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한반도 관련 기록들.1 -신공황후.5. 일본서기 중에서
다음의 글은 김태식교수의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任那問題를 包含하여>
<4世紀の韓日関係史-広開土王陵碑文の倭軍問題를 中心으로>
<4∼5世紀 國際情勢와 加耶聯盟의 變動>등의 논문과 다른 분들의 글을 발췌하고 일부 편집한 내용이다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가) 荒田別、鹿我別를 将軍으로 하여、久氐등과 함께 軍士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卓淳国에 이르러 新羅를 습격하려고 하였다。그때 누군가가 「兵士의 数가 적어서 新羅를 격파할수 없다. 다시한번 沙白과 蓋盧를 보내 軍士를 증원할 것을 요청하라고 하여, 木羅斤資와 沙沙奴跪가 명을 받아 沙白、蓋盧와 함께 왔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比自火本·南加羅·喙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강진, 또는 남해]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忱彌多禮[ 강진]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肖古(근초고왕)와 왕자 貴須[근구수왕]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比利. 辟中. 布彌支· 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父子와 荒田別·木羅斤資 등이 意流村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辟支山[전북 김제]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古沙山[전북 古阜지방]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 년 만 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千熊長彦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久氐 등을 딸려서 보냈다.
다음 해 봄에 장군이 일본으로 돌아와서 조회하면서 백제의 구저 등으로 하여금 와서 조빙하게 하고, 다사성(多沙城)을 더 내려 주어서 오갈 때의 길을 역(驛)으로 삼게 하였다. 또 한국(韓國)의 궁창(宮倉)을 정하여 임나(任那)의 왕을 궁창수(宮倉首)로 삼은 다음,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과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개의 큰 고을을 임나에 붙여서 궁장(宮藏)으로 삼게 하였다다.---------- 일본서기의 기록중에서....
[神功皇后 섭정]49 年(369년)春3에
1.신라의 정벌
2.가야 7국의 평정
3.古奚津, 南蠻 忱彌多禮 복속
4.比利. 辟中. 布彌支· 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했다고 한다.
1.왜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정벌했는가에 대해
①<삼국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366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368년에 신라에 명마 두 마리를 보내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한편, 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가야 소국의 하나인 탁순국 국왕에게 부탁하여, 367년에 백제의 사신이 신라의 사신과 함께 왜국에 도착함으로서 백제와 왜 사이에 최초로 국교가 수립된다.
백제의 이러한 남방 안정책은 369년부터 이어지는 고구려와의 전투를 위한 것이었고 신라와의 이 화친이 깨어졌다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화친은 상당 기간 유지되어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를 밝혀 주는게 독산성주의 망명사건이다.
[ 373년에 백제가 개성 부근의 靑木嶺에 성을 쌓자 禿山城主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났으며 신라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을 두고 백제와 신라가 보이는 태도가 의미심장하다. 근초고왕은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보내시오.’라는 국서를 보냈다]
물론 신라는 이 요청을 거부했지만, 이 국서 중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난다’는 구절은 366년과 368년 맺어진 화친은 이 시점까지(373년)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369년에 백제-신라간에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백제는 369년 雉壤(황해도 백천) 전투와 371년 平壤城 전투에서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살해하였으며, 372년에는 東晉과의 공식적 교류를 시작하였다. (http://dk7117.egloos.com/v/1997376 에서 발췌)
②일본서기에 "목만치는 아버지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부인을 얻어서 낳은 아이이다[木滿致者, 時木羅斤資討新羅時, 聚其國婦, 以所生也]."라고 한 기록에서 '신라를 칠 때'라는 시점을 神功 황후 섭정 46년인 서기 369년에 "탁순에 모여서 신라를 깨뜨렸다[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는 것과 같은 사건으로 해석할 때 목만치가 한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된 후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을 도와 웅진으로 도읍을 옯기는 475년까지는 무려 106세나 산 것처럼 해석되어, 두 사람 사이에는 처음부터 기록된 것과 같은 부자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 아울러 이러한 점을 볼 때 《일본서기》신공황후조의 기록은 전연 허구의 전설로서 실제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고 볼수있다-三周甲인하
위 [神功皇后 섭정]49 年(369년)의 일본서기의 기록은 사실성이 희박하고 설화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관념은 369년이 아니라 663년에 백제부흥군을 돕던 왜군이 白江口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한 후에 실제로 이를 주도했던 여왕인 齊明을 모델로 삼아 조작되어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 설화가 신라에 대한 강한 복수심을 표현하고 있고, 고구려・백제・신라를 ‘삼한’으로 부르는 7세기 후반 이후의 용어를 답습하고 있다.
2.왜와 백제가 연합하여 가야 7국을 평정했는가에 대해
(1)왜가 가야7국을 평정했는가?
가야 7국은 比自㶱(경남 창녕), 南加羅(경남 김해), 㖨國(경남 창녕군 영산면), 安羅(경남 함안), 多羅(경남 합천), 卓淳(경남 창원), 加羅(경북 고령)을 말한다.
가야와 倭는 2~3세기 이래 4세기까지 상호간에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 그 관계는 4세기 후반에 양 지역의 정세의 변동, 즉 포상8국의 난으로 약화되었던 가야연맹이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하여 再統合하고, 일본열도의 畿内의 河内地域을 중심으로 한 新興勢力의 출현에 의하여 더욱 강화 되었다 . 両者의 交流関係는 전통적인 鉄素材와 威勢品의 交易에 더하여、 加耶의 軍需物資의 輸出 및 倭의 軍事力動員의 問題가 중요시되었다.
왜는 5세기까지 철을 생산 제조할 수 없었고 가야로부터 철을 수입했다.
한편 4세기의 일본열도는 소국연맹체의 사회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의 연맹체는 주도 세력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는 주로 북부 九州 세력이 철기 제작에 쓰이는 가야의 板狀鐵斧를 독점하였으나, 古墳時代 전기가 시작되는 3세기 후반에 畿內의 邪馬台國이 近畿 각지와 瀨戶內海 연안 각지의 여러 세력을 결집하여 가야와 철 자원을 둘러싼 상호작용의 주체로 대두되었다.
神功皇后紀의 섭정 46년(246)부터 52년(252) 사이에 나오는 일련의 기사는 왜에 의한 사료 조작이 너무 심한데다가 그 사건이 의미하는 결과가 한일 양국간에 워낙 치명적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7국 평정 記事는「7지도, 7자경등의 献上의 縁起로서 神功紀 編者가 첨가한 작문에 지나지 않는다.
가야 7국의 국명도 3~4세기 당시의 가야국명이 아니고 5세기 이후의 후기가야시대의 국명을 반영하고 있다.
(2)가야평정의 주체가 백제라는 설-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역할을 담당한 것은 백제라고 하는 설이다.
가야방면에서는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가 왜병과 연합하여 비자벌(比自㶱)⋅남가라(南加羅)⋅탁국(㖨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7개국을 평정한후, 여세를 몰아 남만 탐미다례(南蠻 忱彌多禮)까지 정벌하고,
다른 쪽, 지금의 호남방면에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인,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 의 4읍은 근초고왕과 근구수(近仇首) 부자가 직접 군대를 지휘한 것이라고 하는 설.
가야7국을 평정한 것은 왜가 아니고 백제다라는 설에 대해-
‘백제장군 목라근자’가 나오는 것을 계기로, 가야 7국 평정의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교체하여 이를 369년 백제에 의한 가야 정벌로 보는 견해도 있고, 혹은 그 연대를 429년으로 늦추어야 하나 그 역시 木羅氏 家系傳承의 그릇된 주장일 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기사 전체를 후대 사실의 반영이라고 하여 전면 부정하는 설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6세기 전반 欽明紀 2년(541)의 기사의 주석에 나오는 백제 聖王의 회고에 의하면,「옛날、우리 先祖인 速古王・貴首王의 때에、安羅・加羅・卓淳旱岐등이 처음으로 使臣을 보내 서로 통교하고, 서로 친하게 지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기록이 4세기 후반 백제와 가야의 관계를 엿볼수 있게 하는 중요한 사료로서 존재사실이 분명해 보이고, 백제가 무력으로 가야를 정복한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신공기 49년 조의 기사는 369 年 또는 429年에 百済나 倭가 軍事征伐을 断行하여、加耶地域을 征服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史料로서는 인정할 수 없고 이 記事는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전반의 어떤 시기에 百済가 우수한 선진 문물을 가지고 왜와의 교역을 모색하면서, 加耶지역의 親新羅的 일부 小国들과 全南의 마한계통 소국들과 처음으로 通交하여 백제 쪽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고 이를 토대로 가야와 밀접한 교역을 이루고 있던 왜와 연결된 것임을 왜국의 시각으로 과장 왜곡한 것이다. 고고학적인 묘제나 유물로 보아서도, 4세기 후반의 낙동강 유역 목곽묘 문화나 전남 지역 옹관묘 문화는 한강 유역 백제의 적석총 문화와 서로 다른 독립적 문화권이었다. 일본 고분시대 전기의 평화적이고 주술적인 前方後圓墳 문화가 한반도와 다른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신공기 49년조 기사는 이른바 ‘任那日本I府’라는 용어는 물론이고 그 성립과도 전혀 관계없는 기사이다(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 - 金泰植)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신라를 쳐서 얻었다는 7국의 위치로서, 이들은 모두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고, 浦上八國에 속했던 서부 경남 지역은 여기서 빠져 있다. 왜군이 백제장군과 함께 신라를 쳐서 이 7국을 정벌했다는 것은, 4세기 전반 포상팔국의 난 이후 신라 문물을 중개하던 낙동강 연변의 가야 동부 지역을 백제 문물의 중개 지역으로 포섭했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4~5世紀 國際情勢와 加耶聯盟의 變動-金泰植]에서 발췌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교역체계로서 백제와 연결되었다고 하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뿐이다.
加耶와 倭는、전통적으로 鉄을 통하여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日本列島의 鉄 생산은 韓半島 南部에 비해 500년 이상 늦어서 일본에서 제철생산이 이뤄졌던 5세기 후반까지 倭는 가야로부터 交易을 통하여 鉄素材를 입수하여 이것을 鍛冶過程을 거쳐 鉄器를 생산했다. 그러나 金海의 加耶国이 鉄을 倭에 輸出하여 주로 무엇을 수입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加耶인이 왜로부터 노동력을 수입한 것으로 보는 자도 있다. 즉 4세기 전반에 金海나 부산등에서 발견되는 北九州 및 山陰地域의 土師器는, 日本列島로부터 労働力으로서 제공된 倭人의 1世代가 가지고 있던 土器라는 것이다.
三国志』魏書倭人伝의 기록에서도, 2~3世紀에 倭의 対中国 交易商品은 지역내에서 생산된 특정물품보다도 人的資源인 男女生口,즉 奴婢에 해당하는 労働力이 대표적이었다.
土師器의 出土地域 分布를 보면, 倭人들이 加耶에 있어서 苦役이었던 製鉄作業에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鉄素材의 需要者인 倭가、그 鉄素材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해 달라고 하는 가야의 거래조건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4세기 후반에 가야국이 鉄素材 供給의 대가로서 왜국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 가야는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서 성장하는 신라와 패권을 다투고 있어서 그 과정에 있어서 쉽게 동원할 수 있는 倭의 軍事力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百済는 加耶와의 교섭과정에서 加耶-倭間의 人的・物的 資源交易의 伝統을 확인하여、이것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여 자신과 高句麗의 戦争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三国史記』新羅本紀에 나타나는 、新羅를 侵攻했던 倭人・倭兵은、시기적으로 제한되어 있고、대개 、季節的으로 掠奪을 일삼는 海賊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 중의 일부는 가야의 지원을 받은 왜군이 가야의 영역에 들어가 신라를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加耶는 4世紀 후반에 대외적으로 百済 및 倭와 연결하여 다시 통합 발전하여, 대내적으로는 기록이 별로 없지만, 金海 大成洞 古墳群과 慶州 皇南洞109 号墳을 비교하면 、新羅에 뒤지지 않는 권력집중을 상정할 수 있다.
日本列島에 있어서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적 통합이 일찍 달성될수 있었던 원인은, 일본 本州 오지에 있는 畿内 首長 連合勢力이 반도남부와 통교하기 위하여 、瀬戸 内海 連合勢力이 北九州까지의 통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그 지역에서는 고대 국가권력의 성장에 필수인 철이 거의 생산되지 않고 이것을 외부로부터 획득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 大首長의 권위와 능력을 주변의 다른 수장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외래의 威勢品이 필요했었다.
日本열도는 266년부터 413년 까지 中国史書에 어떠한 기록도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九州로부터 瀬戸内海를 거쳐 畿内까지 前方後円墳이라고하는 墓制가 출현했다. 4世紀는 대부눈 古墳時代 前期에 해당한다. 箸墓古墳은 최초의 前方後円墳으로서、3世紀 中葉、卑弥呼가 죽은 직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그후 일본 열도의 각지의 首長은、그들이 구성된 政治連合의 구성원이 죽었을때 공통의 葬送儀礼를 하여 함께 묘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前方後円墳의 존재양태를보면, 이와같은 정치연합은 畿内의 大和政権을 중핵으로 하여 瀬戸内海沿岸各地와 北部九州를 포함하여, 이것들은 鉄鋌으로 대표되는 前方後円墳의 被葬者別로 체현되는 地域権力과 畿内의 政治센타가 병존하고, 그 신분제는 출신과 실력을 기초로하여 상호 승인하는 관계였을 것으로 보인다.
韓半島의 鉄資源과 각종 선진문물의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결속한 首長連合(同盟)- 이 시기의 倭王権의 地方支配는 吉備、出雲、筑紫와 같은 지역의 최고수장을 서열화하는 것에 그치고, 각각의 하위수장은 당해지역의 大首長에게 지배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고분시대에는 국가의 중요한 속성이라고 할수 있는 관료기구가 발달하지 않고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단계라고 보지않고, 이시대의 수장은 다양한 사회와 부족사회의 단순한 집합체이며 각지역의 수장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거기에 참여한 각 사회는 상당히 자율적이었다. 수장연합은 개별의 국명을 가지고 있는 소국규모의 다양한 단위의 정치체가 세력의 크기에 따라 서열화되어 일상교역과 같은 対外関係는 단독의 소국별로 행하고 특별한 대규모의 교역이나 전쟁과 같은 대규모의 행동이 필요할때만 맹주국이 각 소국의 양해를 얻어서 통솔하는 소국연맹체를 의미한다.
한편、文献史学의 首長制社会論에서는 倭王武의 上表文과 刀剣銘을 근거로 하여 5세기 후반의 雄略期를 고대국가 성립의 중요한 지표로 잡고있다.
中国史書에 일본관련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후 5세기 후반까지 왜의 5왕이 중국 남조와 조공관계를 유지했다. 5세기에 들어서 河内지역에 거대정권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로부터 유입된 집단이 통합되었다는 것과 관련되지만, 그 통합의 계기나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4세기 말 5세기 초에 가야지역으로부터 일본열도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4세기 말 5세기 초에 김해등 낙동강 하류유역, 즉 금관가야로부터 일본열도 각지에 馬具類와 金属加工術、 陶質土器등이 流移民과 함께 전해졌지만 、金属加工術과 陶質土器의 경우 、그 당시에 工人이나 製作技法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
金海 및 釜山등과 같이 洛東江 下流域 前期加耶連盟의 중심지역이고 、百済 및 倭와 연결되어 국제관계에 휩쓸리면서 적극적으로 고구려 및 신라에 대립했기 때문에 그 패배직후인 5세기 초에는 流移民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 이 시기는 金海중심의 前期加耶와 高霊中心의 後期加耶 間의 転換期에 해당한다. 가야의 流亡民은 慶尚南北道의 内陸山間地域으로 도망갔겠지만 、가까이 교류하고 있던 일본열도로도 상당한 수가 도망갔을 것이다. 5世紀이후、日本 古代文化의 폭발적인 발전은 日本列島 住民의 努力、및 그 문화의 内的成長에 따른 것도 있지만 、이것을 촉발시켰던 것은 본질적으로 高句麗対 百済의 対決이라고 하는 한반도 정세에 연동하여 성립한 가야의 지원과 가야지역의 상황변동에 따라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가야의 대외교섭] 노중국(계명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에서 발췌
日本의 어떤 考古学者는 이러한 畿内의 倭政権의 지리적인 상황을 전제로하여 、倭는 한반도 남부의 철을 안정되게 입수할 물자 유통 시스템을 장악하기 위하여 중앙정권 차원에서 加耶와 百済가 원하는 동맹에 응하여, 한반도 남부사회에 정치적 또는 군사적으로 적극적 개입을 했다고 보고있다. 이것은 문헌사료의 분석에 의한 고전적인 임나일본부와는 표현형식이 다르지만, 「掌握」또는 「政治的介入」등의 용어를 통하여 적어도 가야에 대하여 왜가 우위에 서서 군사적, 정치적인 관계를 상정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러나 4世紀、즉 日本의 古墳時代 전기 前方後円墳으로부터 나온 遺物은、 銅鏡、 碧玉製鋤形腕輪[鍬形石]과 車輪型腕輪[車輪石]등과 같이 際者的인 성격을 띤 副葬品을 編年基準으로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때 4세기의 일본열도의 지배권력은 실질적인 무력에 기반을 두고 있지않고 儀礼的인 것이엇다. 그러므로 그 통치체제도 관료제에 기반을 둔 엄격한 것이 아니고 각 지역세력의 독립성이 온존된 채로 서열화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실질적인 무력에 기반을 둔 권력이 아니고, 4世紀의 日本列島의 住民 고유의 정신세계나 사회질서에 있어서만 통용되는 권력이 한반도까지 미쳤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당시 왜와 한반도의 무장체계를 비교해 보면,
①高句麗의 武装体系 -
発掘遺物-쏘는 兵器[射兵]인 鉄鏃과 긴 병기[長兵]인 鉄鉾가 많고, 그 다음으로 짧은 兵器[短兵]인 環頭大刀와 鉄剣 이 출토되고 있다. 14基의 高句麗 古墳壁画에서 나타나는 무기를 정리해보면, 4~5世紀의 高句麗의 무기의 비율은 鉄鉾 46.85%、 弓 16.78%、 環頭大刀 10.49%、鉄剣 2.99%、 短刀 1.39%로서、鉄鉾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3세기 이전、漢代와 같은 刀를 주로 하는 것으로부터 4~5세기는 重装騎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鉾중심의 武器体系가 확립되고 刀는 보조수단으로 사용되어 진 것을 반영하고 있다. 고구려의 군대는 4세기 중엽에는 札甲과 冑(兜)을 착용한 보병으로 부터 重装騎兵-鉄甲을 두른 말을 타고, 鉄鉾을 가진 기병으로 가는, 보병과 기병이 조화를 이룬상태였지만, 5세기에 들어서는 전체가 기병을 주로 하여 운영된 것을 알수 있다.
그리하여 400년 당시, 가야에 원정한 고구려의 歩騎5万의 양상은 安岳3号墳과 徳興里 薬水里 고분에 나타나는 행렬도의 중간적인 모양, 즉 보병과 기병이 병존하지만 、 重装騎兵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강화된 상태였다고 추정된다.
②百済의 武装体系 -
3세기의 것은 断面 렌즈型의 鉄鉾와 다양한 형식의 鉄鏃이 중심이 되고 있고 일부 環頭大刀가 있어, 『三国志』나『晋書』의 기록과 대개 부합한다. 그러나 3세기 말~4세기 전반에는 찌르는 기능을 주로하는 鉄鉾가 출현하고, 4세기 후반에 鉄鉾는 大・小形으로 기능적인 분화를 하고, 刀는 装飾大刀도 나타나지만、騎乗戦을 위한 実戦的인 木柄刀가 補助武器로서 보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백제에서도 騎乗馬具의 확산에 따라서 이전의 보병중심으로부터 騎兵・歩兵의 兵種이 分化編制되지만、騎兵의 경우、高句麗와 같은 重装騎兵보다는 軽装騎兵이 主였을 가능성이 높다.
③加耶의 武装体系-
加耶지역의 경우에는 、3세기 후반 이후、金海 大成洞 古墳群、釜山 福泉洞 古墳群등에서 騎乗用 実用 馬具와 鉄製甲冑、공격용 철제 무기등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4세기의 가야의 馬具는 대부분이 棒状의 銜留가 붙은 鑣轡였으며 、鉄棒을 꼬아서 만든 2連式의 銜과 긴 引手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重装騎 馬戦術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던 동북 아시아의 여러가지 馬具 제작기술을 결합하여 개량한 것이다. 4세기 후반에는 木心 鉄板 被輪 鐙子와 하트형의 馬帯장식[心葉形杏葉]도 출토하여、重装騎馬의 戦術이 가능하게 되고, 5세기 초에는 그것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加耶의 騎馬武装은 3세기 말에 이 지역에 들어왔던 북방주민의 문화를 토대로하여 4세기에는 이 지역에서 변형된 것이 보인다.
加耶의 무기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전반에 걸쳐서 공격용 무기가 대단히 발달하여 鉄鉾는 鉾身의 幅이 좁게되고, 断面이 稜形으로 제작되고、鉄鏃도 鏃의 무게를 증대시켜 長頸式으로 개량시켜, 둘다 人馬에 貫通했을때의 殺傷力을 극대화시켰다. 이것은 4세기에 들어서 가야지역 내부의 소국간의 , 또는 신라와 가야간에 격렬한 전쟁이 일어나서, 이것에 대응하여 지배층도 전투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치명적인 무기의 개발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4세기의 金海 大成洞 遺跡은 영남지역에 있어서도 더욱 빠른 단계에 甲冑와 馬具를 갗추고 、공격용 무기의 다종, 복잡한 副葬品을 통해 、「武装의 최상급 유적이 등장」한 상태인 것을 나타내고、그 인근의 상급, 및 중급의 유적에 있어서도 武装保有者、즉 半 専業的 常備軍이 존재하여 、加耶의 지배세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군사동원체제를 갗추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④倭의 武装体系-
百済나 加耶에 비교하면, 日本 列島에서는 4세기代에 소급할 수 있는 금속제 馬具가 一点도 출토되지 않고、5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加耶로부터 개별적으로 수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日本의 古墳時代의 馬具에 관한 研究中村潤子는 5세기 전반의 제1차 도입기(古式)에 전해졌던 한반도 낙동강 하류유역의 馬具는 결국, 일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끝났으며, 5세기 후반의 제2차 도입기(新式)에 剣菱型 또는 扁円剣尾形杏葉과 字形鏡板으로 상징되는 陜川 玉田 계통의 馬具가 들어와、그것이 처음으로 일본에서 계승 발전했다고 말한다. 즉, 일본에서는 4세기 代의 기마문화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甲冑의 場合-、橋本達也-
、日本의 古墳時代 初期에 나타나는 小札革綴冑은 中国系譜의 舶載品이며
、前期中葉 이후(4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竪矧板革綴短甲과 方形板革綴短甲은 한반도 남부의 縦長板釘結板甲의 영향을 받아서、日本에서 만들어 진 것이고
、古墳時代의 中期中葉(5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鋲留技法의 板甲、札甲[掛甲]、眉庇付冑등은 한반도의 工人이 日本 列島로 건너가 、새로운 체제에 의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上述의 小札革綴冑은 극소수의 최고위층의 威勢品이었던 것에 지나지 않고、竪矧板 및 方形板革綴短甲은 加耶의 板甲을 그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전체의 構造나 製作技法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즉, 日本열도의 4세기의 甲冑文化는 미숙한 것이었다.
、倭는 4세기 代에 短剣、短刀、얇은 両刃槍등 鉄鏃등의 무기를 주로 사용하고、5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攻撃具의 주무기로서 長刀를 채택한 정도였다. 얇은 両刃槍과 鉄鏃은 어느정도의 甲과 盾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리하여 、倭의 武装은 일부의 射兵이 付加되어 있지만,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短兵器가 主流로서、실전적인 무기로서라기 보다는 과시적인 威信財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보인다. 高句麗・百済・加耶에 있어서 騎馬武装과 관련하여 성행하고 있던 主要武器인 銎部를 가진 鉄鉾은 最後까지 채용되지 않았다.
당시에 고구려의 무장체계는 쇠투겁창 중심의 重裝騎兵과 步兵이 조화를 이루는 단계에서 밀집대형 騎兵隊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것이었다. 가야의 무장체계는 살상력이 극대화된 단면 마름모꼴 쇠투겁창과 長頸式 쇠화살촉으로 개량되어 있었고, 防護具도
이에 대응하여 철제 종장판 釘結 판갑옷으로 전환되었으며, 목심철판피 발걸이와 하트모양 말띠드리개도 보유하여 중장 기마전술의 구사가 가능한 수준의 것이었다.
반면에 왜의 무장체계는 단검, 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鈹]과 쇠화살촉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 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서,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위세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
다. 또한 4세기 후반에 일부 나타나는 일본열도의 수신판 혁철 판갑옷[竪矧板革綴短甲]과 방형판 혁철 판갑옷[方形板革綴短甲]은 한반도 남부의 종장판 정결 판갑옷[縱長板釘結板甲]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나, 가야의 판갑옷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여 전
체 구조나 제작 기법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미숙한 것이었다.
그 결과 가야를 매개로 하여 동원된 왜군들은 위와 같은 무장 수준의 차이로 인하여 한반도 내에서 독자적인 행위를 하기 보다는 가야군대의 하급단위로 편제되어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야의 의도에 따라 對新羅 戰線에 투입되기도 하고 백제와 가야의 교섭에 따라 고구려와의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였으니, 실상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倭賊’ 또는 ‘倭寇’는, 가야군을 주력으로 삼고 있으면서 왜의 원군이 일부 가세된 가야 -왜 연합군이었다
4세기의 倭가 그 정도의 무기밖에 갗추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유효한 생산기술의 무지, 철기 생산기술의 뒤떨어짐, 加耶의 전략적인 기술 및 무기의 반출통제등도 영향을 미쳤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일본열도가 선진적인 외부세력과의 격렬한 전투경험이 없었고 、弥生時代 이래의 평화적이고 儀礼的인 사회분위기 가운데서 서로 신하로서 굴복하는 것에 만족하는「足相臣服」의 전통이 아직 유지되고 있어 그 이상의 치명적인 무기개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4세기 末까지 高句麗와 加耶 및 倭의 馬具、甲冑、武器의 문화의 양상을 이렇게 비교해볼때、高句麗는 鮮卑族의 前燕과의 실전을 치루면서、이미 重装騎兵으로 대표되는 선진적인 기마무장이 조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단계였다.
加耶도 이미 4세기에 일부 상층부를 중심으로 断面稜形鉄鉾과 縦長板釘結板甲을 주로하는 선진 무장체계를 갗추어、重装騎兵戦 전술을 활용하고 있었지만 이것을 이용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서 조직적인 戦備体系를 구축한다던지 또는 효율적으로 운용한다던지 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한편 倭는 내부적으로는 2세기 후반에 장기간에 걸친 대란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아직 평화적이고 주술적이었다. 4세기의 왜는 지역세력 상호간의 질서를 존중하는 형태였으며 전반적인 무장체계도 重装騎兵戦術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4세기에 한반도 남부는 百済、加耶、新羅로 분열하여 있고, 일본열도는 교역의 필요성 때문에 畿内地域을 중심으로 일원적인 권위가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그 권위 자체가 儀礼중심의 한계성이 있어 전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馬具、甲冑、武器의 격차가 큰 상태였기 때문에 왜가 가야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가야에서는 빠르게는 기원전 1세기, 늦어도 기원후 2세기부터는 철을 量産하고 있었는데 비해 일본열도에서는 5세기 후반까지 철을 거의 생산할 수 없었다. 이것은 가야가 제철기술을 일본열도에 전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일본의 畿内政権이 가야를 제압할 수 없었던 증거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가야와 왜의 사이에 긴밀한 우호관계에 기초를 둔 문화교류는 4세기 말에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가야를 지원하고, 교류하고 있던 백제가 4세기 말에 旧 帯方地域을 둘러싼 고구려와의 30년 전쟁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함으로서 가야와 왜 사이의 교류형태에 주목하여 倭兵을 대거 동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加耶는 百済로부터 선진문물을 제공받는 입장에 있어서, 교역을 중시하는 가야연맹의 정치적 결합은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 컸기 때문에 가야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前述한바와 같이 당시 왜군의 武装体系는 重装騎兵을 주로하는 高句麗軍은 물론이고、断面稜形鉄鉾과 縦長板釘結板甲을 主로하는 加耶軍의 武装体系에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短剣과 얇은 鉄鏃을 主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가야를 매개로 하여 동원된 倭軍은 武装水準의 차이 때문에 、韓半島内에서도 독자의 행동을 하기보다 가야, 또는 백제의 군대의 하급단위로 편제되어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加耶는 倭軍이 유효한 기능을 발휘하도록 , 결국 자신을 돕는 왜군의 무력강화를 위하여 때로는 加耶의 陶質土器와 鉄器 및 甲冑에 関連된 工人을 倭国에 援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미 4세기 후반에 重装騎馬戦術까지 구사할수 있었던 加耶의 軍事装備의 製造基盤은、倭国에 대하여 상대적 우위에 있었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가야는 왜의 군사력을 용이하게 이용하려고 하는 목적으로 왜국에 工人을 파견하여 加耶의 戦争 後背基地로서 개발하였고, 日本의 河内地域의 新興勢力은 加耶의 経済的、技術的 支援을 찬스로 잡아 軍事力量の強化、및 軍隊派遣에 힘을 쏟아 부었다.
加耶의 중개능력은 富와 技術과 武力을 모두 갗춘것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며 단순히 백제와 왜간의 교역을 위한 지리적 편리성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金海의 加耶国의 우월성은 鉄生産과 鉄器製作技術과 武力의 측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金海大成洞 2号墳으로 부터 出土된 대량의 鉄鋌과 縦長板釘結板甲등의 유뮬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 김해 부산등의 加耶古墳으로부터 騎馬武装에 관련된 유물이 대량으로 나타나는 것에 주의를 요한다. 이러한 점은 가야가 백제를 통하여 旧帯方地域、즉 黄海道方面과 교역을 할수 있게 되고, 또 계속해서 이 지역에 있어서 高句麗-百済間의 戦争의 여파에 의해 발생했던 流移民을 수용할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結局、加耶連盟은 4세기 후반에 다시 金海의 加耶国을 중심으로 하여 일원적으로 통합되어 、百済・倭間의 仲介地로서 안정적인 교역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즉 広開土王陵碑文이나『三国史記』強首伝에 보이는 「任那加羅(任那加良)」이라고 하는 명칭은 、金海의 加耶国을 중심으로 한 前期 加耶連盟의 4세기 후반 당시의 이름으로서 이 명칭의 기원은 昌原의 任那国과 金海의 加耶国의 合称이었다. 이 시기에 倭는 古代国家의 건설과정에 있어서 加耶의 鉄을 필요로 하고, 加耶는 洛東江 流域을 둘러싼 신라와의 항쟁과정에서 倭의 人力、특히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한동안의 긴밀한 상호교류가 성립할 수가 있었다.
(3)인명과 지명
沙白、蓋盧、木羅斤資、沙沙奴跪 등의 인명과 比自、南加羅、国、安羅、多羅、卓淳、 加羅、등의 지명, 古奚津、南蠻忱彌, 多禮등의 지명표기는 일본측의 자료로 보이지는 않고 이러한 자료들이 『百済記』의 원전으로부터 나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자료를 전부 신뢰할 수는 없고, 백제중심적인 과장과 일본본위의 改変, 후시대의 용어들을 배제하면서 진상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①百済에서 편찬된 某種의 史料가 있고、
②백제가 멸망한 후 百済遺民이 이것을 一部 再編하여 日本 朝廷에 提出하고, ③『日本書紀』편찬자가 이것을 전반적으로 潤色하므로써 『日本書紀』의 百済関連記事가 성립했다고 하는 総合的観点、즉 三段階 編纂論이 통설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리하여 百済三書 記事의 史料的 価値를 과도하게 신뢰하는 것은 위험하다. 百済三書의 人名이나 地名에 사용되어진 字音假名字는 모두 『万葉集』과 같은 推古朝遺文의 表記法과 높은 근사성을 보이고 있다던가 、百済로부터 망명해온 百済人 또는 백제왕족의 후예의 씨족이 7세기 말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資料중에서 百済가 過去 日本에 협력했던 흔적을 조작, ・再編集하여、『日本書紀』편찬의 修史局에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신공황후 편의 다른 기록들처럼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 이전이나 이후에 있었던 인물들을 끌어다 붙여놓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井上秀雄는 『日本書紀』의 原典研究를 통하여、 6세기 이전의 문헌사료는 불확실하고 神功紀의 『百済記』관련기사는 欽明・継体朝의 投影으로서 、『百済記』자체는 百済가 6세기 중엽에 大和朝廷에 迎合하여 、군사적 원조를 얻으려고 일본에 제출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하여 4세기의 사건을 알수가 없다고 한다.
신공기를 통하여 4세기 후반의 가야와 관련된 사실로서 인정 할 수 있는 것은 창원의 卓淳国(=彌烏邪馬国)、 즉 任那의 중개활동에 의하여 백제와 왜가 연결되었다는 것 뿐이다. 神功紀49 年条의 記事는 継体紀의 後代의 事実을 연대적으로 소급한 것으로서 대략 6세기 전반에 백제의 의도를 나타내는 継体紀 記事가 중복하여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3.古奚津, 南蠻 忱彌多禮 복속문제
忱彌多禮(전남 해남) 南蠻은 남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근초고왕때 마한의 잔여세력을 복속한 것으로, 三国史記 百済本紀 温祚王 26・27 年条의 馬韓 滅亡記事와 同36 全北의 金堤-古阜線까지가 실제로 백제의 영역으로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全南의 忱彌ノ多禮(康津郡 兵営面또는 海南郡 縣山面)地域에 百済가 第二의 対倭交易의 仲介基地를 設定한 것으로부터 나왔다고 본다.
4.比利. 辟中. 布彌支· 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
比利(전북 군산, 전주 혹은 나주라는 설도 있음), 辟中(전북 김제, 寶城이라는 설도 있음), 布彌支(전남 담양, 공주라는 설도 있음 ), 半古(전남 나주시 반남면) 등의 네 읍이 저절로 항복하였다는 것이다 - 백제 近肖古王(346 ~ 375)이 馬韓을 멸하여 전라도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라는 설.
서기 498년 - 백제 동성왕이 무진주(현재의 광주)까지 친히 내려왔다.
탐라국이 백제 동성왕에게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이를 직접 치려고 동성왕이 무진주(武珍州, 광주)에 이르니, 탐라국에서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탐라 정벌을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近肖古王(346 ~ 375)때 마한의 잔존세력인 比利. 辟中. 布彌支· 半古·의 4읍이 항복했으나 백제는 이를 무력을 사용하여 점령하지는 않았고 그들에게 자치권을 일임하고 있다가 그 후 동성왕때 이르러서야 실제로 지배하에 둔 것으로 보인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