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일본의 역사- 한반도 관련 기록들.1 -신공황후.2

청 설모 2013. 8. 23. 14:01

1.신공황후의 新羅征伐

 

仲哀 9년 겨울 10월(200년 음10월 3일)

신공황후가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왕 波沙寐錦이 항복하여 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金銀·彩色綾羅·縑絹을

배 80척에 싣고 官軍을 따르게 했다. 高麗와 百濟의 두 나라 국왕이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內官家屯倉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三韓이다.

 

 

일본이 신라와 삼한을 복속시키고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만들어 한반도를 200년간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寐錦은 이사금과 같은 왕호의 일종으로 광개토왕비문, 중원고구려비문, 지증대사비문, 봉평신라비문에도 나온다.

하지만 이 왕호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안 나온다. 울진봉평비'모즉지매금왕(牟即智寐錦王=법흥왕)'과

광개토왕비문도 신라의 내물왕을 寐錦이라고 표기했다.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왕을 大王이라고 한 반면

신라의 왕을 寐錦 이라고 표기했다. 東夷寐錦이라는 표현도 있고 賜寐錦之衣服(매금의 옷을 하사한다)이라는

말도 나온다.

 

매금=마립간으로 생각한다. 마립간이란 원래 大首長을 의미하는 고구려어 ‘막리지’가 신라어로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신지, 건길지, 한기 등에서 보듯이 ‘지’ 또는 ‘기’는 고대의 우리말에서 大首長에 대한 존칭 어미였던 것 같다.

매금이 大王이나 王보다도 낮은 ‘大首長’을 지칭하는 말이고 아마도 고구려는 숙신이나 말갈의 대수장도 매금이라고

불렀을 것이다.또 가야의 왕이 末錦으로 되어있기도 하다(末錦은 未錦의 誤記로 봄).

 

http://cafe.daum.net/alhc/51qG/2694?docid=CxSE51qG269420101231102914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에서 발췌

 

 

波沙寐錦과 婆沙尼師今은 동일인인 것같다.

(파사이사금은 신라의 5대 왕으로서 3대 유리이사금의 아들이다. 재위 80~ 112) 22년

102년에는 음집벌국(音汁伐國:지금의 安康, 안강 南 또는 울진)과 실직곡국(悉直谷國:지금의 三陟) 사이의 영토분쟁을

가야의 수로왕에게 부탁하여 해결해 준 뒤에 다시 음집벌국을 쳐서 병합하였다.

그러자 실직국과 압독국(押督國:지금의 慶山)도 항복해 왔다고 한다.

 

 

파사왕 3년(AD128년) 8월, 다벌국(多伐國:지금의 大丘 혹은 義昌) 推火(추화 밀성군)와 草八(초팔 합천군 초계면)등이

加耶(가야) 군사와 합하여, 변산에서 良刀(량도)를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吉門(길문)이 黃山津口(황산진구)에서 전투를 맞아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천여급을 노획하였으니, 그의 벼슬을 올려 波珍飡(파진찬)으로 삼았다

 

파사왕 12년(AD137년) 5월, 金官加耶(금관가야)와 月奈(월나)등 7국이 亂(란)을 일으켰다.

吉門(길문)을 征虜大將軍(정로대장군)으로 삼아, 그들을 討平(토평)시켰다.

7월, 發良(발량)과 白馬(백마)에게 명하여 加召城(가소성)과 馬頭城(마두성)을 쌓도록 하였다.

파사왕 20년(AD145년)加耶(가야)가 居陀(거타)(거창)를 습격하였다.

長世(장세, 加召城主)가 소식을 듣고 급히 구하러 갔으나, 싸우다 죽었다.

상은 노하여, 吉門(길문)에게 명하여 京騎(경기) 1천명을 이끌게 하였고,

(상은) 南水(남수, 南路와 水路)의 勇士(용사) 5천명을 이끌고,

三路(3로)는 엄습하여 죽이고, 勝利(승리)를 크게 얻었다.

 

 

 

신공황후는 320년대(200+120년 인상)의 인물이므로 연대가 맞지않아 가공의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波沙寐錦이 微叱己知波珍干岐을 인질로 보냈다고 하여 이는 未斯欣의 이야기인 듯하나 未斯欣은 402년 음력 3월

실성 이사금과 왜가 우호를 맺으며 왜에 볼모로 보내졌으므로 신공황후와는 100여년정도의 시차가 있다.

 

 

2.于老사건

 

9년 12월(200년 음12월 14일)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라는 일본서기의 기록.

 

 

이 이야기는 서기 200년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기록은 연대가 120년 앞당겨진 것으로

판단되므로 실제로는 320년의 기록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있는 신공황후 시기의 기록은 신공황후의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다른 시기에 있었던 사건과 인물들을

끌어다 붙여 놓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시기의 기록은 있는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고 다른 기록과 비교하며

연도와 인물을 재배치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은 삼국사기에 있는 于老를 의미하는 듯 하다.

昔于老는 나해 이사금의 아들로서 조분왕(助賁王) 2년(231) 7월에 이찬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고, 4년 7월에 왜인이 침입해 오자 사도(沙道)에서 화공으로 적의 전함을 불태워 물리쳤다.

조분왕 시대에 우로는 서불감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왜를 물리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침략하여 우로가 출격하였으며 다음 첨해왕 2년에 결화하였다

 

 

첨해왕 7년 계유(253)에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객관(客館)에 와 토산물을 바치고, 그 太子(태자)가 구혼하였다.

于老(우로)가 그 사신을 희롱하며 "너의 왕을 사로잡아 鹽奴(염노)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 어찌 혼사가

가능하느냐" 라고 하였다. 사신이 화가 나서 돌아가 고하니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신라를 치다

대왕이 우유촌(于柚村)으로 나가 있게되자 석우로가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 하고 왜군에게로 가서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잡아서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미추왕때에 왜국(倭國)의 대신(大臣)이 와서 문안하였는데,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로의 아내 명원부인은 조분왕의 딸이며, 미추의 아내 광명부인과 자매간이다.

 

석우로의 아들은 어리어서 걷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이 안고 말을 타고 돌아왔는데 후에 흘해 이사금이 되었다.

 

 

 

첨해왕은 조분왕의 동복동생으로 신라역사상 처음으로 형제지간에 왕위 계승을 한다. 왕위계승순서가 우로, 미추왕 보다도

훨씬 낮았고 그의 왕위계승이 조분왕의 뜻도 아니었으므로 무력을 동원하여 비정상적으로 왕위를 탈취하였다.

즉 왕위계승권자이고 실력도 뛰어난 우로가 왕권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탈취할 염려가 있어 우로를 전장으로 계속 내몰았던 것이다

 

우로에게 연패를 당한 왜이지만 이때에는 첨해왕의 묵인에 의한 탓도 있지만 산라의 영토내에서 신라의 대장군이자 각간을

불태워죽일만큼 강해있었다.

 

 

于老(우로)가 사망한 해가 첨해왕 7년 계유(253).

일본서기에서의 기록은 서기 200년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신공황후 시기의 기록은 대체로 연대가 120년 앞당겨진 것으로

판단되므로 실제로는 320년의 기록으로 전혀 연대가 맞지않다. 신공황후의 업적을 부풀리기위해 다른 연대의 사건을 끌어붙힌 것이다

 

 

[신라가 감문국을 정벌한 것이 230년 7월이고 왜가 금성으로 쳐들어 온것은 231년 4월인데 삼국사기에 왜가 침입한 이유에 대해서

전혀 설명이 없다. 임나(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일본과 친분을 갖고 있던 가야는 왜의 동조로 감문국을 다시 가야로 편입하려다

실패하여 감문국이 완전히 신라에 편입되어버리자 왜가 가야를 대신하여 신라에 보복성 공격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석우로의 활약으로 신라는 대승을 거두게 되고 조분왕의 왕권도 강화가 되다]

http://ask.nate.com/popup/print_qna.html?n=4626630

 

 

 

그런데 이런 주장도 있다.

 

310 삼국사기 흘해 이사금

흘해 이사금(訖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나해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각간 우로(于老)이고 어머니는 명원부인(命元夫人)인데

조분왕의 딸이다. 이때 이르러 기림왕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흘해는 어리지만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하고는 받들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우로가 249년에 죽었다면 그의 아들 흘해 이사금은 310년에 60살이 넘게 된다. 흘해가 310년 왕으로 즉위할 때 '흘해는 어리지만

노성한 덕이 있다.'고 표현한 것과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있는 석우로관련 기록을 60년 뒤로 물려 보았다.

그러자 여러 가지 모순들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1) 309년에 석우로가 피살되고 이듬해인 310년에 그의 아들 흘해가 어린 나이로 이사금이 된다면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된다.

(2) 신라는 300년에 왜(倭)와 사신을 교환한 뒤 왜(倭)에 대해 태도가 고분고분해졌는데 그런 상황과 잘 일치한다.

왜(倭)가 석우로 장군의 실언을 응징하러 쳐들어 왔을 때 신라는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이것은 312년 왜왕이 혼인요청을

해왔을 때 신라가 순순히 응해준 것과 맥락이 같다. 344년에도 왜왕의 혼인요청이 있었는데 이때는 신라가 거부하였고 이듬해

왜(倭)의 보복공격을 받았다.

300년 이전: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1903

300년 이후: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2408

 

 

(3)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사로국(훗날 신라)이 진한과 변한에 있는 24개의 작은 나라 중 하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에서 249년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석우로의 활약과 어울리지 않는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아래의 기록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삼국지(289)

景初 연간(A.D.237~239)에 明帝가 몰래 帶方太守 劉昕과 樂浪太守 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帶方·樂浪의] 두 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韓國의 臣智에게는 邑君의 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

部從事 吳林은 樂浪이 본래 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辰韓 八國을 분할하여 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臣智와 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帶方]太守 弓遵과 樂浪太守 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遵은 전사하였으나 二郡은 마침내 韓을 滅하였다.

 

 

 

그 밖에도 석우로에 관한 기록을 60년 뒤로 옮기면 더 어울리는 부분이 있다.

 

 

292-06 삼국사기 유례 이사금 9년-왜의 군사가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므로, 일길찬 대곡(大谷)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고  지키게 하였다.

 

 

 

293-07 삼국사기-(원래는 233년의 기록에 있는 내용이다.) 왜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요컨대 석우로 피살사건은 309년에 발생한 사건인데 일본서기는 신공황후의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이 사건의 내용을 신라왕

살해사건으로 변경한 다음 연도도 신공황후의 치세시기인 320(<-200)년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 그런데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석우로가 신라의 장수가 아니라 왕이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물론 있다.

비슷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289)에는 왕망의 시기에 왕망의 장수 엄우가 고려왕 도(騊)를 유인하여 살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사기(1145)에는

이때 살해당한 사람이 고려의 왕이 아니라 고려의 장수 연비(延丕)라고 되어 있다.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pg=1&g_thrd=1928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는 이미 높다. 삼국사기와의 대응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가령 삼국사기 열전의 [석우로전(昔于老傳)]과 일본서기 신공황후 신라정벌기사의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의

기사는 거의 일치한다. 한국에서야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을 일방적으로 왜곡으로 몰고가는 분위기 이지만,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기사가 신공황후 기사에 중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국수주의와 민족주의의 지평을 넘어선

고대사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은 우류 + 소불+ 이지간

 

으로 분석할 수 있는바, 助는 일본어로 스, 혹은 소라고 읽힙니다. 措도 같은 음이며, 이로써 우류가 昔씨라는 것을 알수 있지요.

'이지간'은 '이질금'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사금과 동음어였음을 알수 있지요.

 

[우류(우로)]는 이름이며 소불은 우로가 임명되었었다는 [서불한]의 직책명이지 않습니까. '이지간'은 '이질금'의 일본식(이두식)

표기라고 볼수 있습니다.

 

뜻하는 바는, 우로라는 [소불 이사금]이라는 것이죠. 일본서기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명칭입니까. 아버지도 내해이사금, 우로의

아들도 흘해이사금이 되었으니, 우로 역시도 이사금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소불]과 [서불한]이라는 관직의 이름까지

적중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한국사를 위한 또 다른 보고입니다.

 

http://cafe.daum.net/yeohwicenter/4NNQ/172?docid=BfRN4NNQ17220040902123027

 

 

3.인질 未斯欣

(神功皇后, 攝政) 5년 봄 3월 癸卯 초하루 己酉 신라왕이 汚禮斯伐과 毛麻利叱智, 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볼모로 와 있던 微叱許智伐旱을 돌아가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葛城襲津彦을 딸려 보냈다. 함께 對馬에 도착하여 鉏海의

水門에 머물렀다.

 

이 때 신라의 사신 毛麻利叱智 등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微叱旱岐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속인 것을 알고 신라 사신 세 사람을 붙잡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일본서기]

 

 

16대 흘해왕이 후사가 없자 미추왕의 사위인 내물왕이 왕위에 오른다(356년)(미추는 조분왕의 사위이며 출생연도는 200년이다.

즉 미추왕의 출생과 그 사위인 내물왕의 왕위등극과는 156년의 차이가 난다. 미추왕이 20세때 딸을 낳았다면 내물왕의 왕비는

136세에 왕비가 된다는 뜻이므로 믿기 계보에 뭔가 조작이 이루어진 것같다. 16대 흘해왕, 17대 내물왕 왜의 침공과 고구려의

남정 등 격동기에 재위했던 왕들이 똑같이 46년간 재위했다는 기록도 믿기 어렵다)

 

미추왕의 또다른 사위인 실성(내물왕과는 동서사이)이 내물37년(392년)에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고국에 돌아온 뒤에 402년

18대 왕으로 등극했다(실성왕의 장인인 미추왕이 200년에 출생했으므로 미추왕의 출생과 사위의 왕위등극에는 202년의 차이가

난다. 그러면 미추왕은 몇 살에 딸을 낳았는가?)실성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 벼슬에 있던 대서지의 아들이다내물이 죽고

그 아들이 어리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삼국사기’ 실성왕조)’ 실성왕의 귀국 직후 내물왕이 죽고,

내물왕의 아들 대신 실성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삼국유사’의 내물왕과 김제상조에 따르면 내물왕은 아들 미해(美海)와 동생 보해(寶海)가 있었는데, 제상의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모두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도 정작 왕위에 오른 인물은 이런 왕족들이 아니라 이찬의 아들인 실성왕이었던 것이다

실성이 돌아와 왕이 돼서는 원년(402년)에 내물왕이 자신을 외국에 볼모로 준 것을 원망해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왜로,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다..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자기가 고구려에 인질로 머물 때 알고 지내던

고구려인을 은밀히 불러들여 말했다.“내가 구실을 만들어 고구려 군대를 청하고, 눌지로 하여금 그대를 맞이하게 할 터이니,

도상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눌지를 보거든 무조건 죽여 버리시오.”.

 

고구려인이 눌지의 형신이 쾌활하고 젊잖아 군자의 풍모가 있음을 알고

마침내 ‘그대 나라 임금이 나에게 그대를 죽이라고 했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에 돌아갔다.

눌지가 이를 원망해 도리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삼국사기’ 눌지왕조)’417년 ‘

 

이 때 눌지가 실성왕을 제거했다기보다는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의 군대가 실성왕을 제거하고,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즉위시켜서 신라왕실을 괴뢰정권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고구려 장수왕4년, 백제 전지왕12년)

 

실성이사금 4년 4월(405년)에 왜가 경주 부근의 명활성으로 쳐들어왔다. 왕은 친히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으로 나가 요충지에

복병하고 있다가 적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실성이사금은 즉위하자마자 전왕이었던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바다 건너 왜국에 볼모로 보내면서 화친관계를 맺는데,

인질을 보낸 지 3년 뒤에 바로 군사를 동원해서 쳐들어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실성왕이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서 화친관계를 맺은 왜와, 실성왕 4년에 명활성으로 쳐들어온 왜는 다른 세력이다,

 

왜인들이 신라를 침공하기 위해서 대마도에 대대적인 군영을 설치했다, 그러자 실성왕은  대마도 정벌을 주장.

서불한 미사품의 반대에 부딪쳐서 무산됨.

 

눌지마립간 2년 정월에 왕은 친히 시조묘를 배알하였다. 이 때 왕의 아우 복호가 박제상과 함께 고구려로부터 돌아왔다.

이 해 가을에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왔다(418년)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제상(朴堤上)으로 보이며 微叱許智伐旱은 未斯欣으로 보인다. .

이것은 삼국사기에서 박제상을 모말(毛末)이라고도 한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朴堤上이 왜로부터 未斯欣을 탈출시키고 자신이 살해당하는 것이 418년으로서 신공황후와는 연대차이가 많이 난다.

 

4.卓淳國과 百濟에 사람을 보냄

백제 근초고왕때 탁순국의 중재를 통해 처음으로 왜와 접촉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