正天皇(大山守皇子), 允恭天皇
(去来真稚皇子)이 공격에 나선것이다.
인덕천황의 諱는 大鷦鷯天皇이다.
인덕천황은 명예천황이고 실제 천황으로는 되지 않았기때문에 大詐欺를 친 것이므로 諱가 大鷦鷯天皇으로 된 것일것이다.
雄略天皇이 427년에 태어났기때문에 16대 인덕천황은 427년까지는 살아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16대 인덕천황의 생존연대는 385~427년, 院政의 재위년대 420?~427
菟道稚郎子皇子는 宋書의「讚」으로 「播磨国風土記」에서는 宇治天皇으로 기록되어있고 생존년은 不明~427, 천황재위년대
420?~4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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