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http://www.cnara.net 이기훈님의 <동이 한국사>에서 발췌 편집함
연대 |
중원, 산동 |
요서, |
요동 만주 |
한반도 |
|
|
요하지역 주요 신석기문화 1.소하서문화(BC7000-BC6500) 2.흥륭와문화(BC6200-B5200) 3.사해문화(BC 5600- ) 4.부하문화(BC5200-BC 5000) 5.조보구문화(BC 5000 - 4400) |
|
|
BC6000 |
|
요하문명(발해연안문명) (홍산문화~정가와자 문화) |
|
|
|
|
|
|
|
BC5300 |
해변- 북신문화 |
|
|
|
~ 4500 |
|
홍산문화(BC4000~BC 3500) |
|
|
|
|
|
예족의 토템이 호랑이요, 맥족의 토템이 곰 <한국상고사연구> |
|
|
내륙 앙소문화 (황하 중류, 상류) (BC5000~ 3000) |
소하연 문화(BC 3000)-홍산문화가 멸망하여 소하연문화로 교체된다- 하가점 하층 문화로 발전한다. (BC 2400) |
원주민 예족 |
원주민 예족-신석기문화 |
BC4300 |
|
고대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 |
|
고인돌 |
~ 2600 |
대문구문화 |
(단군조선)예족 |
고인돌 |
빗살무늬토기 |
|
|
삼족토기 |
비파형동검 |
|
|
(3황) |
|
빗살무늬토기 |
패총 |
2800 |
복희씨-복희는 동이족 |
|
|
|
~2000 |
신농씨 (용산문명) |
|
|
|
bc2600 |
헌원씨 탁록대전 치우천황(동이족) (동이족) 구려족(九黎族) |
|
|
|
|
악석문화 |
|
|
|
|
(5제) 황하 이남 |
|
|
|
|
소호(少昊) |
|
|
|
|
제준(帝俊), |
|
|
|
bc2333 |
제곡(帝嚳), |
|
|
|
|
요(堯) 요임금 |
고조선건국-단군(檀君) *단군이 아사달에 세운 나라는辰檀=辰國이다(조선은 기자조선국에 나오는 조선현에서 유래) |
|
|
|
순(舜)제순(帝舜), |
(하가점하층문화) 요하지방 |
|
|
|
|
|
|
|
bc2070 |
하(夏)나라 |
|
|
|
~1600 |
순의사후 우가 왕위에 오름-염제(炎帝) |
|
|
|
|
우의 성은 사(姒)였지만 왕조 창시 후에 하후(夏后)로 바꾸었다. |
황하 하류지역에서(BC 1600년)상나라는 남쪽으로 중원을 점령했고 고죽국은 동쪽으로 대릉하 유역으로 이주 |
|
|
|
선흉노 귀방 |
|
이민족 집단의 도래로 BC 14세기경에 위영자문화로 교체되었다(기자+고죽국) 요하남부지역 소능하,스키타이문화-무기,마구,동물장식 |
|
BC1147 |
상(商)나라(동이족) |
|
|
|
~ 1113 |
시조는 설-자씨 성(子姓)-탕왕 |
|
|
|
|
동쪽 구이족과 세력다툼-중원의 라이벌 -,래이萊夷,회이淮夷 |
|
|
|
|
|
|
|
|
|
주왕(紂王)과 달기-자씨 |
|
|
|
|
|
|
|
|
bc1046 |
주(周)나라 무왕(희씨)-화하족 백이, 숙제 |
|
|
|
|
호경 강태공 |
|
|
|
bc1046 |
봉건제 실시- 기자 조선후로 봉함 |
기자조선(bc1046~)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大凌河) 유역으로 이동“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이 있고, 요동이 있다.”<사기>소진 |
“(고조선왕) 단군왕검은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주 무왕이 즉위한 해(상나라가 멸망한 BC 1046년 무렵)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다.”삼국유사(bc1046~)( 개원, 심양) 부여의 중심지가 심양이다) 辰조선, 辰國 |
|
|
주왕의 아들인 무경은 상나라의 옛 땅에 봉해졌으나 무왕의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해 주살당했다. |
요서 지방에 상나라유민들이 이주해와 하가점 상층 문화(BC 1100년)로 교체 (요령성 조양시 일대) -스키타이 문화로, 상나라 요소가 포함된 문명이다 |
빗살무늬토기가 사라지고 보다 발전된 형태의 토기인 민무늬토기가 출현한다. |
|
|
그 후, 무경의 백부의 미자계(주왕의 형)가 송에 봉해져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했다. |
요하 서쪽(요서)으로는 중국식의 발이 세 개 달린 그릇인 삼족기가 동쪽과 뚜렷이 구분되어 사용되기 시작한다. |
하가점상층문화(산융)- 비파검보다 공병식 동검을 사용 |
|
|
|
|
| |
BC 664 |
조연전쟁- 주나라 제후국들인(연, 제)와 기자조선과의 전쟁 |
기자조선과 고죽국이 요동의 단군조선과 힘을 합쳐 연,제와 전쟁<춘추>BC 664 -(기자조선-맥족) |
BC 664 조연전쟁 고죽국이 요동의 단군조선과 관계를 돈독히 함 -(단군조선-예족) 요동의 심양 일대에 비파형동검문화가 출현하고 토착 문명(쌍방유형)이 사라진다. 요동 남부지역에서 고인돌을 만들던 사람들이 다른 형태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다(구덩무덤, 돌덧널무덤). 요서 (조양 중심)의 비파형동검문화를 사용하던 맥계 사람들(상나라 및 북방유목민족 후예)이 기원전 6세기에 요동의 심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의 부여로 이주한 사실을 설명한다. |
맥족(상나라계 북방민)이 남긴 돌덧널무덤(석곽묘)은 초기 철기시대에 한반도 북부 고구려 지역으로 퍼지고 이후 주로 한반도 동남부 지역(신라 지역)으로 전파 되며 AD 6세기 이후 쇠퇴하게 된다.
|
|
|
비파형동검의 분포를 토대로 고조선의 영토를 추정한다 십이대영자문화 -동호 |
정가와자 문화로 교체한다.(BC 7~8)고조선 |
BC 664년 조연전쟁 발발로 BC7~8세기경 한차례 북방 동이계 사람들(마한?)의 유입이 있었고, |
|
|
|
고조선 해체-부여,마한 건국, 진국 |
|
|
전국7웅 |
|
탁리국-BC 4~3세기경 선부여문화, 백금보-한서2기문화. 부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예인(穢人)들이 그들의 수장을 예왕(穢王)으로 부른 집단이 여럿 있었다 |
|
BC 403 |
중국 진(晉)의 한(韓)˙위(魏)˙조(趙)가 각각 자립하여 제후로 됨. 전국시대의 시작 |
|
|
|
BC 280 |
연진개가 조선을 침입 |
BC 280 연진개 침입-眞番朝鮮(진번조선)’을 2,000리나 침범하였다<사기조선전>-만번한경계 (만번한은 평북 박천군에 있는 박천강(江)유역) |
BC 280 연진개 眞番朝鮮침입으로기자조선(스키타이, 흉노계, 맥계)의 직접적이고 대규모적인 한반도 (평양)유입 및 지배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眞番과 辰國은 요동지방인 것으로 보인다) |
기자조선 (평양)유입-마한은 남쪽으로 이주 |
|
|
|
기자조선이 중앙아시아 유목민인 ‘흉노’와 관계가 깊었던 사실은 <한서>에 ‘한 무제가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여 현토와 낙랑을 일으키니 이로서 흉노의 왼쪽 팔을 끊게 된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기자조선)이 흉노의 왼쪽 팔이라는 말은 흉노와 조선(낙랑)이 하나의 공통된 세력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
|
|
|
연나라의 침입으로 요서지역에서 비파형동검이 모두 소멸 |
북방문명의 상징인 동물장식과 새모양을 장식한 칼자루가 퍼진다 |
BC 3세기경에는 고인돌이 서북한 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서북한 지역에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세운 사람들(흉노계 맥족)이 고인돌을 만들던 사람들(예맥족)을 몰아내거나 정복했음을 의미한다. 기자조선은 진(秦)에게 우호적이었다 |
|
|
|
|
이들 요서지역에서 서북한 지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상나라, 스키타이와 관계 깊은 중국 북방민인 흉노계(맥계) 사람들로서, 이후 낙랑, 백제, 신라 등지의 주도세력이 된다. |
|
|
|
『사기』「화식열전」에는 연이 북쪽으로는 오환(烏桓)․부여(夫餘)와 이웃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穢貊)․조선․진번에서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 연이 221년에 망하므로 부여는 그 이전부터 존재 |
세형동검(비파형보다 날렵한 모습의 청동검)과 덧널무덤 양식이 한반도 전체에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
|
|
부여(扶餘) 성립-BC 3세기경 동명이 탁리국 세력으로부터 나와 시엄수를 건너가 송화강 유역 건국. 예족-『논형』과『위략』.전기 중심지는 '녹산'-현도군에서 1000리가 떨어진 곳에 길림시-'서단산 문화'라는 청동기 유적지가 있음. 고구려의 침입을 받고 서쪽으로 중심지를 옮김.기원후 4세기 이후의 부여 중심지역을 농안으로 파악하고 있다 |
|
|
|
|
예족 부여(단군부여)-흉노인과 같이 ‘형사취수제, 흰색숭배, 성을 쌓는 풍습, 점치는 풍습, 상나라 달력 사용, 제천의식’ -상나라의 풍습 |
|
BC 222 |
진시황-연을 포함한 제후국들을 멸망시키게 된다. 산동의 동이(구이) 완전히 정복 회수 강과 사수 강 유역(중국 동부지역) 동이(夷)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보통 국민이 되었다 |
|
“마침내 왕(단군)에게 권하여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AD 285년 선비족 모용외의 제1차 부여 공격으로 의려가 죽고 부여(북부여)의 일부 핵심 지배집단이 옥저지방으로 망명하여 건국한 나라인 동부여와는 별개이다) . 옛 도읍지에는 어떤 사람이 있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라고 칭하며 와서 도읍하였다”<삼국사기> 서쪽에서 맥족이 유입됨 -맥(박)계세력의 부여 정복 (북부여-해모수부여)-구테타 |
|
BC 202
BC 195 |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
|
BC 195 위만조선 연 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으로 피신하게 되고, 반란을 일어켜 조선 왕이 되어 조선을 다스리게 된다 |
기자조선-준은 마한으로 가서 한왕이 됨-한씨 위만조선- 진번을 복속 편입 위만조선은 국력이 매우 막강하여 그 지배 영역이 사방 수 천리-한반도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진번과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우거(右渠)가 길을 가로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다(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진국辰國은 진한)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세형동검문화가 형성되어, 한반도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BC 3세기) 이 세형동검문화는 현재 학계에서 준왕 대의 고조선(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문화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
|
|
BC 108년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토군 관할 아래 두었다.”<후한서> |
진국-辰韓者古之辰國也 진한은 옛(辰國)이다.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중략....皆古之辰國也 한은 3종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이다....중략.... 이들 모두 옛날 진국이다. |
|
|
|
|
조선과 진국이 병립했다는 설 |
|
|
|
고조선이 멸망하던 시기에 마한이 시작된다. 조선이 붕괴한 후 마한이 성립하였다는 설.
마한-북방 고구려 땅에서 발전. 옛날에 고구려는 마한이었다. 요즘 사람들 중 마한을 금마산(金馬山 익산?)으로 알고, 마한이 백제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아마 잘못일 것이다. 고구려 땅에는 (마)읍산이 있는데, 그래서 이름을 마한이라 했다.”<삼국유사>
|
마한-예족과 맥족이 함께 연합하여 세운 국가이다. 예족은 동쪽의 단군조선을 이은 부여의 기층민을 말하고, 맥족은 서쪽의 기자조선을 이은 북방 흉노(한)계 맥족을 의미 ‘마한예맥’은 예족’과 ‘맥족’이 섞여 살았던 나라였기 때문에 ‘마한예맥’이라 부른 것이다. -한반도서북부 고인돌을 만들던 사회(단군조선시기)의 하한과 마한의 상한시기가 일부 겹친다(이 말은 고조선이 멸망하던 시기에 마한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이다) 기자조선(흉노)이 마한의 본토인 서북한으로 밀려올 때 마한 사람들이 한강 이남으로 밀려나 새로운 ‘마한’을 세우게 된다.한강유역, 아산만유역, 금강유역 등지로, 이곳에는 ‘예족 계열의 고인돌’과 ‘맥족 계열의 돌널무덤’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 ‘맥족(기자-흉노족)’의 유입)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54개국 마한의 우두머리가 진왕이다. |
|
|
|
|
|
|
|
|
<기자실기>에는 위만에 패한 조선왕 기준이 측근의 신하들과 궁인을 거느리고 한반도 남부 한(韓)의 지역인 금마군에 들어가 살면서 마한 왕이라 일컬으며 50여개의 작은 나라를 통치하였고 여러 대를 전하다가 소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주한씨. 북쪽도 한씨.<후한서>그 후 준은 절멸(滅絕)되고 마한인들이 다시 스스로 진왕(辰王)을 세웠다. | |
|
|
|
고조선 원주민인 예(부여, 왜-만주지역), 중국에서 이주한 이(夷)와 맥, 호(요동, 한반도 북서부) |
마한은 BC 3세기 북쪽에서 남하한 ‘조선 유민(진한 유민)’을 받아들여 경상도 지역에 터전을 마련해준다- ‘조선 연맹국’ 그러나 평양 근처의(흉노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낙랑군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자세를 취한다 |
|
|
|
선비는 흉노와 풍습이 비슷하던 유목민으로, 이들이 고구려를 도와 중국 한나라에 대항했다. 고구려 서쪽에 있던 선비족은 과거 중원에서 동이(예맥)가 화하족에 밀릴 때(BC 11세기) 만주 서부(요하 북부)로 이주한 사람들로, 자신들이 곰 토템족 수령인 황제(黃帝, 헌원)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다.이들은 후한시기(2세기 중엽) 이후로 중국을 지속적으로 침략하여 여러 국가를 세우고 이후 북위(386∼534)를 세워 황하 이북의 북중국을 다스리게 된다 |
마한은 부여계 신흥 세력인 고구려에는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21년)왕이 마한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 을 포위하였다. (122년) 여름에, 맥(고구려) 사람들이 다시 요동에 있는 선비 사람들 8천 여 명과 함께 요대를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하였다. 가을에 (고구려) 궁 임금은 마한예맥의 기병 몇 천을 이끌고 현토를 포위한다.”<후한서> |
|
|
|
|
|
BC 108 |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멸망 |
|
|
위만조선 우거왕때 재상 역계경이 2천여호의 주민과 함께 동쪽의 辰國으로 망명. BC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4군설치(진번, 임둔, 낙랑, 현도) 진번의 위치 |
|
|
BC 58년 동부여에서 주몽 탄생 |
| |
BC 37 |
|
|
BC 37년 주몽이 졸본에서 졸본부여 건국-한나라 현도군에 속해있던 고구려현을 점령하면서(AD 14년), 국호를 ‘고구려’로 확정짓는다. 시조는 추모왕. 동명은 부여시조로 고구려와는 무관 |
BC57 고조선의 유민(遺民) 박혁거세 서나벌
|
|
|
|
나중에 자신들의 모국인 부여마저 무너뜨린다(AD 22년). |
|
|
|
|
주몽이 정복한 고구려(고구려현)는 단군조선과 상나라 문화를 흡수한 부여세력과, BC 3세기 이후 요서와 중국 동부에서 대거 동쪽으로 이주한 맥족, 구려(고리, 구이, 만이)의 연합국가로 맥족 중심의 국가였다. 구려(고구려)’는 일명 맥(貊)이라고도 불린다. |
|
|
|
|
한나라(漢 BC 202∼AD 220)와 전쟁을 통해 성장(2세기 말까지 170년 동안) 그들 맥족(기자조선)이 중원에서 밀려났던 세력이다 |
|
|
|
|
한이 망한후 많은 유민유입 |
|
|
|
일본-조몬인(남방계특징을 가진 신석기 사람들) 3세기 이후 야요이족(북방계 특징을 가진 한반도 청동기 사람들)이 조몬인을 몰아내고 규슈에 처음 정착한후 일본 땅 절반을 넘어 동부까지 퍼져나갔다, 이들은 농부였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밝혀냈다 |
한나라(낙랑)에 조공한 30여국의 ‘왜’는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한나라 군현인 평양지역 낙랑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충남 지역의 강국‘마한’을 제외한 한반도 동부와 남부의 많은 소국들이었을 것이다-왜(倭)와 예(濊)가 예족(부여족) 사람들이 같은 의미로 사용 BC 3세기 이후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세력에 의해 통제를 당한다 |
왜-영산강 유역에서는 북방 맥족 계열(기자조선계)의 돌널무덤을 만들지 않고 예족계열(단군조선계)의 고인돌을 만들다 독자적인 독무덤(큰 도자기에 시신을 넣는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다 -‘예족(단군조선)’문화를 더 오래 간직한 사람들- <후한서>에 마한 남쪽에 접해있다는 ‘왜’로 표현되는 한반도 원주민 예족(왜족)이 아닌가 한다- BC7~8세기경 남하한 고인돌 세력 예족. |
|
|
|
|
|
|
|
|
|
'뿌리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민족의 원류3 (0) | 2013.02.05 |
---|---|
한민족의 원류2 (0) | 2013.02.05 |
신라김씨는 선비족 모용씨(鮮卑族 慕容氏)의 후예인가?(2) (0) | 2013.01.26 |
신라김씨는 선비족 모용씨(鮮卑族 慕容氏)의 후예인가? (0) | 2013.01.26 |
신라김씨, 가야김씨는 흉노족인가? (0) | 2013.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