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김알지 신화 (삼국사기, 삼국유사)
“65년(탈해왕9) 8월 4일 왕이 밤에 금성(金城·경주)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호공이 시림 속에서 큰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 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어 왕께 아뢰었다. 왕이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이는 박혁거세의 옛 일과 같으므로, 박혁거세를 알지(閼智·지혜가 뛰어나 이름을 ‘알지’라고도 함)라 한 선례에 따라 이름 지었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 아기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하였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태자로 책봉하니 그가 곧 김알지이다. 그리고 시림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
*석탈해는 남해왕(신라 2대왕)의 장녀 아효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가, 남해왕의 아들 유리왕이 죽은 후, 62세가 되어서야 왕위에 오르지만(신라 4대왕), 그때까지도 아들이 없었고, 석탈해왕 9년 그의 나이 70세에 이르러 계림에서 금궤에 든 미동(美童)을 얻어 양자를 삼았고, 그 양자가 바로 김알지다
『삼국유사』〈김알지〉
왕이 길일을 가려서 태자로 책봉했으나 뒤에 파사왕(破娑王)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이에 성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이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가 구도(俱道 또는 仇刀라고 함)를 낳고, 구도가 미추(味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2.문무왕 비문(신라 30대왕)- 1796년 경주에서 발견
1행 國新羅文武王陵之碑 及飱國學少卿臣金▨▨奉 敎撰」
2행 通三▨兵殊▨▨▨匡▨配天統物畵野經( )積德 匡時濟難應神 靈命」
3행 派鯨津氏映三山之( )東拒開梧之境南鄰▨桂之 接黃龍駕朱蒙 承白武仰」
4행 問盡善其能名實兩濟德位兼隆地跨八夤勲超三 巍蕩蕩不可得而稱者 我新」
5행 君靈源自敻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 )侯祭天之胤傳七葉以」
6행 焉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
7행 大王思術深長風姿英拔量同江海威若雷霆▨地 方卷跡停烽罷候萬里澄氣克勤開」
(중략)
24행 貺更興秦伯之基德」
(후략)
비문에 나오는 火官之后, 秺侯, 星漢王, 秦伯, 派鯨津氏 의 의미
火官之后 - 『예기』에 나오는 화관(火官)을 이르는 것이라 하며,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나 소남자에 의하면 화관이란 재상과 동일한 직함이며, 이 화관에 역임하다 나중에 임금이 된 사람을 일컬어 화관지후라 불렀다고 한다. 화관지후는 고대에 불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불은 단순한 불이 아니라 해를 의미하며 불을 관장한다는 것은 불(해=천제)에 대한 제사를 관장하였다는 뜻이다.고대에는 불(해와 달)을 하늘나라 임금으로 섬겼기 때문에 불(해와 달)에 대한 제사는 천제의 아들(천자)을 칭하는 자만이 주관할 수 있었다.고대 기록에 가장 먼저 화관지후로 나오는 사람은 순 임금이다-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순(舜·재위 9년 BC 2320∼2312)
秺侯-투후는 한 소제가 김일제(BC134∼BC86)에게 내려 준 제후의 명칭이다. 한서 김일제전을 보면, 김일제는 흉노족 휴도왕의 아들로 한나라에 포로가 되어 지내다 한나라 7대 황제 무제(B.C 141년~87년)를 섬긴 공으로 무제 때 김씨를 사성 받고, 소제 때 투후 벼슬을 한 인물이다. 秺侯祭天之胤- 투후와 제천지윤은 같은 의미로 7대를 전하여 김일제의 5대손 星 뒤에도 2대나 더 투후 벼슬을 하였다. (BC 100년대)
秦伯-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춘추시대 진 목공(穆公) (재위-B.C 660년부터 B.C 621년) 진의 제9대 군주였던 목공은 작고 외진 곳에 있는 진나라를 북으로는 河西를, 서쪽으로는 西戎에 이르기까지 사방 12개국을 제패하여 진나라를 굳건한 기반에 올려놓은 인물이다-진백의 터전을 다시 일어켰다는 뜻.
派鯨津氏-"派鯨津氏"의 경진은 고래나루라는 뜻이고, 氏는 고래나루로 온 분이라는 뜻이다.
동해는 옛날부터 고래가 많이 잡히는 곳이다. 경북 영덕군 병곡면에 고래불 해수욕장이 있고, 포항의 옛 이름이 고래나루이고, 울산도 고래나루라고 불렀다. 즉 고래나루는 영덕, 포항, 울산 등지의 동해안을 가리킨다. 派鯨津氏는 김씨계 무리가 신라로 올 때 육로로 온 것이 아니라 바다를 통하여 고래나루 즉 동해안으로 왔으며, 투후를 지낸 분 또는 그 후손이 고래나루로 왔다는 뜻이다(BC 100년대)
(일부 사학자는 경진씨를 秦이 망하면서 일족을 안전지대인 지금의 경주나 밀양으로 파견한 휴도왕의 세력으로 해석한다)
星漢王-문무왕의 15대 선조로 나오는 인물이다.
김알지가 성한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삼국사기와 경주김씨 족보에는 세한, 삼국유사에는 열한으로 기록되어 있는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을 지칭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문무왕비문(682) 에는 성한왕(星漢王)
김인문비 (695) 에는 태조한왕(太祖漢王)
흥덕왕릉비(872)에는 태조성왕 (太祖星王)
진철대사 보월 승공탑비(937)에는 성한지묘(星漢之苗)
진공대사 보법탑비 (939)에는 기선강자성한(其先降自聖韓)
진흥왕 순수비(마운령비,황초령비)에는 태조지묘(太祖之苗) 로 표시되어 있다.
비문의 성한왕의 등장이 설화속 김알지의 등장과 비슷하다.
문무왕비문 김알지
원궁(圓穹) 하늘 천(天)
상림(祥林) 수풀 시림(始林)
금여(金輿) 출현 금궤(金櫃)
<삼국사기> 설화속의 김알지는 시림의 금궤속에서 나온다.
비문에서 성한왕은 상림에서 금여, 즉 금수레를 타고 나온다.
"성한왕이 원궁, 즉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상림이라는 성스러운 숲이 나옵니다.
그리고 금여라는 금수레에 좌정했다, 앉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양 설화가 비슷하기 때문에 성한왕이 김알지가 아닌가 추측하는 견해도 조심스럽게 나오고있다." - 이도학 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문무왕비문에 따르면 비문의 성한왕은 오히려 김알지에 가깝다.
추사 김정희가 문무왕비문을 해독해놓은 <해동비고(海東碑攷)>에서 문무왕비문속에 성한왕은 김알지라고 결론지었다.
비문의 내용-
문무왕의 조상은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 하였으며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왔다
문무왕 비문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라지고 태조 성한왕만이 존재한다. 신라는 이제 김씨 단독 왕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바로 문무왕릉비문인 셈이다.
3.재당(在唐) 신라인의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함통(咸通) 5년(864)에 작성.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장안)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된 묘지명으로 9세기 신라인으로서 당에 가서 살다가 죽은 김씨부인의 묘-현재 시안시 비림박물관에 소장 중)
前知桂陽監將仕郞侍御史內供奉李璆夫人京兆金氏墓誌銘幷序
鄕貢進士崔希古撰 翰林待詔承奉郞守建州長史董咸書篆
太上天子有國泰宗陽號少昊氏金天卽吾宗受氏世祖厥後派疏枝分有昌有徽蔓衍四天下亦已多已衆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仕武帝愼名節陟拜侍中常侍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軒紱燉煌繇是望係京兆郡史籍敍載莫之與京必世後仁徵驗斯在及漢不見德亂離瘼矣握粟去國避時屆遠故吾宗違異於遼東文宣王立言言忠信行篤敬雖之蠻貌其道亦行今復昌熾吾宗於遼東 夫人曾祖諱原得皇贈工部尙書 祖諱忠義皇翰林待詔檢校左散騎常侍少府監內中尙使 父諱公亮皇翰林待詔將作監承充內作判官 祖父文武餘刃究平子觀象規模運公輸如神機技乃貢藝 金門共事六朝有祿有位善始令終先夫人隴西李氏搢紳厚族夫人卽 判官次女柔順利貞稟受自然女工婦道服勤求舊及歸李氏中外戚眷咸號賢婦夫人無嗣撫訓前夫人男三人過人己子將期積善豊報豈謂天命有筭脩短定分綿遘疾瘵巫扁不攻咸通五年五月貳拾玖日終于嶺表享年卅三端公追昔平生尙存同體經山河視若平川不避艱儉堅心臨 柩遂歸世域嗣子敬玄次子敬謨次子敬元並哀毁形容遠侍 靈櫬追號网極敬玄等支殘扶喘謹備禮文以咸通五年(864)十二月七日遷神于萬年縣滻川鄕上傅村歸世塋域夫人 親叔翰林待詔前昭王傅 親兄守石淸道率府兵曹參軍聯仕 金門丞家嗣業希古與夫人兄世舊追惻有作因以請銘 銘曰
天地不仁 先死陶鈞孰是孰非 無踈無親 不饗積行 不永大命 豈伊令淑 亦罹賢聖 遘此短辰 遊岱絶秦 大道已矣 萬化同塵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 금천씨(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후략)
경조(京兆)-중국 산시성(陝西省) 장안(長安) 일대를 관할하던 행정구역.
묘지명 내용에 따르면 소호금천씨는 김씨 부인의 가문 시조이며, 그 후손인 김일제가 중시조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일제의 후손이 김일제에게서 7대가 내려와 중국이 전란으로 시끄러워지자, 그 후손들이 '요동'으로 피난해 거기에서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씨 부인은 ‘구당서’ ‘신당서’ ‘책부원귀’ 등 중국 사서들에 신라인으로 기록된 김충의(金忠義)의 손녀이자 김공량의 딸이며 이구(李璆)라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 서기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김충의 부자는 당나라 조정에서 벼슬하며 화가이자 기술자로 이름을 날렸다
5. 투후 김일제란 누구인가?
한나라 유방이 중국을 통일할 당시 지금의 몽골고원에서는 유목민 최초의 대제국(흉노)을 만들어 중국의 漢族과 대결하던 용맹무쌍한 유목민 기마군단이 출현했다. 유방은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40만을 보내 묵특선우에게 도전했다가 패해 죽음의 위기를 맞자 한나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빌어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 후 한무제는 동아시아 최강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기원전 122년 곽거병 장군을 파견해 감숙(甘肅)지방에 있던 흉노를 공격했다. 당시 흉노의 이치선우는 계속되는 패전책임을 물어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을 죽이려 하자 두 왕은 한(漢)나라에 항복하려 했는데, 도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였다. 휴도왕의 큰아들 일(日, 일제)과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한나라에 잡혀가서 한나라 황궁에서 마부로 전락하여 한무제의 말을 관리했다.
그런 굴욕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한무제의 신임을 받게되고, 흉노족 휴도 사람들은 천신에게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사람 모양의 금상(金像)을 제작했는데 금인(金人)을 숭상하는 종족(제천금인祭天金人)의 후예라 하여 김씨 성을 하사받으며 훗날 산동성 지역의 제후인 투후에까지 책봉되었다<한서> ’김일제 열전’.
알타이가 고향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책임진 일종의 샤먼王 집안 출신이므로 알타이의 의미를 따서 金氏 성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 )
(이때 漢무제의 공격을 받은 흉노의 일부는 서쪽으로 나아가 4세기 게르만족을 치면서 로마제국의 붕괴를 일으킨 훈족이 출현하게 된다. )
이렇게 해서 김 씨 성을 갖고 한나라에 정착한 김일제의 후예들은 7대에 걸쳐 漢의 황실에서 중용되어 실권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이곳이 김일제의 투국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고 김일제의 성을 금성(金城)이라고 했다.)
원래 이곳에 휴도성(김일제의 고향인)에서 살던 흉노인 5만 명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사기>에는 5만 명이라고 적혀 있고, <한서(漢書)>에는 3만 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2~3만 명의 흉노족이 이곳 투후의 땅에 와서 현지의 한족들과 어우러져 함께 '투국'을 세웠다."
왕망의 新건국(AD:8~22)
王莽은 元帝의 황후 王氏 가문 출신으로 金日의 증손자 當의 이모부였다( 김일제의 후손으로 김왕망이란 설도 있음)
반란을 일어켜 한을 멸망시키고 신이란 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되자 외가인 金日 家門은 더욱 득세한다.
그러나 王莽의 新은 15년 만에 유수(후한 광무제)에게 망하고(서기 23년) 後漢이 다시 선다
김씨가문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요서, 요동, 한반도, 일본 규슈, 오키나와로까지 도망갔고 그 일파가 경주로 들어온 金閼智라고 추정. (서기 65년-탈해이금 9년)- <삼국사기> ’탈해이사금 본기’
김수로가 김해 땅에 출현(출생)한 시점은 서기 42년이다<가락국기>. 김알지가 김수로보다 17년 늦다.
김일제의 후예들이 중국에서 사라진 시점과 김수로 집단이 한반도에 출현한 시점이 거의 비슷하다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 서기 23년,
김수로 가야 출현- 서기 42년.
서라벌에 김알지출현-서기 65년
4.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김씨가 스스로를 소호금천씨의 후예로 생각했다는 증거로 "신라 국자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비(金庾信碑)에도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少昊之胤)이라"고 하였으며 "남가야 시조 수로(南伽倻 始祖 首露)는 신라(新羅)와 同姓)"이라고 하였다.
박거물(朴居勿)이 글을 만들고 요극일(姚克一)이 글씨를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金仁問(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의 묘비문에도 신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 적혀있다.
헌원이란 중화 문명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전설적인 제왕인 황제(黃帝)를 말하고 소호금천씨는 헌원의 아들이란 기록이 있다-사마천의 사기.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이고 김일제의 동생 김윤의 5대손인 탕(湯)이 김해김씨 시조인 김수로왕이라는 것이다(북방 기마민족의 가야, 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2004년 12월 백산학보).
왕망 때 사용했던 오수전(五銖錢)과 화천 (貨泉)이 중국의 요서와 요동, 평양, 영산강 유역, 나주 낭동지역, 해남, 김해 봉황동 패총. 제주, 일본 규슈 일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하게 출토 .몸통에 화천(貨泉)이라고 찍힌 동전.이는 왕망시대, 21년 동안만 만들어진 화폐다.
김일재가 안니고 금일재다 김씨의 본래성씨가 금씨다 김씨성을 쓰게된건 이성계가 김씨가 이씨을 누른다 하여 김씨로 부르게 한것이다 .
금극목(李=木+子)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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