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삼국사기의 기년(紀年)문제

청 설모 2013. 2. 23. 17:58

삼국사기의 기년(紀年)에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면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은 BC 57년에 해당한다.

신라는 BC 57년에 건국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적고있다.

삼국유사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 建元1)三年等 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 臨理蒸民 民皆放逸自從所欲 盍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時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狀 尋撿之有一紫卵〈一云 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羙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B.C.69) 〈고본(古本)에는 건호 원년(建武 元年, A.D.25년)이고, 건원 3년 등이라고도 했다. 이것들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6부(六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은 모든 백성(蒸民)을 통치하여 다스릴 임금에 오르지 못하고, 백성들은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니, 어찌 덕이 있는 자를 찾아서 임금으로 삼아 나라(邦)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냐!”라고 하였다. 이때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의 아래 나정(蘿井)의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백마 한 마리가 있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형상이라 찾아서 조사하니 자주색 알이 하나 있었다.〈혹은 푸른색 큰 알이라고 한다.〉 말이 사람들을 보자 길게 애처롭게 울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어 어린 남자아이를 얻었다. 형의(形儀, 얼굴과 자태)가 바르고 아름다워서 경이(驚異, 놀라움)롭게 여겼다.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光彩)가 생기고 조수(鳥獸, 새와 짐승)들이 따라 춤을 추니 천지가 진동(振動)하였고, 해와 달이 청명(淸明, 날씨가 맑고 밝음)하였다. 그런 연유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이름 하였다.

 

전한 선제의 두번째 연호인 지절(地節) 원년은 B.C. 69년으로 임자(壬子)년이며 이때 박혁거세가 출생했다고 한다. 13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B.C.57년에 건국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일연은 여기서 괄호속에 그가 보았던 古本에는 建虎元年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建元三年에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건무(建武=建虎)는 후한 광무제의 연호이고 AD 25년에 해당한다. 일연이 본 고본(古本)에는 신라가 B.C.57년이 아닌 AD 25년에 건국했다고 적혀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혁거세가 B.C.57년에 신라를 건국했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하 팔공산님의 블로그에서 발췌)

1.박제상

三國史記卷第四十五 열전 제 5 박 제상

<婆娑>尼師今五世孫. 祖, <阿道>葛文王; 父, <勿品>波珍

파사 이사금의 5세 손이고, 조부는 아도 갈문왕이었으며,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었다

 

파사이사금본기에 의하면 파사이사금은 A.D 112년에 죽었고, 박제상은 A.D 418년에 눌지마립간의 동생 복호와 함께 고구려에서 돌아왔다. 파사이사금과 박제상은 5세대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생존연대가 약 300년 가량 차이가 난다

 

2.일성왕이 유리왕의 장남이라는 문구

逸聖尼師今 儒理王之長子(或云日知葛文王之子) 妃朴氏支所禮王之女」

일성이사금은 유리왕의 장자(갈문왕 일지의 아들이라고도 함)요 비는 박씨이니 지소례왕(추존)의 딸이다.

 

유리이사금의 재위기간은 (A.D 24-57년)이고 일성이사금의 재위기간은 (A.D 134-154)이다. 유리이사금은 A.D 57년에 죽었는데, 아들인 일성이사금은 A.D 154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어, 아버지가 죽은지 100년 후 아들이 죽었다고 적혀 있다

 

3.벌휴왕이 탈해왕의 손자라는 문구

伐休<一作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 母姓金氏 只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豊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벌휴이사금(A.D 184~196년) [발휘라고도 함]의 성은 석씨요, 탈해왕의 아들인 각간 구추의 아들이요, 어머니의 성은 김씨니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세웠다.

탈해왕은 A.D 80년에 죽었는데, 그 손자인 벌휴이사금은 A.D 196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어, 조부가 죽은지 116년 후에 손자가 죽었다고 적혀 있다

 

4.눌지왕이 말구 각간의 손자라는 문구

八年 春正月 拜末仇爲伊伐 末仇忠貞有智略 王常訪問政要.

유례이사금:A.D 283~298년) 8년 봄 정월, 말구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말구는 충직하고 지략이 많았다. 왕은 자주 그를 찾아가서 정사의 요령을 물었다

 

奈勿一云那密尼師今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末仇角干 母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訖解薨 無子 奈勿繼之 末仇味鄒尼師今 兄弟也」

내물이사금(A.D 356~402년) [나밀이라고도 함]의 성은 김씨요 갈문왕 구도의 손자다. 아버지는 각간 말구요,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요, 비는 김씨 미추왕의 딸이다. 내물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어, 내물이 계승하였다(말구는 미추이사금 과 형제간임 

 

말구末仇는 미추의 동생으로 미추이사금의 재위기간은 (A.D 262~283년)이고 유례이사금이 그를 이벌찬에 임명한 해가 291이다. 그런데 손자인 눌지마립간의 재위기간은 (A.D 417-458년) 으로 2세대에 생존시기가 150년 가량 차이가 난다.

 

5.내물왕은 미추왕의 사위라는 문구

奈勿一云那密尼師今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末仇角干 母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내물이사금(A.D 356~402년) [나밀이라고도 함]의 성은 김씨요 갈문왕 구도의 손자다. 아버지는 각간 말구요,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요, 비는 김씨 미추왕의 딸이다

 

미추왕의 딸중 1명은 내물왕의 비가 되었고 또 한명은 실성왕의 비가되었다.

미추왕은 A.D 284년에 사망했고 내물이사금은 A.D 402년, 실성이사금은 A.D 417년에 사망했다. 장인이 죽은지 120~130년이나 지나 사위들이 죽었다

 

6. 흘해왕은 석우노의 아들이라는 문구

석우노는 AD 249년에 죽었는데, 아들인 흘해이사금은 AD 310년에 즉위하여 A.D 356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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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정성일님의 글에서 발췌)

 

참조문 1.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이사금기

제18대 실성 이사금 (實聖尼師今 402~417 재위기간 15년)

실성 이사금 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伊'를 '企'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붕어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여기에서 미추이사금의 재위기를 살펴보면 실성이사금의 왕비의 나이를 알 수가 있다.

 

참조문 2.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이사금기

제13대 미추 이사금 (味鄒 尼師今 262~283 재위기간 21년)

미추 이사금[미조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이다. 그녀는 갈문왕 이칠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이다. 그녀는 조분왕의 딸이다. 미추의 조상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자 탈해왕이 데려와 궁중에서 길렀고,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았으니,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되었다

 

위의 두가지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실성왕비의 나이를 실성왕 원년을 기준으로 최소한 119세이다.

다음 기록을 보면 더 어처구니가 없다. 도대체 실성왕의 비는 도대체 몇살에 눌지왕의 비를 낳았는지 오리무중이 된다.

 

참조문 3.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이사금기

제19대 눌지 마립간 (訥祗 麻立干 417~458 재위기간 41년)

눌지 마립간[김 대문은 "'마립'은 방언으로는 '말뚝'인데, 말뚝은 곧 함조를 뜻한다. 이는 직위에 따라 놓는 것이니 즉, 왕 말뚝이 중심이 되고 신하 말뚝은 그 아래에 나열한다. 이를 빌어와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라고 말했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내물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반부인[내례길포라고도 한다.]이며, 미추왕의 딸이다.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내물왕 37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고나서 내물이 자기를 외국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였다. 그는 내물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원한을 풀고자 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와 은밀히 그에게 "눌지를 보거든 죽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눌지를 가게하여 도중에서 그와 마주치도록 하였다.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외모가 쾌활하고 정신이 고상하여 군자의 기풍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대의 국왕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죽이도록 하였으나 이제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일 수 없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눌지가 이를 원망하여 도리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백제왕의 재위기도 문제가 있다) 

백제 고이왕(재위기간:234~286)은 개루왕(재위기간:128.11~166)의 아들로서 개루왕의 재위가 끝난지 68년만에 왕에올라 52년을 더 다스렸다고 하므로 아버지의 사망시점에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가정하더라도 120세가 되고 비류의 나이는 110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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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 문제가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연대조작이 너무도 극심하여 일본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이든다. 일본의 고대역사는 가야사와 백제사의 연장이라고 할수 있는데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의 황실에서 작성한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의도적으로 한반도와의 연결고리를 끊기위해 역사왜곡을 자행했고 일본학자들이 일본서기의 기년문제를 풀기 위해 삼국사기와 연결지어 시도하였으나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삼국사기의 기년에도 문제가 있어 해결이 쉽지 않음이 발견되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연대가 맞지 않으므로 중국의 사서를 이용하여 양국간의 기년을 비교해본다.

 

고대 왜왕국에서 히미코(卑彌呼, 비미호)라는 전설적인 여왕이 있었음이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에 나온다.

 

삼국지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238년 중국의 魏가 공손씨를 멸망시킴으로써 낙랑대방 2군이 魏에 속하게 되자 여왕 히미코는 대방군을 통하여 위의 수도 낙양에 사절을 파견했다. 魏의 황제는 이들을 환대했으며 여왕에게 ‘親爲倭王’이란 칭호를 仮授했다

 

경초(景初) 2년(239년) 6월에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군에 찾아들어 천자를 예방하고 공물을 바치기를 바랐다. 태수 유하가 관리로 하여금 인솔케 하여 경도에 이르렀다. 그해 12월에 조서를 내려 왜 여왕에게 답했다.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조서를 내린다.

 

정시(正始) 8년(247년)에 태수 왕기가 관에 도착하였다. 왜 여왕 비미호가 구노국의 남자 왕인 비미궁호와 평소 화목하지 못했는데, 왜의 재사와 오월 등을 찾아들게 하여 서로 공격한 상황을 설명하게 하였다.

 

其國本亦以男子為王,住七八十年,倭國亂,相攻伐歷年,乃共立一女子為王,名曰卑彌呼,事鬼道,能惑衆,年已長大,無夫壻,有男弟佐治國。自為王以來,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出入。居處宮室樓觀,城柵嚴設,常有人持兵守衞

 

본래 그 나라는 또한 남자가 왕이 되어 7-80년을 지낸 뒤에(住七八十年)[집해5] 왜국(倭國)에 난이 일어 여러 해 동안 서로 공벌(攻伐)하니 이에 함께 여자 한명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녀의 이름은 비미호(卑彌呼, 히미코)라 하는데, 귀도(鬼道, 술법)를 행하여 뭇 사람들을 능히 미혹하고 나이가 이미 많으나 남편은 없고 남동생이 있어 치국(治國)을 보좌하였다. 왕이 된 이래로 그녀를 본 사람이 적었고 계집종 천명에게 시중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명이 있어 음식을 공급하고 (비미호의) 말을 전하면서 출입하였다. 거처(居處)하는 궁실(宮室)에는 누관(樓觀, 누각), 성책(城柵)을 엄히 설치하였고 늘 병기를 지니고 수위(守衛)하는 자가 있었다.

 

집해5]沈家本曰御覽作漢靈帝光化中六字范書作桓靈間。 

[집해5] 심가본(沈家本) 왈, 「태평어람」(권782의 위지 인용문)에는 ‘ 漢靈帝光化中 ’(한 영제 광화 연간에)의 여섯 글자가 적혀있고, 범엽의「후한서」에는 ‘ 桓靈間 ’(환제, 영제 사이에)으로 적혀 있다.

 

※ 태평어람 - “(위지 왈) 후한 영제(靈帝) 광화(178-183년) 연간에 왜국에 난이 일어 서로 공벌하여 안정되지 못하니 이에 여자 한 명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그녀의 이름은 비미호였다. (漢靈帝光化中, 倭國亂 ,相攻伐無定,乃立一女子 爲王,名 卑彌呼) / 후한서 동이열전 왜전(倭傳) - “ 환제, 영제 사이에 왜국(倭國)에 대란이 일어 서로 공벌했다 ”(桓、靈閒, 倭國大亂, 更相攻伐)

 

景初二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위나라 명제) 경초(景初) 2년(238년) 6월[집해6](※), 왜여왕(倭女王)이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 등을 (대방)군(郡)으로 보내 천자에게로 와서 조헌(朝獻)하기를 청하니(대방)태수 유하(劉夏)가 사자를 보내 그들을 데리고 경도(京都)까지 호송하게 했다 

 

아달라이사금 20(173)년조, “5월에 왜국(倭國)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왜국여왕 히미꼬가 위에 사신을 보낸것이 238년 무렵이고 247년에도 기록에 나타난다. 그런데 신라의 아달라이사금 20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이때는 173년으로서 히미꼬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고 중국사서의 기년이 틀리지 않으므로 삼국사기의 기년에 문제가 있음을 알수 있다.

 

 

(다음은 라디오님의 글에서 발췌)

 

또 伐休紀(벌휴기) 10년, AD253, 6월.

十年 六月 倭大饑 男女一千余口乞食來泊 命居南鄙閑地賜食就業 是爲倭圃 與作平齊名

10년 6월, 倭(왜)가 大饑饉(대기근)이 들어, 남녀 1천여명이 乞食(걸식)하여 배를 대어 오니, 명하여 南鄙(남비)의 閑地(한지)에 살도록 하고, 식량을 주고 일자리를 얻게 하였다. 이것이 倭圃(왜포)이다. 함께 농사짓고, 평등하게 사람수대로 나누게 하였다. 

 

『日本書紀』卷五 崇神天皇 六年(己丑 前九二) 崇神 8년, 254년, 6월(9월).

六年。百姓流離。或有背叛。其勢難以德治之。是以晨興夕■。請罪神祇。先是。天照大神。倭大國魂二神。並祭於天皇大殿之內。然畏其神勢共住不安。故以天照大神。託豐鍬入姬命。祭於倭笠縫邑。仍立磯堅城神籬。〈神籬。此云比莽呂岐。〉亦以日本大國魂神。託渟名城入姬命。祭然渟名城入姬命髮落體瘦而不能祭。

 

숭신 6년 기사의 실제기년은 252년이다.

벌휴기에 나오는 왜의 대기근 사건이 숭신천황 6년 기사에 해당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기년이 조작되었으므로.. 신라본기의 기년으로는 193년으로 되어 있어서..그 동안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연도가 서로 매칭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http://hl2dus.egloos.com/m/1853024

 

서기249년 왜인(倭人)이 신라의 장수 석우로(昔于老)를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 나오는 연대가 서로 다르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沾解尼師今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3년(A.D 249년) 여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노를 죽였다.

 

그러나 三國史記 석우로 列傳에는 沾解尼師今 7년 癸酉(A.D 253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沾解王)七年 癸酉 倭國使臣葛那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戲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爨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前日之言 戲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 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첨해왕) 7년 계유(253)에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객관(客館)에 와 있었는데 [석]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손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鹽奴]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석]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 하고 왜군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잡아서,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삼국사기 흘해왕

訖解尼師今立 奈解王孫也 父于老角干 母命元夫人 助賁王女也 于老事君有功 累爲舒弗邯 見訖解狀貌俊異 心膽明敏 爲事異於常流 乃謂諸侯曰 “興吾家者 必此兒也” 至是基臨薨 無子 群臣議曰 “訖解幼 有老成之德”乃奉立之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해왕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로 각간이다. 그의 어머니는 명원부인이니, 조분왕의 딸이다. 우로는 임금을 섬기는 데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여러 번 서불한이 되었다. 그는 흘해의 용모가 준수하며, 심기가 강직하고 두뇌가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제후들에게 말했다. “내 집안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이 때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든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덕을 지녔다”라 하고 그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다.

 

석우노는 AD 249년(또는 253년)에 죽었는데, 아들인 흘해이사금은 AD 310년에 즉위하여 A.D 356년에 죽었다. 

우로의 나이는 100살이 넘고 아들 흘해왕과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http://blog.daum.net/hl2dus/16870259

 

그런데 일연이 보았다는 古本에 있는 建虎元年에 의하면 A.D.25년이 박혁거세의 출생연도가 되고 13세가 되는 A.D.37년이 신라의 건국연도가 된다. 일연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 古本에 의할 경우 왕들이 100세 이상씩 장수하는 문제가 해소될수 있다.

(천재지변기사는 중국의 기록을 옮긴 것에 불과하다)

 

 

남당 박창화(朴昌和.1889 ~ 1962)의 유고 --

 

남당(南堂) 박창화(1889-1962) 선생은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출생이다. 1908년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배재고, 황성기독청년회관 교사를 역임하고 1923년부터 일본 동경에 거주하면서 1933-42년까지 일본 궁내청 도서료 조선전적담당 조사사무 촉탁직으로 근무하다가 1943년에 귀국하여 1962년에 돌아가시기전까지 고향인근에서 교사생활 및 한학교육을 하였다.일본 동경 궁내청 도서료에서 신라시대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필사하였고, 자신의 남당유고와 고대사 저술 등 30권을 남겼다. 1989년에는 남당의 제자 김종진 씨의 미망인인 김경자 씨가 자신들이 소장하던 화랑세기 필사본을 공개하여 화제가 되었다. 광복회 부산지부장인 이태길 선생에게 보여주어서 국역하여 화랑세기를 출판한 적도 있다.      (http://cafe.daum.net/sangjooinseoul/N7oW/98?docid=1H8fcN7oW9820111108094925)

 

역사학계는 격렬한 '화랑세기 진위논쟁'을 벌인다. 한쪽에서는 역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박창화라는 사람이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소설적 창작품이라고 한 반면, 다른 쪽에서는 1300년 전 신라 사람 김대문(金大問)이 쓴 바로 그 《화랑세기》를 필사한 진본이라고 하였다.

 

2003년에 1927-28년 일본에서 발간된 유명 역사학잡지인 〈중앙사단〉(中央史壇)에 박창화가 기고한 역사 논문 3편이 발굴, 소개되면서 비로소 '역사학자 박창화'가 조명되기 시작했다.

박창화의 손자 박인규(朴仁圭)씨가 남당의 역사학 논저 중에서 우리나라의 강역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5편을 묶어 《우리나라 강역고》(彊域考, 민속원)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유고집

1.疆域槪論 2.疆域考 3.疆域관련원고 4.疆域問答 5.蓋蘇文傳外 6.高句麗史 7.高句麗史略 8.高句麗史略 9.高句麗史抄 10.高麗史列傳 11.國岡上王紀 12.金天大帝法興眞王紀 13.奈勿實聖訥祗慈悲炤智智證紀 14.大文守記 15.麗史列傳 16.百濟王紀 17. 本紀新編列傳 18. 娑婆尼師今記 19. 宣毅公及裏平公年譜 20. 小獸林大帝紀 21. 小獸林王紀 22. 阿達羅紀 23. 安藏大帝紀 24. 於乙于同紀 25. 遼東論 26. 魏華眞經抄 27. 留記芻牟鏡 28.乙弗大王傳 29. 中川大王紀 30. 祗摩紀逸聖紀 31.芻牟鏡 上 32.芻牟鏡 中 33.芻牟鏡 下 34.芻牟鏡衍義 35.芻牟成長紀 還鄕紀 36. 平壤辨 37. 顯宗辛酉正月 38. 花郞世紀 39. 花郞世紀

 

유고집에는 명백히 창작소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일본 궁내청 도서자료에 있던 다른 역사서를 필사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위 유고집 신라사초에 의하면 삼국사기의 기년과는 다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와 있는 신라왕의 재위기와 남당유고집에 나와있는 신라왕의 재위기 비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재위기)

(남당 유고 신라사초의 재위기)

1

박혁거세

(B.C.57 ~ A.D.4)

 

2

남해차차웅

(A.D.4 ~ A.D.24)

 

3

유리이사금

(A.D.24 ~ A.D.57)

 

4

탈해이사금

(A.D.57 ~ A.D.80)

 

5

파사이사금

(A.D.80 ~ A.D.112)

(A.D.126 ~ A.D.158)

6

지마이사금

(A.D.112 ~ A.D.134)

(A.D.159 ~ A.D.191)

7

일성이사금

(A.D.134 ~ A.D.154)

(A.D.192 ~ A.D.212)

8

아달라이사금

(A.D.154 ~ A.D.184)

(A.D.213 ~ A.D.243)

9

벌휴이사금

(A.D.184 ~ A.D.196)

(A.D.244 ~ A.D.256)

10

내해이사금

(A.D.196 ~ A.D.230)

(A.D.257 ~ A.D.291)

11

조분이사금

(A.D.230 ~ A.D.247)

(A.D.292 ~ A.D.309)

12

첨해이사금

(A.D.247 ~ A.D.261)

(A.D.310 ~ A.D.324)

13

미추이사금

(A.D.262 ~ A.D.284)

(A.D.325 ~ A.D.349)

14

유례이사금

(A.D.284 ~ A.D.298)

(A.D.350 ~ A.D.364)

15

기림이사금

(A.D.298 ~ A.D.310)

(A.D.364 ~ A.D.370)

16

흘해이사금

(A.D.310 ~ A.D.356)

(A.D.370 ~ A.D.377)

17

내물마립간

(A.D.356 ~ A.D.402)

(A.D.377 ~ A.D.402)

18

실성마립간

(A.D.402 ~ A.D.417)

(A.D.402 ~ A.D.417)

19

눌지마립간

(A.D.417 ~ A.D.458)

(A.D.417 ~ A.D.458)

20

자비마립간

(A.D.458 ~ A.D.479)

(A.D.458 ~ A.D.479)

21

소지마립간

(A.D.479 ~ A.D.500)

(A.D.479 ~ A.D.500)

22

지증왕

(A.D.500 ~ A.D.514)

(A.D.500 ~ A.D.514)

23

법흥왕

(A.D.514 ~ A.D.540)

(A.D.514 ~ A.D.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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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국사서와 삼국사기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위 남당유고 신라사초에 나오는 왕의 재위기로 환산하여 비교해 볼 필요성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건연대가 맞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