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箕子)에 대한 기록
한서 지리지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差之 嫁取無所讐 是以 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不淫......(<<漢書>> <地理志> 燕條)
: 은나라의 도가 약해지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다. 그 백성들에게 예의, 전잠과 베짜는 것을 가르쳤다. 낙랑조선 백성들은 금팔조를 어기면, 살인을 하면 당시에 죽여서 갚고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배상하고, 도둑질을 하면 남자는 노로 삼고 여자는 비로 삼았다. 스스로 죄를 씻고 풀려나고자 하면 오십만을 주어야 한다. 비록 면제되어 평민이 되더라도 풍속에 오히려 차별을 하여 서로 혼인하려 하지 않으매 이로써 그 백성들은 끝내 서로 도둑질하지 아니하고 문을 닫지도 하니하며 여인들은 정숙하고 신실하고 음란하지 않았다.....
한서 동이전
昔 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 其人終不相盜......(<<後漢書>> <東夷傳> 濊傳)
: 옛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기자는 예의와 전잠을 가르쳤다. 또 팔조의 가르침을 만드니 사람들은 끝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
昔 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 以敎之 無門戶之閉 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至朝鮮侯 準 自稱王(<<三國志>> <魏志> 東夷傳 濊傳)
: 옛날 기자가 이미 조선으로 갔다. 팔조의 가르침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지도 않았고 백성들이 도둑이 되지도 않았고....그 뒤 40여세에 조선 제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대동사강
己卯 太祖文聖王(周武王元年) ......太祖 爲陳洪範九疇 於時避周 率男女五千人 東入朝鮮 (<<大東史綱>> <箕氏朝鮮紀> 太祖文聖王)
: 기묘년(서기전 1122년) 태조 문성왕(주나라 무왕 원년) ....태조는 홍범구주를 펴게 되었는데, 때에 주나라를 피하여 남녀 오천명을 이끌고 동쪽 조선으로 들어 갔다.
조선세가보
太祖爲周 陳洪範九疇 率男女五千人 走入朝鮮(<<朝鮮世家譜>> <子氏 箕子朝鮮王紀> 太祖文聖王) :
태조가 주나라에 홍범구주를 펴게 되었는데 남녀 오천명을 이끌고 달아나 조선으로 들어 갔다.
동사년표
箕子......不臣周 走至朝鮮......初王之東來也 殷之詩書禮樂 醫巫 陰陽 卜筮 百工技藝之類 皆從焉...... (<<東史年表>> 中朝鮮太祖文聖王 元年 己卯{檀紀 1212年})
: 기자는......주나라에 신하가 되지 않고 달아나 조선에 이르렀다......처음 왕이 동쪽으로 온 것이다.
은나라의 시서, 예악, 의술과 무속, 음양과 점치는 법, 백가지 종류의 공예와 기예를 (가르치니) 모두 따랐다.
상서대전
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 去之朝鮮 武王聞子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問鴻範(<<尙書大傳>> 卷2 <殷傳> 洪範條)
: 무왕이 은나라를 이겨 공자 녹부를 계승하였다. 기자를 석방하였다. 기자는 주나라의 석방을 참지 못하고 조선으로 갔다. 무왕이 기자가 조선으로 갔음을 듣고 그를 봉하였다. 기자는 이미 주나라의 봉함을 받은 바라 부득이 신하의 예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로 13년에(서기전 1110년?) 찾아 뵈었다. 무왕은 기자가 찾아 오므로 홍범에 대하여 물었다.
사기 송미자세가
武王旣克殷 訪問箕子 武王曰 於乎 維天陰定下民 相和其居 我不知其常倫所序 箕子對曰 在昔噓 鴻水 泊陳其五行 帝乃震怒 不從鴻範九疇等 常倫所 噓卽壻死 禹乃嗣興 天乃錫禹 洪範九等 常倫所序 初一曰五行......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 不臣也(<<史記>> 卷38 <宋微子世家> 第8)
: 무왕이 이미 은나라를 이기고 기자를 방문하여 무왕이 기자에게 하늘과 땅이 정해졌고 아래 백성들이 서로 화해하며 사는데 나는 상륜의 차례를 모른다 하니, 기자가 대하여 가로되 옛날 곤 때에 홍수가 있었는데 오행을 순조로이 펼치지 못하니 임금(순임금?)께서 이에 진노하여 홍범구주등의 상륜을 따르지 않느냐 하여 곤은 죽임을 당하였고 우가 뒤를 이었는데, 하늘(천제, 단군왕검, 단군의 사자 태자부루?)이 우에게 홍범구주등 상륜을 적은 바를 주었는데, 첫 번째 이르되 오행이라....하였다.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기자는 신하가 되지 아니 하였다.
복생의 상서대전
......武王釋 箕子之囚 箕子走之朝鮮(<<伏生의 <<尙書大傳>>)
: 무왕이 기자를 석방하였다. 기자는 달아나 조선으로 갔다.
회남자
紂死 箕子亡之朝鮮......(<<淮南子>> 卷12 <道應訓>注)
: 은나라의 말왕 주가 죽자 기자는 조선으로 도망하여 갔다.
후한서 동이열전
箕子......避之朝鮮(<<後漢書>> 卷85 <東夷列傳> 第75 倫贊)
기자...조선으로 피하여 갔다.
죽서기년
十六年 箕子來朝(<<竹書紀年>> 卷下 <周武王>)
16년(서기전 1107년?)에 기자가 (주 무왕을) 와서 찾아 뵈었다.
청주한씨세보
箕子 子氏 諱胥餘......韓八世稽王 馬韓之末 元王有子三人 曰友平奔高句麗 仕于琉璃王朝 爲北原鮮于氏 曰友誠降百濟 仕于溫祚王朝 爲德陽奇氏 以幸州爲本 曰友諒 仕于新羅脫解王朝 爲上黨韓氏 以淸州韓氏<韓元王之後世系> 一世 諱友諒(新羅司徒)(<<淸州韓氏世譜>> 卷之一 上編, 1938, 戊寅譜)
: 기자는 자씨로 이름은 서여이다......한(한반도 마한)의 8세는 계왕(서기전32-서기전16)이다. 마한의 말기에 원왕(원래 왕은 =계왕? 학왕? 원왕은 7세왕으로 서기전 58-서기전32년이고 학왕은 9세왕으로 서기전16-서기9)은 아들이 세명이 있었는데, 우평은 고구려로 달아나 유리왕조를 모셔 북원 선우씨가 되었고, 우성은 백제에 항복하여 온조왕조를 모시어 덕양 기씨가 되어 행주를 본관으로 삼았고, 우량은 신라 탈해왕조를 모시어 상당 한씨로 청주 한씨가 되었다.
서전
武王釋箕子之囚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書傳>> 尙書疏)
: 무왕이 기자를 석방하였다. 기자는 주나라가 석방하여 줌을 참지 못하고 달아나 조선으로 갔다.
수산집
箕子......避中國走之朝鮮......周王聞之 因封之爵爲侯而 不臣焉(<<修山集>> 卷之11 <東史本紀> 箕子本紀)
: 기자....중국을 피하여 달아나 조선으로 갔다....주나라 왕은 이를 듣고 봉하여 제후로 삼았으나 신하가 되지 않았다.
기자실기
箕子旣爲武王傳道 不肯仕 武王亦不敢强 箕子乃避中國 東入朝鮮(<<箕子實記>>)
: 기자가 이미 무왕에게 도를 전하게 되었으나 섬기지 않았고 무왕도 역시 감히 강하게 몰아 부치지 못하였다. 기자는 이에 중국을 피하여 동쪽으로 조선으로 들어 갔다.
동사강목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而 不臣也(<<東史綱目>>)
: 기자는 주나라가 석방해 줌을 참지 못하고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를 듣고서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가 되지 아니 하였다.
해동역사
武王乃封 箕子於朝鮮而 不臣也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海東繹史>> 卷之2 <箕子朝鮮>)
: 무왕이 이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가 되지 아니 하였다. 기자는 주나라가 석방하여 줌을 참지 못하고 달아나 조선으로 갔다.
출처: http://kyh77.tistory.com/entry/1 에서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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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중국의 제후국이 아닌 동이족의 독립국 <경향닷컴>에서....
BC 1046년. 주나라 무왕이 은(상)의 주왕(紂王)을 죽이고 은(상)의 554년 역사를 종식시켰다. 이것은 동북아 고대사의 판도를 뒤바꾼 대사건이었다. 한족(漢族)의 하(夏·BC 2070~BC 1600년)를 무찌르고 동아시아의 주인공이 된 동이족의 천하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한족(하)~동이족(은상)~한족(주)으로…. 그 과정은 너무도 드라마틱하다. 주 무왕은 주나라의 수도인 펑이(풍읍·豊邑, 산시성 치산·岐山 부근)에서 전차 300대와 용·갑사 4만5300명을 직접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자 주왕의 학정에 못이긴 은(상)의 제후들도 전차 4000여대를 지원했다. 은 주왕은 70만 대군을 동원, 그 유명한 무야(목야·牧野, 허난성 지셴·汲縣 부근)에서 대치한다.
하지만 전쟁은 너무도 싱겁게 끝난다. 은 주왕의 학정에 몸서리를 친 은나라 군사들이 주 무왕의 군사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은나라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쥔 채(倒兵·자기 쪽을 향해 공격한다는 의미) 배반한 것이다. 결국 은 주왕은 분신 자살했고, 그의 애첩 달기는 목을 맸다. ‘사기’ 주본기는 “은(상)나라 사람들이 모두 교외에서 무왕을 기다렸고, 두 번 절을 하며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고 썼다. ‘사기’는 은 주왕의 폭정에 시달린 은나라 사람들이 주 무왕의 정벌을 반겼다는 투로 썼다.
베이둥 방정(사각 솥) 속 바닥에는 ‘기후(箕侯)’ 명문
옆면에는 24자의 명문이 각각 새겨져 있다.
24자 명문은 “정해(丁亥)일에 ‘회’가 ‘목’이라고 하는 곳에서 右正이란 관직을 가진 ‘문’에게 관패(串貝) 한 조와 붕패(朋貝) 200개를 상으로 내렸다. 이에 ‘문’이 ‘회’에게서 받은 상사(賞賜)를 칭송하기 위해 어머니 모기(母己)의 제사를 지낼 제기(사격형 큰 솥·方鼎)를 만들어 기념한다”고 해독할 수 있다. 바닥의‘기후’명문과 함께 해석하면 ‘회’라는 인물은 기후, 즉 기자족의 일원임을 알 수 있다. ‘箕侯亞 ’ 명문 가운데는 시호를 뜻하는 상형문자로 보인다. 명문중 ‘기후’를 둘러싼 글자는 亞로 해석되는데,‘기후’라는 작위를 내렸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孤竹)’명 청동기는 백이·숙제의 고죽국을 알려주는 고고학 자료이다. | 이형구 교수 해석
■ 굴복하지 않은 기자(箕子)
과연 그랬을까. ‘사기’를 꼼꼼히 살펴보면 은 백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 무왕은 은나라 사람들을 달래려 몇가지 위무 정책을 단행한다. 은(상)의 3인(仁) 중 한 사람인 기자(箕子)를 석방시키고, 은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제후(諸侯)로 봉하면서 은나라 유민(은유·殷遺)들을 다스리라고 명했다. 은나라 역법(曆法)까지 그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특전까지 베푼다. 역법은 정권의 상징. 그런데 은의 역법까지 쓰라고 했으니 얼마나 은나라 백성들의 눈치를 본 것인가.
그러면서도 2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왕의 친동생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무경의 사부로 임명, 감시토록 한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도) 무경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음험한 마음을 품을까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케 하였다.”(사기 위강숙세가)
무왕의 불안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무왕의 행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은나라 유민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기자(箕子)를 몸소 찾아가 천하의 상도(常道)를 묻고 유명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가르침을 받는다. 하지만 이종족(異種族)인 은나라 백성들의 민심을 잡는 것이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우선 기자를 조선에 봉했지만(武王乃封箕子於朝鮮), 그를 신하로 여기지 않았을 만큼(而不臣也) 경외했다. 이것은 해석에 따라 기자가 무왕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다(不臣)는 뜻으로도 된다. 여하간에 기자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기자가 폐허로 변해버린 인쉬(은허·殷墟)를 지나다가 맥수지가(麥秀之歌)를 짓자, 그 노래를 들은 은나라 유민들이 구슬피 울었다는 대목(사기 송미자세가)이 있다. 은나라 백성들의 민심이 어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다(以暴易暴兮)”는 백이·숙제의 비난이 당대 여론의 주류였을 것이다.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스트레스가 컸을까. 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지 3년 만인 BC 1043년 병으로 죽고 만다. 나이 어린 왕(성왕·成王)이 등극하자 무왕의 동생(성왕의 삼촌)인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에 들어간다.
■ 끝까지 저항한 망국의 은(상) 백성
이때 문제가 생긴다. 은나라 제사를 이은 무경(은 주왕의 아들)과, 무경의 감시자였던 관숙과 채숙(둘 다 역시 무왕의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성왕을 대신해 섭정에 나선 주공이 권력을 찬탈할까 의심했던 것이다. 셋은 의기투합했고, 망국의 한을 품은 은나라 사람들이 반란군 세력으로 나섰다. 동이족 계열인 회이(淮夷·산둥 남부 지역의 동이족)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은나라 백성을 이끈 무경과 관숙은 주살되었다. 은 유민의 저항에 놀란 주 성왕은 은나라 세력을 둘로 쪼개 약화시켰다. 은말의 3인(仁)이었던 미자(微子)를 망한 은(상) 왕조의 후사로 삼았으니, 그것이 바로 송(宋)나라다. 또 주 무왕의 다른 동생인 강숙(康叔)을 봉해 은유(殷遺)들을 맡겼다. 강숙과 은 유민은 인쉬(은허)에 거주했는데, 이것이 위(衛)나라다.
“은나라의 저항이 끈질겼어요. 성왕 때까지도 왕이 과거 은나라의 세력과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은을 멸한 지 1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이형구 선문대 교수)
사기 주본기에 “성왕이 은의 잔여 세력을 소멸시킨 뒤에야 비로소 예의와 음악이 바로 잡히고 흥성해졌다”고 했으며, 그 뒤에도 “동이를 정벌하고…”하는 대목이 이어지는 걸 보면 은과 동이의 저항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기자조선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왕에게 ‘홍범구주’의 가르침을 준 기자는 어디로 떠났을까. 사기는 분명히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무왕이 기자를 (존경한 나머지) 신하로 부르지 않았든지, 아니면 신하이기를 거부했든지 어쨌거나 기자는 무왕의 품을 떠났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기자는 과연 주나라의 제후국이었을까. 이형구 교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주나라의 제후국 이름을 보면 한결같이 진·한·위·노·제·송·채 같은 단명(單名)이잖아요. 그런데 조선(朝鮮)은 복명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자기 영역 밖의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복명을 썼거든. 조선, 선우, 중산, 흉노, 선비, 오환처럼…. 그러니까 주나라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외국으로 친 겁니다.”
그러고보니 사마천의 ‘사기’는 기자와 관련된 기록을 ‘기자세가’가 아니라 ‘송미자세가’에 아주 자세하게 담았다. 만약 기자조선을 중국의 역사로 쳤다면 ‘기자세가(箕子世家)’라 해서 별도의 꼭지로 처리했을 것이다.
공자는 그렇다치고, 실패한 반란의 주인공인 진섭(陳涉·반란을 일으켜 秦나라를 무너뜨린 인물)마저 세가(제후국의 흥망성쇠를 담은 것)에 담은 사마천이지 않는가.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무장한 사마천이라면 홍범구주로 무왕을 가르쳐 결과적으로 주나라 건국정신의 토대를 쌓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역사를 당연히 세가에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이 아니기에 차마 세가에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기자가 가공 인물이며, 따라서 사마천의 ‘사기’가 거짓이라는 해석이 팽배한데요. 기자가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해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 그런 측면도 있고, ‘기자조선 인정 = 소중화 = 사대주의’라는 조선시대 이래의 역사 인식에 대한 거부감도 있고…. 또한 중국과 우리의 역사를 떼어놓으려는 일제 관학자들의 그림자도 아직 남아 있고….
” 그런데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기자를 거부하려는 시각이 있다면, 기자의 신분이 종족적으로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 기자에 대한 ‘사기’의 기록은 과연 거짓인가.
“이미 기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노나라 태사 좌구명이 쓴 역사책) 희공 15년조(645년)에 출현합니다. 또하나 사기의 정확성은 정평이 나있잖아요.”
‘있는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는 많지만, ‘없는 역사’를 있다고 하는 법은 드물다. 더욱이 1899년부터 확인된 은(상)시대의 갑골문을 해독한 결과 사기 은본기에 나온 은(상)나라 왕의 이름들과 거의 일치한다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BC 90년 무렵 완성된 사기가 진짜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사기’ 주본기, 송미자 세가와 노주공세가, 위강숙세가 등에 나타난 기자의 기록은 사실로 봐야 할 것 같다.
■ 가자! 본향으로
자, 이젠 기자의 행방을 쫓아가자. ‘기자조선의 존재’를 논증한 이형구 교수가 주목한 곳이 바로 카줘셴(喀左縣) 베이둥(北洞) 유적이었다. “기후(箕侯)와 고죽(孤竹)명 청동기가 나온 두 곳의 유적 거리가 불과 3.5라는 점이 눈에 띄었어요. 기자조선의 대동강 유역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중국학계는 ‘기후’명을 기자로 해석하지 않았거든. 나는 거의 붙어있는 두 유적의 관계를 흥미롭게 여겼는데, 바로 두 제후국이 시간 차를 두고 계승한 것으로 보았어요.”
은말주초(殷末周初)의 명문 청동기는 비단 베이둥에서만 발견된 게 아니다. 카줘셴 산완쯔(山灣子)·샤오좐쯔(小轉子)·샤오보타이거우(小波汰溝)와 이셴(義縣) 사오후잉쯔(稍戶營子) 교장갱 등에서도 나왔다.
그런데 베이둥에서 나온 청동기의 ‘기후’와 ‘고죽’ 명문 외에도 산완쯔·샤오좐쯔·샤오보타이거우 등에서는 숙윤(叔尹), 술(戌), 백구(伯矩), 어(魚), 주(舟), 차(車), 사(史), 아(亞), 윤(尹), 채(蔡), 사벌(史伐), 과(戈) 등 여러 씨족들의 징표가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은(상)이 망한 뒤 기자가 주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여러 씨족들을 이끌고 동북으로, 동북으로 향했다고 보면…. 그리고 머나먼 조상 때부터(훙산문화 시절부터) 하늘신과 조상신 제사를 끔찍이도 모셨던 그들은 신주 모시듯 했던 청동예기(방정·뢰 등)들을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옛 고향으로 떠났다고….”(이형구 교수)
이와 관련, 1930년대 인쉬 발굴을 총지휘한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의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은상의 선조가 동북에서 황허 하류로 와서 나라를 건국하고, 은이 망하자 기자(箕子)가 동북(고향)으로 돌아갔다.”(동북사강·東北史綱)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왕궈웨이(王國維)도 “은이 망한 뒤 기자는 선조의 땅으로 돌아갔다(從先王居)”고 했다. 명나라 사람인 함허자(涵虛子)는 ‘주사(周史)’를 인용하면서 “기자는 중국인(즉 은나라 유민) 50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또 하나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을 보면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자가 망국의 눈물을 흩뿌리며 은(상)의 백성들과 함께 험난한 옌산(燕山)을 넘어 도착한 곳이 그들의 본향인 고죽국, 바로 조선 땅이란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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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루트를 찾아서](32) 천자를 칭한 조선 <경향닷컴>에서....
입력: 2008년 05월 23일 17:45:48
연나라와 대등했던 고조선의 위세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韓)조의 내용을 조목조목 풀어보자. 기승전결을 갖춘 베스트셀러 소설 같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欲東略地),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亦自爲王) 병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周)’의 왕실을 지키려 했다.”
연나라가 제·조·위·중산국 등 다른 네 나라와 함께 왕(王)을 칭한 것은 BC 323년이었다. 왕을 칭했다는 것은 이미 주나라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연나라가 왕을 칭하자 조선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면서 연나라가 동쪽땅, 즉 조선땅을 노리자, 조선이 도리어 주(周)왕실을 지킨다는 구실로 연나라 타도를 외쳤다는 뜻이다.
“(조선이 연을 공격하려 하자) 대부 예(禮)가 ‘절대불가하다’고 간하자 (왕은) 공격을 멈췄고, 대부 예를 연나라에 보내 이야기하니 연나라도 (조선에 대한 공격을) 그쳤다.”
조선왕이 연나라 타도를 외치자 대부(大夫) 예(禮)가 강력하게 만류했다는 얘기다. 조선왕은 공격의 뜻을 철회한 뒤 대부 예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연나라는 조선후가 왕을 칭한 것에 격분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유세가들이 세치 혀로 천하를 주물렀던 전국시대 중기. 조선의 유세가 예는 화려한 언변으로 연나라왕을 녹여 연의 조선침공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조선의) 자손들이 교만해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 그 땅(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攻其西方), 땅 2000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얻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 때 조선왕 비(否)가 즉위했다.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조회에 참석하지는(알현하지는) 않았다(不肯朝會).”
이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는 마침내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방을 공략, 2000리나 되는 땅을 차지했다. 연나라 강역도를 보면 연나라는 한반도 청천강(만번한을 청천강으로 본 것)까지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조선의 세력은 악화됐다. BC 221년 급기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조선은 크게 두려워 해서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진시황을 직접 찾아가 알현하지는 않았다.
■ 연개소문을 떠올리는 이유
일단 여기까지의 ‘위략’ 내용이 담고 있는 속뜻은 무엇일까.
“BC 4세기에서 BC 3세기 사이 조선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어요. 조선이 ‘감히’ 천자를 뜻하는 ‘왕’을 스스로 칭했잖아요. 연나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겠지. 게다가 연나라가 조선을 우습게 보고 공격하려 하자, 조선은 ‘주 왕실의 존숭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연나라를 오히려 공격하려 들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조선의 대부 예의 외교로 양국은 충돌을 면했지만, 악감정은 눈덩이처럼 쌓이고 있었다.
“당시 기자조선-연나라 관계로 훗날 고구려-당나라 관계를 떠올릴 수 있어요.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 그리고 기자조선의 왕과 그 자손들은 닮은 꼴로 중국과 대립한 것이거든….”
하지만 연나라는 BC 314년 제나라와 중산국의 침략 때문에 존망의 위기에 섰던 터라 조선을 넘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중흥군주인 소왕(昭王·재위 BC 312~BC 279년)이 즉위했고, 마침내 BC 280년을 전후로 진개를 파견, 조선 땅 2000리를 공략하고 랴오시(遼西)·랴오둥(遼東), 한반도 서북부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고대사를 둘러싼 하나의 수수께끼는 해결하는 셈이다. 즉 적어도 BC 280년 무렵까지는 연나라가 랴오둥(요동)은 물론 랴오시(요서)까지도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수수께끼 하나. 과연 연나라 진개 장군은 당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 청천강까지 진출했을까.
■ 둥다장쯔 유적의 비밀
지난 2002년 봄, 당시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국장은 마침 선양(瀋陽)을 방문했던 이형구 교수에게 씩 미소를 흘렸다.
“이 선생, 하나 재미있는 게 나왔어요. 청동단검이 나왔는데, 이 선생이 보면 아마 고조선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농담조였지만 흥미로웠다. 이형구 교수는 마침내 ‘2000년 중국 중요고고발현’이라는 약(略)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중국문물국이 2000년 발굴한 중요 유적 24곳에 대한 약보고서였어요. 그런데 만리장성을 넘어 다링허(대릉하)로 가는 길목에 있는 랴오닝성 젠창셴(建昌縣) 둥다장쯔(東大杖子)촌에서 전형적인 청동단검(후기형식·BC 4세기 말~BC 3세기 중엽)이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되었어요.”
만리장성 너머 랴오닝성 젠창셴에서 확인된 청동단검. 고조선 문화인 청동단검 문화를 받아들인 연나라 장군 진개의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선양 | 김문석기자>
마을의 거리와 식당에서 모두 54기의 고분이 확인됐는데, 서울 풍납토성처럼 이곳도 보존과 개발의 틈바구니에서 확인되었던 터라 학자들의 접근이 무척 껄끄러웠다.
“지금도 현장은 볼 수 없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궈다순씨가 반농담조로 말했듯 한국 학자가 가면 고조선과 연결시키려 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고….” 문제는 (고)조선의 전형적인 석곽묘와 손잡이를 황금으로 만든 청동단검은 물론 전국시대 후기(연나라)의 전형적인 청동기들이 함께 나온다는 뜻이었다.
“약보고서의 결론을 보면 흥미로워요. 우선 고조선의 대표문화인 청동단검들이 분포한 가장 서남단에 위치한 유적이라는 점, 그리고 고분의 분포가 광활하고 묘 주인의 신분이 높은 점 등을 보면 이 무덤의 주인공이 연나라 시대의 군사장령(軍事將領), 즉 장군의 무덤이라고 분명히 해두었어요.”
이 교수는 “여러가지 추측을 할 수 있지만 연나라가 파견한 장군이 이곳에서 현지인, 즉 고조선 사람들과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뒤 죽어 묻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자(記者)는 이쯤해서 BC 280년 무렵 조선을 공격한 진개 장군이 퍼득 떠오른다.
“무덤의 규모나 문화 양상을 보면 연나라 장수 진개의 무덤일 수도 있지. 시대와 유물양상 등을 보면….”
앞서 인용한 ‘위략’의 내용, 즉 “진개가 조선의 서쪽을 공격했다(攻其西方)”는 것과 진창셴 유적을 검토하면 만리장성을 넘으면 곧 고조선(기자조선) 의 영역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랴오허를 넘지 못한 연나라
그렇다면 진개의 침략(BC 280년 무렵) 이후 연나라는 랴오둥을 건넜을까. 춘추시대 때 만리장성 너머 랴오시(遼西) 지방에서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았듯, 진개의 침입 이후에도 랴오둥 지역에서도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 및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사기 ‘흉노열전’을 주목한다. “진개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공격, 1000리를 패주시켰다”는 기사.
“이 동호라는 표현이 혹 조선을 뜻하는 게 아닐까. 옛 기록에 호(胡)="이(夷)라고도" 했어요. 또 진개가 조선을 치고 2000리를 넓혔다는 기사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만 나오거든. 나머지 역사서는 모두 동호 1000리만을 기록했어요. 이 동호가 나는 조선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진개는 2000리가 아니라 1000리, 즉 랴오허 동쪽만 점령했다는 얘기다. 중국의 고고학자 천핑(陳平)은 ‘연문화(燕文化)’라는 책에서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해석한다.
“이우뤼산(醫無閭山·랴오시 푸신:阜新)을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전국시대 연나라 문화의 전형적인 유적·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연나라 희왕(喜王) 33년(BC 222년) 랴오둥으로 피신하기 이전에는 연나라가 진정으로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지역에 진입하지 못했다.“
BC 222년은 연나라 희왕이 진나라의 공격을 피해 랴오둥 지역으로 피신했던 때였다. 이는 진개가 조선을 침략했지만 연나라는 60년 가까이 랴오허를 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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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링허~랴오허 사이에 140㎞나 뻗어있는 요택(遼澤). 당나라군이 고초를 겪은 곳으로 유명하다
또 하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진개의 침략 이후 조선은 약해졌으며, 이후 천하통일을 완성한 진나라가 두려워 복속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조선은 자존심만큼은 잃지 않았다. “복속은 했지만 (진시황을) 알현하지는 않았다”(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이 이를 증명해준다. 천하를 떨게 한 진시황 치하인데도 직접 가서 무릎을 꿇지는 않은 것이다.
■ 위만의 조상은 동이족?
이제 다시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사기’ 조선열전을 검토해보자.
“(조선에서는) 비왕이 죽고 준왕(準王)이 즉위했다. (중국에서는) 20여년 뒤 진섭(陳涉)과 항우(項羽)가 반란을 일으키자 연·조·제나라 백성들이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하니, 준왕이 이들을 서쪽에 머물게 했다. (한나라 때 연나라 왕으로 책봉된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은 뒤 준왕에게 항복했다. 위만은 준왕에게 중국망명인으로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한다’고 간청했고, 준왕은 은혜를 베풀어 위만을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봉했다.”
이것은 위만의 등장에 관한 기사다. 준왕은 ‘조선의 병풍이 되겠다’는 위만의 말을 믿고 그에게 박사 벼슬을 내리고 서쪽 100리의 땅까지 내주며 철석같이 믿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어 세력을 키운 뒤 급기야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고하길, ‘한나라 병사들이 열길로 쳐들어옵니다. 제가 가서 막아야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위만은 돌아가 준왕을 공격했으며, 패배한 준왕은 바다를 건너 한(韓·마한)의 땅에 들어갔다.”
BC 194년의 일이다. 가히 쿠데타였다. 위만은 준왕을 속여 서쪽 변방(아마도 랴오둥 지역이었을 것)에서 세력을 키운 뒤 군대를 이끌고 준왕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이로써 BC 1046년 무렵 고조선과 은(상)의 문화를 계승한 기자조선은 900년 만에 정권을 위만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사서에 나온 대로 중국인이었을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는 게 이 교수의 해석이다. 사서를 종합하면 위만은 다른 1만명과 함께 상투를 틀고(추결·추結), 호복(胡服·오랑캐의 옷)을 입은 뒤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했다. 당시는 진나라 말기 혼란 상황. 옛 제·연·조나라 백성들이 대거 조선으로 몰려들었고, 위만도 한나라 초기 혼란기에 수 천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땅에 둥지를 틀었다.
”중국이 어지러울 때 많은 무리들이 옌산을 넘고, 랴오허를 넘어 몰려들었어요. 험준한 옌산과, 폭이 140㎞나 되는 지긋지긋한 요택을 둔 랴오허 유역을 건넌다는 것은 쫓는 무리들의 핍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을 테니까.“(이교수)
동이계인 중산이 마지막으로 망한 때는 BC 296년. 역시 동이족인 고조선이 진개의 침략으로 랴오시(요서·療西)를 잃었던
것이 BC 280년 무렵. 이후 조·연·진의 영역에서 삶을 부지했던 동이계 사람들 역시 변란이 생겼을 때 같은 종족을 찾았을
것이다.
“연나라 사람이라는 위만과 그 수 천 무리도 ‘믿는 구석’, 즉 동이의 나라, 고조선으로, 고조선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마치 은(상)의 멸망 이후 본향을 향해 총총히 떠났던 기자(箕子)처럼….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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