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임나일본부는 실존했다

청 설모 2025. 4. 18. 18:13

아래의 내용들은  TV교건 님의 유투브 내용을 공부용으로 텍스트로 정리한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YNpWyz3tUE

임나일본부 -- 아라가야
    일본서기를 해석한 <석일본기>에 임나일본부로 적고 미마나노 야마토노 미코토마치라고 훈독함.
    이는 임나에 파견된 왜의 사신을 의미하고  529년 안라회의 개최하여 가야의 운명에대해 백제와 신라가 가야를 
    침략하지 말것을 논의함. 가야 신라가 혼인동맹을 맺었으나 신라가 가야를 침략함으로서 파토남. 대가야가
    신뢰를 잃고 아라가야가 대두되기 시작함.
    임나일본부의 주요멤버들은 가야에서 왜로 이주한 가야인들이었다.
    저급철이 많이나는 일본에서 고급철을 구할수 있는 가야를 상대로  무역과 외교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일본 사무라이들이 여러개의 검을 차고 다니는 이유도 칼이 잘 부러졌기 때문이고 명검에 대한 숭배문화도 
    부러지지 않은 칼의 반증이었기때문이다.

    이들은 왜가 이득이 되는 방향보다 아라가야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왜나라의 사신이지만 아라가야(안라국)을 위해 일했던 이들은 임나일본부가 아닌 안라왜신단이라고 부른다.
    구한말 만주나 중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이 조선의 독립을 도왔던 것처럼 말이다.

    가야와 안라왜신단이 어떻게 가야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는가?
    백제성왕과 신라진흥왕이 동시에 가야의 동쪽과 서쪽을 야금야금 침입해왔다.
    백제-- 상다리, 하다리, 모루국 같은 가야소국을 병합하고 가야연맹의 맹주이던 안라국에 결탁성을 짓고 
             백제군을 주둔시킴. 구한말 열강들이 조선에다 병력을 배치한 것처럼.
    신라-- 금관가야, 탁기탄, 탁순국같은 동가야의 나라들을 침입. 
    아라가야는 안라회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가장 침략야욕이 강했던 백제와 사비회의를 추가로 열었다.
    성왕에게 멸망당한 가야국의 부활과 재건을 요청했다. 백제는 더 많은 군사를 가야내에 배치하여 보호라는 명분으로
    나라를 집어삼킬 의사만 보였다. 이에대해 아라가야가 적극 활용한 것이 안라왜신단이었다. 가야가 직접 움직이면
    백제에게 침략명분을 줄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라왜신단은 신라에 접촉하고 가야의 부활고 재건을 요청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백제는 가야연맹의 재건을 
     선포하는등  가야달래기를 시도했다. 가야는 귀중한 시간을 벌게 되었다.

     안라왜신단의 활약 -- 백제는 건방지게 신라에 접촉한 안라왜신단의 활동에 대해 해명하라고 왜왕에게 다그쳤다.
     왜왕은 안라왜신단에 직접 해명하라고 백제로 보냈는데  안라왜신단은 백제 성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왜왕이
     보낸 문서를 건넨다. 그 내용은  '백제가 가야지역에서 손을 떼는 것이 어떻겠냐? 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명백한 
     위조문서로 이에대해 백제는 왜를 크게 꾸짖고 항의했는데 결국 안라왜신단의 일부가 교체되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고구려가 548년 백제 독산성을 공격한다. 백제는 이를 겨우 막아내고 고구려 포로를 심문했는데
     포로는 놀라운 이야기를 한다.
     바로 안라국과 왜인들이 후방에서 돕겠다고 고구려의 백제침략을 사주했다고 증언했다. 여기서 왜인들이 바로
     안라왜신단들이었다.  이에대한 백제의 분노는 어마어마했고 이번에도 혼난 왜왕은 안라왜신단을 또 교체한다.

     이처럼 안라왜신단은 일본의 주장처럼 한반도를 통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직 가야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였다.
     이렇게 가야은 안라왜신관을 통해 삼국과 왜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나라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임나일본부설이 생긴 진짜 이유>
     그런데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배반하여 나제동맹이 깨지고 만다.
     진흥왕은 더이상 백제의 눈치를 보지않고 아야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다. 과거 금관가야는 평화적으로 신라에 나라를
     넘겨 김유신같은 금관가야계는 존속했지만 마지막까지 결사항전한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파괴되고 남은 거주민들도
     타지역으로 사민되며 철저하게 지워져 버린다. 남은건 패망전 신라로 귀순한 대가야의 우륵이 들고간 악기 가야금과
     구슬픈 가야12국에 대한 열두개의 노래정도였다.

     고려시대만 들어와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라는 이름에서 알수있듯이 가야의 존재는 미미해졌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총독부가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해 가야의 고분군들에 대해 대대적인 도굴을 행했다. 또 총독부는 
     고분군에서 일본계 유물이 나왔다고 한반도는 원래부터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선전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기록이 많이 남은 고구려, 백제, 신라는 대중문화로 자주 소비되지만  가야는 여전히 찬밥신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관심속에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더욱 자라날수 있었다. 물론 이미 과학적으로도 임나일본부설이 가짜란 증거는
     나오고 있다. 가야지역에서 발견되는 일본계 유물은 중국에서도 나오는 소수의 교역품들이었고  실제로 일본계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할만큼의 유물이나 흔적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가야 고분군에서 발견된 대가야와 아라가야의 특징적인 유물과 토기들이 서일본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정착촌들도 발굴되며 오히려 가야가 왜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현재 가야 전지역에 파악된 고분군의 규모는 무려 1200기나 된다. 하지만 이중 발굴조사된 건 겨우 30%이다.
     가야의 고분이 하나하나 열릴수록 임나일본부설은 가짜라고 밝혀짐은 물론 기록상 지워져버린 가야의 놀라운 역사
     들이 밝혀질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요약
     고대 한반도 임나지역에 일본의 관청을 설치하고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임나는 가야연맹의 대표로 
     활동한 안라국, 현재 경남 함안에 있던 아라가야를 일컫던 말이다. 현재는 임나일본부의 빌미를 내준 나라라고 
     불리지만, 과거  아라가야의 외교활동은  마치 구한말 조선처럼 무너져가는 가야연맹을 살리기위해 필사적이었다.

     1.신라, 백제, 일본, 가야가  모인 국제회의 안라회의
       2004년 아라가야의 도시 함안에서  초대형 건물터가 발견된다. 길이 40미터로 축구장 절반정도의 크기의 건물이다.
       고대에 이러한 초대형 규모의 건축도 매우 드문 사례이다.

       529년 아라가야의 주도로 개최된 안라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백제, 신라, 왜, 가야의 여러나라 지도자들이 모여 가야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된다.
       당시 한반도는 고구려를 상대로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잘 막아내고 있었다(나제동맹)
       그런데 백제와 신라는 앞에선 동맹이지만 뒤에선 완충지대이던 가야를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라가야는 가야연맹을 대표하여 신라와 백제에게 침략을 중지하고 완충지대로 남겨달라고 설득하기위해
       이 큰 건물에 모두를 초빙했다.

       하지만 여기서 아라가야가 확인한건 백제와 신라가 서로 보호를 명분으로 침략의사를 꺾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구한말 조선의 외교관들이 열강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보호를 명분으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했던것
       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생소한 아라가야는 대체 왜 가야연맹을 대표하고 있을까?

     2. 600년 가야역사의 남버투
       보통 가야의 역사라고 하면 처음엔 김해가야가 철의 나라로 크게 위세를 떨쳤고, 광개토대왕의 금관가야 정벌 이후엔
       고령 대가야가 호남 동부와 영남 서부를 아우러는 거대한 영토를 가졌다고 알고있다.
       하지만 이 두 국가가  600여년간 흥망성쇠할 동안 꾸준하게 남버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아라가야다. 
       대가야가 아라가야에게 주도권을 내준 경위는 이러하다. 안라회의가 열린건 가야의 말기로 당시 대가야도 힘이 빠져서
       신라와 혼인동맹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신라는 혼인을 빌미로 지방행정관과 지리조사를 하는 스파이 100명을 보냈다.
       이에 가야연맹이 크게 반발하여 혼인동맹이 깨지게 되고 신라는 이를 빌미로 금관가야, 탁순가야, 탁기탄을 흡수한다.
       이때부터 가야연맹은 대가야를 신뢰하지 않았고 꾸준한 강국이었던 아라가야가 연맹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 아라가야를 지원하는 든든한 세력이 있었는데 이 세력이 바로 왜의 임나일본부였다.

     3.임나일본부의 허구와 진실
       임나일본부는 명칭부터 허구이다. 일본이란 말은 7~8세기 이후부터 쓰였고, 관청을 의미하는 부 역시 중앙집권화가
       늦었던 일본에선 7세기 이후 처음 쓰였다. 이는 가야가 멸망한지 꽤 지난때의 일로 임나일본부는 후대에 갖다붙힌
       이름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대한 주석을 모아둔 석일본기에서 한자로 임나일본부로 적었지만 미마나노 야마토노 미코토모치
       라고 훈독한다고 한다. 이는 임나에 파견된 왜의 사신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