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1.고대 일본사

청 설모 2018. 4. 20. 18:56

한반도에서는 가야에 대한 역사가 남아있지 않으므로 일본의 고대사를 통해 가야의 역사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일본의 창세신화

1.스사노오(建速須佐之南命,또는 素盞鳴尊 )出雲国 건국신화

 

이자나기(伊奘諾尊)와 이자나미(伊奘冉尊)신의 결혼에 의해 일본 열도를 만들어낸다

이자나미가 저승의 신이 되자 이자나미로부터 도망쳐 나온 이자나기에 의해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 달의 쯔꾸요미(月読), 폭풍의 스사노오(須佐之男, 素盞鳴尊 )가 태어났는데 이들을 三貴紳이라고 한다

 

이자나기는 아마테라스에게 타카마노하라(高天原)을 다스리게 하고,

쯔꾸요미에게 요루노오스쿠니(夜之食國)을 다스리게 하고,

스사노오(建速須佐之南命,또는 素盞鳴尊 )에게 우나하라(海原)를 다스리도록 한다.

 

스사노오(須佐之男)는 성격이 난폭하고 신의 세계인 高天原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자 화가 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는 동굴(天石窟)속으로 숨어버리고 동굴 입구를 돌로 막아버린다.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지자 빛을 잃어버린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곡식은 말라죽게되고 모든 생물이 어둠속에서 헤메며 굶주리게 된다.

 

이에 놀란 제신들이 "야타의 거울(八咫鏡)""야사카니의 곡옥(八尺瓊勾曲玉)"으로 그녀를 동굴 밖으로 유인해내고, 그 사건의 원인이 된 스사노오를 신의 세계(高天原)에서 추방한다. 스사노오는 아들 이소타케루(五十猛神)를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에 내려와 소시모리(曾尸茂梨, 牛頭山)에 살다가, 거기 있기 싫다고 말하면서 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여 이즈모국(出雲國)에 도착한다. 거기서 8개의 머리를 가진 큰 뱀인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를 만나 여러토막으로 잘라 죽이고 出雲国의 통치자가 되고 큐유슈우지역까지 진출한다

 

스사노오의 뒤를 이어 大国主命出雲国을 다스렸지만 나중에는 出雲国国譲渡를 하게된다

 

(스사노오가 큰 뱀을 짤라 죽일때 뱀의 꼬리 부분에서 이상한 광채가 나며 멋진 칼이 나왔다고 한다(天叢雲剣). 이게 바로 '쿠사나기의 검(草薙劍)으로 나중에 神界로 돌아가 이 칼을 아마테라스에게 바치고 화해한다. 아마테라스의 자손 니니기노미코도(瓊瓊杵尊)가 이 칼을 가지고 일본열도로 내려온 것이 소위 천손강림신화이며, 야타의 거울(八咫鏡)과 야사카니의 곡옥(八尺瓊勾曲玉)과 더불어 일본 천황이 계승하는 3신기 중 하나이다)

 

고천원(高天原)-- 김해설, 고령설이 있다.

경북 포항과 마주보는 시마네현 이즈모는 일본 신화의 고장이다. 일본은 바다도 "아마", 하늘도 "아마"라 한다. 가라제국과 신라에서 새 문물을 가지고 배편으로 바다를 건너가도 선주민들이 하늘에서 강림한 천신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지명마저 가라인의 고을이라 하여 아라가야이다.
 
요즘도 이 지역 고령자들은 이즈모를 "아다가야"로 부른다. 아라조, 가라조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전후에 아라가야조로 통합됐다. 이즈모에서 최고의 천신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즈모신사는 1백여년 전까지만 해도 "아다가야 신사"로 불렀다주민중에는 출운(出雲)이라는 성씨가 많은데 "이즈모"라 하지 않고 "아다가이"로 호칭한다. 고대에는 아다가야였으나 ""의 발음이 ""로 변한 것이다. 고대로부터 아라가야신을 모시는 축제를 연례행사로 열며 특이하게도 제수차림에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햅쌀로 만든 "시도키"인데 바로 우리의 "시루떡"이다. 벼농사로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가야신의 은덕이라면서 감사를 올리는 것이다.

아다가야는 삼한시대의 경남 함안의 아라가야 지명에서 연유한다. 일부 한국사학자는 하()가야(아래가라)로 보고 고령의 상()가야에 대응하여 김해 가라국 등 남부지역의 가라제국 전체의 통칭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즈모지방은 고대 가라인(가야인)들이 점거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즈모 신화의 핵심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이며 고령 대가야의 건국왕 이진아시로 추정한다는 학설도 있다.

그의 아들 스사노오가 신라에 강림(탄생)했다고 하여 일본 역사서에 "신라는 어머니의 나라"라고 하였고 그 연장으로 "이즈모는 일본인의 어머니의 나라(의 국) 혹은 일본국의 뿌리가 된 나라(의 국)"로 기록돼 있다.

스사노오는 용감하고 성격이 거칠었던 모양이다. 머리 여덟개 달린 괴상한 뱀을 퇴치했다고 하는데 이 지방을 정복했음을 비유한 것 같다. 신라에 내왕하면서 배를 만드는 목재를 가져갔고 일본의 산림조성에 공을 세웠다는 설화가 있다. 스사노오의 아들 오오쿠니누시는 천하를 다스리다가 니니기노미코도에게 북규슈를 이양했다고 한다.

 

                                                                                                                     부산일보 도쿄=최성규지사장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00217000061

   

高天原을 한국의 고령으로 比定한 츠쿠바(筑波) 대학 마부치 가즈오(馬淵和夫) 교수의 논문 高天原故地가 있다 

< 天孫高天原을 떠나 (규슈로) 남하한 것은 대가야 성립 이전인 기원 1~2세기경의 일인 것으로 본다. 天孫 일행은 적지않은 인원을 거느린 조직이었을 것인 만큼 당시 상황으론 舟行(주행)이 가장 안전하고(집단으로 습격받는 일이 적고), 또한 집단으로 이동 가능한 방법이었을 터이다. 따라서 天孫 일행은 배를 타고 낙동강 하류로 내려와 여기서 海路(해로)로 남하했을 것이다. 이어 가사사노미사키(笠沙御前)를 목표로 항행해, 그 곶()이 바라보이는 해안에 상륙했을 것이다>

기원 1~3세기의 한반도는 三韓시대였다. 당시 고령 지역에 있었던 가야系 小國의 이름은 半路國(반로국)이었다

 

우두산 가야산

소시모리-쇠머리 고령이란 설, 강원도 춘천이란 설이 있다.

 

2.큐슈 竺紫日向지역- 니니기노미꼬 신화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아들 天忍穗耳尊高皇産靈尊의 딸 栲幡千千姫가 혼인하여 瓊瓊杵尊(니니기)를 낳자 高皇産靈尊은 외손자에게 일본열도(葦原中國)를 물려주기위해 武甕槌神經津主神을 보내어 大己貴命(=大国主命, 스사노오의 아들)으로부터 복속을 맹세 받고 나라를 양수받는다.

 

그후 천손(天孫) '니니기노미꼬도' 일행은 큐슈 竺紫日向에 있는 高千穗峯의 구지후루다케(久士布流多気에 강림하여 (후루는 벌 또는 홀, 다케는 을 의미 ) ‘이 땅은 韓國(=加羅國=伽倻國)이 잘보이고(博多) 가사사(笠沙, かささ까지 똑바로 길이 통하고 있고, 아침 해가 찬란히 쬐고 석양빛도 아름답게 비치는 나라로다, 이땅은 너무도 좋은 곳이다라고 찬양하며 그곳에 대궐(大闕)을 지어 정착했다.“라고 古事記는 전한다.

이 기록은 천손(天孫) '니니기노미꼬도'와 그 일행이 부모형제를 남기고 온 고향 가라(加羅=伽倻)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잘 표현한 대목이다. 더구나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을 가라구니다께(韓國岳)라고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라의 일본식 표기가 이다.

(천손강림할때 니니기노미꼬(天津彦彦火瓊瓊杵尊)가 팔판경(八坂瓊)의 곡옥(曲玉)과 청동거울(八咫鏡), 초치검(草薙劍) 3종의 보물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내려왔다.)

 

천손이 강림한 高千穂峰(고천혜봉), 구지후루다케(久士布流多気)-

天孫降臨의 무대인 高千穂峰伝承地로서 宮崎鹿児島両県 경계의 高千穂峰宮崎県 高千穂町가 이름높다.

후일 神武天皇東遷을 결단했던 高千穂宮어느것이나 현재의 日向宮崎県으로 여기고 있다.

天孫 니니기(瓊瓊杵尊)降臨한 구지후루다케(久士布流多気=구지벌 )와 김수로왕의 전설이 있는 (金海) 龜旨峰의 비교  

가라쿠니다케(韓國岳) -가고시마 현과 미야쟈키 현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높이 1,700m의 키리시마(霧島) 산맥의 최고봉.

 

3.국가이양(出雲國讓)

大國主神은 나라를 평정할 때 사용한 창인 히로호고(廣矛)瓊瓊杵尊(니니기)에게 주며 일본열도(葦原中國)를 헌상하고 대신 자신이 거주할 장소로, 천신의 아들이 황위를 이어 갈 훌륭한 궁전처럼, 땅 깊숙이 반석(磐石)에 큰 기둥(宮柱)을 깊게 박아, 고천원을 향해 치기(千木)가 높이 치솟은 신전을 만들어 준다면, 저 멀리 유계(幽界, 저승세계)로 은퇴(隱退)하겠다고 하여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 계열간에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아마테라스 후손은 일본나라[정치]를 경영하고, 스사노오 후손이 신의 일[종교]을 맡게 되었다

 

4.가야의 건국신화

가야의 건국설화로는 두 종류가 있다. 이는 각기 김해(金海)와 고령(高靈)지방에 전하고 있다

 

 (1) 삼국유사의 내용

김해에 전하는 수로왕신화(首露王神話)삼국유사 (三國遺事)”에 수록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천강신화(天降神話)의 요소가 있다.

서기 42<후한건무 (後漢建武-한무제) 8>,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9(九干 : 김해 지방의 변진구야국의 유민들이 9촌락을 이루어 각각 대표를 이루었는데 그것을 9간이라 함)  촌장들이 구지봉에 올라보니 사람은 없고공중에서"천황이 나에게 본부하기를 여기에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하기에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 너희는 산마루에 흙을 모우고 그 주위를 돌면서 자라야 자라야 네 목을 내어 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龜何龜何首其現也 若不現也 潘灼而契也)”라고 노래를 하면서 춤을 추어라. 이것이 즐겁게 뛰면서 임금을 맞이하는 것이니라."하는 말이 들렸다.

 

이에 구간(九干)들이 시키는대로 노래하며 춤을 추다 문득 바라보니 하늘에서 자색 밧줄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밧줄 끝에는 붉은 보자기에 황금상자가 싸여 있었다구간(九干)이 열어보니 해와 같은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어 바라본 백성들은 두려워서 아도간(我刀干아홉 추장 중 한 명의 호칭)의 집 탁자 위에 고이 모셔두고, 다음날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때 황금알 6개 중 가장 먼저 동자로 화한 것이 수로(首露)이고, 그가 나라를 세워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칭하였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돌아가 오가야주(5伽倻主)가 되었다.

 

이는 김해 지역에서 구간(九干)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들이 보다 문화능력이 높은 수로집단에 의해 통합되어 가야국이 출현하는 것과 그 뒤의 어느 시기에 김해 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형성되는 것을 복합적으로 반영한 설화로 보여진다.

 

(2)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정견모주(正見母主)의 신화

고령에 전하는 대가야(大伽倻) 시조신화(始祖神話)는 조선조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령현조에 수록되어 있으며, 오랫동안 구전되어오던 것을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석리정전(釋利貞傳)에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옛 가야산에는 가야산의 모습과 같이 높고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 살고 있었는데 여신은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주려고 마음먹고, 가야산 큰 바위아래에 제단을 차려놓고 하늘신인 "이비가지"(夷毗訶之)"의 짝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늘신께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이비가지(=이비하)는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가야산 상공에 나타났고, 여신은 이를 맞이하여 가야산 높은 봉우리 상공에서 만나서 하늘신과 가야산 처녀 산신이 부부가 되었고 옥동자 둘을 낳았다.

 형은 얼굴이 '이비하'를 닮아 해와 같이 둥그스름하고 불그레하였다하여 '뇌질주일(惱窒朱日)'이라 하고, 아우는 어머니인 여신을 많이 닮아 얼굴이 하늘과 같이 푸르다하여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불렀다.

뇌질주일은 자라나서 대가야국의 첫임금 '이진아시왕'이 되었고아우 뇌질청예는 자라서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고 한다.

                                                                                                           세미신선의 블로그에서 복사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621 

 

6.유물 , 유적

(1)청동기 ---동검, 동모, 동과, 동탁등---

 

동검 --19848월 시마네현 도로공사 중 히카와(斐川)군 간바(神庭) 구릉 고진다니(荒神谷)에서 그 당시까지 일본에서 발굴된 동검의 전체 숫자를 웃도는 358자루의 동검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그 때까지 일본전역에서 발견 된 청동검이 도합 300여개 뿐이었고 대부분 큐우슈에서 나왔다. 코진다니 유적(荒神谷遺跡)은 시마네현(島根県) 이즈모시(出雲市) 히카와쬬(斐川町) 칸바사이다니 (神庭西谷)의 조그만 골짜기에 있는 국가지정의 사적이다. 전설로만 간주되던 이즈모의 스사노오 이야기가 역사가 된 순간이었다.

   

   코진다니 유적에서 동검(銅劍) 358, 동모(銅鉾·銅矛, 청동제 창) 16, 동탁(銅鐸, 청동제 종) 6개가 출토되었다.

   무덤의 껴묻거리가 아닌 독자적 매장 방식으로 질서정연하게 매장된 모습이었다. 이중에서도 가장 이목을 끈 것은

   동검이다. 그때까지 일본 전역에서 출토된 동검이 대략 300개였는데 전체 일본에서 발견된 것보다 고진다니 유적에서

   나온 동검이 더 많았다. 전국 출토 동검의 과반수를 넘어서는 6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한반도에서 전해진 동검·동모·

  동과(銅戈) 등은 애초 실용무기로 전해졌지만 일본에 이르러 편평하고 대형화된 의례 용기로 변화, 일반적으로 무기형

   제기로 불리운다.


   비파형 세형동검은 중국대륙에서는 나오지 않고 만주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고조선 계열의 유물이다. 일본황실의

   보물로 현재 나고야(名古屋)의 아쯔타 신궁(熱田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쿠사나기노 쯔루기(天叢雲剣 또는 草薙剣)

   또한  세형동검이다. 쿠사나기노 쯔루기는 스사노오가 이즈모에 들어 와 퇴치한 뱀, 야마타노 오로찌(八岐大蛇)

   꼬리에서 나왔다고 전해 온다.


   ②동탁--1985년 첫 발굴지에서 7미터 떨어진 곳에서 6개의 동탁(銅鐸) 16개의 넓은 창날(銅矛)이 추가로 발굴

     되었다  

   1996년 코우진타니 유적에서 3.5 킬로 쯤 떨어진 곳에서 39개의 동탁이 발견되었다. 시마네 현(島根県) 운난시

   (雲南市) 카모쬬우(加茂町) 이와쿠라(岩倉)에 있는 야요이 시대(弥生時代)의 이 유적을 카모이와쿠라 유적(加茂岩倉

   遺跡)이라 한다. 당시까지 시가(滋賀)현 야즈시(野洲市) 오오이와야마(大岩山) 산록에서 24개의 동탁이 발굴된 것이

   일본 기록이었다. 가모 이와쿠라(加茂岩倉) 유적에서, 한 군데의 유적에서 출토된 숫자로는 전국 제일이 되는 39개의

   동탁이  발견되었다. 이들 청동기는 신께 바치는 제사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미루어 이즈모 땅이 고대부터 신께

    바치는 제사를 중시해 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1996년에는 고진다니 유적에서 3떨어진 가모이와쿠라(加茂岩倉)에서 동탁 39개 발굴되었는데, 역시 무덤

    껴묻거리가 아닌 독자적 매장 방식이었다. 대형 동탁 14(28) 안에 작은 동탁이 들어간 형태로 역시 질서정연한

    형태였다. 가모이와쿠라 유적의 발견 이전에 일본 전역에서 640여개의 동탁이 발견된 바 있는데, 가모이와쿠라의

    동탁은 동탁에 관한 한 단일지역에서 출토된 가장 많은 양이었다. 이로써 이즈모 일대의 제천문화에서는 동검 뿐

    아니 라   동탁도 널리 제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특히 이즈모 동탁은 양·질의 면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여

    기왕의 동탁 기나이 중심설에 대해서도 많은 반성점과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이처럼 이즈모 지역에서는 유물이 한번

    출토되기만 하면 일본 열도의 순위를 바꾸어 놓는다고 할 정도였으니 이즈모 지역이 초기 야요이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었다.

   동탁 역시 한반도에서 전해질 때는 작은 형태였으나 일본화하면서 애초의 기능성을 상실하고 대형화하였으며 장식성

   까지   더해져 일본 야요이문화를 대표하는 기물이자 제기가 되었다 

       

대체로

북큐슈지역의 제기는 동모·동과,

기나이 지역은 동탁이 중심이 되는 경향이었는데,

이즈모의 경우 이들과 함께 동검이 위주가 되는 특징을 보였다.

 

다른 청동기에 비해 동검은 한반도 청동기의 대표성을 띠는 기물일 뿐아니라, 특히 한반도의 선도(仙道) 제천문화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제천 의기인 삼종신기(동경·곡옥·동검)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성격의 동검을 제기의 중심으로 삼았던 이즈모의 제천 문화는 일본열도 중에서도 한반도 제천문화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었던 경우로 바라보게 된다.

         

이즈모 청동기의 원료에 대한 분석 또한 흥미롭다. 야요이시대 청동기에는 동이나 아연 등과 함께 납이 주성분으로 포함되어 있었는데, 현재 이 납을 분석하여 그 청동기가 어느 지역의 원자재를 사용해서 제작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분석 결과에 의하면 야요이 초기에는 한반도산 재료가 쓰이고 중기에는 중국 화북산(華北産) 재료가, 후기에는 중국 화북산의 획일적인 재료가 쓰여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애초 이즈모지역의 주된 교역 루트가 한반도였다가 서서히 후한이나 한사군 등 중국과의 관계 중심으로 바뀌어가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분 -- 이즈모 청동기 매장 유적이 조성된 시기는 대체로 A.D. 1~2세기 무렵으로 추정되었다. 가무암창 유적의 경우는 이러한 시기보다 1세기 정도 빠르게 보는 시각, 곧 기원 전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중요한 것은 스사노오에서 시작된 이즈모문명이 A.D. 1~2세기 무렵 제사권=정치권을 상실하고 기나이세력에 복속된 시점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고진다니 유적이나 가모이와쿠라 유적과 함께 한가지 더 주목해 볼 유적으로 니시다니(西谷) 고분군있다. 서곡 고분군은 고진다니나 가모이와쿠라와 멀지 않은 지역에 자리하여 이 일대 전체가 이즈모세력의 선조들의 무덤이 조성되고 여기에서 제천 및 선조에 제사를 올린 신성지역이었음을 알게 한다. 니시다니 고분군에서는 고분시대 전방후원분 이전의 특이한 무덤 양식으로 알려진 사우돌출형(四隅突出形) 분구묘(墳丘墓)6기가 발굴되었다. 사우돌출형 분구묘는 네 귀퉁이(四隅)를 길게 돌출시킨 특이한 양식으로 큰 무덤은 돌출부까지 포함해 전체 길이가 50m가량 된다. 분구를 조성한 후에도 분구 위에 4개의 나무 기둥(솟대)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이즈모 지역의 청동기를 매장한 세력의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되며 조성 시기는 대체로 A.D. 1~3세기로 이해된다. 또한 사우돌출형 분구묘는 이즈모가 자리한 동해안가를 따라서 산인(山陰)지역이나 호쿠리쿠(北陸) 지방까지 퍼져있는 무덤 양식이다. 무덤내 출토된 토기 면에서 양 지역의 토기가 공유되어 양 지역이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이즈모세력의 통치권 또는 문화권을 이 일대로 설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3세기 초반 기나이 일대에 전방후원분이 새로운 묘제로서 등장하여 일본 열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이즈모의 특징적인 묘제인 사우돌출형 분구묘는 사라지게 된다. 이상 청동제기 매장 유적의 매장 시기 및 사우돌출형 분구묘의 조성 하한을 통해 A.D. 1~3세기에 걸쳐 이즈모세력이 기나이세력에게 밀려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3세기로 접어들면서 기나이 일대에서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등 기나이 세력의 정치적 위상이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었지만, 그 이전의 시기 이즈모지역의 청동기문화의 수준은 일본열도에서 가장 앞섰다. 야요이 초기 문화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스사노오의 문화권이었던 이즈모문화였다고 할 수 있고 이는 기·기 신화의 내용과도 온전히 합치되는 부분이다.

`고진다니 유적`에서 한꺼번에 358점이 출토된 동검(청동검)`가모이와쿠라 유적`의 동탁(청동 방울)은 선진 제철기술을 전수받아 일본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즈모의 야요이 유적·유물을 통해본 스사노오의 이즈모 개척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48720 코리안 스피릿에서 복사

 

토기 -- 벼농사의 곡창이라는 이즈모평야를 내려다 보는 고진다니유적에서는 358개의 동검과 동탁(구리 종)6, 동모 16, 무기류, 동경, 곡옥 등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인근 유적에서는 김해식-신라식 토기로 보이는 하지키, 청동기가 무수히 발굴됐다. 한국 고고학자들은 고대에 가라-신라인들이 전승한 유물이라는 주장이고 異論을 가진 학자들은 대륙과의 교류품이라면서 간접적으로 가라유물임을 인정했다. 이는 고대 일본이 가라-신라의 분국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미 북규슈 요시노가리유적의 가라유물군과 이즈모지방의 가라인 판도를 상정하면 고대 가라인들은 북규슈로 진입하는 항로와 이즈모로 직행한 경우도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일보 도쿄=최성규지사장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00217000061

 

 

파형동기-- 서기 1989년과 1992년 사가현(佐賀県) 칸자키군(神埼郡) 요시노가리유적(吉野里遺跡)에서 14기의 옹관묘(甕棺墓)가 확인되었고 부장품 가운데서 파형동기 주형(鋳型)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발견된 최초의 파형동기 주형으로 날개가 7개였다

 

파형동기는 오직 일본에서만 100여개 출토되어 야오이 시대 600년간 존속했던 요시노가리 시대의 유물을 일본의 요시노가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데  일찍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던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인 파형동기를 찍어내는 주형을 볼 수 있다거품집을 통해 파형동기를 찍어냈다는 것은 얼마나 수요가 많았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시노가리유적(吉野里遺跡)을 발굴하면서 일본 최초의 파형동기 주형이 발견되어 신문들이 대서특필하던 무렵 한국에서 김해 대성동고분을 발굴조사하고 있었다. 부산 경성대학교 박물관이 서기 1990612일부터 81일까지 1차 발굴조사, 199093일부터 1991414일까지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차 발굴조사중 13호 고분에서 4개의 날개가 달린 파형동기 6점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파형동기가 부착되어 있던 목재의 방패 흔적이 확인되었다. 파형동기는 방패 장식이었던 것이다.  여태까지 이 유물은 고대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출토되었다. 그러나 가야의 대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13호분에서 일본 것보다 훨씬 큰 파형동기가 발견됨으로써 일본 고유의 유물이라는 주장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또한 이 유물의 존재로 인해 고대 일본 지배층이 가야에서 건너간 계층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대성동고분 2, 13, 23, 39호분에서 11점의 파형동기가 출토되고 그 후 20127차 발굴조사중 88호분에서 13점이 출토되었다. 13호분은 4세기 2/4분기, 88호분은 4세기 3/4 분기에 축조되었고 모든 파형동기의 날개는 4개였다. 2차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파형동기가 한국에서 처음 출토된 것이며 2013년 현재까지 한국에서의 파형동기 출토는 대성동고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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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도스 청동솥' 가야의 옛 무덤에서, 그리고 저 멀리 부여족의 무덤에서도 발견된 솥이었다

 

 

기술고고학(실험고고학)이 밝혀 낸 사실들 -- 일본청동기의 청동원료가 중국 것인가, 한국 것인가 하는 문제

청동기는 구리(Cu)와 주석(Sn)과 납(Pb)으로 구성돼 있는데 , (Pb)의 동위체 비(同位體 比)를 측정하는 방법을 통해 청동기의 원산지가 어디인지를 찾아내는 결정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동위체표를 보면, 구리에는 2, 주석에는 10, 납에는 4개의 안정 동위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량분석계가 발명되고나서, 구리와 주석은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 캐낸 것이나 다 동위체 비가 일정하나 납은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같은 광상(鑛床)의 것은 거의 일정한 값을 나타낸다.

 

이 사실은 납의 동위체 비를 측정하면 그것이 어느 지역에서 산출된 원료를 쓴 것인지 단정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납은 납 204, 206, 207, 208 등 네가지 동위체가 있는데 동아시아 지역, 즉 중국 한국 일본에서 산출되는 납의 동위체 비가 다 다르다는 측정결과가 밝혀졌다. 이 사실은 그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일본청동기의 청동원료가 중국 것인가, 한국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이다.

최근 일본 각지에서 출토된 53개의 동탁(銅鐸)을 분석했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분류된 2개의 동탁은 "한국으로부터 전래된 질좋은 청동기를 녹여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이제 일본의 청동기기술의 시작을 하나의 기술사로서 재구성해 보면,

i) 한반도의 돌거푸집에 의한 청동기의 주조기술은 합금으로 된 청동 덩어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때가 기원전 3세기경이다. 처음에는 완제품인 청동기가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일본의 규슈(九州) 지방으로 전해졌다. 대마도와 규슈에서 출토된 한국형 청동검과 규슈에서 출토된 청동기들 중에는 숭실대학교 박물관의 돌거푸집에 꼭 들어맞는 것도 있다.

ii) 그러다가 나중에는 기술자가 기술과 원료를 함께 가지고 가서 일본에서 청동기를 만들어냈다. 기술 이전의 첫 단계가 이루어진 셈이다.

iii)그 다음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가 일본에서 직접 청동원료를 찾아내 현지에서 바로 청동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청동기기술이 이식되는 둘째 단계다.

 

이런 사실들은 일본에서 출토된 청동기가 여실히 증명해 준다. 일본에서 발굴된 여러 초기 청동기유적들은 일본학자들의 표현대로 이른바 '한국계'. 이제 일본의 많은 중견학자들은 일본의 청동기기술이 한국인 기술자와 함께 한국에서 건너간 청동합금을 원료로 해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일본에서 만든 독특한 청동기인 동탁(銅鐸)의 화학적 분석결과, 47개 중 30개에서 아연이 발견됬다. 이 사실도 일본의 청동기 기술이 한국청동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경주 입실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경의 작은 동탁이나 신라시대의 선림사종(禪林寺鐘)의 분석결과도 이것들이 모두 같은 유형의 청동으로 만들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청동기는 그 후에도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금 일본의 쇼소인(正創院)에는 86436개의 뚜껑 달린 놋쇠 겹대접이 보존되고 있다 그것은 8세기경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8세기경에 이만큼 훌륭한 놋그릇을 만들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청동기 주조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일본은 그 때에도 좋은 청동기를 한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전상운 성신여대 한국과학사 과학동아 199003월호)

                                                                     http://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199003N025   

(2)

가야에서 생산된 철을 바탕으로 일본 고대국가인 야마토정권이 성립됐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여러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보면 3세기 후반부터 가야로부터 철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4세기 이후부터는 가야의 토기와 갑주, 마구 등이 들어왔다. 물론 5세기 이후에 일본열도에서 철생산이 이루어지나 가야가 멸망하기까지 300년 동안 일본은 가야로부터 대부분 수입했던 것이다. 가야 멸망후 가야의 철기술자들이 일본에 건너옴으로써 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생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규슈대 니시타니 다다시 명예교수)

 

(3)日 吉備지역의 가야인들 --즈쿠리야마 고분과 가야인들 ---(오카야마현 吉備지역)

16백년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등으로 인한 혼란의 상태를 피하고자 두려움을 안고 나라를 떠난 가야인들이 정착한 땅이다.

일본학자들은 吉備지역은 463년 이 지역호족들이 야마토 정권과 싸워 패배하기 전까지 철기를 바탕으로 60여년간 일본전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있었던 지역이라 주장하며 그러한 것을 증빙하는 자료로 현지의 고분을 든다. 이 고분을 중심으로 吉備세력이 형성돼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발굴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즈쿠리야마 고분은 吉備시기인 5세기초에 조성됐으며 일본에서 네번째로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으로 길이가 360m나 된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트였다. 이 사방 시야가 닿는 곳에는 전부 가야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한 것은 발굴된 5, 6세기의 수많은 유적이 웅변해주고 있다. 그러면 이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고구려와의 전쟁에 왜가 참가했는데 당시의 전쟁에서 주로 활약한 왜의 주체는 기비지역의 호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러니까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왜란 다름아닌 기비지역의 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만큼 기비세력이 강력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산대 신경철(사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한국 학계에서는 비문에 있는 왜의 주체를 기타큐슈나 기나이(畿內)세력으로 본다고 말했다.‘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2세기말~3세기초에 규슈와 기비, 야마토지역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부경대 이근우(사학과)교수는 당시 야마토의 히미코 여왕이 240~250년에 후쿠오카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체크했다는 것으로 봐서 이 시기가 되면 아먀토와 기비 2대 중심세력권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야마토정권에 패했지만 476년 기비지역의 호족세력이 난을 일으키자 유라쿠 천황이 70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와있다. 이 사건 이후 기비지역에서는 전방후원분을 크게 쓰지 못했다.

 

이 지역에서 기원전 1천년에 이미 한반도 토기가 출토되는 등 한반도와 교류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 고분을 중심으로 가야인들이 살았던 주거지와 일터, 즉 철을 생산했던 공방과 무덤이 곳곳에 있다.

 

구보키 야쿠시(窪木藥師) 유적(공방)--이 고분의 뒤쪽에 5세기초인 구보키 야쿠시(窪木藥師) 유적이 있다. 기비 지역에서 처음으로 가야인에 의해 철이 생산된 곳으로 알려진 이 유적은 철을 만들던 공방으로 철정(덩이쇠)과 철작업 후 남은 찌꺼기, 그리고 부산 복천동 고분군 21·22호분에서 나온 철촉과 유사한 철촉 등이 출토됐다.

다카즈카(高塚)유적(주거지) 이 고분에서 1정도 떨어진 곳에 이 공방에서 일했던 가야인들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없었던 시루와 부엌도 나왔다

호래(法蓮)유적(무덤) --즈쿠리야마 고분과 구보키 야쿠시 유적의 중간쯤인 호래(法蓮)유적은 이들의 사후 거주지였던 무덤이었다. 즉 이 지역에 이주해 살았던 가야인들의 주거지와 일터, 무덤이 세트로 인근에 많이 형성돼 있었던 셈이다. 또 즈쿠리야마 고분 바로 인근인 사카키야마 고분은 고위직 가야인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카즈카 유적 뒤 즈이앙(隨鹿)고분에서 일본에서는 5곳 밖에 없는 단야세트가 나오며 수혈식석실분으로 원통형 목관을 가야식 꺽쇠로 고정하고 있다. 이처럼 이곳에서 7세기 후반까지 200년간의 단야관계 유구가 확인되며 기비의 호족들은 이처럼 가야인들의 철을 기반으로 해 강력한 세력을 키웠다.

 

가야식 산성 기노죠성--7세기 중엽으로 파악되는 이 산성은 5, 6세기대 기비지역에 왔던 가야인들 또는 그 후손들이 만들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경주에는 이런 양식을 보이는 성이 없다. 규슈지방에 있는 백제계 산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기비지역과 가야인들의 관계를 정의한다면.

고대 4세기말부터 7세기까지 기비지역은 가야인들의 주거지로 봐도 될 만큼 이 시기 유적을 조사해보면 전 지역에 걸쳐 가야인들의 흔적이 나타난다. 특히 가야인들이 철을 직접 생산한 철 관련 유적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이주 규모는 엄청나다고 본다. 기비세력은 가야인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이해하고 있다. 가야인들이 기비지역으로 들어왔던 나루터는 1세기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뭇가지를 쌓은 후 흙을 쌓는 축조방식으로 한국 벽골제식이다

                                                                                    (가메다 슈우이치 교수)

                                                        (가야가 살아온다 <26> 5부 동북아속의 가야 기비지역의 가야인들

                                                                    국제신문 입력: 2003.04.17 20:43 조해훈기자 massjo@kookje.co.kr )

                                                                                  http://tadream.tistory.com/13286?category=565852  

(4) 오사카 가와치(河內) 지역의 가야인들

오사카 가와치(河內) 지역--가야인들은 4세기말부터 6세기까지 오카야마 기비지역과 시가켄 오오츠와 쿠사츠, 나라 아스카지역 등에도 건너왔지만 가장 집단적이고 조직을 갖춘 체제로 넘어온 곳은 역시 당시 야마토 정권이 있었던 오사카 가와치 지역이었다.

 

이치스카 고분 인근은 갑주와 마구 등을 제작하던 제철유적은 물론이고 스에키 토기 등을 만든 도요지가 특히 많다. 이를 반증하는 것으로 이 인근에 스에키기타(陶器北)라는 지명이 있으며 오바데라를 포함한 스에무라(오사카와 이치스카 사이에 위치한 지역)엔 가야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수의 가마터가 발견됐다. 이들 지역은 가야인들의 일터였다. 이치스카 고분군에서 3거리의 카시바시에는 가야인들의 생활유적이 있다. 즉 가야인들은 천황이 살았던 지역에 생활지와 일터, 그리고 사후세상인 고분군을 갖추고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독립적으로 생활했을 것으로 고대사학자들은 추측한다.

 

부경대 이근우(사학과) 교수는 야마토 지역에 건너온 가야인들은 매우 집단적이었으며 이들은 자체 지배조직을 갖고 있었고  가야지역에서 사용하던 행정단위도 그대로 옮겨올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치스카 고분군은 반경 1.529에 걸쳐 광범위하게  자리해 있다. 현재 발굴된 고분만 250(6세기초~7세기초 조성)로 이중 99%가 횡혈식 석실묘로 한 묘에 2,3명의 가족이 매장돼 있었다. 간바야시 시로 지카츠아스카 박물관 주임 학예원은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주한 가야인들 1세대나 그 자손들로 보인다고 말할 만큼 당시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는 가야인들의 땅이었다.

      

시가현 구사츠 지역 아즈치  박물관 오하시 노부야 학예관은 이치스카 고분(一須賀古墳)군에서 오사카쪽으로 몇떨어진 구로히메야마 (黑姬山·길이 160m) 고분에서 나온 갑주유물 중 특히 핀으로 갑주를 고정시킨 것이 있는데 이는 틀림없는 가야계라며 보통 갑주는 검은데 왕이 입는 건 금이 칠해져 있다. 쇠의 표면에 금도금하는 기술은 당시 일본에 없었다. 이러한 작업을 한 주인공 역시 가야인들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사카만에 인접, 길이 486m로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인 닌토쿠(仁德·또는 大仙)릉 고분에서는 부산 복천동 갑주와 동일한 5세기 갑주가 발견됐다

                                                                                          국제신문 입력: 2003.04.17 20:43 조해훈기자

                                                                            http://tadream.tistory.com/13287?category=565852 

(5) 야마토 정권의 가야인들 -

5세기 초 야마토지역에 가야인들을 이렇게 대규모로 불러들이고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닌토쿠(仁德)왕이었다. 지난 96년 지카츠 아스카 박물관(飛鳥博物館)은 도굴된 닌토쿠(仁德)릉 고분 유물을 모아 특별전을 개최했지만 이 고분의 주인공이 닌토쿠왕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또 구로히메야마(黑姬山) 고분의 피장자가 가야인들의 최고 지배자 신분이었을 것이라는 게 현재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두 고분에서 나온 갑주와 마구 칼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지난 4세기대 전방후원분의 동경과 옥 등에서 보이는 주술적인 성격에서처럼 철제의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탄 무사 캐릭터의 군사적인 이미지로 급변했다는 것이다. 즉 가야인들의 제철기술 등에 의해 무력적인 강력한 왕권이 형성됐고 가야인들의 행정조직을 바탕으로 야마토 정권의 행정력이 체계를 갖춘 것이다. 또한 이치스카고분 (一須賀古墳)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바데라(大庭寺) 등지에서 가야인들에 의해 생산된 스에키(須恵器)토기가 왕권을 상징하는 부장품으로 매납된 사실도 일본 고대국가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하시 학예관은 또 당시로서는 신분이 높거나 특정 기술력을 가진 가야인들은 가와치지역으로 이주를 했고 그 보다 하급계층의 가야인들은 그 주변지역인 오오츠와 쿠사츠 지역 등으로 이주를 한 것으로 추정한다당시 가와치 지역은 왜의 중심지였다고 덧붙였다.

 

  나라 카시하라 고고학연구소의 반 야스시 학예사는 나라지역은 전성기인 4세기 이후에도 가와치 지역의 변방으로 가야인들의 이주가 계속됐다. 이는 일본서기에도 가츠라기(葛城) 지역 (나라현 고세 시 및 가쓰라기 시)의 가야인들 관련 기록이 있듯이 고세시 난고유적과 니아자와 센즈카 유적에서 나온 갑주와 토기 등을 비롯, 5세기 초반인 미야야마(宮山) 고분군 소츠히코 추정 무덤에서 김해형 배모양의 도질토기가 발견된 것으로도 증명된다고 말했다. 5, 6세기 고구려의 남진 등으로 나라를 등질 수밖에 없었던 가야인들이 매화꽃 하얀 이치스카 고분군의 햇살 속에 당시 모습으로 살아나 이곳을 처음 밟은 취재진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고분군에 박물관이 있다. 이 고분군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해석한다면.

야마토정권이 불러들인 가야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들은 천황에게 조언을 하고 권위를 갖추게 해준 가야의 지배계급과 관료, 철제와 도자기를 만드는 고급기술자들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5, 6세기대 가야인들에 의한 이런 수준높은 문화 수입에 대해 부정하는 일본 학자들도 있다는데.

우리는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도 사실대로 이야기 한다. 고고학적인 자료를 어떻게 왜곡해 해석할 수 있겠는가, 나도 가야의 후손인지도 모르는데. 관람객들 중에도 거꾸로 해석하려는 경우가 있으나 유물을 예로 들며 이해시킨다.

 

-이코마 산맥을 끼고 제철유적과 도요지 유적이 많은데.

둘 다 불, 즉 숯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산기슭에 공방 등이 위치해야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산맥 너머 나라지역의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가츠라기 지역에도 공방 유적이 많다.

 

 

일본 천황가는 세명의 조상신을 모시는데 모두 이즈모의 가라긴이다. 천황이 읽는 제문도 "가라신이시어-보살펴 주옵소서"라는 내용이다.

에도시대의 조정중신이며 유학자인 아라이학세키(1657~1725)"신화의 신령은 인간이다"고 규정했으며 이는 신은 곧 실존의 가야-신라인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즈모에는 엔기식(905년 제정한 제사법 세칙)의 국가지정 신사들이 많다. 가라신을 모신 신사만이 지정돼 있다. 대표적인 이즈모신사의 주신이 신라와 연고 깊은 스사노오이다. 모든 국가지정 신사들의 명칭은 가라쿠니이타대신사, 가라시마신사, 사라가미시라기신사, 가라가마신사로서 어김없이 "가라"를 명시해 놓았다.이야)신사와 다마사쿠유신사에도 가라신이 주신이다.  

                                                                                                                부산일보 도쿄=최성규지사장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00217000061

 

어디 그뿐인가! 황실(皇室)은 고대로부터 궁중(宮中)에 가라가미(韓神)를 받들어 모시고,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가라가미마쯔리(韓神祭)를 지내 오고 있다. 서기 927년에 당시 국무총리 격이었던 후지와라 다다히라(藤原忠平)가 편찬한 연희식(延喜式)에는 가라가미마쯔리(韓神祭)를 지낼 때 제상(祭床)에 올리는 제물의 종류와 제사(祭祀)의 절차가 자세히 기술돼 있으며, 근년에 와서는 가라가미마쯔리(韓神祭)를 봄에 지내는 221일을 건국기념일로 제정해 놓고 황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축제를 지내고 있다.

 

천손(天孫)이라고 하는 황실이 가라(加羅=伽倻)에서 온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개척한 일본열도가 독립하여 자치령이 되어 스스로 '야마터(日本)'라고 일컬으기 시작한 것은 서기 663,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부터다.  

                                                                                                                               박병식 칼럼니스트

                                                                                         백제의 속령 일본, 가야족(伽倻族)의 자치령이었다

      

김해김씨 족보에 수로왕의 왕자 10명 중 7명이 하동 칠불사에서 수도한 후 구름을 타고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시기인 2세기경 남규슈 가고시마 유적에 시치구마라는 지명이 있다.지금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7명의 지배자가 웅거했다는 유적이 있다.

 

가야신을 모시는 7개소의 신사도 있고 7왕자를 주신으로 모신다. 인근에는 가라구니우즈미네신사 등 "가라"명칭을 붙인 신사들이 많다. 이 지방 향토사학자들은 "옛날부터 가야국 7명의 왕자가 이곳에 군림하여 세력을 뻗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왕가의 사학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씨는 "일본신화는 가야신화와 흡사하며 연고가 깊다"면서 가야인이 천황가문의 조상임을 간접적 긍정한 바 있다.

 

일본 개국왕 진무천황의 증조부가 바로 수로왕의 왕자들인 것으로 비정하는 일본사학자도 있다. 당시 남규슈는 가야계가 점거하고 신라계 여왕설의 히미코는 북규슈에 자리 잡았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북규슈 후쿠오카 남쪽 세부리산 너머의 사가현 요시노가리의 야요이시대 유적은 일본역사를 바꿔 써야할 만큼 유명하다.가야식 옹관묘와 지석묘,가야 유물과 동질인 토기, 동검, 곡옥 등 귀족들의 장식품, 동경, 무사들이 착용한 판갑옷, 투구, 말머리가리개, 말안장까지 출토됐다.

 

유물중에서 가장 진귀한 것은 파형동기이다. 이것을 만든 거푸집(주형)도 출토돼 일본 사학자들도 놀랐다. 파형동기의 수수께끼를 풀면 북규슈일대에 대한 가야국의 지배 여부를 명확히 파악하게 된다. 파형동기의 파는 태양의 불꽃형상이며 권위의 상징이다. 김해의 수로왕릉 정문에도 파형문양이 부착돼 있다. 따라서 규슈 유적에서 파형동기가 출토된 것은 당시 그곳에 수로왕의 왕자나 수령급 집단의 군대가 있었다는 증거물일 것이다.

 

수로왕릉의 파형문양은 9개파, 요시노가리 것은 7개파에 불과하다. 파수가 많은 것은 상위자의 의미를 갖는다. 요시노가리 파형동기의 파수가 적은 것은 분국임을 추정할 수도 있다.

 

더욱이 거푸집이 출토된 것은 파형동기를 대량 제작한 증거이며 규슈에 가야국 예하의 왕자급 집단이나 군사력이 엄청났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에가미 나미오박사가 주장한 고대한국의 기마군단이 일본 중부지역을 정벌했다는 기마민족정복설과 합치되기도 한다.

 

일본 고대사 고사기에 요시노가리 일대를 말로국이라 했다. 경남 밀양고을이 말라국이었다. 말라국의 호칭이 말로국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정설이다. 따라서 가야시대에 밀양출신들이 먼저 점거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또 일본서기에 남규슈 사츠마지방을 졸마국이라 했다. 삼국사기에 졸마국은 경북 김천군 조마면으로 명시돼 있다. 고령 대가야의 성읍국이었던 김천 졸마국 출신의 터전이었던 모양이다.  

                                                                                                                       부산일보 도쿄 최성규 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