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신라김씨는 선비족 모용씨(鮮卑族 慕容氏)의 후예인가?(2)

청 설모 2013. 1. 26. 04:06

 

 

경기도 박물관장 李鍾宣 박사는 자신의 著書 「古新羅王陵硏究」(學硏文化社)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흥미롭게도 반도 서북부의 소위 낙랑故土에 그러한 유형의 고분

 

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지역)와 연결해서 볼 때 매우 주목할 현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漢의 팽창으로 그 일파가 서쪽으로 밀려가서 헝가리, 즉 훈족(흉노)의 나라를 세운 주체가 되었고, 뿐만 아니

 

라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일파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고 봐야 당시 시베리아 민족들의 대

 

이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에서 살던 흉노족의 일파가 기원 전 3세기경부터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고조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

 

양 근방에서 수백 년 살다가 고조선이 망하거나(서기 전 2세기), 낙랑이 고구려에 점령되는(서기 1세기) 등 정치변동기에 한반도의 동남쪽으

 

로 이동하여 지금의 경주지역에 정착했다. 그 후 4세기 그들이 신라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내물왕 이후 신라 金氏 왕족이 바로

 

북방草原이 고향인 흉노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李관장은 신라김씨 계통의 이동경로를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평양 부근-경주의 서북-동남방향으로 설정했다.

 

 

 

李鍾宣 관장은 신라는 馬具와 금공예품은 발달했으나 갑옷 등 무기류는 가야가 더 발전했다고 말했다. 가야 지배층의 종족적 분류에 대해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을 주장했던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부여族이라는 주장을 했고 국내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

 

 

李鍾宣 관장은 가야 유물로 볼 때 그 지배층은 신라 김씨와 비슷한 흉노-알타이 계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조선-낙랑지역에 거주하던 흉노

 

계가 신라지역보다 먼저 가야지역, 지금의 부산 부근에 들어온 흔적이 부산·김해 등지에서 발견되는 토광목곽분과 무기류, 그리고 銅(동복: 유

 

목민이 쓰는 구리 항아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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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는 스키타이족이 될 수 없다.

                                                                     이문수

 

 

300년 가까이 잠잠하던 그들이 갑자기 북방문화를 일으킬 근거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한양대에 계시는 김병모교수님께서 중앙아시아를 답사하고 '금관의 비밀'을 비롯한 책을 쓰셨는데, 북방기마민족의 영향을 목곽적석총, 금관과 각배를 중심으로 논하셨더군요. 파지리크고분과의 연계성은 시간상으로 400년 이상의 거리가 있어서 유물의 여러가지 면에서 가장 가까울 것 같지만 확신할 수 없다고 합니다.

 

 

각배는 고구려 덕흥리 고분 주인공뒤에 각배를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신라에만 발견된 것도 아니고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굳이 유목민들과 관련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대구와 출자모양의 왕관은 신라에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백제 영토였던 나주 반남면에서도 등장했습니다. 만약 이것을 모용씨가 백제로 가서 그 영향이 끼친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왜 신라에는 이 때의 고분 형식이 유목민들의 적석목곽분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같은 유물이 나온 백제의 나주에는 옹관묘가 성행했는지

 

 

적석목곽분에 대해 주장하면서 이 저자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무덤 양식과 똑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장은 이 뿐입니다. 선비족의 무덤양식에 대한 것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기원전후에도 있었던 해상루트를 4세기에도 없었다고 하면 안된다.

 

 

유리로 만든 그릇이나 공예품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습니다.

 

 

4세기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마구류와 북방기마적인 유적 유물이 나온다고 한 것에 대해 의문점을 품었던 것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4세기라는 점에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 왜 간과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4세기중엽말 고구려는 신라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고 4세기 말에는 신라가 고구려에 질자까지 보냈으며 실성이사금은 고구려에 의해 세워지기 까지 합니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란 엄청났을 것이고 고구려의 문화가 급속도로 신라에 들어간 것은 더할나위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배나 마구류 같은 기마민족적 성격을 가진 유물이 충분히 나올수 있는 것입니다.

 

 

 

쿠르칸은 천산지역에는 최근것이라야 bc3 세기 정도이고 그후에 신라에서나 나타나는 대형 적석목곽분이라는것이 4세기 동북아 끝에서 발견이 되니 약 500여년의 시간차가 있다.

출처: 역사문

 

 

鮮卑族(선비족)

 

鮮卑族은 원래 東胡(동호:내몽골-만주 일대에 살던 옛 민족)의 일파로서 흉노족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다. 기원 전 200년께, 좀 어리숙했던 東胡族의 임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흉노에 싸움을 걸었다가 묵특 선우가 거느린 흉노군에게 멸망당했다.「동호」는 망하고 그 무리는 크게 세 갈래로 흩어진다. 한 무리는 흉노로 흡수되고 하나는 오환(烏桓), 나머지는 선비로 통합된다.

 

 

그후 약 3백년이 지나서야 鮮卑족은 흉노에 복수를 하게 된다.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이 後漢書에 나온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원래 선비족의 인구는 40만명 정도였는데 이때 2배 이상 커지게 된다.

 

 

半匈奴(반흉노)」라 할 수 있는 선비족 가운데 한 일파가 「慕容부족」이다. 모용 부족의 명칭은 서기 150년경에 활동했던 「慕容」이란 추장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 내부에는 拓跋部(탁발부)와 宇文部(우문부) 등 여러 부족이 존재했지만 「모용」의 5대손쯤 되는 모용 涉歸(섭귀)가 추장이 되었을 즈음 모용부가 汎(범)선비족 가운데 최강의 부족으로 떠오르고 섭귀는 「선비 單于(선우)」에 올랐다.

 

모용외를 뒤이은 아들 慕容(모용황)은 337년 자신의 영역이 춘추전국시대 燕(연)나라와 겹친다하여 국호를 燕(연)이라 정하고는 왕위에 오른다 「5호16국 시대」 모용씨 왕조가 탄생한다.

 

 

서기 342년 모용황은 5만5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삼국사기는 「왕우(북로 침공군 대장)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모두 죽었다(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고 기록하고 있다 북로로 진군한 1만5천명이 아무도 본진으로 귀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수문제 당테종도 모두 선비족 탁발씨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