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의 피장자
해남반도의 왜계 고분의 피장자는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대가야의 남해안 要衝이며 任那四縣인 여수반도와 帶沙인 하동지역을 장악하려는 백제의 전략 하에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강 상류역의 광주와 담양지역 왜계 고분의 피장자는 섬진강 중상류역의 己汶을 통하여 대가야를 압박하려는 백제의 전략에 의해 배치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지역의 倭人은 대가야의 남해안 요충이며 任那四縣인 여수반도와 금강 상류역, 섬진강 중상류역의 己汶, 섬진강 하류역의 港인 帶沙의 영유를 둘러싼 백제의 對 대가야 공략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 피장자가 왜계 백제관료로서 지방관의 역할과 함께 對 대가야 공략, 대왜교섭에 종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과 거의 동시에 가야지역에 출현하는 왜계 고분의 피장자는 백제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 피장자를 移植한 것과 같이 대가야와 이에 연계된 소가야에 의해 移植되어 백제, 일본열도, 신라와의 외교 및 군사 활동 특히 백제측에서 활동한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 피장자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과 가야지역의 왜계 고분은 任那四縣과 帶沙, 己汶지역을 중앙에 두고 분산 배치되어 있고 6세기 전엽에 국한된 출현시기와 각각 백제와 대가야산 위세품을 보유한 것에서,「任那日本府」와는 어떠한 관계도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는 任那四縣과 帶沙, 己汶을 둘러싼 백제와 대가야의 공방전에 北部九州지역의 倭人이 백제와 대가야측에 각각 傭兵으로 동원된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산물이다.
北部九州지역의 倭人은 백제왕권과 대가야왕권에 각각 臣屬하면서 양국의 군사 외교에서 활약하며, 그 선진 문물을 출신집단에 제공하고 그 대가로 一族의 군사력을 지원받는 창구 역할을 수행하고 일본열도 전역에 백제와 대가야의 문물을 각각 공급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
-任那問題를 包含하여- 김태식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에서 日本의 甲冑와 太刀가 出土됨.
영산강유역의 前方後円墳은 대략 30m부터 70m 정도의 크기이다. 日本에서는 야마토 왕권의 왕과 지방호족의 고분간에는 크기에 차이가 있었고 세력이 약한 호족은 그보다 더 작았다. 당시 백제의 武寧王陵은 대개 20미터 정도의 墳으로 百済王의 墓보다 더 큰 점은 백제를 콘트롤 하였던 것이 아닌가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6世紀前半継体天皇의 墓190m-日本書紀에 의하면 527年(日本書紀・継体21年)継体天皇은 6万の軍勢를 朝鮮半島에 보냈다고 한다. 목적은 任那의 復興이었다。(衆六萬欲往任那為復興)-磐井의 반란으로 실패함(賊師磐井交戦於)-東洋大学教授 森公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