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박씨신라와 오환족

청 설모 2022. 5. 30. 15:39

{조약돌님}의 글

일찍이 김상 교수님이 “B.C 2 ~ A.D1세기는 민족의 대 이동기(『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이하『네티즌 고대사』)”이며 “서라벌국의 원주지는 북만주나 바이칼호 동쪽의 몽고초원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셨는데, 그 때 그분이 “선비족과 오환족이 왕을 가사, 거세, 거수 등으로 불렀다(『네티즌 고대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박혁거세 “거서간”의 이름도 이들의 왕명이라는 주장을 덧붙이셨죠.

이는 고(故) 김원룡 교수님이『한국문화의 원류』에서 신라를 건국한 이가 북방 기마민족 출신이었다고 추론하시고 박 혁거세의 탄생설화에 말[馬]이 등장한다는 점과 신라 귀족들이 반드시 말을 탔던 것을 보더라도, 신라 건국자가 북방 기마족과 관계 있음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주장하신 점이나, 김성호 박사님이 박씨족의 상주도읍 때 고타군주가 파사왕에게 헌상한 ‘청우(:푸른 소)’가 바로 박씨왕가에 출가한 최초의 김씨왕비 사성부인을 은유한 말이며 이것이 바로 박씨족의 시조신화로서, 이것은 비단 박씨족에 한한 것이 아니라 거란족이던 요국(遼國)의 시조신화도 바로 이와 같다고 지적하신 점,

최초의 박씨 왕 때에는 왕비의 국구(왕비의 아버지)만을 갈문왕으로 추봉하여 거란족의 국구장제와 동일하며, 박씨족과 거란족은 시조신화뿐만 아니라 국구장제까지 일치하여 동족이었음이 확실하다는 연구결과와 비슷해 주목되는데, 저는 언어와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보았을 때 그분들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 제 주장을 그분들의 논지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전개하려고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거란은 퉁구스(:동호)인 계통인데, 홍기문 선생이 인용한 정인보 선생의 견해를 따르면 신라의 관명 아찬(阿粲)은 곧 동호어(東胡語)의 형(兄)이라는 아간(阿干)과 같은 말(홍기문 선생의 책인『洪起文 朝鮮文化論選集』에서)이며

『거란국지(契丹國志)』세시잡기(歲時雜記) 속에 3월 3일날 거란인들은 나무로 새긴 토끼를 과녁으로 삼고 편을 갈라서 활쏘기를 내기하면서 그날을 도리화(淘裏化)라고 부르는데, 도리(淘裏)는 토끼라는 말이요, 화(化)는 활이라는 말이라고 한 대문이 있고(『삼국지』진한 조와『삼국유사』진한 조를 따르면, 진한인들은 활을 ‘호’라고 불러 거란어와 비슷함을 알 수 있음. ‘활’은 진한인의 말인 ‘호’가 바뀐 말로 보인다),

홍기문 선생이 인용한 시라토리(鳥居) 박사의 여행기에는 동몽고 일대(거란 - 키타이 - 족이 살았던 곳)에서 고적(古蹟)을 ‘신라인의 자취’라고 부르고 있다는 구절이 나와 이들과 서나벌 왕족이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또한 중국 사서에 따르면 선비족은 동생을 ‘아우’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나와, 선비족의 말이 신라인의 말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퉁구스계로 알려진 민족 가운데 오환족과 신라의 풍습이 비슷하다는 점은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죠.

한 인간집단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제사의식이나 장례식에서 오환족과 - 신라인의 문화를 이어받은 - 한국/조선(:이북)의 그것이 비슷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환(烏桓)의 장례의식에는 한국의 자리걷이(씻김군)과 유사한 습속이 보이고(박원길의 책『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에서. 이하『초원제국의 샤마니즘』), 음식을 먹기 전에 일정량을 떼어 하늘과 땅 및 조상에게 바치는 행위(고수레)가 오환족에게서도 나타나며(『초원제국의 샤마니즘』에서),

한국/조선 사람은 장례식 때 죽은 사람의 물건을 태우는데, 오환족에게서도 물품을 태우는 ‘툴레시(Tuleshi)’라는 습속(박원길 연구원의 말에 따르면, 툴레시는 순장과 더불어 북방민족의 대표적인 풍습 가운데 하나라고 함)이 발견되기 때문에, 오환족과 우리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단 말이죠.

게다가 박 연구원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오환족의 거주지는 적산인데, 적산(赤山)이라는 명칭은 고대 한국의 불거내 ․ 불함산이나 고대 몽골의 보르킨산(Burkhan Khaldun)과 의미가 매우 유사하다는 데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 오환의 적산은 “붉은 빛을 내는 산”이라는 점에서 어원적으로 불함산이나 Burkhan Khaldun과 큰 차이가 없다고 간주할 수 있으므로(『초원제국의 샤마니즘』에서), 저는 종래 한국학계가 막연하게 ‘북방 유이민’이라고 불러온 서나벌 건국세력의 정체가 오환족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것입니다.

또한『삼국지』「오환전」에는

“문자가 없고, 나무에(부호를) 새겨 신표로 삼은 뒤 읍락(邑落)마다 (그것을) 전한다(刻木爲信, 邑落傳行, 無文字).”.

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그로부터 3세기 뒤의 신라 상황을 전하는『양서(梁書)』「신라전」에 나오는

“(신라는)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부호를) 새기고 그것을 신표로 삼았다”.

는 구절과 비슷하여 관심을 끕니다. 오환족은 서기 207년 오환의 기마군단을 탐낸 조조가 20여만명에 이르는 오환의 부중을 중국의 내지로 이주시켜 군호(軍戶)와 편호(編戶)로 흡수함으로서 역사상에서 사라져 갔고, 신라의 풍습은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뒤에야 중국 남부에 알려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요?

이는 신라가 고구려/백제를 뛰어넘어 몽골초원 동남부에 살던 오환족과 만났거나, 아니면 오환족이 어떤 시기에서건 신라에 들어와 자신들의 풍습을 남겼다고 추리할 때에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기록과 고고학 유물로 미루어보았을 때 전자일 가능성은 별로 없으므로, 저는 후자를 골라 오환족이 서기 207년 이전에 경상북도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게다가『삼국지』「오환전」에는 오환족이 각 마을 하나하나를 ‘부(部)’로 불렀다(數百千落自爲一部)고 적혀 있는데, 이 기록은 그동안 ‘후대에 조작된 기록’으로 알려진『삼국사기』「신라본기」유리이사금 조(條)의 기록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단 말입니다.

「신라본기」는 서기 32년 유리이사금이 혁거세가 정복한 6촌(村)의 이름을 각각 양<부>, 사량<부>, 점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로 바꾸었다고 적어 오환족이 마을(:村) 하나하나를 부(部)로 불렀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죠.

혁거세의 후손인 유리이사금을 오환족 출신으로 볼 경우, 유리이사금 조의 기록은 지배자인 유리이사금이 피지배자인 6촌을 오환족의 풍습대로 뜯어고친 사실을 적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한국/조선의 역사학자들이 거의 살펴보지 않은『삼국지』「오환전」의 기록이 혁거세의 출자와 서나벌 왕실의 출신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준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 글을 읽은 一道安士 님의 답글 :  
Re: 신라초기 유리왕의 부 체제

조약돌님 말씀:

"게다가『삼국지』「오환전」에는 오환족이 각 마을 하나하나를 ‘부(部)’로 불렀다(數百千落自爲一部)고 적혀 있는데, 이 기록은 그동안 ‘후대에 조작된 기록’으로 알려진『삼국사기』「신라본기」유리이사금 조(條)의 기록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단 말입니다.

「신라본기」는 서기 32년 유리이사금이 혁거세가 정복한 6촌(村)의 이름을 각각 양<부>, 사량<부>, 점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로 바꾸었다고 적어 오환족이 마을(:村) 하나하나를 부(部)로 불렀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죠.

혁거세의 후손인 유리이사금을 오환족 출신으로 볼 경우, 유리이사금 조의 기록은 지배자인 유리이사금이 피지배자인 6촌을 오환족의 풍습대로 뜯어고친 사실을 적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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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제 유리왕조의 부 체제 확립이 이해가 됩니다. 이 신라의 부 체제란 것이 본래 북방유목민족의 풍습으로 훗날 여진족의 부 체제나 비슷한 준 군사조직의 성격을 지닌 통치조직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서나벌 왕족이 오환족이라면, 그들이 왜 고향을 떠났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요,『삼국지』「오환전」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기록을 읽어봅시다.

“그들의 선조가 흉노에게 격파당한 뒤, 많은 (오환족) 사람들이 다른 세력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했고 그 스스로도 힘이 없어서 흉노의 신하가 돼 복종했다. (오환은 흉노에게) 세세토록 소와 말과 양을 보내야 했으며, 만약 (보내는) 시한을 넘겼는데도 흉노가 요구하는 만큼의 마릿수를 채우지 못하면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흉노의) 종으로 보내야 했다.

오환은 흉노의 일연제(壹衍鞮) 선우가 다스리던 때에 이르러 사나워졌고, (흉노족한테) 장차 모돈(冒頓)이 누운 곳이 박살난 사실을 퍼뜨려 치욕을 안겨주려고 흉노 선우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일연제 선우가 (그 사실을 알고) 몹시 화를 내며 기병 2만명을 내 오환을 쳤다.

대장군 곽광(藿光)은 (소식을) 듣자 도요장군(渡遼將軍) 범명우(范明友)를 보내 그가 기병 3만명을 데리고 요동(군)을 나가 흉노를 치게 했으나, 흉노는 명우를 따르는 군사가 (싸움터에)이르렀을 때 이미 (군사를) 이끌고 떠난지 오래였다.

오환은 그들이 무너진 틈을 타 진격해 마침내 6천여 명의 목을 베고, 세 왕(王)의 머리를 얻어서 돌아간 흉노병(兵)을 피해 또다시 달아나야 했으며, 나중에 몇몇이 다시 변방을 노략질하자 명우가 (오환족 패잔병을) 여러 번 쳐부수었다.”

―『삼국지』「오환전」

(:오환족이 ‘왕(王)’이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을 여러 명 두었다는 기록도 신라의 갈문왕 제도와 거란족의 국구장제가 오환족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려줍니다. 서라벌과 거란은 비슷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비슷한 제도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한(漢)나라의 장군 곽광이 살아 있을 때인 서기전 78년(곽광은 서기전 87년에 대장군이 되었고 서기전 68년에 죽었으므로,「오환전」의 기사는 서기전 87년에서 68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짚어볼 수 있음. 혁거세왕이 태어난 해가 서기전 69년이므로 그 시기를 서기전 87년에서 서기전 69년 사이라고 생각했다),

동호족의 후손인 오환족은 동호를 무너뜨린 흉노에게 복수하려고 싸움을 걸었다가 오히려 지고 쫓겨났는데, 이후 그들은 한나라의 국경지대로 쳐들어왔다가 한군(漢軍)에게 가로막혀 갈 곳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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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

동한(:후한) 사람인 반고(班固)가 지은『한서(漢書)』에는 “원봉(元鳳) 3년(B.C. 78) 1월 태산(泰山) 지역의 내무산(萊蕪山) 남쪽 흉흉(匈匈)에 수천명의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가보니, 큰돌이 스스로 섰는데, 높이가 1장(丈) 5자(尺)이고 크기가 48위(圍)이며, 땅속 깊이 8자(尺)에 돌 세개가 다리를 하여 세워져 있다. 돌이 세워진 곳에는 흰 까마귀(白烏)들이 수천마리 몰려있었다(孝昭元鳳三年正月 泰山萊蕪山南匈匈 有數千人聲 民視之 有大石自立 高丈五尺 大四十八圍 入地深八尺 三石爲足 石立處 有白烏數千集其旁 [:漢書 卷27 五行志]).”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자신들과는 겉모습과 언어(言語)가 전혀 다른 부족이 이상하고 신비스러운 석조물을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邊 光 賢,「고인돌에 대한 기록(記錄)」,『고인돌과 거석문화 - 동아시아 - 』, 도서출판 미리내, 서기 2000년, 302 ~ 303쪽)”되며  

“여기서 말하는 ‘흰가마귀(白烏)’는 겉이 하얀 가마귀가 있을 수 없듯이, 단순하게 가마귀(烏)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흰옷을 입고있는 가마귀와 관련된 부족(部族)을 약간 비유(比喩)하여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흰가마귀(白烏)는 곧 연(燕) 나라의 북쪽에 근거(根據)하고 있었다는 오환족(烏桓族, 東胡)의 유민(遺民)을 비하(卑下)하거나 비유(比喩)하여 말한 것으로, 오환족(烏桓, 烏丸)은 동호족(東胡族)과 흉노족(匈奴族)의 한 갈래이며, 사새(四塞) 안에서 볼 때 야만족이므로 멸시(蔑視)하는 의미에서 이같이 쓰지 않았나 생각된다(변광현, 같은 책).”

“또한 여기서 말하는 흉흉(匈匈)이라는 지명(地名)은 태산(泰山)의 동쪽에 있는 내무산(萊蕪山) 남쪽 기슭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산동반도(山東半島) 제남(濟南)의 동남쪽에 위치한다(변광현, 같은 책).”

당시 전한의 영토였던 산동반도 제남의 동남쪽에 난데없이 오환족이 수천 명이나 나타나 거석 구조물을 세운 사실로 미루어볼 때, 오환족은 서기전 78년 이전이나 또는 그 해에 흉노족에게 쫓겨서 한나라로 침투한 듯하며 서기전 78년은 곽광이 대장군으로 일하던 때이므로『삼국지』「오환전」의 사건이 일어난 해가 서기전 78년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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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족은 신(新)나라 왕망과 사이가 나빠져 중국에 자주 쳐들어갔고(『삼국지』「오환전」), 후한 초기에는 고구려 ․ 예 ․ 맥 ․ 선비(鮮卑)족과 함께 후한(後漢)에 쳐들어가기도 했으므로(『후한서』「고구려전」과『삼국사기』「고구려본기」) 그들은 흉노족이 자신들을 짓밟은 다음에도 살아 남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한데, 유목민족의 특성상 싸움에 지면 순순히 무릎꿇기보다 다른 곳을 찾아 달아나는 경우가 많으니만큼(예컨대 흉노족이 한과의 싸움에서 지자 서쪽으로 달아나 훈족이 된 사실이나, 여진족에 깨진 거란족이 중앙아시아로 달아나 ‘카라 키타이[:서요西遼]’왕국을 세운 사실이 좋은 예임)

이 무렵 많은 오환족이 본거지인 흥안령(興安嶺. 몽골초원과 만주를 나누는 산맥임)에서 요하(遼河) 상류인 노합하(老哈河. 라오허) 유역까지 펼쳐진 초원지대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고 짚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난민들은 전쟁이 터진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법이므로, 몽골초원(:흉노의 땅)이나 화북평원(:전한[前漢] 땅)이 아닌 몽골초원의 동남쪽으로 갔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이곳에는 요령성과 흑룡강성, 길림성이 있으며 한/조선 반도도 있으므로 이들의 이동과 서나벌의 건국이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박씨족이 오환족일 수도 있다는 가설은 김성호 박사님이 서기 1982년『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들고 나오신 학설이며, 제 창작물이 아님을 밝힙니다. 비록 박사님이 최근에는 그 가설을 철회하고 박씨족을 스키타이족과 연결지어 생각하시지만, 저는 그분과는 달리 박씨족이 오환족일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서나벌이 세워지기 전, 오환족의 왕족이었을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조선의 유민(『삼국사기』「신라본기」)”인 6촌 사람들과 만난 시기는 오환족이 학살당한 지 10년 뒤인 서기전 69년(「신라본기」에는 혁거세가 서기전 57년, 열세 살 때 즉위했다고 적혀있는데 그렇다면 혁거세의 탄생 시기 - 서나벌 왕족이 내려온 시기 - 는 57 + 12 = 69 여서 서기전 69년이라는 계산이 나옴)입니다.

그리고 6촌 사람들은 몽골초원의 동남쪽인 경기도에 살고 있었죠(천관우/김성호/일도안사설). 그로부터 13년 뒤인 서기전 57년에 서나벌이 세워지며, 이들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데로 북아시아 유목민의 신화인 천손 신화와, 남아시아 농경민의 신화인 난생 신화가 접목된(김병모 박사의 학설) 혁거세 탄생 설화를 지닌 채 역사에 나타납니다.

이들은 당연히 흉노에 대한 반감과 한(漢)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며, 그 사실은 경주 금척리 고분군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도 드러나고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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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건국되고 박혁거세 거서간이 열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첫 임금이 되었는데,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려고 언제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 날 어린 임금이 대궐 뜰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웬 사람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한 뒤 사라졌다.

"저는 천제(天帝)의 사자입니다. 천제께서 지금 '지상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이루어졌는데 새 나라를 축복하기 위해 이 금척(金尺. 황금 자)을 선물로 갖다 드려라.'고 하셔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 금자는 앓는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다시 살아나는 보물입니다.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은 하늘에 절하고 금자를 받아들어 신하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박혁거세 거서간과 알영 왕비는 백성을 어질게 다스렸으므로 나라 안이 화목하고 농사도 잘 되어 태평세월이 계속되었다. 임금도 백성들도 '이것은 하늘이 축복해준 금자의 덕'인 줄로 알고 금자를 소중히 여겼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한(漢)나라 왕이 신라에 금자라는 보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금자를 잠깐 보고 줄 테니 빌려 달라."고 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린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금자를 빌려 주는 것이 좋겠소, 안 빌려 주는 편이 좋겠소?"라고 물었다.

한 신하가 나와서 아뢰었다.

"한(漢) 나라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교만한 나라입니다. 금자를 빌려주면 우리 신라를 업신여겨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신하가 아뢰었다.

"한(漢) 나라는 자기네 나라가 부강한 것을 믿고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만일에 그러한 보물을 한나라가 가진다면 이웃 작은 나라들을 더욱 괴롭힐 것입니다. 금자를 보내서는 아니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중한 보물이라 하더라도 잠깐만 보고 주겠다는데 그것도 못한다면 어찌 이웃간의 의리가 서겠소, 못 주겠다는 구실이 뚜렷해야 하지 않겠소?"

"그 금자를 땅 속에 묻어버리는 편이 좋을 듯 하옵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한도가 있는데 죽어야 할 사람을 그러한 보물로써 자꾸만 살려 놓는다면 마지막에는 나라 안에 사람이 차고 넘쳐 새로 세상에 태어날 자손들이 크게 위협받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보물을 가져 공연히 힘센 나라의 욕심을 자극해 침략받을 염려도 없지 않으니 땅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왕은 그 의견을 옳게 여겨 금자를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신하들은 다시 임금에게 아뢰었다.

"한(漢)나라는 넓고 큰 나라입니다. 만일 금자를 땅에 묻었다는 기미를 알게 되면 곧 파내어 가지고 갈 것입니다. 금자무덤 주위에 더 많은 무덤을 만들어서 어느 무덤속에 금자가 들어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그 뒤 한나라 사신이 와서 금자를 빌려 달라고 했다. 왕은

"이웃나라께서 금자를 잠깐 빌려 달라하시니 어찌 못한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금자가 너무 귀중한 보물이라서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래도 도적들이 훔쳐갈까 두려워서 그 주위에 더 많은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자를 묻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금자가 어느 무덤에 들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렵게 먼 길을 오셨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금자를 보여주지 못하는 까닭을 설명했다.

한(漢)나라 사신은 "있는 무덤을 모두 파보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며 "금자를 묻은 무덤으로 안내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한의 사신은 금자를 묻은 무덤 주위에 너무 많은 무덤이 있어서 파보는 일을 단념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날 이후 무덤 속에 금자를 묻은 사람이 정말 죽었으므로 신라에서도 금자가 들어있는 무덤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도 금자는 금척리 고분군 가운데 어느 한 무덤에 묻혀 있으리라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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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우선 "박혁거세" 거서간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적고 있고 신라의 보물을 탐내는 '이웃'이 한(漢) 나라라고 전하는데, 이는 혁거세왕이 한대(漢代)인 서기전 57년에 즉위하였다는 역사서의 구절과 일치하므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만든 가능성이 큽니다.

한나라는 22년 전 오환족이 학살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오환족 족장의 아들이 새 나라를 세우고 진(辰)을 몰아낸 사실을 안 뒤 새 나라가 한(漢)을 위협할 만큼 힘이 센지를 알려고 사신을 보냈겠죠.

박씨족은 22년 전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기 때문에 한(漢)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신하가 된 "조선의 유민"(:6부)들도 53년전 ― 한漢의 신하이자 연나라 사람이었던 ― 위만이 세운 나라에서 달아나 진(辰)에 망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그리고 위만조선이나 한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어떤 나라와도 왕래하지 않을 정도로 한漢을 미워했으므로) 왕족과 마찬가지로 한(漢)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금척리 전설에서도 신하들이 앞장서서 한나라를 "교만한 나라", "자기네 나라가 부강한 것을 믿고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는 나라라고 욕함. 또 혁거세왕이 한나라를 "이웃"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서나벌이 한나라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암시한다.

오환족은 한나라와 가까운 초원지대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한이 "이웃"나라였다. 만약 6촌 촌장이나 박혁거세가 경상북도의 토착세력이었다면 한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이웃 나라"로 느꼈을 까닭이 없고, 애초에 부딪히지 않으므로 반감을 품을 까닭이 없다)

서기전 57년, 북아시아(:시베리아와 몽골초원)/동아시아에서 이렇게 극심한 반한(反漢)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세력은 한나라와 대립하던 흉노나, 구성원이 한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흉노에게 학살당했으며 나중에 한으로 들어가는 것도 제지당한 오환족, 한때 위만조선에서 조선상(朝鮮相)이라는 벼슬을 지내다가 위우거(우거)와 대립해 고조선 사람들을 이끌고 "동쪽 진(辰) 나라"로 달아난 역계경의 후손밖에 없습니다(역계경의 이야기는『삼국지』「한전」이 인용한『위략』에 실려있음).

그러나 흉노는 - 중국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 나라를 유지하고 오환족을 쳐부술 정도로 강자였고, 따라서 달아나 새 나라를 세울 까닭이 없죠. 또 "조선의 유민"들은 한에 반감을 품긴 했어도 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결국 말을 잘 기르면서 말을 상징으로 삼고 한나라에 대한 반감을 품을 수 있는 무리는 오환족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백(白)은 '서쪽'을 나타내는 빛깔이기도 합니다. 흰 말은 - 목격자인 “조선의 유민”이자 “6촌”의 주민들이 볼 때 - '서쪽에서 온, 말을 잘 다루고 말을 상징으로 삼은 무리'를 은유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은 6촌으로 오기 전에 흉노와 한에게 학살당해 살 곳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죠. 그래서 저는 박혁거세 거서간(불구내)이 오환족의 거수라는 가설을 세운 것입니다.

이 전설은 박씨들이 겪은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다가,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 경주의 전설이 되어 전해 내려왔을 것입니다. 금척리 고분군의 전설은 ‘결과’이며「오환전」의 기록은 ‘원인’인 셈이죠.

결국 혁거세 거서간의 아버지는 서기전1세기 무렵 흉노와 싸워서 지고, 한(漢)에 쳐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오환족 난민들의 지도자이자 ‘거수’라고 불린 왕이며 살기 위해 경기도로 달아나 위만조선의 유민을 굴복시켜 동맹자이자 신하로 삼은 다음 새 나라를 세웠다는 가설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때 성씨를 ‘박’씨로 바꾸었을 것입니다.

▩[고침]서나벌 왕족의 뿌리 : 3. 남겨진 과제 - 달 숭배신앙은 오환족의 문화인가?

앞 글에서 박씨족이 오환족일 가능성을 살펴보았거니와, 그렇다면 ‘월성(月城)’이나 ‘시라기(일본어로는 신라를 “시라기”라고 부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신라는 도읍을 ‘월성’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도 오환족의 문화와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인 것이죠.

『삼국사기』「신라본기」파사이사금 22년(서기 101년) 조에는

“봄 2월에 성을 쌓아서 <월성(月城)>이라 하고,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에 옮겨 거처했다.”

(서나벌이 신라를 정복하고 경주에 새 수도를 세움 - 조약돌)

는 구절이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경주에 월성을 쌓은 무리는 서나벌의 왕족인 박씨족임을 알 수 있는데(『삼국유사』「탈해왕」조와「신라본기」탈해이사금 조에는 석씨족의 시조인 탈해이사금이 세운 도성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으며, 전자는 탈해왕이 “양산 밑에 있는 호공의 집을 바라보고는 좋은 땅이라 생각하여 속임수를 써서 빼앗아 거기에 살았는데 - 나는 탈해이사금이 서기 57년에 신라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박씨족이 석씨족의 도성을 정복하고 그곳에 새 성을 쌓은 뒤 ‘월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얘기임)>.”고 설명해 경주에 월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들이 석씨족이 아닌 박씨족이라고 판단했다),

이 ‘달’을 좋아하는 문화가 오환족의 것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환족은 흉노족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이들이 흉노족처럼 달을 섬겼을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경상북도로 내려왔을 때 도성의 이름을 ‘월성(月城)’으로 지었다고 볼 수 있어요.

따라서 저는 ‘모세로’씨가 <신라는 ‘月氏’가 동쪽으로 와서 세운 나라이다?>라는 글에서

“일본은 신라를 ‘시라기’라고 하였다. 아마 ‘사로’, ‘사라’에서 온 말이리라. 몽고어로 ‘달(月)’은 ‘사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사라’가 ‘다라’가 되고 또 ‘달’이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신라의 국명 ‘사라’는 ‘달’이라는 뜻이 되고, ‘기’또는 ‘지’는 성城이라는 뜻이므로 ‘시라기’는 곧 ‘사라기’ 또는 ‘사라지’가 변해서 된 말일 것이다. ‘사라지’는 아마 우리 고대 말로 월성月城이었고, 성을 이두식으로 쓰면 지支가 되므로 월지月支(월지月只)가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존중하며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모세로 씨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서나벌’의 ‘서나’는 ‘사라’일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서나벌’은 ‘달님의 나라’라는 뜻인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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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충 설명 :

서나벌이 ‘새로운 벌판’이라는 뜻이거나 ‘동쪽(:새) 땅(<나>를 만주어 낱말인 “땅”으로 볼 경우임)의 벌판’이라는 뜻이 있지 않겠느냐고 물으실 텐데, 한때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전자는「신라본기」에서 서나벌이 처음 세워진 곳 - 6촌이 자리잡은 곳 - 이 “산골짜기”였다는 증언과 어긋나고, 후자는 ‘땅’과 ‘벌판’이라는, 뜻이 같은 두 낱말이 겹쳐진 이름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풀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가설을 버리고 모세로 씨의 풀이를 받아들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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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 월성이라는 이름은 오환족의 풍습과도 어긋나지 않으므로 박씨족이 오환족(또는 오환족의 영향을 받은 고조선 유민)이라는 가설에는 아무련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비록 모세로 씨가 월지족의 이동 능력을 강조하며 “당시 오로도스에서 서역까지 이동할 실력이면 고조선이나 신라까지의 이동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그들의 이동 능력이 대단했음은 인정합니다), 월지족은 오환족과는 달리 서기 200년 이후에는 동쪽으로 달아나지 않았고 서기전 69년 이전에 흉노족과 싸우지도 않았으므로 그들이 신라를 세웠다고 보는 건 무리입니다.

따라서 박씨족은 월지족이 아닌 오환족일 가능성이 높으며, 한국 학계는 박씨족의 기원을 알기 위해『삼국지』「오환전」의 기사를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서기전 78년, 선조(:동호東胡)의 원한을 갚고 싶어 흉노족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도리어 무참하게 깨진 오환족은, 그로부터 10년 후(서기전 69년)에 경기도 동북쪽으로 내려가서 “조선의 유민(『삼국사기』)”이 살던 여섯 마을을 점령한다(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고침] 서나벌 왕족의 뿌리 : 2. 오환족이 내려온 까닭」을 참고하기 바람).

이후 그들은 마한 임금의 신하가 되었으며,『삼국사기』「신라본기」혁거세거서간 38년 조(서기전 20년)에 마한 왕이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으랴?”라고 비난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이때까지는 마한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들이 왜 곧장 독립하지 않고 열 세해 동안 기다렸느냐는 점인데, 지금까지는 이 의문을 제대로 풀지 못해『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실린 서나벌의 건국 연대를 믿지 않고 “김부식이 신라를 추켜세우려고 건국연대를 끌어올렸다”거나 “서기전 57년은 12간지(干支)의 으뜸인 ‘갑자甲子’년이므로 후세 사람이 신라의 건국을 신성화하려고 조작한 연대임이 틀림없다.”고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위에 소개한 가설을 내놓은 학자들과는 달리 기록에 나오는 서나벌의 건국 연대가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박씨족(:오환족)은 한(漢)과 흉노의 눈치를 볼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흉노족과 싸웠고, 한에게도 ‘국경지대를 어지럽히는 침입자’로 낙인찍혔다. 비록 두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땅으로 달아나긴 했지만, 망명지에 모인 오환족의 수는 너무 적고 적(:흉노)과 믿을 수 없는 이웃나라(:한)는 여전히 강성하다. 당신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하겠는가?

새 나라를 세워 적에게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보다는 차라리 힘센 나라에 망명하여 안전을 보장받고, 다시 일어설 때를 기다리려 들지 않겠는가?

그들은 바로 그 때문에 서기전 57년까지 나라를 세우지 않았고, 독립하고 나서도(:나라를 세우고 나서도) 서른여덟해 동안은 마한에 조공을 바쳤던 것이다.

(이는 졸본부여에서 마한으로 달아난 비류와 온조가 서기 9년까지는 마한 임금의 ‘제후’임을 자처했던 사실과 비슷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내게 “그럼 서기전 57년이 박씨족에게 특별히 유리한 해였단 말이오?”라고 물으리라. 나는 “네.”라고 대답하면서 그 증거로 한과 흉노의 사정을 다룬 글을 들고자 한다.

“중국과의 서역(:중앙아시아 - 옮긴이) 지배를 둘러싼 전쟁에서의 패배로 흉노의 세력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흉노의 지배층 내에서는 선우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더불어 선우위(선우 자리 - 옮긴이)를 둘러싼 내분과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내분과 대립은 기원전 60년 선우였던 허려권거(虛閭權渠 : B.C 68 ~ B.C. 60)의 사망과 더불어 표면화되었다. 당시, … 우현왕의 지위에 있던 도기당(屠耆當)이 허려권거의 연씨의 도움으로 악연구제선우(握衍胊鞮單于 : B.C. 60 ~ B.C. 58)로 등극했는데 선임 선우와는 달리 그의 좌각(左角) 그룹에 대한 과감한 숙청으로 흉노의 지배층을 구성했던 우각과 좌각 그룹사이에 대립과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기원전 58년 좌각그룹은 새로운 선우인 호한야(呼韓邪 : B.C. 58 ~ B.C. 31)를 등극시켜 악연구제를 토벌해서 그를 자살하게 했다. 악연구제의 사망은 또다른 분열을 가져오게 했는데 기원전 57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중앙정부의 약화를 틈타 흉노의 각지역 군장들이 독립하여 제각기 선우라 칭하는 ‘오선우쟁패시대(五單于爭覇時代 : B.C. 57 ~ B.C. 56)’가 시작되었다.”

― 우덕찬 교수의 책인『중앙아시아史 槪說』(중앙아시아사 개설)에서

보다시피 오환족을 억누르던 흉노가 다섯 나라로 갈라지고 있다. 다른 네 선우와 싸워야 했던 호한야가 제국 밖의 오환족을 칠 수 있었을까? 그러긴 커녕 오히려 -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라도 - 오환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한나라도 왕실이 외척을 숙청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나라의 내부를 안정시키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박씨족이 더 이상 한나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곽광(전한의 대장군. 외척이기도 했다 - 옮긴이)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다가 B.C. 68년(지절地節 2년) 병사하자 선제(:이름은 유병이劉病已 - 옮긴이)는 친정(親政. 군주가 나라를 - 환관이나 외척, 모후母后, 태상왕太上王의 도움을 받지 않고 - 몸소 다스리는 일 : 옮긴이)을 회복하고 상서의 권한을 제한하여 상주(上奏 : 상소문 - 옮긴이)를 직접 황제에게 제출토록 하였다.

또한 소문에 곽씨가 독살했다는 허(許) 황후의 아들 석(奭)을 황태자로 삼고 다시 곽씨가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더욱이 백성의 고충을 경감하기 위하여 병역을 줄이고 군제를 개혁하여 곽씨가 장악했던 거기장군과 우장군 휘하의 군대를 폐지하였다.

이 때문에 불안을 느낀 곽씨일문이 반란을 모의하자 일족을 모두 주살(誅殺 : 베어죽임 - 옮긴이)하여 마침내 곽씨정권을 궤멸시키고 곽황후도 폐위하였다.”

―『中國歷史』[상권](신서원 펴냄)에서

“선제(:유병이 - 옮긴이)는 … 민생안정과 지방 치안유지에 전력하였다.”
    
―『中國歷史』[상권]에서  

가장 위험한 적이었던 흉노의 힘이 약해지고 오환을 경계하던 한도 더 이상 나라 밖에 신경쓰지 않고 있다. 게다가 많은 동족들이 13년 동안 ‘오환족이 마한에 망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박씨족이 자리잡은 곳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마침 불구내(혁거세왕)의 아버지인 거수(박씨족을 이끌고 내려온 거수)도 세상을 떠났다.

혁거세왕의 모후(母后)와 박씨족의 장로들(서기전 57년에는 이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을 것이다)은 ‘지금이 눈치보지 않고 나라를 세우기에는 아주 좋은 때이다.’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 지도자를 새울 때 나라의 이름도 ‘서나벌’로 고쳤고, 지도자를 ‘거수’가 아닌 ‘거서간’으로 부름으로써 자신들이 단순한 망명자가 아니라 어엿한 독립왕국의 백성임을 선언한다.

이것이 내가 보는 서나벌 건국 연대의 진상이다.

원글 출처: http://blog.daum.net/msk1953/1052952
             북청물장수 2004. 10. 14. 0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