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일본의 역사- 한반도 관련 기록들.4- 敏達 推古(聖德太子) 舒明天皇 -불교의 수용

청 설모 2013. 9. 25. 04:18

다음글은 <일본서기>를 번역한 [다산을 찾아서]란 블로그의 <일본육국사>에서 옮겨 온 글이다

http://sambolove.blog.me/150172958454


 

敏達天皇   渟中倉太珠敷天皇   

百濟大井에 宮 造營
元年 여름 4월(572년 음4월) 이 달 百濟大井에 宮을 만들었다. 物部弓削守屋大連을 옛과 같이 大連으로 삼고, 蘇我馬子宿?를 大臣으로 삼았다. 

元年 5월(572년 음5월 1일)
高麗 사신의 入京
5월 壬寅 초하루 천황이 皇子와 大臣에게 “高麗 使人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大臣이 “相樂館에 있습니다”라 대답하였다. 천황이 듣고 매우 슬퍼하며 탄식하기를 “슬프도다. 이 使人들의 이름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 천황에게 아뢰었었다”라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를 相樂館에 보내어 調로 바치는 물건을 조사하여 기록하고 서울로 보내게 했다.
 
元年 5월(572년 음5월 15일)
高麗의 表文을 王辰爾가 해독
丙辰 천황이 고려에서 올린 表를 大臣에게 주었다. 여러 史를 불러 모아서 풀이하 게 하였는데, 이 때 여러 史들은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도 읽지 못하였으나 船史의 조상인 王辰爾가 능히 읽고 해석하였다. 이 때문에 천황과 大臣들이 모두 讚美하여 “부지런하구나 辰爾여, 훌륭하구나 辰爾여, 그대가 만약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누가 읽고 해석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부터는 宮中에서 近侍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東西의 여러 史에게 “너희들이 배운 바는 어찌하여 나아감이 없느냐. 너희들은 비록 많으나 辰爾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라 하였다. 또 고려가 올린 表에 까마귀 날개에 쓰여진 것이 있었는데 글자도 날개처럼 검었으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辰爾가 이에 밥김에 날개를 쪄서 비단으로 날개를 찍어 그 글자를 베껴냈더니 朝庭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元年 6월(572년 음6월)
高麗 大使의 죽음
6월 高麗 大使가 副使 등에게 “磯城嶋天皇(欽明天皇) 때에 너희들은 나와 상의한 바를 어기고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함부로 국가의 調를 나누어 *천한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찌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겠느냐. 만약 우리 국왕이 안다면 반드시 너희들을 꾸짖을 것이다”라 하였다.

 

副使 등이 서로 “만약 우리들이 나라에 이르렀을 때 大使가 우리의 허물을 말한다면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일 것이다. 몰래 죽여서 그 입을 막아야 한다”라 하였다. 그 날 저녁 모의가 새어나갔다.

 

大使가 이를 알고 복장을 갖추고 혼자 몰래 가다가 相樂館의 뜰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때 한 사람이 몽둥이를 가지고 나와서 大使의 머리를 치고 물러 났으며 다음에 또 한 사람이 곧바로 대사를 향해 와서 머리와 손을 때리고 갔다. 그런데도 大使는 묵묵히 서서 얼굴의 피를 닦았다. 다시 한 사람이 칼을 들고 급히 와서 大使의 배를 찌르고 갔다. 이 때에 대사는 두려워서 땅에 엎드려 빌었는데 뒤에 한 사람이 나타나 죽이고 갔다.

 

다음날 아침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東漢坂上直子麻呂 등이 그 까닭을 물었다. 副使 등은 “천황이 大使에게 妻를 내려 주었는데 大使가 칙을 어기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매우 無禮하였으므로 臣들이 천황을 위하여 죽였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有司가 禮로써 거두어 葬事지냈다. 
 
*함부로 ~ 주었으니 : 이같은 사실은 欽明天皇 31년 4월·5월조에 보이는데 고려의 使人이 越國에 표착하자 이 곳의 豪族이었던 道君이 천황이라 칭하며 고려의 貢物을 빼앗았던 일이 있다. 천한 사람이란 곧 道君을 가리킨다.
 
元年 가을 7월(572년 음7월)
高麗 사신의 歸國
가을 7월 高麗 使人이 使行을 마치고 돌아갔다.
 
2년 여름 5월(573년 음5월 3일)
越로 가는 高麗 사신의 표착이 많자 돌려보냄
2년(573) 여름 5월 丙寅 초하루 戊辰 고려 使人이 越의 海岸에 정박했는데 배가 부서져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朝庭에서는 자주 길을 잃는 것을 의심하여 잔치를 베풀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吉備海部直 難波에게 칙을 내려 고려의 사신을 보내도록 하였다. 
 
2년 가을 7월(573년 음7월 1일)
送使가 高麗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림
가을 7월 乙丑 초하루 越의 海岸에서 難波와 고려의 사신들이 서로 의논하여 送使 難波의 船人 大嶋首磐日과 狹丘首間狹을 고려 사신의 배에 타게 하고, 高麗人 두 사람은 送使의 배에 타게 했다. 이같이 서로 바꾸어 타서 간사한 마음에 대비하도록 했다. 함께 배를 출발하여 몇 里쯤 갔을 때 送使 難波가 파도를 두려워하여 高麗人 두 사람을 붙잡아 바다에 던져 넣었다. 
 
2년 8월(573년 음8월 14일)
送使의 처벌
8월 甲午 초하루 丁未 送使 難波가 돌아와서 復命하기를 “바다에 큰 고래가 배와 노를 가로막고 부술듯 하였으므로 難波 등은 고래가 배를 삼킬까 두려워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듣고 속이는 말임을 알고는 官에서 사역시키고 (吉備)國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년 여름 5월(574년 음5월 5일)
高麗 사신의 越의 해안 정박
3년(574) 여름 5월 庚申 초하루 甲子 高麗 使人이 越의 海岸에 정박했다.
 
3년 가을 7월(574년 음7월 20일)
高麗 사신의 入京. 送使의 배가 도착하지 않은 것을 제기
가을 7월 己未 초하루 戊寅 高麗 使人이 서울에 들어와 “신들은 지난 해에 送使를 따라서 귀국했습니다. 신들은 먼저 저희 나라에 이르렀는데 저희 나라는 使人의 禮에 준하여 大嶋首磐日 등에게 향응을 베풀었으며 고려국왕은 따로 두터운 禮로써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送使의 배는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삼가 使人과 磐日 등을 보내어 저희 使人들이 돌아오지 않는 까닭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라 아뢰었다.

 

천황이 듣고 難波의 죄를 책하여 “朝庭을 속인 것이 하나요, 이웃나라의 사신을 물에 빠뜨려 죽인 것이 둘이니, 이같은 큰 죄는 놓아서 되돌려 보낼 수 없다”라 하고 그 죄를 처단했다.
 
3년 겨울 10월(574년 음10월 11일)
王辰爾의 아우 牛가 姓을 받음
(겨울 10월) 戊戌 船史 王辰爾의 아우 牛에게 조를 내려 津史라는 姓을 내렸다.
 
3년 11월(574년 음11월)
新羅가 사신을 보냄
11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4년 2월(575년 음2월)
百濟가 사신을 보냄
(4년, 575 2월) 乙丑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쳤는데 여느 해보다 더욱 많았다. 천황은 신라가 任那를 세우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皇子와 대신에게 “任那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4년 여름 4월(575년 음4월 6일)
新羅, 任那, 百濟에 사신을 보냄
여름 4월 乙酉 초하루 庚寅 吉士金子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吉士木蓮子를 임나에 사신으로 보냈으며, 吉士譯語彦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4년 6월(575년 음6월)
新羅가 사신을 보내 4邑의 調를 바침
6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쳤는데 보통 때보다 매우 많았으며, 아울러 多多羅·須奈羅·和陀·發鬼 *4邑의 調를 바쳤다. 
*多多羅·須奈羅·和陀·發鬼 4邑의 調 : 繼體天皇 23년(529) 4월 是月조에 보이는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의 4邑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킨 후 이 지방의 調를 임나의 調로서 바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6년 여름 5월(577년 음5월 5일)
百濟에 宰(使)를 보냄
(6년, 577) 여름 5월 癸酉 초하루 丁丑 大別王과 小黑吉士를 보내어 백제국의 宰로 삼았다王의 신하로서 명을 받들어 三韓에 使臣으로 갈 때 스스로 宰라고 칭한다. 韓의 宰가 된다고 하는 말은 대개 옛날의 典範인 듯하다. 지금은 使라고 하는데 나머지는 모두 이를 따른다. 大別王은 어디 출신인지 자세하지 않다.
 
6년 겨울 11월(577년 음11월 1일)
百濟가 歸國하는 사신과 함께 經論 등을 보냄
겨울 11월 庚午 초하루 백제국왕이 돌아오는 사신 大別王 등에게 딸려서 經論 약간 卷과 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의 6인을 바쳤으므로 難波의 大別王寺에 安置했다.
 
8년 겨울 10월(579년 음10월)
新羅가 사신을 보내 調와 佛像을 보냄
8년(579) 겨울 10월 신라가 枳叱政 奈末을 보내어 調를 바치고 아울러 佛像을 보냈다.
 
9년 여름 6월(580년 음6월)
新羅가 사신을 보냈으나 되돌려보냄
9년(580) 여름 6월 신라가 安刀 奈末과 失消 奈末을 보내어 調를 바쳤는데 받아들이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11년 겨울 10월(582년 음10월)
新羅가 사신을 보냈으나 되돌려보냄
11년(582) 겨울 10월 신라가 安刀 奈末과 失消 奈末을 보내어 調를 바쳤는데 받아들이지않고 되돌려 보냈다.
 
12년 가을 7월(583년 음7월 1일)
百濟의 日羅와 함께 任那 재건 계획
12년(583) 가을 7월 丁酉 초하루 조를 내려 “나의 아버지 천황 때에 신라가 內官家의 나라를 멸망시켰다天國排開廣庭天皇(欽明天皇) 23년에 任那가 신라에게 멸망당하였으므로 신라가 우리 官家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다.

 

아버지 천황이 임나를 복구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돌아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朕은 神의 謀策을 도와 任那를 부흥시키고자 한다. 지금 백제에 있는 火葦北國造 阿利斯登의 아들 *達率 日羅가 어질고 용맹스럽다고 하므로 朕은 그 사람과 함께 계획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紀國造押勝과 吉備海部直羽嶋를 보내어 백제에서 불렀다. 

*達率 日羅 : 達率은 百濟 16官等 가운데 제2관등이며, 日羅는 아마도 본래 加羅系 百濟人이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가 있다.
 
12년 겨울 10월(583년 음10월)
百濟가 日羅를 보내려하지 않음
겨울 10월 紀國造押勝 등이 백제로부터 돌아왔다. 조정에 復命하기를 “百濟國主가 日羅를 소중히 여겨 바치려고 하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12년(583년)
日羅의 파견. 日羅의 죽음
이 해 다시 吉備海部直羽嶋를 보내어 日羅를 백제에서 불렀다. 羽嶋가 백제에 가서 먼저 사사로이 日羅를 보려고 혼자 집 문 근처에 갔다. 얼마 후 집안에서 韓婦가 나와서 韓語로 “너의 몸을 나의 몸 안으로 들여 보내라”고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羽嶋가 곧 그 뜻을 깨닫고 뒤따라 들어갔다.

 

이에 日羅가 나와서 손을 잡고 자리에 앉게 하고 비밀스럽게 말하기를 “내가 저으기 들으니 百濟國主는, 天朝가 臣을 보낸 뒤에 억류하여 되돌려 보내지 않을까 의심한 까닭에 (저를) 소중히 여기고 바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칙을 선포할 때 마땅히 엄하게 하여 매우 급하게 부르십시요”라 하였다.

 

羽嶋가 그 계책에 따라 日羅를 불렀더니 百濟國主는 天朝를 두려워 하여 감히 칙을 거스리지 못하고, 日羅와 恩率 德爾·餘怒·奇奴知·參官·?師 德率 次干德, 水手 등 약간인을 보냈다.

 

日羅 등이 吉備兒嶋 屯倉에 이르자 朝庭에서는 大伴糠手子連을 보내어 위로하고, 다시 大夫 등을 難波館에 보내어 日羅를 찾아보게 했다. 이 때 日羅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문 앞에 이르러서 곧 政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고 물러나면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한탄하기를 “檜?宮御宇天皇(宣化天皇) 때에 우리 君 大伴金村大連과 국가를 위하여 바다 밖에 사신으로 갔던 火葦北國造 刑部?部 阿利斯登의 아들 臣 達率 日羅는 천황의 부름을 받고 두려워하며 來朝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갑옷을 벗어 천황에게 바쳤다.

 

阿斗桑市에 館舍를 지어 日羅를 머물게 하고 바라는 대로 공급해 주었다. 또 阿倍目臣과 物部贄子連·大伴糠手子連을 보내어 日羅에게 國政을 물었다. 日羅가 대답하기를 “천황이 천하를 다스리는 바의 정치는 반드시 백성들을 보호하고 기르는 데 있습니다. 어찌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멸망에 이르려 하십니까.

 

그러므로 지금 논의하는 자들로서 조정에 있는 臣·連의 두 造로부터(二造란 國造와 伴造이다)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유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십시오. 이렇게 3년을 하면 양식과 병사가 풍족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즐겁게 하여 물불을 꺼리지 않고 國難을 함께 구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선박을 많이 만들어 津마다 줄지어 두고 客人들이 보게 하여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십시오. 그리고 유능한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 그 국왕을 부르되 만일 오지 않으면 太佐平·王子 등을 부르십시요. 그러면 저절로 복종할 마음이 우러나올 것이니, 그런 뒤에 죄를 물으십시요”라 하였다.

 

또 “백제인이 꾀하여 ‘배 3백 척으로 筑紫에 가 살고자 합니다’라 하였는데 만약 그것이 진실로 청하는 것이라면 겉으로는 (筑紫를) 내려주십시요. 그러면 백제는 새로 나라를 세우려고* 반드시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을 배에 싣고 올 것입니다. 국가에서는 이 때를 대비하여 壹伎·對馬에 伏兵을 많이 두었다가 이르는 것을 기다려 죽이십시요. 오히려 속임을 당하지 말고 중요한 곳마다 튼튼한 요새를 쌓으십시요”라 아뢰었다.

 

이에 恩率·參官이 나라로 되돌아 갈 때에 몰래 德爾 등에게 “내가 筑紫를 지나갈 때쯤을 헤아려 너희들이 몰래 日羅를 죽인다면 내가 왕에게 모두 아뢰어 높은 벼슬을 내리도록 하고 자신과 처자식들에게도 후에 영예를 내리도록 하겠다”라 하였다. 德爾·余奴가 모두 허락했다.

 

參官 등은 드디어 血鹿에서 출발하였다. 이 때 日羅는 桑市村으로부터 難波館으로 옮겼다. 德爾 등은 밤낮으로 서로 모의하여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에 日羅의 몸에서 빛이 나 불꽃같았으므로 德爾 등은 두려워서 죽이지 못하였다.
드디어 12월 그믐에 빛을 잃기를 기다려 죽였다. 日羅가 다시 살아나서 “이는 내가 부리던 奴 등의 짓이지 신라가 아니다”라는 말을 마치고 죽었다 마침 이 때에 신라 사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황이 贄子大連과 糠手子連에게 명하여 小郡의 서쪽 부근 언덕 앞에 거두어서 장사지내게 하고, 그 처자식과 水手 등은 石川에 살게 했다. 이에 大伴糠手子連이 논의하여 “한 곳에 모여서 살면 변고가 생길까 두렵다”라 하였으므로 처자식들은 石川 百濟村에 살게 하고 水手 등은 石川 大伴村에 살게 했다.

 

德爾 등을 붙잡아 下百濟 河田村에 두고 몇몇 大夫를 보내어 그 일을 따져 물었다. 德爾 등이 죄를 자백하여 “진실로 이는 恩率·參官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 우리들은 그 밑에 있기 때문에 감히 거스릴 수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때문에 옥에 가두고 조정에 복명했다.

 

葦北에 사신을 보내어 日羅의 권속을 다 불러 德爾 등을 주어서 뜻대로 죄를 판결하게 했다. 이 때 葦北君 등이 (德爾 등을) 받아서 모두 죽여 彌賣嶋에 던져버리고彌賣嶋는 아마 姬嶋(ひめしま)일 것이다 日羅를 葦北에 移葬시켰다.
그 후 바닷가에 있는 사람들이 “恩率의 배는 바람을 만나 바다에 빠졌고, 參官의 배는 津嶋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라 하였다. 
 
*백제는 ~ 세우려고 : 백제가 筑紫지방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는 것은 일본열도에 백제의 分國을 두려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3년 봄 2월(585년 음2월 8일)
新羅에 사신을 보냄
13년(585) 봄 2월 癸巳 초하루 庚子 難波吉士木蓮子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마침내 任那에 갔다.
 
13년 가을 9월(585년 음9월)
百濟人의 彌勒石像과 佛像
가을 9월 백제에서 온 鹿深臣이름이 빠졌다이 彌勒石像 1軀를 가지고 있었고 佐伯連이름이 빠졌다이 佛像 1軀를 가지고 있었다.
 
13년(585년)
佛法의 시작
이 해 蘇我馬子宿禰가 그 佛像 2軀를 청하고 鞍部村主司馬達等과 池邊直氷田을 보내어 사방에서 수행자를 찾게 했다. 이에 오직 播磨國에서 승려로서 환속한 자를 찾았는데 이름이 高麗惠便이었다. 大臣이 스승으로 삼았다. 司馬達等의 딸 嶋를 得度시켰는데 (善信尼) 나이 11세였다.

 

또 善信尼의 제자 2인을 득도시키니, 한 사람은 漢人夜菩의 딸 豊女로 禪藏尼이고, 또 한 사람은 錦織壺의 딸 石女로 惠善尼이다.  馬子는 홀로 佛法에 의지하여 세 비구니를 공경했는데 세 비구니를 氷田直과 達等에게 맡겨서 衣食을 공급하게 했다.

 

집 동쪽에 佛殿을 경영하여 彌勒石像을 안치하고 세 비구니를 청하여 齋會를 크게 열었다. 이 때 達等이 齋食할 때에 佛舍利를 얻어서 舍利를 馬子宿禰에게 바쳤다. 馬子宿禰는 시험삼아 舍利를 모루에 놓고 쇠망치로 후려 쳤더니 모루와 쇠망치는 부서졌지만 舍利는 훼손할 수 없었다. 또 舍利를 물에 던졌더니 舍利는 마음으로 원하는 바에 따라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馬子宿禰와 池邊氷田·司馬達等은 佛法을 깊이 믿고 修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馬子宿禰가 또 石川宅에 佛殿을 지었는데 佛法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14년 3월(586년 음3월 30일)
佛敎 박해
(14년, 586, 3월) 丙戌 物部弓削守屋大連이 스스로 절에 나아가 胡床에 걸터앉았다. 그 탑을 무너뜨리고 불을 놓아 태워 버렸으며 또 佛像과 佛殿을 불태웠다. 태우고 남은 불상을 모아서 難波의 堀江에 버리게 했다. 이 날 구름도 없었는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大連은 비옷을 입고 馬子宿?와 그를 따라 수행하는 승려들을 꾸짖고, (또) 욕보이려는 마음이 생겼다.

 

이에 佐伯造御室을 보내어 馬子宿禰가 공양하는 善信 등의 比丘尼를 불렀다. 이 때문에 馬子宿禰는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슬피 울며 比丘尼 등을 불러내어 御室에게 맡겼다. 有司가 곧 尼 등의 법복을 벗기고 가두어 海石榴市亭에서 채찍으로 쳤다.

 

천황이 임나를 세우려고 생각하여 坂田耳子王을 뽑아 사신으로 삼았다. 이 때 마침 천황과 大連이 갑자기 종기를 앓게 되어 보낼 수 없었다. 橘豊日皇子(뒤의 用明天皇)에게 명령하여 “아버지 천황의 조를 거스릴 수 없다. 임나의 정치를 힘써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종기가 생겨 죽은 사람들이 나라에 가득찼는데 종기를 앓는 자들이 “몸이 불타고 매맞고 부러지는 듯하다”고 하면서 울부짖으며 죽었다. 늙은이나 젊은이들이 몰래 서로 “이는 佛像을 불태운 죄이다”라고 말하였다


用明天皇    橘豊日天皇 , 崇峻天皇   泊瀨部天皇 
2년 6월(587년 음6월 21일)
百濟에서 受戒法을 배우고자 함
(崇峻天皇 卽位前紀, 用明天皇 2년, 587, 6월) 甲子 善信阿尼 등이 大臣에게, “出家의 길은 戒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니, 백제에 가서 受戒法을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2년 6월(587년 음6월)
百濟가 사신을 보냄. 尼의 受戒에 대해 언급
이 달 백제의 調使가 와서 조알하였다. 大臣이 사신에게, “이 비구니들을 데리고 너희 나라에 가서 戒法을 배우게 하여 다 마치면 보내라”고 말하였다. 사신이, “신 등이 저희 나라에 돌아가 먼저 국왕에게 아뢴 뒤에 보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원년(588년)
百濟가 사신과 승려를 보냄
(원년, 588) 이 해 백제국에서 사신과 승려 惠總·令斤·惠 寔 등을 보내어 佛舍利를 바쳤다. 백제국이 恩率 首信·德率 蓋文·那率 福富味身 등을 보내어 調를 진상하고 아울러 佛舍利, 승려 聆照 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 등과 寺工 太良未太·文賈古子, 鑪盤博士 將德 白昧淳, 瓦博士 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 畫工 白加를 바쳤다.

 

 蘇我馬子宿禰가 백제 승려들을 초청하여 受戒의 법을 묻고, 善信尼 등을 백제국 사신 恩率 首信 등에게 부탁하여 보내어 學問을 배우도록 하였다. 飛鳥衣縫造의 선조 樹葉의 집을 허물어 비로소 法興寺를 지었다. 이 땅은 飛鳥眞神原이라 이름하기도 하고, 또한 飛鳥?田이라고도 일컫는다. 
 

3년 봄 3월(590년 음3월)
學問尼가 百濟에서 歸國
3년(590) 봄 3월 학문을 배우러 간 비구니 善信 등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櫻井寺에 머물렀다.
 
3년(590년)     度尼
이 해 출가한 비구니는 大伴狹手彦連의 딸 善德·大伴狛의 夫人·新羅媛 善妙·百濟媛 妙光, 또 漢人 善聰·善通·妙德·法定照·善智聰·善智惠·善光 등이다. 鞍部司馬達等의 아들 多須奈도 같은 때에 출가하였는데, 이름을 德齊法師라 한다.
 
4년 가을 8월(591년 음8월 1일)
任那 재건의 의지
(4년, 591) 가을 8월 庚戌 초하루 천황이 군신에게 조를 내려, “짐이 任那를 세우고자 생각하는데, 경들은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군신들이, “任那官家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모두 폐하께서 조를 내리신 바와 같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년 겨울 11월(591년 음11월 4일)
新羅와 任那에 사신을 보내 任那의 일을 물음
겨울 11월 己卯 초하루 壬午 紀男麻呂宿禰·巨勢猿臣·大伴囓連·葛城烏奈良臣으로 대장군을 삼았다. 각 氏의 臣連으로 裨將과 部隊를 삼아 2만여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筑紫에 머물게 했다. 吉士金을 신라에 보내고, 吉士木蓮子를 任那에 보내어 任那의 일을 물었다.

 

推古天皇   豐御食炊屋姬天皇 

원년 여름 4월(593년 음4월 10일)
廐戶豐聰耳 皇子의 攝政. 高麗 僧 慧慈
(원년, 593) 여름 4월 庚午 초하루 己卯 廐戶豐聰耳 皇子(聖德太子)를 皇太子로 삼아 攝政하도록 하고, 정치를 모두 위임하였다. (그는) 橘豐日天皇(用明天皇)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 皇后는 穴穗部間人皇女이다.

 

황후가 임신하여 해산일에 궁 안을 순행하며 여러 관사를 감찰하고 있었다. 馬官에 이르러 마굿간 문에 당도하였는데 힘들이지 않고 홀연듯이 아이를 낳았다. 태어나면서 말을 잘하고 성스러운 지혜가 있었다.

 

장성하여서는 한꺼번에 열 사람의 송사를 들어도 능히 판별하지 않음이 없었고, 아울러 앞날의 일도 미리 알았다. 또 고려의 승려 慧慈에게서 內敎(불교)를 익혔고, 博士 覺哿에게서 外典(유교의 경전)을 배워, 아울러 모두 통달하였다. 아버지 천황이 사랑하여 궁의 남쪽에 있는 上殿에 거처하도록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일컬어 上宮廐戶豐聰耳太子라고 하였다.
 
3년 5월(595년 음5월 10일)
高麗 僧 慧慈의 歸化. 慧慈가 황태자의 스승이 됨
(3년, 595) 5월 戊午 초하루 丁卯 고려 승려 慧慈가 귀화하자,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3년(595년)
百濟 僧 慧聰이 옴
이 해 백제의 승려 慧聰이 왔다. 이 두 승려(고구려 승려 慧慈와 백제의 승려 慧聰)는 불교를 널리 펴서 모두 三寶의 棟梁이 되었다. 
 
4년 겨울 11월(596년 음11월)
慧慈, 慧聰이 法興寺에 주석
4년(596) 겨울 11월 法興寺를 짓는 것을 마쳤다. 이에 大臣 男善德臣을 寺司로 삼았다. 이 날 慧慈·慧聰 두 승려가 처음으로 法興寺에 주석하였다. 
 
5년 여름 4월(597년 음4월 1일)
百濟王子 阿佐의 朝貢
5년(597) 여름 4월 정축 초하루 백제왕이 왕자 阿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5년 겨울 11월(597년 음11월 22일)
新羅에 사신을 보냄
겨울 11월 癸酉 초하루 甲午 吉士磐金을 신라에 보냈다.
 
6년 여름 4월(598년 음4월)
新羅에 갔던 사신이 돌아옴
6년(598) 여름 4월 難波吉士磐金이 신라로부터 돌아와, 까치 두 마리를 바쳤다. 이에 難波社에서 기르도록 하였더니, 나무 가지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6년 가을 8월(598년 음8월 1일)
新羅가 공작을 바침
가을 8월 己亥 초하루 신라가 공작 한 마리를 바쳤다. 
 
7년 가을 9월(599년 음9월 1일)
百濟가 낙타 등을 바침
(7년, 599) 가을 9월 癸亥 초하루 백제가 낙타 한 필, 나귀 한 필, 양 두 마리, 흰 꿩 한 마리를 바쳤다.
 
8년 봄 2월(600년 음2월)
任那 구원
8년(600) 봄 2월 신라가 任那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자, 천황이 任那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8년(600년)
新羅 공격
이 해 境部臣을 대장군으로 삼고 穗積臣을 부장군으로 삼아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任那를 위하여 신라를 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곧바로 신라를 향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신라에 이르러 5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에 신라왕이 두려워하여 흰 기를 들고 장군의 깃발 아래에 이르러 서서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迦羅·阿羅羅 6城*을 떼어 주며 항복을 청하였다.

 

그 때 장군이 함께 의논하여, “신라가 죄를 알고 항복하니 억지로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 하고, 곧 (천황에게) 아뢰었다. 천황이 다시 難波吉師神을 신라에 보내고, 또 難波吉士木蓮子를 任那에 보내어 일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에 新羅·任那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치고, 表를 올려 “하늘에는 神이 있고 땅에는 天皇이 있으니, 이 두 신을 제외하고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앞으로는 이후로 서로 공격하지 않겠으며, 또 배와 노를 마르지 않도록 해마다 반드시 조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곧 사신을 보내어 장군을 불러 들였다. 장군들이 신라로부터 이르자, 신라가 또 任那를 침략하였다.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迦羅·阿羅羅 6城 :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는 『日本書紀』 繼體天皇 23년(529) 4월 是月條의 ‘四村’, 敏達天皇 4년(575) 6월조의 ‘四邑’과 대응하고, 南迦羅는 그 4촌의 총칭 또는 그 중의 素奈羅로 보이며, 阿羅羅는 南迦羅의 서쪽 변경에 위치한 阿羅(安羅)로 풀이되고 있다.
 
9년 3월(601년 음3월 5일)
高麗와 百濟에 사신을 보내 任那 구원 요청
(9년, 601) 3월 甲申 초하루 戊子 大伴連?을 고려에 보내고, 坂本臣糠手를 백제에 보내어 “급히 任那를 구원하라”고 조를 내렸다.
 
9년 가을 9월(601년 음9월 8일)
新羅 間諜을 처벌함
가을 9월 辛巳 초하루 戊子 신라의 간첩 迦摩多가 對馬에 이르렀다. 이에 잡아들여 (천황에게) 올리니 上野에 유배하였다.
 
9년 겨울 11월(601년 음11월 5일)
新羅 공격 논의
겨울 11월 庚辰 초하루 甲申 신라를 칠 것을 의논하였다.
 
10년 봄 2월(602년 음2월 1일)
新羅 공격 준비
10년(602) 봄 2월 己酉 초하루 來目皇子를 신라를 치는 장군으로 삼고, 여러 神部와 國造·伴造 등과 군사 2만 5천 명을 주었다.
 
10년 여름 4월(602년 음4월 1일)
新羅 공격 준비
여름 4월 戊申 초하루 장군 來目皇子가 筑紫에 도착하였다. 이에 嶋郡에 나아가 주둔하여, 선박을 모으고 군량을 날랐다.
 
10년 6월(602년 음6월 3일)
征新羅將軍 來目皇子의 병으로 新羅 공격 실패
6월 丁未 초하루 己酉 大伴連?·坂本臣糠手가 함께 백제로부터 도착하였다. 이 때 來目皇子는 병들어 누워 결국 (신라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10년 겨울 10월(602년 음10월)
百濟 僧 觀勒이 曆本, 天文地理書 등을 가지고 옴
겨울 10월 백제 승려 觀勒이 왔다. 이에 *曆本과 天文·地理書 및 遁甲·方術書를 바쳤다. 이 때 書生 3, 4명을 선발하여 관륵에게 배우도록 하였다. 陽胡史의 선조인 玉陳은 曆法을 익혔고, 大友村主 高聰은 天文·遁甲을 배웠으며, 山背臣 日立은 方術을 배워, 모두 배움에 성취가 있었다. 

 

*曆本 : 觀勒이 일본에 전한 曆本은 중국 南朝 宋나라의 元嘉曆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周書』·『隋書』 百濟傳에는 백제가 元嘉曆을 사용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백제 武寧王陵 誌石에 보이는 月朔과 日干支에서도 백제의 曆이 元嘉曆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비로소 國史를 편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0년 윤10월(602년 윤10월 15일)
高麗 僧 僧隆, 雲聰의 歸化
윤10월 을해 초하루 己丑 고려 승려 僧隆·雲聰이 함께 와서 귀화하였다.
 
11년 봄 2월(603년 음2월 4일)
將軍 來目皇子의 죽음
11년(603) 봄 2월 癸酉 초하루 丙子 來目皇子가 筑紫에서 죽었다. 이에 驛使를 보내어 아뢰니, 천황이 듣고 크게 놀라 皇太子와 蘇我大臣을 불러, “신라를 정벌하는 대장군 來目皇子가 죽었다. 그가 큰 일에 임하고도 완수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슬프도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周芳娑婆에 빈소를 차리고, 土師連猪手를 보내어 장례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猪手連의 후손을 ‘娑婆連’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뒤에 河內의 埴生山의 산등성이 위에 장사지냈다.
 
11년 여름 4월(603년 음4월 1일)
當摩皇子를 征新羅將軍으로 삼음
여름 4월 壬申 초하루 다시 來目皇子의 형 當摩皇子로 신라를 정벌하는 장군을 삼았다.
 
11년 가을 7월(603년 음7월 3일)
新羅 공격을 위한 出征
가을 7월 辛丑 초하루 癸卯 當摩皇子가 難波로부터 배를 출발하였다.
 
11년 가을 7월(603년 음7월 6일)
當摩皇子 妻의 죽음으로 新羅 공격 실패
丙午 當摩皇子가 播磨에 도착하였다. 그 때 같이 간 妻 舍人姬王이 赤石에서 죽었다. 이에 赤石의 檜笠 산등성이 위에 장사지내고 當摩皇子가 돌아왔다. 마침내 (신라를) 정벌하지 못하였다.
 
13년 여름 4월(605년 음4월 1일)
佛像 조성에 高麗에서 황금을 보냄
13년(605) 여름 4월 辛酉 초하루 천황이 皇太子 大臣 및 여러 왕과 신하에게 조를 내려, 함께 誓願하여 銅·繡丈六佛像 각 1구씩을 처음으로 만들게 하였다. 이에 鞍作鳥에게 명하여 불상을 조성하는 工人으로 삼았다. 이 때 고려국 大興王(영양왕)은, 일본국 천황이 불상을 조성한다는 말을 듣고 황금 300兩을 바쳤다.
 
16년 여름 4월(608년 음4월)
唐 사신을 위해 館舍를 지음
16년(608) 여름 4월 小野臣妹子가 大唐으로부터 도착하였다. 당나라에서 妹子臣을 ‘蘇因高’라고 불렀다. 대당의 사신 裴世淸과 下客 12인이 妹子臣을 따라 筑紫에 이르렀다. 難波吉士雄成을 보내어 대당의 사신 裴世淸 등을 부르고, 당나라 사신을 위하여 다시 새 館舍를 難波 高麗館의 위에 만들었다. 
 
16년 6월(608년 음6월 15일)
唐 皇帝의 書를 百濟가 빼앗음
6월 壬寅 초하루 丙辰 사신들이 難波津에 정박하였다. 이 날 飾船 30척으로 사신들을 강 입구에서 맞이하여 新館에 안치하였다. 이에 中臣宮地連烏摩呂·大河內直糠手·船史王平을 掌客으로 삼았다. 그러자 妹子臣이, “(臣이) 돌아올 때에 당나라 황제가 서찰을 신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백제를 지나올 때에 백제인이 조사하여 빼앗았으므로 올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군신들이 의논하여, “무릇 사신이란 비록 죽을지라도 소임을 잃지 않아야 하는 법인데, 이 사신은 어찌 그렇게 태만하여 대국의 서찰을 잃어버렸는가”라 하고, 유배형에 처하였다. 그 때 천황이 칙을 내려, “妹子는 비록 서찰을 잃어버린 죄가 있으나, 경솔하게 이를 처벌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 대국의 사신들도 이를 듣고 또한 좋지 않다고 하므로, 죄를 용서하여 처벌하지 않았다.
 
16년(608년)
新羅人들의 歸化
이 해 新羅人이 많이 귀화하여 왔다.
 
17년 여름 4월(609년 음4월 4일)
百濟의 吳 使行의 표착
17년(609) 여름 4월 丁酉 초하루 庚子 筑紫大宰가, “百濟의 승려 道欣, 惠彌를 비롯한 열 사람과 俗人 75명이 肥後國의 葦北津에 머물고 있습니다”라 아뢰었다.

 

이 때 難波吉士德摩呂, 船史龍을 보내어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는가”라고 물으니, “百濟王의 명으로 吳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 나라에 난리가 나는 바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폭풍을 만나 바다 가운데에서 떠돌아다니다가 다행히 聖帝의 변경에 도착하게 되어 기뻐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7년 5월(609년 음5월 16일)
표착한 百濟人을 본국으로 돌려보냄. 일부는 歸化
5월 丁卯 초하루 壬午 德摩呂 등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곧 德摩呂와 龍 두 사람을 다시 보내어 百濟人들을 돌보아 본국으로 보내는데, 對馬에 이르러 *道人 등 11사람이 모두 머물기를 청하자, 表를 올려 머물게 하였다. 이에 元興寺에 있게 하였다. 
 
*道人 : 『智度論』에 ‘得道者名爲道人 餘出家者未得道者 亦名道人’이라고 되어 있다. 즉 俗事를 버리고 佛法에 귀의한 사람을 가리킨다.
 
18년 봄 3월(610년 음3월)
高麗 僧 曇徵과 法定이 옴
 18년(610) 봄 3월 高麗王이 승려 曇徵과 法定을 바쳤다. 曇徵은 5經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 수 있었으며, 아울러 연자방아를 만들었다. 대개 연자방아를 만드는 일은 이 때에 시작된 듯하다. 
 
18년 가을 7월(610년 음7월)
新羅와 任那가 사신을 보냄
가을 7월 新羅의 사신 沙?部 奈末 竹世士가 任那의 사신 㖨部 大舍 首智買와 함께 筑紫에 이르렀다.
 
18년 9월(610년 음9월)
新羅와 任那가 사신을 부름
9월 사신을 보내어 新羅와 任那의 사신을 불렀다.
 
18년 겨울 10월(610년 음10월 8일)
新羅와 任那의 사신 入京
겨울 10월 己丑 초하루 丙申 新羅와 任那의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 날에 額田部連比羅夫에게 명령하여 新羅의 사신을 맞이하는 莊馬의 長으로 삼고, 膳臣 大伴을 任那의 사신을 맞이하는 莊馬의 長으로 삼았다. 그리고 阿斗河 근처의 숙소에 머물게 하였다.
 
18년 10월(610년 음10월 9일)
新羅와 任那의 사신의 朝廷拜禮
丁酉 사신들이 조정에 배례하였다. 이에 秦造河勝과 土部連?를 명하여 新羅사신을 인도하는 사람으로 삼고, 間人連鹽蓋와 阿閉臣大籠을 任那사신을 인도하는 사람으로 하였다. 모두 인도하여 南門으로 들어와서 뜰 한가운데 섰다.

 

이 때 大伴昨連, 蘇我?浦蝦夷臣, 坂本糠手臣, 阿倍鳥子臣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뜰에 엎드렸다. 그러자 양국의 사신들은 각각 두 번씩 절하고 사행의 뜻을 아뢰었다. 이에 4명의 大夫가 일어나 大臣에게 나아가 아뢰니, 大臣은 자리에서 일어나 政廳 앞에 서서 들었다. 다 마치고 사신들에게 祿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18년 10월(610년 음10월 17일)
新羅와 任那의 사신에게 연회를 베품
乙巳 사신들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河內漢直贄를 新羅 사신과 함께 먹는 사람으로 삼고, 錦織首久僧을 任那 사신과 함께 먹는 사람으로 하였다.
 
18년 10월(610년 음10월 23일)
新羅와 任那 사신의 歸國
辛亥 사신들이 의례를 마치고 돌아갔다.
 
19년 가을 8월(611년 음8월)
新羅와 任那가 사신을 보냄
(19년, 611) 가을 8월 新羅가 沙㖨部 奈末 北叱智를 보내고, 任那가 習部 大舍 親智周智를 보내어 함께 조공하였다. 
 

20년(612년)
歸化한 百濟人의 재주(山岳의 모형, 伎樂儛)
(20년, 612) 이 해 百濟에서 귀화하여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얼굴과 몸에 모두 흰 반점이 있어서 혹 白癩病者 같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긴 것을 싫어하여 바다 가운데의 섬에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저의 얼룩진 피부가 보기 싫다면 얼룩소나 말을 나라 안에서 기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또 저에게는 조그만 재주가 있는데 山岳의 모형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를 머물게 하고 써주시면 나라에 이로움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헛되이 바다의 섬에 버리려 하십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 말을 듣고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남쪽 뜰에 須彌山의 모형과 吳橋(中國風의 石橋)를 만들 것을 명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사람을 路子工이라 불렀다. 다른 이름은 芝耆摩呂라 한다. 또 百濟人 味摩之가 귀화하였는데, “吳나라에서 배워서 伎樂의 춤(고대 티벳 인도의 가면극)을 출 수 있다“고 말하였다.

 

곧 櫻井에 안치하고, 소년을 모아 伎樂의 춤을 배우게 하였다. 이 때 眞野首弟子·新漢濟文 두 사람이 그것을 배워 그 춤을 전하였는데, 이들이 지금의 大市首·辟田首 등의 선조이다. 
 
23년 가을 9월(615년 음9월)
百濟가 사신을 보냄
23년(615) 가을 9월 犬上君御田鍬와 矢田部造가 唐(사실은 隋-隋 煬帝 大業 10)에서 돌아왔다. 百濟의 사신이 犬上君을 따라 來朝하였다. 
 

23년 11월(615년 음11월 2일)
百濟 사신에게 연회를 베품
11월 己丑 초하루 庚寅 百濟사신에게 향응을 베풀었다.
 
23년 11월(615년 음11월 15일)
高麗 僧 慧慈의 歸國
癸卯 高麗의 승려 慧慈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24년 가을 7월(616년 음7월)
新羅에서 佛像을 보냄
(24년, 616) 가을 7월 新羅가 奈末 竹世士를 보내어 佛像을 바쳤다. 
 
26년 가을 8월(618년 음8월 1일)
高麗가 사신을 보내 隋의 침입을 알림
26년(618) 가을 8월 癸酉 초하루 高麗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리고 “隋 煬帝가 30만의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우리에게 격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포로인 貞公·普通 두 사람과 북·피리·쇠뇌·抛石 등 10종류의 물건과 토산물 및 낙타 1필을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29년 봄 2월(621년 음2월)
聖德太子와 高麗 僧 慧慈의 죽음
(29년, 621, 봄 2월) 이 달 上宮太子(聖德太子)를 磯長陵에 장사지냈다. 이 때에 高麗의 僧 慧慈는 上宮太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황태자를 위하여 승려들을 모아 齋會를 열었다.

 

그리고 몸소 경을 강하는 날에 서원하여, “日本國에 聖人이 있어 上宮?聰耳皇子라 하였다. (그는) 진실로 하늘이 낸 분으로, 聖人의 덕을 지니고 日本의 나라에 태어나셨다. 夏 禹王·殷 湯王·周 文王의 덕(三統)을 두루 갖추고 옛 聖人의 큰 계획을 이었으며, 佛·法·僧 三寶를 공경하고 백성의 재난을 구원하셨으니, 그는 진실로 大聖人이셨다.

 

지금 太子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나는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마음은 똑같아 쇠라도 끊을 수 있는 정도이다. 혼자 사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나는 내년 2월 5일에 반드시 죽어서, 上宮太子를 淨土에서 만나 함께 중생을 교화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慧慈는 기약한 날이 되어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두 나라의 사람들은, “上宮太子만 聖人인 것이 아니라 慧慈 또한 聖人이었다”라고 말하였다. 
  
29년(621년)
新羅가 사신을 보냄. 新羅의 表文의 시작
이 해 新羅가 奈末 伊彌買를 보내어 조공하고, 表로써 使行의 뜻을 아뢰었다. 무릇 新羅가 表를 올리는 것은 대개 이 때부터 시작된 일인 듯하다.
 
31년 가을 7월(623년 음7월)
新羅와 任那가 사신과 함께 佛像 등을 보냄
31년(623) 가을 7월 新羅가 大使 奈末 智洗爾를, 任那가 達率 奈末智를 보내어 함께 來朝하였다. 불상 1구 및 금탑과 사리, 또한 큰 觀頂幡 1구와 작은 幡 12條를 바쳤다. 이에 불상은 葛野의 秦寺에 두고, 그 나머지 사리와 금탑, 觀頂幡 등은 모두 四天王寺에 들였다.

 

 이 때 唐에서 학문을 닦던 승려인 惠齋·惠光 및 醫 惠日·福因 등이 모두 智洗爾 등을 따라 돌아왔는데, 惠日 등은, “唐나라에 머물며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학업을 달성하였으므로 불러들여야 할 것입니다. 또 저 唐나라는 법식이 두루 정비된 보기 드문 나라입니다. 모름지기 항상 왕래하여야 합니다”라고 함께 아뢰었다. 
 
31년(623년)
新羅의 任那 복속
이 해 新羅가 任那를 공격하여 任那가 新羅에 복속되었다. 이에 天皇은 장차 新羅를 치고자 大臣들에게 묻고 여러 卿들과 의논하였다. 田中臣은, “서둘러 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먼저 상황을 살펴서 (新羅의) 반역을 알아 본 뒤에 공격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시험삼아 사자를 보내어 그 사정을 엿보게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中臣連國은, “任那는 원래 우리나라의 內官家였는데 오늘날 新羅人이 그것을 쳐서 소유하였습니다. 청컨대 군대를 정비하여 新羅를 정벌하고 任那를 취하여 百濟에 부속시키십시오. (그것이) 新羅에 소속되어 있는 것보다 이익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말하였다.

 

田中臣은, “그렇지 않습니다. 百濟는 배반함이 많은 나라로 길가는 잠깐 사이에도 오히려 속임수를 씁니다. 무릇 그가 청한 바는 다 잘못된 것이므로 (任那를) 百濟에 부속시켜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결국 정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吉士磐金을 新羅에 보내고 吉士倉下를 任那에 보내어 任那의 일을 묻게 하였다. 이 때 新羅의 國王(眞平王)은 8명의 大夫를 파견하여 新羅國의 일을 磐金에게 아뢰고 또한 任那國의 사정을 倉下에게 아뢰었다.

 

그리고 “任那는 작은 나라이지만 천황의 부용국이다. 어찌 新羅가 함부로 그것을 영유하겠는가. 평상시대로 內官家로 정할 것이니 원컨대 걱정하지 말라”라고 약속하고, 奈末 智洗遲( 智洗爾)를 吉士磐金에게 딸려 보내고, 또한 任那人 達率 奈末遲( 奈末智)를 吉士 倉下에 딸려 보내어 두 나라의 調를 바쳤다.

 

그러나 磐金 등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 해에 大德 境部臣雄摩侶·小德 中臣連國을 大將軍으로 하고, 小德 河邊臣禰受·小德 物部依網連乙等·小德 波多臣廣庭·小德 近江脚身臣飯蓋·小德 平群臣宇志·小德 大伴連이름은 빠졌다·小德 大宅臣軍을 副將軍으로 하여,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新羅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 때 磐金 등은 모두 항구에 모여서 배를 띄우려 바람과 파도를 살피고 있었는데, 바로 이 때에 군대를 실은 배가 바다를 가득 채우며 수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두 나라의 使人은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 돌아가 머무르며, 대신에 堪遲 大舍를 任那의 조공 사신으로 삼아 바치게 하였다.

 

이 때에 磐金 등은, “이렇게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이전의 약속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任那의 일은 이번에도 성공할 수 없게 되었다”라 서로 말하고, 배를 내어 건너갔다.

장군들은 처음에 任那에 도착해 의논하여 新羅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新羅 국왕은 많은 군대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미리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장군들이 함께 의논하여 表를 올리니, 천황이 허락하였다. 
 
31년 겨울 11월(623년 음11월)
新羅와 任那에 보냈던 사신의 귀국. 新羅의 迎船
 
겨울 11월 磐金·倉下 등이 新羅에서 귀국하였다. 이 때 大臣이 그 상황을 물으니, “新羅는 (천황의) 명령을 받들고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나란히 사자를 파견하여 (新羅·任那) 두 나라의 調를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실은 배가 이르른 것을 보고 조공사신은 다시 돌아가 버렸으므로 다만 調만을 올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大臣은 “후회스럽구나, 너무 빨리 군대를 파견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이번에 군사를 일으킨 일은 境部臣과 阿曇連이 일찍이 新羅의 뇌물을 받았던 까닭에, 大臣에게 권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자의 뜻을 미처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정벌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처음에 磐金 등이 新羅로 건너가던 날 항구에 도착할 즈음에 장식한 배 한 척이 바닷가에서 맞이하였다. 磐金이 “이 배는 어느 나라의 영접선인가”하고 물으니, “新羅의 배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磐金이 또 “어찌하여 任那의 영접선은 없는가”라고 물으니, 곧바로 任那를 위하여 배 한 척을 더하였다. 新羅가 영접선을 2척으로 하는 것은 이 때부터 시작된 일인 듯하다. ……
 
 
32년 여름 4월(624년 음4월 3일)
百濟 僧 觀勒의 表
 
32년(624) 여름 4월 丙午 초하루 戊申 어떤 승려가 도끼를 가지고 祖父를 쳤다. 이 때 천황은 그 말을 듣고 大臣을 불러 놓고 詔를 내려, “대저 출가한 자는 머리숙여 三寶에 귀의하고 갖추어 계율을 지녀야 한다. 어찌 뉘우치고 꺼리는 바 없이 경솔하게 악역을 저지르겠는가.

이제 짐이 듣으니 어떤 승려가 祖父를 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절의 승려들을 모두 모아서 심문하고 만약 사실이라면 중벌을 내리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모든 승려들을 모아 심문하고 악역을 행한 승려 및 여러 승려들을 모두 벌하려 하였다. 그 때 百濟의 승려 觀勒이 表를 올려, “대저 佛法은 西國(印度)로부터 漢(中國)에 이르러 3백 년이 지나 百濟國에 전해져(枕流王 원년=384)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백 년이 되었을 때에, 우리 왕(百濟의 聖王=聖明王)은 일본천황(欽明天皇)이 지혜가 깊고 사리에 밝다는 것을 듣고 불상과 경전을 바쳤는데 아직 백 년이 못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승려가 아직 법과 계율을 잘 익히지 못하여 문득 악역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승려들은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악역을 범한 자를 제외한 나머지 승려들은 다 용서하고 벌하지 말아 주십시요. 이것은 큰 공덕일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이에 그 말을 좇았다
 
32년 4월(624년 음4월 17일)
百濟 僧 觀勒이 僧正이 됨
壬戌 승려 觀勒을 僧正으로 삼고 鞍部 德積을 僧都로 삼았다. 이 날에 阿曇連이름은 빠졌다을 法頭로 삼았다. 
 

舒明天皇   息長足日廣額天皇
2년 3월(630년 음3월 1일)
高麗, 百濟의 朝貢
(2년, 630) 3월 丙寅 초하루 高句麗의 大使 晏子拔, 小使 若德과 백제의 大使 恩率 素子, 小使 德率 武德이 함께 조공하였다.
 

2년 가을 8월(630년 음8월 8일)
高麗, 百濟의 사신에게 朝堂에서 잔치를 베품
(가을 8월 癸巳 초하루) 庚子 고려와 백제의 사신에게 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2년 9월(630년 음9월 4일)
高麗, 百濟 사신의 歸國
9월 癸亥 초하루 丙寅 고려와 백제의 사신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2년(630년)
三韓館 수리
이 해 難波의 大郡과 三韓館(한반도로부터 오는 사신이 묵는 숙소)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3년 3월(631년 음3월 1일)
百濟王子 豐章
(3년, 631) 3월 庚申 초하루 백제왕 *義慈가 왕자  *豐章을 들여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백제왕 義慈 : 의자왕은 641년(舒明天皇 13) 3월에 즉위하여 660년에 羅唐聯合軍에 의하여 백제가 망할 때까지 재위하였다. 그러므로 631년 당시 百濟王 義慈 云云 하는 것은 잘못이다. 혹시 舒明天皇 13년의 것이 錯簡된 것이 아닌가 한다.
 
*豐章 : 『三國史記』 권 20 과 『新唐書』 권 220 백제전에서 말하는 의자왕의 아들 夫餘?을 가리킨다. 『日本書紀』 孝德, 濟明紀에는 豐璋으로 표기하였다. 660년에 백제가 망한 후 복신과 도침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켰을 때, 일본에 있던 豐이 일본의 원군을 태운 170여척의 배를 이끌고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그 후 내부 분란과 白江전투에서 패함으로써 夫餘豐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4년 가을 8월(632년 음8월)
新羅의 送使
4년(632) 가을 8월 唐이 高表仁을 파견하여 三田耜를 보내주었는데, 함께 對馬島에 다다랐다. 이 때 學問僧 靈雲과 僧旻 및 勝鳥養, 신라의 送使 등이 그를 따랐다. 
 
7년 여름 6월(635년 음6월 10일)
百濟가 사신을 보냄
(7년, 635) 여름 6월 乙丑 초하루 甲戌 백제가 達率 柔等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7년 가을 7월(635년 음7월 7일)
百濟의 사신에게 朝堂에서 잔치를 베품
가을 7월 乙未 초하루 辛丑 백제 사신에게 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10년(638년)
百濟, 新羅, 任那의 朝貢
(10년, 638) 이 해 백제·신라·임나가 나란히 조공하였다.
 
11년 가을 7월(639년 음7월)
百濟川의 宮 造營
(11년, 639) 가을 7월 조를 내려 “금년에 큰 궁궐과 큰 절을 만들어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百濟川 옆을 궁궐터로 하여 서쪽의 백성은 궁궐을 짓고 동쪽의 백성은 절을 지었다. 또 書直縣을 大匠으로 삼았다.

 

11년 가을 9월(639년 음9월)
新羅 送使의 入京
가을 9월 唐에서 학문을 배우던 승려 惠隱·惠雲이 신라의 送使를 따라 서울에 들어왔다. 
 
11년 겨울 11월(639년 음11월 1일)
新羅 사신에게 朝堂에서 잔치를 베품
겨울 11월 庚子 초하루 신라 사신에게 朝堂에서 잔치를 베풀고 冠位 1級을 주었다.
 
11년 12월(639년 음12월)
百濟川의 9층탑
(12월) 이 달 百濟川 옆에 9층탑을 세웠다. 
 
12년 겨울 10월(640년 음10월 11일)
唐에 간 學問僧, 學生이 新羅, 百濟의 사신과 함께 옴
(12년, 640) 겨울 10월 乙丑 초하루 乙亥 당에서 학문을 배우던 승려 淸安, 학생 高向漢人 玄理가 신라를 거쳐 이르렀다. 백제·신라의 조공사신이 함께 따라 왔는데, 그들에게 각각 官爵 1級을 주었다. 
 
12년 10월(640년 음10월)
百濟宮
이 달 *百濟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百濟宮 : 舒明天皇 11년 7월의 조칙에 의하여 百濟川 옆에 지은 궁궐로 지금의 奈良縣 橿原市 飯高町에 그 옛 터가 있다.
 
13년 겨울 10월(641년 음10월 9일)
百濟宮에서의 天皇의 죽음
13년(641) 겨울 10월 乙丑 초하루 丁酉 천황이 百濟宮에서 죽었다.
 
13년 10월(641년 음10월 18일)
百濟大殯-丙午 (百濟)宮의 북쪽에 시신을 모셨다. 이것을 百濟大殯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