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9.일본천황의 계보(2) -길비계 천황들-垂仁- 景行-(成務)-仲哀
11대 垂仁天皇 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
10대 崇神天皇은 御間城姫를 황후로 하여 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 (11대 垂仁天皇), 彦五十狭茅命을 낳았다고 적어놓았다(*御間城姫 8대 효원천황의 제1皇子 大彦命의 딸이라고 적어놓았지만 사실은 7대 효령천황의 황후이다)
7대 효령천황의 가계를 다시한번 검토해본다.
앞에서 7대 효령천황의 妃라고 하는 倭国香媛은 실제로는 神武天皇(=4대 懿德天皇)의 妃이고 그녀가 낳은 倭迹迹日百襲姫命과 倭迹迹稚屋姫命은 神武天皇의 딸이고, 彦五十狭芹彦命은 神武天皇의 아들이며 이자가 7代 孝霊天皇인 것이다.
다음의 妃로 적혀있는 糸亘某姉가 7대 효령천황의 황후로서 彦狭嶋命과 稚武彦命(吉備臣의 始祖)을 낳았고 그들의 父가 7대 효령천황인 것이다. 7代 孝霊天皇은 신무천황이 阿岐國을 정복한 뒤 吉備國을 정복하여 吉備의 高島宮에 8년(고사기에서는 3년) 머무를때 吉備國王의 딸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이상을 기초로하여 생각해보자
신무천황이 大和에서의 천신의 자손이라고 숭배받고 있는 饒速日命의 妹를 妃로 맞아들이고 9대 開化天皇을 낳아 후계자로 삼았지만 開化天皇은 젊어서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숭신천황을 10대 천황으로 삼게 된다. 그러나 숭신천황도 자식을 낳을 정도의 나이가 될때까지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개원천황계열-饒速日命계열의 천황이 단절 된다)
垂仁天皇의 諱 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과 효령천황의 이름 彦五十狭芹彦命은 대단히 닮아있다. 일본서기에서는 10대 숭신천황의 황후는 御間城姫(8대 효원천황의 제1황자 大彦命의 딸이라고 적혀있지만 사실은 7대 효령천황의 황후 糸亘某弟)로서 8대 효원천황의 딸이며
이 여자로부터 11대 수인천황, 12대 경행천황, 14대 충애천황으로서 吉備国系 천황으로 이어진다.
또 10대 숭신천황의 후견인으로서 7대 효령천황이 담당하는 체제에 반대하는 자들을, 7대 효령천황인 彦五十狭芹彦命 (別名은 吉備津彦)과 8대 효원천황인 大彦命이 제휴하여 무력투쟁으로 괴멸시켰다. 이것을 생각하면 7대 효령천황(길비계)의 아들을 11대 수인천황으로 하고 8대 효원천황( 大化계)딸을 황후로 했을 것이다.
9대 개화천황의 계열(饒速日命계열)로부터 7대 효령천황의 계열(길비계열)로 바뀜.
신무천황이 5대부터 9대천황의 父인 것을 감추기 위하여 천황의 母를 앞천황의 황후로 한다던지, 妃로 한 것처럼, 이번에는 7대 효령천황의 황후를 10대 숭신천황의 황후로 하여, 7 대 효령천황과 御間城姫 (糸亘某弟)의 아들이 표면상으로는 10대 숭신천황과 御間城姫사이의 자식이 되어, 10대 숭신천황의 계통이 계속되는것처럼하여 계통이 바뀐것을 알지못하게 했다.
10대 숭신천황과 御間城姫命의 사이에 생긴 것으로 적혀잇는 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 은 7대 효령천황의 장남 彦狭嶋命이고(11대 垂仁天皇) , 彦五十狭芹彦命은 7대 효령천황의 차남 稚武彦命이 되므로 御間城姫命(糸亘某弟)는 7대 효령천황의 황후가 맞다.
또 숭신천황의 妃 遠津年魚眼妙媛、妃 尾張大海姫와 그의 자식들은 8대 효원천황의 妃와 자식들이 된다. 8대 효원천황과 妃 遠津年魚眼妙媛와의 사이에 난 딸 豊鍬入姫命이 수인천황의 황후 日葉洲媛命이다.
일본서기의 계보에서는 8대 효원천황의 딸 日葉洲媛命은 11대 수인천황의 祖父인 9대 개화천황의 異母兄妹로 된다. 효원천황이 아무리 정력이 절륜해도 자신의 딸을 曾孫의 수인천황의 황후로하여 12대 경행천황을 낳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효령천황과 효원천황은 서로 신무천황(예덕천황)의 배다른 자식으로서, 수인천황은 효령천황의 아들이고, 효원천황의 딸 日葉洲媛命 (豊鍬入姫命)과는 従兄妹라고 하는 나의 설의 계보가 이치에 맞다
7대 효령천황(길비계)은 자신의 장남 彦狭嶋命을 11대 수인천황으로 하고, 8대 효원천황( 大化계)의 딸 日葉洲媛命(豊鍬入姫命)을 수인천황의 황후로 하고, 차남 稚武彦命을 吉備国의 跡取로 한 것이다.
11대 수인천황의 시대는 처음에는 7대 효령천황의 院政을 기초로 하여 스타트했을 것이다. 효령천황의 院政의 치적이 숭신천황의 치적으로 씌여져, 그 때문에 수인천황의 諱가 효령천황을 나타내는 諱 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이 되었을 것이다. 수인천황이 실권을 잡은 것은 효령천황의 사후에 가서일 것이다. 어쨌든 간에 신무천황 이후의 권력은 9대 개화천황의 계열로부터, 7대 효령천황의 吉備国의 계열이 주도권을 잡게되었다. 11대 수인천황의 시대는 12대 경행천황이 제몫을 할때까지 살아있었다고 생각되므로 길었을 것이다. 355년 전후로부터 385년 전후로 생각한다.
수인천황의 諱 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의 活目은 「生く奴」로서 생명이 영구적이고 霊力이 있는 奴 孝霊天皇이 천황에게 넣었던 五十狭茅天皇이다.
12대 景行天皇 大足彦忍代別天皇
12대 景行天皇은 일본서기에서 吉備臣等의 若建吉備津日子 (7代 孝霊天皇의 次男 稚武彦命이며, 11대 수인천황의 弟)의 딸 播磨稲日大郞姫를 황후로 하여 大碓命、小碓命 2명의 남자를 낳았다 (고사기에서는 櫛角別王、大碓命、小碓命、倭根子命、神櫛王). 小碓命이 日本武尊이다.
日本武尊은 일본서기에서 11대 수인천황의 딸 両道入姫命을 취하여 14대 仲哀天皇을 낳았고 다음의 妃인 稚武彦命의 딸 吉備穴戸武媛에게서도 2명의 남자를 낳게했다.
(고사기에서는 11대 수인천황의 딸 布多遲伊理毘賣命과의 사이에 帯中津子命(仲哀天皇)、弟 橘比賣命과의 사이에 若建王을、吉備臣 建日子의 妹 大吉備建比賣와의 사이에 建貝兒王을、一妻와의 사이에 息長田別王을, 그외에 2명에게서 각각 1명의 남자를 합쳐서 6명이 태어났다. 息長田別王의 아들, 杙俣長日子王 , 그외의 자식들은 飯野真黒比賣命、息長真若中比賣、弟比賣이다)
若建王은 飯野真黒比賣命을 취하여 須賣伊呂大中日子王을 낳는다. 須賣伊呂大中日子王은 淡海의 柴野入杵의 女、柴野比賣를 취하여 迦具漏比賣를 낳는다. 景行天皇이 迦具漏比賣命을 취하여 大江王을 낳는다
12대 경행천황은 일본서기에서 八坂入媛을 妃로 하여 첫째아들 稚足彦命天皇(成務天皇)、둘째 五百城入皇子、세째 忍之別皇子,네째 稚倭根子、第5 大酢別,第6 淳熨斗皇女、第7 淳名城皇女、第8을 五百城入姫皇女、第9를 카고頼姫皇女、第10을 五十狭城入彦皇子, 第11을 吉備兄彦皇子、第12를 高城入彦皇女、第13을 弟姫皇女를 낳았다고 한다.
《古事記에서는 八坂의 入日賣命의 子, 若帯日子命, 五百木의 入日命, 押別命, 五百木의 入日賣命을,
또 妾의 子、豊戸別王、沼代郞女、
또 다른 妾의 子, 沼名木郞女、다음 香余理比賣命、다음 若木의 入子王、다음으로 吉備의 兄日子命, 다음으로 高木比賣命, 다음 弟比賣命、日本武尊의 曾孫, 須賣伊呂大中日子의 女, 詞具漏比賣에 大枝王)을 낳았다고 한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적혀있는 인간관계의 차이는 속이고 있는 부분을 알려주는 경우가 많고 이번에는 고사기쪽이 옳다고 생각된다. 일본서기에서 황후는 櫛角別王、倭根子命、神櫛王減을 낳고、八坂入媛은 第4를 稚倭根子、第5를 大酢別,第6을 淳熨斗皇女、第7을 淳名城皇女、第9를 카고頼姫皇女、第10을 五十狭城入彦皇子、第11을 吉備兄彦皇子、第12를 高城入彦皇女、第13을 弟姫皇女를 낳았다.
12대 경행천황의 시대에 四国의 정복, 큐슈의 웅습정벌의 족적이, 정복지의 국왕의 딸을 취하여 생긴 아들에게 정복한 나라를 잇게 하는 신무천황 이래의 정책이 그 땅의 妃의 자식들로부터 四国 의 讃岐国造의 시조, 伊予国의 御村別의 시조를 파악할수 있다.
12대 경행천황은 영토를 비약적으로 확대한 것에 자신을 얻어, 吉備国의 피를 이은 자를 천황으로 하려고 하는 주위의 예상을 배반하여, 8대 효원천황의 피를 이은 八坂入媛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 성무천황을 13대 성무천황으로 했다.
경행천황의 諱 大足彦忍代別天皇은 천황을 대만족으로 지나갔지만 다음 대에서는 成務天皇과 日本武尊의 아들 仲哀天皇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12대 경행천황의 시대는 길게 385년 전후로부터 415년 전후..
13대 成務天皇 稚足彦天皇
13대 成務天皇(대화계열-효원천황계)은 12대 경행천황이 죽자 바로 7대 효령천황의 피를 이은 길비의 세력에게 천황의 자리를 내주어, 죽은 日本武尊(길비계)의 아들 仲哀天皇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고사기에서는 성무천황은 穂積臣等의 祖, 建忍山垂根의 女, 弟財郞女를 취하여 생긴 아들이 和詞奴気王이다.
성무천황의 諱 稚足彦天皇은 어려서 만족하게 보내지 못한 천황
14대 仲哀天皇 足仲彦天皇
日本武尊은 父가 12대 경행천황이고 母가 (11대 수인천황의 弟의 娘 播磨稲日大郞姫)라고 하는 태어나면서 차기천황이라고 생각되어, 吉備国계통의 사람들에게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日本武尊은 11대 수인천황의 딸 両道入姫命을 취하여 14대 仲哀天皇을 낳게하고, 다음 妃 11대 수인천황의 弟 稚武彦命의 娘 吉備穴戸武媛에게도 二명의 男子를 낳았다
그러나 八坂入媛을 사랑했던 12대 경행천황은 8대 효원천황의 피를 이은 八坂入媛을 妃로하여 그 아들을 13대 성무천황으로 삼았다. 위기를 느꼈던 吉備国계통의 사람들이 강제로 13대 성무천황을 천황으로부터 끌어내리고 새로이 천황으로 추대한 사람이 日本武尊의 아들 14대 仲哀天皇이다.
仲哀天皇은 천황이 되기 전에 12대 경행천황의 妾의 딸 카고頼姫皇女(香余理比賣命), 또 彦人大兄의 딸 大中姫를 취하여, 아들 카고坂皇子와 忍熊皇子가 있었다. 吉備계통은 이렇게 하여 안심하고 仲哀天皇을 14대 仲哀天皇으로 앉힌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神功皇后는 개화천황의 증손 気長宿禰王(息長宿禰)의 딸이라고 적어놓았지만 気長宿禰王은 딸을 황후로 할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서기에서는 仲哀天皇이 14대 仲哀天皇으로 되자 익년 춘정월에 神功皇后로 되었다고 적혀있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되어서는 吉備国의 사람들에 의하여 강제로 13대 성무천황을 천황의 자리로부터 끌어내려 日本武尊의 아들 仲哀를 14대 仲哀天皇으로 한 것이 무의미한 것이되고 만다.
14대 仲哀天皇의 진짜의 황후는 12대 경행천황과의 妾의 子 카고頼姫皇女(香余理比賣命)로서 카고坂皇子가 차기 천황으로 약속되어 있기때문에 13대 성무천황을 끌어내리고 仲哀天皇을 14대 仲哀天皇으로 옹립한 의미도, 神功皇后의 일행과 카고坂皇子, 忍熊皇子의 황위를 둘러싼 싸움에서 吉備세력이 전력을 다해 카고坂皇子와 忍熊皇子를 응원하였던 의미도 이해가 가는 것이다, 또 神功皇后가 황후로 있을 턱이 없고 武内宿禰가 자신의 자식을 천황으로 옹립하고 싶어하는 神功皇后를 꼬드겨서, 応神天皇을 옹립하여 吉備세력을 일소했던 것이 이해될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