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6.神武天皇의 東征-고대 유물의 비교
6.神武天皇의 東征-고대 유물의 비교
3세기의 九州는 考古学的으로 銅剣・銅鉾文化圏이었다. 이 시기의 邪馬台国은 卑弥呼・台与를 盟主로 하여 九州로부터 西中国에 걸쳐 九州王朝를 형성하고 있었다. 卑弥呼・台与 사후 九州王朝는 구심점을 잃고 소국으로 분립하여 九州王朝는 이름뿐이었다(270~300年경)。
당시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
위,촉,오 삼국을 통일한 西晋王朝가 八王의 乱(300~306年)으로 내부붕괴하고, 北方의 諸民族(五胡)이 北部中国을 침입하여、晋王朝는 揚子江 이남으로 물러난다(318年、東晋王朝의 成立)따라서 중국의 정통왕조는 조선이나 일본에 손을 미치지 못하였고,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군을 멸하고(313, 314년) 南朝鮮에서는 百済・新羅가 일어난다
일본에서도 九州勢力이 呪術에 사로잡힌 폐쇄된 상황을 벗어나 新天地를 찾아서 神武東征에 의하여 畿内의 銅鐸文明을 무너뜨리는 大事態가 일어났다.
1)大和朝廷=天皇家의 九州起源説. 神武東征은 역사적 史實
야요이(弥生)시대는 北九州로부터 瀬戸内海에 걸친 銅剣・銅鉾文化와、近畿・中部를 중심으로 하는 銅鐸文化의 2대문화권의 존재가 알려져있다. (銅鐸은 畿内문화를 상징. 九州에서는 초기의 銅鐸이 소수 발견되었을 뿐 미미하다. 初期 銅鐸이 대륙, 朝鮮半島로부터 九州를 경유하여 近畿地方에 퍼지고 銅鐸文化가 近畿・中部地方에서 개화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九州에서는 銅鐸이 유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近畿勢力은 2~3세기경은 九州를 정복하지 않았으므로 近畿 銅鐸文化가 九州지방에 移入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銅鐸文化는 弥生時代 후기에 近畿・中部地方에서 더욱더 성행하다가 돌연 소멸한다. 銅鐸은 祭器라고 알려져있고 이것이 돌연 소멸한 것은 외부세력에 정복되었기때문이고 이 외부세력이 神武東征으로 상징되는 九州勢力이다.
弥生時代 九州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銅鏡이 압도적으로 발견되고, 銅剣・銅鉾과 함께 甕棺이 발견되고있다. 이에 대해、銅鐸文化圏의 중심지인 畿內에서는、弥生時代의 墓로부터 銅鏡이 전혀 出土되고 있지 않다.
古墳時代에 들어가면, 고분에서 中国製 銅鏡이 出土되고, 더구나 近畿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것은 鏡을 墓에 묻는 관습이 北部九州로부터 畿内로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동의 시기는 弥生時代 末~古墳時代 初로 추정되어 이 이동을 일어킨 자가 九州勢力의東征이다
弥生時代의 北部九州의 墳墓로부터、鏡・剣・玉이 다수 출토되고 더군다나 이 3점이 셋트로 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天皇家의 三種의 神器와 문화적으로 직결된다. 이에대해 弥生時代의 畿内의 銅鐸文化는 다음의 古墳文化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혹시 邪馬台国이 弥生時代에 畿内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수립되어 그것이 大和朝廷으로 이어졌다고 한다면 近畿에서 성행했던 銅鐸文化가 大和朝廷으로 이어진 흔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大和朝廷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신화에는 鏡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나오지만
銅鐸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다. 畿内의 弥生墳墓로부터는 한 장의 銅鏡도 출토되지 않고 다음의 古墳時代에는 鏡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문화적 단절이 있다.
畿内 大和의 前期 古墳文化에서 鏡을 副葬하는 관습은 自生한 것이 아니고、九州세력의 東征에 따라 가지고 온 것이다
2)東征의 시기.
九州勢力의 東征은 邪馬台国 卑弥呼・台与이후 즉 270년 이후부터 .
高句麗 好太王碑에는、倭国이 4世紀末~5世紀初에 4回(391年、399~400年、404年、407年)에 걸쳐 遠征軍을 파견하여、新羅・高句麗와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倭国은、国家의 総力을 걸고 半島에서의 軍事作戦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九州勢力의 東征은、半島에서의 新羅・高句麗와의 激突이전、즉 邪馬台国 이래의 3세기말 ~4세기 前半이 된다. 朝鮮半島에서 倭国의 軍事活動이 본격화하기 이전 즉4世紀 前半까지 이뤄졌다고 생각된다. 또 東征을 4世紀 後半이후로 하게되면 、銅鐸文明의 消滅時期(3世紀後半~4世紀初頭)와의 관련성이 멀어지게 된다
神武東征으로 畿内 大和를 평정한 大和朝廷은、그것만으로 국토통일을 완성한 것이 아니다. 神武東征後、畿内를 拠点으로 하는 大和朝廷은、4世紀 前半은 国土統一을 계속하던 시기로서 이것이 記紀에서는 崇神、垂仁、景行朝에 보이는 統一事業에 해당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東征은 4世紀 初頭、즉 310年경 까지 이뤄져、4世紀 前半이 国土統一의 時期가 된다
즉 東征은 卑弥呼・台与 이후 九州王朝는 구심력을 잃고、「小卑弥呼」 「似非卑弥呼」가 続出하여、小国分立・呪術支配에 따른 閉塞된 社会状況에 빠져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폐쇄된 상황이 계속되던 280~290년 경, 「呪術支配」로부터 벗어나 新天地에 통치조직이 정비된 강력한 국가를 확립하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神武東征은 280~310年의 期間、좀더 좁히면 285~305年 경에 実行된 것으로 추정된다.
3)東征의 主人公
초대천황을 2인으로 나누어, 東征까지는 神武天皇, 즉위후부터는 崇神天皇으로 하여, 한사람의 인물을 둘로 분할하여 배치하고 2대부터 9대까지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건국년도를 기원전 660년으로 올리기 위하여 가공의 인물을 천황으로 넣고 재위년수도 2배~3배 부풀렸다.
崇神天皇에 의한 北陸・東海・西道・丹波로 四道将軍의 派遣은、崇神時代의 大和朝廷이 近畿地方의 銅鐸文明의 나라들만을 정복한 것으로 아직 일본의 통일왕조가 아니고 地方権力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記紀의 記述과도 일치하고있고, 『旧唐書 日本伝』의 「日本은 旧小国、倭国의 地를 併합하고」의 의미를 이해할수 있다. 즉 旧唐書에서의 「日本」은 近畿 大和政権、「倭国」은 九州를 의미하고、神武東征에 의하여 성립된 近畿 大和政権이 후에 倭国(=九州王朝)의 領域을 併合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皇祖 天照大御神을 제사지내는 伊勢神宮의 起源이、崇神・垂仁天皇의 時代로 되어 있다. 皇祖神의 天照大御神은、大和의 地主神인 大国魂과 함께、崇神天皇이 처음으로 大殿에서 제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