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원류2
연대 |
부여 , 만주족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왜 |
(북)부여(扶餘) 성립-BC 3세기경 동명이 탁리국 세력으로부터 나와 시엄수를 건너가 송화강 유역 건국. 예족-『논형』과『위략』. 전기 중심지는 '녹산'-현도군에서 1000리가 떨어진 곳에 길림시-'서단산 문화'라는 청동기 유적지가 있음. 고구려의 침입을 받고 서쪽으로 중심지를 옮김.기원후 4세기 이후의 부여 중심지역을 농안으로 파악하고 있다 221년 |
고조선이 멸망하던 시기에 마한이 시작된다. 조선이 붕괴한 후 마한이 성립하였다는 설.
마한-북방 고구려 땅에서 발전. 옛날에 고구려는 마한이었다. 요즘 사람들 중 마한을 금마산(金馬山 익산?)으로 알고, 마한이 백제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아마 잘못일 것이다. 고구려 땅에는 (마)읍산이 있는데, 그래서 이름을 마한이라 했다.”<삼국유사> |
원주민 고인돌세력 진국-辰韓者古之辰國也 진한은 옛(辰國)이다.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중략....皆古之辰國也 한은 3종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이다..중략.이들 모두 옛날 진국이다.<삼국지> 진왕이 진한의 왕이 아니라 삼한을 아우르는 진국(辰國, 臣國)의 왕으로서, 마한을 중심으로 한‘봉건국가 황제’의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삼한의 국호가 ‘진(辰)’이었음을 의미한다. |
원주민 고인돌세력
이 ‘진(辰)’이란 국호는 예족(단군족, 부여족)들이 대대로 자신들의 국가를 일컫던 말로, 한반도 남부의 고대 국가인 진국(辰國), 요동의 진한(진조선), 발해의 국호인 대진국, 금나라에 반발해 세운 대진국(1215∼1233) 등에서 공통으로 사용한 ‘진’과 통하는 말이다. |
원주민 고인돌세력 | |
BC 195 위만 |
BC 195 연 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으로 피신하게 되고, 반란을 일어켜 조선 왕이 되어 조선을 다스리게 된다 |
|
BC 280 연진개 眞番朝鮮침입으로 기자조선유민이 요동과 한반도 북부로 밀려들자 마한의 본토인 서북한으로부터 한강 이남으로 밀려나 새로운 ‘마한’을 세우게 된다.한강유역, 아산만유역, 금강유역 등지로, 이곳에는 ‘예족 계열의 고인돌’과 ‘맥족 계열의 돌널무덤’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 ‘맥족(기자-흉노족)’의 유입)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54개국, 마한의 우두머리가 진왕이다. <한서>에는 위만조선(BC 194~BC 108)이 가로막아 그 나라에서 중국 천자를 알현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에는 예 나라(동예) 남쪽에 접해 있다는 기록과, 마한, 진한, 변진이 모두 고대 진국에 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들을 볼 때, 진국은 삼한 이전에도 한반도 남부 전체를 다스리던 예인(왜인)들의 나라였던 것을 알 수 있다. |
BC 280 연 진개 침입후 만주의 진조선(진한) 기층민 예족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여 새로운 진한(辰韓)을 세운다.<진서>진(秦) 나라에서 도망 온 사람들로서, 부역을 피해 한(韓) 나라로 왔는데, 한(韓) 나라에서 동쪽 지역에 거하도록 떼어주었다고 한다. <진한(辰韓)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 사람들까지’잡거했다고 한다. |
변진
|
위만에 패한 조선왕 기준이 측근의 신하들과 궁인을 거느리고 한반도 남부 한(韓)의 지역인 금마군에 들어가 살면서 마한 왕이라 일컬으며 50여개의 작은 나라를 통치하였고 여러 대를 전하다가 소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주한씨. 북쪽도 한씨.<후한서>그 후 준은 절멸(滅絕)되고 마한인들이 다시 스스로 진왕(辰王)을 세웠다. |
진한(辰韓) 유민’은 <삼국사기>에‘조선의 유민’이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BC 3세기 연나라의 공격으로 만주에서 내려와 한반도 동남부에 정착하여 신라의 기초를 쌓은 고조선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진한(辰韓)이 처음부터 한반도 동남부에 있던 나라가 아니라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지역에 폭넓게 분포해 살던 국가로, 진조선(진한)을 의미하고 있다 |
<흠정만주원류고>에 숙신씨 이후로, 한(漢)나라 시기에는 삼한(三韓)이었고, 위진 시기에는 읍루였다. 위나라 시기에는 물길이었고, 수당 시기에는 말갈, 신라, 발해, 백제 등의 나라였다.”-한나라(BC 202~ AD 220) 시기에 만주와 한반도는 세 개의 한국(삼한)이 있었고 이들의 땅에 말갈, 신라, 발해, 백제가 들어섰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조선유민’의 나라 ‘진한’은 원래부터 경상도지역의 작은 부족연합이 아니라 여진족이 살던 지역, 즉 후대에 진국(震國, 振國 = 발해)이 세워지는 만주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 |||
BC 58년 동부여에서 주몽 탄생
평양 지역-한군현인 낙랑 |
BC 37년 주몽이 졸본에서 졸본부여 건국-한나라 현도군에 속해있던 고구려현을 점령하면서(AD 14년), 국호를 ‘고구려’로 확정짓는다. 시조는 추모왕. (동명은 부여시조로 고구려와는 무관) 나중에 자신들의 모국인 부여마저 무너뜨린다(AD 22년). 주몽이 정복한 고구려(고구려현)는 단군조선과 상나라 문화를 흡수한 부여세력과, BC 3세기 이후 요서와 중국동부에서 대거 동쪽으로 이주한 맥족, 구려(고리, 구이, 만이)의 연합국가로 맥족 중심의 국가였다.구려(고구려)’는 일명 맥(貊)이라고도 불린다. |
왜-영산강 유역에서는 북방 맥족 계열(기자조선계)의 돌널무덤을 만들지 않고 예족계열(단군조선계)의 고인돌을 만들다 독자적인 독무덤(큰 도자기에 시신을 넣는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다 -‘예족(단군조선)’문화를 더 오래 간직한 사람들- <후한서>에 마한 남쪽에 접해있다는 ‘왜’로 표현되는 한반도 원주민 예족(왜족)이 아닌가 한다- BC7~8세기경 남하한 고인돌 세력 예족.
백제는 압록강 유역의 부여(졸본부여)로부터 이주해온 온조(재위 BC 18~AD28) 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하면서부터 시작한다.-백제(伯濟)는 마한의 통제를 받는 수많은 소국 중 하나에 불과 |
BC 108년 평양 근처의 위만조선이 망하면서 남부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마한(백제는 마한 연방국임)’을 피해 충청북도, 경상북도 일대로 이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박혁거세 세력과 (흉노계) 낙랑 사람들 이 낙랑인(위만조선인) 세력은 경상도 일대에까지 진입하여 <삼국사기>에는 ‘말갈(맥)’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한다.
당시 한반도 북쪽은 한나라에 속한 예맥인들이 낙랑군, 동예(동부여, 예)를 이루고, 남쪽에는 고조선의 전통을 이은 한(韓)이 72개나 되는 국가 연맹의 형태로 있었다. |
||
과거 요동 북부에 있던 부여(해부루 부여, 말갈, 동예)는 서쪽에서 이주해온 북부여(해모수 부여)에 의해 한반도 동북으로 쫓겨나면서 동예(동부여)라는 국가로 새롭게 탄생하는데, 이로 인해 동예(말갈, 동부여) 사람들은 북부여 세력에 반감이심했다 |
백제가 처음 한강 유역(경기 북부)에 정착할 당시(BC 18) 평양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한군현인 낙랑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백제 동북방(강원도)에 있던 말갈(동예, 동부여)과는 대립하는데,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요서에서 이주한 맥족(동이)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BC 1세기 북방 진한(조선)의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남하한다. 진한 구성원들 .선주민 예족 .진의 노역을 피해 온 연나라 사람들(BC 220년경) .조선유민- 준을 따라온 조선유민들로 준이 죽고 마한이 동쪽 땅을 내주어 살게 했다(BC 190년경) 위만조선의 유민들(先是 朝鮮遺民) 이들이 진한을 이루고 6부로 나뉘어 살았다. 박혁거세를 왕으로 세우고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슬한(居瑟邯)으로 불렸는데, 간(干)과 한(邯)이 ‘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지고 도합 24개 소국가의 왕은 마한에서 파견된 것이다. 마한의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사로국을 중심으로 진한 6국이 힘을 모아 서라벌이 탄생했다(BC 57년)
| ||
37년 고구려에 멸망한 평양지역 ‘낙랑’은 다시 한(漢)나라 광무제에 의해 회복되어(44년) ‘새로운 낙랑’으로 313년까지 유지되다 고구려에 병합이 된다. |
37년 대무신왕 낙랑멸 백성 5천여 명이 신라 투항 나머지는 낙랑의 동맹국인 말갈(함경도, 강원도, 충북, 경북) 일대에서 독립 세력으로 |
북부여로부터 밀려난 동부여는 북부여에 대해 감정이 좋지않은데 북부여(졸본부여)에서 백제가 이주해 오자 동예(동부여) 세력으로 추정되는 말갈은 백제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진한의 왕은 마한왕이 지명한 마한사람만이 될수 있는데 진한6부 촌장이 모여 왕으로 세운 사람은 마한 사람이 아니라 진한 사람 혁거세이므로 이것은 진한이 마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한반도 남부‘가야’는 한반도 남부의‘예족(왜족, 부여족)’국가로 볼 수 있다 | |
. |
57년 고구려가 한반도 동북지역의 옥저와 그 남쪽(동예, 동부여)을 공격한다. 한반도 중부에 있던 말갈세력(기자조선, 낙랑유민, 동예)이 사라진다, 그들중 일부가 한반도 남부 신라 지역으로 유입되어 박씨로부터 왕권을 뺏은 것으로 보인다-석씨 |
한강 유역으로 이주한 백제는 건국 초(BC 16)부터 말갈로 표현되는 강원도 지역 동예 세력에 의해 공격을 당한다. 이후 백제 북부에 있던 낙랑마저 백제와 관계를 단절하자(BC 11), 백제는 남쪽의 마한에 의지하게 된다 |
고구려에 의해 밀려난 동부여(동예, 왜) 세력은 남쪽으로 내려와 서기 57년 신라를 정복하며 박씨로부터 왕의 지위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석씨 신라 등장),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말갈(낙랑)을 포섭한 것으로 보인다.-57년 신라 박씨로부터 석탈해 즉위 |
한반도 ‘예족(왜족, 부여족)’국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땅을 침략한 외부세력인 ‘기자조선, 위만조선, 낙랑, 한(漢)’ 세력에 강한 적개심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과 대립한 대표적인 국가로 마한, 가야, 왜(예)를 들 수 있다. | |
낙랑과 관계가 악화된 후 백제는 마한에 신기한 사슴을 진상하고(BC 10) 수도마저 마한과 가까운 한강 남쪽으로 옮기며(BC 5) 북쪽의 낙랑과 말갈(동부여, 예, 왜)을 견제하게 된다.
마한은 북방으로부터 이주하는 유민들을 동쪽에 살게하고 백제도 그들의 위쪽에 살게 하면서 지배력을 행사한다 |
박씨 신라(사로국)’는 경상도 지역 20여개 국가 중 하나인 소국으로서 충북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이 한반도 중부(충북 보은, 괴산)의 ‘신라’가 백제의 견제를 받기도 하고, 백제와 전쟁도 벌이면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사실 이들은 비록 ‘신라’는 아니었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 이후 ‘석씨 신라(동예계 신라)’와 연합한 ‘낙랑계 사람들(말갈)’로서, 이후 역사서에 ‘신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
마한은 한군현(현도)과 직접적으로 대립했고, 왜(예)와 가야는 낙랑세력이 유입된 신라(진한)와 수백 년 간 대립했다.
이 예족(진조선) 공동체인 한(韓), 가야, 왜(예) 사람들 중 특히 ‘왜(예)’는 <삼국사기>에 건국 초부터 신라(사로국)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는데, 이 ‘왜’는 지금도 학계에서 그 출처가 불분명하여 반드시 일본열도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 |||
동예(왜로 추정) 세력이 백제를 장악하는 4세기 이후에 가서야 마한에서 독립하여 거꾸로 마한을 병합하기 시작한다. |
(65년 김알지 탄생)김알지 세력-신라에 유입된 낙랑 유민 세력, 충북지역 말갈(낙랑)인들이 ‘석씨 신라(동예 신라)’와 연합-왜(동예)인 호공의 중재로 신라(동예 신라)는 말갈의 영토까지 병합하여 북쪽으로 국경이 크게 확대된다 |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는 BC 57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경주지역에서 최초로 왕이 되었을 때 신라를 공격하지 않다가, ‘흉노계(위만조선계, 낙랑계)’ 이주민으로 추정되는 ‘알영 부인’이 유입되자마자 신라를 침략하기 시작한다(BC 50). 왜는 이후 신라와 수백 년 동안 큰 이유 없이‘원수’처럼 지내면서 공격을 한다. | |||
북방에서 이주해온 두 세력 곧 석씨(동예, 왜)와 김씨(낙랑, 말갈)가 진한계 박씨를 대체해 주도권을 쥐게 되고 끊임없이 함경도 지역 동예 및 한강 이북 낙랑 지역에 대한 회복을 시도하게 된다. |
이는 예족(왜족)의 땅인 진한에 외부 정권인 한나라 낙랑 사람들이 유입되어 국가를 이루어가는 것에 대한 토착민(왜)의 반발로 해석할 수 있다. | ||||
이렇게 ‘낙랑’ 세력의 근거지가 되는 신라는 종종 ‘낙랑’으로 불리게 된다. 565년 북제의 황제는 신라의 왕을 ‘낙랑군공’으로 임명하며, 이후 594년 수나라의 황제도, 624년 당 나라의 고조도 왕을 낙랑군공으로 책봉한다. 심지어 고려 태조는 신라 경순왕(김부)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며 ‘낙랑공주’라고 호칭하며, 목종 11년(1008년)에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낙랑군’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낙랑세력(말갈)은 왜(예)인 호공의 중재로 신라(사로)와 연합한 뒤(65년)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된다 |
맥족(흉노) 중심의 고조선(기자조선) 평양 지역을 제외한 지역은 모두 예(왜)족 중심으로서, 예(왜)가 한반도와 만주에 넓게 분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이 기자(위만)조선, 한나라 침입 이후 남부로 축소된 뒤, 북쪽에 남아있던 예인(왜인)들은 말갈로 불리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391년‘왜’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기록이 있다-이 당시 왜(동부여, 동예)는 중심지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 서부 지역으로 옮겨간 상태였다-부여의 별칭인 ‘예’는 최소한 <삼국사기>에서는 ‘왜’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 ||||
말갈은 한반도 동북부에 살던 동부여(동예) 사람들을 일컫다. 그들은 과거 북부여에 밀려 동진한 사람들로서 부여, 고구려와 언어나 풍습이 같았으며 성품이 공손하고 성실했던 문화인들이었다. 3세기 초 한나라가 멸망할 즈음부터 예족 중심 국가인 말갈(동예, 동부여)은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한(漢)군현계 맥족 중심 국가인 낙랑, 대방, 백제와 대립했다. |
신라를 공격한 말갈이 중국 측 기록을 보면 ‘부여’로 기록돼 있다.“안제영초 5년(111년)에 부여 왕이 칠 팔천인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처음으로 낙랑을 침범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였으나, 이후에 다시 화해하였다.”<후한서> |
“환제, 영제 말년에(146~189, 한(韓) 사람들과 예(濊) 사람들이 강성해져서 중국 군현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한(漢) 나라 군현(낙랑, 대방)에서 많은 백성들이 한(韓)나라로 이주를 했다.”<삼국지>-한반도 서북부의 많은 한군현(낙랑, 대방) 사람들이 남쪽 마한의 북부 국가인 백제로 이주를 했음을 말한다 |
‘말갈’이 다시 나타나 대대적으로 신라를 침략하며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사로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한다(125년). 그 뒤로도 말갈은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한다(137년, 139년). - |
||
167년에는 북부여의 왕 부이(夫台)가 2만 명을 이끌고 만주의 한 군현인 현도를 공격한다. 한나라를 공격할 만큼 부여는 국력이 강했던 것이다.
말갈(동예)이 백제를 100여년 만에 다시 공격(210년).-대방 출신 초고왕에 의해 다스려지던 당시, 요동 실권자 공손강(공손탁의 아들)이 한강 이북에 대방군을 설치하여(204) 과거 한사군 유민들을 모우고 . |
초고왕(재위 166∼214)(=구이)시기부터 백제가 기존과는 다른 북부여계 ‘부여’씨가 왕이 되어 ‘새로운 시조(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167년 아찬 길선이 반란을 일어키다 백제로 망명- 신라왕이 ‘경주’가 아닌 ‘한강(한수)’으로부터 백제에 이르러 공격함. 진한의 소국 신라’는 경주 근처의 국가들도 제압하지 못한 약소국이었는데 한강 유역에서 백제로 공격한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
|||
백제를 흡수하려 하자, 당시 말갈은 한반도 중부에 새로 들어서는 국가(대방)를 원하지 않고 공격하게 된다. 그 주요 대상은 바로 대방과 친연관계에 있던 마한의 ‘소국’ 백제(대방 백제)였다. 그러나 말갈(동예, 왜)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백제가 무너지지 않고, 거기에 요동 공손씨의 세력이 중원(위나라)과 맞설 정도로 강력해지자 말갈은 공격을 멈추게 되고, 결국 말갈은 요동 공손씨 세력에 귀속된다(230년) |
한반도 북부의 한 군현인 낙랑, 대방이 약해지고 대신 주변의 마한(한)과 동예(예, 왜)가 강성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마한(한) 지역으로 이주했는데 백제가 당시 마한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대부분 ‘백제’로 유입되었고 그들의 대표가 ‘초고왕’이었다-백제의 두번째 기원지 대방군 |
진(晉)의 진수(233∼297) <삼국지>에는 3세기 말 신라를 장악한 왜(예, 동부여)에 대하여 “(변한, 진한에서)스물 네 나라 중 열 두 나라가 진왕(辰王)에 속해 있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에게 그 나라들을 맡겨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진왕은 그 사람들이 독립하여 왕을 세우지 못하게 한다. <위략>에는 이주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분명히 마한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172년 소백산맥 북부에서 신라지역으로 길(조령, 죽령)을 내던 석씨 세력(동부여, 말갈, 동예)이 박씨 왕계를 끊고, ‘석씨’인 벌휴왕(재위 184~196)을 왕으로 세운다. |
백제로 유입된 ‘낙랑-대방세력’과 신라를 장악한 ‘부여(동부여, 말갈, 예, 왜)세력’의 한반도 주도권 싸움으로 볼 수 있다 | |
220년 한(漢)나라가 멸망하게 되고 위(220~265)가 들어섬 한이 망한후 한 군현(낙랑, 대방)은 한나라(漢)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대신 당시 요동의 실세 ‘공손씨' 세력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공손연은 점차 요동 뿐 아니라 한반도 중부(낙랑, 대방)와 중국 동부 산동지역까지 세력을 뻗치며 중원을 차지한 위나라와 전쟁을 벌일 만큼 강성해 진다. |
고구려는 한나라(漢 BC 202∼AD 220)와 전쟁을 통해 성장(2세기 말까지 170년 동안) 그들 맥족(기자조선)이 중원에서 밀려났던 세력이다
한이 망한후 많은 유민유입 |
부여(동부여, 동예, 왜)계 석씨 ‘벌휴’는 신라에서 군주(軍主)라는 관직을 처음 두고, 소문국을 정벌하여 경상도 일대로의 영역 확장 사업을 본격화한다. 그리고 자신들(예, 부여)의 적이 된 한나라‘대방계 백제’와 충북일대에서 치열한 전쟁을 자주 벌인다. |
|||
위에 위협을 느끼고 위를 공격(242). |
요동 공손씨의 세력이 커지자 그 여파는 한반도까지 미치게 되어 공손씨와 가깝게 지내던 한반도 중부의 백제(대방 백제)가 또다시 새로운 국가로 태어나게 된다. 바로 공손연이 다스리던 대방 출신 고이왕(구이)이 백제에 등장한 것이다(234). 마한 북쪽의 백제가 한 군현 세력 대방(공손씨 대방)에 병합되는 시기는 한나라 당시가 아닌 한나라 멸망 이후 대방 출신 고이왕 대에 가서이다(234년).한(漢) 문명을 이은 백제(伯濟) |
가야(왜?)’는 이전의 신라에 대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석씨(부여) 신라’와 화친 -가야는 왕자를 볼모로 보내며 신라의 속국이 된다(212). 대성동 고분군에서 동복(銅鍑 ), 마구, 순장풍속-북방 유목민족의 고유문화로 선비족과 연관 중국 (요서) 라마동 고분군과 유사-부여(예) | |||
대방군 주변에 있던 강국인 남쪽의 한(韓, 삼한), 동쪽의 왜(동예, 동부여)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위가 요동 공손씨를 공격하자 고구려가 같이 도와 공손씨가문을 요동에서 축출한다(238).‘신라’로 묘사되는 ‘낙랑’과 ‘말갈’로 묘사되는 ‘예(왜)’가 지속적으로 마한에 속해있던 백제를 공격하고 있었다 |
<삼국사기>에는 고이왕이 과거 대방에서 남하한 초고왕과 ‘동복형제(친형제)’ 사이였다고 한다. 초고왕은 166년 즉위, 고이왕은 234년에 즉위했기 때문에 둘 사이는 ‘친형제’가 될 수 없고 출신지와 이름이 같아 마치 형제 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초고의 초는 작다, 닮다는 뜻으로 작은 구이란 의미. 구이는 큰 사람이란 뜻의 부여(왜)어 |
동명의 후손 중에 구이(仇台)라는 사람이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탁이 자기의 딸을 구이에게 시집보냈고, 그들(백제)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북사>, <수서>, <삼국사기> 한군현 대방군에 세워진 국가로 한강 남쪽(위례성)에 있던 백제와는 다른 세력, 대방 유민이 백제를 장악하고 지도층이 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이왕(구이왕) 대방시대 (234~286) |
부여(예)계 석씨 세력이 신라를 장악하던 시기(서기 222년 경) 신라의 북쪽 영토를 보면 강원도 춘천일대(우두주), 함경남도(웅곡) 지역까지의 넓은 지역으로, 석씨 세력 유입 이전 신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토가 넓어진다. 이는 그 지역 세력(석씨, 부여, 동예, 말갈, 왜)이 신라를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150여 년간 신라에서 세력을 유지하게 된다 |
||
말갈(동예, 왜)은 이후 고이왕이 재위할 당시 백제(대방 백제)에 말을 바치며 충성을 했다(258).
북부여와 동부여(예)의 갈등은 수백 년 간 이어져 3세기 말 북부여가 선비족에 밀려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해 올 때 동부여(예)를 한반도로 밀어낸다.
북부여나 예(동부여, 왜)의 국호는 모두 ‘예(부여)’였지만, 북부여는 ‘예’라는 호칭 대신에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일컫던 ‘부여’라는 국호를 선호한다. 반면 북부여에 의해 동쪽으로 쫓겨난 예(동부여, 동예)는 중국인들이 임의로 부르던 ‘부여(휘)’라는 호칭 대신에 ‘해’를 의미하는 ‘예’ 또는 ‘왜’라는 고유어를 자신들의 민족 또는 국가의 명칭으로 유지했다. |
.
|
백제는 과거 마한에 속하여 한 군현인 대방과 지속적으로 대립관계를 보였는데, 대방계 왕인 초고왕, 고이왕 이후 대방과 서로 협력관계가 된 것이다. 238년 공손연이 위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낙랑과 대방이 다시 위나라의 지배아래 들어가자 고이왕의 백제(伯濟)는 공손씨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며, 독자적인 국가로 커간다. 공손씨의 낙랑과 대방이 조조의 위나라에 멸망할 무렵(238) 그 지역 사람들은 대방 출신 왕 구이(고이)가 다스리던 백제(대방 백제)로 대거 피난 올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고이왕 시기(234~286)에 여러 가지 제도적 정비를 갖추고 관등(6좌평 16관등)과 공복이 제정되는 등(260년), 다른 마한연방 국가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중앙집권이 강화된다. 그러나 고이왕 당시에도 백제는 여전히 마한에 속한 작은 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3세기 후반에 기록된 <삼국지(220~280 기록)>에 백제(伯濟)는 마한의 50여개 나라 가운데 하나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
한반도 남부를 점령한 ‘왜 | ||
220~226년 읍루의 배반 238년 위가 부여와 사돈관계를 맺고 있던 요동의 공손가문을 멸-낙랑군과 대방군마저 차지하게 된다-부여위축 |
242년 부여가 쇠락하자 강성한 고구려가 동천왕때 위나라가 차지한 요동 지방을 공격하게 된다. 한반도 동북부에 있던 석씨 신라의 세력권이던 동부여(동예)마저 점령하게 된다(245년). |
|
유사 이래로 한 번도 침략한 적이 없던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동예, 동부여)’을 침입하는데 신라는 이를 막지 못하고 후퇴한다- |
||
246년 위 관구검이 고구려 침입- 대파하고 한반도 서북부 낙랑, 대방 등지에서 건재하였으며, 고구려가 잠깐 차지했던 동예(신라 북부 영토)를 자신들의 세력 하에 두었고, 이어 한반도 남부의 한(韓, 삼한)과 전쟁을 벌여 세력을 넓히게 된다-진한(신라) 여덟 나라를 떼어 낙랑의 관할 하에 두려고 하였다.(247년-위나라가 신라 북부 영역이었던 동예(동부여)를 점령함)-미추왕이 왕으로 있던 시기 |
246년 위 관구검 고구려를 반격해 도읍 환도성을 빼앗는 등 고구려를 크게 물리치고, 고구려는 수도마저 옮기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247년-위나라가 신라 북부 영역이었던 동예(동부여)를 점령함)
왕이 남옥저로 달아남 |
“(246년)한(韓) 나라 사람들이 대방군 기리영 지방을 공격하게 한다. 당시 대방군 태수였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는 이에 출병하여 한(韓) 나라를 정벌하는데, 궁준은 전사하고 두 군은 한(韓) 나라를 멸망시킨다.”<삼국지> |
한국 측 기록에는 당시 삼한이 패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동예(동부여)는 위나라 낙랑, 대방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되고(247년), 신라(진한)는 부여(동예)계 석씨가 쇠락하는 대신 낙랑계(흉노계) 김씨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262년 미추왕 등극).낙랑계(위만조선, 흉노) (김씨)세력신라장악 -“그들은 낙랑 사람들을 ‘아잔(阿殘)’이라고 부르는데 이말의 뜻은 낙랑에 ‘자신들이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삼국지> |
||
(265) 위나라가 결국 오래지 않아 망하면서두 나라간 전쟁도 중단된다. 274년 진(晉)을 세운 사마염은 요령성 요양을 중심으로 평주를 설치한다-동북지역은 잠시 안정된다 |
(286)고구려가 대방을 침략할 때 백제가 고구려를 물리침으로 백제는 대방과 하나로 통합된다. 낙랑과 말갈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백제는 대방과 하나로 통합된 상태였다-백제가 말갈과 연합한 낙랑을 공격하는데(304) 대방을 넘어 더 북쪽에 있던 낙랑을 직접 공격한 것으로 알 수 있다. |
부여계 석씨(동예, 동부여) 세력이 약화되면서 갑자기 친고구려 정책을 쓰게 되고 고구려에 빼앗긴 예(동부여, 예)의 책임자였던‘우로’ 또한 ‘왜인’에 의해 죽는다 |
|||
모용외(269 ~ 333)가 등장 부여에 침입하여 의려가 자살하고 (285) 부여는 큰 타격을 받아 동쪽 두만강 근처 함경도 지방 북옥저까지 밀려난다(해모수북부여). 그로인해 함경도 지방의 동부여(동예, 왜) 세력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를 장악하게 된다(304년 비류왕 등극). 293년, 296년에 모용외가 고구려를 침입하면서 고구려는 큰타격을 입고 남쪽진출 대방을 공격(286), |
-이때 고구려가 낙랑의 연합국인 대방을 공격하며 압박하자(289년), 낙랑은 한반도 중부로 밀려온 동예(동부여)와 힘을 합해 백제를 침략한다(298). 한반도 중부의 동예(동부여, 왜), 낙랑, 대방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던 백제와 신라를 확실하게 자신들의 통제에 두어야 했던 것이다. |
중국기록을 보면 당시 백제는 마한의 한 소국으로서, 한반도 중부 한강 유역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열도의 ‘왜’와 갈등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으므로 신라가 백제에게 ‘왜’를 같이 치자고 할 때 ‘왜’는 일본에 있던 왜가 아니라 백제와 신라 주변에서 두 나라를 함께 괴롭힌 ‘공공의 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295년 신라왕이 백제와 연합하여 공격하려 했던 ‘왜’는 당시 신라와 백제를 동시에 자주 공격하던 ‘예(동예, 동부여)’이다, |
왜(동부여, 동예)의 부활-위 멸망으로 동예(왜, 동부여)가 신라를 괴롭힘-“(287년) 여름 4월에 왜인(倭人)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을 놓아 태우고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삼국사기 신라본기> 그러자 신라왕은 당시 자신들과 ‘원수’였던 백제에게 손을 벌려 그들을 물리치려 한다-김부식은 신라를 괴롭혔던 ‘동예(예, 동부여)’를 모두 ‘왜’라고 표현하고 있다-맥(貊)은 강원도 함경도 지방의 ‘동예’를 의미한다 |
||
말갈(동예,왜)-위가 망하고 모용씨가 북부여를 공격하여 북부여를 동쪽으로 몰아내자(285, 286) 북부여에 의해 밀려나 백제가 있는 한강으로 남하하면서 위나라 멸망 이후 새롭게 독립국이 된 한반도 서북부‘낙랑국’과 연합하여 남쪽에 있는 마한 연맹국 백제(대방 백제)를 공격한다(298)- |
고구려의 한(漢)군현 세력 축출-302년에서 315년 사이에 옛 한(漢) 군현에 속해있던 현도, 요동, 낙랑, 대방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한반도에서 낙랑과 대방을 몰아내게 된다
|
공손씨와 위나라의 기반을 모두 잃은 대방을 흡수하여(대방백제) 남쪽 마한에 의지하면서 낙랑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공격으로 왕(책계왕)이 죽고(298), 낙랑을 다시 공격하지만 또다시 왕(분서왕)이 살해된다(304).낙랑-말갈(동예)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두 왕을 잃게 된다(298, 304). 304년 출신이 불분명한 평민왕 비류가 등극하게 된다. |
말갈(동예, 왜)이 신라를 복속하면서 강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낙랑마저 흡수해 버리며 강해지는데(300년 낙랑의 신라 항복), 이 때 말갈(동예) 세력 하의 신라(왜 신라, 석씨 신라)는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한다. 이는 신라가 스스로 개척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갈이 신라를 점령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말갈이 신라를 복속하고(298) 낙랑, 대방의 항복을 받고(300), 백제마저 결국 말갈(동예, 왜)의 손아귀에 넘어가자(304) | |
동부여(동예, 왜) 세력이 백제를 장악하게 된다(304년 비류왕 등극). |
위기감을 느낀 고구려는 이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먼저 말갈에 항복한 평양 주변 낙랑을 침입하여 멸망시키고(313), 이어서 백제 북부에 있던 대방도 무너뜨린다(314). |
동부여(동예, 왜)세력이 장악한 뒤 국력이 급격히 성장하여 낙랑국이 있던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장악하며, 여세를 몰아 자신들을 몰아낸 북부여를 함경도 지역에서 공격하여 요하유역까지 쫓아낸다. |
한반도로 남하한 동부여, 즉 말갈(동예, 왜) 세력은 위나라 멸망으로 약해진 낙랑과 연합하여 강성해지며, 이에 백제(대방 백제)와 신라의 ‘두통거리’가 된다. 당시 신라왕(유례왕)은 적국인 백제와 연합하면서까지 이들(왜, 말갈)을 물리친다(295). |
||
왜(말갈, 예)의 한반도 장악 첫째는 평안도 지역 낙랑과 대방(백제)이 중국으로부터 고립되어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비족에 의해 동쪽으로 쫓겨난 만주 부여(북부여) 세력이 함경북도 북부(간도) 지역에 새로 거주지를 옮기며 말갈(동부여, 왜)을 압박했기 때문이다(285). |
313년 낙랑이, 314년 대방이 고구려에 멸망된다. 이로써 기자조선 이후 1300여 년 동안 지속된 ‘흉노계(기자조선계)’ 정권은 마감이 된다.이들 낙랑, 대방, 왜(동예) 정권은 사라지지 않고 그 세력이 백제와 신라로 유입되어 새로운 백제(왜)와 새로운 신라(낙랑)를 건설하게 된다. |
<삼국사기>에 이 시기(300) 낙랑과 대방(백제 책계왕이 298년 말갈에 빼앗긴 백제 북부 지역)이 ‘신라’에 ‘항복’했다고 기록한 사실은 이들 두 나라가 작은 국가인 사로국(신라)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급격히 세력이 커진 한반도 중부의 말갈(예, 동예, 왜)에 항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298년-말갈의 신라 복속-‘왜(말갈)’의 공격으로 크게 고민하던 신라 왕(유례왕)이 사망하자, 신라는 ‘왜(동예, 말갈)’와 마치 ‘하나의 나라’처럼 지내고 ‘신라’의 영토는 함경도까지 확대된다(300). -고구려와 위나라에 빼앗겼던 함경도 지방(비열홀)을 다시 회복- 한반도 북부에서 낙랑과 함께 자웅을 겨루던 ‘예(말갈, 동부여, 동예, 왜)’는 과거(164) 자신들이 점령했던 ‘신라(사로)’를 다시 정복하여(298) 이를 기반으로 낙랑, 대방 지역마저 흡수하게 된 것이다(300) |
||
낙랑 지배층은 313년 고구려에 망하면서 한반도에서 요서로 이주하여 선비족 모용씨를 돕게 된다-낙랑의 왕준은 그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씨에 투항하여 낙랑군을 (요서에) 세운다. 태수가 되어 군사에 참여.”<자치통감> |
비류왕(재위 BC 304~344) 백제의 평민 왕-선비족의 동진으로 인해 부여의 일부 세력 또는 동부여(동예, 왜) 세력이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백제로 유입된 세력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구수왕의 아들’로 기록된 비류왕 |
그런데 신라의 국력으로 낙랑, 대방의 연맹국인 함경도 지방의 동예(왜, 동부여)를 정복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신라의 영토가 함경도에 이른 것은 동예가 신라를 장악했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
|||
낙랑을 흡수한 요서의 선비족 모용씨는 이후 전연(337~370)을 세워 중원을 정복하고 453)부터는 한반도에서 신라, 백제, 왜를 장악한다 |
고구려와 모용 선비의 대결- 293년 모용씨의 수령인 모용외가 침입하기 시작하여 405년까지 100년 넘게 모용 선비와 10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쟁을 한다 407년 모용씨 왕조인 후연(後燕)이 멸망하면서 비로소 전쟁을 그치게 된다. |
구수왕(214~234 재위)은 대방계 ‘초고왕(작은 구이)’의 장기집권을 마감하고 왕이 된 사람으로 초고왕과는 계열이 다른 백제의 중시조였다. 비류왕 역시 고이왕부터 다시 시작된 대방계 왕들(책계왕, 분서왕)과 다른 계통의 사람이었다. 이들 두 왕(구수왕, 비류왕)의 공통점은 한사군 계열인 ‘대방’의 ‘구이(초고, 고이) 백제’로부터 새롭게 정권을 잡은 왕들로 말갈(왜)사람일가능성이높다. |
300년 낙랑과 대방이 항복한 이후 신라(동예)는 307년 국호를 기존의 ‘사라’, ‘사로’ 등의 고유어 국호에서 중국 한자를 사용한 국호인 ‘신라’로 확정한다.-이 시기에 낙랑계(흉노계) 사람들의 이주와 영향력이 확대됨을 의미 |
||
낙랑의 다른 한 부류는 남쪽 신라에 편입된다.
|
고구려와 백제(북부여) 세력의 대결-북부여세력(근초고왕)까지 유입된 백제는 급격히 국력이 커져 근초고왕 시기(346∼375)에 고구려로부터 옛 대방지역을 빼앗고 마한과 가야를 정복하는 등 정복활동을 활발히 한다. 그는 북부여가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적대시했듯이 백제를 장악한 뒤에도 고구려와 시종 적대적 정책을 쓴다 |
비류왕이 등극한 304년 이후, 그동안 백제와 원수처럼 전쟁을 하던 낙랑과 말갈(동예, 왜)은 신기하게도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왜 백제)의 영토는 비약적으로 확대된다. 그는 중국에서 인정할 만큼 강했던 마한을 크게 몰아내고 금강유역, 호남평야 일대까지 장악하게 되며, 그동안 백제가 차지하지 못했던 ‘말갈(동예, 왜)’ 영역이었던 영서지방까지 차지하게 된다. 이는 약한 백제가 강한 말갈을 복속한 것이 아닌 말갈이 백제를 복속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왜(예, 부여) 동맹체가 된다왜(동예), 신라(석씨계), 백제(왜) 삼국은 서로 혼인하거나(312년) 예방을 하는 등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를 유지한다. |
||
304년경 부여(북부여)가 백제의 공격을 받아 요서지역 선비족 왕조인 연나라 근처(농안)까지 쫓겨간다
이렇게 동부여 백제(동예 백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서쪽 요하 근처까지 내몰린 북부여 사람들은 그곳에서 또 다시 모용선비의 전연에게 공격을 받아 왕과 백성 5만 명이 잡혀가면서 국가의 존립이 어려울 지경에 이르게 된다(341). |
요동의 선비와 부여세력(북부여, 동부여, 옥저, 동예)은 모두 고구려에 적대적인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한(漢)나라 시기에 한군현에 속해 있다가 한나라 멸망 이후 공손가문과 위(魏) 등의 세력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4세기 고구려가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현도군, 요동군, 낙랑군, 대방군 등을 공격하며 점령해가자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하며 고구려에 저항하게 된다. |
(비류왕이 재위한 304년경) 동예(동부여, 왜)가 백제를 장악한 뒤, 자신들의 근거지인 한반도 동북부 동예지역으로부터 북부여 본거지인 만주 지역을 ‘동쪽에서’ 공격하여 세력을 넓힌다<자치통감> 또한 마한과 협력관계에 있던 ‘백제’가 비류왕 당시 금강을 넘어 호남평야 일대까지 마한 지역을 석권하게 되는데, 이는 한강 유역의 소국이자 마한 연맹의 일원이던 백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마한과 관련이 없는 새로운 세력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가능 |
|||
백제가 북부여를 공격했다고 기록(자치통감)- 당시 한반도 대부분을 장악한 말갈(왜, 예) 세력의 중심지가 백제였음을 의미한다. 그렇지않다면 ‘동예(동부여)’ 또는 ‘옥저’로 기록했을 것이다. |
(부여, 예)’ 세력은 이후 근초고왕에 의해 한반도에서 밀려 4세기 중반 일본(왜)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파형동기가 출토. 왜’는 ‘부여’, ‘예(동부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
346년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는 자신들 근처로(농안) 이주해 온 부여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하여 현왕을 포함해 5만 여명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부여를 사실상 멸망 직전까지 이르게 만든다.-남하한 북부여 유민들 선비족에 의해 크게 무너진 고구려를 지나 백제를 점령하여 새로운 백제를 만든다-근초고왕 |
선비족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붕괴된 북부여는 다시 한반도로 남하하여 과거 자신들을 서쪽으로 몰아냈던 백제(왜)를 몰아내고 한강 유역에 새로운 부여 정권(부여 백제)을 세우게 된다-346년 근초고왕 즉위 |
부여(북부여)는 왜(예) 세력의 기원지로서 동부여(동예, 왜)와는 친연관계가 있었지만 BC 3세기 고리국 출신 해모수 세력에 의해 동쪽으로 쫓겨났던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북부여와 관계가 친밀하진 못했다. | |||
|
346년 근초고왕 즉위 -선비족에 의해 붕괴된 부여(북부여) 일파가 남하하여 정권을 장악- 그동안 백제를 다스린 왜(동예) 정권이 무너지게 된다. -북부여의 공격을 받은 백제(왜 백제)는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한반도 북동부와 남부로 밀려난다.왜(예 백제)는 신라를 ‘급하게’ 공격하여 신라의 수도 금성(경주)까지 포위한다. |
신라는 왜(동예?, 가야?)의 공격을 막아내고. 부여(동예)가 약해지고 모용 선비의 나라인 연(전연)이 강성해지자당시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된 모용 선비족 연나라와 관계가 깊은 김씨세력, 즉 예(왜)계 석씨에 눌려 있던 김씨 세력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나물왕 즉위 356년). - 낙랑계 김씨 김일제후손 |
근초고왕과 전연으로부터 내려온 북부여세력(목라근자)이 마한복속- 이 시기부터 백제와 신라, 마한, 진한, 가야, 왜 등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국가는 북부여계 이주민 정복자들의 세력 하에 들어가게 되며, 과거의 왜(동예, 말갈) 연맹은 와해되어 버린다-동예(말갈, 왜) 세력은 다시 함경도, 강원도, 경상남도, 일본 서부 지역으로 축소되고, 그 땅은 백제(북부여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아래 놓이게 된다.왜(예)의 중심지가 한강 유역 백제에서 일본으로 점차 바뀐다. | ||
370 모용씨의 전연이 멸망 백제의 요서진출 모용씨의 전연은 서쪽에는 전진, 동쪽에는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연은 중원을 정복하기 전에 배후의 위험세력인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수도를 파괴하고 큰 피해를 입힌다(342). 그리고 이어서 부여를 침공해 부여를 거의 멸망상태로 만들어 버린다(346년). |
비류왕 대에 이미 점령했던 한반도 남부의 마한을 다시 정복하고 가야에까지 세력을 넓힌 점, 백제(왜 백제)와 관련이 없던 요하 유역(요서)을 근초고왕이 점령한 점, 백제가 부여의 시조묘인 동명묘를 설치한 것이 4세기 중엽의 일인 점-무덤양식이 4세기 후반 갑자기 바뀌는 것으로 증명된다-만주지역 고분양식(석실 적석총)이 나타난다 |
선비계(흉노계) 신라 김씨 세력은 부여계 이사금에서 선비계(흉노계) 호칭인 마립간으로 바꾸게 된다. |
간, 한’은 예맥인(알타이어인) 중 북방 민족들이 사용하던 호칭으로, 중국 기록상에는 처음에 선비족 사람들이 3세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송서). 이들 만주지역 부여(북부여)는 마한을 물리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왜(일본 부여)를 정벌하게 되는데, 북부여 기마족은 369년 일본의 왜의 야마토(大和) 정권을 정벌하고 6세기 초까지 왕권을 장악하며 일본문화를 꽃피우게 된다(존카터 코벨). | ||
서쪽의 전진이 동쪽의 모용씨 전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자(370) ‘부여계’ 왕인 근초고왕이 북부여(전연부여)이주세력과 함께 요서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
백제가 근초고왕 당시 요서를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혼란과 더불어 요서 지역의 부여 주민들이 대거 백제로 유입되었고, 북부여 출신 백제왕들 역시 ‘본토’인 요하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신라에서 이 시기(4세기)에 들어 과거 400년 동안이나 사용한 ‘이사금’ 칭호를 버리고 당시 선비인들이 사용하던 왕호인 ‘간’을 왕호로 삼게 되는데, 이는 그만큼 신라와 당시 북방 민족과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한다 |
4세기 후반에 이전의 주술적 문화가 사라지고 실용성과 귀족성,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북아시아 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백제는 이 시기 이후 아직기, 왕인을 비롯한 전문직 사람들을 대거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 ||
요서지역은 당시 백제로 이주한 부여인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의 땅인 요동을 고구려로부터 되찾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이로써 근초고왕의 백제(부여 백제)는 한반도에서 왜 연맹을 몰아내고 중국에서 요서를 장악한 대국이 되었으며, 같은 시기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를 요서와 한반도에서 압박하게 된다
전연이 멸망할 당시(370) 중국 동북 지역에서 많은 유민이 고구려와 한반도로 이주해 왔다 |
고구려는 요동을, 부여(백제)는 요서를 점유하였던 것이다. |
<양서> 백제전에 “진(晉, 265~420)나라 때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지배에 대응해 요서·진평 두 군을 점령하고 그 땅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346년 당시 전연에 포로로 잡혀갔던 ‘근초고왕의 동포’인 5만 여명 ‘부여계’ 유민의 도움이 있었다-370년 전진이 전연의 수도 업성(鄴城, 현 하북성 경내)을 포위했을 부여 왕자 여울(余蔚)은 인질로 와있던 부여인, 고구려인 궁정 숙위(호위) 귀족 500여인을 이끌고 밤에 업성 북문을 열어 전진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한다(자치통감). |
나물왕(재위 356∼402)때부터 기존에 없던 적석목곽분이 제작되는데 이 적석목곽분은 북방계 무덤형식으로서, 그 무덤들에서는 선비(흉노, 낙랑)계 유물이 다량 발견된다 |
왜(일본 부여)는 4세기 말 전연계 북부여 기마족의 유입과 더불어 국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왜(일본 부여)는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약해지자 백제를 장악하며(391) 이에 백제는 태자 전지를 일본(왜)에 인질로 보내고(397), 신라 역시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일본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402).이후로도 강해진 일본(왜 부여)의 국력은 한반도에 남부에 미치게 되어 일본 왕(왜왕)은 425년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마한?)’ 여섯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소개한다 | |
신라는 김씨 왕조가 들어선 4세기 중반을 계기로 비로소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377년, 382년) 중국과 통교를 시작하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라가 부여계(동예, 왜, 석씨) 중심에서 선비계(흉노, 낙랑, 김씨) 중심으로 넘어간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일본서기>에 기록된 4세기 이전 일본역사는 ‘일본열도 왜’의 역사가 아니라 ‘한반도 왜’, 즉 한반도 중부와 남부의 동부여(동예), 삼한의 이야기로서 4세기 초 한반도 남부 전체를 영향권에 두었던 ‘한반도 왜 연맹’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