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한민족의 원류3

청 설모 2013. 2. 5. 00:47

연대

부여, 만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

 

369년-중국에서는 서부유목민 저족이 세운 전진과 모용선비족 전연간의 전쟁-전연의 전세가 크게 기울자 전연 세력하의 북부여가 한반도 남부로 남하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원래 286년 대방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을 빼고는 건국 이후로 한 번도 전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근초고왕이 재위하던 369년부터 394년 사이 25년 동안 무려 14번 전쟁을 한다. 369년은 모용 선비의 나라 전연에 복속돼 있던 북부여가 전연의 쇠퇴로 위기감을 느끼고 백제로 유입되던 시기이다

이들(북부여)보다 먼저 남하하여 백제를 장악했던 근초고왕은 이들을 받아들이고 연합하여 한반도의 남은 왜(동부여, 예)를 정복한다(369). 근초고왕은 마한 지역을 병합하고 왜(일본 부여)에 칠지도를 하사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백제왕(근초고왕)이 ‘일본열도의 왜’를 제후국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초고왕에 의해 왜 백제(동예 백제)’가 무너진 뒤에도 ‘왜(예)’의 기원지인 ‘동예’는 한반도 동부에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예는 고구려의 광개토왕(392~412)이 400년 신라에 5만 병력을 보내 대규모로 ‘왜’를 정벌할 때 결국 멸망하여 고구려와 신라로 편입이 된다

369년 한반도에서 밀려난 ‘한반도 왜’는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게 되며 일본에서 ‘왜(예)’세력은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일본서기>에는 ‘일본 왜’가 한반도로 건너와 가야 7국을 점령하여 실질적인 통치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穢 =hui)나

부여(夫餘 =fuyu)나

중국 발음은 비슷하다

북부여 후예들-한반도 왜(동부여, 예)’의 영원한 숙적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에는 왜’의 처절한 노력이 기록되어 있다“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 우리 속민으로 공물을 바쳐왔다. 그러나 왜(倭)가 신묘년(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

당시 한반도 남부와 일본은 기존의 왜(예, 동부여) 세력을 대신해 북부여세력에 의해 새롭게 통일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백제,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 한(韓) 지역 전체를 주름잡던 한반도 ‘왜(예, 동부여)’ 세력은 한반도 남부 가야(가라, 한, 가예, 왜)로 축소되어 562년 신라에 병합되기까지 근근이 세력을 유지하게 되며, 왜의 주요 세력은 ‘일본열도’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 열도로 밀려난 왜 역시 그곳까지 침략한 전연계 북부여인들에 의해 정복된다.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6년(396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광개토왕비문>

근초고왕을 비롯한 북부여 세력은 한반도 남부(전라남도, 경상남도)와 동부(강원도), 일본서부(규슈 중심)에 퍼져있던 ‘왜(동부여)’세력을 아우르고 있었는데,

 

왜계‘석씨’세력을 몰아낸 친선비계(친부여계)‘김씨’의 신라는 북방 유목민 왕조인 전진에 사신을 보내는데(381년), 그때 전진왕 부견이 질문한다.

391년 고구려가 신라에서 한반도 왜(예)를 일본으로 대거 몰아냈다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백제(부여 백제)를 공격하고(369~377), 신라 또한 고구려와 가까워지자 일본열도의 ‘왜’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경이 말하는 해동(海東)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신라사신 위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이름이 바뀌었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일본서기>가 ‘한반도 왜’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열도 왜’의 이야기를 쓰는 시기는 5세기 선비계 ‘모씨(모용씨)’ 세력이 한반도를 통일하고 일본으로 진입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시기(461년 이후)부터이다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의 국력 약화는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열도에 걸쳐 있던 ‘왜’ 세력이 대대적으로 한반도를 점령하는 계기가 된다(391).

 

4세기 후반 말을 타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수많은 소국을 점령했던 부여(백제) 전사들은 한반도의 강성한 국가였던 고구려, 신라 등을 어렵게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일본열도를 장악한 뒤, 자신들이 거쳐 왔던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일본에서 많은 군사들을 한반도로 동원한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왜’, 곧 일본열도에서 한반도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기원이라고볼수있다.

 

 

백제’를 ‘백잔(百殘)’, 즉 ‘백 여가의 잔여세력’이라 부른 것은 ‘북부여 일파’가 만주에서 선비족에게 멸망하자 그 ‘남은 무리(근초고왕 일파)’가 남하하여 ‘왜 백제’를 정복하고 세운 나라가 ‘부여 백제(남부여)’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

. 백제는 고구려에 빼앗긴 북부지역 땅을 찾기 위해 고구려와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8000명의 사망자를 내는 대패를 한다(395년)

 

그러므로 대체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는 근초고왕(4세기) 이전에는 ‘동부여(동예)’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동부 주민을 말하고, 4세기 후반 이후에는 한반도 남부 및 일본을 점령한 북부여(전연 부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407). 후연이 망하자 고운(모용운)은 후연 모용씨의 대를 이어 북연의 왕이 되고모용씨 연나라와 고구려와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게 된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4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다시 왜와 연합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북부지역을 차지하게 된다(392년).

이렇게 ‘고구려’에 의해 위기에 처한 백제는 그동안 자신들이 한수 아래의 제후국으로 여기던 ‘왜’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태자를 인질로 보내기에 이른다(397년).

 

백제가 의지하여 고구려를 대항할 정도로 강했던 이 ‘왜’는 생각보다 넓은 지역을 차지했던 ‘한(왜) 연맹’으로 보고 있다. 말갈로 불리던 강원도 지역 ‘왜(동예)’, 근초고왕에 의해 한반도 남부로 밀려난 마한,

 

집권 2년 후 측근에 의해 살해되고 풍발(재위:409~430)이 그의 뒤를 이어 북연의 왕이 된다

 

“영락 9년(399년)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해하고 소통하였다.”<광개토왕비문>

 

신라가 점령하지 못한 경상도 인근 국가들(가야), 일본 서부 규슈에서 세력을 키우던 ‘일본열도 왜’ 등을 모두 포함한 국가 연맹체가 ‘왜’였을 것으로본다

 

436년 북연 왕 풍홍때 탁발 선비의 나라 북위가 북연을 침입- 북연은 수도 황룡성(조양)을 버리고 왕과 귀족, 평민에 이르기까지 대규모로 고구려에 투항한다.-용성(황룡성)은 북연이 북위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나면서(397) 요서 조양에 다시 세운 수도이다. 이 북연의 수도 용성은 왕 풍홍이 고구려로 도피하면서 불태울 때 그 불이 열흘 동안이나 탈정도로 규모가 장대했다.

이미 동북아시아 강국이 된 고구려에 북연 세력의 유입은 고구려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고구려의 인구가 북위 건국(386년) 이후 5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광개토대왕)세 배가 늘어났다(438)

“10년(400년) 왕(광개토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동원하여 신라를 구원하러 출발했다. 남거성에서 신라성까지 왜 사람들이 그 땅에 가득했는데, 고구려군이 이르자 왜는 퇴각하였으며, 이에 왜의 뒤를 급히 쫓아가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게 된다. 성은 곧 항복하여 신라인으로 지키게 했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고구려)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나라 경내에 가득하여 성과 연못을 파괴하고 있고, 노비들과 외국인을 양민으로 삼고 있으니, 왕께 귀의하여 명을 받고자 합니다.’ 태왕(광개토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여 특별히 사신을 돌려보내며 비밀 계획을 고하게 하였다.” (광개토왕비문)

왜’는 고대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져 살며 해를 숭배했던 ‘예족(동이, 부여)’을 기층민으로, BC 7세기 이후 중국 북부 맥족(흉노, 기자조선)의 동진으로 합쳐진‘예맥’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이 집요하게 신라를 공격한 이유는 신라에 유독 자신들의 적이자 중국 한나라 군현이었던 낙랑(흉노, 선비) 세력의 유입이 많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선비족(북연) 탄압 -장수왕이 풍홍과 그의 자손 10여 인을 죽이자 고구려에 투항한 많은 선비족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신라성과 염성에서 왜 도적(왜구)을 색출하자 왜가 크게 무너졌으며, 성 안의 열에 아홉은 왜를 따르기 거부하였으며, 이에 신라인이 다스리게 했다. 남은 왜군은 도망하였다.” <광개토왕비문>

 

 

당시 신라의 지도층인 낙랑계 김씨 세력이 ‘왜’에 의해 거의 국가의 경영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왜’가 신라에 쳐들어와 노비나 외국인을 양민으로 삼았던 이유는 ‘왜’가 신라 지배층 김씨보다는 신라의 기층민인 ‘예’와 가까운 사람들이었음을 암시한다고 본다.

한반도 선주민 왜(예, 동부여, 가야, 말갈, 규슈)가 4세기 말 백제와 신라를 침공한 이유는 고구려에 의해 나라가 위태로워진 백제와 신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당시 왜가 신라를 장악했던 상황은 광개토왕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북연 마지막 왕 풍홍이 고구려 망명하기 전(435) ‘고구려에 의지하였다가 나중에 나라를 일으키겠다.’라고 했듯이 고구려에 투항했던 북연 세력은 고구려에서 받은 차별대우를 피해고 자신들의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왜가 퇴각한 한반도 남부‘임나가라 종발성’이 신라가 다스리던 땅이 아닌 ‘왜’가 다스리던 땅이었다는 사실과, 신라 사람들이 ‘왜’를 따를 것인지, ‘신라’를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사실과 그들이 신라 기층민과 가까웠던 사람들(석씨계 예인)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왜(예, 가야)가 장악했던 신라를 고구려가 구원하자, 신라는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되며,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의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346)한강 유역 백제에서 근초고왕에게 내몰린 동부여(동예)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지인 한반도 동북으로 위축된다. 40여년 만에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387).

왜(동예)계 석씨에서 낙랑계 김씨로 넘어간 신라 역시 공격하기 시작한다(395).

그러나 동부여(동예, 말갈)의 한반도 영토회복 노력은 고구려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면서(410) 소멸된다

 

 

(313)낙랑이 고구려에 망할 때 낙랑유민이 일부는 연나라로 일부는 신라로 투항했으므로 어느정도 친밀한 면도 있었다.

4세기 후반 백제 사람들은 자신들이 동아시아의 중심국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들은 과거 선비족의 주도하에 중원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 비록 중원은 빼앗겼지만

왜와 동맹을 맺은 서울지역 백제는 더 이상 왜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되지만,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신라는 왜의 주요 공격대상이 된다.

또 다른 한반도 진출을 꾀하던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북부여의 공격으로 일본열도 서부로 대거 이주한 ‘왜(일본 부여)’였다.

그들은 일본열도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확보한 뒤 다시 한반도로 관심을 기울여 4세기 말부터 활발한 정복활동을 시작한다.

 

 

새로운 황룡국(북연)을 꿈꾸던 북연 세력의 숙원은 고구려가 신라를 왜(예, 부여)로부터 지키기 위해 선비족 출신 장군들을 신라에 파견하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으로 보이다.

여전히 중국 북방에 대해 영향력이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동부여(동예)계 국가들인 비류세력과 신라의 석씨세력을 몰아냈으며, 일본에서 왜를 장악한 사람들이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도움으로 왜로부터 회생한 뒤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이 돌아와(401년) 바로 왕이 된다(402년).

(일본 부여, 왜)의 한반도 점령 과정과 고구려와의 전쟁-<광개토왕비>에 전한다

* 391년 : 왜(일본 부여)가 건너와 백제(백제 부여)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 삼다

 

 

신라에 파견된 선비족 모용씨 세력은 그곳의 정권을 장악하고(453년 이리가 시림에 들어감), 이어서 백제에 진입하여 백제의 군권을 장악한다(455년 한강에 흑룡 등장).

이렇게 한반도 남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고구려와 왜(일본부여), 말갈(동부여)의 전쟁이 391년 이후 20년 가까이 지속된다. 이들의 전쟁 속에 고구려에 타격받은 백제와, 왜에 타격받은 신라는 사실 고구려와 왜 중 어디에 의지할까 고민할 뿐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책임질만한 국력이 없었다.

(백제, 신라)은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왜의 북진정책 사이에서 때로는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왜에 인질을 보내기도 하면서 국가를 유지해 간다.

신라에서는 나물왕(내물마립간)이 죽고(402년) 그의 자손이 아닌 고구려에서 갓 돌아온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이 왕이 된 이유는 그만큼 고구려가 신라의 내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 396년 : 광개토왕이 백제를 토벌하였다. 백제왕이 포로 1천 명과 좋은 천 1천 필을 바치면서 항복하였다.

* 399년 :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일본 부여)와 서로 통하였다. 신라왕이 신라에 가득찬 왜인(倭人)을 몰아내 줄 것을 고구려에 부탁하다.

* 400년 : 광개토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신라 수도에 이르니 왜군이 가득하였는데,고구려군을 보고 퇴각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니 항복하였다. 신라 내물왕(매금)이 조공하였다.

* 404년 : 왜가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참살한것이 무수

* 407년 :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왜군을) 모조리 살상 분쇄하였다.

* 410년 : 동부여(동예)를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에 도달하자,(투항).

 

 

 

‘나제동맹’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지원을 입고는 있었지만 일본열도로 밀려난 ‘왜’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왕이 된 ‘실성’은 자신을 고구려로 볼모로 보냈던 나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을 왜로 보내며 왜와의 화해를 도모한다

왜의 신라 공격이 있던 해

 

405년, 406년, 407년, 415년, 431년, 440년, 444년, 459년, 462년, 476년, 477년, 482년, 486년, 493년, 500년

 

 

 

 

 

 

 

중국 남조 송(420~479)에 한반도지배 승인을 요구한 ‘왜(일본)’

 

 

 

 

이 기사는 좀 엉뚱하긴 해도 5세기 초 한반도 중부 이남에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마한?)이라는 나라들이 서로 구분되는 정치체로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태조 원가 2년(425)에 (왜국) 진이 왕위를 잇게 되고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고는 이를 정식 관명으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송서>

 

 

 

 

당시 한반도 남부는 왜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리고 었다.

‘안동장군, 왜국왕’으로만 임명.백제왕에게는‘대장군’존칭

 

 

고구려와 선비 연맹(백제, 신라)의 전쟁

 

 

특히 신라는 왜의 공격으로 금성이 포위되고(444년) 왕(눌지왕)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기도 한다.

451년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장군’의 관명을 더하였다.”<송서>

 

 

신라에서 453년 이리떼(북연 선비족)가 신라 시조를 모신 시림에 진입하자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며 적대감을 표출한다(454).

고구려는 신라를 200년 만에, 백제를 60년 만에 공격

(455 9월)백제 한강에 검은 용(북연 선비족)이 출현한 뒤 백제 비유왕(비류왕과는 다름)이 의문 속에 사망하고 개로왕은 비유왕의 시신을 20년간 맨땅에 방치한다-뒤이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다

453년 7월에 이리떼가 시림(始林)에 들어갔다

과거 백제를 한 번도 군사적으로 돕지 않았던 신라가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물리친다(455년 10월).

 

 

 

이 시기부터 신라와 백제에는 선비계 요소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하며 두 나라는 지속적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한다.

 

이후 백제 권력은 기존의 ‘부여씨’에서 ‘모씨’로 넘어가게 된다. ‘모씨’왕들은 백제 뿐 아니라 이후 신라에도 등장한다. 고구려에 투항했던 북연의 지배층 모용씨 세력으로 추정된다

지속적으로 ‘왜’의 시달림을 받다보니 고구려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고구려 군사들 중 일부 세력이 신라 지배층을 침범한 것으로 추정된다.-신라는 급격히 고구려와 적대적 관계-

고구려에 투항한 옛 요서지역의 선비족 국가인 북연, 즉 황룡국(407~436) 세력

 

 

 

(436).선비계 왕조 ‘북연’의 고구려 투항-고구려를 당시 동북아 최강국 중 하나로 여기게 된다

북연의 왕 풍홍(馮弘)의 거만한 태도에 불만이 많던 고구려 장수왕은 그를 제거해 버린다(438)-선비계 북연 사람들의 고구려의 정책에 불만이 많게 증가하게 되어

고구려를 배신하게 된다.

455년 고구려 장수왕 침입

461년 ‘모씨(모용씨)’ 세력의 중심인물인 좌현왕 곤지가 왜를 정벌하러 남쪽으로 떠난다-‘좌현왕’은 백제에서는 없던 관직이자, 북방 선비(흉노)계 사람들이 사용하던 호칭으로 왕 다음 최고 군사권을 가진 관리였다

454년 고구려가 자신들의 ‘보호국’이었던 신라를 침입한다-그동안 200년간 침입하지 않았다-내물왕

신라에 갑자기 등장한 최고관직인 좌장군, 우장군 관직은 신라가 당시 북방 선비계(흉노계) 영향을 받았음을의미

480년대부터 선비계 모씨’가 왜의 중심부인 일본열도 중서부(기내)를 장악한다음 서쪽 왜의 본거지인 규슈(구주)를 정복한다{ 왜(일본)의 중심지는 기존의 서쪽 규슈 지역에서 동쪽 기내지역(교토, 나라, 오사카)으로 점차 중심지가 옮겨지게 된다.

 

모용씨는 3세기 이후로 고구려, 부여를 크게 격파하고 중국북부를 점령하고 다스림

다른 선비족 세력인 북위의 ‘탁발씨’에게 중원의 자리를 내준다(409, 후연 멸망).

왜’를 견제하기 위해 파견된신라에서 신라를 전복하고(453년), 백제 왕실까지 장악하면서(455년) 한반도에서 ‘모용 선비(북연)’의 세력을 확장해 간다.

 

‘여’씨에서 ‘모’씨로 바뀐 백제왕들-개로왕사후(475). 문주왕이 뒤를 이었으나 그는 부여씨가 아니라 ‘모’씨인 ‘모도(牟都)’었다.

 

(474).북연(모용 선비족) 세력이 백제에 유입된 당시 왕이었던 개로왕은 중국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지만 북위가 백제(선비 백제)의 계략을 눈치 챘는지 아니면 고구려의 강한 국력을 의식했는지 이를 거절한다- 475년 고구려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사망하고 한성백제가 망한다(일본서기). 이로 인해 백제는 수도를 한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 웅진(공주)으로 옮겨 고구려를 대항할 방법을 찾는다.

왜의 마지막 공격은 지증마립간이 즉위하던 500년에 있었다. 그 뒤로 왜는 신기하리만치 신라를 전혀 침략하지 않다.

서기 500년 일본을 정복한 북부여 곤지세력은 신라에 대해서도 압력을 더욱 행사하여 신라의 왕을 교체하며 왜와 하나의 통치권역으로 만든다.

이는 일본 기내지역으로 넘어간 북부여(곤지계 모씨 세력)가 이시기에 일본 서쪽 규슈지역의 ‘왜(서이)’를 완전히 정복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북부여계 백제 곤지 세력이 일본을 장악한 이후로 ‘왜’는 수백 년 간 신라와 마치 한 나라처럼 갈등 없이 지내게 된다.

 

요서에 다시 북연을 세우나 다시 탁발씨 북위의 위협으로 고구려에 투항한다(436)

 

당시 백제가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백제의 왕은 부여씨(개로왕)에서 모씨(문주왕, 동성왕)로 바뀐다. 그동안 부여씨(여씨)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모씨(모용씨)가 비로소 백제의 전면으로 등장한 것이다.

지증마립간은 중국식 호칭인 ‘왕’으로 바꾼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일본 정벌을 마무리한 북부여계(부여 백제) 곤지세력이 신라에 강한 압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한다.

개로왕의 아들 곤지가 457년 송나라에 파견되어 받은 작위가 ‘정로장군 좌현왕’인데, 여기에서 ‘좌현왕’이란 중국계 관직이 아닌 선비(흉노, 돌궐)계 나라에서 왕 다음의 고위 관직을 일컫던 호칭이다.

 

고구려에 투항한 뒤에 모용씨 세력은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백제, 신라, 왜로 유입되어 세력을 기르다가, 신라에서 500년 이후 전면에 등장하며 왕이 된 다(514년 법흥왕 모진 즉위).

 

 

이때부터동성왕(모대)이후 백제는 고구려 대신 북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탁발 선비계 국가인 북위는 원래 모용 선비계 국가인 북연을 멸망시킨 나라로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장악한‘모용씨(모씨)’에게는 고구려보다 더 큰 원수의 나라였다.

정식 왕이 아닌 갈문왕이었던 지증왕에 이어 김씨’가 아닌 ‘모씨(모용씨)’ 법흥왕(모진)이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514년).

좌현왕 곤지는 461년 왜국으로 건너가는데, 그가 왜국에 들어간 후 기존 왜국의 지배층이 대거 숙청 된다. 당시 왜와 백제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모’씨 성의 곤지가 입국한 뒤로 왜의 지배층이 모두 숙청되는 것은 기존 백제의 지배층(부여씨)과는 다른 부류의 세력(모씨)이 왜로 건너갔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한반도남부와 일본열도를 장악한 모용 선비인들은 강한 고구려를 정복하는 대신에 차라리 자신들의 고향이자 원수들(북위)이 점령하고 있는 중원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낫다는 계산을 하게 된다.

487년 봄 2월에 신궁(神宮)을 나을에 설치했다. 나을은 시조께서 처음 태어난 곳이다.”<삼국사기> 기존의 ‘시조묘’와 별도로 또다른 시조를 모신 ‘신궁’을 설치한다낙랑계 김씨 왕과는 다른 ‘모씨(모용씨)계’

곤지는 개로왕에 의해 일본열도로 건너가 왜를 정복한다(361).그가 왜의 천황인 유라쿠 천황(중국에서는 무왕으로 호칭함, 418 ~ 479)으로 보기도 하고, 유랴쿠 천황의 대를 이은 게이타이 천황(450? ~ 531)으로 추측하고 있기도 한다.

 

 

 

백제에도 모(牟)씨 성을 가진 왕들이 즉위했는데, 문주왕(재위 475∼477)의 이름은 모도(牟都)였고, 일본(왜)에서 와 왕이 된 동성왕(재위 479∼501)의 이름은 모대(牟大)였다.‘모씨’ 선비계 세력이 백제와 신라 그리고 백제의 배후세력인 ‘왜’마저 장악했던 사실을 말한다

493년 백제왕 모대(牟大, 동성왕)과 사돈관계를 맺는 다-당시 신라에서 백제왕의 이름을처음 직접적으로 거론, ‘모대’를 기존 왕들의 성씨인 ‘여’씨를 붙여‘여대(부여대)’라고 하지 않고 ‘모대’라고 기록한 것 역시 모대가 백제의 정통 왕이라기보다는 정변에 의해 등극한 ‘외래인’, 즉 선비계 모씨(모용씨)세력 사람임을 설명한다

당시 왜와 백제의 관계를 보여주는 내용이 중국사서에 등장한다.“(왜 나라) 흥왕이 죽고 아우 무왕이 제위를 이었는데, 자칭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였다.”<송서>

여기에 등장하는 무왕(유랴쿠 천황)이 바로 백제 좌현왕으로 왜를 정벌한 곤지왕으로 추정된다

 

 

 

동성왕이 즉위할 당시 왜는 백제의 좌현왕 출신인 곤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한성백제가 멸망하자(475년 개로왕) 곤지는 다시 백제로 와서(477) 백제를 재건하려한다. 그러나 그는 백제에 온지 세 달 만에 죽는데, 이는 선비계였던 그를 반대한 부여계 해씨 세력(해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물왕즉위-기존 낙랑계 김씨가 세력을 잃고 선비계 모씨가 성공적으로 정권취득

 

‘신라(新羅)’라는 중국식 국호확정(503년), - 북연세력

그는 중국의 승인 없이 자칭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마한’을 지배하는 왜왕이라 호칭하고 있다. ‘백제’를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멸망한 475년 이후 원래 백제의 2인자였던 곤지가 왜에서 당시 막 멸망했던 백제까지 포함하여 다스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탁발씨’ 선비족이 세운 북위(386∼534)는 ‘모용씨 선비의 나라’ 황룡국(북연)을 436년 멸망시킨다- 5세기 말 모씨(모용씨)가 장악한 백제로부터 대대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신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부여계 해씨 세력은 곤지뿐 아니라 선비계 왕인 문주왕(모도)(475~477)마저 살해하며, 삼근왕이라는 어린 왕을 세운다. 그러나 왜에서 파견된 곤지의 아들 동성왕(모대)은 백제에 도착해서 삼근왕을 제거하고 다시 백제의 왕이 된다(479).

선비족 왕조인 북연(北燕 407년~436년)을 ‘황룡국’으로 부른 이유는 북연의 수도가 요서지역 대릉하 주변의 황룡성(黃龍城 현 조양시)이었기 때문이다.황룡사(皇龍寺)’ 건립

 

 

 

중국 백제의 지속 기간

 

중국으로부터 ‘대장군’ 칭호를 받던 동성왕 등극 시기(483)부터 무령왕이 죽고 ‘장군’ 칭호를 받던 성왕이 등극할 때(523)까지 약 40년간 중국 대륙에서 정권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 신채호 선생은 고대 중국 동부 양자강 유역의 월나라 땅 수 천리와, 요서지방, 일본에 이르는 땅이 백제의 영토였음을 여러 사서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

 

 

고구려는 492년 위에서 세자를 보내 입조하라고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하기도 하고,위나라가 백제의 공격으로 위축되어 결국 산서성 대동시에 있던 수도(평성)를 중원 내륙의 낙양으로 옮기자, 고구려는 현재 북경 동쪽의 땅(영주, 평주)을 차지한 것이다(494, 남제서).

백제 동성왕은 왜(일본)의 배경을 업고 북위를 공격하여 중국 양자강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북위를 압박하여 북위의 세력을 크게약화시킨다(490)<남제서> 백제 동성왕 당시 백제가 북위를 물리치고 중원을 장악하여 고구려와 중원에서 대결했던 사실은 <양서>의 기록으로 확인된다-고구려에 의해 개로왕이 죽고(475) 한성백제가 멸망한 이후 남쪽 웅진(공주)으로 밀려났던 백제가 중국을 공격할 수 있었었던 것은 동성왕의 배경에 ‘왜’가 있었기 때문이다-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다. 곤지를 유라쿠천황(왜왕 무)로 추측

중국 남조 제나라가 동성왕에게 내린 ‘진동대장군’은 중국의 동부를 안정시키는 최고위 장군의 의미한다. 502년에 받은 ‘정동장군’의 직위는 ‘동쪽을 정복하는 임무를 맡은 장군’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모두 중국 동북부에 있던 고구려를 염두에 둔 직위로, 백제는 한반도에 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서쪽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고구려와 대치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문 선비족의 나라인

북주,

수(581~618),

당(581~618)와는 돈독

495년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강원도 원주)을 공격했으나 이를 신라와 연합해서 물리침

503년 백제가 평양 근처인 황해도 신계 지역까지 고구려를 공격함

선비계 동성왕이 집권한 이후(479)선비 백제는 중국을 공격하기에 앞서 고구려와 적대적이던 왜(동예)계 물길을 끌어들여 협공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지만

신라는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낙랑국’으로 각인된 나라였다. 이들 왕조들은 신라왕에게 모두 ‘낙랑공’이라는 칭호를 주었고,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낙랑’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북위는 백제와의 많은 전란으로 국토가 피폐해지고 점차 주변국을 통제할 힘을 잃게 된다

균전제를 실시하며(486년)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중국 남쪽에 새로 들어선 제나라와 통교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다 북위에 발각되어 위나라 황제에게 책망을 듣지만(480), 고구려는 이를 무시하고 바로 다음해(481) 다시 남제에 조공을 한다. 백제와 고구려는 시종 자신들이 ‘부여’의 후예임을 강조하여 선비계 사람들과 구분하고 있다.

북위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북위를 크게 약화시키며 급기야 북위로 하여금 수도마저 옮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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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즉위-백제에서 그동안 백제를 강국으로 만들고 중국을 공격하며 ‘본토회복’에 힘쓰던 ‘모씨’ 동성왕이 암살당하고(501) 대신 모씨 이전의 왕이었던 ‘부여씨’ 여융(무령왕)이 집권한다.

 

 

 

백제가 6세기 초에 과거에 잃었던 한강 유역 뿐 아니라 옛 말갈(신라 북부)지역까지 회복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얼마 후 백제는 고구려의 대규모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다시 잃게 된 다(529).

무령왕은 461년 선비계 좌현왕 곤지에 의해 모태에 임신된 상태로 왜(일본)에 넘어갔던 부여씨 개로왕의 아들이다. 무령왕은 자신이 부여계 혈육임을 잊지 않고 백제를 장악한 뒤 백제에서 선비계 요소를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성왕(재위 523~554)이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기며 국호마저 ‘남부여’로 정한다.

낙랑은 원래부터 선비(흉노, 기자조선) 성격을 가진 국가로서, 313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망하면서 일부는 선비계 ‘모용씨’ 나라로 망명하고 일부는 신라로 망명하였다. 따라서 신라가 ‘낙랑’의 후예라는 것은 수나라, 당나라와 같은 선비(흉노)계 왕조임을 의미한다.

 

 

백제, 신라의 선비계 모씨 연합은 고구려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백제는 비록 5세기 말 선비계 모씨 왕들에 의해 왕권을 빼앗겼지만, 6세기 초 무령왕(여융)은 모씨 성을 쓰지 않고 부여씨 또는 줄여서 여씨를 성을 썼으며,

 

 

 

 

고구려는 신라를 침입하면서 강성해진 백제를 견제하고자 노력하고(489년), 백제는 중원(북위)을 공략해 고구려를 서쪽에서 압박하게 된다(490년).

그 뒤를 이은 성왕(523∼554)은 백제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는 등 선비계에 장악당하기 전인 5세기 중엽 이전 백제로 돌아가고자 노력한다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은 그 뒤로도 계속되지만, 백제는 점점 옛 북부여(부여씨)를 정통으로 따르게 되어 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다.

반면 신라는 모씨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에 의해 선비계 모용씨의 황룡국(북연)을 정통으로 따르게 되어 백제와 신라는 점차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신라가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 애쓴 이유는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기회를 틈타 백제를 공격하나(554) 실패하게 되고, 이후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된다-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우면 어부지리를 노린다

백제는 20여 년 만에 고구려로부터 되찾은 자신들의 옛 땅을 신라에게 빼앗기자 신라를 총공격하게 된다(554). 그러나 이 전쟁에서 왕(성왕)이 죽고 백제 최고 관리인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이 사망하는 잊을 수 없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백제와 신라의 아슬아슬한 동맹은 결국 백제와 신라가 함께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던(551) 한강 유역을 신라가 다시 백제로부터 빼앗으면서(553) 끝이 나게 된다.

개로왕의 국서에는 고구려에 복속된 낙랑 사람들과 황룡국(북연) 사람들이 고구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고,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고자 염원하고 있던 상황이 기록돼 있다. 따라서 낙랑과 황룡국(북연)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신라 입장에서는 고구려에 있는 자신들의 형제를 구해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이 있었던 것이다.

 

우문씨 선비국이었던 북주(北周, 557∼581)를 이어 들어선 선비계 왕조 수가 중국을 통일한다(589).

고구려에서 조공을 보내는데, 수나라는 고구려왕에게 ‘고구려왕’ 호칭 대신 ‘요동군공’의 작위를 내리면서 고구려의 지위를 낮춘다.

 

 

 

 

수나라는 이를 빌미로 수군과 육군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한다(598). 그러나 결국 10명 중 8,9명이 죽을 정도로 크게 패하여 돌아간다

수나라에 대한 저자세를 버리고 598년 요서의 영주를 공격하며 수나라와 대립하기 시작한다.영주는 고구려가 기원한 곳이자 수나라 이전에 고구려 영역으로 494년 남제의 황제는 고구려왕에게 ‘영주, 평주 도독’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국에 의해 멸망한 뒤(660), 많은 백제 유민이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한다. 일본은 그들을 통해 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로인해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와 백제를 본국처럼 여겼던 일본은 서로 관계가 멀어지게 되며, 일본은 이때부터 한반도 신라보다는 중국(당)과의 직접적인 교류에 더욱 힘을 쏟게된다.

 

 

대제국이던 돌궐(동돌궐)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나라를 견제하고자 한다(607).

 

 

 

 

612년 수양제는 1백 13만 대군을 동원해 다시 고구려를 공격한다

-을지문덕 살수대첩

 

 

 

 

(613)에 또다시 공격해 오나 수나라 내부의 반란 소식으로 전쟁을 멈춘다.

 

 

 

 

 

614년에 다시 공격해 오지만 고구려가 항복하여 회군한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트려 결국 망하게 된다(604).

 

 

 

 

 

 

 

 

 

 

 

당나라가 돌궐(한국, 汗國)을 물리치고(630),당태종은 친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한다(644년)-고구려가 있던 요동은 원래 중국 땅이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막리지(연개소문)가 그 임금을 죽였다는 이유였다. 안시성 싸움에서 참패

연개소문

 

 

안시성 양만춘

 

 

 

 

당 태종의 아들 이치(고종)는 신라와 협공하여 8차례의 공격을 통해 668년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7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백제로 이어지던 예족(부여족, 왜족) 중심의 역사가 한반도에서 종식되고, 상-기자조선-낙랑-신라로 이어지던 맥족(박족) 중심의 역사가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는 계기로 평가할 수 있다.

 

 

 

 

 

 

 

 

 

 

선비족’은 알타어계 ‘예맥’민족 중 하나로서 한국민족과 가까우나 유목생활을 한다. 기원전부터 고구려에 속해 있으면서 고구려와 함께 한나라를 물리치기도 한다(121년)

고대 중원의 동이족으로서, 한자를 만든 상나라와 문화적, 인종적으로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선비’라는 이름이 선비족 고유어 중 ‘대제사장’, ‘성스러움’을 의미하는 ‘사비(Sabi)’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비’는 원래 ‘성스러운 동물’을 의미하던 소ㅂ이’ 즉 ‘소의 사람’이 아닌가 한다.

세기 말 선비계 모씨가 장악했던 백제의 마지막 수도 역시 이름이 사비(부여)였는데, 사비는 ‘소부리’라고도 불리던 도성이었다

 

 

흉노가 한의 공격으로 망한후 일부가 선비로 흡수되어 강해지고 중국을 압박한다.

선비족 탁발씨는 북위(北魏 386~557) 왕조를 건국하여 북중국 전체를 통일하게 되며(439), 이들에 의해 밀려난 연나라 선비족모용씨는 고구려에 유입된 뒤 한반도와 일본을 하나의 왕국 ‘왜’로 통일시킨다.

 

 

선비 왕조 북주(北周)를 이어 건국된 수나라, 당나라 집권층 역시 선비(흉노)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요나라(916~1125)거란족도 선비족 일파인 유연부족의 후예이다. 고려를 쳐들어와 옛 고구려 역시 고구려와 풍습이 같았던 자신들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933년 서희 담판).

선비족은 동아시아를 천 년 가까이 지배했던 고대 동아시아 고대 역사의 주인공

 

 

 

http://www.cnara.net 이기훈님의 <동이 한국사>에서 발췌 편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