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너머

영혼의 역사(2)

청 설모 2016. 6. 12. 23:42

이런 일이 있었다.
새벽녘에 어렴풋이 잠에서 깼는데 내 안에서 강렬한 기도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기도의 내용은 알수 없지만, 매우 강렬한, 마치 하늘을 끌어당기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몇번 한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대해 혼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을 할때... 마음을 텃치한다고나 할까  그런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방언..


너무도 놀랍고 기쁘면서도 두려운 경험이었다...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속에 임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왜 그렇게도 눈물이 쏟아지던지...나는 산속으로 들어가 한참동안 울다 나왔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절로 감사와 찬양이 흘러 나왔다. 마음속의 천국?
매사에 조심하고 마음속에 분노, 시기, 미움, 욕심, 교만, 정욕등.. 이러한 것을 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삼십대의 건강한 나이라 성욕이 늘 자신을 괴롭혔다.
(나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단지 성욕만이 문제가 아니라 음란한 상상들...  
나의 내면은 늘 성적 욕망에 시달렸다. 겉으로는 젊잖고
여자에 대해서 무심한듯하면서도  내 육신은 한편으로 얼마나 갈망했던가.... )
위선이 아니다. 


성스럽다는 것과 성적인 것은 상극인 것 같았다. 머리로 이해를 해서 아는것이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서로 부딫치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으나
내 육적 본능과 물적 집착이 벌거벗긴채로 들켜서 부끄럽고 민망했다. 숨을 곳이 없었다.


 (양평에서 농사를 지을때,  밭에 난 잡초를 뽑으면서..  뽑아도 뽑아도 또 다시 끈질기게 올라오는 잡초를 보며 그 질긴 것이 성욕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편으로 성욕이야말로 육적 생명력의 원천이 아닌가.  대지에 뿌리박고  강인한 생명을 이어가는
잡초의 생명력이야말로 성욕과 그 뿌리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스럽다는 것과 성적인 것은 왜 정반대의 느낌이 드는 것인지...


늘 드는 의문점.
건강한 육체에서 생겨나는 성욕이 죄악인가,
내가 동굴에 들어가서 평생 금욕 수련을 한들 이것을 극복할수가 있을까?(욕망 자체를 일어키지  않을수 있을까?)
다른 일은 다 내팽개치고 전적으로 이 일에만 매달려 설사 그것을 극복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이들어 늙으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거늘.....
육적인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내 내면이 깨끗한가하는 점등.


성욕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조심할수록 희안하게도 오히려 머릿속은 온갖 음란한 상상들이 맴돌았다.
감사와 찬양에 물을 끼얹는 것이 성적 욕망과 상상들이었다
허리 아래에서는 성적 욕망이 꿈틀거리는데 가슴쪽에는 성스러운 영이 거주하시고 머릿속에는 음란한 상상이 뱅뱅 도는 것이 영
거북하고 불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현상이 더 또렷이 부각되고 내 육신이 하나님의 영을 배척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심한 죄책감을 느꼈고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나는 더이상 그러한 갈등을 겪지 않게 되었는데
그때 나도 모르는 새 도박게임에 빠져 있었고 점점 더 심각하게 중독이 되어 갔다.
일도 하지않고 도박게임에만 몰두하다가 돈을 다 잃고 밥도 굶은채 차비도 없어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간적도 많았다.

내일 또하면 손가락을 짜르겠다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아무리 기도를 해도 헛방이었다.
그러한 생활이 몇년간 지속되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만큼 무디어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나무 사이로 피한 것처럼
나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 세상속으로 돌아갔다.


생계를 위해 노가다 판에서 몸을  혹사시키고 그러한 육신의 학대가 어느정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비참한 기분과 자조가  일어났다.
나는 하나님의 영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내 한계이고 ..내 육의 본모습인 것을...


영과 육의 이질성
육은  영을 담는 그릇이다. 영은 육의 반대개념으로서가 아닌 육을 초월하는 절대적 영혼.
또한 육은 慾이다. 慾과 영은 조화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육은 악인가?
육은 자연이다. 육이 죄악이라면 자연도 죄악이고 이 세상 자체가 죄악이 된다.
그러나 자연은 죄악이 아니다.
잡초가 씨앗을 발아시켜 새싹이 땅밑에서  돋아나오고..땅속을 더듬어  뿌리를 벋어가는 일...
연어가 산란을 위해 수만리 먼곳에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절벽을 오르고 알을 낳은뒤
자신의 시신을 영양분으로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적욕망도 생명의 탄생과 자손의 번식을 위한 준비적 단계일뿐  죄악이 아니다.


숫사자에게서 낳은 새끼를 물어 죽여 없애버려야만 교미를 허락하는 암사자...
교미를 거부하던 암컷을 통채로 먹어 삼켜버리던 킹코브라..
어미가 물어준 먹이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결국은 형제를 물어 죽이고 시신을 깨끗이 삼켜버리던 호랑이 ....
이러한 자연의 모습들이 신이 창조한 생의 살아있는 모습들이다.


자연에는 선도 악도 윤리도 없다. 생존조건만 있을뿐이고 그것이 충족되어야 생존이 가능하다.(공기, 온도, 습도, 햇빛, 영양등)
생존을 추구하는 것이 慾이고 이기적 본성이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육적욕망은 물적 집착으로 이어진다.
무한한 욕망에 비해 그것을 채워줄 재화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약육강식의 세상이 된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하지만... 물질적 번영의 원천이기도 하다.
돈이 흘러 나오는 곳으로부터 권력이 나오고, 돈은 慾의 흐름에 따라 흘러간다.

생존을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관리자의 지시 감독을 받아야 하고
소비자의 감성, 욕구를 자극해서 이윤을 창출해야한다.


이 사회의 스템은 무한한 慾을 어떻게 충족시키며 동시에 제어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한정된 자원으로 어떻게하면 더 많은 욕구를 충족시킬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 경제학이고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고 조정할 것인가를 다투는 것이 정치이며  그러한 권한과 의무를 규정한 것이 법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여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데는 이러한 아무것도 필요없다.


바울은 육적 소욕을  버리라고 했지만, 현실에서의 구체적 인간의 모습은 어떤가?
더좋은 스펙을 쌓고, 좋은 직위와 배우자를 만나서, 돈많이 벌고, 삶을 즐기는 것이 대부분 인생의 목표이다.
행복추구권.

그러나 살인, 강도, 성추행  온갖 추악한 범죄와 전쟁까지도 일어나는 것이 현실 세상이다.
삼성과 애플의 특허전쟁,  구조조정을 해야하는 조선업, 난민, 폭탄테러, 핵개발, 월 스트리트.....,

세속적인 성공, 공부, 사업, 예능, 스포츠  심지어 예술, 문학등도 이러한 성공의 모든 것들이 돈으로 연결되고
돈으로 평가받고 그러한 성공이 또다시 상품마케팅으로 활용되어 소비촉진, 돈벌이의 수단이 되는 물질주의 사회.
과학, 기술, 문명이란 것도 어쩌다 이런 방향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것이 결국 생겨난 것이다.
이 세상은 아담이 실수하여 죄악이 들어오고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존재해야 할 것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육의 출생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되고 그 생명의 속성이 慾이다.
이 세상의 모순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慾의 표출이다. 
이 세상은 사랑이 아니라 慾과 힘에의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고 무너지면 흡수되거나, 전쟁이 일어난다
길태. IS 김군. 총기난사 윤병장등....그들이 육적 열등인자의 모습이라면 히틀러, 재벌등은 육적 우등인자의 모습이다.
자연계의 약육강식의 모습은 인간사회의 약육강식의 모습과 닮아있다.

인생의 전장터에서 말없이 끌려가는 마소가 되지 말고 영웅이 되라고 한다.
노예로 살기보다 주인으로 살고, 비정규직 일용노동자나 용역보다 관리자, 감독자, 나아가 자본가가 되라.
왼쪽 뺨을 얻어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밀 것이 아니라
옆구리를 걷어차 두번다시 집적거리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초인이 되라.


그러나 육의 법칙대로 살아가게 되면 생기는 문제 - 약자의 눈물 -


생명에는 慾과는 전혀 다른, 상반되는, 초월하는  다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영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 너머에 의지가 있고(=慾), 그와는 또다른 영이 있다.

영의 세계가 존재하고 이것은 육의 세계와는 다르다는 것.
영은 육의 그릇에 담기나 서로 이질적이다. 바울은 영의 소욕과 육의 소욕은 서로 대립한다고 한다.
육의 세상에서는 누군가의 피와 땀을 빼앗아 자신의 慾을 충족시키는데 사용한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서는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가르친다.

구약에서는 약소민족인 유대인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주변의 이방민족과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통하여
그들의 육적 정착을 이루었다.
신약에서는  육적 소욕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눈을 뜨면 마주치는 현실세계는 육의 차량이 질주하는 고속도로이고 영은 언제 로드킬 당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처지이다.
육의 세상과  영의 세계의 모순


창조주 하나님--약육강식의 세상을 창조,  현실에서의 성공, 번성과 축복을 기원하고,  병들고 약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이므로 제사에도 올리지 말게 하며   이 세상에서 꼬리가 되지말고 머리가 되라고 가르친다(구약)
메시아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의 소망이 되기를 원했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자들의 친구가 되셨고, 왼쪽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내세에서의 구원을 말한다(신약)
살아남기 위한 육의 생존경쟁과 영의 영생의 문제는 상호 대립적이다.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나?
육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가?


영지주의자는 영과 육의 이질성을 구별하여
이 세상의 창조주는 저급하고 악한 영이라고 보았으며 영은 이 물질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라 하여 선과 악의영원한 대립과  2원론을 주장한다.
칼융은 육은  빛의 그림자이며 우리 자신의 어두운 모습이라고 하고, 사탄도 신의 한 모습이라고 하여 영과 육의 타협을 주장한다. 성속일여?
기독교는  창조주와 메시아, 성령의 3위일체를 주장한다.
성스러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모순이 가득찬가에 대해서
아담의 타락과 사탄의 지배, 예수의 구원으로 설명한다
이리 생각하면 이게 맞는것 같기도 하고 저리 생각하면 저게 맞는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 아프리카 초원에 우기가 닥치면 풀이 돋아나고 초식동물이 번성하여 그를 먹이로 하는 육식동물도 개체수가 늘어난다.
그러다 건기가 오면 초식동물은 먹이를 찾아 긴 이동을 하고 육식동물도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한다.
초식동물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므로써 개체수를 줄여 무한증식을 방지하고 초지의 황폐화를 막는다.
최상위 포식자인 사자들의 세계에도 약육강식의 전쟁이 벌어진다.
힘빠진 늙은 사자는 젊은 숫사자에게 밀려 왕좌자리를 내주고 쫒겨나 쓸쓸히 굶어 죽어가고, 왕자의 사자 새끼는 새강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새로운 사자새끼가 출산한다.
자연은 때에 맟춰 우기와 건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생명이 유지되어 간다.
약육강식으로 많은 생명이 사라지면서도 그 안에서 꾸준히 생명은 이어간다.
생명의 원천인 신.



* 도살장에 끌려가기 며칠전부터  먹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는 소의 심정을 아는가?
인간은, 그가 아무리 사회적으로는 약자라하더라도  한편으로 생물학적으로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최상위 포식자이기도 하다.

소나 돼지, 기타 다른 생명체들을 잡아먹는....
바이러스는 자연계의 평형상태를 유지하려는 신의 뜻인가?



* 육의 탄생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되고 육적 욕망으로부터 영으로의 초월적 존재로 나아감.
 애벌레에서 나비로 날아가듯... 육신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이것이 생명의 궁극적 목표이고 죽음도 그러한 과정의 한 모습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지식과 이성의 축적, 과학의 발전은 이룰수 있지만...
 영적 탄생과 성장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초월명상을 통해 도달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승에서의 우리는 애벌레이다. 때가 차면 저 너머로 날아가기를 기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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