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經, 大雅 韓奕
奕奕梁山,維禹甸之。 크고 큰 양산(梁山)은 우임금이 다스리셨네
有倬其道,韓侯受命。 밝으신 그 도로 한후(韓侯)가 명을 받았네
王親命之,纘戎祖考, 왕께서 친히 명하시어 그대의 조상 공적을 이어
無廢朕命,夙夜匪解,虔共爾位。 짐의 명령을 저버리지 말고 낮밤 없이 게으르지 말며 그대 지위 삼가 공경하라.
朕命不易,榦不庭方,以佐戎辟。 짐의 명령은 바꾸지 않으리라, 내조하지 않는 제후 바로 잡아 그대의 임금 보좌하라.
四牡奕奕,孔脩且張。 네 필 수말 크기도 하며 길고 큰 몸집 당당하네.
韓侯入覲,以其介圭,入覲于王。 한후가 들어와 왕을 뵈올 제 그 큰 홀[圭]을 받들고 왕에게 인사드리네.
王錫韓侯,淑旂綏章。 왕께서는 한후에게 하사하시니 무늬 있는 깃대와
簟茀錯衡,玄袞赤舄。 새깃 깃발 대자리 덮개와 고운 멍에채. 검은 곤룡포에 붉으신 고리달린 말배띠와
鉤膺鏤鍚,鞹鞃淺幭,鞗革金厄。 무늬 있는 당로 수레의 가로막이 나무 턱, 호피덮개 고삐 줄 황금고리였네.
韓侯出祖,出宿于屠。 한후 노제를 지내고 가다가 도(屠)땅에 머무셨네
顯父餞之,清酒百壺。 현보(顯父)가 송별잔치 하니 맑은 술이 백병이나 되네.
其殽維何?炰鼈鮮魚。 그 안주는 무엇인가 구운 자라와 싱싱한 생선이네.
其蔌維何?維筍及蒲。 그 나물은 무엇인가 죽순과 부들이었네.
其贈維何?乘馬路車。 그 선물은 무엇인가 네 필 말과 큰 수레네.
籩豆有且,侯氏燕胥。 대그릇 나무그릇 많기도 하니 한후 기뻐하여 즐기네.
韓侯取妻,汾王之甥,蹶父之子。 한후가 장가를 드니 분왕(汾王)의 생질이요 궤보(蹶父)의 따님이네.
韓侯迎止,于蹶之里。 한후가 아내로 맞이하러 궤씨네 마을까지 갔네.
百兩彭彭,八鸞鏘鏘,不顯其光。 많은 수레 의젓하게 달리며 여덟 말방울 딸랑거리니 그 빛 매우 밝았네.
諸娣從之,祁祁如雲。 따라오는 여러 몸종들 줄지은 것이 구름 같네.
韓侯顧之,爛其盈門。 한후가 뒤돌아보니 찬란한 빛 그 문 안에 가득하네.
蹶父孔武,靡國不到。 궤보는 매우 용감하여 가보지 않은 나라 없으며
為韓姞相攸,莫如韓樂。 딸 시집보낼 곳을 찾아보니 한나라만한 곳이 없더라네.
孔樂韓土,川澤訏訐。 즐거운 한나라 영토여, 시냇물 못물이 넘쳐흐르고
魴鱮甫甫,麀鹿噳噳。 방어와 서어 뛰놀고 암사슴 떼지어 풀을 뜯고
有熊有羆,有貓有虎。 곰과 말곰이 있으며 살쾡이도 있고 범도 있네.
慶既令居,韓姞燕譽。 이미 좋은 곳을 가려 잔치하니 궤보 딸도 좋아하네.
溥彼韓城,燕師所完。 높은 저 한나라 성은 연나라 백성이 완성시켰네
以先祖受命,因時百蠻。 조상의 명을 받들어 여러 오랑캐를 다스리시니
王錫韓侯,其追其貊。 왕께서 한후에게 추나라와 맥 땅까지 내리셨네
奄受北國,因以其伯。 북쪽 나라 맡아 다스리고 그곳의 제후가 되셨네
實墉實壑,實畝實藉。 성 쌓고 호 파고 밭 정리하고 부세하여
獻其貔皮,赤豹黃羆。 비가죽(貔皮)과 표범가죽 누런 말곰가죽을 바치네.
- 시경 , 이상진․황송문 역, 자유문고, 1994
시경 한혁편은 尹吉甫가 西周나라 宣王(BC 827~782)을 기리어, 서주왕실을 방문한 한후(韓侯)를 칭송하여 지은 작품으로 모두 6장으로 되어 있다. 춘추시대에는 두 개의 한국(韓國)이 있었다.
이 시에 나오는 주나라 선왕(기원전 827-782년)을 만나는 한(韓)과
춘추5패중의 하나인 진(晉)나라가 분열하여 생긴 '韓'(기원전 403년에 건국~기원전 230년)은 서로 다른 나라이다
전국7웅의 하나인 韓은 진목후의 후손이며 진의 대부였던 韓씨, 魏씨, 趙씨가 진나라의 영토를 분할하여 독립하였고 기원 403년에 주나라로부터 정식 제후로 인정을 받으면서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국군(國君: 국왕)은 희성(姬姓)이었고 지금의 섬서 한성(韓城)에 있었다.
이 시에서 주나라 선왕(기원전 827-782년)을 만나는 한후(韓侯)는 하북 고안현(固安縣) 동남에 있었다. .
王符의 <潛夫論> 씨성편에서..- 王符, 潛夫論, 卷九, 志氏姓
晉穆侯生桓叔, 桓叔生韓萬, 傅晉大夫. 十世而爲韓武侯, 五世爲韓惠王, 五世而亡國. 襄王之孼孫信, 俗人謂之韓信都. 高祖以信爲韓王孫, 以信爲韓王, 後徙王代, 爲匈奴所攻, 自降之. 漢遣柴將軍擊之, 斬信於參合, 信妻子亡入匈奴中. 至景帝, 信子頹當及孫赤來降, 漢封頹當爲弓高侯, 赤爲襄城侯. 及韓嫣, 武帝時爲侍中, 貴幸無比. 案道侯韓說. 前將軍韓會, 皆顯於漢. 子孫各隨時, 帝分陽陵·茂陵·杜陵. 及漢陽·金城諸韓, 皆其後也.
信子孫餘留匈奴中者, 亦常在權寵, 爲貴臣. 及留侯張良, 韓公族姬姓也. 秦始皇滅韓, 良弟死不葬, 良散家貲千萬, 爲韓報讎, 擊始皇於博浪沙中, 誤椎副車. 秦索賊急, 良乃變姓爲張, 匿於下邳, 遇神人黃石公, 遺之兵法. 及沛公之起也, 良往屬焉. 沛公使與韓信略定韓地, 立橫陽君城爲韓王, 而拜良爲韓信都. 信都者, 司徒也. 俗前音不正, 曰信都, 或曰申徒, 或勝屠, 然其本共一司徒耳. 後作傳者, 不知信都何因, 彊妄生意, 以爲此乃代王爲信都也. 凡桓叔之後, 有韓氏·言氏·嬰氏·禍餘氏·公族氏·張氏, 此皆韓後姬姓也.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 遷居海中.
東漢 말기시대의 왕부는 《潛夫論(잠부론) 志氏姓(지씨성) 제35》와 《風俗通(풍속통) 姓氏篇(성씨편)》에서 당시 유행한 6백 여개의 성과 그 성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이 〈지씨성志氏姓〉편은 특정 성씨가 나타나는 여러 기록을 상고하여 모두 나열하고 이를 정리한 것이다.
왕부는 이 글에서 주나라 왕실의 후예로서의 춘추전국시대의 한씨를 설명하면서',
晉나라 목후가 桓叔을 낳고 桓叔은 韓萬을 낳고, 桓叔의 아들인 한만(韓武子)의 3대손으로 진 경공 시기(기원전600~581)에 활동한 한궐 때부터 한씨 성을 사용했고, 한나라를 세워 왕을 칭하여(기원전 403) 주로부터 제후국으로 인정받았으나 진시황에게 멸망당했다(기원전 221). 桓叔 이후 桓叔을 공동조상으로 하는 여러 성씨가 출현했는데(韓氏, 言氏·嬰氏·禍餘氏·公族氏·張氏), 그들은 모두 姬姓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잠부론(潛夫論 後漢)에 나오는 한(韓)은 세 종류가 있다. 앞 구절에서는 "주나라 왕실의 후예로서의 전국(戰國)시대 한(韓)"씨를 정리하고,
맨 끝에 주나라 왕실과 관계가 없는 서주(西周)때의 한(韓)씨이며 마지막 한(韓)은 조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경에 나오는 韓侯에 대해 보충 설명하는 내용인데 왕부는 이 세종류의 한씨가 종족적으로 관련이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이들 모두가 한씨를 성으로 했음을 말하고 있다.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普彼韓城 燕師故詩云 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 遷居海中“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雲:「普彼韓城,燕師所完。」
옛날 주나라 선왕때 또한 韓侯가 있었는데 그나라는 燕나라에 가까웠다. 옛詩(시경)에서 말하기를 ‘저 커다란 韓城은 燕나라 군사들이 쌓은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其後韓西亦姓韓,爲魏滿所伐,遷居海中。
그후 韓나라 서쪽도 역시 성이 韓이었는데 위만의 침공을 받아 바다 가운데로 옮겨갔다.
연대
BC 2333 : 단군조선의 건국
BC 1046 : 주무왕 13년 주무왕이 기자에게 홍범 9조를 묻다. 기자는 조선의 옛땅에서 고조선과 은의 문화를 계승하는 기자조선 건국
BC (827~782) : 西周의 宣王이 한후를 만나고(시경 한혁편). 追,貊을 주다
BC 770 : 주가 낙읍으로 천도하다 (동주의 시작) 춘추전국 시대 170 여개국 난립 (춘추 BC 770~475) (전국 BC 403~221)
BC 774 : 선우국(중산국) 건국-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했는데(회남자)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천판)
BC 414 : 선우국이 중산국과 함께 불리다가 중산국이 되다.
BC 323 : 진의 제,조,위, 3국이 왕을 칭하자 주는 제후국으로 인정함(삼가분진) - 중산국도 왕을 칭함
BC 280 : 연나라 진개가 조선을 침입 2천리를 옮겨가게 함(동호를 침입 천리를 옮겨가게 함) -요하는 건너지 못한 것 같다-유물이 안보임
BC 222 : 연나라 희왕이 진나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요동지역으로 피신 (비로서 연이 요동지역에 처음 들어옴)
BC 221 : 진시황의 천하통일 (기자조선은 진개의 침입후 약해지고 진나라에 복종했으나 알현하지는 않았다)
(연,조,제나라 백성이 기자조선으로 피난옴)
BC 194 : 연에서 피신 온 위만이 구데타를 일어켜 준왕을 몰아내고 준왕은 마한지역으로 피신하여 한국을 세움
BC 108 : 한무제가 고조선을(위만의 손자 우거왕) 멸망시키고 낙랑등 한4군을 설치함 .
韓西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
<이병도 - 한씨조선설>
이병도는 ‘韓西’를 ‘韓東’의 오기로 보고, 한후의 한국(韓國)과 조선을 별개로 인식하면서
이를 ‘(한국이 생긴 후에) 그 한국의 동쪽[朝鮮]에서도 또한 한씨 성을 일컫더니
(그 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해중으로 천거하였다’고 보았다.
즉 그는 잠부론의 위 구절은 조선 왕의 성(姓)이 韓씨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지만 그 한씨는 한국과는 별개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의 왕이 한씨 성을 칭한 것은 우리말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즉 만몽어에 군장을 汗(Han) 혹은 可汗(Khahan)이라 하고, 부여․고구려에서도 대인을 加(Kha),
신라에서도 군장․대인을 干(Khan), 今(Khum)이라 한 것 등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81>
<윤내현>
윤내현은 이병도가 잠부론 의 ‘韓西’는 ‘韓東’의 오기로 본 것은 중대한 착오라고 했다.
그는 이병도가 인용한 잠부론의 바로 앞부분을 들면서 왕부의 지적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무릇 桓叔의 후손으로는 한씨(韓氏)․ 언씨(言氏)․영씨(嬰氏)․화여씨(禍餘氏)․공족씨(公族氏)․장씨(張氏)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韓의 후손으로 姬姓이었다(한편 옛날 주 선왕 때에 또한 한후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 …).
잠부론 에서 왕부가 전하려고 한 뜻은 서주 왕실과 동성인 희성이며 韓나라의 제후였던
桓叔의 후손으로는 韓氏․言氏․嬰氏․禍餘氏․公族氏․張氏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성이 희(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韓)과 다른 또 하나의 한후(韓侯)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병도가 인용한 부분의 잠부론 은 정확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앞에 나오는 한후는 연나라의 동쪽에 있던 그 지역 토착세력의 왕[君長]을 의미하고,
뒤의 한은 기자국의 준을 뜻하는 것이니 기자국이 한후의 서쪽에 있었다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주 선왕 때에 연나라에 가까웠던 한후는 고조선한국를 가리키고
그 고조선한국의 서쪽에는 기자한국이 있었는데 이 기자한국이 위만에게 공벌당해서 해중으로 옮겨가 살았다는 것이다.
- 윤내현, 고조선 연구 , 일지사, 1999
* 윗 부분은 정형진, 『시경』한혁편의 한후와 한씨조선에 관한 새로운 견해, 단군학연구 제13호, 2005. 12 에서 인용
<박병식 >
後漢때 왕부가 쓴 잠부론 지씨성조
韓侯라는 말은 韓나라의 王侯가 있었다는 말이지 韓씨 성을 가진 王侯가 있었다는 말은 아님이 분명하다
주나라 선왕은 BC 827~BC 782 이니 이때 韓國이 이미 있었다.-- 단군조선
이때 韓國은 韓이라고 한문자로 표기한 것이 아니고 우리 고유의 말로 하라(=태양의 나라, 광명의 땅의 의미)라고 불렸다.
[후세에 이르러 하소리가 가로 바뀌어 하라-加羅로 발음. 오늘날 일본말로 韓을 간으로 발음하고 있지만
옛문헌에는 加羅라고 읽게되어 있는데 하라-하나(ㄹ이 ㄴ으로 변화)와 둘째소리마디의 모음탈락으로 한으로 바뀐 것을
한문자로 韓으로 표기하게 된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300 년전쯤에 편찬된 고사기나 일본사기에 우리나라 이름을 韓이라고 적으면서 시종일관하여 加羅라고 토를
달아 놓은 것으로 보아 우리 이름을 8세기 경 까지도 加羅=韓으로 불렀던 것을 확인할수 있다. 위지 왜인전에 김해지방을
가야한국(狗邪韓國)이라고 기록한 것도 그 이유를 납득할수 있다.]
사기나 전한서에 韓이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
첫째 한문자로 韓이라고 표기된 것을 무엇이라고 읽어야 옳은지 애매하였기때문에 중국학자들은 韓이라는 글자를 피하고
그것과 같은 뜻이 되는 부여와 조선을 사용했다.
둘째 전국7웅의 하나인 韓이 그 당시 낙양에 도읍하고 있었기때문에 같은 시기에 존재하는 우리의 韓을 같은 문헌속에서
혼돈되게 쓰기보다 다른 표기방법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쪽의 韓은 계속되었지만 중국측 韓은 서기전 230년 진나라에게 멸망당한후 그 이름이 끊기고 말았다.
후한대 이후의 문헌에 우리의 韓이 등장할수 있게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기자가 은나라로부터 우리나라로 왔을 당시에는 아사달이라는 우리 고유의 이름으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순수 우리말을 주나라 사람들이 비로서 조선이라는 한문자로 고쳐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면 중국의 <하상주삼대도>에 그 이름이 나타타 있어야 하는데 조선이라는 이름을 보이지 않고 대신 우이-해돋는 곳에 사는 외국민족)이라는 이름만 보일뿐이니 말이다.
<韓西가 朝鮮이라는 설>
(案韓西蓋卽朝鮮. 朝誤爲韓, 西卽鮮之轉, 故 『尙書大傳』 以西方爲鮮方. 살펴보건대 韓西는 朝鮮이 아닐까 싶다. 朝를 韓으로 잘못 썼고 西는 鮮을 달리 쓴 것으로 보인다. 상서대전에도 西方을 鮮方으로 표기했었다. - 1800년경 왕계배의 주석)
시경(詩經 先秦)에 나오는 한(韓)은 서주(西周)때의 한(韓)으로, 여기에 나오는 '韓侯受命'와 '王錫韓侯'의 구절은 아래 죽서기년(竹書紀年 先秦)의 기록과 일치한다.
BC 1030 王帥、燕師城韓。王錫韓侯命。
BC 0824 王命蹶父如韓,韓侯來朝。
연(燕)이 한(韓)의 성을 쌓아주었다는 이야기도 같다. 이 한(韓)은 기자조선과 동시대에 존재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先秦)과 사기(史記 前漢)의 기록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BC 1043 이전 죽서기년(竹書紀年 先秦)
(주무왕) 16년에 기자가 내조하였다.
BC 1043 이전 사기(史記 前漢)
이에 무왕이 곧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는 아니었다. 그 후 기자는 주나라에 배알하고 옛 은나라의 유적을 지나게 되었는데 궁궐이 무너지고 그곳에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슬퍼하여 소리 내어 울고 싶었으나 그런 일은 부인들이나 하는 거라 시만 한 수 지어 읊었다.
우리 한(韓)은 기자조선에서 나왔다.
BC 222이전 위략(魏略 3세기)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周)가 쇠약해지자, 연(燕)이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기자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燕)을 역공하여 주(周)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BC 195 삼국지(三國志 3세기)
(준왕은) 그의 가까운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그 뒤 준(準)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841? 에서 복사
<韓西가 朝鮮이 아니라는 설>(열국연의에서 발췌)
‘其後韓西亦姓韓’ 의 해석. ‘잠부론’ 주석에는 ‘韓西’의 한(韓)을 조(朝)의 오기로 보고, 서(西)는 선(鮮)과 호용되는 글자로 보아 이를 조선으로 보기도 하는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한서’를 조선과 관련된 나라로 보려고 했다. 하지만 ‘잠부론’에서 한씨를 다룬 전문의 흐름으로 볼 때 이러한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한서’를 조선으로 보면 인용한 전문의 흐름으로 볼 때 모순이다. 이는 왕부가 지적하려고 한 한씨들의 발생시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먼저 ① 한숙(桓叔)의 후예인 전국시대 한국의 한씨가 있었다. 이들은 ‘사기’ 한세가와 ‘잠부론’ 내용으로만 보면 진나라 목후의 손자이자 桓叔의 아들인 한만(韓武子)의 3대손으로 진 경공 시기(기원전600~581)에 활동한 한궐 때부터 한씨 성을 사용했고 기원전 403년에 韓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② 뒤에서 설명하고 있는 연나라 근처에 있던 한국은 주 선왕의 재위 기간(기원전827~782년)에 이미 있었다. 그리고 ③ ‘한씨 성을 가진 韓西’가 가리킨다고 본 조선(후조선)은 주나라 초기부터 있었다(서주는 기원전 1046~기원전 771년)
선후로 보면 韓西가 가장 앞서고, 다음이 연나라 옆에 있었던 한국이며, 마지막이 전국시대의 한국이 된다. 세 집단의 발생시기를 염두에 두고 왕부의 글 전체를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其後韓西亦姓韓’에서 ‘其後’를 연나라 주변의 한후가 있은 후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면 ‘한서의 한’은 조선일 수 없다. 그들은 당연히 한후보다 늦게 한씨 성을 사용한 전국시대의 한국이다.
필자는 ‘其後韓西亦姓韓’은 ‘시경 한혁편의 한국과 이름이 같은 한국이 서쪽에 있었으며 그들의 성이 한씨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삽입한 문장이고 위만에게 공벌당했다는 나라는 韓奕편의 한국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여기에 위만에게 공벌당한 한국은 연나라 주변에 있던 한국의 후예들이 주도한 나라인 조선(韓氏朝鮮)을 지칭한다. 즉, 왕부는 한혁편에 나오는 한국과 조선이 관련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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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路史》卷二十八韓西, 王肅云涿郡方城縣有韓城是 韓西나라는 王肅이 말하기를 涿郡의 方城縣이라고 하는데 韓城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欽定日下舊聞考》卷一百二十四補詩曰其追其貊燕師之北國也韓在燕北貊為韓之北國韓既歸于燕韓從而東徙漢初謂之三韓(燕史)그 追와 그 貊맥... 연나라의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韓은 燕의 북쪽에 있다. 貊은 韓의 북쪽에 있다. 韓이 이미 燕에 귀속하였기 때문에 韓은 동으로 달아났는데 漢 초기에는 이들을 삼한(三韓)이라 불렀다.(燕史에서 인용)
(위만에게 공벌 당하여 해중으로 옮겨가 산 존재. 그는 기자의 후손 준이다. -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 -
조선왕 준은 위만에게 격파되어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갔다.)(기원전 194년)
《후한서(後漢書)》에,
“기준이 위만에게 침공(侵攻)을 받자, 좌우(左右)의 관인(官人)들을 인솔하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을 쳐부수고는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하였다.
《위략(魏略)》에,
“기준의 아들과 친족으로서 그 나라에 남아 있는 자들이 한씨(韓氏)로 성(姓)을 삼았다.”
하였으니, 이 또한 국호(國號)를 빌어서 성을 삼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기준의 족속이 멸망하자 마한(馬韓) 사람이 스스로 임금이 되어 진왕(辰王)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진(秦) 나라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이 쫓겨서 한(韓)으로 들어오자, 마한에서 그들을 위해 동쪽 지경을 떼어 주었으니, 이것이 곧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그들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고 자기들 스스로는 왕이 되지 못하였으니, 곧 유랑인(流浪人)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진(秦) 나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진한(辰韓)이라 한 것이다. 변한(弁韓)은 변한(卞韓)이라고도 하는데,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변진(弁辰)으로 되어 있다.
《후한서》에,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이 진한(辰韓)과 서로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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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위만의 나라 이름의 유래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이 어디서 처음에 기록되었을까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단군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 과연 "조선"이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는 곳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 중 조선열전입니다. 史記卷一百十五, 朝鮮列傳苐五十五
(集解張晏曰朝鮮有濕水洌水汕水三水合為洌水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중략....)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為置吏築鄣塞...중략....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집 해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 등 3개의 강이 있는데 이 강이 합하여 열수가 된다. 혹 낙랑이 조선이라는 이름을 취한것은 이때문이 아닌가 한다...중략...)
조선의 왕은 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전성기때부터 항상 진번과 조선을 공격하여 관리를 두고 장새(鄣塞)를 쌓았다....중략.... 요동태수가 위만을 한나라의 바깥에 있는 신하로 삼기로 약속하였다.
이 기록이 과연 고조선에 대한 기록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그지 없습니다. 지나인의 얄팍한 역사기술 방법에 놀아난 샘이죠. 사기 조선열전을 쓴 이유는 위만이 서한(西漢)의 외신(外臣)이었기 때문입니다. 위 기록에서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문장입니다.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대부분 이를 해석하기를 "낙랑조선이 그것 때문에 이름을 취하였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이 앞의 3수에 대한 설명의 부연설명인 것을 본다면 이렇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위만의 나라의 원래 이름은 낙랑인데 그곳에 3수가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위만조선의 원래 이름이 낙랑일까요? 그것은 바로 위만이 기자조선을 뺏었기때문입니다.
제가 추론하기로는 기자족은 원래 산동성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태원에 살았다가 BC12세기 경에 조선현(朝鮮縣)으로 가서 단군의 나라에 투항하여 단군나라에 봉국이 됩니다.* 산동성에 살았다는 의심의 뒷받침 할 만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바로 한서 지리지에 낭야군(琅邪郡)이 보이며 이곳에 속한 현으로 기현(箕縣)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서에서는 이곳이 기자가 살던 곳이 아니라고는 하나 이곳은 고대에 우이(隅夷)가 살던 지역으로 우리민족이 고대부터 거주하던 곳입니다.
* 태원이 기자족이 살았다고 뒷받침할만한 기록은 로사(路史)에 보입니다. 로사(路史) 권27에 보면 기국(箕國)이보이는데 그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路史 권27箕 箕子之先箕伯之封小國也春秋猶有箕崇之國姓纂云商之圻内今太原晉敗狄于箕者預謂太原陽邑有箕城是陽邑隨之大谷後為骨打都今遼之榆社東南三十古箕城在遼山與琅邪益都襄邑異
기국은 기자의 선조 기백의 작은 봉국이다. 춘추에는 기숭의 나라가 있고 성찬은 말하기를 은나라의 기내라고 하였는데 현재 태원이다. 진인이 적인을 기(箕)에서 공격하였다는데 자유는 말하기를 태원 양읍에 기성이 있다고 하였다.....위 기록은 기자족이 산동성이 있었던 낭야군(琅邪郡)에 있다가 현재 태원 근방으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은나라 태원에 살던 기자가 주나라가 서면서 단군의 나라로 옮겨오는데 그곳의 현(縣) 이름이 조선현(朝鮮縣)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단군의 나라로부터 봉국을 받는데 기자족이 원래 살던 산동성의 나라 이름대로 낭야국(琅邪國)이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음운을 잘 보면 낭야국(琅邪國)은 낙랑국(樂浪國)과 통하는 글자이며 오늘날 우리나라 말인 "나라(國)"라는 의미인 것이죠. 이러한 기자의 나라를 위만이 빼앗게 된 후에도 그 나라이름은 낭야 혹은 낙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기 조선열전에 위와 같은 기록이 보이는 것입니다. "혹 낙랑의 조선이라는 이름을 취한 것은 이때문일 것이다(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라고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기자가 단군의 나라로 투항할때 조선으로 갔다는 것은 단군나라 이름이 조선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군나라 지방현 이름중에 조선현이라는 곳이 있었고 그곳에 투항하여 단군나라의 봉국이 된 후에 기자족이 원래부터 살았던 산동성 낙랑지역의 이름을 따서 낙랑국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한(西漢)의 군현 중 낙랑군(樂浪郡) 안에 속한 현으로 조선현(朝鮮縣)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군의 나라가 조선이라면 절대로 낙랑군 안에 조선현이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단군 나라의 이름삼국지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辰韓者古之辰國也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위 문장을 해석하기를 진한은 옛 진국의 땅에 건국하였다고 말하지만 틀린 말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려면 "辰韓者古之辰國地也" 라고 해야 합니다. 즉 위 기록은 진한의 건국주체가 옛 진국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단군나라가 북부여 해모수가 차지하게 되자 단군나라 사람들이 남으로 이동하여 진한을 한 것이며 이는 단군나라의 이름이 진국(辰國)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후한서에는 진한만이 진국이 아니라 삼한 모두 진국이라고 말합니다.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중략....皆古之辰國也한은 3종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이다....중략.... 이들 모두 옛날 진국이다.삼국지에서는 아마도 단군나라 중 단국 직할국만 일컬어 진국이라고 하였으므로 진한만 진국이라 한 것이라 생각되며, 후한서에서는 단군나라의 영향권이 미친 모든 나라를 가리켰기때문에 삼한 모두 진국이었다고 말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지나인들은 혀가 짧아 긴 단어를 그들만의 방식대로 짧게 말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진국이 과연 맞는지 또 찾아봐야합니다.
여기서 한후(韓候)는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위만에게 정벌당한 서쪽의 한(韓)이라는 성(姓)을 가진 나라는 기자조선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그 뿌리가 같다는 사실과 함께 이들이 상당기간 병존(竝存)하였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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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선왕은 기원전 9세기의 사람이고 이때 만난 한후는 단군조선을 뜻한다.
한나라 서쪽에 있다가 기원전 2세기때 위만에게 쫒겨난 한씨는 기자조선의 준왕을 뜻한다
고조선은 한반도 안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의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위만에게 망한 韓侯의 후예는 고조선의 준왕이었지만 그로부터 약 800년 전에 존재했던 조상이 조선후가 아니라 韓侯라는 명칭을 쓴 걸 보면 고조선의 과거 국호가 '한(韓)'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기자조선의 실체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렇다면 기자조선은 무엇인가? 조선왕조실록중 세종12년 기사를 보자
산천단 순심 별감(山川壇巡審別監) 정척(鄭陟)이 아뢰기를,“평양 기자묘(箕子廟) 신위(神位)에 쓰기를, ‘조선후기자(朝鮮侯箕子)’라고 하였사오니, 청하건대 ‘기자’ 두 글자를 삭제하옵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그렇다.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인데, 이를 칭호(稱號)로 함은 불가하다. 그러나 그저 조선후라고 일컫는 것도 미안한 듯하니 ‘후조선 시조 기자’라고 하는 것이 어떠할까. 상정소(詳定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하니,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찬성 허조 등은 ‘후조선 시조 기자’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희(喜) 등의 의논에 따랐다.기자의 가묘를 처음 세울때에 조선후기자(朝鮮侯箕子)라고 썼었나보다. 즉, 주신이란 나라의 제후인 기자란 뜻이다. 정척이라는 자가 이르기를 조선후와 기자가 같은 뜻으로 문구의 뜻이 중복이 되니"기자"를 삭제하여야 한다고 청한 것이다. 그에 대해 세종대왕이 뭐라고 하냐면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인데".... 종합해보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제후국의 이름이 기(箕)이고 그 제후국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조선에서 작위를 내린것을 뜻하는 글자가 자(子)라는 것이다. 기자의 가묘에 조선의 제후라고 하는 것이 미안하니까 후조선의 시조 기자라고 하자고 한것이다. 이것이 후에 사대사상에 의하여 살이 붙여지고 미화되어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이은 나라라고 와전된 것이며, 중국의 역사왜곡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분명 세종때까지 "기자"라는 인물은 고조선의 작은 제후국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세종대왕 자신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묘를 세울정도이니 그가 매우 위대한 사상가이었다는 것은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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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기자의 후손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성씨 ]행주 기(奇)씨, 서(徐)씨, 태원 선우(鮮于)씨, 청주 한(韓)씨
[ 기자를 따라왔다는 성씨 ]해주, 태인 경(景)씨, 토산 궁(弓)씨, 봉화 금(琴)씨, 밀양, 함평 노씨(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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