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평양성은 어디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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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HBIsW1R_0IY&t=2353s
고구려의 평양성은 어디였는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고구려의 첫도읍지인 졸본은 현재 중국 요녕성 환인현 오녀산성이었으며
유리왕(AD3년)이 천도한 국내성은 중국 길림성 집안일대였고
장수왕(AD427년)이 천도한 평양성은 지금 북한의 평양지역이라고 한다.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교과서들이 북한 평양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졸본으로 추정되는 중국 요녕성 환인현 오녀산성 일대 및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중국 길림성 집안일대,
그리고 고구려 평양성이라고 주장하는 북한 평양일대에서는 고구려의 도읍지가 존재했었다는 명확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이들지역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는 그 어떤 기록도 없다. 그리고 국내성이라고
추정하는 중국 길림성 집안 일대에서는 2009년과 2011년의 발굴조사 결과, 3세기 이전의 고구려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또한 평양성이라고 추정하는 북한 평양지역의 성곽에서는 고구려 유적임은 확인하였으나
그것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그 어떤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그런데 평양성으로 추정하는 성곽의 발굴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발굴된 성곽의 석각(石刻)에서는
이곳이 고구려의 평양성이 아니라 한성(漢城)이었다는 것이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後 卩小兄文達節自此
(병술년 12월에 漢城 下後部의 小兄 文達이 여기서부터 서북방향을 맡는다) 라고 되어있는데 하후부 소형은
고구려의 관직명인데 이 성이 평양성이 아니라 한성(漢城)이라고 한다.
고구려 한성에 대한 기록들
「周書」 「이역열전」 고구려 -- 북주의 正史 636년 편찬
高句麗 治平壤城 其城 東西六里 其外有國內城及 漢城 亦別都也
(고구려의 도읍지는 평양성으로 그 성은 동서가 6리이다. 그밖에 한성과 국내성이 있으니 별도의 도읍지이다)
「隋書」 「동이열전」 고구려 -- 당 636년 편찬
其國東西二千里 南北千餘里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復有國內城 漢城 並其都會之 所 其國中呼爲 三京
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 남북이 1천여리이다. 국도(國都)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都會地)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이라 일컫는다.
이와같이 고구려는 평양성외에 별도로 한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성도 또한 중요한 거점의 큰 성이었지만
그렇다고 평양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양성, 국내성, 한성이 모두 도회지였다고 한다.
도회지란 사람이 많이 살고, 물류의 유통이 활발하고, 상공업등이 발달한 번잡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국내성이라고 추정하는 중국 길림성 집안 지역은, 평야지대도 없으며, 물자운송도 불가능한,
첩첩산중 속에있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역대왕조 조상들의 공동묘지로서의 용도밖에 사용할수 없으며, 절대 도회지
라고는 볼수없는 위치인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유리왕때부터 장수왕 이전까지 국가를 운영했던 도읍지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 될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의 첫도읍지인 졸본의 위치를 중국 요녕성 환인현 오녀산성이라고 하거나 국내성의 위치를 중국 길림성 집안
일대라고 주장한 사람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년생)였으며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 및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등이 고구려의 평양성 및 한사군이 지금이 북한 평양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그 어떤 역사기록도 전혀 없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고구려 첫 도읍지 및 평양성 그리고 한사군의 위치등에 대하여는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역사책인 「朝鮮史」의 내용을 아직도 그대로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북한 평양지역이 장수왕이 천도(427년)한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고조선의 도읍지인 평양도 지금의 북한 평양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 평양성에 대한 역사기록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명일통지」 권지 25 「요동도지휘사사」-- 명나라 천순 5년 (1461년) 관찬지리지
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다. 일명 왕검성이라고 한다. 곧 기자의 옛나라이다.
성밖에 기자의 묘가 있다, 한나라 낙랑군의 치소였다.
동진 안제(405~418) 이후로 고구려 장수왕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 평양성은 후에 서경이라 불렀다, 원나라때는 동녕로라 하였다.
(고구려 평양성 = 고조선 왕검성 = 기자조선 = 한나라 낙랑군 = 고려 서경 = 원나라 동녕부)
패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및 < 한국학 중앙연구원>
패수는 중국세력과 우리 민족(고조선등)의 경계를 이루던 강
한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지방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요동과 고조선의 경계로 삼았다.
「사기」 조선열전 고조선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진번 조선지역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 곳 요동 외요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 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하여 연에 소속시켰다.
패수의 기록 ---
「한서」 서남 이 양월 조선전 --- 고조선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역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장수 위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명을 모아
상투를 하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변경)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의 만이와 옛연나라 , 제나라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하였다 ---- 교과서에는 위만의 도읍지인 왕험성이 북한 평양이라고 하나 북한의 평양지역은
동쪽으로 강을 건너서 도읍할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을 남쪽으로 건너야 평양이
나온다)
「한서지리지」에
요동군은 진나라때 설치하였다. 유주에 속한다. 18개현이 속해있다.
험독현 -- 응소는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물이 거세게 흐르므로 험독이라 한다'라고 한다
신찬은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한다
「통전」 동이 조선
왕험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다
「태평환우기」 동이 조선
위만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왕험은 지명이며 대수의 동쪽에 있다
(북한 평양은 될수 없다)
「대명일통지」에서 고구려의 <평양성>이 <압록강> 남쪽이 아닌 동쪽에 있다고 했다
이 <압록수>에 대해 「삼국유사」 에는 응법, 순도조려
고구려 본기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일명 안정홀로서 요수의 북쪽에 위치해있고
요수는 일명 압록으로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한다
(고구려 수도=안시성=안정홀=안민강으로 요수(=압록)의 북쪽에 있다)
<요수>는 고대로부터 수나라, 당나라 당시까지 중국 하북성 북경 일대에 있었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요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금의 <요하>를 가리키는 강이다. 그런데 고대의 <압록강>을 <요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백두산>의 이름 -- 삼국시대에는 <백두산>을 <개마대산=개마산>이라 불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한서지리지에 현토군의 서개마현이 있다.
당 고종의 장회태자의 주석에 의하면
개마는 현의 이름이며 현토군에 속한다. 그 산 즉 개마대산은 지금의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평양성은 지금의 왕험성이다. (백두산은 삼국시대의 개마대산이 아니다)
「삼국유사」 고조선 왕검조선
당의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인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한나라가 3군으로 나누었으니 현토, 낙랑, 대방이다.
(고죽국=고구려=기자조선=한3현)
「통전」 동이 고구려
고구려는 동진이후 그 왕이 평양성에 거주했는데 즉 한나라 낙랑군의 왕험성이다.
지금 만리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 땅으로 들어간다.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라고도 한다. 그 물은 원래 동북의 말갈의 백산으로부터 나온다.
(심백강 -- 북경 앞을 흐르는 강의 옛 이름이 조선하라고 한다)
(낙랑(=북경)=조선) 북경을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한다 -- 한의 침입으로 조선이 망하고 유민이 동쪽으로
와서 옥저 동예 낙랑국(최리)등을 세웠다
낙랑이 북경이냐? 요양이냐?
「통전」의 정리 -- 만리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다
①고구려 평양성 = 낙랑군의 왕험성
②만리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다
③마자수=압록수
진나라 당시의 행정구역을 표시한 <서진군국도>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위에 요수가 보이고 있으며
요수가 만리장성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통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낙랑군 안에 있는 왕험성이라고 하였으니 지도에서 보이는 낙랑군 지역이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던 위치인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요수가 압록강이라고 했으므로 지금의 지도에서 보이는, 요수가 압록강이라는 것이다.
<대명 구변 만국인적 노정전도>를 보면 만리장성 아래에 압록강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있다.
산해관도 보이고 갈석산도 보이고 영평부도 보이고 있다.
조선 순조때 한진서가 편찬한 역대지리서인 <해동역사속>을 보면 , 조선이란 이름은 단군에서 비롯된다
「산해경」에 의하면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하여 조선이라고 한다.
곽박의 주석에 의하면 조선은 지금 晉나라 당시의 낙랑현이며 기자를 봉한 곳이라고 한다.
「東史」에 의하면 단군은 요임금 당시 무진년에 평양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전국책」에 소진 이야기에서 연문후가 말하기를 ,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한다.
「상서대전」을 보면 기자가 조선으로 갔는데 무왕이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대명일통지」 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험성이며 기자의 옛나라이고 한나라 낙랑군의 치소였다.
「수서열전」에서 배구가 주장에 이르기를,
고구려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때 기자를 봉한 곳이며 한나라때 나누어 3군(낙랑군, 임둔군,
진번군)을 설치하였다.
「구당서 고려전」에서 온언박이 말하기를 요동은 고구려의 땅이며 주나라 때는 그 곳에 기자의 나라가 있었다.
「대명일통지」에 의하면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다. 전하여 오기를 기자가 봉함을 받은 땅이라고 한다.
「일지록」 한서지리지에 낙랑군에 속한 현이 25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조선현이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조선국은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봉한 곳이다고 한다.
「위략」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는 패수라고 한다.
「사기」 조선전 -위만은 망명하려고 동쪽 변경 밖으로 달아나 패수를 건넜다. 차츰 진번조선의 무리들을 모아
왕이 되었고 왕험성에 도읍하였다.
「통전」에 이르기를 위만이 도읍한 왕험은 패수의 동쪽에 있다.
고구려는 평양성에 거주했는데 즉 한나라 낙랑군의 왕험성이다.
「후한서 주석」 평양성은 곧 왕험성이다.
「괄지지」 고구려의 평양성은 본래 왕험성이다 = 왕검성 (험=검)
「한서음의」 응소가 말하기를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의 동쪽에 있다.
「성경통지」 험독현은 서한때 설치했으며 요동군에 속해있다.
험독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 평양은 지금 압록강의 동쪽에 있다.
평양성=왕험성=압록강 동쪽
요동군 험독햔 =위만 왕험성 =낙랑군 패수 동쪽
고구려의 평양성=고조선 평양 =고죽국=기자조선=왕험성= 한나라 낙랑군=당 영평부
모두 같은 지역에 있었다.
춘추 초기 주나라 제후국 <중산국> ← 북연;북경 → <고죽국>
북경에 조하(조선하)가 있었다.
고대의 요동은 어디였는가?
(고대의 요수) 요나라 건국(916~1125) 현재 요하
한나라 당시 : 북경일대, 유주일대 (고죽국 위치) 요양 부근
「후한서」 <광무제 본기>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며 요동에 있다
「한서」 <설선열전> 안사고가 말하기를 낙랑군은 "유주에 속해있다" (지금의 북경일대)
「후한서」 <최인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지도 <기주협우 갈석도>에 요수 표기
본래 요동이란 뜻은 중원에서 먼 곳 (멀 요)이란 의미라고 한다
고대의 요동은 하북성 일대를 통칭하여 불렀다
진.한 시대 이래로 요동국과 유주에 속한 요동군이 있었으며
또한 요수를 기준으로 서쪽은 요서, 동쪽은 요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냥 요동은 하북성 동쪽 일대를 가리키며, 요동군은 유주에 속한 행정구역을 가리킨다.
구분을 해야한다
요서=하북성 일대
요동 =유주성(북경) 일대
「사기」 항우본기-- 항우는 연왕 한광을 옮겨 요동왕으로 삼았다
「집해」 서광이 말하길 요동의 도읍은 무종에 있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한후 기원전 206년 한광을 요동왕에 봉했고 , 요동의 수도는 무종이었다)
「한서」 이성제후 왕표-- 한나라 원년 2월에 요동을 나누었다.
연은 계에 도읍하였다. 요동은 무종에 도읍하였다.
(한나라가 건국 원년에 요동을 연과 요동으로 나누었는데 요동의 도읍지가 무종이라고 한다)
요동의 수도가 무종인데 그 무종이 오늘날의 어디인가?
「중국고금 지명 대사전」에 <옥전현>- 당나라때 무종현을 옥전으로 고쳤다 <당서 지리지>
「중국고금 지명 대사전」에서 무종은 춘추 전국시대에 산융국의 명칭이었다.
무종은 지금의 직례 옥전현에 있다.
하북성 당산시 -- 옥전현 (1928년 직례를 하북성으로 명칭 변경함) 지금도 옥전현이다
(지금의 북경 동쪽이 요동이다)
<서한 군국도> 지도에 낙랑, 현도 밑에 유주 요서 요동 (요동은 낙랑밑에 있고 유주와는 멀다)
<서진 군국도> 지도에 위; 요동
북평 낙랑, 대방, 현토 (요동은 낙랑 위에있고 북평과는 거리가있다)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 --- 고구려 평양성 = 한 낙랑군의 옛땅
「구당서」 동이 고구려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종족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다.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땅이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5,100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고구려의 영토는 동서 3,100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고구려의 전쟁기록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구려는 일명 맥이라 부른다.
건무 25년 (AD49년) 봄 정월에 요동 요외의 맥인들이 우 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을 침략하였다.
「후한서」 권5 효안제기
원초 5년(AD118) 여름 6월 고구려와 예맥이 현토군을 침략하였다.
현토는 군의 명칭으로 요동에 있다.
건광 원년(121) 봄 정월에 유주자사 풍환이 2개군의 태수를 인솔하여 고구려, 예맥을 공격햇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 12월에 마한, 예맥이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후한서」 권8 효령제기
건녕 원년 (168) 12월 선비 및 예맥이 유주와 병주를 침범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고구려 왕 궁(宮=태조왕)이 죽고 그 아들 백고(=신대왕 165~179)가 왕이 되었다.
후한 순제(125~144)와 환제 (146~167) 연간에 다시 요동군을 침공하여 신안과 거향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正始 3년 (AD 242년. 고구려 동천왕 16)에 고구려 왕 宮이 서안평을 침략하였다.
「태평환우기」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다. 東晉이후로 그 왕이 평양성에 거주했는데 그 곳은 한나라 낙랑군의
왕검(험)이다. (四夷=東夷=고구려)
고구려의 영토는 후한시기에는 2천리였고 후위(북위), 남북조시기에는 작아져서 겨우 천여리였다.
수나라 시기에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유주, 즉 하북성 북경 일대에서 계속적으로 중원의 세력과 전쟁을 한 기록들이 매우 많이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도읍지는 하북성 일대에서 멀지 않는곳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고구려 평양성에 관한 기록들>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 낙랑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송서」 열전 고구려국
동이 고구려국은 지금 송나라 488년 당시에, 한나라때의 요동군을 다스리고 있다.
(한대의 요동 --- 무종 =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옥전현)
박지원의 「열하일기」 도강록
소위 고죽국은 지금의 영평부에 있다. 즉 평양은 원래 요동에 있었다.
한나라 낙랑군의 처소는 요동에 있었으니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곧 요양의 평양이다.
「당토명승도회」 -당나라 당시의 지명을 표시함.
보면 만리장성 안쪽에 산해관도 보이고 옛 고죽성도 보이고 고조선의 성도 보이고 갈석산과 창려도 보인다.
고죽국 = 영평부 산해관
(고조선 성) 갈석산
(고죽국=영평부=평양 =요동=낙랑군)
모두가 당나라 당시에는 영평부의 관할에 속해 있었던 것들이다.
뿐만아니라 이 지역 일대에 평양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고대의 요양은 지금의 요녕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도에서 보이는
하북성 일대에 있었던 것임을 알수있다.
「사기」 주 본기 -- 사마천
고죽의 옛 성은 평주 노령현에서 남쪽으로 12리(4.8km) 떨어진 곳에 있다.
「사기집해」 배인 --- 고죽은 요서군 영지현이다.
「한서지리지」 요서군 조
영지에 고죽성이 있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백이국으로 고죽성이 있다.
商나라 당시의 지도를 보면 <夏朝形勢> <商朝形勢> 오른쪽 위쪽에 고죽국이 표시되어 있다.
(발해만 가운데 지점)
고죽국의 위치에 대하여 중국의 모든 역사서와 현대의 모든 학자들까지도 예외없이 지도상의 위치에
고죽국이 있었다고 한다.
「대명일통지」 북평군 조선현
조선성의 유적이 영평부 경내에 있다. 북평은 군이름이다.
고죽은 옛이름이고 북평은 진나라때 이름이며 노룡은 북위때 이름이다.
북연때는 평주와 낙랑군이라 불렀고 북위때 낙랑군을 북평군으로 바꾸었다.
조선성=영평부=고죽=북평군=노룡=평주, 낙랑군
「대명일통지」 영평부 고적조
영평부 안에 조선성의 유적이 있는데 기자가 봉함을 받은 곳이라 전해져 온다
(영평부=조선성=기자조선) 고죽국 고조선성
영평부
「통전」 주군 평주
평주는 지금 노룡현을 다스린다. 은나라때 고죽국이었고 지금 노룡현에는 옛날 고죽성이 남아있다.
(평주=노룡현=고죽국)
「일지록」 명나라때 고염무 편찬
일통지에 이르기를 조선성은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라고 말했다.
곧 이는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 지금의 영평부라는 뜻이다.
「대청광여도」에서 영평부와 그 밑에 갈석산, 옆에 산해관이 있고 한참 떨어진 좌측에 북경이 있다 (1785년)
「독사방여기요」 북직 영평부 -- 청의 고조우 (1631~1692) 편찬
영평부는 동쪽으로 산해관까지 180리이고 수나라에서 노룡현으로 개칭했다.
또 조선성이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고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다. 지금은 조선 경내에 있다.
고죽성은 영평부 서쪽 15리에 있다.
「괄지지」 에 고죽국의 옛성은 노룡현 남쪽 20리에 있다고 한다
「路史」 조선
기자는 뒤에 요의 낙랑에 봉하였다. 오늘날의 평주 노룡현 지역으로 여기에 조선성이 있다.
그러므로 무덕연간에는 요를 기주로 삼았다. 무덕 8년이다. 그런데 고구려도 또한 그 지역에 있었다.
(기자조선=낙랑군=평주 노룡현 =조선성 =고구려)
다시말해서 고구려의 도읍지가 평주 노룡현 지역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노룡현은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아직까지도 그대로 노룡현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태평환우기」 노룡현 -- 송나라 낙사(930~1007) 편찬
노룡현 -- 노룡현의 동쪽에 고죽성이 있으며 은나라 제후국이다. 즉 백이 숙제의 나라이다.
노룡현에는 조선성이 있으며 이곳이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 황폐한 조선성이 남아있다.
(노룡=고죽=기자=조선=고구려)
※ 춘추전국시대 요동국의 도읍이 무종이고 지금의 당산시 옥전현이다.
북경에 조선하가 있고, 요동국 무종(지금의 당산) → 노룡현 (고죽국=고구려=기자조선)
난하
고구려 평양성 위치 정리
고조선 평양성=고죽국=기자조선=위만 왕험성=한사군 낙랑=고구려 평양성=진 북평군=북위 노룡현=북연 평주,낙랑
수--노룡현, 당-영평부, 현대 --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북평부-영평부 -평주 - 고구려 평양성
<평양성을 옮기다>
고구려 평양성이 당나라에게 공격을 당한 후 도읍지를 옮겼다고 한다.
「원사」 지리지 동녕로
晉 의희 연간 이후로 고구려 왕 고련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주했다. 당이 고구려를 정벌할때 평양을 공격하여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압록수(=요수)의 동남쪽 1,000 여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 지금 이곳의 평양은 옛날의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이 서경이 되었다.
원 지원 6년 (1269년)에 이연령, 최탄, 현원열등이 부주현진 60개성을 가지고 와서 귀부하였다
(원나라에 바쳤다. 원나라에서는 동녕부라고 고쳤다)
지원 8년 (1271년)에 서경을 고쳐 동녕부라고 하였다.
지원 13년(1276년)에 동녕부 총관부로 승격시키고 녹사사를 설치하였으며
정주, 의주, 인주, 위원진을 나누어 파사부에 예속시켰다.
요수가 압록수라고 하였으므로 압록수에서 동녕로까지의 거리가 약 천리이다.
(북한에 있는 압록강에서 북한 평양까지의 거리는 약 600리 이다.)
또 북한 평양은 압록강의 동남쪽이 아니라 압록강의 남쪽에 있다.
결국 그 옮겨간 평양도 지금의 북한에 있는 평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키백과에서 파사부를 찾아보면
파사부는 원나라 초기 파속로로 고쳐서 설치했으며 요양부에 속했다.
치소는 지금의 요녕성 단동시 동북에 있다(요양부에 속함)
요양부는 요나라가 지금의 요동을 점령한 이후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 일대에 설치한 옛 행정구역이다.
요나라의 동경이었다. (동경요양부=동경) (상경, 동경, 중경, 남경, 서경)
「요사」 지리지 동경도 동경요양부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주 무왕이 기자를 죄수에서 풀어주고 조선으로 가자 그대로 그 땅에 봉하였다
북위 태무제가 사신을 보내 그가 거주하는 평양성에 이르게 하니 요의 동경은 본래 이곳이다.
당의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요사지리지 정리
(동경 요양부=고조선=기자조선=고구려 평양성=안동도호부=요나라 동경=현재의 요녕성 요양시 일대)
그러나 요사지리지의 기록은 고구려의 패망과 더불어 고구려 평양이 쫒기고 밀려서 이 곳으로 옮겨져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한 민족이 사용하던 역사적으로 고유한 지명도 그 민족이 이동과 함께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지명이 역사의 변천에 따라 여러곳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민족의 이동=지명의 이동
고구려 패망과 지명의 이동
당나라에 의하여 고구려가 하북성에 있던 도읍지인 평양성을 함락당하여 패망의 길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잔여세력이 동쪽으로 밀려나게 된다.
고구려인들이 요녕성 요양지역을 새로운 중심지(도읍지)로 하게되면서 서서히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들의
고유한 지명들이 함께 이동하게 된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나라가 건국(916년) 되면서 지금의 요하일대가 그들 활동의 주요무대가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요하,요동
요서등의 지명들이 자리를 잡게 된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역사의 변천과 지명의 이동을 모르는 후대의 역사 기록들은 그 기록을 편찬할 당시에는 지금의
요녕성 일대에 요하, 요동, 요서, 요양등등의 지명이 현존하고 있었기때문에 , 고대 역사속의 지리비정에
많은 혼란을 보이고 있다.
송나라, 요나라, 원나라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 및 고려시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을 보면 ,
<현존하는 당시의 지명>과 <고대의 역사기록>사이에서 매우 많은 혼동과 혼란을 보이고 있다.
원사지리지에서 보듯이, 고구려가 패망하는 과정속에서, 민족의 이동과 함께 당시의 요수, 요동, 요서, 요양등의
지명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며 요나라 건국이후 서서히 현재의 지방으로 고착되어졌던
것이다.
고구려 이후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중원세력에게 계속적으로 밀려서 점점 영토가 줄어들게 되었고
이에따라 수많은 지명들이 한반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